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의 유익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롬 5:1-4)
녹취자: 배미라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환란과 시련을 당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환란과 시련을 당하는 것을 기뻐할 사람이 없지만, 그러나 오늘 성경은 그런 환란의 유익에 대해서 말합니다. 환란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이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 소망을 통해서 또 성령의 부어주시는 그런 은혜를 우리가 경험한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환란이 불쏘시개가 되어서 환란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에 불이 붙어서 연단이 되고 ,연단에 불이 붙어서 소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소망에 불길이 타올라서 사랑의 커다란 산불이 되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두 번째로 이런 의문을 갖게 됩니다. 그럼 환란을 당한 모든 사람들이 왜 이런 사람은 너무나 소수이고 왜 대부분의 사람은 환란을 당해서 그렇게 곤고하게 살아갈까 이런 의문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과거를 돌아보면, 많은 환란과 시련을 당했을 때 그것이 영혼의 부흥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우리의 경험에도 사실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 궁금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환란이 그런 불쏘시개 역할을 하면서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소망이 사랑을 이렇게 낳는 정말 아름다운 결론에 이르게 될까 이런 궁금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거에 대한 답이 1절에 나옵니다. 같이 한번 볼까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이거는 어떤 사실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 이렇게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평범한 사실을 이렇게 여기다 덧붙이고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아주 간단합니다. 뭐냐 하면 구원이 우리의 공로로 얻은 것이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얻은 것이고 그리고 우리가 얻은 것은 바로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의이다. 값없이 받은 구원에 대해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은즉, 이게 환란을 당한 사람들한테 큰 위로가 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정말 소수의 사람들은 추호의 자신의 잘못이나 과오 실수 죄가 없이 진짜 아주 성결하게 살았는데 그런데 주님을 위해서 환란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죠? 이번 코로나 때도 많은 선교사들이 돌아가셨는데 그런 것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에는 이 환란이라는 것은 그렇게 쉽게 저 사람은 순결한데 순전히 이세상의 악 때문에 혹은 욥처럼 그렇게 순결한데도 하나님이 주시는 환란이다 이렇게 딱 잘라서 말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뭅니다. 대부분 우리의 환란이라는 것은 그런 하나님의 계획도 있지만 우리가 살아온 삶의 발자취로 관련이 되고 다른 사람의 죄뿐만 아니라 나의 죄, 나의 과오, 이런 모든 것과 서로 연관이 됩니다. 그렇게 환란을 당했을 때, 그때에 조용히 상기해야 될 사실이 있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이 환란에서 낙심하고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그런 죄 가운데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의롭다하심을 얻었으니 이 환란에도 하나님이 나를 건져줄 것이다. 나의 의로움과 공로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나를 건져주실 것이다라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환란에 처할수록 상황과 씨름하기보다 믿음의 근본과 더불어 씨름하는 자세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잘 못합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환란과 시련 속에서 낭비하고 고통을 받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의롭다하셨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첫 번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눈을 이 세상과 나 자신에게서 떼어놓아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우러러 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겁니다. 그래서 나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 나의 구원이 나의 의로운 행실에 달린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라는 아주 신앙의 기본적인 사실을 생각하면서 시련의 구덩이에서 하늘을 향해 눈을 들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거는 하나의 원리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두 번째는 훨씬 실제적인 것인데 이렇게 말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환란 속에서 그 환란이 인내를 이루고, 인내가 연단이 되고, 연단이 소망, 소망이 사랑이 되기까지 놀라운 그 은혜의 역사를 일으키는 비결이 실제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현실적으로 내가 누리고 살 때, 그때에 환란은 내 마음속에 재해석되어서 그래서 환란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게 되고 인내를 통해서 내가 좀 더 순결하고 단단해지는 연단으로 나아가게 되고, 그 연단 속에서 세상에 붙었던 소망의 찌끼들을 털어버리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는 소망의 순결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소망으로 가득 차게 될 때 그 소망에는 사랑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앞에 나온 믿음, 소망, 사랑이 결국은 다시 고리도전서 13장에 나오는 것처럼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라고 하는 이 말씀이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궁금한 것은 하나님과의 평화, 그것이 문제인데, 하나님과의 평화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 무엇일까? 