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짖는 자의 소망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시 28:1)
녹취자: 남궁지선
다윗이 정확히 언제 이 시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매우 곤고하던 날에 지은 시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렇게 봅니다. 주석가들은 아마도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했을 때 그 고통의 시기에 혹은 그 고통을 회상하며 쓰여진 것이 아닌가 이렇게 추측합니다. 1절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크게 3가지입니다. 내가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내게 귀를 막지 마십시오. 세 번째는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입니다. 뒤엣것부터 보면 제가 무덤에 내려가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무덤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보르’인데 사실은 무덤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경우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무덤이라기보다는 구덩입니다. 구덩이, 그래서 킹 제임스 버전, NIV, NIV 2011년판, ASV 모두 이것을 grave 라고 번역을 안 하고 pit라고 번역을 했습니다. pit는 짐승을 포획하거나 사람들 사로잡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함정입니다. 깊은 함정. 위를 뭐로 덮어서 들판이면 들판과 똑같이 해놓고 한 번 빠지면 쑥 들어갑니다. 그러면 자체가 짐승이든지 사람이든지 포획하거나 사로잡는 게 목표이기 때문에 자기의 힘으로 애써서 나올 수가 있으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웅덩이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 ‘보르’라고 하는 것은 특히 시편 전체에서 보면 ‘보르’는 자신의 힘으로는 극복해서 나올 수 없는 곤경, 그리고 누구도 도울 자가 없이 빠진 깊은 절망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이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도 바로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누군가가 꺼내주기 전까지 절대로 자력으로 나올 수가 없는 그런 상황입니다. 요즘 현대철학자들의 말로 이야기하면 실존의 한계적 상황이라고 할까 자기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해 낼 수 없는 그런 한계 상황을 가리킬 때 웅덩이 혹은 구덩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하면서 ‘깊은 웅덩이에서 나를 건져주시고 나의 발을 반석 위에 세우사’ 이렇게 찬송할 정도로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정서를 가지고 절망적인 웅덩이를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 시대 사람들은. 성경을 읽을 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이런 웅덩이라 그러면 우리는 잘 실감 나지 않고 존재하지 않지만 한 번 그런 것을 깊이 생각하면서 그 시대의 문맥으로 돌아가려고 애써서,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의 두 키 이상 세 키 정도 되는 깊은 웅덩이 도저히 무엇을 이용할 것도 없고 자신의 힘으로 빠져나갈 수도 없는 그런 웅덩이에 갇혀 있는 상황, 사면을 볼 수 없고 오직 동전만 한 하늘을 밖에는 보이지 않는 가운데서 아침이 지나고 저녁이 되고, 또 저녁이 지나고 아침이 되면서 거기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 가고 있는 자신을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웅덩이가 주는 하나의 뉘앙스입니다.
그러니까 이건 절망입니다. 신자의 절망이 어디에서 오는가? 사실 상황이 절망적이어서 절망적이라고 하는 것은 꼭 일치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쇼펜하우어도 그런 얘기를 합니까?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을 쓰는데 그의 대표작입니다. 사실은 니체의 사유의 상당 기반을 쇼펜하우어가 이미 자리를 놓고, 사실 니체가 철학을 한 것도 대학교 1학년 때 서점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고서점에서 중고책을 발견하고 흠뻑 빠져들어 가면서 쇼펜하우어 책을 읽은 것이 그게 바로 프리드리히 니체가 철학에 헌신하게 된 하나의 동기였습니다. 문헌학으로 들어가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사람도 이야기하는 게 뭐냐 하면 표상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눈에 감각적으로 들어오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가 무엇인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그 세계 자체는 의지의 덩어리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게 칸트의 물자체 개념하고 같은 것입니다. 이처럼 결국 우리들은 우리들의 눈앞에 펼쳐지는 세계는 결국은 우리의 해석에 불과한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는 이것이 더더욱 사실입니다. 왜냐면 똑같은 현실을 놓고 어떤 사람은 거기서 하나님께 더 간절히 매달리고 그러면서 희망을 발견해야 할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는 데 비해서, 어떤 사람은 희망의 줄조차도 내려놓고 절망의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계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얼마 전에도 설교 속에 얘기했습니다만 740만 원인가를 보이스피싱 당한 자매가 그 일 때문에 자살을 합니다. 사실은 물론 그 자매가 얼마나 어려웠으면 740만 원을 가지고 자살을 했겠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면 결국 그 740만 원이라는 돈을 달리 생각하면 얼마든지 다시 희망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고 노력을 해서 그 손해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데 왜 그렇게 할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찌 되었든 간에 현실 세계는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현실 세계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냥 인식하고 해석할 뿐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되고 어떤 사람에게는 절망의 근거가 되고, 또 한 사람에게는 싫증의 근거가 되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열정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계의 표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 눈에 비친 그런 세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시인이 얘기하는 것이 그렇게 표상으로 비친 세계가 얼마나 절망적인지 자신이 그렇게 누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구출 받을 수 없는 깊은 웅덩이 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습니다. 하나의 일종의 절망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깊은 절망이 어디에서 오는가? 결국 현실에서 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똑같은 현실이 예전에는 나에게 희망을 주고 도전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시인이 경험하는 깊은 절망이 무엇이냐 하면 시련을 당했는데 하나님과의 교제의 끊어짐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좋은 의미에서 놀라는 것은 자신이 깨닫지 못하는 하나님의 영광 성품 진리의 빛 이런 것을 보는 것도 놀람이지만, 놀람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는 놀람 때문에 자신의 인식의 구도가 확 바뀌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살할 때가 되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다 절망적으로 해석이 됩니다. 인식되는 모든 것이 나의 절망을 정당화 시켜요. 그래서 어떤 희망도 가질 수 없게끔 세계가 모두 들고 일어나서 나를 매장시키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 감정 자체가 싫지 않고 평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뭔가를 욕망을 가지고 자신의 마음에 거슬려서 뭔가를 해보려고 할 때 인간이 괴로운 거지 일단 그런 애착을 모두 끊고 나면은 기이한 평안이 밀려옵니다.
