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본질적 요소의 회복: 복음과 능력
녹취자: 이은정
제가 1988년도에 대학에 교수로 임명이 되고, 한 95년도까지 대학에 있다가 이제 뜻이 있어서 사직하고 열린 교회를 개척하게 됐습니다. 개척하고 나니까 갑자기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꽤 많이 받던 연봉도 다 없어지고 교회 들어오니까 한 달에 100만 원씩 주겠다.(그랬습니다.) 개척을 했으니까 100만 원밖에 받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미국을 가려고 그래도 이제 전부 다 그 무직자로 분류가 되가지고 심사가 되게 복잡하고 그래서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기도를 많이 했습니다. 그때 쓴 책이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입니다.
근데 그 책이 얼마나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느냐면. 학교 퇴직하고 일 년 동안 책을 인세 들어온 게 전에 있던 교수의 일 년 치 연봉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80세까지 찍혔습니다. 그래서 기념 에디션을 냈는데, 제가 왜 이 말씀을 드리냐면 지금이나 그때나 사람들은 예배에 대한 굉장히 많은 갈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근데 우리가 그러한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예배에 대한 간절한 갈망을 채워주지 못하기 때문에 또 어떻게 채워줘야 할 것인지를 잘 모르기 때문에 성도들이 예배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실제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이것은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여튼 나오자마자 한 오만 권 정도가 확 팔려나가고, 서점에 있는 주인들이 책이 가장 안 팔리는 유월에 이 책을 사러 사람들이 꾸역꾸역 서점에 오면서 자신들이 다른 책도 팔 수 있었다고 서점 협회에서 감상할 정도였습니다. 굉장히 커다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책을 잘 썼기 때문에 충격을 주었다기보다는 이렇게 사람들이 별로 주목하지 않던 주제에 대해서 던졌고, 그것이 가장 실제적인 자신들의 신앙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사실 엄청난 독자들을 이 책에 빨아들일 수 있었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지금까지 한 십오만 부 정도에 찍혔습니다.
근데 지금 그러면 그게 해소가 됐느냐? 하면 그게 아닙니다. 지금도 여전히 특히 코로나시기를 거치면서 예배에 대해서 근본적인 것부터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코로나 이전까지는 예배에 대한 비교가 없었습니다. 자기는 예배만 드렸는데 이제 작은 교회들은 그런 시설도 안 돼 있고, 인프라도 안 돼 있고 그다음에 원격으로 예배를 드리다 보니까 자꾸 옆에 다른 교회들의 예배가 뜨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제 다른 데는 어떻게 예배드리고 있는지에 대해서 눈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제 교회는 이전에 맛보지 못했던 아주 굉장히 중요한 하나의 국면을 맞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아직까지도 코로나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포스트 코로나에 성도들이 어떻게 반응하게 될지에 대해서 아무도 모릅니다. 예측을 못 합니다.
한쪽에서는 아주 비관적인 예측을 내놓습니다. 뭐냐 하면, 이미 예배가 무너졌기 때문에, 이제 결코 돌아오지 않는 교인들이 많이 있을 거고. 인터넷을 떠돌면서 예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잘 들리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기도 하고, 한쪽에서는 반대로, 그렇게 오랫동안 이 교회를 못 나오면서 성도의 교제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면서 오히려 이것이 기폭제가 되어가지고 더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모이게 되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보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저희 교회 같은 경우는 코로나 나기 전에 열린 교회 설교를 정기 구독하던 사람의 세 배 정도가 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코로나 시대 때에 정말 행복하게 목회를 했습니다. 책도 좀 몰입해서 쓸 수 있었고, 너무 감사하게 지냈습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은 이런 기회를 통해서 우리들이 예배에 대해서 생각하고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이 예배에 대한 근본적인 회복을 우리가 맨날 이야기하지만 근본적인 회복을 우리들이 다시 한 번 꿈꿔봐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범위가 넓으니까 이제 범위를 좁혀서 요한복음 4장 24절에 보면,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대화를 하시면서‘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옛날 성경에,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니라’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저는 신약 성경에서 예배에 대해서 가르쳐주는 아주 핵심적인 교훈이 요한복음 4장에 담겨 있다고 봅니다. 신학적으로 아시는 바와 같이 “하나님은 영이시니”라고 하는 이 부분은‘하나님이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알려주는 사실 단 두 개의 신구약 성경 구절인데 두 개, 하나는 에디아 셀 에디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하는 것과 ‘영’이시라는 것, 이 두 개만이 사실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본질에 관해서 설명해주고 있는 구절입니다. 그 가운데 한 구절이 이제 이 의미 있는 구절이 여기에 나오고 이게 예배와 연결된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의미심장한 거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성취되는 즈음에까지 왔다고 칩시다. 그래서 우리 원하는 대로 복음이 편만해지고 신학교가 왕성하고 많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의 도가 흥왕해진다고 할 때, 그 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이겠습니까? 