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기는 자와 교회의 영광
“노래하는 레위 사람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과 그의 아들들과 형제들이 다 세마포를 입고 제단 동쪽에 서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을 잡고 또 나팔 부는 제사장 백이십 명이 함께 서 있다가 나팔 부는 자와 노래하는 자들이 일제히 소리를 내어 여호와를 찬송하며 감사하는데 나팔 불고 제금 치고 모든 악기를 울리며 소리를 높여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하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역하 5:12-14)
녹취자: 김재혁
솔로몬이 드디어 이제 성전을 지었습니다. 아버지가 이미 건축에 필요한 설계도부터 시작을 해서 모든 자재들을 거의 완벽하게 구비해 놓은 상태에서 이제 솔로몬이 드디어 이제 성전을 건축합니다. 거기서 완공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다윗성에 있던 법궤를 모셔오게 됩니다. 그때 제사장들과 성전에서 노래하게 될 섬기는 사람들 이 사람들이 가장 마음이 들떴을 것입니다. 법궤가 온다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웠을까요? 오죽했으면 다윗이 법궤가 들어올 때 아직 성전 지어지기 전이었지만 어린아이처럼 춤을 추면서 그렇게 좋아합니다. 그 당시에는 법궤 자체가 하나님의 임재로 여겨지던 시대였으니까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 심정을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그러나 교회에 대해서 정말 애틋하게 여기고 사랑하고 그러던 사람이 교회를 볼 때의 감격스러웠던 것과 같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아무튼 법궤가 들어옵니다. 그 때 제사장들과 그 다음에 노래하는 레위 사람들 아삽, 헤만, 여두둔 이러한 사람들이 이제 모두 나옵니다. 세마포 옷을 입고 나옵니다. 하얀 세마포 옷을 입고 이제 제사장의 복장으로 나오고 그들이 제일 먼저 하나님을 향해 찬송 영광 감사의 찬송을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읽으면서 그 깊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봤습니다. 제일 먼저 생각해 볼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들이 그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 법궤가 들어올 때 그렇게 감격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전은 말할 것도 없고 더군다나 그 하나님의 법궤가 회막에 모셔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한 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도 법궤가 회막에 있었던 그러하던 법궤가 이제 드디어 하나님의 집을 건축하고 들어오게 될 때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너무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게 말하자면 감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제일 먼저 우리가 여기서 배우는 것은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법궤가 들어올 때 그렇게 감격했던 이스라엘 백성과 같은 그런 그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와 감격이 우리에게 있는가? 예배 중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다라고 할 때 그 놀라운 감격, 어느 성도들이 주님을 만났을 때 그렇게 만나주신 것에 대한 깊은 감격, 나처럼 모든 성도들이 주님을 만나주시기를 임재의 축복을 누리기를 기대하는 그런 사모함이 우리에게 있는가 하면 반성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그런 사람이 돼야 된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임재를 너무 사모하는 그런 사람들이 돼야 된다. 그것이 우리의 예배를 드리는 동기가 되고 교회를 섬기는 동기가 되고 목회를 하는 동기가 되어야 됩니다. 그때 그 마음속에 그 하나님을 향한 깊은 울림과 감사와 이런 은혜들이 이제 충만하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들이 이 법궤를 맞으러 나올 때 세마포 옷을 모두 입고 나왔다는 것입니다. 계시록 19장을 보면 이 세마포에 대해서 설명을 합니다. 천국의 성도들이 모두 세마포를 입고 있는데 그 세마포가 결국은 성도의 의로운 행실입니다. 성도의 올바른 행실. 신약시대에 그렇게 모든 성도들이 이제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간격이 이제 폐지되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그 성소의 휘장이 찢깁니다. 위로부터 아래로. 그러면서 지성소와 성소 사이의 구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지성소는 일 년에 딱 한 번씩 대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또 속죄일에. 그런데 그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면서,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지성소 사이에 구분이 없어졌으므로 바로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되었는데 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이 제사장들이었단 말입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는 우리를 위해서,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오’라고 하면서 우리 모두가 만인이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직접 뵙는 영광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을 뵙는 그 제사장들인데 구약에서 보면 그 제사장들이 제사를 지으며 하나님을 섬길 때 세마포 옷을 입고 등장을 합니다. 그것은 결국 신약 시대에 모든 성도들이 만인이 제사장이 되어서 하나님 앞에 성결하게 살아갈 예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아무리 외모가 빼어나고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아무것도 옷을 걸치지 않고 있다면 얼마나 부끄럽겠습니까. 그리고 옷을 걸쳤는데 간신히 중요한 부위만 가리는 옷 밖에는 도저히 옷이 없어서 그렇게 있다고 할 때 ‘수치스럽다’라고 하겠습니까. 벌거벗은 것은 수치입니다. 