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정6 (2010.5.23. 주일오전설교)
아내와 남편
“남편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 3:7)
I. 본문해설
오늘 성경은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은 남편 된 자들에게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라” 는 권면의 말로 시작합니다. 여기에서 ‘이와 같이’라고 하는 이 부사구는 바로 그 앞 1절과 6절 사이에 나오는 내용을 염두에 두고 ‘이와 같이’ 라고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 앞부분에서 사도는 아내가 가정의 질서 상 남편에게 순종하고, 또 거룩한 단정함으로 가정의 아내의 역할을 감당하도록 촉구하였으니 이와 같은 원리에 따라서 “남편 된 자들도 아내와 함께 동거하고 귀히 여기라” 라고 하는 권면입니다.
II. 아내는 누구인가?
A. 연약한 그릇
그러면 오늘 이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아내는 누구입니까? 제일 먼저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릇이라고 번역된 ‘유스코스’라고 하는 이 희랍어 단어는 어떤 특정한 그릇이 아니라 그릇 전체를 총칭하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디모데 후서에서 우리에게 주었던 사도바울의 교훈을 생각나게 해 줍니다. 그는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다양한 일꾼들이 있다는 것을 그릇으로 비유하였습니다. 금 그릇도 있고, 은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어서 어떤 것은 귀히 쓰고 천히 쓰는데 그 모든 것들이 주님의 쓰심에 합당하도록 만드셨다는 뜻입니다. 바로 아내도 비록 남편과 함께 가정생활을 이루며 겉보기에는 남편을 수종 드는 것처럼 살아가지만 사실은 그도 역시 하나님께로 부름 받은 독특한 일꾼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흔히 여자가 아무리 많은 계획을 세워도 결혼을 하면 남자가 하여야 하는 일에 의해서 일생의 가는 길이 결정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사실 또 그렇습니다. 제가 아는 한 자매는 평생 선교사로 가기로 늘 마음을 먹고 기도했다가, 시골에 목회하는 사람에게 시집을 가서 지금 시골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은 저에게 그렇게 물을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여성은 이런 저런 꿈과 계획을 세워도 그것은 소용없고, 결국은 남자가 남편이 되어서 가고자 하는 그 길에 결국은 따라가는 것이 아닙니까?’ 사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 자매의 가는 길은 원래 시골 목회인데 자기가 착각을 하고 있었던 거라고 생각합니다.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나름대로 이런 저런 꿈을 꾸어 본 것입니다. 저도 원래 목사를 하려고 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딴 거 하고 싶은 게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렇게 만나고 보니까 이 길이 나의 길이었고, 실컷 꿈꾸던 길은 주님이 가기를 원하던 길이 아니었으니까 여러분하고 결혼을 한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 자매도 역시 마찬가지니까 오히려 자신이 갖고 있던 착각과 편견이 결혼을 통해서 깨뜨려지고 현실이 드러났다 그렇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게 모든 일 뒤에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정하는 신앙입니다. 그런 것과 상관없이 남자하고 결혼해서 우겨 넣어서 내가 시골 목회를 하고야 말았다고 생각하면 남편 때문에 목회하는 거지, 소명 때문에 목회하는 거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웃은 것에 대해서 사과해야 합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그렇게 그런 방식으로 남편과는 다른 영역에서 섬겨서 남편과 더불어 주님을 섬기게끔 선택하신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연약한 그릇이라 하면서,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여성들만 연약한 게 아니라 남자도 연약한데 인간은 다 연약한데 여자가 좀 더 연약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중에 어떤 분들은 그렇게 말할 것입니다. ‘연약이라고 지금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아내는 그 단어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 아내는 산소(生牛)와 같은 여자 입니다. 산소! 언제나 씩씩하고 힘이 넘쳐서 내가 눌려 삽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것은 원래 아내의 모습이 아닙니다.
요즘에 어느 회사에서 광고 카피를 했는데 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진이 석 장, 넉 장이 나오는데 남편하고 마트에 가서 시장을 보고 남편은 양쪽에다가 무거운 걸 들고 올라가고 있습니다. 계단도 한 다섯 개 밖에 안 되었습니다. 아내는 수박 한 덩이를 들고 못 올라가서 남편을 애처롭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 사진 밑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아내는 약하다.” 그 다음에는 애기 유모차를 끌고 아파트 앞을 왔는데 올라가는 길이 없습니다. 사방을 둘러보더니 번쩍 들고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밑에 “어머니는 강하다.” “엄마는 힘이 세다.”
