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지식을 따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7)
우리는 가정의 대의에 대해서 4주째 살펴보고 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것만을 가리켜서 신앙생활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정말 신앙생활이라 부르려면 우리 자신의 영혼과 마음에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이 넘치도록 충만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됨으로써만 구원 받은 우리들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서 창조의 목적대로 살 수 있고 또 그렇게 창조의 목적대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해 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지정하신 인간의 자리, 거기에서 인간에게 합당하게 기대되는 행동, 이것들을 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해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하나님께서는 가정의 각 구성원, 부모는 자식에 대해 자식은 부모에 대해 각각 있어야 할 자리와 합당한 행위를 지정하셨고 또 이와 같은 원리는 남편과 아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I. 아내에 대한 남편의 사랑
아내에 대한 남편의 관계, 그리고 그 자리가 무엇인지를 살펴봄으로써 가정의 대의를 살펴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남편에 대하여 아내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두 가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A. 연약한 그릇
이 그릇이라는 말은 희랍어로 ‘스큐오스’(σκεὖο) 라고 하는 말인데 어떤 특정한 그릇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담는 모든 용기의 총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편지 속에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쓰시는 그릇들이 있는데 금 그릇도 있고 질그릇도 있다고 우리에게 비유로 말하였습니다. 이것은 결국 사명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가는 길에서 회심하였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제 사울이 변하여 바울이 될 그 사람에 대해 이 사람은 나라와 임금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택한 나의 그릇이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담는데 사용되는 아주 소중한 도구 이것을 그릇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내를 연약한 그릇이라고 하였을 때 우리가 연약하다는 말에 주의를 집중하기 전에 그릇이라는 말에 먼저 주의를 집중하여야 합니다.
흔히들 여성은 결혼하면 남성의 부속품 정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여성들도 그것이 자신의 운명인 것처럼 체험하며 살아가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본인을 위해서나 남편을 위해서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올바른 태도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남편을 돕고 그와 함께 배필이 되어서 인생을 개척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다고 생각할 때, 자신의 자리가 남편에게 사로잡혀서 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워주셔서 있는 자리라고 생각할 때 그가 가정에서 남편을 돕기 위해 행하는 모든 섬김들이 하나님을 위한 사명을 수행하는 과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릇사상입니다.
오늘 성경은 바로 이런 그릇을 연약한 그릇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집안에는 많은 그릇들이 있습니다. 아무리 던져도 모양도 변하지 않고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바가지 같은 그릇이 있는가 하면 깨지지 않지만 강압의 힘을 강하면 우그러지는 그런 알루미늄으로 된 양푼 같은 것들을 사용하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색깔도 변하지 않고 아무리 던져도 찌그러지지도 않고 흠집도 나지 않는 새로운 주방 기기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사용하기에는 편리할지라도 미려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같은 과일이라고 할지라도 질그릇에다 과일을 깎아서 담아 내놓았다면 예쁘지 않을 텐데 꽃으로 수놓아지고 정교하게 빚어져서 불에 구은 예쁜 도자기에 담겨진 잘 깎은 과일은 대접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마음을 흐뭇하게 합니다. 그런 그릇들은 때도 끼지 않고 아주 예쁘지만 고가의 물건이고 특별히 잘 깨어지기 때문에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연약한 그릇입니다.