이게 그리스어로 ‘에이레네’이고 히브리어로 되돌아가게 되면 ‘샬롬’인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게 ‘온전함’, ‘안녕’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사람들이 만났을 때 ‘샬롬’하고 인사를 하고 빵집에 가면 아침에 빵집에 가서 ‘텐리샬롬’이라고 이야기를 하면 빵을 오븐에서 구워서 전혀 자르거나 뜯지 않은 온전한 하나의 빵을 줍니다. 그게 너무 커서 반만 먹고 싶으면 ‘텐리하찌’라고 이야기하면 절반을 칼로 잘라서 주는 것입니다. 혼자 살아도 양이 많으면 하나 먹고 적으면 반을 먹고 하는데, 히브리 사람들에게 ‘샬롬’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원래 있어야 할 상태에서 빠지거나 더해지지 않은 온전한 상태입니다. 원본 그대로 있는 상태, 그것을 ‘샬롬’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 ‘샬롬’에 대한 생각은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과 물질적이고 그다음에 지상적인 것들을 칼처럼 나누지 않습니다. 그런 사고방식은 그리스 사람들이 잘 하는 방식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오히려 통합적입니다. 그래서 그 무엇인가 정신적인 측면에서 빼거나 더해지지 않은 원래 있어야 할 그 상태가 그대로 보전된 그 온전함의 상태가 몸과 삶으로, 삶의 상황으로 그대로 투영이 되어 나타난 것이 또 ‘샬롬’입니다. 그러니까 ‘샬롬’이라고 인사를 할 때 히브리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것은 영적이고 정신적인 평화로부터 그리고 물질적이고 육체적이고 환경적인 평안에 이르기까지 모두 ‘샬롬’의 상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거하고 우리나라 말에서 가장 90프로 이상 접근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영어의 ‘peace’도 거기에 접근하지 못합니다. 사실은 라틴어로 ‘팍스’라고 하는 것은 로마시대에 돌아가서 보면 전쟁이 없는 상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엄청난 권력을 로마가 가지고 있어서 세계를 자기 원하는대로 질서대로 로마가 통치하기 때문에 전쟁이 없는 상태를 ‘팍스로마나’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런데 ‘피스’는 사실은 그것을 온전히 표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말에 진짜 좋은 그 말이 무엇이냐면 ‘안녕’입니다. 페어웰하는 ‘안녕’ 그게 아니라 ‘안녕하셨습니까’ 그러잖아요. 우리나라에 그런 인사법이 언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 학자들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는데 아마 임진왜란 후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거기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확신을 할 수 없습니다.
‘안녕하십니까’, 특히 그 앞에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라는 말을 붙입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사회적인 상황이 밤새 안녕한건 당연합니다. 옛날의 사회에서 불 끄면 모두 들어가서 자니까 아침에 일어나면 밤새 아무 일 없는 게 당연합니다. ‘밤새 안녕하셨습니까’라는 얘기는 무슨 뜻이냐 하면 그만큼 변수가 많은 사회를 살았다는 것입니다. 간밤에 나라가 풍전등화처럼 시달리니까 도둑도 많고 그다음에 왜적이 침입 했을 수도 있고 그러다보면 여러 가지 불상사가 일어나니까 ‘간밤에 평안한 게 대게 힘들었을 텐데’라는 생각이 이웃을 확인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안녕이라는 것도 우리도 보면 헤어질 때 안녕이라고 헤어집니다. 그 의미가 뭔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안은 편안할 안자고 영자는 강령하다 할 때 그 영자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이냐면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모두 너를 힘들게 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마땅히 있어야 될 사물의 상태들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네가 그 질서 속에서 살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전혀 괴로움을 당할 것이 없는 그런 상태를 얘기하는 것입니다. ‘안녕’이라고 얘기하는 건 갑자기 로또를 맞아서 부자가 된다든지 벼락출세를 한다든지 횡재를 한다든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모든 만물이 원래 있어야 될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나의 만족이 다른 사람에게 고통이 되는 그런 구조가 아니라 나의 만족이 이웃의 만족이고 우리 모두가 만족하고 행복한 그런 온전한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 그림이 기가 막히게 구약성경이 얘기하는 그림과 맞아 떨어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제는 그런 안녕한 상태를 찾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샬롬이 없이 자기 자신이 많이 소유하고 큰 권력을 가지고 자기 욕망을 뿜어내면서 분출하는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다가 보니까 결국은 하나님과의 샬롬을 깨트리고 사람과의 샬롬을 깨트려야지만 자기게 이루어진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게 폭발하듯이 욕망을 터트리고 욕망이 충족되지 않으면 결코 만족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이 뭐냐 하면 병적인 만족입니다. 