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의 본질적 요소의 회복에 관한 연구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롤 예배할지니라.”(요 4:23)
녹취자 : 김세나
우리는 다양한 문제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최근 50년 사이에 이처럼 어려운 목회 환경을 직면하였던 때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약 30년 전 열린 교회를 개척했고, 그때와 지금을 비교해 보니 그때는 거저 목회하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상황이 있으면 사람들은 대책을 세우기 마련입니다. 학자들은 연구하고, 목회자들은 궁리를 하고, 현실적인 타계를 위한 여러 가지 대안들을 내놓습니다. 인구는 줄어들기 시작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수는 더 빨리 줄어들고, 교회는 점점 문을 닫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고, 자라나는 세대가 없어서 지방의 많은 교회들은 교인이 200명이 넘는 교회들 중에서도 주일학교를 없앤 교회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이러한 교세의 현격한 저하는 도시에서 훨씬 더 심각합니다. 한때 서울의 교회는 커피숍 수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교회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반감과 박해도 심해지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정치가들이 아주 노골적으로 기독교를 조롱하고 하나님 없는 사상들이 팽배해져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우리는 여러 가지 대책을 세웁니다. 그 모든 것들은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나름 쓸모가 있습니다. 당연히 상황이 생겼으니 대책도 의논해야 하겠고, 방법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러한 모든 것 속에서 본질적인 문제를 한번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예수님이 예배에 대해 직접 가르쳐 주신 가장 명징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은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는데, 그 예배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려야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입니다. 그리스어 원어로 보면 이 부분은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도대체 우리의 선교 현실이 쉽고 녹록하였던 적이 언제 있습니까? 어느 시대든 모든 목회자들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하였고, 세상이 두 팔을 벌리고 기독교의 복음을 듣겠다고 우리에게 마중 나온 적은 없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박해가 있었고, 어느 때에나 기독교를 반대하는 세력들이 있었으니 정도가 지나치다고 하지만 그러나 오늘날 우리 앞에 펼쳐지는 이 선교의 환경이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결국 이러한 속에서 우리는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인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기독교에 대해 반성을 하고 여러 가지 대안을 내놓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우리의 대안이라고 할수 있는 것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고서는 교회의 모습은 절대로 변화되지 않습니다.
저는 몇 해 전에 영국에 가서 시티 미션을 담당하는 목회자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아주 활동적으로 사역하고 있는 그들의 선교상황을 돌아보았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영국 교회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전체적으로는 죽었습니다. 이것은 이미 그들이 1968년도 파리에서 학생 혁명이 일어나고, 그 자유의 기운이 온 유럽에 퍼졌습니다. 그리고 유럽에 퍼진 것들은 다시 남미, 동유럽뿐 아니라 호주까지 날아갔고, 이것들이 오늘날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있는 차별금지법을 비롯하여 모든 자유주의적인 성향들을 폭발하듯이 토해 놓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본까지도 그랬습니다. 그래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6․8혁명의 기운이 우리나라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는 이미 군사독재 시대였고, 철저하게 병용으로 통제된 사회였기 때문에 그러한 운동이 들어올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는 역설적으로 말하면 자유주의적인 기운이 훨씬 늦게 들어오는 유익을 얻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운동으로 인해서 유럽의 교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선교환경이 초토화되다시피 하였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인간의 이성을 믿게 되었고, 데카르트 이후로부터 내려오는 서양철학의 근대사상에 물들어서 모든 진리의 세계를 객관적인 진리의 세계에서 주관적인 인식의 세계로 이동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속에서 결국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모든 진리의 판단을 내리는 기준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 진리는 인간에 의해서 생산 되어져 나오는 것이고, 이로 인해서 이어져 나오는 니체 이후 다원화된 세계관 속에서 모든 사람들은 각자 자기가 주체적으로 진리에 대해 결정할 수 있는 존재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지적인 토양 속에서 기독교가 생존하기는 매우 척박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교회는 점점 약화되어졌고, 교회가 점점 문을 닫고, 자유주의화 되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속에서 영국을 방문하였습니다. 놀랍게 성장하는 교회들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집회에 초청을 받아 가게 되었습니다. 켄트라는 지역에 모였는데, 1800명의 젊은이들이 모였습니다. 10대, 20대, 30대, 40대가 대부분이었습니다. 