연약한 그릇이 우리 집안에는 꼭 있습니다. 아내를 바로 연약한 그릇으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연약해도 별로 값어치가 없는 그릇이 아니라 연약하면서도 값어치가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두고 써야 할 그런 그릇으로 아내를 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에 대해서 베푸는 사랑은 반드시 인격적인 사랑이어야 합니다. 사랑 자체가 인격적인데 비인격적인 사랑도 있습니까? 사랑이라고는 말할 수 없지만 사랑처럼 보이는 비인격적인 것들도 있습니다. 더 높은 목적을 위해서 어떤 대가 때문에 사람을 선대해주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것을 가리켜서 비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마치 애완견 같은 그런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남편이 정해놓은 질서의 테두리에서 순종하고 복종하는 그 남편을 떠받들기 때문에 그에 대한 대가로서 아내에게 일정한 사랑을 베푸는 이런 희어적인 사랑은 인격적인 사랑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남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은 왕이 신하에게 베푸는 것 같은 권력에 의지한 희어적 사랑이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이 세상에 창조된 인간으로서 서로의 모습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보고 존중하고 사랑하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여자를 창조하실 때 돕는 배필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혹은 성경에 나온바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니”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여성은 남성을 위하여 존재하고 여성은 남성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보조적인 존재이니 이것이 바로 여성들이 남성들에 의해서 종속되는 근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그를 위하여 라고 되어있는 히브리어는 ‘캔네게도’(דּוֹ) 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맞먹는’ 이란 뜻입니다. 대응하는 그러니까 번역도 ‘내가 그와 대응하는’, ‘내가 그에게 상응하는’ 그‘ 남자에게 대응하는 한 여자를 지으리니’ 이런 의미라고 하는 것입니다. 돕는 배필이라고 하는 것도 ‘에제르’(ר)라는 단어인데 구약에서 많이 나오는 “여호와는 나의 도움이시오” 할 때 그 도움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신의 힘보다 훨씬 더 큰 힘을 가지고 있는 그런 종류의 군사적 응원군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와 합하여 한 몸을 이루는 그것은 누구도 남자이건 여자이건 한 사람이 자신만으로는 충분한 인간으로서 자기를 구현하기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서로를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로 만드셨고 그런 점에서 여성의 존재는 남성을 완전하게 하고 남성의 존재는 여성을 완전하게 이바지 하도록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여성을 독자적으로 하나님의 그릇으로 부르셔서 남성 곁에 있게 하신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아내를 먼저 생각할 때에 그가 하나님이 보내셔서 내 곁에 있으며 그것이 그의 독자적인 사명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아내를 대하면 이런 어리석은 종속적인 사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를 인격적으로 대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흔히 폭력이 있는데 이런 폭력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 된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폐하게 하는 이러한 폭력적인 행동들은 종식되어야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교회에서 아주 열심히 봉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크리스챤이지만 집에 가면 이런 폭력적인 행동을 하는 남자들이 있는가 하면 반대로 이런 폭력을 휘두르는 여성도 있다는 사실을 우리들이 우려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그가 누구든지 간에 이런 폭력에 시달리는 아내들은 거기에 근거한 질서에 절대로 순응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코 그런 일들이 가정에서 일어날 수 없도록 해야 합니다. 가정에서 폭력을 휘두르는 남성 중 90%이상은 정신 질환자입니다. 그것은 적절한 치료를 요합니다. 그런고로 만약에 여러분들이 가정에서 그런 폭력이 있다고 한다면 즉시 교회에 알리고 목회자의 적절한 도움을 받도록 그런 상황을 통제하여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은 깊이 참회하고 그렇게 폭력을 행사할 때 아내와 아이들에게 주는 고통과 해보다도 더 큰 악이 자신의 영혼과 정신 속에 남아서 자기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그런 삶을 돌이키고 필요하면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정을 택하셔서 아내와 남편을 세우시고 이것으로 가정의 근간을 삼으셨습니다. 그래서 자식과 부모와의 관계,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보다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성경적으로 볼 때 가정의 기본 단위입니다. 그래서 이 일들이 잘 이루어져야지만 경건한 가정이 성립될 수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도리에 의해서 성경은 말하기를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알고 쉽게 상처받고 쉽게 감동받는 대신 쉽게 깨뜨려질 수 있는 그릇으로 알아서 아내를 선대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남편은 하나님과 열린 기도의 세계에 방해를 받지 않고 충만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B. 생명의 유업을 공유하는 자
오늘 성경이 생명의 유업을 함께 누릴 자라고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생명의 유업을 누린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결코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될 그것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접붙여지게 되고 교회에 접붙여진 공동체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 하나님과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교회를 통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통을 누리게 되는데 그 교통의 본질은 사랑과 생명입니다. 이 사랑과 생명은 그리스도 예수께 접붙여진 순간 우리 속에 스며들어 오게 되고 연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해 스며드는 삼위 하나님의 생명을 통해서 이 세상과 자기와 죄를 이길 수 있는 힘을 공급받게 되고 그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교통하는 사랑의 힘으로 우리가 그 사랑을 분여 받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을 향하여 박애적인 사랑을 베풀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랑과 생명의 교통 없이 살아간다면 그는 살아있으나 사실은 동물적인 생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생명과 사랑의 분여와 교통, 이것이 바로 생명의 유업이고 이것들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도 누릴 수 있고 또한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보다 더 충만한 방식으로 이 생명과 사랑을 유업으로 누리게 되는데 바로 아내가 이러한 생명의 유업을 지금 함께 누리고 있으며 앞으로 누릴 자이기 때문에 그를 깊이 공경하고 사랑하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생명의 유업을 누리는 모든 사람들은 생명과 사랑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며 그 하나님께 더없이 소중한 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데리고 있다고 하면 그 남편은 자신이 믿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이 생명과 사랑을 아내도 함께 분여 받거나 혹은 함께 분여 받을 자이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아내를 사랑하여야 한다고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고 있습니다. 