연약한 그릇이기에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두 시간에 걸쳐서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 것과 그리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 부부의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의 유지를 위해서 얼마나 필수적인지를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해야 할 의무인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여성분들은 오래도록 고대하셨습니다. 지난주에 이런 설교를 할 줄 알고 남편에게 정신 똑바로 차리고 들으라고 그랬는데 그만 빗나갔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아내를 가리켜서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릇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슈큐오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컵이나 접시, 양푼 모든 것을 통칭하는 그런 의미의 진짜 그릇입니다. 여기서 왜 ‘그릇’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을까요? 우리 남편들은 아내를 말로는 그렇게 안하지만 자기에게 딸린 부속물 정도로 생각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지 되는 것을 조화로운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명하복의 관계로 생각을 합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도록 성경이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우월한 지위에 있는 상관이고 아내는 부속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보조하기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가치에 있어서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하나님은 남편과 아내를 남성과 여성으로 동등하게 이 세상에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성을 흙으로 빚어서 직접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여성을 남성인 아담의 갈비뼈에서 취하여 만드신 것은 그가 남성에게 존속된 삶을 살아야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의 근원에 관한 사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인 하와를 남성의 갈비뼈에서 만드신 것은 둘이 존속된 관계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닙니다. 나뉘어줄 수 없는 연합을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일깨우시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주석가 메튜 헨리가 지적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여성이 남성의 보호를 받도록 품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받도록 심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신체 일부를 떼어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남성과 여성은 공히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을 함께 부여받은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그 점에 있어서 남성은 조금도 여성보다 우월한 지위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모두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나누어가진 존재로 이 세상에 창조되었고, 또 여성의 역할이 남성을 위해 돕는 배필이지만 보조적 역할이라기보다는 횡적으로 나누어진 역할이라고 말씀을 이미 드렸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짓겠다고 할 때에도 ‘그와 상응하는’ 이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 단어가 사용이 되었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성 우위론적인 사고에 빠져서 여성들을 하찮게 여기고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복종하라는 명령이 상령하복의 관계 내지는 종속적인 관계라고 생각하면서 이해한다면 그것은 성경의 사상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을 떠난 이 세상의 풍조에서 여러분들이 배워온 것입니다. 혹은 성경에도 보면 여자를 무시하고 아내를 하찮게 여기는 듯한 표현들이 나오는데, 기록들이 나오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아서 보여준 오류 내지는 실패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은 항상 올바른 모본을 보여줌으로서만 우리를 가르치는 책이 아니라 때로는 그릇된 모본을 보여주어서 우리에게 그렇게 살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머릿속에서 정리해야지 될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명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질서의 문제일 뿐이지 결코 복종을 받는 남편이 아내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든가 혹은 아내가 자신의 존재보다 열등하고 부속품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상을 모두 담고 있는 말이 그릇 이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을 그릇에다가 비유하는 이야기가 성경에 몇 차례 나오는데 모두 그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표현입니다.
즉 디모데 후서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집에는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고 하면서 그릇 이야기를 하십니다. 모두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자기가 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들인데 그들이 하나님의 뜻을 담는다, 라는 면에서 그릇으로 비유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금 그릇과 같이 사용하시고 어떤 사람은 은그릇과 같이, 질그릇과 같이 사용하시는데 결국 그것은 그 그릇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선택하시고 구속하신 사람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가장 좋은 비유는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바울을 두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그릇이라는 표현입니다. “이는 이방의 임금들과 나라를 하나님께 돌아오기 위해서 내가 택한 나의 그릇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는 쓸모없는 사울이었지만 하나님이 그를 선택하시고 구속하심으로 이제는 하나님의 뜻을 퍼 담을 수 있는 훌륭한 그릇이 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그릇이라고 하는 이 표현은 결코 여성이 남성 즉 아내가 남편에 의해서 지배되고 부속물처럼 여겨지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여성인 이 아내가 엄연히 존귀한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된 존재이고 선택된 존재이고 또 하나님의 백성인 경우에는 구속해서 비록 그가 아내에게 복종하는 처지에 있지만 하나님이 아내라고 하는 그 그릇에 하나님의 뜻을 담을 수 있는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로 하나님이 불러주셨음을 암시하는 단어가 바로 그릇이라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그릇은 반드시 사명과 관계가 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라고 하는 주되신 사상과 관계가 있습니다. 