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 아론은 회막안 증거궤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여호와 앞에 항상 등잔불을 정리할지니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라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순결한 등잔대 위의 등잔들을 항상 정리할지니라”(레 24:1-4)
녹취자: 김정호
이렇게 환영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가르쳐주신 성막을 관리하는 방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성막은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주님이 계시해주셨고 그 성막은 일종의 이동식 성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도 항상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신 것입니다. 가장자리에서는 울타리가 흰 천으로 둘러져 있었고 이 성막은 직사각형 모양의 방이었습니다. 앞에 있는 큰 방은 12평쯤 되었고 뒤에 있는 작은 방은 6평쯤 되었는데 앞에 있는 방을 성소라고 불렀고 뒤에 있는 방을 지성소라고 불렀으니 이는 1년에 한 차례씩 오직 대제사장만 들어가서 속죄의 제사를 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앞에 있는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는 탄탄한 커튼이 쳐져 있었고 그것은 양쪽에서 황소 두 마리가 잡아 당겨도 찢어지지 않는 단단한 천이었습니다. 성막에 바깥은 해달의 가죽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을 맞고 햇빛을 받았으니 거무튀튀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멀리서 볼 때 그 성막은 아무것도 화려한 모양이 없었습니다.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막을 중심으로 모든 지파들이 각기 진을 치게 되었고 그 성막은 거무튀튀하고 아무런 아름다운 것이 없는 겉모습을 가졌지만 그 속에는 아주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청색, 홍색 실과 각종 금으로 된 기구들이 거기에 있었고 그것들은 아주 아름다운 모양이었을 것입니다.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회막을 지으라고 말씀하셨을 때 창문을 내도록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 성막은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 있었으니 캄캄한 어둠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불빛은 오직 등잔불로만 밝히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무슨 뜻이었을까요? 분명히 여기에는 하나님이 무엇인가 우리의 구속에 대해서 그리고 미래에 있을 교회의 영광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가르쳐주고자 하신 것이 분명한데 그 뜻이 무엇이었을까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저는 하나님이 성막에 창문을 내지 않게끔 설계해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가르침 중에서 어떤 한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시기 위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자, 한번 상상의 날개를 펴보십시오. 가죽으로 덮여 있어서 캄캄한 그 어두운 성막에 들어갔고 제사장은 거기서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그런데 어떠한 빛도 들어오지 않습니다. 오직 등잔불에서 비치는 그 빛의 도움을 받으며 거기서 거룩한 옷을 입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우리에게 보여주는 등잔불,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바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계시의 빛을 따라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계시의 불빛이 없으면 캄캄한 어두운 성막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불빛이 비침으로써 아름다운 모든 성막 안의 광경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인식하며 제사장들은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영광이 무엇입니까? 혹은 수많은 정치인들이 교회에서 나오는 것이 교회의 영광이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계시의 영광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영광입니다.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가득 차야지만 그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전심으로 올바르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교회의 역사를 보면 고대의 건축술이 발달하고 각각 문명의 사조를 따라서 이런저런 교회당이 건축술의 발전을 보였지만 그 건축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래프와 교회의 영적인 그래프는 일치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로 갔습니다. 