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에서 만난 예수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흰 옷 입은 두 천사가 예수의 시체 뉘었던 곳에 하나는 머리 편에, 하나는 발 편에 앉았더라 천사들이 이르되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이르되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는 말이라)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요 20:11-18)
녹취자 : 조복령
I. 본문해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의 사건입니다. 다른 복음에서보다 상세히 보도하고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안식일이 지난 첫날 새벽이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 드리기 위해 다른 여인들과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들은 시신에 향품을 넣으러 달려가면서 예수님 무덤의 돌문을 어떻게 열지 근심하였습니다. 그런데 가보니 뜻밖에도 돌문은 누군가에 의해 굴려져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마가복음 16장은 말합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요 16:3).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요 16:4).
마리아와 함께 올라온 그녀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시신이라도 찾아보려고 무덤으로 달려간 것입니다. 혹시 누군가에게 발각되면 예수와 한패라고 지목받아 큰 고초를 치를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예수님의 무덤 속에 있는 것을 발견한다면 예수의 시체를 빼돌리고 예수가 부활했다고 꾸며내려는 계략이었다고 비난과 고소를 받을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한 여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뜻밖에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II. 무덤에서 만난 예수
A. 울고 있는 여인
막달라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돌문이 열린 것만 보고 이미 누군가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20장 11절은 말합니다. “마리아는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더니 울면서 구부려 무덤 안을 들여다보니”(요 20:11). “울고 있더니”라는 이 번역은 그리스어로 보면 소리 없이 흐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귀에 들리도록 큰 소리를 내어 엉엉 우는 동작을 가리킵니다. 이는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었던 슬픔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 여자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님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 면류관을 쓰시며 피범벅이 된 시신을 깨끗이 수습하고 거기에 향품을 넣어드려 마지막 떠나시는 예수님에게 장례의 예를 표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시신은 사라졌고 마리아는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는 마리아 안에 있는 슬픔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예수님의 시신조차 발견할 수 없었기에 터져 나온 커다란 울음소리였던 것입니다.
그렇게 위험을 무릅쓰고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은 막달라 마리아는 누구입니까? 갈릴리 근처에서 살던 여인이었습니다. 한때 일곱 귀신이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여인이었다고 마가복음 16장 9절이 말합니다. “···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막 16:9) 예수님은 그녀를 고쳐주셨습니다. 죄를 용서해 주시고 다시 사랑해 주셨으며 한때 예수님의 발 옆에서 말씀을 들음으로 주님께 칭찬받았던 여인이었습니다. 또 병들어 죽었던 나사로의 누이이기도 하였습니다. 죄인이었던 이 여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 후 마리아는 예수님의 복음 사역에 전심으로 헌신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다니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실 때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자신의 소유를 바쳐서 섬긴 사람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8장은 말합니다.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눅 8:2) “···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눅 8:3) 그들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그녀는 그 어머니와 이모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함께 거기에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버리고 모두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이 여자는 십자가에 매달려 마지막 운명하시는 그 순간까지 갈보리 언덕에서 마지막까지 십자가를 지켜보고 있었던 여인이었습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리마대 요셉이 이미 죽으신 예수님의 시신을 가져다가 자기의 무덤에 장사하고 돌로 무덤을 막는 광경까지 모두 지켜보았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는 순간까지 그뿐만 아니라 시신이 마지막 안치되는 그때까지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 곁을 떠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지금 그 마리아가 큰 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죽으셨지만 마리아의 마음속에 있는 예수님 사랑의 불길은 꺼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버리고 간 생명은 남아 있는 이 여자의 마음이 죽음이 되었습니다. 사랑의 진실함과 깊이는 사랑하는 대상을 상실했을 때 보여주는 슬픔의 크기로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빈 무덤에서 홀로 통곡함으로써 그녀 속에 있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참으로 깊고 진실한 것이었음을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온갖 기적을 행하시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힘없이 체포되어 심문을 당하시고 죽으셨으면 실망할 법한데 이 여자는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결코 실망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돌아가셨지만, 이 여자는 예수님을 계속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을 처음으로 찾아 달려온 사람들은 제자들이 아니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왜 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하여 달려오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아직도 두려웠던 것입니다. 예수님과 한패라는 것이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습니다. 또 예수님 때문에 어떤 피해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꽁꽁 숨어 있는 제자들로 하여금 무덤으로 달려오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회개하고 십자가 앞으로 다시 나아와 예수님 곁에 있었던 요한조차도 무덤까지 올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부른 사람들 중 누구도 예수님의 무덤에 달려온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름 없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들만이 무덤으로 새벽에 달려왔습니다.