내가 남편으로서 아내의 도움을 받으면서 어떤 일을 해나가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를 통해서, 나만 그 일을 가지고 있고 사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도 역시 그릇이기 때문에 거기에 하나님의 뜻을 담고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하는 성경적 사상이 이 짧은 그릇이라는 단어 속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선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사랑하는 방법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들 중에 강아지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개를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 보신탕 좋아한다는 뜻이 아니라 애완견을 좋아하시는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분들도 개를 끔찍이 사랑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한 식탁에서 먹고 한 이불에 데리고 자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애완견으로서 사랑해주는 것입니다. 오늘날 남성들이 갖고 있는 이 아내 사랑이라고 하는 그 성격이 애완견적 사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무엇인가 하면 말을 잘 들어라. 그러면 사랑해줄게. 말썽피지 말고, 까불지 말고 네 자리에 잘 있어라. 마치 강아지에게 방에다 똥 싸지 말고 밥그릇 엎지 말고, 그리고 입에다 뭐 물어뜯지 말고 말 잘 들어. 그러면 사랑해줄게. 사료주고 우유도 주고 리본도 매달아줄게. 그런 애완견적인 사랑, 또 어느 성도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이런 차이를 모르기 때문에 남편으로부터 받는 사랑이 이게 애완견적인 사랑인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진짜 정상적인 그런 인격적인 사랑인지를 분별을 못하고 좋아하다가 그 다음에 나중에는 안 좋아하는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애완견적인 사랑과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인격적인 사랑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애완견적인 사랑은 자기가 좋을 때까지만 사랑합니다. 자기가 사랑할 수 있을 때까지만 사랑합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이 사랑은 인격적 헌신과 위탁이 동반된 사랑입니다.
비유가 될지 모르겠는데 이제 나라의 부름을 받고 군대에 갑니다. 안 갈수가 없습니다. 부르면 가야지 됩니다. 가서 훈련을 받고 군인의 길을 가기 위해서 자대에 배치되어서 근무를 합니다. 거기에 있는 군인들이 항상 군대생활 하기가 좋겠습니까?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젊은이들은 좋을 때는 한번도 없다고 이야기를 하는데 좋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대하고 나면 또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닙니까. 좋을 때도 있고 싫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싫다고 해서 총 놓고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게 바로 군대생활입니다.
서로 연애할 때 사랑하는 것과 결혼해서 사랑하는 것은 다릅니다. 연애할 때 사랑하는 것은 비유를 하자면 노을이 지는 해변가에서 어깨동무하고 깨끗한 하얀 벤치에 앉아서 노을이 참 아름답지? 그래. 정말 예쁘다. 그리고 속삭이는 것과 결혼한 후에 사랑이라는 것은 둘이 쪽배를 타고 함께 노를 저으면서 그 노을이 지는 황금빛 파도를 헤치면서 일정한 목적지를 향해서 항해하는 것입니다. 물도 들어오고 뒤집어질 수도 있고 쓰러지기도 하고 이 손바닥에 물집이 생기도록 노를 저어야지 됩니다. 결혼한 후에도 바닷가에서 어깨동무하고 노을을 감상하는 것 같은 사랑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것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철딱서니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분히 성숙한 후에 시집 장가를 가야지 됩니다. 계속 안 성숙하면 가지 마십시오.
그런데 오늘 성경이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여성이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그냥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뭐라고 그랬습니까? 더 연약한 그릇이다. 누구에 비해서, 남자도 연약합니다. 기억을 좀 해줬으면 좋겠습니다.
(찬양)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갑니다 고통 가운데 계신 주님
변함없는 주님의 크신 사랑 영원히 주님만을 섬기리
여러분, 여성들에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찬송 부르고 싶을 때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갔을 때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고 그리고 넓은 바다에 던져진 돗대도 없고 삿대도 없이 내던져진 조각배와 같이 그래서 정말 하나님밖에는 바라볼 수 없는 안으로안으로 오그라드는 그런 연약한 그런 것을 느낄 때가 있을 것입니다. 깨어질 것 같은 그런 연약함, 그게 여성이기 때문에 기도할 때 그런 것을 경험합니까? 아닙니다. 남성들도 경험합니다. 이것은 남성과 여성이 상관이 없습니다. 다윗이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천하를 호령하고 지칠 줄 모르는 전투적 경향성을 가진 용사였습니다. 그런데 뭐라고 그렇게 합니까?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고 곤고하오니,
모세! 그러면 떠오르는 그림이 무엇입니까? 비록 백발이 휘날리지만 우람한 팔에 그 하나님이 주신 지팡이를 들고 바람이 막 부는 광야에서 바다를 명하여 홍해가 갈라지는 그런 광경, 모세를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모세가 내가 이 백성을 낳았습니까? 나는 이제 내 생명이 족하니 내 생명을 거두어주십시오. 죽을 것 같습니다. 그런 인간은 모두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는 풀이오, 그 육체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그렇게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다른 것으로 안 만들고 흙으로 사람을 빗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히브리 원어에 의하면 티끌입니다. 티끌을 빗어서 사람을 만든 것입니다. 먼지를 빗어서 만드신 것입니다.