베드로 성당을 짓고 화려한 성당을 지을 때 교회는 영적으로 퇴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문제는 교회 밖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미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이 가득 차게 하는 것,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가르침은 진리의 가르침이어야 하고, 그 가르침의 빛이 교회에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역할이 그 누구보다도 중요한 것입니다. 그 목회자들을 교육하는 신학교 안에는 정말로 진리의 빛이 찬란한 광채로 빛나는 장소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끊임없이 진리의 빛으로 연단되어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저 세상에서 들을 수 있는 연설 따위들이 교회에서 판을 치고 예배를 드리고 가도 성도들이 무엇인가 깨달은 진리가 없이 교회를 떠난다면 일주일동안 삶은 살아보나 마나 이미 세상에 패배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문제는 우리에게 정말로 외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진리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있는가 보는 것입니다. 피를 토하는 설교자가 있을 때 교인들은 눈물을 흘리게 되고, 눈물을 흘릴 때 비로소 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하여 땀을 흘리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선지학교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해 훈련받는 동안에 열심히 하나님 앞에 학문의 빛을 듬뿍 받은 사람들이 될 수 있도록 진리를 탐구하는 일에 온전히 헌신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존경하는 17세기 청도교 신학자 가운데 존 오웬이 있습니다. 그분은 복음주의의 신탁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당시 최고의 학문과 경건을 겸비한 대학자였습니다. 영국에서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도 그는 매우 중요한 개혁파 정통주의의 한 획을 그은 신학자였습니다. 저는 평생 그분을 연구하며 살아왔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서 기독교를 이해하려고 힘써 왔습니다. 그는 크롬웰 치하에서 옥스퍼드의 총장이 없는 부총장이 되었습니다. 총장은 그 당시에 크롬웰이었는데 그는 정치의 최고의 수○(09:36)이었으니까 정신없이 바빴고 (존 오웬이) 사실상 옥스퍼드를 책임지고 있었고 부총장으로 부임하면서 대대적인 개혁을 했습니다. 실력 없는 교수들을 내보내고 실력 있고 경건한 교수들을 보충하고 무너진 학교의 재정을 귀족들의 모금을 통해서 충당해서 교회의 재정을 건전하게 하고 마지막 한 일이 있습니다. 공부 안 하는 학생들을 위해서 감옥을 만든 것입니다. 공부 안 하고 대드는 학생들을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여러분들은 지하에 감옥이 생긴다면 갇힐 사람일까요? 자유롭게 학교에 다닐 사람일까요? 내가 총신(대학교)에 가서 지하에 감옥을 만들어서 공부 안 하는 사람들을 가두고 밥도 주지 말아야 된다고 했습니다. 학생의 사명은 공부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 한다고 진실한 종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 진실한 종이 된다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들어가는 것처럼 희귀한 일입니다. 많이 알아도 진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이 알지 않는다고 해도 그가 진실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학문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도들에게 가장 괴로운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들을 내용이 없는 설교를 듣는 것, 목회할 인격이 되지 않는 사람에게 목양을 받아야 하는 것, 그것이 교인에게 가장 쓰라린 고생입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부지런히 공부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 공부하라는 이야기를 교수님들이 하면 식상합니다. 교수님들이 원래 하는 일이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일입니다. 저는 목회자로서 평생을 공부해온 사람으로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공부해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공부해야 하느냐. 신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저렇게 공부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주위에서 생각할 정도로. 왜 웃습니까? 저는 하나도 우습지 않는데. 저는 웃는 여러분들이 우습습니다. 그렇게 공부해야 됩니다. 요즘이 어느 시대인데 공부 안하고 목회하려고 합니까?
제가 34세에 교수가 되고 열심히 학생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 학생이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이런 책을 읽으라고 끊임없이 가르쳐주셨는데 그 책을 모두 사서 읽었습니다. 한 학기에 한 키였습니다. 책을 세워서 한 키가 아니라 눕혀서 한 키를 읽었다고 합니다. 그게 제가 읽으라고 가르쳐준 책입니다. 한 학기에 한 키씩은 책을 읽어야 됩니다. 그래서 레포트를 내주면 앞, 뒤 읽고 글짓기 하듯이 휙 던지고 교과서도 안 읽고 그러면 안 됩니다. 공부하는 요령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학교 다니는 동안, 학기 중에는 어떻게 하든지 그 과목을 모두 끝낼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학기 중에는 학교공부에 전심을 다해야 합니다. 