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본질적 사명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불을 켜기 위하여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을 네게로 가져오게 하여 계속해서 등잔불을 켜 둘지며”(레 24:1-4)
녹취자: 장미연
성막은 직사각형으로 되어있는 네모난 텐트였습니다. 작은방의 크기는 6평 좀 큰 방의 크기는 12평으로 되어있는 텐트였습니다. 거기에서 이루어질 규례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날 이 부분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읽다가 생애적으로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감동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중심으로 여러분과 몇 말씀을 나눠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막은 특이하게 창문이 없습니다. 모두 겉에를 해달의 가죽으로 모두 덮어버렸습니다. 멀리서 보면 그 성막은 조금도 화려하지 않습니다. 햇빛과 비바람에 그을린 거무튀튀한 그런 가죽으로 덮여있는 텐트였습니다. 그런데 그 외관에 비해서 내부로 들어가 보면 아주 화려합니다. 청색, 홍색 실과 그리고 각종 금 그릇들이 있으면서 아주 찬란합니다. 놀라운 것은 왜 하나님이 창문을 만들지 않으셨을까? 가죽으로 덮어놓은 캄캄한 방이었으니 제사장이 뭘 섬기기 위해서는 불빛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등잔불에 관한 규례가 나오는 것입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가죽으로 모두 덮여서 캄캄한 방에 그 불이 켜집니다. 거기서 환한 빛이 나오면서 제사장은 비로소 사물을 분별할 수 있고 그 사물들을 가지고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세 가지 사실만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우선 첫째는 등잔불입니다. 불빛이 비췸으로 모든 회막 안의 사물들이 드러나고 이제 제사장은 백성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주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중요한 사명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입니다. 목회자이든 선교사이든 상관없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진리의 빛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사람들의 일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그 진리의 빛은 하나님을 알게 해주고 세계와 인간에 대해 알게 해주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해주는 지혜의 빛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탁월한 아름다움을 구속사속에 전개하셨고 그 구속사는 고스란히 성경에 담겨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의하면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모아놓은 주님의 아름다움의 정수’입니다. ‘essence of beauty’입니다. 그러니까 이 성경을 펼쳐서 이 속에서 지혜의 빛을 탐구하고 이 지혜의 빛이 이 세상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달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목회이고 선교입니다.
선교는 이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빛을 전달하는 것이고 국내에서 목회하는 것은 문화가 같은 동족에게 이 말씀을 전해서 진리의 빛으로 들어오고 목회는 그 진리의 빛대로 사람들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 그들의 인격과 삶이 예수를 닮을 수 있도록 돌보아주는 일이 목회입니다. 그러니까 진리라는 기둥 그것을 중심으로 목회, 선교, 설교, 심방, 교육 모든 것들이 둘러 쌓여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학을 공부하는 이유는 그 자체에 대한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진리의 빛은 어떡하면 더 풍성하게 찬란하게 비취게 만들어서 더 멀리까지 더 깊숙이 그들의 마음에 진리를 전달할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고민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에 대한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이 신학을 공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진리의 빛은 결국 우리로 하여금 지혜를 갖게 만들어주는 빛입니다. 지식은 수단일 뿐이고 지혜는 우리의 마음속에 들어와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향하여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떻게 살아야할 것이고 또 세상에서의 삶이 영원한 세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게 해주는 지혜의 빛입니다.