그게 결국 무엇인가 하면 그렇게 인간 자체로는 가치가 없다는 그런 뜻도 되고 하나님에 의해 존귀하게 됐지만 그렇게 연약한 존재라는 뜻도 됩니다. 남성도 연약합니다. 그런데 여성은 더 연약하다는 것입니다. 남성 속에도 여성성이 있고 여성 속에도 남성성이 있습니다. 의학적으로는 남자에게서는 남성호르몬이, 여자에게서는 여성 호르몬이 나오는 것 같지요. 아닙니다. 여성 속에도 남성호르몬이 나오고 남성들도 여성호르몬이 나옵니다. 남성이 여성호르몬이 풍부해지면 노화가 잘 안 옵니다. 그런데 또 너무 많이 섭취하면 신체적인 이상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이 호르몬도 남성이 여성을 공유하고 여성이 남성을 공유하는 것처럼 잘 들으십시오. 남자와 여자를 하나님이 창조하셨을 때 모두 아담은 당신을 닮고 하와는 제 삼의 인물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라고 우리가 부르지만 그러나 성경을 보면서 그 하나님 아버지를 하나님 우리 엄마라고 부르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이게 바로 오늘날 타락한 인간들 속에서 경험하는 아버지를 통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을 읽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아버지에게 많이 맞아보셨을 것입니다. 위로해주십니까? 나는 경험 못했습니다. 때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위로는 누가 해줍니까? 그렇습니다. 엄마는 잔소리를 하다가도 아빠가 몇 차례 때리고 지나가면 반드시 빈방에 들어가서 아이를 위로해줍니다. 그래 아빠가 때렸지만 뭐 너 잘되라고 때렸겠냐. 화나서 때렸지. 그렇게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아빠 편을 들어서 네가 미워서 때렸겠는가. 그래도 아빠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데. 그렇게 얘기를 해줍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그렇게 해줍니다. 여성성입니다. 그러니까 아빠가 아이를 때릴 때 엄마가 더 패요. 그렇게 패서 되겠어요. 그리고 커다란 야구방망이 가져다주면 그것은 계모입니다. 친엄마가 아닙니다.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때리시고 어루만지십니다. 저는 한 10년 전에 성경을 읽다가 이것을 발견하면서 막 진짜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그런 경험을 했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그래서 제가 책을 쭉 읽으면서도 이런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많이 못 읽었습니다. 나중에 이제 좀 빗나간 방향이기는 하지만 해방신학에서 여성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어머니라고 성경에다가 이렇게 써났습니다. 하나님 우리 어머니, 이렇게 했는데 그것은 또 너무 저쪽으로 치우쳐나간 것이고,
그런데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탕자의 비유에서 재산을 가지고 허랑방탕하게 갔습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아버지가 살아있는데 유산을 나누어달라고 그래서 멀리 갔다고 하니 벌써 동리에 망신입니다. 가서 허랑방탕하다는 소문을 다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지낼 때 매일 동구 밖에 나가서 눈이 짓무르도록 아들을 기다리는 그 모습은 사실은 아버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머니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는 말할 수 없는 강한 귄위와 능력, 위엄 그 다음에 뛰어난 우리를 향한 그 지도력 이런 남성성이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게 세미한 그런 아주 델리키트 한 여성성이 존재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사람 한사람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이 절대로 사람들을 동일한 방법으로 다루시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를 다루시는 방법이 하나님께서 다릅니다. 사람을 보며 이렇게 다루시는 게 다릅니다.