남성들의 경우에는 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사람이거나 혹은 아직 불신 상태에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함께 신앙을 고백하여 자신과 그리스도와 함께 접붙여 한 몸을 이루고 있다면 여러분들은 배나 더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의 아내는 단지 육신의 아내일 뿐 아니라 함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붙여져 교회를 이루고 있고 예수의 몸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여러분들의 아내가 미모도 없고 젊지도 않고 많은 지식과 교양도 없고 여러분들을 탁월하게 돕는 은사도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여러분들의 그 아내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고 여러분들이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서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에게는 여러분들의 아내도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아내가 마음에 차지 않아도 그 아내는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생명과 사랑을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분여 받고 있는 존재이며 미구에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어 하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의 교통 속으로 들어가게 될 그런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있어서 그가 그리스도 예수께 받은 구속의 은혜에 깊이 감사하며 일생을 교회 속에 살면서 연약하기 짝이 없는 지체들을 깊이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 끊임없이 자기를 깨뜨리며 그들을 온전하게 섬기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봉사하며 일생을 살았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얼마나 고귀한 인생을 산 사람이며 여러분들은 그렇게 지체들을 위해 헌신하고 사랑의 생애를 산 그 사람을 얼마나 존경하고 높이겠습니까? 바로 여러분들의 아내가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지체되었고 예수의 한 몸이 되었으니 여러분들이 아내를 깊이 사랑한다면 그 사랑은 단지 여러분들의 인생에 만족을 주었던 그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에 대한 사랑이며 또한 그리스도 자신에 대한 사랑이며 나아가 삼위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이 될 것이니 그렇게 사랑하는 동안에 여러분들은 정말 영혼이 온전해지고 모든 불결로부터 순결해져서 지복의 상태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여러분들의 아내가 이미 믿는 아내라면 더 많이 사랑하고 깊이 긍휼히 여기고 연약한 그릇으로 알아서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여러분들의 아내가 불신 아내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주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 생명과 사랑의 교통에 참여하고 그 진리의 은혜와 깊이와 넓이를 알며 감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의 아내는 신앙생활하지 않고 있습니다. 혹은 교회에 나오고 있다 하더라도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나오는 그 교회 생활 속에서 아직 인격적으로 주님을 만나지 못했고 회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 안에는 참여하였으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몸에 한 살이, 한 피가 되지 못한 그런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아내를 더 많이 사랑하여야 합니다. 우리들은 흔히 우리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가족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어렵지만 어떤 면에서는 내가 아는 가족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그것은 나의 언사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내가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예수님이 생명이시고 사랑이시라는 사실을 나의 삶속에서 충분히 보여주고 나의 가족과 친지들을 깊이 사랑할 때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매우 쉽습니다.
직장에 있을 때 성경공부를 인도하고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주님을 만나고 깊이 변화된 자식들이 상처 많은 가정에서 부모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부모들이 네가 믿는 하나님이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겠다고 그렇게 고백하는 부모들 많이 보았습니다. 아내가 탁월한 신앙의 행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급격히 변화되는 아내를 보면서 당신을 그렇게 행복하게 하는 예수라면 나도 한번 믿어보겠다고 하는 남편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 일이 있다면 어찌 남편의 아름다운 행실 때문에 아내가 주님을 믿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교회에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놀랍게 변화된 남편을 보면서 신앙의 길에 들어서기로 결심한 자매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내에게 보일 수 있는 아름다운 본이라는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아내에게 대한 인격적인 사랑이 없이 남편이 보이는 그 아름다운 본이 어떻게 아내의 마음에 감동을 줄 수 있겠으며 믿지 않는 그 자매의 마음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줄 수 있겠는지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남편들은 가정의 모든 화목과 평화가 신앙 안에서 이 모든 안정을 너무나 당연하고 인간으로서 가질 수 있는 기본적인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행복들을 일상적인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서 온전하지 못한 아내로 말미암아 고통을 받는 현실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남편들이 얼마나 방황하고 고통을 겪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무분별한 아내들이 아닌 단정한 아내들을 주시고 아직 신앙이 있든지 없든지 그래도 남편을 사랑하고 가족 안에서 한 유대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는 관계를 주신 것에 대해서 얼마나 감사한지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런 모든 것들을 일상적으로 여기고 감사한 마음 없이 살아가지만 그런 생활 속에서 아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이고 내가 오늘 존재하는 것이 그 아내의 많은 눈물과 희생, 섬김을 통해서 내가 여기에 있는지를 잊고 살 때가 많이 있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저는 여러분들의 부모에 대해서 설교하면서 정말 그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를 기억하지 말고 그 부모가 여러분에게 사랑받고 있는지를 물어보라고 도전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오늘 똑같이 여러분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리의 아내, 우리를 위해 섬기고 봉사하며 희생하는 많은 날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런 많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오늘 남편인 우리 마음에 있는 아내는 어떤 사람입니까? 정말 우리들이 우리 아내를 향해 눈을 감고 손을 높이 들고 이렇게 노래 부를 수 있습니까?