우리 종종 과거의 시대의 어머니들을 보면 그 갖은 풍상을 다 겪고, 남편 일찍 여의고, 혹은 여의지 않아도 그 놈팽이 같은 남편 만나서 남편은 맨 날 술이나 먹고 방안에 퍼질러 자고 아내가 미친 듯이 시장 바닥에서 일하고, 막 거칠게 살면서 자녀들을 키우고 하는 그런 어머니의 삶들을 우리들이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결코 눈물한번 보이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자라면서 ‘우리 엄마하고 여자 됨하고는 거리가 멀다.’라고 생각합니다. 언제나 씩씩하고 아빠 같은 엄마,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엄마의 모습일지는 몰라도 아내의 모습은 아닙니다. 아내의 모습은 언제나 연약하고 그리고 남편을 의존하면서 그리고 남편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을 아내가 함께 나누어 하면서 그러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불러 주신 사람이 아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남성을 창조해 놓고 보니까 외로워서 여자를 우연하게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그것은 인간들이 하도 머리가 나쁘니까 알아듣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거고,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남성과 여성을 창조하셔서 이 세계를 창조의 목적에 맞도록 돌보시게 하시려고 작정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에게 주신 명령 속에서도 드러납니다. 그 명령은 “생육하고 번성하라” 라는 명령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 아래에 구체적인 명령이 둘이 나오는데 ‘정복하라’는 명령과 ‘다스리라’는 명령입니다. 정복은 아직 개척되지 않는 곳에 도전하고 개척하여 자기의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통치권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다스리는 것은 이미 그렇게 통치권이 확보된 땅에 서로 관계를 짓고 질서를 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그 땅의 주인인 그 사람의 뜻이 펼쳐지도록 그렇게 돌보는 것이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복과 개척이 남성의 정신이라면 다스림과 돌봄은 여성의 정신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제왕 학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아주 영면한 군주가 되기 위해서는 이 남성성과 여성성을 동시에 잘 정신 속에서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개척과 정복의 정신이 있어서 외국에 있는 군대를 무찌르고, 땅을 차지하고, 깃발을 꽂고, 야심차게 정복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왕국 전체의 운명을 걸고 자기의 목숨까지도 걸고 전쟁을 해서 남의 땅을 빼앗고 개척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만 하면 안 되고, 그렇게 개척된 땅은 사람들을 심어서 제도를 만들고 법을 제정하고 질서를 가꾸어서 왕 자신의 통치의 철학이 그 모든 영토 속에 아주 서민들의 생활에 이르기까지 전부 다 실현되도록 만드는 동안에 또 다시 정복을 하고 도전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 속에서 보면 종종 이 두 가지 정신의 균형을 잃은 왕들이 종종 나타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전자는 아주 탁월하게 잘하는데 후자를 못합니다. 그러면 결국은 열심히 정복한 큰 땅이 내분을 일으켜서 무너져 버립니다. 또 이렇게 내적인 것들은 아주 잘하는데 외적인 것들은 못합니다. 그러면 아주 아름다운 문화를 일구어 놓고도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에 짓밟혀져 왕국이 하루아침에 풍비박산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물을 것입니다. 둘 다 못하는 사람은 어떡합니까? 백성이 불쌍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되는데 괜히 태어나서 그 시대에 살아가는 모든 국민들을, 백성들을 도탄에 몰아넣는 것입니다. 두 개가 다 갖춰있으면 진짜 역사에 남는 대단한 임금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여러분들이 지도자의 길을 걸어가려면 그것이 무슨 방면의 지도자이든지 간에 이 두 가지 정신이 마음 안에서 아주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야지만 그런 지도자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렇게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이 남성들은 그렇게 정복하고 그 다음에 개척하고 하는 것들을 주시고, 여성들에게는 그렇게 개척하고 정복한 것들을 관계를 묻고 통치하게 하면서 살아가도록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근데 저 사람이 더 연약한 그릇이다’라고 말합니다. 남자도 연약한 그릇이지만 여자는 더 연약한 그릇입니다. 그러니 한 아내가 남에게 절대 연약해 보이지 않는 산 소 같은 사람이 되었을 때 그가 살아온 그 삶이 얼마나 역경에 가득 찬 삶이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래서 우리는 씩씩한 모든 여자들을 마음 한 구석에서는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남성들은 누가 내 아내를 저렇게 산소처럼 만들었을까? 그것을 스스로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여기서 특별히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비교급까지 써서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남성들도 약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나이가 들면 더 약해집니다. 왜냐하면 남성들에게서 여성 호르몬 분비가 많아지고 여성들은 줄어들고 남성 호르몬 분비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나이가 점점 들면 젊었을 때는 산소 같은 여자들이 나이가 들면서는 산소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성들은 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젊어서는 아내가 있든지 말든지 그런 거 아주 알기를 우습게 알고 씩씩하게 살다가 이제 정년퇴직 하고 나이 들면 마누라가 문만 열고 화장실 가도 “여보 어디가?”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고 곰국 끓여놓으면 가슴이 철렁하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며칠 동안 나가 있으려고 곰국을 끓여놓나?’ 그렇게 의존하는 마음에 생겨서 막 따라 다닙니다. 그래서 젊었을 때 남성들이 보험을 잘 들어놔야 합니다. 그 보험이 뭐냐 하면 서로 사랑하는 관계의 보험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절대 남편 없이 살 수 없게끔 그렇게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나이 들어서 아내가 방문 드르륵 열 때 “여보 어디가?” 그러면 “그건 알아서 뭐해?” 그런 핀잔 안 듣게 됩니다. 이 남성들 진지해지는 것 보십시오. 보험을 별로 안 들었습니다. 큰일 났습니다.