어그제 뉴스를 보니까 무서운 세상입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애가 인터넷에서 유료로 게임을 많이 하고 그래서 야단을 쳤더니 자기 방에서 목매어 죽었습니다. 신문에 났습니다. 부모도 좀 화가 났을 것이 한달에 인터넷 요금이 백 몇 십 만원이 나오고 그랬다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이를 부모가 미리 알았어야지 됩니다. 이렇게 야단을 치면 애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모두 아시면서 그렇게 각기 이 사람, 이사람 다 다르게 다르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여기까지 데리고 오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입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이 남성성과 여성성 안에 있는데 이것을 하나님이 남성을 만드실 때는 남성성에 많이 주시고 여성성을 조금 주셔서 남성을 만드셨고 여성을 만드실 때는 여성성을 많이 주시고 남성성을 조금 주셔서 만드셔서 여성이 가진 남성성과 남성이 가진 여성성을 매개체로 해서 이 남성이 결합을 하게 하시고 그렇게 해서 남성성과 여성이 가진 여성성이 이렇게 조화를 이루도록 그래서 온전한 사람됨을 구현해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처음 믿을 때 우리가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처음 믿을 때 우리들이 하나님을 통해서 구원을 받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었지만 그러나 이제 우리의 자녀들이 우리의 가정에서 하나님을 알아갈 때는 아내를 통해서 하나님의 여성성을 배워가고 아버지를 통해서 남성성을 배워가서 그래서 엄마 아빠, 남편과 아내의 연합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들의 대화, 행동, 사고방식, 그 다음에 인격적 관계를 통해서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와 관계가 있고 그 관계가 다시 자식들에게까지 확대되어서 관계 안에 함께 섞여서 살면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배워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이것은 확 뒤집어서 어떤 집안에 어떤 사연이 있어, 남편이 매일 집에서 빨래나 하고 꽃꽂이나 하고 방청소나 하고 그러면서 앞치마를 두르고 헤어나지를 못하고 밥이나 하고 그렇게 살아갑니다. 부인은 막 여장부처럼 휘두르면서 동서남북에 있는 돈들을 긁어모으면서 그렇게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편이 여보, 쌀이 떨어졌는데. 그래. 사! 이렇게 해서 그래서 아빠 나 뭐 좀 줘! 그러니까 야, 아빠는 돈 없다. 엄마에게 얘기해라. 이런 집안이 만약에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런데 또 남편은 아내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빨리빨리 돌아가야지. 이게 바뀌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남편은 아내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아내는 남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어떻든지 간에 잘 돈도 벌고 자녀들도 잘 자라간다. 그런데 그 자녀들은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각별한 은혜가 아니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데 있어서 중대한 지장이 온다고 저는 그렇게 봅니다. 그 아이들이 행복한 가정생활을 영위해가기를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서 자란 딸이 어머니가 남편에게 복종한 것을 본적이 없고 그 다음에 거기서 자란 아들이 그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한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다만 노예적으로 복종하는 것만 보면서 자랐을 뿐입니다. 이게 혼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 가정이 어떤 의미에서 보면 교회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앙생활을 똑바로 못하고 참된 신자가 안 되어 가면 반드시 자식농사는 망칩니다. 그것은 필연입니다. 단 예외가 있는데 그 자식들이 더 크기 전에 하나님을 만나서 왕창 깨트려져서 새사람이 되면 됩니다. 그런데 그 길이 얼마나 어려운 길인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아실 것입니다. 신비합니다. 그런데 이런 것을 알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오늘 성경에서 두 번째로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지식을 따라서 아내와 동거하며” 라고 했습니다. 뭐가 필요하다고?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게 무슨 지식인가. 우선 첫째는 하나님의 성품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지식을 깊이 받고 그리고 그 지식 안에서 사람을 잘 이해하는 지식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통해서 지금 여러분들이 듣는 이야기도 새로운 이야기인데 그렇지 않습니까? 다 안다고 그러면 내가 섭섭합니다. 한 10년 전에 이것은 나에게는 코페르쿠스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래서 인간을 보는 눈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조금 빗나간 것 같지만 조금만 더 해볼게 들어보십시오. 이것을 저의 성경적인 생각을 입증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최근에 불행한 가정과 행복한 가정을 전부다 조사를 했는데 가부장적인 가정치고 행복한 가정이 별로 없습니다. 