1800명의 영국인들이 은혜를 받겠다고 대학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우리 강사들을 부른 것이었습니다. ‘영국교회가 죽었다.’고 하는 것은 전체적으로 맞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사실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교회는 지금도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더 놀라운 소식이 무엇인지 압니까? 영국이 철저하게 자유주의로 기울고, 성공회도 자유주의로 기울고 동성애와 모든 것을 다 용납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에 최대한 항거하면서 해묵은 오래된 기독교의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있었습니다. ‘프리처치’(Free Church)입니다. 놀랍게도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교인들의 교회는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한 교회를 목회해서는 월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웨일즈에 있는 개혁교회에 가보니까, 한 사람이 8개의 교회를 담임해야 담임목사로서의 월급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까지 초토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프리처치’는 살아나고 있습니다. 아주 빠르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저는 오늘 한국교회에 말하고 싶습니다. 우리 조국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목사와 장로님들이 깊이 예배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은 주변에 있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예배가 어떻습니까? 극장을 가도 15분 전에 도착을 하여 줄을 서서 표를 끊고 팝콘을 사고, 음료를 사고 만발의 준비를 하여 극장에 들어갑니다. 광고부터 시작해서 영화를 상영하기 시작합니다. 늦게 오는 사람 보았습니까? 거의 없습니다. 몇 사람 고개를 숙이고 오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화 시작 전에 모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배는 어떻습니까? 11시 예배인데, 11시 15분 전에 나와 기도하는 교인 별로 없습니다. 10분 전에 모이기 시작합니까? 아닙니다. 5분 전이 되어야 우르르 몰려 들어옵니다. 그리고 예배 정시에 시작을 하여도 2/3밖에 차지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들어옵니다. 그것을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서 예배를 드립니다. 어떻게 됩니까? 순서를 따라 일어서고 앉았다 일어섰다를 반복하여 찬송을 부릅니다. 찬양은 왜 그렇게 힘이 없습니까? 진심이 없습니다. 극치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시간입니다. 설교자가 올라갑니다. 저희 중학교 다닐 때 목사님께서 그러셨습니다. “두 시간 예배드린다고 교인인지 아시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청년이 되니까, “한 시간 반 예배드린다고 교인인지 아시오?” 지금은 한 시간입니다. 한 시간도 안 되는 교회들도 많습니다. 결국 줄어드는 것은 설교 시간밖에 없습니다. 설교 시간이 한없이 줄어들어서 길게 하는 교회가 40분, 30분, 20분, 10분대 접어든 교회도 많이 보았습니다. 설교가 시작됩니다. 예배 견디기는 설교 견디기입니다. 교인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설교자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더군다나 오늘날은 마스크까지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 쳐다보는지 안 보는지도 모릅니다. 주보를 뒤적이며 틀린 글자를 고치고, 심지어 교회 소식을 들여다보고, 헌금 걷힌 것을 보고, 헌금 낸 명단을 세 보고, 가로로 더해보고, 세로로 곱해보고 나누어보고 일인당 얼마나 헌금하였는지 이렇게 하면서 해도 설교는 끝나지 않습니다. 아예 성경을 펼쳐놓고 성경을 읽는 실속파도 있습니다. 그리고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문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조는 교인이 문제가 아니라, 조는 교인을 보고 눈물 흘리지 않는 목사가 문제입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가는 교인들을 어떤 학자고 조사를 하였더니 금방 예배를 드리고 나온 서울 시내 교회의 교인들 중 조사 대상자 10명 중 5명은 잠시 전 들었던 설교 본문이 구약이었는지 신약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고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예배라고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까?
도대체 어디에서 교인들이 변화되겠습니까? 물론 열심히 심방을 해야 합니다. 잘 가르쳐야 합니다. 슬픔도 위로하고, 상담도 하고, 정치도 가르치고 참여하게 하고, 교리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예배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되는 심령의 변화가 없이는 나머지 모든 목회의 방식을 별로 그렇게 가슴을 파고들지 않습니다. 가장 힘든 목회가 무엇이겠습니까. 목양 받을 의지가 1도 없는 사람을 목양하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와도 그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목양’은 주님을 만나고, 은혜의 물에 풍덩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할 때, 그것이 목회가 됩니다. 그 물을 쏟아붓는 것, 거기가 바로 예배입니다.
목사님들, 기억나지 않습니까? 저는 주일학교 다닐 때 설교는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배 끝나고 나면 어른이나 아이나 모두 눈물 흘렸던 기억이 납니다. 제가 신학교에 다녔을 때만 해도 매일 채플을 드리는데, 매일 매일 눈물바다였습니다. 저는 그 속에서 영적인 토양을 먹고 자랐습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립니다.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나서 밖에 나가서 장로님과 목사님들 쭉 서서 교인들이 “감사합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여기가 무슨 음식점입니까? 여기가 무슨 영업장입니까? 찾아와줘서 감사하다는 것입니까? 나 보러 왔습니까? 주님을 만나게 하는 예배도 드리지 못한 채 교인들에게 감사하다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감사입니까?
