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고 기쁨 되는 아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녹취자: 김경애
예수님이 처음부터 메시아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일정한 나이가 되실 때까지는 메시아로 취임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릴 때에도 새끼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일 년 혹은 삼 년쯤 자랐을 때 성체가 되었을 때 제사의 제물로 쓰였던 것처럼 예수님도 삼십 세쯤 되어서 드디어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것은 어떻게 보면 말이 안 됩니다. 세례는 그 당시에도 일종의 죄 씻음의 표였고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었기 때문에 굳이 세례를 받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세례를 준 사람은 더 문제가 됩니다. 세례 요한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메시지는 예수님 보다 앞서 와서 회개하라고 외친 사람이었고 그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은 예외 없이 회개한 죄인들이 세례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지만 사실 인격적인 실체는 신이셨고 죄도 없는 분이셨으니 사실은 세례 요한이 당신이 나에게 세례를 주셔야지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세례를 드릴 수 있겠느냐는 말이 진실한 발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십니다. 이것을 두고 레온 모리스라는 신학학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써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죄에서 씻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원래 메시아였던 이분을 공적으로 취임시키신 사건이었고 그 사건을 하나님이 보증해 주시듯이 성경 전체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딱 한 번의 중요한 사건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이 모두 한 장소에 모인 것 같은 사건입니다.
사실 저는 이 문제를 두고 지금은 돌아가신 화란의 신학자 밀렌반스패커 교수님하고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장소적으로 계실 수 없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여러분들이 이야기하는 우리 안에 성령님이 계시다는 말도 이것은 하나의 은유이고 상징이지 실제로 성령님이 우리 안에 실체로 계신 것은 아니다. 물질 속에 계실 수 있는 분은 아니다. 그러면 도대체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그것은 바로 중생과 함께 하나님이 허락하신 우리 영혼이 영이신 하나님과 교통하실 수 있는 그 교통, 그것이 언제나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 안에 주신 그것을 비유적으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불신자에게는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루터나 칼빈이나 부처나 모든 사람들이 표현방식은 조금씩 달랐지만 사실 그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씀하시면서 덧붙인 것이 단 하나 아주 눈에 띄는 중요한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사건이라고 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한곳에 계신 것 같은 장면이 나타나는데 이것이 유일한 사건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돌아와서도 탐구를 하면서 고민을 하면서 내 나름대로 답을 찾아보았습니다. 이것도 보면 예수님도 신성이라는 면에 있어서는 무한한 신의 성품이지만 인간의 몸으로는 한정된 공간과 장소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역시 진짜 성부, 성자, 성령이 여기에 모이셨느냐는 것에 대해서는 그것도 하나의 문학적인 한 표현방식이지 이 자체를 실체로 보면 안 되겠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 하나님이 동시에 거기에 계신 것 같은 그런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성경의 유일한 장소가 여기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곁가지로 약간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모세가 가시떨기나무 사이에서 불붙는 불을 본 것은 하나님이 무엇인가 거기서 모세와 교통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내려오셔서 가시덤불 사이에 앉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풀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모든 만물이 아니시기 때문에 우리가 소위 칸트가 이야기하는 만물을 가지고 재는 범주를 기준으로 유한한 사물인 이 물건들을 재는 범주를 가지고 하나님이라는 무한자를 잰다는 것은 적용의 오류입니다. 이것은 성립할 수 없는 측정 단위와 측정 대상이 성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매치되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권경철 목사님이 튜레틴에 대해서 굉장히 많이 공부를 하셨는데 저는 튜레틴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튜레틴이 자기의 변증신학에서 이 세상에 있는 사물이 존재하는 세 방식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한정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사물입니다. 사물의 공간이라는 것은 전통적으로 사물의 연장이라고 보았는데 리모컨을 보면 여기부터 보면 리모컨이고 여기부터는 리모컨이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하는 방식으로 보면 크기, 형태, 부피, 모양, 체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비해서 제한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있는데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 영혼이 있습니다. 노라의 영혼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배에 있는지, 가슴에 있는지, 머리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노라의 영혼이 다른 사람 속으로 출장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정된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즉 제한된 장소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 사물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은 충만적으로 계시기 때문에 이렇게 모든 사물이 하나님을 벗어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모든 사물과 같이, 모든 사물 곁에, 모든 사물 아래, 위, 옆에, 혹은 속에 같이 계신 것은 아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사실 하나님은 아무데도 안 계신 동시에 아무데도 안계시지 않은 그런 사물이 되는 것입니다.