이 지혜는 사랑을 반드시 동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대의 교부들은 기독교의 가르침을 철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철학은 ‘filosofia’ ‘지혜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 지혜가 우리의 마음에 지성에 확실성을 주고 우리의 정서에 열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의 의지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게 하여 기쁨으로 애덕의 삶을 살게 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놀라운 지혜입니다. 이 지혜 없이는 인간은 짐승과 다를 것이 없고 결국 이 지혜를 따라 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읽혀지는 분이시니 세계의 창조로부터 종말에 이르는 모든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혀있고 세계의 창조와 종말에 이르는 모든 드라마는 접혀진 그리스도 예수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의 펼침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 진리에 대한 접힘과 펼침이 일어남으로써 세계 이 모든 역사들이 전개되는 것을 통해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누구신지 아는 사람이 바라보는 역사와 하나님이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이 보는 역사는 사뭇 다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놀라운 지혜의 빛을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가지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게 하기 위해 우리를 선교사로 목회자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기억해야할 것은 매일매일 이 지혜안에서 성숙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 구약의 ‘다트 엘로힘’, 그리고 신약의 ‘그노시스 크리스투’. 하나님을 아는 구약의 지식이 신약시대에 와서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conversion 됩니다. 왜냐하면 위대한 하나님의 지혜의 핵심이 모두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할 때에만 가장 하나님에 대한 확실한 앎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첫 번째로 이 안에서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데 우리의 사명이 바로 어두운 세상의 이 지혜의 빛을 비추는 사람들이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지혜의 빛이 신학을 공부하면 공부할수록 우리 안에서 이 지혜의 빛이 밝게 빛나고 애덕의 삶을 살 수 있게끔 우리 자신이 그렇게 훈련되어져야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 등잔불을 부칠 때 거기에 사용되는 것은 기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심 할 여지없이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결코 사람의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학의 원리는 계시와 믿음입니다. 외적으로는 객관적인 계시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주관적으로는 신앙으로 이 계시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 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앙을 갖게 해주시는 그 주체가 성령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할 수 없고 단호하게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을 공부하면서 성령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공부를 해서 그 지식으로 우리 자신의 이름을 빛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오히려 이 지식으로 우리 자신 속에 성령의 충만한 능력을 힘입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사랑하는 일에 있어서 우리가 성숙해가야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그가 하고 있는 일은 세상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윌리엄 버클레이는 자기의 주석에서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한 목회자는 행정가일 수도 있고 학자일 수 있고 뛰어난 재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성령의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날 세월이 흘러가면서 신학교에서 제일 아쉬운 것이 주님을 향한 뜨거운 열정입니다. 그것이 너무 아쉽습니다.
예화) 저는 총신에서 공부를 했고 이 학교에 와서 설교를 하고 인연을 맺은 것이 제가 지하실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일이었으니까 1994년도부터 몇 해에 한 번씩 꾸준히 왔고 최근에는 매년 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교회 학생들 중에서도 지금 50대 중반쯤 된 사람들이 여기 학교 다니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굉장히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이 산 곳곳에서 기도했습니다. 그것은 이 학교뿐만이 아니라 우리 총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업이 끝나거나 저녁때가 되면 기숙사에 학생들이 모두 산에 올라가서 그 총신에 있는 뒤에 골짜기에서 기도 소리가 그치지가 않았습니다. 무엇이지요? 그들에게 성령의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만큼 그렇게 신학교육이 잘 정착되지 못하고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그러나 그렇게 열렬하게 기도했던 것입니다. 1988년도에 제가 처음 신학교 교수로 임용이 되었는데 그 때에 생각을 해보면 수업이 끝나고 저는 항상 통성 기도로 마쳤습니다. 그런데 수업이 끝나고 나면 그 교실이 눈물바다가 된 적이 그저 몇 주에 한 번씩 늘 있는 일이었습니다. 채플 시간을 잊어버릴 수 없는 게 채플 시간은 거의 부흥회였습니다. 대학이었는데도 말이지요. 물론 개중에는 아주 형편없는 학생들도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평균적으로 볼 때 훨씬 열정이 넘치는 때였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온라인으로도 이 설교가 나간다고 하는데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의 사람이 되어 지혜의 빛을 전파하는 것은 성령의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당신의 영에 강력하게 사로잡힌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십니다. 선교환경이 어려워졌다고요? 사실입니다. 목회환경이 어려워졌다고요? 사실입니다. 이제 동남아 지역을 여행해 봐도 선교의 지형이 20년 전 같지 않습니다. 많은 선교학자들은 국민소득이 5천 불을 기준으로 한답니다. 