그래서 벌거벗었다는 것과 수치가 구약 성경과 신약 성경에서 동의어로서의 사용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항상 그 세마포 옷을 입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결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 성도로서 합당한 성결한 삶으로서, 반드시 쥐어짜는 가난이나 혹은 금욕주의적인 삶이나 그걸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호사스러운 삶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도의 내적인 그 도덕 생활을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어제 정필도 목사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수영로교회 정필도 목사님하고 저하고 사역을 같이 한 것은 없었습니다. 내가 부목사 생활을 안 했으니까요. 그런데 2000대 초반에서부터 2000대 그 10년도 되기 전까지 길게 잡으면 10년 짧게 잡으면 한 6-7년 정도 매달 부산을 출장을 갔습니다. 그렇게 부산에서 나를 부르는 그 초청이 많았습니다, 거의 매달. 그래서 지금도 대한항공 탄 기록을 보면 부산 갔다 온 것이 제일 많습니다. 부산 목회자들이 나를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왜 좋아했는지 알아요? 서울에 살기 때문에 좋아했습니다. 아무리 교인들이 와도 나는 서울로 올라오면 되니까 그래서 더 좋아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냐면 수정동교회라는 곳에서 했는데 경찰이 출동할 정도였습니다. 사람들이 그 사고 날까 봐. 수영로교회에서 자주 불러주셨습니다. 가서 일주일씩 집회를 하고 그러지 않았지만 하여튼 수시로 불러줘서 내려갔습니다. 가면 목사님이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참 좋아해 주셨습니다. 아주 소중하게 여기고 꼭 밥 먹고 가라 그러고. 그러고 앉으셔서 당신의 목회 경험에 대한 이야기, 자기 성령 체험한 이야기, 수영로교회 옮기는 이야기, 그런 얘기를 그렇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모님이 또 내 책의 열독자였습니다. 그래서 가면 매번은 아니지만 그렇게 따뜻하게 대해주셨습니다. 같이 세미나도 여러 번 갔습니다.
마지막으로 같이 간 것이 일본 ‘스즈오카’에서 있었던 일본 선교사를 위한 세미나였습니다. 거기서 목사님하고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거목이, 한국교회의 한 거목 한 분이 사라졌습니다. 그런데 그 분이 정말 그 지지리도 가난한 집 안에서 태어났는데 그 당시에 경기 중학교 경기고등학교를 나와서 서울대 법 서울대 무슨 대학교인지 모르겠습니다만. 문리대학 서울대 문리대 무슨 과인지 모르겠지만 가셨습니다. 무슨 과? 철학과? 이렇게 가셨습니다. 철학과는 뭐 그때 조금 좀 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쨌든 가셨습니다. 그런데 아주 특별한 분이셨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이미 벌써 성령을 깊이 체험하셨습니다. 정필도 목사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이규현 목사님하고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이 퇴직을 하셨습니다. 한 10년 11년쯤 되셨습니다. 교인이 3만 명인데, 원로 목사님으로 물러나시는데 얼마나 대우를 잘 해드렸겠습니까. 그러니까 집회 다니실 때 늘 1등석 끊어드리고, 아파트도 마련해 드리고, 그리고 얼마인지는 모르겠는데 상당히 큰 금액을 목사님을 퇴직할 때 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10년 뒤에 통장에 10원도 없었다고 합니다. 10년 동안 다 나눠주고 이렇게 쓰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규현 목사님 하시는 이야기가 자기가 부임을 했을 때, 담임 목사님, 원로 목사님이 계신 방 안 우연히 들어가게 됐는데, 사다리 같은 것이 이렇게 옆에 이렇게 있더랍니다. 철봉이 이렇게 삼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 있더랍니다. 그것이 뭔가? 운동기구는 아닌 거 같고. 그것이 기도할 때 붙들고 하는 손잡이랍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는 1단을 붙들고 무릎이 너무 아프면 좀 일어나서 2단을 붙들고, 너무 아프면 일어서서 제일 위에 단을 붙들고 이제 기도를 하신 것이랍니다. 교인들이 그 목사님을 그렇게 많이 섬겼습니다. 그런데 다 받으셔가지고 다 나눠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0년이 지났는데 그 금액은 얘기를 안 하시나 그럼 대충 짐작은 갑니다만, 그런데 그것을 다 이 사람 저 사람 해가지고 다 나눠준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성도의 행실입니다 행실. 성결하고 의로운 행실. 그래서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만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성결하게 사는, 가난하다고 성결하게 사는 것은 아니고 부유하다고 불길하게 사는 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아리마대와 같이 그렇게 부자이면서도 성결하게 하나님을 섬긴 사람이 있고, 가난해도 탐욕스러운 사람이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법궤가 들어올 때 입었던 그 세마포의 행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우리가 신약시대의 제사장들로서 어떠한 행실로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외모의 모습만이 아니라 겉과 속이 모두 일치하는, 남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시범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잃지 않는 경건으로부터 나온, 지난주에 설명한 ‘샬롬’, 하나님과의 ‘샬롬’에서 나오는 그런 일체의 세상 것들에 대한 사랑 없음. 그러면서 그 하나님 앞에서 순수한 동기로 살아가는 성결한 생활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사람들이 한 일이 그 법궤가 들어올 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꿈에도 그리던 성전이 지어지고 법궤가 들어올 때 사람들이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따라 불러야 되는 것처럼 그렇게 노래를 불렀겠어요? 아닙니다. 가슴이 막 터질 것 같은 그런 감격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성결한 삶을 세마포를 입음으로써 하나님 앞에 언약에 대해 다시 충성하는 마음을 갖고 가슴 깊은 곳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격을 가지고 터져 나오는 찬양을 드리게 되었으니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목회의 동기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하는 행위 그 자체가 독솔로지(Doxlology)가 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송영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향한 깊은 감격과 찬양이 있을 때 목회하는 행위와 모든 섬기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양이 꽉 찼을 때에는 섬기는 것이 춤추는 것 같습니다.