근데 그런 관계들을 가로막는 것이 뭐냐 하면 비인격적인 생활입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적으로 인격적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위격’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위격 간에 그러한 아름다움과 그 다음에 사랑, 그리고 일치, 그것이 위격적인 것이라면 그 위격적인 것의 반영이 인간 사회에서의 인격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나 남편이 볼 때에 젊었을 때 이 세상에 살 때에는 각각 자원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젊어서는 남편이 돈을 와락와락 벌어. 돈 통을 자기가 쥐고 있어. 그것도 하나의 권력 아닐까요? 또 아주 젊었을 때는 아내가 미모가 있습니다. 그것도 6개월 밖에 안 갑니다. 하지만 또 뭐 꽂히면 더 갈 수도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에 따라서요, 그것도 미모가 될 수 있스빈다. 나이가 들면 남편이 건강이 약해집니다. 오늘날의 여성이 남성보다 4년 내지 5년 더 사는 것으로 통계가 나왔잖아요? 78세인데 모든 사람이 그렇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남성의 삶의 질이 여성보다 훨씬 떨어지는 사람이 많습니다. 왜? 젊어서는 너무 건강을 마구 허비하며 살았기 때문에 그런 결과도 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 아내는 기운이 생생합니다. 자원에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그런 자원을 가지고 서로를 대할 때 무시하기도 하고 깔보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살아온 부부의 일생에서 인격적인 그런 연합들이 제대로 안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 많이 받고 사랑으로 충만할 때 형제가 돈 없다는 이유 때문에 멸시해본 적이 있어요? 오히려 돈이 없고 가난하면 더 불쌍히 여김을 받게 되고, 그리고 건강이 나쁘면 “아유 저거 병이 걸려서 골골하는 게 옆에 교회에 가서 등록하지 왜 우리 교회에 와 가지고 병균을 퍼트린데?” 그런 생각 안하잖아요? 오히려 “저런 연약한 지체를 우리 교회에 붙여주셨으니까 우리들이 더 잘 섬겨야지.” 그런 생각 갖지 않나요? 그게 바로 사랑의 연합이 시키는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러면 남편과의 관계도 그렇게 돼야지 정상이 아닐까요? 그런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서로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서 각자 하나님께로부터 그릇으로서의 사명을 받아 이 가정을 동등하게 꾸려가고 있다고 하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인식을 안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여러분 시중에서 나오는 가정에 관한 책들 중에서도 조심해야 할 책들도 많습니다. 어떤 책들은 심지어 기독교인이 썼는데도 성경적인 가정관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드센 쪽이 이깁니다. 그래서 어느 한 쪽이 그 대에 굴복해서 평화가 이루어진 것 그게 간증이 될 수 있을까요? 그래서 드센 남편에게 죽은 듯 사는 여성, 그 사람이 진정으로 인격적인 남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부부간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애완견적인 사랑도 있고 인격적인 사랑도 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아부하듯 들러붙어서 껌벅 죽어지내니까 개뼈다귀 하나 던져주듯이 아내 머리 쓰다듬는 그런 종류의 사랑을 받으라고 이 땅에 아내들을 만들어 내신 게 아닙니다. 더군다나 그런 사랑을 사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불쌍한 사람입니다. 인격적인 사랑은 각자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났고, 그리고 ‘그가 아내가 되어서 비록 나의 일을 돕고 있지만 사실 나를 섬기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그릇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는 중이다.’ 라고 여길 수 있을 때 자기가 하고 있는 밖의 일보다도 가사를 하찮게 생각한다던지, 아내의 역할을 하찮게 여긴다든지 그러는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법원에서 무슨 판결을 내리기를 가사 노동하는 주부들의 임금을 150만원x결혼한 날 수라고 했는데 그건 성경적으로 동의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게 어떻게 있을 수 있을까요? 거의 말하자면 날마다 와서 일하는 심부름센터 도우미 수준의 월급 계산인데, 그걸 계산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해서 오늘 날의 가정 속에서 일어나는 그 폭력적인 언어, 거친 욕설, 거기에 한 발짝 더 나아가서 물건을 집어던지고 폭력을 행사하는 이런 것들은 하나님 앞에 아주 커다란 죄입니다. 