예배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온 세계를 땅 끝까지 예배하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살아있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서 신학을 하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서 우리들이 선교를 하는 것이고, 이 일을 위해서 목회를 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근데 이렇게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의 그림이 예배를 통해서 나타나게 되고 하늘나라에서도 우리가 하는 최고의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양의 예배입니다. 그 모형이 이 세상에서 실행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서 바라보시는 하나의 종말론적인 소망이라는 얘기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예배자가 되기 위해서 살아가는 것이고, 사는 것은 그런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우리가 사는 것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예배에 대해서 예전부터 시작해서 많은 고찰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핵심을 가지고 얘기하자면, ‘하나님은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고 할 때, 그럼 그 말을 뒤집으면 ‘저렇게 예배하는 자는 하나님이 안 찾으시니라’고 하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예배에 있어서 어떤 중요한 결코 포기돼서는 안 되는 어떤 방식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건데 이게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와 관련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그리스어 성경에서 보면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 이렇게 돼 있습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그래서 결국 이것은 예배의 본질적인 두 기둥은, 결국은 성령과 그다음에 진리, 두 개로 우리가 가져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거는 성경 전체를 달려오고 있는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당신의 영원한 지혜와 사랑으로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을 지성으로 알고 의지로써 사랑함으로써 창조의 목적을 이 땅 위에 구현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신학적인 맥락의 두 기둥이 예배라는 형식 속에서 구체적으로 들어와서 하나하나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것 이것이 바로 예배의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니까 목회자가 그 예배를 드리고 그렇게 해서 모이는 성도들이 성도들을 목양하는데 그 목양도 결국은 진리를 아는 지식의 한 기둥과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또 하나의 기둥, 이 두 개로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마지막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것도 조나단 에드워드의 설명이면, 그 나라는 지식의 나라이고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지식과 사랑이 희미하던 것이 완전하게 지식이 조명이 되고, 사랑이 온전해진 그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이 지식과 사랑이라는 두 개 성령과 진리와 성령이라고 하는 이 두 개의 기둥은 성경 전체의 창조로부터 마지막 구속과 완성으로 이루어져서 마지막에 천국에 이르기까지 계속되는 두 개의 하나의 주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두 개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지식의 빛을 잃어버리고, 사랑의 열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불행이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예배 속에서 이 두 가지가 회복돼야 하는데 우선 첫째는, 말하자면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인 토대는 이런 것입니다. 왜냐면 근본적으로 물질은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없습니다. 근본적으로 물질은 영의 세계와 교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를 받아도 물질은 그것을 알 수 없습니다. 결국은 인간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이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이것이 하나의 가능성이고 영이신 하나님과 영혼을 가진 인간 사이에 성령이 개입하심으로써 영이신 하나님과 영혼을 가진 인간이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제기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일반적인 역사이든지 특별한 역사이든지 간에 어떤 경우이든지 ‘성령 없이는 영혼을 가진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바로 그 영의 임재 안에서 하나님과 영혼을 가진 인간이 교통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오기 전까지 사람은 대부분의 시간들을 감각적인 사물의 세계에 갇혀서 지냅니다.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우리가 감각 세계 안에 갇혀서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 사고방식도 감각 세계 안에 갇혀 있고, 이성의 활동도 감각 세계 안에 계속 갇혀 있습니다. 이것이 특별히 사랑이라는 이 부분과 함께 결합하게 되면 이게 ‘earthly mind’ 를 인간에게 만들어냅니다. 세속적인 사고방식을 만들어내고, 그다음에 육적인 생각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을 깨뜨리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게 바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에 의해서 하나님 앞에 영적인 세계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사실은 우리가 이성으로서 알 수 없는 세계입니다. 그래서 칸트가 이야기하는 감각 세계 안에서 이성으로서 작용하는 그 범위를 초월하는 것입니다.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는 그런 한계를 명확하게 긋습니다. 그렇지만 실천 이성 비판에서는 그거를 그것만 가지고는 인간이 살아갈 수 없다는 거를 이야기하면서 그다음에 순수 이성 그 이상의 실천 이상이 필요함을 이야기하면서 여기에서 종교가 신을 요청합니다.