예수님은 운명하셨지만 마리아와 이 여인들의 사랑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죽었으나 그들의 마음은 예수님을 놓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 여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는 복음의 비밀까지는 몰랐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 자신의 죄 때문이고 하나님의 구속 방법이며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오르실 것이라는 것, 그리고 거기서 온 우주와 교회와 인류를 통치하실 것이라는 사실도 이 여인들은 아직 몰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죄가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알았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어떠한 사랑으로 자신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는지 가슴으로 알고 있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는 미천한 자들이었고 권세 있는 자들에게 무시당할 만한 여자들이었으며 유력(有力)한 자들에게는 아주 아무것도 아닌 여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들에게는 예수님을 향한 사랑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바로 그 여자들에게 부활하신 당신의 첫 모습을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이렇게 만나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습니까?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 같이 주님을 만나 뵙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습니까? 구속의 비밀도 몰랐던 여인들이 단지 예수님께로부터 받았던 한 없는 사랑 하나를 기억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새벽에 무덤을 향하여 달려왔고 비어있는 무덤을 보면서 막달라 마리아는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우리에게 이렇게 예수님을 향해 달려오는 갈망이 있습니까? 그들은 죽으신 예수님의 시체를 만나지 못했는데도 통곡하며 울었는데 우리가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까? 주님을 만난 사람은 감격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너무 슬퍼서 눈물을 흘리는 광경이 참 교회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의 사랑의 추억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배반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위험을 무릅쓰고 마음의 그리움을 안고 무덤으로 달려왔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었을 때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무엇도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을 위로할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없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어찌하든지 주님을 만나야 되겠다는 간절한 갈망보다도 하나님이 받으심 직한 향기로운 제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어제 주일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회심집회를 했습니다. 정말 오래간만입니다. 영아부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학년 학생들까지 엄마 아빠 손을 잡고 모두 교회에 나왔습니다. 이 예배당에서는 3학년, 4학년, 5학년, 6학년 학생들이 집회를 했습니다. 그 학생들이 예배당을 가득 메우고 단정한 모습으로 뜨겁게 찬양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어린아이들이 고사리 같은 손으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찾는 기도를 드리는 모습을 여러분이 한번 보셨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이와 상관없이 어디서든지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러운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십니다. 우리에게 간절함이 남아 있습니까? 정말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간절한 기도 온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부르짖는 울부짖음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의 인생과 현실은 놀랍게 변했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오늘 부활절을 맞아서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을 회복하는 살아있는 신앙을 갖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만나주신 예수
결국 간절히 울며 주님을 찾는 이 여자를 예수님은 만나주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시신이 사라졌다는 생각에 크게 낙심했습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그녀는 무덤 속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허리를 구부려 무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놓여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시신은 없고 두 천사가 앉아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천사들은 물었습니다. “···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 ···”(요 20:13) 마리아는 그들이 누구인지 확인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가 찾는 것은 천사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예수님께로 모두 쏠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그들이 누구인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이렇게 말했습니다. “···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요 20:13) 아마도 눈물을 흘리며 천사들에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때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서 말씀하셨습니다. “···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요 20:15) 호격(呼格)이 단수로 되어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과 마리아가 단독으로 나눈 대화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분을 동산지기인 줄로 착각했습니다.