어떤 가정이 좀 행복한가하면 남편이 약간 여성스러운 부분이 있는 그런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통계가 나왔습니다. 지금 남성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여성들은 알아듣는데 남성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릅니다. 지금, 그래서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제 친구가 벌써 죽었는데 그 죽은 친구가 이틀 동안 엄마가 시골인가 어딘가 내려가셔서 집을 비었는데 엄마 돌아올 때까지 계속 굶다가 다시 엄마가 오셔서 차려주시는 밥상을 받았습니다. 내가 볼 때는 그 인간이 이해가 안 갔습니다. 집에 가보니까 찬장에 라면도 있고 다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러느냐고 했더니 아빠가 그렇게 산 것입니다. 사내자식이 무슨 부엌에 들어가서 렌지를 켜고 그러는가. 좀 하면 어때. 그런 가정이 행복하지 않다고 통계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가끔 방이 더러우면 남자가 좀 치우고 그리고 아내가 바쁘면 자기가 냉장고 꺼내서 밥도 좀 차려먹고 여력이 생기면 매일 그럴 수는 없지만 일년에 몇 번씩 아내가 밖에 외출했는데 들어와 보면 된장찌개를 끓여놓고 기다린다든지, 여성들은 감격스럽고 남성들은 가소롭다고 지금 웃는 것입니다. 그런 약간 기울어진 여성성을 가진 가정이 행복한 가정으로 통계가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든 그 이야기는 또 가면 한없이 나가니까 그래서 결국 뭐가 필요한가 하면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녀가 결혼을 하는데 머리 속이 하얗습니다. 아무 지식이 없어, 하나님의 결혼의 원리가 무엇이고, 가정의 원리가 무엇이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결혼하는가? 나이가 찼기 때문에, 오직 그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이 결혼의 성경적인 대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살다가 행복해지는 가정이 있으면 그것이야말로 정말 소 뒷다리에 개구리 맞은 격입니다. 정말 어쩌다가 일어난 일이고 불행해지는 것은 아주 자연적인 수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간에게 이런 결혼의 제도를 주시고 남편과 아내를 만드시고 둘을 이런 관계 속에서 살아가라고 하신 그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가. 이것을 끊임없이 배워가고 그 지식 안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때 아! 그렇구나. 그것을 깨닫습니다.
말 들으니까 지난주에 여성들이 많이 찔리셨다고 그러는데 그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이렇게 죽어라 희생하는데 왜 남편이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왜 나는 이렇게 많이 집안을 위해서 애들을 위해서 희생적으로 살아가는데 남편이 왜 다른 생각만 하며 살아갈까? 그런 것들이 지난주 설교에서 다 답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지식에서 자라갈 때 무지함을 면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서 비로소 동거가 가능합니다. 조금 있다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번째 지식이 무엇인가 하면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아내를 아는 지식을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아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아는 지식과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 남의 아내를 배워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 사람하고 살게 아니니까. 우선 일반적으로 아내라고 하는 존재에 대해서 지식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여성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서 뭐라고 그랬는가 하면 더 연약한 그릇이다. 때로는 강해보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연약함을 이야기할 때 아이고 목사님 우리 아내는 산소 같은 여자입니다. 산소가 얼마나 좋습니까? 훅! 하! 저 사람 참 행복 하겠구나 했더니 그런 산소가 아니라 ‘산소’ 지금 케네디 형제가 이해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산소는 oxygen 이고 산 소 그러면 living cow, 그래 연약하다고요. 제가 연약하지 어떻게 우리 집사람이 연약합니까? 제 평생에 소원은 우리 아내가 연약해지는 것 좀 보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모두 겉모습일 뿐입니다.
우리 옛날에 이조시대 때 근대화 이전의 여성들이 얼마나 강인했습니까? ‘이혼’ 그런 것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열 몇 살 나이에 청산과부가 되어도 평생을 열녀문 남기고 죽었습니다. 평생 정절을 지키며 살다가 죽었습니다. 굉장히 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하게 살 수밖에 없어서 살았지만 사실은 어떻습니까? 너무 연약한 것입니다. 그 연약함을 받아주는 사람이 없었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그렇게 살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가식적인 태도를 오래 반복하면 이 진실로 돌아가는 게 부자연스럽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외식을 일삼으면서 살던 사람은 외식의 껍질을 벗고 진실로 돌아갈 때 이렇게 닭살이 돋기 시작합니다.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십니까? 설명을 더 안하지만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강해보여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말 연약합니다. 