그러면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대입을 해보면, 결국은 우리는 특별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 한 인간은 감각 세계와 사물 세계에 갇혀서 육적인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위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모든 관심이. 그것이 아주 육욕으로 떨어지는 저열한 가치이냐 아니면 국가와 민족과 인류와 사회라고 하는 좀 더 고등한 가치이냐 하는 차이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차피 사물 세계 안에 감각 세계 안에 갇힐 수밖에 없는 거라는 것입니다. 이걸 초월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결국은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인간의 이성의 추론으로서 확증 할 수 없는 세계들에 대한 경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블레이즈 파스칼은 이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이성에만 논리가 있는 게 아니라 마음에도 논리가 있다. 감각적 사물에 대한 것은 이제 이성의 논리에 의해서 추론을 하지만, 이런 것들을 초월하는 것들에 대해서는 마음으로서 그것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인간의 지성 안에 인간의 마음 안에, 말하자면 추론적인 이성의 추론적인 요소와 오성의 변증적인 요소가 함께 있어서 결국은 그것으로써 우리는 초월 세계의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이성을 초월하는 가치들을 받아들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학문적으로 설명하면 너무 복잡하고 철학자들 사이에 언변이 많지만, 그러나 우리가 신앙적으로 설명하면 너무 간단한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나지 않은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요 3:5) 그래서 결국은 적용을 하자면 다 생략하고 적용을 하자면 결국 우리의 예배에서 아주 회복되어야 할 너무너무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발표자가 이야기한다고 해서 꼭 그거를 오순절에서의 그런 스타일의 성경만을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유고한 종교 개혁자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하시는 성령, 그러니까 성령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말씀하시지 않는 하나님과 연결을 짓는다면 그러면 결국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심각하게 결핍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여담으로 하나 잠깐 말씀을 드리면요. 한 15년 전의 일이었습니다. 꼭 그때만 그런 일이 있었던 게 아니라 한 예를 드는 것입니다. 교회의 성탄절 날 한 사람이 예배드리러 나왔습니다. 근데 이 사람은 철학자였습니다. 플라톤을 전공하고 대학에서 플라톤을 강의하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교수는 아니고 강사로,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불신자였습니다. 그래서 아내가 교회에 다니기 때문에 가정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교회에 따라 오는 사람이었는데, 그날도 철학하는 사람들은 술을 워낙 좋아하잖습니까? 근데 그 전날 이제 크리스마스이브 때 후배들하고 잔뜩 술을 먹고 동서네 집에서 잠을 자고 그리고 그다음 날이 성탄절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러면 우리가 다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자 하고 이제 온 것입니다. 그리고 가족들은 흩어져 앉고 자기는 삼분의 일 정도 되는 지점에 앉았는데, 술은 먹고 숙취는 아직 깨질 않았고 의자가 편안하고 안락하니까 해서 푹 자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설교자가 올라가더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외아들을 화목 재물로 주셨음이라.’ 라고 듣는데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지더랍니다. 후에 얘기입니다. 그리고 예배 설교가 계속되는 내내 설교 내용은 무엇인지 모르겠는데 하여튼 눈물이 한없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하고 나서 딱 플라톤의 체관 개념이 생각이 나더라는 것입니다. 인트리션. 그래서 감각 세계를 초월하는 무엇인가를 접촉하는 체관이 혹시 이런 것인가라는 의문을 가지면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집이 저기 계룡대였습니다. 아내는 뒤에서 예배드리니까 남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고, 차를 타고 가면서 “여보, 우리 다음 주일날 여기 다시 한 번 예배드리러 오면 안 될까?” 그렇지 않아도 전도하고 싶어 하는 아내니까 멀긴 하지만 너무 좋아했습니다. 돌아와서 다시 또 혼자 앉았습니다. 