사실 예수님의 얼굴에 관심이 없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간절히 찾고 있는 것은 예수님이었고 그녀의 생각에 예수님은 시신으로 거기에 누워 계셨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천사든, 동산지기든 이 여자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예수의 시신을 찾고 싶었던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눈에 마지막 목격된 예수님의 모습은 십자가에서 가시 면류관을 쓰시고 온 얼굴에 피를 흘린 채 채찍에 맞아 죽으시고 창에 허리 상하여 피와 물을 모두 쏟으신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끌어내려져 결국 마지막에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눕혀지는 광경이었습니다. 그것이 막달라 마리아 속의 마지막 남은 예수님에 관한 기억이었으니 살아있는 사람으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거기 계신 그분을 어떻게 예수인 줄 알았겠습니까? 그녀는 만약 예수님의 시신을 그들이 어딘가로 옮겼다면 거기가 어디인지 알려주기를 간청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셨습니다. "마리아야!" 이때 비로소 마리아는 그분이 예수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의 이름을 부르실 그때 자기를 이름으로도 불러주시고 이름만으로도 자기를 알아주시는 살아생전 예수님의 친밀함을 그녀는 느낄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서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의 하나님 내 할아버지의 하나님 내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때 그것이 신앙의 뿌리가 되어서 우리의 마음에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그렇게 말하는 그 사람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어야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청교도들이 담긴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신자에게는 아버지 하나님은 있지만 할아버지 하나님은 없다.'라는 말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누구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버지가 신자이기 때문에 아들이 아버지 덕에 신자가 되었다면 그에게는 하나님이 할아버지 하나님이 될 텐데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신앙은 모두 개인의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개인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 몸의 피붙이처럼 알고 계십니다. 이름으로도 우리는 그분의 마음에 새겨진 사람들입니다. 그 만남은 예수님과의 영적인 만남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만 의식될 수 있는 만남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에 잠시 누우신 것도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든 사람 중 이처럼 당신을 간절히 찾는 자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사랑과 친밀함을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절망과 슬픔의 긴 터널을 통과했습니다. 2년 반이나 계속되는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 많은 사람이 경제적으로 좌절을 경험하고 죽음을 선택했는가 하면 그와는 비교되지 않는 더 많은 사람이 코로나 질병으로 죽어갔습니다. 많은 사람이 일터에서 내몰리고 사업장이 문을 닫고 가정의 경제가 무너지고 온 가족이 고통을 당하고 질병 속에서 절망과 슬픔을 한껏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이것도 전 세계적인 고통에 비하면 우리는 그래도 가볍게 지나간 것입니다. 인도에서 들려왔던 이야기는 한동안 우리의 마음에 눈물이 멈출 수가 없게 만들었습니다. 선교사를 포함해서 만 천 명 이상의 시체를 들판에 깔아놓고 거기에 석유를 뿌려서 한 번에 태워버리는 일들이 매일매일 계속된 것이 팬데믹 상황 속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왜 이런 어마어마한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났고 차 대전 차 대전 못지않게 수많은 사람이 수백만 명의 사람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아직은 적절한 대답을 모두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히 깨달은 것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상이라고 생각하고 너무나 당연하게 누리던 모든 것들이 사실은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우리를 긍휼이 여기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돌봄 속에서 우리의 일상이 지탱되어 왔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계를 붙들고 계시고 인류를 두 손안에 붙잡고 우리를 당신의 품에 안고 있는 동안에만 우리에게 일상이 가능했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과학을 광신하는 많은 사람에게 우리는 실망하게 되었습니다. 현대의 발달한 과학기술로도 인류가 이렇게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뼈저리게 경험한 년 반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죽고 우리는 살아남았습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의로웠기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우리들보다 죄가 많았기 때문이라고도 우리는 믿지 않습니다. 다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계획이 그들은 데려가셨고 우리는 남겨두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끔찍한 팬데믹의 마지막 탈출구 앞에 서서 터널 끝에서 찬란한 빛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오기까지 우리를 지켜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이 큰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깨닫게 해주신 우리 주님의 은총을 노래합시다. 이렇게 살아있는 것을 선물로 여깁시다. 이제는 코로나 팬데믹이 찾아오기 전에 철없던 우리의 삶을 접고 성숙한 삶을 삽시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인정합시다.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읍시다. 팬데믹 상황 속에서 물론 많은 사람은 실망하고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 중에는 팬데믹 때문에 믿음을 잃어버린 사람보다는 오히려 이 시련 때문에 하나님이 얼마나 꼭 필요한 존재인지 깨달은 사람들이 더 많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성도들이 더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 사람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현대에 가능합니까? 