초대교회 때 같으면 전부 다 치리를 받고 교회에서 수찬 정지되거나 심하면 출교 당할 죄들입니다. 그런 것들이 일반화된 속에서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거는 너무 나쁜 것이고 한 사람이 그렇게 남편이 폭력을 행해서 비인격적으로 아내에게 대하게 되면 그 폭력이 결국은 메아리가 되어서 자신의 노년에 그대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속에 무슨 사랑의 일치나 결합이 있겠어요? 노예적인 생활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세우신 가정일 수가 있겠어요? 심지어 이런 폭력들이 예수 믿는 사람의 가정에서도 버젓이 행해진다고 하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방치하는 것도 나쁜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 젊은 사람들 결혼할 때 내가 얘기하는데 “부부싸움 하지마라. 피할 수 없이 부부싸움을 하게 되더라도 말로 다투는 것 이상으로 넘어서서는 안 된다. 죄짓지 마라. 그리고 폭력을 행사하면 일단 경찰서에 집어넣고 얘기하라. 왜 웃어요? 그게 웃을 일인가요? 제일 먼저 목사한테 전화하고, 경찰서에 전화해서 집어넣고 쇠창살 가운데 두고 대화를 시작을 해라.” 혼을 내놔야 합니다. 내가 맘대로 할 것 같으면 지하 밑에다 감옥소를 만들어 놓고 콩밥을 먹일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아내가 한번 두 번 세 번 봐주니까 그 폭력이 습성화 되면서 얻어맞는 아내가 문제가 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의 하나님의 형상이 막 파괴가 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치료를 요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특별히 이 일에 있어서 남편들이 깊이 각성을 해야 합니다. 그 잘못된 비 성경적인 가부장적인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통계적으로 보면 여성이 남성화된 가정에 평화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약간 여성화된 가정에 오히려 평화가 있습니다. 그렇게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에서 폭력이 없는 인격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아내가 남편에게 완력으로서는 남편을 이기지 못하니까 폭력을 행사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 세상에 맞고 사는 남편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맞고 사는 사람이 한번 이야기를 하는데 그렇게 때릴 때 자기가 덤벼들어서 확 꺾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아내가 까무러친다는 것입니다. 눈을 하얗게 뜨고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말의 사랑이라도 남아있으면 그렇게까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물리적인 폭력이 아니더라도 비인격적으로 남편을 대하는 여성들의 그 마음의 태도와 이런 것들도 심각합니다. 물론 따지면 거기에는 “남편이 남편 구실을 제대로 하면 내가 그렇겠느냐?” 하는 반감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남편도 약하고 여자도 약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성은 더 약합니다. 그러니까 그릇을 다루듯이 잘 다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돌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도 결국은 가정에서의 교육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기를 때 남자아이에게는 어려서부터 아버지로서의 덕목을 아버지로부터 배우게 하고, 그 다음에 딸에게는 엄마의 덕목을 배우게 해야 합니다. 제가 그런 얘기하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말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길러야 된다고 그러니까 그 쬐끄만 여자아이를 쥐어 패는데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딸을 때리면서 키우는 것은 짐승입니다. 그러면 아들만 때리라는 걸까요? 물론 아들만 패라는 것입니다. 딸은 때리면 안 됩니다. 제 기억에는 아직 우리 딸 때린 적이 없습니다. 아들은 4-5번 아주 심하게 때렸어도 딸은 때린 적 없습니다. 딸은 그렇게 다루어서는 안 됩니다. 