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당할 때 드리는 기도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시 86:1-2)
녹취자: 양현정
언제인지 알 수는 없지만 다윗이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고통을 받는 날에 지은 시 입니다. 최근에 며칠 전 아침 이 본문을 읽으면서 감동을 받은 것이 있어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제일 먼저 시인은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라고 말합니다. 모든 언어가 그렇듯이 원래 언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제대로 다 담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원래 그 글이 나온 원어로 쓰인 것을 보고 싶은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경건하오니" 이 단어가 ‘하시드' 입니다. 여러분들이 너무 잘 아는 ‘헤세드'라는 단어의 피동명사입니다. ‘헤세드'를 입은 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지난 번 조엘 킴 총장이 와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가장 심오한 단어 10개를 꼽으라 하면 그 안에 들어갈 단어중 하나가 이 ‘헤세드'입니다. 어떤 학자는 일평생 ‘헤세드'를 연구했다고 합니다. 자기는 큰 태산 아래에서 삽질을 하고 있는 느낌이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개념이 ‘헤세드'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경건하오니"라고 했지만 원래 의미대로 말하자면 나는 ‘헤세드'를 입은 자이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사실은 목숨입니다. ‘네페시'라고 되어 있는데 ‘네페시'에서 1인칭이 붙었습니다. 결국 이것을 성경에서 ‘하시드'를 성도라고도 번역을 합니다.
아무튼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제 ‘헤세드'의 개념은 시편에서 ‘헤세드'를 강조할 때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 속으로 들어간 것을 보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인자하심을 모든 세계에 베푸시고 사람뿐만 아니라 이 땅에 있는 짐승들도 하나님의 헤세드의 은덕을 입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좁은 의미에서 보면 절실하게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성도들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언약관계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라는 뜻입니다. 시인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냐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런 속에서 자신이 이제껏 하나님 앞에 서 있는 것이 자기의 공로나 의로움을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신 은총을 의지해서 있는 것이니 그러니 하나님이 나의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것입니다.
'보존하다'라는 이 말은 ‘카멜라'라고 하는데 전쟁할 때 성이나 요새 같은 것들을 지키는 그런 그 동작을 의미합니다. 잠언 4장에 “지킬만 한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키라" 할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결국 그것은 전쟁하듯이 의지를 가지고 보호하고 지키는 것입니다.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가 되었으니까 하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 근거는 무엇이냐면 ‘나는 하나님과 언약 관계에 있는 사람이 아니옵나이까. 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미 언약 관계의 헤세드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그러니 나를 보호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의 기도를 방해하는 것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 가장 큰 것이 가책. 죄의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기도를 가로막는 적이 많이 있습니다. 오류에 빠지거나 잘못했을 때에는 자기가 잘못한 것에 대한 깊은 상처와 자책감들이 많이 남아 있어 기도를 방해합니다. 집요하게 기도를 방해합니다. ‘네가 한 일을 생각해봐라. 너의 잘못을 기억해 봐라.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느냐' 이러한 손가락질이 자기 내면의 세계로부터 집요하게 나타납니다. 그 때 기도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늘 우리에게는 있는 일이고 시선을 하나님께로 향하고 내가 누구인가라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내가 선하고 경건하게 삶으로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헤세드'를 일방적으로 받음으로써 그 언약관계 안에 불림을 받았고 거기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그것이 말하자면 우리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일에 방해하지 못하도록 떨쳐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뻔뻔해지고 죄의 정당한 의식을 치워버려야 하는 뜻이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고 지금 내가 주님을 눈물 흘리며 의지할 수밖에 없다’라는 마음을 갖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신앙의 초보였을 때는 이런 덫에 많이 걸립니다. 삶도 온전하지 않고 젊은 시절에 수시로 욕망과 이 세상에 대한 욕심에 더럽혀집니다. 기도하면 여지없이 정죄와 가책을 손가락질이 오고 가고 이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을 찾아가는 경건한 몸부림이 쉽지 않은데 이런 속에서 영혼을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또렷하게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하시드다. 