교회 섬기는 것은 마음을 다해서 섬기되 쓸데없는 시간을 교회에서 허비하면 안 됩니다. 책상에 파묻혀서 공부해야 합니다. 학기 중에는 그 과목을 열심히 공부해서 그 과목에 대한 확실한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학기 중에 모두 레포트를 끝내고 방학을 하면 그때부터는 자기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공부는 최소한의 공부입니다. 그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늘 여러분들에게 나눠주는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에 기록되어 있고 더 자세한 것은 「신학공부 나는 이렇게 해왔다」라는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말씀드립니다. 지금 이 시절에 철저하게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학기 중에는 학교 교과를 공부하고 방학이 시작되면 그날부터 즉시 목사로서, 목회자로서 무슨 공부를 해야 하는지를 파악하면서 부지런히 공부해야 합니다. 영어,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부터 시작해서 기본적인 철학, 역사, 그리고 문학, 문화에 대한 이해를 공부해야 하고 인문학에 대한 공부 없이 현대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요즘 제가 니체와 함께 약 6개월을 보내고 있는데 현대 철학을 이해하지 않고 현대인의 사상을 이해하기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 역사와 철학들을 끊임없이 공부하면서 오늘날의 세계의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구도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에서 외치는 설교가 예수 믿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공허로운 외침이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가 예배시간에 와도 귀담아 들을 수 있는 어떤 접촉점과 진리가 그 안에 담겨 있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전으로 알려진 기독교의 고전들로부터 시작해서 현대 신학자들에 이르기까지 탄탄하게 공부를 하고 열심히 여러분들의 경건과 목회에 활용하고 사용해야 합니다. 많은 책들을 놓고 공부하지만 그 모든 책들 한 가운데는 오직 한 권의 책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공부를 하되 많은 책들의 사람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한 권의 책이 바로 성경입니다. 매일 매일 성경을 읽고 그 성경 속에서 자신과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진리의 말씀이 깊이 감동을 받고 그러한 영성이 학문과 함께 결합이 될 때 거기서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설교가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건전하고 올바른 판단을 가지고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는 미래의 지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나는 요즘 학생들이 공부하지 않는 것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프고 우리 자녀들의 미래의 세대의 교회가 걱정이 됩니다.
제가 총신의 MDv에 입학할 때 20대 1이었습니다. 1,200명이 원서를 내고 그중에서 60명을 뽑는 것입니다. 지금은 1대 1을 간신히 넘었습니다. 우리 아들이 신학교에 들어갈 때만 해도 3대 1, 4대 1이었는데 20대 1이 1대 1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학생들의 수준이 말할 수 없이 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무슨 의미냐면 그때의 신학생들이 공부했던 것보다 지금 더 많이 공부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면 출발선 자체가 다릅니다. 어떻게 똑같겠습니까? 대학 나온 사람 20명 중 1명을 뽑은 학교 학생과 1명이 와서 1명이 뽑힌 학교가 어떻게 똑같은 교육의 출발선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때 60명 안에 들어왔던 학생들은 그중 90% 이상이 영어책을 자유롭게 읽었습니다. 클래스에 들어오면 학생들을 한 반에 모아놓고 교육을 했는데 3분의 1 정도는 영어 원서로 강의를 했고 시험도 그렇게 나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영어 한 줄도 못 읽습니다. 영어는 그만두고 한글로 된 글도 안 읽으려고 합니다.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십시오. 집에 가서 책꽂이를 쭉 보십시오. 학생들이 교재도 사지 않습니다. 그거 어떻게 합니까? 먹을 건 먹으면서 교재도 안삽니다. 3년 학교를 다녔다는 사람이 집에 갔는데 책이 없습니다. 빌려서 쓰고 도서관에서 빌려서 휙 던져놓고 제대로 읽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양심적으로 집에 가서 책을 한 권씩 펴보면서 끝까지 읽은 책을 발밑에 쌓아놓고 3학년이 된 여러분들이 도대체 책을 얼마큼 읽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쌓이는 것이 몇 권이나 읽었는지 찾아보십시오. 양심적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회개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의 사명은 공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공부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자신의 책 속에서 이야기했습니다. “책 읽기가 싫으신가요? 아마 목사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목회의 소명이 아닐 것입니다.” 