그러니까 똑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 삼주를 경험하고 그가 드디어 그리스도인이 됐습니다. 6개월 내에, 국내에 존재하는 모든 조직 신학 책을 다 읽었습니다. 근데 나는 그것이 성령의 역사의 필요성을 가장 잘 설명해준다고 생각을 합니다. 스펄전의 전기를 보면 ‘테버멘트 교회는 은혜에 넘쳤다. 심지어 철학자들도 와서 회심한다’는 그런 얘기가 나옵니다. 얼마나 자기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 아집이 강한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거를 그 당시에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는 이처럼 모든 사람의 상식을 뛰어넘으면서 그러면서 여태까지 보지 못했던 또 하나의 세계를 보도록 만들어주는데, 결국은 그렇게 그 위의 세계와 아래 세계를 함께 봄으로써 우리는 겨우 지혜를 가질 수 있는 것이고, 이 세상에 보이는 세계에서 보이지 않는 세계의 의미를 추적하며 살 수 있는 사상의 기틀들이 마련되는 거잖습니까? 신학이라고 하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사물의 세계 안에 갇혀서 감각 세계를 보는 그 모든 지루한 일을 끝내고, 그 감각세계 너머에서 사물을 보면서 의미를 규정하고 창조의 목적을 생각하며 인생의 목적을 확정할 수 있는 지혜를 갖는 것 아닙니까? 그게 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궁극적인 목표 아니겠습니다. 결국 우리에게 회복되어야 할 것은 ‘성령의 놀라운 은혜가 이 예배 속에서 회복되어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배들은 이런 점에 있어서 학식은 부족했지만, 그러나 탁월한 많은 간증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를 해오면서 하나님의 생생한 역사를 경험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역사가 누가 와서 돈을 내고 건물을 지어주고 그런 정도의 간증이 아니라 성령으로 말미암는 근본적인 인간의 변화, 이 일들이 예배를 통해서 일어나는 것이 가장 정상적인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얼마나 중요하냐면. 저는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갔을 때는 하나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삼지사방으로 찢어졌던 상태라고 보는 것입니다. 정신이. 왜냐하면 이미 벌써 제사를 드리지 못한 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고 거기에서 지금 종살이 한 지도 너무 오래된, 민족적 정체성이 위협을 받을 정도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을 그 공동체가 10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을 공동체적으로 경험함으로써 하나님을 경배하는 공동체가 되었고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중요한 계기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역사를 보면 중요한 부흥이 일어나고 그들이 변화를 받을 때마다 예배가 회복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신약 시대를 넘어와도 성령의 역사가 만든 것은 예배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 공동체는 설교자들에 의해서 예배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탄생하기 전까지는 예배의 공동체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부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의미와 부활의 사실이라고 하는 이 두 가지 지평을 향하여 지성이 열리게 되면서 그러면서 사실은 기독교라고 하는 것이 성립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다메섹의 가는 길에서 경험했던 것도 역시 그런 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성령의 역사가 다시 충만하게 부어져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T. H. L. Parker가 칼빈에 관한 전기를 쓰면서 칼빈의 설교의 특징을 패밀리 헤러티라고 얘기합니다. 칼빈의 설교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성경과 설교자의 마음이 떨어지지 않는 탁월성, 성경을 설교해도 자기 이야기를 설교하는 것 같은 친밀성 이것이 있었는데 그 본드의 역할을 했던 것이 성령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서 성경을 경험하고 그 진리를 자신에게 끊임없이 적용시키는 삶을 살았기 때문에 성경을 설교해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빈틈이 느껴지지 않는 친밀성이 느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식의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원래 예배 위에 부어져야 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회복하는 일 없이는 예배의 한쪽 기둥은 서지 않는다.