(찬양)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하여
우리에겐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이렇게 눈물을 흘리며 찬송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좋은 아내를 얻었기 때문에 그렇게 노래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그렇게 생각하며 자기를 끊임없이 깨뜨려 아내에게 서서 섬길 수 있는 자리를 줄 수 있었기 때문에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II. 지식을 따라 사랑함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아내를 이렇게 사랑하되 지식을 따라 사랑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지식은 무엇을 가르치는 것일까요? 이 지식은 곧 두 가지 지식이니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사람을 아는 지식입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아내라고 하는 피조물을 아는 지식입니다.
A. 하나님께 대한 지식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모든 설교가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납니다. 설교와 모든 사역의 초점들이 사람에게 맞추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해지고 자유를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인간을 알지니 그 인간을 잘 알면 너희가 자유케 되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세상의 수많은 자원의 결핍, 참다운 은혜의 빛이 없는 가운데 시들어져 가는 영혼 때문에 고통 하는 모든 인간들을 향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사실 인생사에 묻혀서 허덕이며 살다 보면 진리에 대해 생각할 여유조차 없습니다. 사람들은 자꾸 자신의 고통의 문제와 이 세상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자신의 실존에 모든 시선을 집중하고 그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몸부림칩니다. 많은 투자들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그를 행복하게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불행과 고통의 원인은 속박에 있고 그 모든 속박을 끊어 낼 수 있는 위대한 힘은 인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바깥에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로부터 오는 그 힘이 아니고는 누구도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고통 속에서 속박된 그 사람에게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고통 하는 많은 인간들에게 진리를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거기에 해결이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성경의 모든 표현은 하나님을 3인칭 남성 단수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게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사실을 아담과 하와의 창조를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남성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서는 존재가 모자란다는 것을 하나님은 보여주시면서 여성을 창조하셔서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남성이 아닙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 아버지 그러는데 하나님은 성경에서 온 단어이고 아버지 그럴 때 그 개념은 우리의 유교적 개념 속에서 흘러나옵니다. 아버지가 하나님의 모습을 잘 반영하는 삶을 살고 성품을 자녀들에게 보여주면 자녀들이 하나님을 아는데 도움이 많이 됩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힘듭니다. 우리가 유교적으로 전통적으로 배워 온 아버지는 근엄하고 감정적인 동요가 별로 없고 많이 사랑해도 결코 쉽게 표현하지 않고 냉정한 아버지 상입니다. 그런 남성상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끌어안고 광야의 길을 가면서 너무 힘드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내가 왜 이 백성들을 다 끌고 이 고생을 해야 합니까? 내가 이 백성들의 유모입니까? 그 사실은 실제로 모세의 사역이 이스라엘의 백성을 어머니처럼 끌어안고 젖을 먹이고 끌고 간 유모와 같은 사역이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백성들을 그렇게 생각하며 끌어안고 가야 하는 그 어머니의 마음은 모세가 누구에게 배웠습니까? 