결국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합니다. 영광을 돌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인가를 빙빙 돌린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깊이 엎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찬양한다.’는 것은 ‘내가 너를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경에서 신학적으로 영광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본질적인 영광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발산적인 영광은 하나님께서 어느 장소에 당신이 계신 효과를 강력하게 나타내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장면이고, 모세가 섰던 불붙지 않는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서 있는 장소입니다. 그런가 하면 효과적인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배에서 구하는 영광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 그래서 우리를 보고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시인하게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영광을 주님께 돌린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결국 예배의 목적은 예배드리러 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은 하늘 높이 계신 곳이고, 자신은 이 땅에 있는 비참한 피조물일 뿐이라는 것임을 예배 시간에 깊이 인정하고 그 분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배입니다. 이 예배의 목적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그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목표에 도달해야 합니다. 그 목표가 바로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의 조건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영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 그러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갈망하는 예배자의 마음입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삼각형을 이룰 때, 그때 그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이 있는 예배가 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입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우리 목회자로서 한번 물어봅시다. 설교를 했는데 온 교인이 눈물바다가 되는 것은 매주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무튼 내가 예배를 인도했는데 예배당이 눈물로 젖은 마지막 예배가 언제입니까? 목회자가 눈물을 흘리면 교인은 겨우 땀을 흘리고, 목회자가 피를 흘려야 눈물을 흘리는 것이 교인입니다. 성령 안에서 드리는 이 예배를 얼마나 우리가 간절히 갈구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모두 그러한 부흥의 끝물을 먹은 사람들입니다. 정말 학식은 오늘날 우리만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해 아는 것도 우리보다 더 뛰어나지 않았던 선배 목사님들이 그 투박한 설교로 사람들의 마음을 후벼팔 수 있었던 것은 진실한 삶과 성령의 능력이 함께 하였던 설교였습니다. 그것이 저항할 수 없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우리 사람들을 후벼파게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마지막으로 부흥의 끝물을 먹을 때, 우리들이 경험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한번 우리의 예배가 정말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인가, 하는 것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이 어떻게 꺾입니까? 자기만을 알던 이기적인 사람이 어떻게 십자가 사랑에 감동하게 됩니까. 예배당을 한번 보십시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리러 오는 성도들이 정말 어떤 마음을 가지고 나오는지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는 일에 우리의 사명이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들을 교인들에게 정확하게 지적하고, 어떻게 우리가 마음을 모아서 하나님 앞에 성령의 임재가 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인가 고민해야 합니다.
선배들은, 특히 청교도들은 이 예배를 드리는데 자신의 목숨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거룩한 예배를 위해 온 힘과 마음을 다했습니다. 이 일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장면 두 컷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첫 번째 컷은 칼빈을 제네바 종교개혁에 불러드린 파렐의 이야기입니다. 칼빈은 잠시 들르기 위해 제네바에 갔습니다. 종교개혁에 참여하도록 요청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써야 할 책도 많고, 연구해야 할 것도 많기 때문에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육체적으로 힘들기 때문에 쉬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파렐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 “휴식이라고요?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휴식이란 없습니다. 그러한 휴식 위에 하나님의 저주가 내리기를 바라노라.” 했을 때 학문적으로는 훨씬 더 뛰어났던 칼빈이 무릎을 꿇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인생이 제네바의 종교개혁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습니다.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학문의 위세에 눌려서입니까? 논리에 굴복해서입니까? 아닙니다. 칼빈에게는 없었던 선배 파렐과 함께 하였던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이 젊은이를 영적으로 굴복시키신 것입니다.