사실은 제가 가지고 있는 약점 중에 하나가 춤을 못 춥니다. 그리고 남이 춤을 추는 걸 봐도 오글거려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이 결혼을 해 집에 왔는데 막 춤을 추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고등학교 때부터 선비라고 스스로 생각했기 때문에 선비는 저렇게 몸을 가볍게 놀리는 게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뭐 너무 춤을 잘 추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이렇게 생각해 보니까 춤을 추는 것도 뭐가 씌워야지 할 수 있는 것 같았습니다. 결국 그걸 못해본다는 이야기는 무엇인가 한번 씌워져야 될 것이 안 씌워진 것입니다. 뭔가 2프로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쨌든 그렇게 만약에 춤을 추는 것처럼 그렇게 그 춤을 출 때는 완전한 자율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흥에 귀여워서 스스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똑바로 뭐 춰 이러고 추는 건 그건 군대에서 기합이지 춤이 아닙니다. 춤은 그냥 괜히 둥두둥 둥두둥 그러니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어깨가 들썩들썩하면서 이렇게 나오는 게 춤이잖습니까. 그게 섬김이 돼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지만 그렇게 그 장구 소리가 들릴 때 이렇게 어깨가 아무도 시키는 사람이 없는데 어깨가 들썩들썩거리고 서로 막 박수를 치고 막 빙글빙글 돌고 싶고 그 관광버스에서 그 아줌마들이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하고 싶으려면 어떻게 돼야 되겠어요? 흥이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이 흥이 이 안에서 꽉 찰 때 그게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입니다. 그것이 꽉 찰 때 우리의 섬김은 춤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그런 사역을 열린교회를 하면서 참 맛을 봤습니다. 춤을 췄습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를 하면 여러분들은 안 믿겠지만, 일 년에 휴가가 칠일이었습니다. 나는 한 번도 휴가 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역자들도 절반 이상이 그 칠일을 다 안 썼습니다. 그러면 나오라고 내가 막 종주목을 댔냐 아니 그러지 않았습니다. 자기 자신들이 자기 사역 속에 들어가면서 춤추듯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굳이 관여할 필요가 없습니다. 사람이 춤출 때는 그냥 놔둬야지 그거 틀렸어 틀렸어 자꾸 그러면 그 춤에 흥이 깨집니다. 그 전통이 아직 남아서 일단 검증만 되고 그 다음에 자기가 신앙에 입각해서 마음속에서 감사와 찬송이 나오면 자율적으로 하는 전통이 열리교회에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진짜 나는 그때까지는 그런 비유를 몰랐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진짜 사역이 아니라 춤추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뭐 춤을 모르니까 그것에 대하여는 말을 못하지만, 이제 나는 거꾸로 사역을 보면서 춤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걸 이제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춤을 추잖아요. 니체도 그러한 얘기를 하는데 춤춰보지 않은 사람은 약간 비정상적인 사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가 진짜 춤을 좋아했는지는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춤추는 것을 어떻게 설명하면, 이것이 손을 올리고 다리를 올리고 그리고 몸을 빙글빙글 돌면서 춤을 추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면 중력을 이겨야 됩니다. 원래 힘을 쭉 늘어뜨리고 있으면 우리가 코끼리 세 마리를 짊어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중력이. 이렇게 해가지고 손발이고 뭐고 다 들어주고 어깨까지도 똑바로 세울 힘이 없이 쭉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말하자면 중력의 삶의 무게입니다. 그런데 그거를 그 중력을 이기면서 발을 치켜들고 손을 들고 하면 춤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위한 감사와 찬송이 꽉 차게 될 때, 그때 주님을 섬기는 것은 춤추는 것처럼 즐거운 것입니다. 그래서 이게 춤추지 않는다면 무슨 흥이 있을까 할 것처럼 주님을 섬기면서 사는 것이 자신의 내적인 고백이 되면서 그 속에서 신명이 나는 것입니다. 그런 그 섬김을 섬김의 원리를 우리가 보여 준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결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마음에 감사와 찬송이 차서 제금과 비파와 수금과 막 이런 악기를 들고 하는데 그게 무거웠겠어요? 아마 거의 무게를 느끼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온 마음을 다해서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찬양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그 춤추는 것 같은 주체적이고 자율적이고 행복에 겨운 삶이 결국은 우리의 내면의 세계에서 시작된다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우리의 마음에 꽉 차는.