하나님께 배운 것입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영혼들을 바라보시면서 가슴 아파하시던 예수님의 눈물 어린 마음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아버지의 마음이라기보다는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더 재미있는 사실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옵니다. 탕자의 비유가 나옵니다. 집안이 그렇게 발칵 뒤집혔는데 엄마는 나오지 않습니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탕자가 집을 나가려면 엄마가 나와서 이 못된 녀석 아버지한테 감히 그러는 것이 어디 있냐면서 야단을 쳐야 하잖습니까? 또 멀리 갔으면 아버지는 체면 때문에 못 갔어도 엄마가 야간열차라도 타고 가서 애를 잡아 왔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어야 하는데 안 나옵니다. 그것을 자식이 유산을 나눠달라고 할 때 회초리를 치는 대신 못 이기면서 유산을 나눠주는 것은 엄마가 할 일이지 아버지가 할 일이 아닙니다. 그가 멀리 떠났을 때 의절하는 결단을 하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지만 그 나간 자식을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는 자식을 동구 밖에서 눈이 짓무르도록 기다리다가 자식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가서 끌어안는 것도 아버지가 할 일이 아니라 엄마가 할 일입니다. 거기에서 그려내고 있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양성성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저는 의학자도 아니고 이것은 어디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남자의 몸에도 여성 호르몬이 흐르고 있는 것 아시나요? 여자의 몸에도 남성 호르몬이 흐릅니다. 여자가 정말 여자 같지 않고 굉장히 강해 보이고 남성적인 여성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맞고 사는 남편들의 모임이 정식으로 결성되어 있는 것 아시나요? 회장도 있고 이사장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대부분 여성 속에 남성 호르몬이 많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남성인데 성격이 왜 그런지 닭살 돋게 하는 여성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잘 하고 남자는 대개 호탕하고 웃는데 이 사람은 여성처럼 웃고 말을 해도 남성처럼 호탕하게 하지 못하고 여자들 귀속 말하는 것처럼 속삭이고 남의 비유도 잘 맞추고 하는 사람은 절대 대머리 안 벗어집니다. 여성 호르몬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대개 대머리는 권위적인 사람입니다. 여성 호르몬이 적습니다. 이 두 호르몬이 적절하게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균형이 깨뜨려지면 사람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지면서 나빠집니다. 난 이런 것 자체가 하나님 안에 있는 양성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안에 이 모든 것들이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없습니다. 거기로부터 마치 햇빛이 흐려짐을 통해서 찬란한 일곱 가지 빛깔로 분광이 되듯이 하나님 안에 있는 한 성품이 인간에게 투영될 때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지면서도 여성을 모두 여성으로 만들지 않고 남성을 모두 남성으로 만들지 않아서 남성 속에 여성을 섞으시고 여성 속에 남성을 섞으십니다. 전 이 사실을 발견할 때 굉장히 뛸 듯이 기뻤는데 여러분 별로 감격을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가정이 여성이 약간 남성화되고 남성이 약간 여성화 되어야지만 이 가정이 행복합니다. 남편이 기분 좋은 일이 있어서 돈을 푹 썼습니다. 그때에 여성이 진짜 여성성에 집착합니다. 그 돈이면 쌀이 몇 말인데 몇 달 동안 장을 볼 텐데 이러면 가정이 행복하지 않습니다. 좀 더 쓰지 그랬냐고 하면서 호탕함을 보이는 것입니다. 남성은 어느 시점에서 보다 여성화 되어 밖에서 크고 웅장한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어 남자가 여성스러운 경향을 많이 갖게 될 때 가정이 행복합니다. 커다란 사업 3개 할 것 하나해도 집에서 설거지라도 잘 하면 됩니다. 여성성이 없으면 못합니다. 남성이 어느 정도 여성이 될 때 가정의 행복을 이루게 됩니다.
하나님을 깊이 알게 될 때에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아내를 향한 사랑이 통합을 이루게 되는 한 근거가 됩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여러 해전에 발견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는 놀라운 순간이었습니다. 아내를 사랑하게 되는데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게 되면 그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 자기 아내를 향한 사랑, 특별히 하나님 안에 있는 여성성을 발견하게 될 때 자신의 아내의 존재의 가치를 새롭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 빛들을 통해서 아내를 올바로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됩니다.