어쨌든 곁가지로 나왔지만 그렇게 하면서 이 사건이 굉장히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왜 그러면 하나님이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단 하나 여기에서 동시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세 인격이신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 같은 그런 표징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을까? 이 사건은 아주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의 천지창조 이후로 가장 중요한 사건임을 보여줍니다. 천지창조의 때는 이 방식과는 약간 다른 방식으로 성부, 성자, 성령이 또 동시에 계십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성부 하나님이 하나님의 영이 수면 위를 운행하시고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하나님의 창조의 삼위 일체적 사역입니다.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아주 보다 더 정확하게 세례 받으시는 바로 이 장면에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함께 계신 것 같은 그것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어떻게 보면 두 번째 창조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창조의 사건은 이 세계를 만드시고 인간을 지으신 사건이었는데 여기에서의 사건은 인간의 죄로 창조의 세계와 질서가 무너지게 되자 하나님은 여기서 창세기 1장에 비견될 수 있는 그런 나타나심을 통해서 여기서 인류의 재창조가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성경신학적으로 그림을 그리자면 창세기 1장, 2장에서는 천지창조가 이루어지고 그 창조가 구체적으로 들어가면서 인간창조가 이루어지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서 인간이 재창조됨으로써 확장되어서 마지막에 신음하고 고통 받는 우주 만물이 저주를 회복하고 복된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해서 이렇게 왔던 것이 이번에는 여기서 이렇게 퍼져나가는 그런 구속사적인 구도‘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오늘 드리고 싶은 말씀은 사실 그런 거창한 구속사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마지막 절에 나와 있는 ‘하늘로부터 들리는 음성’ 거기서 우리들이 교훈을 받고자하는 것입니다. 같이 한 번 더 읽어보겠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마 3:17)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다는 것은 신약에서 처음 나오는 표현방식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수없이 나옵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할 때 하늘이 열린다는 표현이 항상 수동태로 쓰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하늘 스스로 열리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하늘을 열면 수동적으로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그렇게 여실 때에는 반드시 그냥 여시는 적이 없고 주실 말씀이 있을 때만 하늘이 열리는 것입니다.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전형적인 장면이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이상이 보이고, 계시가 보이고, 하나님의 메시지가 해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가지고 선지자들은 자기 시대에 모세의 율법을 적용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선지자의 사명이 미래에 대한 예언이 주 임무가 아니었습니다. 주 임무는 모세의 율법을 해석해서 그 시대에 외치는데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서 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그 심정을 전수받고 그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애정을 읽으면서 자기가 미처 보지 못한 깨달음의 세계를 전수받고 그것을 하나님과 동일한 열정을 가지고 불타는 마음을 가지고 때로는 흐느끼는 위로의 마음으로 때로는 아주 분노하는 마음으로 때로는 냉소적인 방식으로 때로는 더 큰 불행을 예언하거나 회복을 예언하는 방식으로 설교를 한 것입니다. 오늘날의 열정적인 설교자들의 그림을 구약의 예언자들과 맥락을 같이한다고 보면 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매우 매우 중요한 어떤 메시지가 하늘로부터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이것은 하늘이 열린 것입니다. 하늘이 열리고 소리가 있어 말씀이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말씀이었습니다. 들린 음성이 무엇이냐 하면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요’ 원어적으로 보면 ‘나에게 사랑하는 받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가 기뻐하는 자라.’ 하는 음성이 들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문제를 해석할 때 이렇게 두 지평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해석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셨기 때문에 주어진 말씀이다. 고로 이것은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다.’ 이래도 안 되고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똑같이 주어진 말씀이다.’ 이렇게 해석을 해도 한쪽으로 치우친 것입니다.
두 지평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말씀은 일차적인 의미에서는 인류 중 아무도 있을 수 없는 구속사적으로 두 번째 아담인 완전한 인간, 제물로 바쳐지기에 적합했던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사람이신 아무도 유래를 반복할 수 없는 하나님의 아들에게 일차적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가슴에 새기고 이 말씀을 들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두 번째 지평에서 우리들이 보아야 할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 예수님은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때 하나님만 보여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보여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참 인간이 어떤 존재가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할 것인가를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받으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보면서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보인 하나님의 모본을 따라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가장 이상적인 인간으로 삼고 그러니까 나의 최고의 이상적인 모습을 무엇이라고 설정하고 우리가 달려가야 할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두 지평의 적용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이해 못하실 것이 없으실 것입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말씀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랑받는 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그래서 아가페토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요. 나의 사랑을 받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것을 이중의 인침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이것을 관계의 인침이라고 보았고 뒤의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는 것은 사역의 인침이라고 보았습니다. 저도 기쁘게 그 해석을 받아들이고 지금도 인정하는데 조금 너무 인위적인 구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설명을 하겠지만 사실 성경에서 볼 때 한 인간의 사람됨과 한 인간의 하고자 하는 일은 히브리적인 사유에서는 분리가 되지 않습니다. 분리가 되지 않고 하나로 봅니다.