마지막 두 번째는, 이제 진리라는 요소입니다. ‘알레데이아 진리’입니다. 예전에 진정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진리가 맞는 것 같습니다. ‘알레드에이아’는 여러분 아시다시피 그냥 ‘자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 이것이 사실은 그리스어에서 ‘알레데이아’의 뜻입니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이 자명하게 드러나 있는 것’, 이게 이제 ‘진리’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맥아더 목사님이 얘기한 것처럼 ‘enthusiastic heresy’, 그러니까 열광적인 이단도 문제지만 barren orthodoxy 황폐한 정통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두 개가. 결국은 이 조화는 결국은 스피리츠스콤 베르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경이라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이 가치를 두 개를 결코 분리시키지 않고 꽉 붙듦으로써 사실 이것은 해결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이것이 분리될 때마다 결국은 ‘enthusiastic heresy’나 혹은 ‘barren orthodoxy’로 갈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이 고리를 놓치게 될 때, 그때 우리는 얼마나 교회가 망가지는지를 사실 우리는 이전의 역사를 통해서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또 한편으로는 그런 성령의 역사를 도외시하게 될 때에 결국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들을 또한 동시에 역사 속에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여기서는 이제 결국은 진리라고 하는 것, 그러면 그 진리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없으니까 간략하게 생각하자면 그러면 ‘예배 자체가 진리가 지배하는 예배가 되어야 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맨 처음에 이 책을 쓸 때에는 그때 거의 한국교회가 찬양 집회에 미쳐가고 있던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걸 찬양 집회를 내가 모두 다 부정하거나 다 공격하는 건 아닙니다. 그런데 어쨌든지 간에 그러면서 사실은 교회 안에 예배 속에 깨닫게 하는 요소가 무시되고 감동을 받는 더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느끼는 요소가 과대하게 증대가 된 것입니다. 근데 역사적으로 보면 사실은 교회 안에 예배 속에 음악이 들어온 게 사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기독교 공인 이후로 이제 음악이 예배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교회 오르간이 들어온 것도 훨씬 12세기 그다음에 성가대가 여러 가지 멜로디를 합쳐서 이렇게 화음으로 노래 부르고 하는 것들은 전부 다 12, 13, 14세기 이후에나 일어나는 일입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은 알다시피 무악기파였습니다. 저는 청교도의 견해를 무조건 옹호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리고 ‘교회 예배에 일체의 음악을 도입하지 말아야 한다’라고 하는 크리스토스톰의 발언도 지금 문맥에서는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지만 하여튼 그 모든 문맥을 고려해서 읽는 것은 무엇이냐? 왜 그러면 그 많은 선배들은 교회에 음악이 들어오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과민할 정도로 경계했느냐? 라고 하면, 예배에 있어서 한 가지 요소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한 경각심이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예배 안에 있는 깨닫게 하는 요소, 이것이 이런 음악 같은 것들로 인해서 방해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거를 아주 강력하게 고수했던 것입니다. 청교도들은 집에서는 음악을 아주 즐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교회에서만큼은 무악기로 예배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영국에 가면은 그거를 따르는 교파 사람들은 교인이 많이 모였는데 일체 음악이 없고 한 사람이 피리를 갖고 나와서 음을 한 번 딱 잡아 줍니다. 그럼 모든 회중들이 찬양을 하는 것입니다. 근데 그것도 보면 현실성이 좀 떨어집니다. 그러니까 교인이 많아서 막 뜨겁게 찬양을 하면 이게 은혜로운데 교인 한 열대 명밖에 안 되는데 그걸 다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찬양을 하니까 좀 그렇습니다.