왜입니까? 목회자는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진리의 등잔불을 밝히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그 소명이 있으면 당연히 흥미도 있는 것입니다. 그 일이 하기 싫은데 그게 어떻게 소명일 수 있겠습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간절히. 여러분들은 묻고 싶을 것입니다. 목사님은 얼마나 공부하기에 그럽니까? 제가 뭐하러 여러분들에게 하겠습니까? 그런데 확실한 것은 신학대학원 3년을 다니면서 3번을 학교에서 쓰러졌습니다. 영양실조였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제가 올해는 아직 코로나가 끝나지 않아서 식사를 대접을 못했습니다. 그래서 맛있는 간식을 여러분들에게 나눠주기 위해 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왜 이렇게 신학교를 다니면서 밥을 한 끼씩 사는지 아십니까?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너무 굶주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에 갔는데 돼지고기를 상추쌈에 이만큼 주는 겁니다. 이게 뭐냐고 했더니 졸업한 지 20년 된 선배들이 와서 한 턱 내는 거라고 했습니다. 그때 그것을 맛있게 먹으면서 제가 이다음에 목회를 해서 교회가 능력이 되면 매년 후배들에게 가서 밥을 사줘야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20년 가까이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할 것입니다. (박수)
그런데 그런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목회를 하는데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결국 그렇게 했습니다. 신대원 다니던 시절에 저는 나 자신을 채찍질하면서 안 자려고 애쓰고 몸부림쳤습니다. 5시간 이상 자지 않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요새는 나이가 드니까 5시간만 잤으면 너무 좋겠습니다. 불면증에 시달립니다. 약을 먹어야 합니다. 다 한때입니다. 휴교하고 그런 땐 하루에 15시간 공부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저는 오늘날 목회를 위한 지식들을 쌓았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 열렬히 공부하셔야 합니다. 공부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 불충한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여러분들을 위해 기도하고 어머님, 아버님, 장로님, 권사님들이 그렇게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며 여러분 손에 꼬깃꼬깃한 장학금을 쥐어주고 교회에서 낸 헌금으로 장학금의 지원을 받고 교수님들이 불철주야 연구하시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칩니다. 이런 좋은 여건이 어디 있습니까? 중국이나 동남아 가서 뜨거운 선교의 열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교육받을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 속에서 여러분들은 치열하게 공부해서 교회를 진리의 빛으로 밝히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죽했으면 제가 총신의 2008년, 2012년 두 번 개강 수련회를 갔습니다. 공부하라고 강력하게 촉구했는데 성령이 역사하셨습니다. 학생들이 뒤집어졌습니다. 그때 제가 이야기했습니다. 공부하다가 쓰러지면 열린교회에서 책임진다. 제가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 걸고 다짐한다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학생들이 제 수련회가 끝나고 라틴어 수업을 신청했는데 15명 들어오던 강의에 75명이 꽉 찼습니다. 문병우 교수님이 라틴어를 가르치러 들어왔다가 학생이 많은 것을 보고 다시 나갔습니다. 자기 학생이 이렇게 많을 리가 없다고. 학생이 뛰어나와서 “교수님 어디 가세요?”했습니다. 교수님이 교실을 잘못 찾은 것 같다고 했더니 (학생이) 여기가 맞다고 했습니다. 75명이 수강신청을 해서 라틴어를 공부했습니다. 제가 라틴어 꼭 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진짜 공부하다가 쓰러지는 학생들이 나왔습니다. 교회가 책임져 줄 테니 공부하다가 어떤 병이 걸려도 교회로 연락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정말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 이 등잔불을 무엇으로 밝혔을까요? 이것이 성경에 보면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나옵니다. 제가 어느 해인가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다가 너무 감동을 받아서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 감동이 한 6개월은 간 것 같습니다. 여기에 찧어낸 순결한 감람유라고 하는 그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 ‘쎄멘자이뜨 자크 까띠뜨’라고 나옵니다. ‘쎄멘’은 기름이고 ‘자이뜨’는 올리브입니다. ‘자크’는 pure 순결하다는 뜻이고 ‘까띠뜨’는 때리다, 치다, 부수다의 수동형 분사입니다. 여기서 기름을 짜는 것입니다. 기름을 만들어서 그 기름을 순결한 기름을 가지고 계속해서 등잔불을 밝히는 것입니다. 기름이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심할 여지없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신약시대의 교회가 충만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말씀이 교회에 가득차서 찬란하게 비출 것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입니다.