거기로부터 훨씬 더 멀리 떠나서 조나단 에드워즈 시대로 가보겠습니다. 1740년 이후부터 커다란 부흥이 일어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뉴잉글랜드의 1차 대각성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 한복판에 조나단 에드워즈가 있었습니다. 이미 1736년부터 1739년까지 자신의 지역에서 큰 부흥을 경험하였고, 하나님은 그를 사용하셔서 미국 전체에 영향을 끼칠만한 위대한 부흥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엔펠드라는 마을에 8월 어느날 설교 초청을 받았습니다. 에드워즈는 지독한 원고 설교주의자였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손에는 원고를 들고, 한 손으로는 등불을 비춰 보면서 원고를 읽고 설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설교문의 제목이 유명한 <진노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잡힌 죄인들>이라고 하는 설교였습니다. 그 설교문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냥 읽었습니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이 데굴데굴 구르고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진정하십시오. 내 설교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당신들이 이렇게 하면 나는 설교를 할 수 없었습니다.” 진정시켰지만, 별로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그 지역이 뒤집혀 지는 것 같은 성령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이것이 그 유명한 1차 대각성 미국의 대부흥의 시작이었고, 이것을 통해서 미국 전역을 휩쓸며 칼빈주의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내려오는 27권의 저작들은 아직도 기독교의 자양분이 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들에게만 일어난 일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시대, 우리 앞에 있는 모든 사람들, 오늘 교회를 세우고 이제까지 역사해오신 여러 목사님들과 장로님들, 이 성령이 없이 선 교회가 있습니까? 섰어도 이 성령이 없이 지탱된 교회가 있습니까? 유지된 교회가 있습니까? 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변화된 그러한 섬김에 충실할 수 있었던 교회가 있었습니까? 단연코 없었습니다. 켜졌다가 그 불이 더 이상 타지 않는 교회는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아직까지도 그 불길이 타오르는 교회들 중에는 이 능력을 맛보지 못한 교회가 아무데도 없었습니다. 이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 얼마나 현저히 사라져 가고 있는지 여러분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날 교인이 항의의 편지를 썼습니다. 왜 목사님은 설교 시간에 그렇게 우십니까? 그래서 답장을 하였습니다. 당신이 안 울어서 내가 운다고 하였습니다. 너희들이 다 울면 눈물을 그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여러분들은 다윗의 기도를 기억하고 있으십니까?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간절히 눈물 흘리며 매달렸습니다. 우리게 만약 성령이 없다면, 우리가 무엇으로 이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으며 어떻게 이 어두운 세상에서 그들을 빛으로 살라고 그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가 어디에서 보여줄 수 있습니까. 바로 이 예배당에서,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이 주일 예배 시간, 수요 예배 시간에 예배가 살아있어야지 기도회도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주님 못 만나는, 죽은 예배 속에서 드리는 애쓰는 기도회는 기름 안 넣고 띄우려 하는 비행기와 같습니다. 엔진이 돌아가지 않는데, 어떻게 비행기가 뜨겠습니까.
작은 결론 하나를 맺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배 시간에 성령 안에서 드리는 예배가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합니다. 성령이 없어도 그럭저럭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만족하였던 삯꾼의 삶에서 우리를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매달려야 합니다. 교인들에게 기도하라고 족칠 필요 없습니다. ‘이것도 예배라고 드리고 내가 목회를 하고 있나?’라고 생각하고 엎드려야 합니다. 성령의 은혜는 간구하는 사람에게 부어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다음 예배 시간이 내 생애 마지막 예배 시간인 것처럼 거기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들이 회개를 안 하면서 내가 회개해야 합니다. 칼빈이 자신의 제자 멜랑히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당신은 설교할 때 당신의 설교를 듣고 교인이 화가 나든지, 변화되지 않은 교인을 보며 당신 자신이 화가 나든지 둘 중 하나가 되게끔 설교를 하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예배자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탁해 주셨습니다. 장엄한 소명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주의 종의 소명, 그리고 그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현장을 보여 줄 수 있는 목회의 소명, 이것은 바로 예배의 소명입니다. 예배가 변화되어 보십시오. 모든 목회가 변화되기 시작할 것입니다. 새가족으로 등록하고도 교육받지 않고 뺀질거리는 교인 있습니다. 예배시간에 한번 회개해보십시오. 다음 주일에 당장 새가족실 문을 두들기며 참된 신자가 되기 원하니 나를 가르쳐 달라고 할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성령의 임재가 없는 예배를 인도하였던 것에 대해 회개하고, 그리고 목숨을 걸고 나의 이 예배 시간에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물 붓듯 부어 주시길 간절한 간구로 매달리는 우리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번째는 진리입니다. “영과 진리 안에서 예배할지니라.”고 하였습니다. 두 번째 요소는 ‘진리’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예배 시간에 설교하도록 주어진 시간이 있습니다. 저처럼 마음대로 설교하는 교회도 있지만, 대부분 교회는 설교 시간의 제약을 받습니다. 길어야 40분 정도 시간입니다. 그 시간 안에 정확하고 또렷하게, 아주 쉬우면서도 깊이가 있게 진리의 말씀을 전하여 사람들이 변화하도록 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진리의 말씀을 들으면 지루할 것이라 생각하면, 그는 설교자로서 소명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진리에 대해 지루해하니까, 다른 사람도 자기의 설교를 들을 때 지루해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모두를 위해 설교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진리는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설교한 모든 사람들이 회개하고 당신을 믿었습니까? 아닙니다. 나쁜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들으며 더 마음이 강퍅해졌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몫이 아닙니다. 우리의 몫은 정확하게 진리의 말씀을 겁없이 담대하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손을 내밀면 모든 사람이 아니라, 그 진리에 목말랐던 그 누군가는 그 손을 잡아 줍니다. 그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설교 준비를 성실하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설교를 들어보면 금방 압니다. 성실하게 준비하였으면 그런 설교가 나올 수 없습니다. 설교를 얼마나 준비해야 합니까? 많이,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에게 “당신은 얼마나 준비하십니까?” 물으실 것입니다. 짧으면 6시간, 길면 30시간입니다. 다른 것은 안 하는가, 할 때 다른 것 다 합니다. 덜 자고, 덜 쉬고, 매달려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버벅거림 없이 정확하게 쏜살같이 시위를 떠난 화살이 정확하게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것처럼 죄인들의 심장에 꽂혀야 합니다.