그전까지는 복음의 수용성이 뛰어나고 5천 불이 넘으면서 수용성이 떨어진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제 모든 나라들이 점점 잘 살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매년 전 세계는 약 4%에서 많으면 7%정도의 경제 성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전 세계가. 그리고 선진국일수록 성장률이 낮고 후진국일수록 성장률이 높습니다. 동남아를 여행하면 10년, 20년, 30년 전이 도저히 비교 안 될 정도로 눈부시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성장하는 것만큼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 구원의 은혜, 하나님, 그리스도 이런 것들에 관한 기본적인 선교의 관심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성장하고 선진국이 되고 교육의 수준이 높아지면 그런 산업화와 자본주의에서 오는 고립과 소외감 여러 가지 많은 심리적인 문제들이 있는데 그것을 복음에서 답을 찾으려고 하지 않고 다른 방식에서 문제들을 해결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현대사회에 소비와 쾌락에 자신들을 맡기면서 문제들을 풀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답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사역의 환경은 척박해지는 것입니다. 그 때에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것이 충만한 지식과 충만한 성령의 역사입니다. 그 두 가지에 붙잡힌 사람들은 어디다 내어놓든지 간에 결국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증거하고 그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변화되게끔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코로나를 통해서 예배가 많이 무너졌습니다. 이걸 다시 복원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예화) 지금으로부터 한 15년 됐나요? 그전이었습니다. 예배당에서 성탄 예배를 드리게 됐습니다. 한 사람이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는 철학자였습니다. 철학을 전공하고 철학을 가르치는 사람이었는데 하필이면 플라톤 전공자였습니다. 제가 플라톤에 관심이 많았는데. 예수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정 평화 때문에 할 수 없이 교회 다니는 사람이었습니다. 전날도 후배들과 함께 실컷 성탄절 이브라고 술을 마시고 동서네 집에 와서 자고 아침에 가정 평화를 위해서 성탄절 예배에 나왔습니다. 그리고 앉아보니까 교회 의자가 푹신했어요. 이제 숙취도 안 풀렸고 ‘여기서 한숨 자다 가야되겠다.’ 그러고 들어왔는데 설교자가 단에 올라가더니 성경을 읽었습니다. “사랑은 여기에 있나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의 독생자를 화목제물로 주셨습니다.” 후에 간증에 의하면 갑자기 눈물이 확 쏟아지더라는 겁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러면서 갑자기 플라톤 철학의 체관이 생각이 나더랍니다. 플라톤의 체관의 개념은 감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이 초월적 세계를 직관으로서 알게 되는 그런 정신작용입니다. ‘intuition’이라고 합니다. 체관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어쨌든 눈물로 예배를 드리고 아내는 뒷줄에 앉아있어서 남편에게 일어나는 일을 몰랐습니다. 집이 대전보다 좀 더 먼 곳이었습니다. 집에 차를 타고 가면서 아내에게 얘기했습니다. 다음 주에 이 교회에 다시 한 번 와볼까? 그리고 생각하기를 아마 내가 뭔가 좀 마음속에 정서적으로 불안정해서 그런 일이 있을 것이다. 다음 주에 왔는데 똑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세 번을 경험하고 그는 결국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무엇이 그를 가능하게 했을까요? 설교자의 재주가 아니라 성령의 역사가 사람들의 마음에 임할 때 그렇게 지혜의 빛이 전달되며 인생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들이 되십시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여기에 보면 ‘감람을 찧은’ 감람을 찧어낸 순결한 기름이라고 했습니다. ‘세멘자이뜨 까띠뜨’라고 히브리어 성경에 나옵니다. 찧어낸 이라고 번역된 이것은 ‘까띠뜨’라고 되어있는데 ‘까따뜨’라는 동사. 때리다. 깨뜨리다. 치다 동사의 수동분사 남성단수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감람유는 치료 목적부터 식용, 미용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바쳐지는 제사에 이르기까지 안 쓰여지는 곳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등잔불을 밝히기 위해서 쓰는 이 기름은 감람을 찧어낸 것이어야 했습니다. 당시 감람유를 만드는 방법이 두 가지 있었는데 우선 이것을 감람을 찧어서 프레스에다 놓고 누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많은 양의 기름이 나옵니다. 그 대신 거기에는 억지로 프레스로 눌렀기 때문에 불순물들이 섞여 나옵니다. 그래서 거기에 불을 붙이면 그을음이 나오는 겁니다. 이것은 성막에서 쓰기에 적합하지 않은 기름이었습니다. 두 번째 방법은 연자 맷돌이나 혹은 절구에 넣고 찧으면 그냥 때리면 그래서 깨어지면 자연스럽게 거기에서 기름이 흘러나왔습니다. 그 기름을 채집한 것이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세멘자이뜨 까띠뜨’입니다. 그래서 감람을 찧어내서 프레스로 누르지 않은 채 흘러나오는 그 기름. 그것은 순수한 성분의 기름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자기 깨어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고 성령의 은혜를 받아서 옛 자아가 깨뜨려지고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죽는 죽음의 경험을 통해서 예수와 함께 다시 살아난 경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 함께 깨뜨려지고 죽는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거슬러 살고자 하는 나의 육은 죽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고 그리고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게 될 때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심령 속에 현재적으로 실제화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한 그 핵심입니다. 그 때에 다시 살아나면서 거기에서 예수를 살려내신 하나님의 생명의 능력이 내 안에 나타나면서 이렇게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아나는 자기 깨어짐이 없을 때에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을 이렇게 예수와 죽고 다시 살아남으로서 이 영원한 생명 때문에 현실을 감당하며 살 수 있는 힘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걸 가리켜서 존 오웬이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이렇게 오늘 우리 마음속에서 영원 안에서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깊이 깨뜨려져서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