그래서 이제 정필도 목사님이 그런 이야기를 글에다가 쓰셨습니다. 자기도 어떤 때는 마음이 칼칼하고 괴로울 때가 있다. 목회하는데 왜 괴로울 때가 없었겠습니까? 또 뭐 한 번 만나서 얘기하시는데, 꼭 토요일에 교인이 전화를 해가지고 목사님 아무개 집사와 아무개 권사가 목사님을 더럽게 씹고 다니고 있습니다. 꼭 토요일 날 저녁 때 전화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도 보면 설교 준비하다가 막 정신이 산란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마음이 산란해지 때문에 아예 산꼭대기로 올라가서. 나도 거기 가서 기도했었습니다. 삼각산 얘기하시는데 언제 한번 여러 교역자들 한번 내가 데려갈 용의가 있습니다. 지금 다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삼각산에 가면 말하자면 기도 바위가 있습니다. 낭떠러지 바로 앞에 나도 서봤습니다. 응답 바위라고 그러는데 거기 무릎을 딱 꿇으면 인천서부터 육군사관학교까지 한 번에 보입니다. 그런데 거기서 기도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이렇게 너무 가슴이 아파서 이렇게 매달려 기도하다 혹시라도 실수를 해서 떨어져 죽으면 누가 날 보고 자살했다 그러겠는가? 주님 앞에 기도하다 죽었다 그러겠지. 그래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싶지 않다.’ 그러고 올라가셔서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이 해결해 달라고 그렇게 몸부림 치면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그런 갈망과 찬양이 있을 때 삶은 춤추는 것처럼 따라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되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말씀의 은혜를 받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다시 마음의 기름을 성령의 기름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로운 처녀처럼 사는 것입니다.
제가 세 가지 얘기했습니다.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그다음에 거룩한 행실의 삶을 살고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감사와 찬송이 가득 차서 섬김이 춤추는 것처럼 되게.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 이제 마지막 절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그 때에 여호와의 전에 구름이 가득한지라 제사장들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가득함이었더라”(역하 5:13-14) 그랬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응답이에요. 하나님의 응답입니다. 천상의. 이것은 뭐냐 하면 히브리어로 ‘쉐키나’라고 얘기하는데 ‘샤칸’ 하나님이 거주하신다. 그리스어로는 ‘에스케노스앤’이라고,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할 때에 그 ‘거하시다’라는 단어도 사실은 ‘샤칸’에서 나옵니다. 원래 ‘텐트를 이렇게 친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건 뭘 의미하냐면 여러분 기억이 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제가 세 개로 분류하면서 본체적인 영광, 발산적인 영광, 효과적인 영광이라고 그러는데 그 발산적인 영광입니다. 어느 특정한 장소에 하나님이 계실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특정한 장소에 당신이 살아 계시다는 놀라운 증표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구름이 꽉 차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임재하신 표였고 영광이 그 여호와의 전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모두 다 엎드리게 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부복하며 여호와는 지존하신 하나님이시니 우리는 그 앞에 정말 티끌 같은 존재로서 부복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교회에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찬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은 하나님의 교회의 영광이 가득 차면 하나님이 그 교회의 영광이 가득 차 하나님이 거기 계시다는 증거들이 수 없이 나타난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을 통해서, 교회를 통해서, 이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되는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하나님은 영광이시니 천하는 그 앞에 잠잠할 그런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우리가 일하면 일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일하는 것보다도 더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교회에 가득 채우셔서 주 여호와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지를 거기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이 깨닫고 주님 앞에 부복하는 것 그게 교회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예배와 찬양과 목양과 모든 섬김 속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러면은 그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큰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거기서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수없이 배출되면서 그러면서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을 향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들, 성결한 삶을 사는 사람들 감사와 천상의 마음에 꽉 찬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를 맞이할 때 하나님은 그 응답으로 교회에 당신의 영광을 가득 채우셔서 여러분들이 목양하는 부서에서 또 섬기는 여러분들의 사역 속에서 하나님의 이런 복이 넘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