개혁신학에 있어서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사이에 관계는 확고합니다. 그게 무엇이냐면 스쁘리뜨 스꽁 베르보,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입니다. 말씀과 상관없이 성령은 역사하지 아니하시고 말씀이 가르쳐지는 곳, 말씀이 선포되는 곳, 말씀이 깨달아지는 곳, 거기에 성령이 함께 하셔서 사람을 변화시키고 능력을 주시고 순결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윌리엄 바클레이는 자기의 책 속에서 말합니다. “한 목회자가 유능한 행정가일 수도 있고 뛰어난 문장가일 수도 있고 뛰어난 조직을 만드는데 탁월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아니라.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성령에 깊이 사로잡힌 그런 신학생의 모습이 30년 전 신학교의 모습과 오늘날의 모습은 사뭇 다릅니다. 자꾸 옛날이야기를 하는 것 자체가 늙은이가 되었는다는 뜻인지 모르겠지만 안타까운 마음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채플시간에는 온 예배당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심지어 저는 강의시간에도 마지막 강의를 끝내고 마지막 기도는 통성기도로 강의를 마쳤습니다. 거의 매시간 온 강의실이 눈물바다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그런 것들을 점점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들은 많은데 무엇인지 하나님을 깊이 찾고 거기서 성령의 큰 은혜를 경험하여 자신이 정결해지는 그런 경험들이 너무 드문 것입니다. 교회에도 그런 뜨거운 열정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의 사람이 아닌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그런 성령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 성령의 불꽃으로 주님의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찬란하게 비추는 사람들이 되셔야 합니다.
결국 이렇게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들이 되는 것, 학문이 신령한 세계로 가는 약도를 그려줄 수는 있지만 진짜 그 세계에 도달하여 그 천국의 향취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것은 지식이 아니라 성령님입니다. 그 충만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는 일평생 영적인 싸움 속에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영적인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가 없습니다. 참 이상합니다. 설교하러 올라가면 어떤 날은 수천 명이 예배당을 가득 메워도 내가 그들을 꽉 잡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어떤 때는 50∼60명밖에 안 모였는데 내가 이들을 붙들고 있지 못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것이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가득해서 주님의 권세를 충만하게 느끼는 설교의 시간과 그렇지 못한 시간의 차이입니다. 이런 성령을 누구에게 주십니까? 그것은 바람이 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임의대로 주십니다. 그런데 대개 하나님이 그 은혜를 갈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십니다. 그래서 간절히 성령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찬양)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주님을 알기를 간절히 원하네
내 생애 가장 귀한 것 주 사랑함
하나님을 아는 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성령의 가장 큰 열매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뜨거운 성령의 은혜 속에서 감격이 있는 신학 수업을 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이 부분이 제 마음을 깊이 울렸습니다. 그것은 ‘찧어 낸’이라는 단어입니다. 그것은 히브리어 성경에 ‘까띠뜨’라고 되어 있습니다. ‘얻어맞다’, ‘때리다’의 수동태 분사입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구약에서 감람유를 내리는 방법을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감람은 아시다시피 올리브입니다. 올리브 씨앗에서 기름을 짭니다. 그러면 커다란 연자 맷돌 같은 곳에 올리브를 잘 다듬어서 기름 짜기 좋게 펼쳐놓고 소나 사람이 연자 맷돌을 돌립니다. 그러면 그 돌멩이가 올리브를 밟고 지나가고 찧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올리브가 다 깨집니다. 가장자리에는 홈이 파여 있습니다. 거기서 자연적으로 기름이 흘러나옵니다. 노란 기름이 흘러나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쪽에 모여서 밑에 있는 용기에 떨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감람유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감람유를 많이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찧어진 감람 찌꺼기들을 모두 모아서 천을 깔고 그곳에 넣고 프레스로 누릅니다. 오렌지를 짜듯이 착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름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기름은 양은 많지만 순결한 기름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들은 허드레 용도를 쓰고 진짜 중요한 곳에 쓰는 기름은 그렇게 눌러서 짜낸 착즙된 기름이 아니라 부서진 올리브 열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기울여서 흘러나오는 맑은 기름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것을 ‘쎄멘자이뜨 자크’, ‘순결한 감람유’라고 부릅니다. 그것을 성막에서 쓰게 하신 이유는 착즙된 기름은 불순물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고 밝지 않습니다. 좋은 기름으로 등잔불을 켜야 냄새도 안 나고 그을음도 없고 불빛도 더 환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착즙된 기름은 하나님의 성막을 밝히기에는 적합하지 않는 기름이라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순결한 기름을 감람을 찧어 낸 순결한 기름으로 등불을 밝히도록 지정하신 것입니다.