그럼 내버려두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다른 방법으로 그 아이를 자극하고 일깨워서 갖게 해서 자기의 여성성 자체가 파괴되지 않도록 만들어 줘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 아이가 곰살궂게 뭐 예쁜 거 만들고 그럴 때에 막 놀리고 그러면 그 아이가 여성스러워지는 거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갖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사람 가정에는 딸이 하나 있는데 하여튼 미장원에 한번 가려면 펑펑 울고, 그리고 남자처럼 하고 다니는 것만 좋아하고, 바지고 운동화고 모두 남자 거를 입고 그리고 칼싸움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날도 칼을 사가지고 갖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도 내가 조금 더 애들을 길렀잖습니까? 그래서 내가 얘기한 것입니다. 그거는 그 아이가 그걸 좋아한다고 해서 부모가 무조건 동조하면 안 된다. 그렇다고 지금 걔가 칼싸움 좋아하는 것을 칼을 확 뺏어서 ‘너 이딴 거, 계집애가 이딴 거 하면 혼난다’라고 하면 이 아이가 상처를 받고 찌그러져. 그렇게 하면 안 된다. 그래서 내가 이야기 하는 게 뭐냐 하면 ‘얘야. 그런 식으로 만약에 지금 하는 것처럼 하면 그럼 얘는 나중에 이제 대인 관계에서 남성들과 굉장히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사귀는 게 다 남자친구들만 사귄단다.’ 제가 그런 자매들 몇 명을 만났습니다. ‘여자들 왜 안 사귀냐?’ 하니까 ‘아이고 짜증난대, 잘 삐지고 울고 샘내고 남자들은 화통해서’ 여자 애가 뛰어 다니면서 ‘형형형형’ 그러고 다닙니다. 그것은 그렇게 놔두면 안 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래서 칼싸움을 하는 것을 좋아하면 칼싸움을 아주 용기 있게 잘하는 것과 아주 예쁘고 여성스러워지는 것이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아이 속에 동시에 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칼싸움은 초등학교 졸업하면 안 합니다. 걔가 결혼했는데 첫날밤에 칼 두 자루 들고 와서 신랑하고 그거 하자고 그럴까요? 철이 들면 안 하게 됩니다. 우리도 어렸을 때 딱지치기, 구슬치기 다 했는데 지금 집사님들 그거 땅 바닥에 무릎 꿇고 앉아서 그거 하는 사람 있어요? 그때는 영원히 할 거 같지만 나이 들면 안 합니다. 그러니까 그 칼싸움 좋아하는 것은 괜찮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도 남자처럼 해야 되고 옷도 남자 옷을 입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들어서 여성스러워지는 것 자체에 대해서 막 자기가 그거를 짓누르면서 억압하게 만들면 이 인성자체가 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내가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아주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줬습니다. 여러분 안젤리나 졸리라는 배우 기억하시죠? 지금은 다 아줌마가 되어서 그렇지만 한참 젊었을 때 20대에 보면 그 액션이 정말 화려합니다. <툼 레이더> 같은 영화에서 무덤처럼 생긴 바위 사이를 뛰어 다니면서 거의 전광석화와 같이 카리스마에 넘치는 액션 연기를 보여줍니다. 근데 일단 군복을 다 벗으면 정말 예쁜 여자입니다. 그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넣어 줘야지만 그게 여성성이 찌그러지지 않으면서도 개별적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상한 특질들을 소화해 낼 수 있습니다..
남자 아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실패했어도 여자아이들이 할 수 없는 과감한 일을 해냈을 때 그때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고 칭찬해줄 때 남성성 자체가 꺾이지 않고 계속 개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거 봐라, 인마 엄마 허락도 안 받고’ 줘 패고, 욕하고 그러면 아이가 더 이상 도전해야 엄두를 못 내서 찌질 한 남자애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거를 항상 부모가 판단을 하고 생각을 하면서 자녀들을 길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이제 남성과 여성성들이 발달하면서 한 가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오늘 분명하게 말합니다. “여성은 더 연약한 그릇이다.” 우리가 고무 대야나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것들을 헤져서 못쓰고, 깨져서 못 쓰는 경우 있습니까? 쓰다가 지겨워서 쓰레기 담다가 나중에 버립니다. 그리고 새 것을 삽니다. 왜일까요? 발로 차도 안 찌그러지고 집어 던져도 안 깨집니다. 그런 고무 대야입니다. 근데 오늘 성경은 ‘아내는 잘 깨지는 그릇’이다. 그래서 그런 그릇을 우리들이 꼭 필요할 때 꺼내서 쓸 때는 아주 조심해서 다루듯이 그렇게 남편이 아내와 관계를 맺고 살아갈 때에는 말이나 행동, 모든 육체적인 힘, 모든 것에 있어서 더 연약한 그릇이라고 생각하고 배려하고 돌보면서 살아야 될 사람이 바로 아내다 이렇게 생각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도 이렇게 여러분들에 의해서 연약한 그릇으로 여김을 받기를 바랍니다.