근데 어쨌든지 간에 중요한 것은 예배에 있어서 깨닫는 그 요소가 오늘날 너무 많이 무시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통계에 의하면, 예배를 드리고 예배를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 중에 90%가 방금 드린 예배에서 성경 어디를 설교했는지 기억을 못한다고 통계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억도 못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실은 설교자들이 더 문제인 게, 깨달으려고 하지 않는 회중들에 대해서 너무 마음이 너그럽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성격이 좀 유별나서 누가 내 얘기를 안 들으면 난 얘길 안 합니다. 나도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려고 노력을 하고. 그게 서로 교통이잖습니까. 그런데 앉아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 설교를 들을 의지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렇게 고개를 숙이고 주보에다가 낙서를 하거나 주보 교정을 보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은 아예 성경이나 읽고 있든지 아니면 눈을 지그시 감고 명상에 잠기다가 졸든지 이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 시간이 계속 짧아집니다. 그래서 우리 어렸을 때는 목사님이 그러셨습니다. 여러분들이 두 시간 예배드린다고 그게 신자가 아닙니다. 주일 예배가 두 시간이었습니다. 기준이. 그러다 한 시간 반. 지금은 한 시간 안에 모두 끝납니다. 순서는 되게 다양해졌습니다. 설교 시간이 20분 심지어 15분 쪽으로 접근하는 교회들도 많이 나오는 것입니다. 아예 엊그제 보니까 아예 논문에서 나오기를 40분을 넘지 않는 것이 좋다. 커뮤니케이션 이론에서는 25분이 한계다라고까지 가르칩니다. 그런데 저의 목회의 경험으로 보면 그건 이론에 불과합니다. 최근에 한 7주 전에 제가 주일 설교 예배를 2시간 16분 34초를 설교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뭐 지루해 하는 사람도 있지만 뭐 지루해 하는 사람은 할 수 없는 거고, 그 설교를 듣고 자살할 사람이 생각을 돌렸다고 편지를 보냈으니까, 그런 사람들을 염두에 두면서 설교를 하는 것입니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설교 시간에 깨닫게 하는 요소가 예배 정신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그것이 바로 신약의 예배의 정신이다 이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설교자는 그래서 화술도 문제가 됩니다. 화술도 문제가 되는데, 기독교의 진리를 아주 정확하게 때 묻지 않은 진리를, 현대인의 심성에 맞는 방식으로 파고들어서 어떤 식으로든지 그들에게 깨닫게 해주는 그것이 있어야지만 신뢰할 수 있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J.I. 패커가 자기의 청교도에 관한 설교 속에서 얘기를 하는건데 청교도들은 존오웬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깨달음이 없는 성령의 역사는 대부분 부정하거나 아주 해로운 것이라고 봤습니다. 항상 성령이 한 신자의 마음속에 오실 때 가장 뚜렷한 증표는 성경을 성경과 친숙해지게 한다는 것, 그리고 성경 전체의 통일성을 보게 만들어준다는 것, 그 성경의 진리를 자기 개인에게 apply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능력이 이 성령 안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두 개의 축이 함께 한 쪽 바퀴는 말씀이, 한쪽 바퀴는 성령이, 같이 돌아가는 형태가 되는 그것이 개혁주의의 영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회복되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회복이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 시간에 세상 이야기로 채우지 말고, 한 톨이라도 진리의 말씀을 넣어줘야 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 진리에 불붙은 사람이 되어서 설교단에 등단해야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온몸으로 그 진리를 느끼고 체험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설교를 해야지 남의 이야기하는 것처럼 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들어 있는 도시 한 군데에는, 예배 잠들어 있는 교회가 있고, 잠들어 있는 교회 한 군데에는 하나님이 받으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는 공동체가 있고, 그런 예배를 드리고 있는 공동체의 한 구석에는 잠들어 있는 강당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설교자들이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가장 커다란 문제는 뭐냐 하면, 제임스 파커가 하나님을 아는 500만 권 이상 팔리는 제임스 파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서두를 어떻게 시작하는지 아십니까? 스펄전의 설교를 시작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스펄전의 설교의 묘사를 쭉 인용하면서 하는 얘기는 이제 이 코에 솜털이 나기 시작하는 애송이에게서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과 속성에 대한 이런 탁월한 묘사가 나올 수 있느냐. 그 답이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라고 이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자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너무너무 중요한데, 근데 그것은 신학교에서 가르쳐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17세기를 돌아가 보면 말입니다. 