15년 전 입원을 하였습니다. 두 눈을 수술하게 되었습니다. (31:38-53, 녹음 불량으로 녹취 안됨) 마음이 허락을 하지 않습니다. 외출증을 끊어서 입원한 병원 옆에 있는 교회에 오전 예배와 오후 예배를 나갔습니다. 명예와 관련된 일이어서 교단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한 교회는 장로교 교단에 속한 교단이었고, 한 교회는 장로교가 아닌 복음주의 교파에 속한 교단이었습니다. 오전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장로교 교단이었습니다. 나이가 50쯤 되어 보이는 젊은 목사인데,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시종일관 ‘주의 종을 잘 섬겨야 복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 나이로 보아도 그러한 설교를 할 나이는 아닌 것 같고,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주의 종들에게 잘해 주었더니 그 자손들이 복을 받았는지를 구구절절 설교를 하는데 나 이외에 아무도 듣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말입니다. 저는 설교 시간의 기본자세는 부동자세라 생각하니까, 똑바르게 앉아 설교를 다 들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기도를 하는데, 너무 마음이 상하였습니다. 세상에, 주의 종을 잘 섬기는 것도 진리중 일부겠지만, 그 황금 같은 주일 예배 시간에 교인 400-500명을 모아놓고 얼마나 설교할 것이 많은데 저 내용을 물고 늘어지면서 주의 종을 가슴 아프게 하면 저주받는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저 젊은 나이에 하고 있을까, 생각하며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다른 교회에 갔습니다. 거기는 어느 교파에 속한 교회였습니다. 설교를 하는데 똑바르게 앉아 들었습니다. 도대체 신학을 공부하고 성경을 연구하면서 평생을 살아왔는데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도통 못 알아듣겠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안개속을 헤매는데, 그것이 심오하여 안개 속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너무 평범한 하나님의 말씀 하나를 놓고 말씀을 떠나서 상상의 날개를 펴면서 돌아다니는데, 나중에 30분쯤 지나니까 두통이 납니다. 끝나고 나서 기도를 하는데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 갔던 교회는 주제는 명료하였습니다. ‘주의 종을 섬겨라.’ 그런데 오후에 드린 교회는 도대체 뭘 말하려는지 모르겠었습니다. 저는 확신하였습니다. ‘그 설교자도 모를 것이다.’ 본인도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르고 저도 몰랐습니다. 그것을 예배라고 인도하고, 똑같이 밖에 서서 ‘감사합니다.’라를 연발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감사합니까. 그리고 병원에 돌아와 기도하였습니다. “하나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이것이 한국교회입니다.”
우리들이 설교를 들을 기회가 별로 없습니다. 오랜만에 설교를 들어보았습니다. ‘정말 어떻게 할 것인가.’ 였습니다. 내린 결론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전철에서 약을 팔아도 그렇게 팔면 안 팔리겠다 생각하였습니다. 약을 팔아도 그렇게 팔면 안 됩니다. 정성을 기울여 연구를 하고, 얼마나 이 설교를 잘 하였는지 보면서 탐구를 해서 그것을 철저하게 준비하고 버벅거리지 않고 쓸데없는 말 없이, 아주 깔끔하게 아주 잘 차려진 한 그릇의 음식처럼 사람들에게 내놓아야 합니다. 그 일을 하라고 목사가 된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칼빈이 자신의 정체성을 뭐라고 불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종, 칼빈’이라고 하였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이라고 하였습니다. 자신의 아호 대신 쓴 것이 그것입니다. ‘The servant or Gospel of Christ’-그리스도의 복음의 종 오웬. 하나님의 말씀의 종 오웬. 모두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말씀과 연관 지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목사의 정체성입니다. 요한복음 1장 4-6절에서 말합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이 났나니 이름이 요한이라. 그가 증거하러 왔으니 그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빛이 아니요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갖게끔 만들어 주는 일들을 위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종으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일에 온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목사는 행정가일수도 있고, 유능한 기획가일 수도 있고, 예술에 대한 특별한 재능이 있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운동가일 수도, 정치가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말씀이 종이 아니면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매여서 철저하게 설교를 준비하고 그 설교를 익숙한 방식으로 설교해야 합니다. 버벅거리면 안 됩니다. 아무것도 안 들었습니다. 원고를 잔뜩 써가지고 왔습니다. 제가 이것을 펼쳐 놓고, 이렇게 하고 읽으면서 강의하면 들으시겠습니까? 교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못하는 것은 교인도 못 합니다.