그게 여성의 본성입니다. 일반적인 모든 여성, 아내인 모든 여성이 바로 이런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그러니까 일반적인 아내가 여성이고 그 여성이 어떤 사람인가 끊임없이 배워가야지 됩니다. 성경에서, 성경이 이야기하는 여성이 어떤가? 강하고 약함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무력으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여성은 또 강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남성에게는 없는 섬세함이 있습니다. 그런 섬세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섬세함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섬세함이 뭐고 그 아내인 여성이 가지고 있는 아내로서 공통된 연약함이 어떤 것이라고 하는 것을 배워갈 때 비로소 그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다룰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가전제품이 엄청나게 좋아졌습니다. 저는 중국 가서도 기분이 너무 좋았는데 삼성에서 만든 가전제품이 그 도시 전체에서 가장 커다란 마케시어를 차지하고 있었는데 일본에 있는 소니나 히따지 제품보다도 그 도시에 있는 사람들이 한국 제품이 훨씬 고급 제품이라고 생각하고 심지어 20%이상 비싸게 파는데도 그것만 사겠다고 사람들이 줄을 서는 광경을 봤습니다. 기분이 너무 좋았습니다. 솔직히 일본의 아끼아라 같은 곳에 가도 저것은 꼭 사가고 싶다는 물건이 거의 없을 정도로 잘 만듭니다. 그런데 옛날에 정말 국산이 나빴습니다. 그래서 가전제품을 놓고 80년대까지만 해도 무슨 이야기가 있었는가 하면 외제는 잘 안나올 때 때리면 아주 망가지고 국산은 다시 들어온다고 그랬습니다.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튼튼하게 만들어진 옛날에 진공관 라디오가 선이 많았습니다. 안 들어오면 탁 때리면 한대 맞으면 정신 차리고 다시 들어옵니다. 그런데 요즘 나오는 고급 전자제품 같은 것 안 들어오면 때리면 몇 백 만원 날라 갈 수도 있습니다. 3-400만원하는 여러분, 디지털 캠코더나 아니면 1800-1900만원하는 PDP 같은 안 들어온다고 한번 발길로 뻥 차면 그 속에는 머리털보다 더 가느다란 줄들로 전기 줄로 선이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 떨어져서 깨트려지든가 하면 결국 부속품을 전부다 갈아야 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절대로 안 들어온다고 때리고 그러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옛날 시대입니다. 요즘은 즉시 AS 센터에다가 부탁해야지 됩니다.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는 말하자면 남성은 단순한 진공관 라디오 같은 것이라면 그래서 안 되면 툭 때리면 되지만 여성은 아주 섬세한 PDP 같습니다. 각막형 TV와 같아서 망가지면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잘 수리하고 고쳐야지 발길로 툭 차고 에이씨! 그러면서 이렇게 때리면 안 됩니다. 아주 망가집니다. 그런 차이들을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 다음에 작은 두 번째는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처음에 남녀가 결혼하면 아무리 결혼 예비교육을 많이 시켜도 도움은 되지만 그러나 여전히 갈등들이 생겨나고 문제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무엇 때문인가 하면 일반적인 아내와 여성에 대해서 배웠다고 하더라도 그 배운 지식이 아직 체험된 지식이 아니고 쉽게 이야기하면 전쟁에 대해서 많이 배웠지만 전쟁을 아직 못 경험한 것과 똑같습니다.
두 번째는 일반적인 아내에 대해서 공부했는데 내 아내는 또 일반적인 성품도 있지만 그러나 내 아내이기 때문에 독특함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남자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고 다 다릅니다. 여자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아내가 다르고 남의 아내가 다르고 사람마다 각각 다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 지식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아들딸 시집장가 보내고 둘이 같이 살면서 티걱거리고 싸웁니다. 굉장히 크게 염려하는데 괜찮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싸웁니다. 그것을 저는 가리켜서 갈등의 조정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단 그 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이 거의 없고 무지하면 그 싸우는 것이 심각한 결과로 끝날 수 있습니다. 결혼 초기에 인격적인 연합이 안 되고 분열을 자꾸 경험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시간이 지나면서 아예 부부로서의 정신적이고 인격적인 결합이 힘들어지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그러면 동거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고 말씀에 끊임없이 은혜를 받아서 성장한다면 반드시 그 사람들이 잠시 갈등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갈등이 해소됩니다. 왜 내 아내를 아는 지식, 내 남편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이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남편이 아내와 함께 동거할 때 지식을 따라서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어떤 것들이 힘들어하는가. 어떤 것들을 싫어하는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가. 그런 것을 하나하나 배워가야지 됩니다.