죽음 직전의 사람은 평안합니다. 그리고 생리의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온몸에 남아있는 모든 도파민이 다 발산이 된다고 그럽니다. 환락의 상태에서 죽음의 두려움을 이기고 눈을 감게끔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고 합니다. 인간이 그렇게 되어 있다고 합니다. 깊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단절되고나 방해를 받는 깊은 내적인 곤궁함이 시인에게 파고든 것입니다. 그것을 이렇게 시어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원인이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침묵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의 반석이여 나의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라고 합니다. 귀를 막지 말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귀가 먹다. 말을 못 드는 귀머거리가 되다 이렇게 나오고 잠잠하시면 이라고 하는 단어하고 두 개가 똑같이 나옵니다. 번역을 할 때 문학적으로 중복이 되면 지루하니까 이렇게 한 것입니다. 직역하면 ‘나의 반석이시여 나에 대하여 귀머거리가 되지 마시옵소서. 만약에 주께서 귀머거리가 되시면 나는 이러 이러할까 하나이다.’ 귀머거리는 못 듣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소리가 그것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자신의 청각으로 뇌 속으로 들어가지 않는 상태입니다. 그러니까 뭐 하나님이 아무리 신앙이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시인이 하나님이 귀머거리고 못 듣겠다고 생각을 하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의 마음이 귀머거리가 된 것 같은 그 상태를 하나님께 투영하여서 반영하는 것이 이러한 문학적인 묘사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귀머거리가 되지 마시옵소서. 시인의 반대의 경험을 한 번 들어보세요. 시인이 늘 하나님 앞에 감사하고 충만하게 살았을 때 감사의 제목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 소리를 들으셨나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로다. 주께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나이다. 나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나니 내가 감사하리로다. 주께서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셨나이다. 귀머거리가 된다는 말의 반대말은 귀를 기울인다는 말입니다. 그런 속에서 시인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매우 특별하게 선택된 하나님의 자녀이며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관계 속에 있다는 사실을 깊이 경험하며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시인에게서 이 표현은 매우 의미심장한 자신의 영적인 상태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 시인이 그렇게 하나님이 자신에 대해서 귀머거리가 되었다고 하는 것, 자신의 기도를 거절하신다고 하는 이것은 시인에게 있어서 매우 커다란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절망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는 고백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기도를 안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기도를 안 해도 괴로워하지 않는 것이 문제 아닙니까? 기도가 안 되면 그것을 고통스러워하고 괴로워해야 하는데 그것을 안 느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웅덩이가 얼마나 일상화 되어 있냐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그림을 그려 보시죠. 깊은 웅덩이에 빠진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하늘은 동전만 하게 보이고 지나가는 사람은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뭘 짚고 올라갈 지팡이도 없고 사닥다리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지막 희망은 사람이 와도 못 건집니다. 사람이 와서 밧줄을 내려야 겨우 삶의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럼 그걸 할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듣든지 말든지 온 힘을 다해서 “Help me!”하고 외치는 것입니다. 나를 구해주옵소서, 나를 구해주옵서서. 소리 지르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깊은 웅덩이에 빠진 채로 모든 것을 포기해. 아니면 내가 깊은 웅덩이에 빠졌다는 사실 자체도 잊어버리고서 손장난이나 하고 있습니다. 그럼 결국은 시간이 지나면 그 절망은 죽음으로 바뀝니다. 시인에게 배우는 것은 이것입니다. 자신의 삶의 상황이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과 같이 되었을 때 그것이 그 속에서도 하나님이 자기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깊은 절망을 느끼면서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것을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그 마음이 우리에게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우리는 일을 위해서 기도를 하는데 사실 우리에게 더 필요한 것은 기도를 위해서 기도하는 일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설명하겠습니다. 우리는 일을 위해서 기도한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기도 자체를 위해서 기도해야지만 우리의 기도가 유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조지 위필드가 자기의 일일 점검 목록을 제시했을 때 첫 번째 올린 목록이 나는 오늘 열렬히 기도하였는가? 를 첫 번째 올린 이유가 그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신앙을 말해주는 거란 말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아침에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기도가 안 되는 것이 고통스러운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지 몸부림을 쳐요. 교역자에게 도움을 받든지, 간증집을 읽든지, 아니면 감동적인 성화를 보든지, 기도원에 가든지 아니면 금식을 하든지 안 되면 성경 필사를 하든지 무엇이든 하려고 몸부림을 친다고. 그런데 그 깊은 웅덩이에 빠진 것이 불편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의 소리를 듣지 않는 것이 낙심되지 않는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간이 흘러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깨뜨려진 관계는 고착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가 특별히 커다란 범죄를 하지 않고 교회 언저리에 머물며 다닌다고 할지라도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해도 거기에 자신의 피를 바르거나 눈물을 쏟거나 하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모든 게 마음으로 하는 사역이기 때문에.