만족을 찾는데 샬롬이 없습니다. 자기가 거기에 도달해도 샬롬을 깨트리고 거기에 도달해서 만족을 누려도 그 욕망은 거기다 내버려두지 않아요. 거기서 더 많은걸 욕망하게 만들고 해서 결국 이 사람 속에는 샬롬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인의 최후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샬롬이라는 단어를 그렇게 놓고 보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자’라고 얘기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들도 이 평화를 저절로 누리고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고도의 영적인 싸움 속에서 끊임없이 병리적인 자아를 거부하고 건강한 자아를 자기가 지지하는데서 오는 것이고, 더 넓게 보면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 속에서 그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여기에서 결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은 것만으로는 우리가 어떤 환란을 만났을 때 그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소망이 사랑을 이어지게 하는 이런 놀라운 은혜의 부흥을 보증할 수 없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고 사는 것 자체가 성화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구원 얻은 것만 자랑하지 말고 구원을 얻은 사람으로서 그때에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과의 놀라운 평화를 나의 오늘의 삶속에서 그거를 충만하게 누리면서 사는 데에 인간의 진정한 주체성이 있고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진정한 화평을 누리고 사는 사람,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삶의 있어서 평화를 누리고 사는 사람들의 삶은 환란이 그에게 결국은 사랑을 가져온다는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어떤 나쁜 일도 결코 나쁜 일이 될 수 없고 그 나쁜 일이 반드시 그에게 좋은 일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어버리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숙제는 그렇게 하나님이 영원히 단번에 우리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를 받은 우리가 어떻게 매순간 나의 삶 속에서 하나님과의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가?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커다란 숙제인 것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 사랑이 우리에게 계속 불붙을 수 있도록 우리 스스로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면서 살아야 되고, 또 하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죄와 은혜는 양립할 수 없습니다. 죄는 은혜를 몰아내고 은혜는 죄를 추방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평화를 유지하고 살게 되면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평화가 촉진됩니까? 우리도 이렇게 사람들과 교재를 하게 되면 늘 똑같은 감정이 아닙니다. ‘그저 그랬는데 같이 한번 시간을 갖고 교재를 하고나니까 이사람 참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생각이 되면서 ‘저 사람이 나한테 저렇게 진심으로 나를 염려하고 사랑해주니 나도 그러고 싶다’라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게 교재의 증진입니다. 이것이 바로 화목의 증진입니다. 사랑의 증진이기도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다 이것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를 받고 하나님을 섬기고 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점점 더 소중한 분이시라는 것이 느껴지고 그리고 내 맘속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계속해서 뜨겁게 타오른다는 것이 경험이 되는 것입니다. 어떤 때 내 마음에 그런 것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그거를 증진하는 삶을 살아야합니다. 그리고 어느 때에 하나님과의 화목이 깨트려지는가, 어느 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마음의 샬롬이 상처를 받고 내 삶의 어느 한 부분이 힘없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는가라는 것을 보면서 죄를 경계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우리의 목회 사역도 결국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과 불화한 사람들을 돌이켜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 이미 화목하게 된 사람들을 하나님과 더욱 화목하게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래서 환란을 당했는데 환란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이 소망을, 소망이 사랑을 이루면서 결국 마지막으로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고난당하기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지만 주의 율법을 율례를 알게 되었나이다’이런 시인의 고백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져 가는 게 우리의 목회사역의 목표입니다. 그래서 조용히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과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계속 증진되어서 영원으로부터 모든 물질의 삶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샬롬에 지배를 받는 여러분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