B. 아내에 대한 지식
첫째는 보편적인 아내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게 됩니다. 여성으로서 한 남편의 아내가 된 보편적인 아내가 어떤 사람들인지를 아는 지식 속에서 자신의 아내에 대해서 올바로 알게 됩니다. 우리가 우리를 안다고 하는 것은 나만을 알아서는 안 됩니다. 내가 나를 안다고 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물론 알고 인간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 속에 있는 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학이란 학위는 있지만 ‘김순희학’ 이런 것은 없습니다. 개별적인 인간이기 때문에, 각각 다 다르기 때문에 그렇게 형성할 수 없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함께 사는 아내는 보편적인 아내인 동시에 개별적인 내 아내이므로 이 둘의 대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보편적인 아내에 대한 지식을 생각해 보십시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먼저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에게 땅을 정복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곧 이어 하나님이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여 남편에게서 갈비뼈를 취하여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남자는 흙으로부터 지으시고 여자는 갈비뼈에서 취해서 만들었으므로 남성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전 반대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흙이 더 소중한 재료입니까? 아니면 사람의 살과 뼈가 더 소중한 재료입니까? 남성은 창조될 때부터 재료가 불완전한 상태였습니다. 티끌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여자는 보다 더 완전한, 하나님이 두 번 창조한 것입니다. 재료를 흙으로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시고 그 사람의 완전한 몸을 취하여 여성을 창조하셨으니 재료비가 훨씬 더 많이 들었습니다. 고급 재료를 사용한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여성들이 존귀한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정복하라고 할 때 우리들이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여기에는 적어도 두 방향의 일이 중첩되어 이 명령을 완수해 나가도록 지정되어 있습니다. 땅을 정복하는 일은 바깥으로 뛰쳐나가는 일입니다. 외향적인 지향성을 갖습니다. 번성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입니다. 생육하는 것은 그 안에서 일어납니다. 남녀가 둘이 만나서 한편으로는 생육하고 생육하여 자손들이 번성하고 그 번성하는 가운데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아름답게 인간 공동체 모습을 형성하고 가꾸어져 가는 것은 관계 중심적인 일이고 그것들을 토대로 이 사람들이 뻗어 나가면서 정복하고 땅을 다스리는 이 모든 일은 외향적으로 뻗어 나가는 일입니다. 관계 지향적이고 내적인 일들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밖으로 뻗쳐나가는 일은 남성적인 그 성격을 통해서 성취되는 일들인데 이 두 가지가 아주 균형을 이루면서 바깥으로 뻗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전혀 새 모습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발견됩니다. 교회 안에서 이 두 개가 긴장 속에서 잘 균형을 이룰 때 교회가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주님 믿고 이제 내가 이 교회 교인이 되겠습니다. 하고 들어온 사람인데 그들의 관계를 잘 가꾸어 주고 주님을 잘 믿고 자라도록 젖을 먹이는 이런 일은 안하고 예수 믿기로 결심했으니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한다. 돈 다 내놔라. 그리고 헌신해라. 가르치지도 않고 잘 먹이지도 않고 무조건 역량을 모아서 선교하고 전도하고 사회 일하고 다 뻗어나가면 건강한 교회가 되지 않습니다. 마치 집안의 관계가 다 깨뜨려지고 남편이 집안에 있는 가산 다 털어서 사업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일들을 위해서 교회가 부름을 받았지만 그 건강한 일을 위해서는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과 올바른 관계, 온전한 관계 속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람과 관계를 맺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자기와 올바른 관계를 형성하면서 이렇게 온전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목양센터에서 하는 사역은 여성적인 사역입니다. 어머니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여성 호르몬 많이 받은 사람이 여기 모여야 합니다. 머리 많이 벗어지고 남성 호르몬이 충만한 사람은 보다 공격적인 일을 위해 헌신하고 여성 호르몬이 많아서 머리도 잘 안 벗어진 사람들이 모여서 여성적인 사역을 많이 해야 합니다. 곱살 궂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가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어떤 교회는 한쪽만 합니다. 저희들끼리 모여 먹고 놀고 좋다고 하면서 삽니다. 공격을 하지 않습니다. 마누라 좋고 아이들 좋다고 돈 벌러 가지 않고 집에서 가족끼리 오락회만 하고 사는 가정과 같은 것입니다. 알콩달콩 산다고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내는 그렇게 하고 남자는 세상의 평화도 염려하고 하나님 나라의 일을 근심하면서 이렇게 나가야 합니다.