중국 선교를 하면서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목사도 없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사람도 심지어 없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우후죽순처럼 전파되어 나갑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회심합니다. 제가 만난 형제는 예수 믿은지 2년 6개월 되었는데 6천 명 교회를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만났습니다. 너무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름대로 함께하십니다. 혼란스럽기는 합니다. 어떻게 이 복음이 놀랍게 전파되었는가 듣게 되었습니다. 시골에서 중학교까지 의무교육입니다. 고등학교를 아이를 보내려면 그 당시로 시골에서 농사를 지어서 남는 모든 것을 학교에 내야지 한 아이를 고등학교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농민들이 꿈도 못 꾸었습니다. 이 아이들은 시골이 싫으니까, 60년대 방직공장에 다니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였던 젊은이들처럼 무작정 도시로 올라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선교사들이 보고 전도자들과 함께 전도를 합니다. 그들에게 잘 수 있는 숙소와 직장을 제공해 주고, 예수를 믿게 만들어주고, 헌신 되게 만듭니다. 너무 은혜를 받고 이제는 나는 도시에서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 자신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을 자신의 동족에게 전해야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은 지 6개월, 1년밖에 안 되었습니다. 신학이라는 것은 공부한 적 없고, 겨우 성경 읽고 예배드린 것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전도자로 파송을 합니다. 예수 믿은지 6개월밖에 안 된 자들을 어떻게 전도사로 파송하는가 물었더니, 그 놀라운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설교를,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기가 막힌 설교를 짜깁기 하여 만들어서 잘 다듬어서 A4용지로 3-4장쯤 되게끔 기가 막히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 형제, 자매들이 밤이나 낮이나 완벽하게 외웁니다. 그것을 얼마나 들려 보내는지 물었습니다. 한 15편 정도 만들어서 들려 보낸다고 합니다. 그 대신 연습하고,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연습하고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여 15편은 눈 감고도 아주 원고 하나 없이 일목요연하게 유창하게 중국어로 설교하도록 만들어서 보내는 것입니다. 그 농민들이 평생 공산주의 유물론에 절어 있던 사람들을 초청하여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하나씩 둘씩 모인다고 합니다. 우리는 그 현장을 보면서 자라지 않았습니까.
초등학교 다닐 때 전도 부인이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장에서 자기 인생을 사마리아인처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내 말 좀 들어 보십시오. 나는 어릴 적 남편을 잃어버리고 과부가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일곱이나 되어서 저는 빌어먹으러 다녔습니다.” 이러면서 시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쓰레기통 같은 곳에 올라가 설교를 하면 사람들이 길 가다가 하나씩 둘씩 모여서 어떤 때는 20명, 30명씩 됩니다. 그러면 눈물 흘리고 땀을 흘리며 전도 부인이 전도를 합니다. 실제로 저는 어린 나이에 거기에서 똑똑하게 이것을 적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그러한 역사가 중국이라고 안 일어나겠습니까?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완벽하게 아주 깔끔한 문장으로 철저히 설교를 외우는 것입니다. 그것을 한 몇 개월 동안 하면서 연습하고, 연습하고, 연습해서 전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없습니다. 왜 입니까? 한 곳에서 설교를 하면 15편의 설교로 밑천이 드러날 텐데, 여기에서 3편 전하고 다른 동네로 이동을 합니다. 그러면서 복음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한 교회에서 설교 테이프를 전해달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600명이 모이는데, 목회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20년 전 일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듣다가 은혜가 받았는데, 그것을 보내주시면 그것을 중국말을 달아 주일 예배에 틀어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요지는 이것입니다. 교인들이 깜짝 놀라게 설교해야 합니다. ‘그것은 류응렬 교수님 같은 특별한 분에게 주신 은사이지.’ 은사와 사명을 혼돈하시면 안 됩니다. 그러한 특별한 은사를 가지고 태어난 분도 있지만, 사명은 우리 모두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설교 준비에 기울이는 절대적인 시간이 모자랍니다. 오히려 지적으로나 많은 것을 잘 갖추어진 목사님들은 설교 준비에 시간을 많이 씁니다. 그런데 모자라는 목사님들은 시간을 그렇게 많이 들이지 않습니다. 설교에 대한 기대 자체가 별로 없습니다. ‘내가 설교를 할 때에 온 교인이 뒤집어 질 것이다.’ ‘온 교인까지는 몰라도 1/3 정도는 눈물 없이는 예배를 못 드릴 것이다. 