그러니까 어떤 물건이 좋으면 잘 작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건이 좋지만 작동하지 않는다. 그런 개념이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윗을 볼 때에 준수하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때 특히 여성을 보고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때는 무엇인가 그것이 외모가 그렇다고 한정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히브리 사람들이 여자를 볼 때 아름답다고 이야기할 때는 몸매가 팔등신으로 기가 막히게 예쁘다는 그런 개념보다는 하나님이 여자로서 지정해준 존재로 잘 작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내 외면이 조화를 이룬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그것이 현숙한 여인과도 통하고 지혜로운 여인과도 통합니다. 그래서 그리스적인 사유는 외면적입니다. 눈썹이 얼마나 길고 얼굴이 얼마나 예쁘냐는 것을 통해서 접근했다면 히브리 사람들의 사유는 인간의 외면보다는 내면을 보는 것입니다.
언제도 이 시간에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저는 잘 모릅니다. 조선공학을 한 사람들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노아 방주에 대한 묘사가 관점이 밖에서 본 것이 아니라 안에서 본 것이랍니다. 그렇게 히브리 사유와 그리스 사유가 훨씬 다릅니다. 그리스에 가서 조각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릅니다. 가나안이나 이스라엘이 아니더라도 이스라엘과 메소포타미아 쪽에선 발견되는 조각물과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조각물은 다릅니다. 그리스에서 발견되는 조각은 그곳이 무른 돌이 많기 때문에 여자의 콧날도 오뚝하게 합니다. 오늘날 서양의 미의 기준이 그리스에서 로마로, 로마에서 서양으로 넘어가고 이것이 연극, 영화, 예술을 통해서 우리 쪽으로 들어오면서 미의 기준이 동양적인 미의 기준이 허물어지면서 제국적 지배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지금의 미의 기준을 갖게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런 것들을 보면 사물뿐만 아니라 사람을 볼 때에도 어떤 각도로 사람을 보느냐는 것이 그리스주의 즉 헬레니즘에 현혹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사실은 인생을 망치는 남자들이 많습니다. 여자들도 많습니다. 외모가 너무 아름다우니까 혹하는데 깨물어 보니까 독이 든 사과입니다. 아니면 너무 멋있어서 깨물어 보니까 속이 썩었습니다. 그런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정도의 사람들을 못 만나셨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이것 두 개를 분리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서대로 이야기 하자면 첫째로 하나님 앞에 사랑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이 내려 보시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한 장소에 계신 것 같은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는 모든 인류가 그렇게 하나님이 예수를 바라보실 때 사랑스러우셨던 것처럼 그렇게 사랑스럽게 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서 마지막으로 적용을 하자면 우리의 한 인간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하나님께 사랑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숙제입니다. 저는 요새 항상 생각하는 것이 어떻게 내 인생을 주체적인 살 수 있을까? 나는 어려서 나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서 인생이 휘둘리는 지긋지긋한 광경들을 너무 많이 목격했기 때문에 누구를 향해서든 그런 식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의 사랑에 기대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남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들, 며느리, 딸에게 말하기를 나는 너의 사랑이 필요 없다. 그런데 너는 너 자신을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좋다. 나는 나의 존립에 너희들의 사랑이 필요 없다. 효도가 필요 없다. 예를 들자면 네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는다든지 효도를 하지 않으면 내 인생이 무너진다든지 꺾인다든지 매우 불행하게 된다든지 그런 것은 없다. 나는 그렇게 의존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 그런데 너를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좋다. 어떻게 보면 더 압박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좋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 좋냐 하면 마음이 상하는 일이 별로 없습니다. 기도를 하는데 나는 너에게 나의 존재를 의존하지 않는다. 당연합니다. 네가 무슨 행동을 해도 내가 마음이 상하거나 흔들리는 적은 없다. 너를 위해서 내가 충고한다면 너는 이렇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똑같습니다. 무슨 마음을 갖느냐 하면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주어도 그것 때문에 내가 마음이 상하지 않고 진정으로 저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것이 인생을 아무리 말로 주체적으로 살아가자고 이야기를 해놓고 마치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성질부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이 주체적인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자기가 상처받지 않는 것. 그런데 알프레드 아들러가 이야기한 것처럼 그 사람을 무시하거나 아니면 무관심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럴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알프레드 아들러 같은 사람은 그것을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만약에 그것이 잘 되는 사람이었다면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디에서 찾느냐 하면 하나님 앞에서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랑을 많이 받을 때 질투 납니까? 