결혼을 하면 남성들은 가정의 안정을 토대로 뻗어나가려고 합니다. 일 지향적이고 성취지향적인 성격을 갖습니다. 연애할 때에 그렇게 좋고 달콤했는데 그 꿈을 계속 꾸면서 결혼 후에도 왜 그렇게 연애할 때처럼 안 해주냐고 하는데 연애할 때 여성들이 왜 그렇게 행복한지 아세요? 그 이유는 남성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 관계에 충실 하는 집중적인 기간입니다. 회사도 없고 출퇴근도 없고 모든 것 다 필요 없고 오직 관계에 열중하는 것입니다. 그 성향이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평생 그렇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만 충실하게 살 수 없지요. 평생 연애만 하며 삽니까? 그러니까 어느 정도는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는 큰 것 가지고 감동하는 것 아닙니다. 며칠 전에 이지스함을 건조해서 전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이지스함을 소유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것이 1조원이고 천km 바깥에 있는 수천 개의 표적들을 동시에 추적하고 500km 안에 들어오면 27개의 목표물을 향해 동시에 공격할 수 있고 그런 숫자 못 외워도 결혼 날짜 외우는 것 더 좋아합니다. 삼일절이 뭔지 잊어버려도 약혼 기념일 기억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구 온난화 문제 때문에 눈물 흘리지 않아도 앞뜰에 자기가 심은 채송화꽃 복숭아꽃 보며 한번 기뻐해 주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아내들의 성품입니다. 아내들이 상처받는 것이 엄청난 것 때문에 상처받는 것이 아닙니다. 대개 작은 것 때문에 상처를 받습니다. 머리를 하고 왔는데 본 척 하지 않았다거나 집안에 무엇을 새로 해 놓았는데 관심을 안 갖는다든지 그런 것입니다. 관심을 가지세요. 칭찬하고 격려하고 그래야 합니다.
두 번째는 개별적인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자기 아내를 아는 지식입니다. 결혼 5년이 된 어느 부부가 있었는데 얼마나 남자가 짠돌이인지 외식 한번 안 시켜 주었습니다. 어느 날 전화를 해서 외식 시켜줄 테니 나오라고 한 것입니다. 아내가 칠보단장을 하고 달려 나갔습니다. 보신탕집으로 쑥 들어갑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막 퍼 먹으면서 남편이 “와 안 묵노?” 5년을 살면서도 아내가 보신탕을 못 먹는 것을 모른 것입니다. 개별적인 아내를 아는 지식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정신적인 연합을 이루기가 매우 힘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정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가정이 남편과 아내의 뜨거운 사랑으로 한 연합을 이룬 공동체가 되길 간절히 바라셨습니다. 여러분 남성들도 이 세상을 살면서 외로움을 느낄 때가 많이 있습니다. 내가 만난 어느 목사님은 자기 목회 경험에 의하면 여성들의 외로움보다도 중년 남성들의 외로움이 정신과적으로 더 심각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왜 그러냐고 했더니 여자는 관계 지향적이기 때문에 아이들하고 관계에 더 몰입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편은 안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많은데 자기의 필요를 채워주는 사람은 너무 적다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내가 남성으로서 여러분 남성에게 말하는데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수많은 사람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아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안 외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진짜 안 외로운 사람은 한 사람이라도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외롭다고 느끼면 사실은 사랑을 못 받고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사랑을 안 해서 외로운 것입니다. 이 세상에 누구도 사랑을 받음으로 그 외로움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랑함으로써 외로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 남편으로 부름을 받아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를 깨뜨려 연약하기 짝이 없는 그 아내를 온전한 사랑으로 세우고 그를 위해서 희생을 해야 하는데 아내만을 바라보면 너무 어려운 길입니다.
III. 결론과 적용
저는 오늘 설교를 듣는 여러분 가운데 물론 남편 사랑하고 아내 사랑하겠지만 오늘 예배를 끝나고 가서 만날 아내의 얼굴을 생각하면서 가슴 설레는 남편이 몇이나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오늘 예배드리는 아내들 가운데 예배가 끝나고 나서 남편의 얼굴을 볼 생각 때문에 가슴이 쿵쾅 뛰는 여성이 몇 명이나 되는지 묻고 싶어요. 연애 때는 그랬거든요. 지금 안 그러지요? 항상 그런 감정 속에서만 살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게 되면 우리의 삶의 지표가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자원만으로는 너무 힘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깊이 감동된 가운데 그 사랑의 마음으로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때문에 자신의 아내를 깊이 사랑하고 주님이 불완전한 자신을 긍휼히 여겨 주었던 것처럼 아내를 긍휼히 여기며 서로 사랑하고 그렇게 살아가서 자기를 끊임없이 깨뜨리고 상대방을 온전하게 하는 과정을 통해서 자기도 완성하고 아내도 완성하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가정의 행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