B. 생명의 유업을 공유할 자
두 번째는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라고 성경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생명의 유업을 함께 받을 자’ 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받은 바 그 구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과 사랑을 누릴 자가 바로 ‘아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과 교회는 나누어 질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정상적인 경우라면 믿는 형제와 자매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게 되어있는 것이 가정의 원리이고, 그렇다면 두 사람은 부부로 연합되기 전에 먼저 그리스도를 몸으로 한 교회의 연합된 성도였습니다. 그렇게 한 몸을 이루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그 남자의 아내, 그 여자의 남편이기 전에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하나의 지체입니다. 그렇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가정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때에는 교회를, 교회에 대해서 가르쳐 주실 때에는 가정을 함께 비유로 들어가시면서 우리에게 두 기관을 같은 연장선상에서 가르쳐 주시고 싶어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일반적인 사람들과의 관계는 잠시 머무는 이 세상에 있다가 깨뜨려지는 관계일 수 있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영원 무궁히 지속되는 것처럼, 나의 아내 역시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한 몸으로서 우리의 관계가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는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도 없으니 거기에서 우리끼리 살림을 차릴 일은 없지만 그러나 그렇게 남편과 아내 된 그 완전한 사랑과 연합의 관계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의 관계로 승화되어서 한 결합을 이루며 살아가게 됨으로써 같은 생명의 유업을 하나님께로부터 누릴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누릴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도 이미 누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아내에게 그런 태도로 섬겨야지만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단서를 붙였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매일 매일 살아가는 모든 삶이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영적인 생명과 사랑의 힘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인데 이렇게 아내와 남편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그리고 남편이 아내에게 폭압과 폭력으로 대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현저히 파괴하게 될 때에는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 하늘을 열고 부어주시는 주님의 은혜가 없이 살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 은혜의 교통의 문이 막힌다는 것, 그래서 생명의 유업을 오늘 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대단한 경고가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은 보이는 아내와 남편을 향한 사랑 속에서 구체화되는 것이니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점검하는 남편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III. 지식을 따라 사랑함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성경은 오늘 ‘지식을 따라서 사랑하며 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말하는 지식은 도대체 무슨 지식을 따라 살라는 뜻입니까? 이거는 넓게 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지만, 가깝게 말하면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아내를 아는 지식은 다시 둘로 나뉘는데, 보편적인 의미에서의 아내를 아는 지식과 개별적으로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을 두 가지를 다 포함을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아내는 어떤 사람입니까? 이렇게 연약한 그릇이고 생명의 유업을 공유할 자인 동시에 아내는 성향 자체가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과는 즉, 남편과는 다른 사람들입니다. 남편은 대출을 얻어서라도 집을 하나 더 사야지만 만족을 느낄지 모르지만, 아내는 지금 있는 집으로도 만족을 하고, 오히려 새 집 살 돈이 있으면 그 돈 중에 일부를 가지고 화단을 가꾸고, 가구를 새로 들여놓고, 집안에 칠도 새로 하고 이렇게 그 가정을 가꾸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남자는 집을 새로 사서 바닥을 수입제 대리석으로 까는 것에 관심이 있을지 모르지만, 여성은 그 공간에서 도대체 누가 모여서 무슨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느냐에 더 관심이 많은 것입니다. 그것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입니다. 그러니까 때로는 우리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게 되면 아내의 눈에는 남편이 이렇게 아름다운 관계를 증진시킴으로 가정다운 가정을 만드는 것을 자꾸 방해하는 사람이 남편이라고 생각될 수 있고, 끊임없이 뻗어나가서 개척을 하려고 하는 정복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는 남성에게는 이 여자 때문에 발목을 잡혀서 내 꿈을 못 펼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가정이 안정되면 아내는 그 안정된 가정 속에서 이제 우리끼리 행복하게 살자고 말하고 싶고, 남성은 가정은 아내가 어련히 잘 꾸려가니 이제 나는 밖으로 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근데 이 두 마음은 어느 하나가 누구를 굴복시켜야 될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 긴장을 유지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만든 비유가 ‘연의 비유’입니다. 바람이 부는 날 실패를 풀어서 연을 띄웁니다. 그럼 알다시피 여러분 연을 띄울 때에는 줄을 풀어주지 않습니다. 오히려 팽팽한 줄이 되도록 그 연을 끌고 들판을 막 달립니다. 연이 뜨면서 줄을 팽팽하게 잡아당깁니다. 그래도 쉽게 풀어주지 않습니다. 충분히 뜨는 것을 보고 팽팽하게 잡아당기면 힘이 느껴지면 그 다음에 풀어줍니다. 그렇지 않고 마구 풀어주면 그나마 올라간 연이 가라앉습니다. 그래서 잡아당깁니다. 때로는 오히려 감습니다. 감으면 강한 압력을 받으면서 연이 줄 좀 풀어달라고 하늘 꼭대기에서 줄을 막 당깁니다. 그때 조금씩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줄을 느끼면서 하늘 높이 날아 오른 연은 저 놈의 줄 때문에 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일단 끊어지고 나면 연은 자기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반대로 잡아당기는 그 힘에 의해서 떠 있기 때문에 결국은 땅바닥으로 떨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긴장 관계가 있다는 거 자체가 정상적인 가정입니다. 그러니까 남편과 아내가 어느 한 사람을 전적으로 굴복시켜서 꺾으려고 하는 그런 것은 안 됩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어떻게 하든지 바깥으로 뻗어나가고 개척하고 정복하려고 하는 남편의 꿈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남편은 그럴 경우에 생겨나는 위험과 그 다음에 염려, 그렇게 자원을 한쪽에 몰아서 쏟아 부을 때 연약해질 지도 모르는 가정 안에서의 결속이라든지 이런 것에 대해서 우려하는 아내의 목소리에 대해서도 귀를 기울이면서 그렇게 연과 떠있는 연과 연줄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남편과 아내가 수시로 손바닥을 맞부딪치며 완전히 의견일치를 보는 가정이 위험합니다. 이것이 원리입니다.