나는 일방적인 하나님의 헤세드를 덧입은 당신과의 언약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다. 무엇으로도 변할 수 없으며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냐 무엇으로도 이것을 끊을 수 없다'라는 그 고백을 하면서 주님 앞에 나아가기를 멈추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구원하소서’라는 것은 자기를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어려움 속에서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천국 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출해 달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정을 토로합니다. 자기를 ‘하시드'라고 한 것은 신앙의 고백이고 자신의 심정은 ‘의지하오니'라고 말합니다. 분사입니다. ‘바타흐'라는 동사입니다. 이 동사는 시편 42편 43편에 보면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것이 바로 ‘바타흐'라는 동사를 번역한 것입니다. ‘바타흐'는 여러 가지 동사로 쓰입니다. ‘의뢰하다’, ‘의지하다’, ‘신뢰하다’, ‘소망을 갖다’, 특히 ‘hope in God' ‘하나님께 소망을 두다’ 할 때 쓰는 말입니다. 아주 구약 성경에서 많이 쓰이는 단어입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하시드’다. ‘하나님의 헤세드를 입은 사람이다’라는 것을 생각할 때 따라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헤세드'와 하나님의 ‘에메트.' ‘신실하신’ 두 개는 짝으로 항상 움직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우리의 공로 전혀 없이 어떤 은택을 입혀 주셨는데 그것이 요동을 치면서 수시로 변덕을 부린다면 그것은 ‘헤세드’가 될 수 없습니다. ‘헤세드'는 그 자체가 일관적이어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를 사랑해도 사랑할 때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랑이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들쑥날쑥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일관되어야 합니다. 상대방이 때로는 힘들게 하고 어렵게 할 때조차 사랑이 계속될 때 이 사람 안에 있는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다른 동기에서 사랑을 사랑합니다. 외모를 본다든지 자기 이익과 관련하든지 원인이 주어져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원인이 되어 우리를 사랑합니다. 그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멀리 떠났다 돌아와도 하나님은 항상 거기에 계십니다. 그것이 사랑의 일관성입니다.
그 일관성을 바라보면서 일관되지 않은 자기 자신을 비교할 때 결국은 자기 자신을 의지할 수 없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시인의 이 마음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의존입니다. 그래서 그 때 인간의 영혼은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 됩니다. 인간은 인간을 의지할수록 추해 보일 수 있는데 인간이 하나님을 의지할 때 그때 인간의 영혼이 가장 아름다운 상태가 됩니다. 그분에게 결코 버림받을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왜 기도가 안 됩니까? 의지하는 마음이 적으니까 기도가 안 됩니다. 왜 의지하는 마음이 적습니까? 사랑하지 않으니까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 신자들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000 선교사님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해주십시오. 2018년 종합 검진을 하고 그 안에 한국에서 나를 만났으면 반드시 받게 했을 텐데 어머니가 암에 걸리셔서 오늘 내일 하셔서 급히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오히려 차도가 괜찮아지시고 김주희 선교사는 한 달에 8kg가 줄었다고 합니다. 갑상선에서 암이 시작되어 다 퍼졌다고 합니다. 수술을 했는데 다 뜯어내면 목소리를 잃어야 한답니다. 목에 구멍을 내고 호흡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생명도 중요하지만 삶의 질도 중요하니 부분만 떼어냈습니다. 다음 주에 라오스 들어간다 하는데 목소리가 쉰 소리가 납니다. 힘들게 이야기를 합니다. 병원에서 치료할 수 있는 것도 없고 하나님의 기적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할 처지인데 건강에 최대한 신경을 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하고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삶의 명랑함에 관하여’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감사하라. 긍정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몸이 바짝 말랐습니다. 가엾었어요. 여러분 간절히 기도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우리의 인생이라는 게 그런 것입니다. 남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남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언제든지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그런 일이 언제나 나에게 가능하다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럴 때 오히려 그런 생각을 떨쳐 버리면 명랑할 것 같지만 거짓된 명랑함입니다.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다보면서 명랑하게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지막 도달하는 결론은 하나님께 일방적인 헤세드의 은총을 입은 사람은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갓난아이들이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품으로 파고들면서 그러면서 엄마 품에서 엄마를 꽉 잡고 의지하는 것처럼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도록 창조된 존재입니다.