누군가는 인생이 바뀔 것이다.’ 그러한 확신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나쁘게 말하면 매일 매일 때우는 것입니다. 심지어 더 나쁜 경우는 무엇인지 아십니까? 표절입니다. 인터넷을 켜고 들어갔더니 누가 제 설교를 합니다. 토시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자기 이름을 달아 긴 시리즈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책을 그대로 뜯어놓고 설교하는 것 같은 것입니다. 이것은 범죄입니다. 파렴치한 일로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드립니다. 본인이 설교가 정말 딸리면 차라리 스펄전 설교를 놓고 요약을 잘 하십시오. 진리의 요소가 깃들여져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이야기하십시오. “이 설교는 내가 스펄전 목사님의 설교집을 읽다가 너무나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내 속에서 재창조하여 여러분들에게 설교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존경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읽고, 읽고, 외우고, 외웁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다 마친 후에 산에 올라갑니다. 그리고 원고를 다 외웁니다. 나무들을 교인들이라 보고 설교를 합니다. 완벽하게 설교를 다 외운 다음에 와서 유창하게 쏟아 놓습니다. 그것을 일주일에 한 번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수요예배, 금요예배는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좀 봐줍니다. 그리고 전도사님들이나 부목사님들에게 맡길 수 있지 않습니까. 주일 예배는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설마 하고 나왔다가 ‘와’ 하고 돌아가게끔, 정신이 번쩍 나도록 벼락을 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게끔 그렇게 하고 돌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자기 자신이 하나님께부터 받은 설교가 없으면 설교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 준비는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져야 합니다.
저는 반대로 물어보고 싶습니다. 자신이 회개의 눈물이 있는 사람들만 교인들이 회개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것을 목표로 합니다. 자신이 그러한 것이 없는 사람은 결코 남을 향해서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목표로 한다면 바리새인입니다. 자기도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 하라고 하니까 말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우리 모두에게 질문해 보고 싶습니다. 최근에 성경을 읽다가 눈물을 비처럼 쏟은 적이 언제입니까? 어제 권성수 목사님이 “마음을 찢어야 목회가 된다.”고 말씀을 하셨는데, 성경을 읽다가 마음을 쥐어 뜯을 정도로 통증을 느끼면서 아팠던 적이 언제입니까? 하나님은 설교를 그렇게 쉽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 설교를 결코 쉽게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그 말씀을 통해서 설교자의 심장을 너덜너덜하게 찢으시고, 피의 짓이기신 다음에 비로소 우리가 설교할 때 핏방울이 튀어나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방지일 목사님이 100세가 넘으셔서 목회자와 선교사의 모임에 나오셔서 또랑또랑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은 문제입니다. 피가 없습니다. 설교에 피가 없습니다. 기도에 피가 없습니다.” 그게 한 시대를 살았던 선배 목사님의 진단입니다. 그렇게 설교자 자신이 아주 아름다운 설교를 해서 설교의 어떤 모본을 남겨야 되겠다라는 그러한 방식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심령을 찢으면서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피가 되고 살이 되어서 쏟아져 나오는 것입니다. 설교는 한 사발의 피입니다. 일생 동안 그 진리의 말씀과 함께 살고, 특별히 전해야 할 말씀에 자신의 심령이 찢어져 그 속에서 자신의 모든 피들이 고여있는 한 사발의 토혈의 설교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듣는 입장에서 강단 아래에서 설교를 이렇게 들으면 (48:21-33, 녹음 불량으로 녹취 안됨) 그래서 헬무트 틸리케라는 독일의 신학자가 이야기하였습니다. “주일날 전하는 설교자의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되려면 일주일 동안 그 진리의 증언을 붙들고 피를 흘리는 삶을 설교자가 살아야 한다.” 그래야지만 그것이 주일날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지, 성경을 설교한다고 하여 그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교인을 위해 아무리 많이 기도하여도, 결국 그 영혼이 영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야 변화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도는 그렇게 하는데 먹일 말씀이 없습니다. 기도 응답이 희귀해 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변화시키고, 말씀으로 그를 꺾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제는 무엇입니까. 목회자 자신 속에 예배자로서의 처절한 심령, 가슴을 쥐어 뜯는 그러한 몸부림이 있어야 합니다.