결국 이것이 보여주는 것은 교회에 하나님의 말씀의 찬란한 등잔불빛이 비추고 성령으로 그 불빛이 계속 타오르게 하기 위해서는 깨어지는 감람이 있었던 것처럼 똑같이 목회자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있는 말씀이 되어서 성도들에게 심금을 울리는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목회자의 자기 깨어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점점 사라져가고 있는 단어가 바로 자기 깨어짐, 통회, 애통, 감격, 경건한 슬픔, 애곡 이런 단어들입니다. 우리 선배들이 늘 입에 달고 쓰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자기 깨어짐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 목회자 자신이 깨어지고 그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되고 단련된 학문 속에서 탐구한 말씀으로 선명한 진리를 확신 있게 전파할 때 그 말씀이 약이 되어서 병든 영혼을 고치고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학교 다니는 학생으로서 하나님 앞에 마음이 아프도록 깊이 통곡하며 자기가 깨어져본 경험이 언제입니까? 신학교 올 때는 그래도 그렇게 종종 마음의 부흥회가 있었는데 신학교 들어오고 나서 1학년, 2학년, 3학년, 4학년 이렇게 지나가면서 점점 그렇게 진실하게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했던 경험들이 사라지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앞으로 어떻게 진실한 종이 될 수 있겠습니까? 어느 청교도가 말했습니다. 입에 나온 말은 기껏해야 잘하면 상대방의 머리까지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가슴에서 나온 말은 가슴까지 도달할 수 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간 적이 있어야 합니다. 깨뜨려진 적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없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호세아 1장 4절에 보면,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이 호세아에게 임하니라’ 할 때 ‘에게’라는 단어가 히브리어 성경에 ‘왜’로 나옵니다. ‘떼일라뜨 디베르 아도나이 붸 호쉐아’라고 나옵니다. 여기서 ‘붸’는 ‘into’입니다. 호세아의 심령 속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머리로 들어왔다가 입으로 나가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호세아의 심령을 뒤집으며 그를 변화시킨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그는 배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의 심정으로 애절하게 그렇게 탄식하듯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밧모섬에 갇혔던 요한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인봉되어 있는 것이 환상으로 나타났습니다. 아무도 인봉을 뗄 사람이 없다. 하나님의 뜻을 알 사람이 없다고 할 때 노사도 요한은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거기 ‘울었다’는 단어가 ‘통곡하다’입니다. 흐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해달라고 부르짖었던 것입니다.
그런 자기 깨어짐이 쌓이고 쌓이면서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들의 인격과 삶 속에 피와 핏줄처럼 용해되어 결국 진리의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사람의 말을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헬무트 틸리케라는 독일의 신학자는 말했습니다. “목사가 6일 동안 진리의 말씀과 더불어 몸부림치며 살 때 주일 그의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될 수 있다.” 깊이 자기가 깨어지는 경험을 하고 주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많이 기도하십시오. 깨어지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님의 교회를 밝히는 찬란한 진리의 빛이 여러분을 통해 가득해지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