시인은 가장 큰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거기서 또 한 번 훈련을 받습니다. 세상에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하나님 한 분밖에 의지할 것이 없다. 그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하나님의 품을 파고드는 것이 신앙입니다. 요즘 젊은 목회자들을 많이 생각합니다. 왜 교회가 안 될까 후배들을 이렇게 보면 너무 가엾습니다. 젊은 날에 소명을 받아서 열심히 해서 50이 넘고 그랬는데 교회가 안 됩니다. 삶은 궁핍하고 핍절하고 그렇다고 교회를 확 엎어서 새롭게 해보겠다고 하기에는 너무 힘들게 살아온 시간들이 많아 어렵습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깊은 의존의 마음입니다. ‘예수에 살고 예수에 죽고 내 생명이 예수의 십자가에서 흘리는 핏방울에 떠 있다’라는 의미를 갖게 되면 무엇인가 그것을 떨치고 일어날 수 있는 용기가 생기지 않겠어요? 하나님을 의지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합니다. 이 은혜는 ‘헤세드'가 아니고 동사, 명사, 목적어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체가 ‘하난'이라는 동사입니다. ‘하난'은 ‘은혜를 베풀다’라는 뜻도 있지만 호의입니다. 좋게 대해 주는 것입니다. ‘favor'를 베푸는 것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도 이 동사에서 옵니다. 여호와께서 호의를 베푸셨다. 요한이라는 말. ‘요하네스. 존’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옵니다. 라틴어의 ‘이와네스’라는 단어들이 다 나옵니다. 결국 시인이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나의 공로를 보지 마시고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십시오. 당신의 선하신 성품으로 나를 잘 대해 주십시오. 후하게 나를 대접해 주십시오.'하며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 제목의 핵심입니다. 앞에 신앙고백, 내면 묘사라면 이것은 기도의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그 내용이 ‘하나님, 나에게 후하게 주십시오. 나에게 당신이 나에게 주시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간구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에서가 장자의 특권을 빼앗긴 다음에 아버지에게 와서 울면서 몸부림치면서 ‘내게도 축복하소서. 어찌 내게는 축복하지 않으시나이까' 울부짖으며 후회하는 광경을 생각해 보세요.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는 모든 것은 내가 결코 나의 공로로 얻었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에게 호의를 베풀어주십시오. 나를 후하게 대우해 주시옵소서. 내가 주를 위해 살겠나이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이기적인 것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의 유익을 위해 구하며 자기의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 해결받기를 원하는 그 마음을 믿음으로 보십니다. 그런 유익이 있습니다.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을 때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전적으로 반성하게 됩니다.
최근 열린신문 나온 간증 중에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이 아기가 아파서 떨어졌는데 병원에서 종양이 있다고 했습니다. 수술하고 아이가 재발하고 하는 과정을 통해 엄마가 깨뜨려 지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내게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내게 호의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그것이 신앙입니다. 살아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을 하는 것이 훌륭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이 이런 마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합니다. ‘콜 하이윰'이라고 나옵니다. 그 날에 전부 동안에 내가 부르짖나이다. 목소리를 내서 누군가를 이름을 부르거나 소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한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다급해졌는가를 보여줍니다. 졸듯 자듯 하는 기도가 아니라 심령에서 솟구치는 기도입니다. 펌프를 박으면 옛날에는 남자들이 때리면서 파이프를 박습니다. 얼마큼 다 박고 나면 수맥이 터져 물이 위로 솟아납니다. 그것처럼 이 속에서 기도가 솟아납니다. 깊이 박아야 수맥이 터지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도 깊이 들어가야 기도의 영이 터져 나옵니다. 그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으므로 시인이 인생의 위기에서 건져냄을 받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이렇게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이렇게 신앙을 가지고 이기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맡기고 일체의 염려하지 말고 그리고 ‘나의 인생이 주님의 손에 있습니다. 내 인생이라는 것은 주님의 핏방울에 떠 있고 나를 위해 기도해주는 성도들의 눈물방울 위에 떠 있는 가랑잎 같은 것이 나의 인생입니다’라고 할 때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고 살아날 소망이 생깁니다. 네 단어 ‘하시드', ‘바타흐', ‘하난', ‘카아라' 기억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