비유를 하자면 이것입니다. 설교는 목회자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진리에 자기가 깨뜨려집니다. 마음이 가루가 됩니다. 그 가루에 눈물을 쏟습니다. 반죽을 합니다. 그것을 지식과 학식으로 아주 훌륭한 떡을 빚습니다. 그것을 성령의 화덕에 넣고 굽습니다. 구워진 그 빵을 사랑이 가득찬 마음으로 성도들에게 성찬을 떼어주듯 나누어 주는 것이 바로 설교입니다. 자기 부수어진 가루가 있습니까? 눈물로 반죽이 됩니까? 혹은 피로 반죽이 됩니까? 성령의 오븐에 구워집니까? 그리고 진짜 눈물 어린 어미의 마음으로 가슴을 풀어 젖을 물리는 어미의 심정으로 그 떡을 떼어 성도들의 입에 넣어주는 것입니다. 안 먹겠다고 도리질 치는 아이를 달래며 달래며 부드러운 말로 달래며 입을 열어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 떡의 참맛을 보게 해 주는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진리가 너무 희미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예배 시간 속에 설교가 기대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렇게 목회의 토양을 바꿔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단순히 운동을 하고 회의를 하고, 무슨 기구를 조직해야 할 복잡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 앞에 내 양심과 나의 모든 것을 다해서 눈물로 이 예배를 위해 기도하고, 나를 먼저 깨뜨린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할 것이며, 그리고 이 설교를 나는 목사로서의 모든 양심을 걸고 더 이상 최선을 다할 수 없다는 마음으로 모두 쏟아부으며 설교를 준비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 합니다. 그때 설교 몇 편만 연달아 폭발하면 교회는 여러분들이 보던 교회와 완전히 다른 교회가 될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가 진리의 사람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깨뜨려지는 적이 언제입니까?
(찬양) 우리 죄와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아들아, 됐다. 내 종아 됐다. 이제 그만 울거라. 가엾구나. 네가 그렇게 예배를 위해 눈물을 흘리고 설교를 위해 통곡하고 있느냐? 이제 그만 울어라. 내가 네 마음을 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사도요한이 나옵니다. 그는 사랑하는 가족과 교회를 등지고 절해고도의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씩씩하였습니다. 모든 핍박과 고난을 견뎠습니다. 그런데 그 노 사도가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그리스어 원전에 보면 ‘크게 통곡하였다.’고 나옵니다. 언제였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두루마기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인봉이 되어 있습니다. 저것을 뜯어야 계시의 뜻을 알겠고, 그 계시의 뜻을 알아야지만 선포하겠는데 하늘에서나 땅에서나 아무도 저 인봉을 뗄 사람이 없다, 계시는 봉인되었다, 알려질 수 없다라는 선언이 있었을 때 그 꿋꿋하던 노 사도는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계시의 말씀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깨달을 수 없기 때문에, 깨닫지 못한다면 선포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아이처럼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것이 주의 종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모두 설교한다고 한 세기에 몇 사람 나올만한 그런 설교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우리의 주의 종으로서의 마음의 양심을 걸고 “나는 매 순간 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말씀의 종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결코 잘하지는 못하였지만, 이 사명을 잊은 적이 없으며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들기 위해서 나의 모든 것을 다 하였고, 나머지는 부업이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으로 하나님 앞에 평가받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진리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저를 포함하여 우리 모두에게 오늘 결심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깊이 깨어지며 그 말씀의 사람으로 다시 빚어져 가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와는 신앙 노선이 조금 다르지만, 요한 웨슬리는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사람이었습니다. 60년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났고, 일 년에 평균 1200편의 설교를 했고, 그가 말을 타고 다닌 거리는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의 전설적인 목회사역으로 어마어마한 부흥을 이루었고, 감리교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저도 그 교회에 가본 적 있습니다. 목회자 관광객이 들리는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거기에 가서 어느 목회자가 안내하는 분에게 물었습니다.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성공을 이루셨는데 비결이 무엇입니까?” “정말 아시기 원하십니까?” “예. 정말 알고 싶습니다.” “정말이요?” “예.” “그러면 저를 따라 오십시오.” 강대로 데리고 갔습니다. “올라가십시오.” 그는 따라 올라갔습니다. “이 의자에 엎드리십시오.” 엎드렸습니다. “지금부터 통곡하십시오. 그게 웨슬리 목사의 성공의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너무 사랑하셔서 보호하십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망하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선교적인 현실에 너무 비관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러한 심령으로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깨뜨려지며 나를 깨뜨리고 변화시킨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수 있는 설교자로서의 주일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여러분들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