나는 그런 모습을 가정에서도 보지만, 전 목회자니까 교회에서도 더 잘 발견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면 만약에 교회가 그냥 자신들끼리 모여 교재하고 헌금 걷은 거 자기네들이 쓰고, 그 다음에 자기네 교제를 즐거워하고 이렇게 내적으로 말하자면 응축됩니다. 반드시 부패하고 맙니다. 교회가 헌금 많이 걷히고, 일군들이 많이 세워지고, 교인이 많아졌는데 할일이 무엇인지를 모여서 옹기종기 앉아있으면 반드시 부패합니다. 그 돈 때문에 교회에서 사고가 나고, 그리고 그렇게 모여 있는 사람들 속에서 교제가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냐하면 끊임없이 누군가가 목회자를 비롯해서 지도자들이 그 남성적인 마음을 가지고 그 교회 바깥에 있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보고, 그 속에서 주님의 마음을 느끼면서 우리들이 해야 할 일이 있다고 그러고 성도들이 하나님께로 받은 많은 자원들로 봉사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그럼 꿈들을 보여 줘야 합니다. 그런 미래들을 보여줘야 합니다.
지난주에 아웃리치 우리가 950여명 정도 갔다고 합니다. 근데 14년 전이었습니다. 그때는 저희들 교회에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지하실에 있는 쬐그만 교회에서 그리고 나도 그런 것 해 본적이 없습니다. 목사님 어디서 훈련을 잘 받았다고 그러는데 아닙니다. 나도 해 본적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그렇게 시골 교회에 대해서 애지중지하면서 여름마다 교인들이 가서 땀을 흘려주는 그런 교회 전 다녀보지 못했습니다. 머릿속으로 생각을 하면서 그리고 경험들을 생각하고 실제로 가보면서 사역의 장을 열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14명이 가서 시골교회에 땀을 흘리며 전도해서 10명밖에 안 모이던 교회가 갑자기 100명으로 불어나는 역사를 경험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그들이 가서 그렇게 열어 놓으니까 사람들이 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물질, 여러분이 이번에 가서 거의 1억 원 가까운 돈을 쓰셨지 않나요? 그렇게 하나님께서 쓰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주신 자원입니다. 그걸 흘러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 돈만 그럴까요? 눈물과 땀과 기도, 모든 것 마음을 모으면서 누가 그렇게 합니까? 그런데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렇게 흘러가서 여러분들은 빈털터리가 되서 돌아왔습니까? 아닙니다. 그 사람들이 여러분들에게 받았다고 그렇게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우리는 정 반대로 그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 너무나 많이 퍼줬는데 사실은 우리가 빚지고 온 거라고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끊임없는 도전들을, 이 세상에는 너무너무 주님이 일군들을 기다리고 있는 일들이 세고 버린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와서, 그런 것들을 보여주고 거기에 꿈을 심고, 우리 모두가 가진 않아도 이 정복하는 사람들이 달려가서 정복을 하고 여기에서는 탄약을 만들고 김밥을 싸고 이렇게 하면서 협력하면서 하나님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봉사해 가라고 하나님이 성령의 은혜도 주시고, 진리의 지식도 주시고, 이 세상의 물질도 주시고, 아직 써금써금 하지만 건강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러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안하면 교회가 망가집니다.