보신탕을 전혀 못 먹는 아내에게 오늘 외식시켜줄게, 아! 정말 좋아. 이게 얼마만이야. 그리고 야호! 그리고 따라갔는데 보신탕집에 가자. 그리고 꾸역꾸역 먹으면서 왜 안 먹노? 이리 도. 다 갖다놓고 자기 혼자 먹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한두 달 후에 다시 외식하러 갔는데 그걸 또 잊어버렸습니다. 또 거기로 갑니다. 그것은 아내를 아는 지식에서 전혀 안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하나 자라가는 것입니다. 그런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그 지식을 따라서 어떻게 하라고? 동거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동거하라는 것은 둘이 함께 같이 사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편에 보면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정신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함께 깊이 기대고 연합을 이루면서 살아가고 있는 그 상태를 가리켜서 동거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동거하지 않고 그냥 살기만 할 뿐일 수 있습니다. 어떤 연합도 없이 그냥 살아갑니다. 별로 싸우지도 않는데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너는 너, 나는 나 그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동거가 아닙니다. 그렇게 연합을 이룬 함께 살아가는 삶이 동거인데 그런 동거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지식이 필요합니다.
가끔 보면 결혼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 사실 결혼에 대해서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난센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알고 있는데 문제는 집과 같습니다. 집을 지었다고 해서 모두 집이 아니라 어떤 재료로 지었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가정에 대해서 알고 있는데 워낙 그 지식 자체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그 다음에 아내를 아는 지식도 부족하고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도 부족해서 그래서 지어진 생각과 사상의 집이 아주 쓰레기 같은 사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나름대로 부부생활의 원리를 터득했다고 나오는 이야기가 뭐 그런 것이 아닙니까? 마누라와 북어는 계속 패야지 된다. 그런 식으로 이 세상에서 배워온 잡다한 재료들을 가지고 나름대로 가정생활을 영위해가는 원칙들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들이 결코 가정을 하나님의 가정으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 한 가정에서 정말 좋은 사람의 남편이 되는 이 일은 사실은 참된 신자가 되어가는 성화의 과정과 일치합니다. 목회가 어려운가, 한 가정의 가장과 남편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렵냐고 그러면 나는 일분도 망설이지 않고 목회가 더 쉽다고 말하겠습니다. 쉽습니다. 자녀들에게 자신의 전 삶을 다 보여주고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위장이 불가능합니다. 진실로 승부를 해야지 되는데 그렇게 진실로 승부해서 존경을 받고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지어낸 것으로는 불가능하고 자신 속에서 끊임없이 참된 남편, 참된 아버지, 가장이 되어가는 변화의 과정이 있어야지 되는데 이것이 자신의 힘으로 변화가 되는가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사람 속에 끊임없이 역사해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한 아내의 남편으로 온전하게 되어가고 자녀들의 한 아버지로서 가정의 한 가장으로서 온전하게 되어가는 이 일이 하나님 앞에서의 끊임없는 고민이 되고 자기의 이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분투하는 성화의 한 과정이 되지 않으면 그가 결코 그렇게 온전한 남편, 온전한 아버지, 온전한 가장이 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신자가 되어갑니까? 내가 정말 이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도 예배시간에 눈물을 흘립니다.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깨트려집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보면서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이렇게 이런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확인을 받게 됩니다. 아픕니다. 깨트려집니다. 그리고 변화됩니다. 이런 과정이 반복됨으로서 우리가 겨우 걸음마 하듯이 주님의 성품을 본받으면서 참된 신자가 조금씩 조금씩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것도 없는 사람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는 점점 짐승과 같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고 그는 짐승과 다를 바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키드멘스타 리차드 백스터에 마더스 카터키즌이라고 하는 어머니의 교리문답이라고 하는 책에 보면 아이를 앉혀놓고 엄마가 가르칩니다. 질문이 이런 질문이 나옵니다. ‘애야. 교리문답 배우자.’ ‘엄마 교리문답이 무엇이예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란다.’ 아이가 또 묻습니다. ‘엄마 그런데 이 세상 사람들은 그런 것 안 배우는 사람도 많은데 우리는 왜 배워야지 되요?’ 엄마의 대답이 무엇인가하면 ‘그들은 다 짐승이란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네가 어렸을 때부터 배워야지 된다.’ 그렇게 해서 겨우 주님의 사람으로 조금씩조금씩 되어갑니다.