마지막 세 번째 그래서 시인이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히브리말로 ‘카라티’예요. 이거는 소리가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카라티’는 작은 소리도 ‘카라’라고는 말하고 내가 여기서 아무개야 하고 부르는 것도 ‘카라’라고 말하고, 큰 소리로 살려달라고 하는 것도 ‘카라’라고 표현하지만. 어쨌든 ‘카라’는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음성으로 발화되어서 공기 중에 퍼지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카라’입니다. 오히려 ‘다바르’는 그런 의미가 적습니다. ‘아마르’는 생각하는 것을 포함해서 말하고, 어쨌든 ‘카라’는 공기를 진동시켜서 나오는 물리학적인 소리입니다. 결국 그것은 뭐를 보여 주냐면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커다란 안타까움으로 가득 찼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cry입니다. cry.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의 표기입니다. 그것이 이 시인이 묘사하는 바입니다.
청교도들 속에도 신비주의적인 청교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청교도들을 오웬은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기도론에서 말하기를 기도는 소리 내어 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예외적인 경우가 두 개 있습니다. 대표 기도할 때, 대표 기도할 때 소리 없이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음이 하나님의 정에 의해 어찌할 수 없는 상태일 때 그때는 소리 질러 기도하라 그랬습니다. 그 엄격한 신학자가 그 가능성을 인정했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그것을 경험해 본 것입니다. 습관적으로 주여 삼창을 하는 것은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서 성도들이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것은 우리들이 짜증내지 말고 그 사람을 존중해 줘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도 절제가 필요하지만 귀한 교제의 시간에 방해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배려해 주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면 그렇게 기도할 수 있는 기회가 날이면 날마다 매일 오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서럽게 쏟아놓으면서 눈물을 흘리며 부르짖는 기도가 있다는 것은 마음의 소원이 그만큼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간절한 마음의 소원이 마지막으로 표현되는 것이 있다면 ‘카라티’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나이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우리의 양심이 소리의 크기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양심은 소리 내지 않고 흐느끼기만 해도 내 양심은 내 마음이 울부짖는지, 마음은 고요하고 입으로만 떠드는지 우리의 양심이 모두 증거를 합니다. 심지어는 다른 사람을 의식해서 기도하는지 우리의 양심이 다 증거합니다. 마음을 깊이 쏟아놓으면서 하는 기도는 항상 우리의 신음소리를 동반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 그런 기도는 시간에 대한 감각을 앗아가 버립니다. 그래서 한 참 기도를 많이 할 때 얘기지만 잠깐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다섯 시간이나 흘렀습니다. 또 한 번은 누가 나한테 필리핀 다녀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떠났는데 잘 갔다 오라고 기도를 해주고 간절히 기도를 하고 눈을 떴는데 필리핀 도착할 때가 훨씬 지났습니다.
이런 게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것 사실 우리들이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마지막에 한 가지만 안 잃어버리면 우리들이 희망이 있습니다. 그게 나는 부르짖을 수 있고 하나님은 들어주시고 그러면 우리의 막혀있는 이 모든 삶의 웅덩이와 같은 상황을 그분께 모두 쏟아 부으면서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평강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뜻대로 우리를 인도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마음을 평화롭고 담대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에 티끌만 한 거리낌이 없게끔 만들어 주십니다. 그러면 거기에서 어떻게 내가 이 깊은 웅덩이에서 빠져나오게 될지 모르지만 그 과정은 상상할 수 없지만 반드시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나를 이 깊은 웅덩이에서 건져주실 것이라고 하는 희망이 절망을 내어 좇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충만한 하나님이 사랑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찬송하는 제목 중의 하나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는 것이 찬송의 제목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할까요? 결국 인간의 가장 큰 절망은, 인간은 종종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절망의 때에 이를 때가 있다. 그때의 가장 큰 절망은 하나님과의 기도의 교통이 끊어지는 것이다 결국 그 속에서 해결의 길은 하나님께 마음으로부터 간절히 부르짖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그 깊은 기가 막힐 웅덩이에서 건져내서 반석 위에 우리를 다시 세우시는 때가 온다. 여러분의 문제가 무엇이든지 이렇게 주님께 매달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