그런데 또 안에 어떻게 돌아가든지 내버려 두고 바깥으로 쏟아져 버리면 그러면 교회 안에서 다시 부패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두 가지를 잘 이루어야 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가 교구별 목양 보고를 받으면서 이제 청년 교구만 남았는데 받으면서 하나님 앞에 너무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구역밖에 모르고 자기 구역식구 밖에 모르고 열심히 봉사하고 영혼들을 위해서 눈물 흘리는 그런 구역장들이 있고, 일꾼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먼 곳까지 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균형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균형을 이루어서 서로가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때때로 제동을 걸지만 기본적으로는 내가 가지고 있는 꿈들을 이해해 준다, 그리고 남편이 때때로는 자기 할 일을 모두 하지는 못하지만, 그러나 누구보다도 이 가정을 소중하게 여기고 우리들과의 관계를 가장 기쁘게 생각한다는 마음을 서로 인격적인 관계에서 읽을 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아내입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보편적인 아내를 생각하면서 이제 그 이해를 토대로 자기 아내가 누구인지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내는 이웃집에 다른 아내들하고는 다른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동네 아저씨는 몰라도 됩니다. 어차피 데리고 살 거 아니니까. 내가 잘 알아서 그래서 내 안에 사용 설명서를 잘 익혀야 합니다. 내 아내 제품이 어떤 제품인지.
하도 무뚝뚝한 경상도 사람한테 시집을 간 어떤 자매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한다는 그런 이야기를 할라치면 온 몸에 뭐가 돋는다고 진저리를 치는 그런 사람입니다. 근데 또 구두쇠여가지고 결혼한 지 5년이 됐는데 외식 한번 안 시켜주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어느 날 전화를 불쑥하더니 “내가 밥 사줄게, 나오라.” 그러는 것입니다. 이게 5년 만에 웬일이니 칠보단장을 하고 보신탕집으로 쑥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보글보글 끓는 것을 열심히 땀을 흘리면서 꺼내서 소스를 찍어서 질질 흘리면서 퍼먹고 있는 것입니다. 그 남편이. 그러더니 “와 안 묵노?” 그때까지도 아내가 개고기를 못 먹는 다는 거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지식을 따라서 살아가는 거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연구를 하십시오. 연구를 ‘내 아내는 어떤 사람이다’ 그리고 연구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함께 한 10년 살면 그래도 500페이지 논문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지식이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의 인간, 인간성, 단점, 약점, 결점, 그리고 좋은 점, 등 쭉 해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여러분 아내에 대한 최고의 권위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고개를 열심히 끄덕거릴 필요도 없습니다. 제 남편이 뭘 좋아하는지, 누군지, 사용 설명서를 알아야 합니다.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A. 동거함
그렇게 하면서 성경은 두 가지를 명령하는데 ‘동거하라’ 같이 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장소적인 것은 물론 포함하지만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연합입니다. 그래서 시편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 지요” 정신적으로 연합되어 있는 관계, 사랑, 그곳에서 한 장소를 공유하면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부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기도하는 것 이외에는 분방하지 말도록 가르치셨는데 이것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부부가 결혼을 했어도 얼마나 연약한 존재이고, 부부 사이에 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합들이 얼마나 쉽게 와해될 수 있는지를 아셨기 때문에 주신 경고의 말씀이니 새겨듣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정신적인 사랑의 연합 속에서 함께 동거하면서 사는 것, 이것이 바로 남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B. 귀히 여김
마지막으로 두 번째는 ‘귀히 여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사랑의 특성이 두 가지인데 하나는 기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귀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자가 없어지고 나면 또 다른 기회가 올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건 자기의 생각이지 사람이 결혼하고 나이가 들수록 이제 두 사람은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고, 그리고 결혼하기 전에는 홀로 있는 것이 아름다워 보이고, 자유로울지 모르지만 결혼을 하고 후에 홀로 있는 것은 정말 독처하기에 좋아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존재를 아내는 남편에게, 남편은 아내에게 더 많이 의지하면서 그 안에서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며 사는 것이 그것이 서로를 귀히 여기는 부부의 관계이고 사랑입니다. 그래서 소중하게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짝지어 주셔서 살게 하셨으니 이 사람 안에서 그래도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하고, 그리고 좋았던 기억들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마치 사람이 나무를 가꾸듯이 그렇게 남편과 아내의 관계를 가꾸며 귀히 여기며 살아가는 가정이 될 때에 그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가기에 적합한 자녀들이 자라나게 될 것이고 그렇게 살아가는 가운데 자신들의 영혼도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아직도 늦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오늘 이 설교를 들으면서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오늘이라도 가서 진심으로 회개하고, 그리고 화해하고, 용서를 빌고, 남편과 아내의 정해진 자리로 돌아가서 그래서 주님의 가정을 교회답게 세우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