예배에 나오고 싶어도 법적으로 예배에 나올 수가 없고 주님을 찬양하고 싶어도 주님을 찬양할 수가 없고 지체들을 섬기고 싶어도 법으로 섬길 수가 없고 주님을 위해 복음을 전하려고 해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이런 일들이 어떻게 현대에 가능하겠습니까? 꿈꾸지도 못했던 일인데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거기서 우리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를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상한 갈대와 같은 존재였고 꺼져가는 등불의 심지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 속에서 많은 사람은 간절히 주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평화로울 때 만나지 못했던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팬데믹 속에서 만났습니다. 저는 코로나 팬데믹 상황 속에서 마음으로 은혜의 부흥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마음에 눈물은 그치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어루만져주시는 은혜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은 텔레비전 앞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평화롭게 예배당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결코 일상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때문에 가능했음을 비로소 깨닫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절망과 슬픔 속에 있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여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슬픈 마음으로 언덕을 올랐고 무덤이 열리고 예수님의 시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절망으로 찢어지는 마음이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뵈옵는 순간 모든 좌절과 절망은 소망과 기쁨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부활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교회의 질서상으로도 예수님이 이러시면 안 되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나타나서 부활의 모습을 보여주시려면 그래도 사도들에게 먼저 보여주시고 사도들은 가서 모든 교인에게 '염려하지 마라.‘,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우리가 보았다.'라고 해야 그래도 교회의 지도자로서 면목이 서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과 전혀 상관이 없이 이름 없는 여인들 한때는 죄인이었던 여인들 그리고 세상에서 멸시받았을 하찮은 여인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의 부활의 영광스러운 첫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사도들도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한 막달라 마리아와 이 여인들의 증언을 듣고서야 비로소 예수님의 부활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가르쳐주는지 아십니까? 성별과 연령과 세상의 지위와 신앙의 경력에 상관없이 지금 예수를 그리워하는 자 지금 예수를 사랑하는 자 지금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에게 자기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여인들은 황량한 무덤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부활의 첫 증인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경험하고 있는 좌절과 슬픔 팬데믹 상황 속에서 겪은 많은 고통과 슬픔이 무덤이라면 바로 그 무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갈망하기만 하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절망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희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좌절해보지 않은 사람이 어떻게 승리를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신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견했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는 것처럼 절망의 무덤 앞에 서 있던 모든 사람 중 주님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결국 희망의 주님을 노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고 다시 그 무덤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 여인들의 마음은 올 때와 얼마나 달랐겠습니까? 올 때는 슬픔과 좌절 억누를 수 없는 고통과 허무가 이 여인들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돌아갈 때 비록 예수님의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이 여인들의 마음은 기쁨과 사랑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체를 발견하고 장례를 지내드린 것과는 비교되지 않는 말할 수 없는 마음의 기쁨과 평안함이 소망이 되어 그들의 마음속에서 솟아났습니다. 이게 바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예수의 생명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여인들은 모든 일을 제쳐놓고 부활의 기쁜 소식을 모든 사람에게 전하고 싶었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소망이 되었고 절망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사신 것을 발견했을 때 죽었던 그녀들의 영혼도 모두 함께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III. 적용과 결론
그러므로 오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겪고 있는 좌절과 고통이 아무리 큰들 예수님을 사랑했던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 앞에서 통곡하고 있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이겠습니까? 거기서 주님을 갈망했더니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어떠하든지 답은 우리 예수님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만들지만, 답은 우리에게 없고 주님께 있습니다. 주님을 간절히 찾으십시오. 그래서 주님이 나타나서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하게 해드리십시오 "네가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찬양)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고자 주를 갈망합니다
주여 어찌합니까
지금도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전심으로 자신의 얼굴을 구하고 눈물로 자신을 갈망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시는 주님이신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며 사는 여러분이 되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