종교개혁 시대가 끝나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 시대가 옵니다. 그렇죠? 마스트리흐트나 보에티우스나 이런 사람들은 다가오고 있는 ‘데카르트의 카르티시아니즘’은 데카르트주의의 위험성을 다 봤습니다. 특히 마스트리흐트 같은 사람은 17세기 18세기 화란 철학자 사전에도 7,8 페이지로 언급이 될 정도로 탁월한 사람이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 사조를 못 막아냅니다. 결국은 그 요소를 한두 가지로 왜 못 막아내느냐를 가지고 한두 가지로 할 수는 없지만 결국은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 안에서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는 충만한 은혜의 경험들이 지배하는 시대가 끝나고 나니까 그다음에 아무리 이론의 칼을 세우면서 훌륭하게 그것들을 변증하고 해도, 결국은 그것으로써 해결이 안 됐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거를 과연 그때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에게 모두 책임을 돌리는 것이 마땅하느냐에 대해서는 뭐 우리가 question mark를 붙일 수 있겠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계몽의 시기로 접어들면서, 결국은 하나님을 마음에 기뻐하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무신론 내지는 이성주의가 강한 호소력을 이미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데카르트 이후로, 이후의 칸트에 의해서 완성되지만, 존재론에서 인식론으로 회귀하고 진리의 근거 자체가 외적 사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인식의 틀 속에 있다고 하는, 아주 거대한 축의 전환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그것이 시대의 정신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거를 어느 설교자 몇 사람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겠지만, 결국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거는 그런 정도의 충격적인 시대가 모든 시대에 계속된 것은 아니지만은 그런 시도가 없었던 교회의 시대가 과연 있는가? 그러니까 결국은 뭐냐면, 1세기 교회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중세 교회도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수도사들이 있었고 종교개혁자들 칼빈도 울부짖으면서 그 설교를 했고, 17세기도 마찬가지고,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똑같이. 그 어느 시대든 그런 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교회는 그런 것들과 싸우기 위한 하나의 독특한 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가 마지막 의지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제가 한 칠팔 년 전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우연히 이제 트리니티를 가게 됐는데, 여기에 있는 교수들 이야기가 뭐냐면, 영국이 가장 안타까워하는 점은 뭐냐 하면, 세속주의를 좀 더 빨리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 이것이 영국 교회가 침체되는 원인이었다는 식으로 진단을 해내는 것을 보면서 경악을 했습니다. 너무 재밌는 게 말입니다. 영국의 ecumenical 계통의 교회들, 자유주의 계통의 교회들은 이게 지금 decline 되고 있습니다. 확실하게. 근데 놀라운 게 Free Church의 계열의 교회들은 이게 숫자가 계속 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런던에 가서 런던 시티 미션 관계자들하고 같이 이야기 나눴습니다만 놀라운 그 말씀의 부흥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제가 4년 전인가 초청을 받았는데 영국 런던에 있는 18교회 연합 수련회에 갔습니다. 1800명이 모였는데 전부 10대에서 40대입니다. 안 믿어집니다. 그걸 대학 캠퍼스를 불려서 텐트를 치고 거기서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팀 켈러 목사님도 오고했는데 그러더니 집회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 복음주의입니다. 이게 놀랍게 빨아들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거기서 특강을 했는데 특강만 하고 한 교인이 자기가 꼭 이 스피커를 만나게 해달라고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이분은 케임브리지 출신의 변호사입니다. 뭐냐 하면 굉장히 감동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면서 과학과 자녀 교육과 성경에 관한 것에 대해서 대화를 같이 나눴습니다. 남편하고도 대화를 나누고, 근데 뭐냐 하면은 놀라운 것은 꼭 표피로 보면 자유주의 신앙이 이기고 있는 것 같지만, 진짜 영혼의 갈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도 진리를 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진짜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마지막으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어쨌든지 한국 교회가 회복돼야 될 것은 성령의 역사와 이 진리를 다시 회복하는 예배가 되고, 그 예배 속에서 거룩한 하나님을 만날 때, 한국 교회에 살 길이 있다.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네 마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