얼마나 느린지는 여러분들이 증인이 아닙니까? 그렇게 똑같이 그 빛 아래서 아내의 잔소리나 불평, 집을 뛰쳐나가겠다는 공갈, 협박 이런 것들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한 아내의 남편으로 이렇게 이런 존재가 되어서 살아가도 되는가. 이것을 지고 십자가처럼 씨름하면서 자기가 끊임없이 변화되어 가는데 아내 때문에 변화되어 가는 것은 애완견적 사랑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왜 우리가 아내의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우리 소유주가 우리 아내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참다운 남편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성경이 이야기하는 남편으로 변해가고 또 성경이 이야기하는 아버지로서 이런 모습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끊임없이 변화되어가야지 됩니다. 그래서 결국 이 모든 것들이 그가 성화의 도상에서 분투하면서 그가 살아가지 않으면 일어날 수 없는 변화들입니다. 바로 그런 지식을 따라서 살 때 아내와 동거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나오는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면 남편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더 연약합니다. 남편이 가지고 있는 강함이 아내에게는 모자랍니다. 그 대신 남편의 연약함이 남편에게는 연약한 부분이 아내에게는 강한 것으로 존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아내가 남성인 우리도 연약하지만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연약하다고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남성도 연약합니다. 정말 연약합니다.
이 세상에서 저는 이렇게 지도자의 삶을 살아가다가 어느 한순간에 어떤 상상을 할 때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 내가 지도자가 아니라 누군가의 지도를 받는 사람이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뭔가 이렇게 내 자신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고 느껴질 때 그냥 어린아이처럼 하나님의 품을 파고들고 싶은 그런 충동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런 연약함이 남성들에게도 모두 존재합니다. 그러니까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성은 그것보다 더 연약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연약하다고 느낄 때마다 아내는 나보다 훨씬 더 연약하겠구나. 그런 생각을 해야지 됩니다.
연약할 때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이 연약할 때에 귀찮게 여겨질 수도 있고 불쌍히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데 사랑하지 않아. 이게 자꾸 연약해. 그럼 나를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일을 하라고 회사에서 채용을 했는데 매일 아프다고 그러고 오늘은 감기, 내일은 몸살, 그 다음에는 두통 그러면서 계속해서 직장도 안 나가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 사장이 어떻게 생각하면 잘라 버려. 그것은 관계는 있지만 사랑이 없을 때 그런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회사를 위해서 충성하고 회사를 위해서 자기 몸을 바쳐서 일해 왔는데 오늘은 아프고 내일은 편찮고 모레는 두통이 온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럼 사장 생각에 얼마나 아프면 저럴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아내의 연약함이 여러분들에게 사랑이 있으면 그것이 불쌍히 여겨지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 연약함이 귀찮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이 뭐라고 그러는가 하면 그래서 귀하게 여기라고 그랬습니다. 에베소서에서는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자신을 주심과 같이 남편들도 아내를 사랑하고” 라고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의 두 정체는 뭐라고 그랬습니까? 기뻐하고 그 다음에 소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Delight 그리고 Valuation 그래서 기뻐하고 그 다음에는 Valuation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사랑입니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귀하게 여기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어떻게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사랑하라는 것인가? 성경은 동정적인 사랑을 아내에게 주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에 최고봉을 말합니다. 그것을 적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 최고봉이 무엇인가 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신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최대한의 사랑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이 보여주신 최대한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렇게 하나님께 순종하고 말씀 잘 들으며 살아갈 때에만 사랑하십니까? 아닙니다.
(찬양)
주 예수 내가 알기 전 날 먼저 사랑 했네
그 크신 사랑 나타나 내 영혼 구원 했네
우리가 주님을 모르고 철없이 주님을 대적하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을 때에 그때부터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생각도 짧고 마음에 그 하나님께 순종하지도 않고 거스르며 살아가고 있는 그때에도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은 사랑할 때까지만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었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참는 사랑이 아니었고 자기를 다 내어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있어서 이 세상에 있는 인간인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것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말할 수 없는 아픔이었고 고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은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무엇을 아끼셨습니까? 자신의 소유도, 자신의 시간도, 자신의 마음도 모두 우리의 범죄하고 순종하지 않고 불순종한 인간들을 위해서 내어주셨고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자기를 못 박으심으로 구속을 이루신 것이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들이 순종할 때에만 예수님이 사랑하신 것이 아니라 순종하지 않을 때에도 사랑하셨습니다. 다만 순종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더 많이 느낄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교훈을 받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사랑해주지 하는 그런 태도는 성경이 이야기하는 그런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주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며 사는 것처럼 또한 아내는 아내라는 사실 단 하나 때문에 사랑을 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이고 우리는 일평생동안 그 사랑을 실현해가도록 부름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부부가 이 세상을 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깨트려지며 자기를 낮추고 남편에게 복종하고 끊임없이 깨트려져서 사랑할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사랑할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하고 참을 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참을 수 없을 때에도 사랑하고 그래서 한 여자의 한 아내의 좋은 남편이 되어가는 그 모든 과정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한사람의 진실한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일치하도록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