신기한 것이 예를 들자면 어떤 남성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지혜가 있는데 좋은 남자친구가 있다고 가정을 합니다. 가정을 해야 하는지 실제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있습니다. 그런데 지혜한테 여기에 앉으라고 털어주고 ‘마스크 안 가져왔지?’ 그러면서 꺼내주고 자기는 84를 끼고 자매에게는 좋은 마스크를 줍니다. 그런데 옆에 있는 자매에게도 똑같이 합니다. 요즘 깻잎논쟁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깻잎을 들어주는 것이 되냐? 안되느냐? 하는데 우연이 같은 경우는 엄격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깻잎을 들어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판단이 잘 안섭니다. 나는 들어줄 사람도 없고 받쳐줄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 다른 여자에게 똑같이 해주면 짜증이 납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이 하나님의 사랑은 놀랍습니다. 내가 사랑을 많이 받는데 김성구 형제가 나 같은 사랑을 받는다더라. 김동기 형제가 더 많이 받는다더라. 최성기 형제는 최근에 회심했는데 매일매일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더라. 그럴 때 내 마음이 내게 받은 사랑이 감소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는 감격이 느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독특성입니다.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느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라고 했을 때 그 ‘Cosmos’가 사실은 물리적인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 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사랑의 품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객관적인 있음이 아니라 내가 그 사랑을 의식하는 것입니다.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내가 알고 하나님과 같은 동질의 사랑으로 내가 하나님께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라고 하실 때 이것은 하나님과 사랑받는 그리스도 사이에 유통하는 사랑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어거스틴이 이야기하는 ‘아모르소끼알레’입니다. 교통하는 사랑입니다. 자기애는 끊임없이 사랑을 단절해내는 효과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이것을 확장하는 측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리를 하면 우리가 첫 번째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한 인간으로서의 아름다운 모델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그 사람만이 하나님의 엄청난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죄밖에 지은 것이 없고 나는 정말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은 사실 그 말이 팩트가 아닙니다. 자기가 자신의 모든 세포까지 동원해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 인생에 있어서 해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느냐는 두 번째 문제입니다. 첫 번째 문제는 내가 어디에 있든지 병들었든지 건강하든지, 남자든 여자든, 금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흙수저를 물고 태어났든, 내가 병상에서 죽어가든지 내가 청년으로 뛰어다니든지, 정치가이든지 작가이든지 상관없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는 것입니다.
요즘 철학책을 보는데 엊그제도 마르쿠제의 책을 보았는데 그 사람도 보면 1898년에 태어나서 1979년에 죽습니다. 나는 항상 철학자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죽는 연도에 주목합니다. 무슨 사상을 부르짖었어도 죽을 때는 똑같습니다. 대부분 바지에 오줌 싸고 충격이 오면 바지에 오줌을 쌉니다. 오줌 싸고 어느 한순간에 꼴깍꼴깍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똑같습니다. 그것을 보면 만약에 인간 존재의 삶이 이 현실에 국한되었다면 인간은 그 허무함이 주는 슬픔 때문에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부인하라고 니체는 수없이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하나의 속임수이지 그렇게 쉽게 되지 않는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그런 각도에서 보면 니콜스 카잔스키가 이야기하는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사는 것이 현대인의 가장 하나의 이상형처럼 여겨지는 시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합니다. ‘저 그리스인 조르바처럼 살아라.’ 우리가 보기에는 어느 한쪽의 눈을 감은 채 어떤 의미에서 진짜 현실을 외면하고 산 사람의 대표적인 본보기이고 그런 점에서 그는 뛰어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생각을 하지 않고 살기로 결심한 사람입니다. 나는 결코 그런 식의 행복을 얻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조르바가 불행한 시기를 웃으면서 넘기고 더 많은 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 하고 쾌락을 즐기면서 살았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에 바지에 오줌을 싸고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그렇게 아름다운 것이 되겠습니까?
결국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사랑이 얼마나 행복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 때 내가 얼마나 자유롭고 주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런 인생을 택하고 그런 것을 찬양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따라다니면서 추종하고 그것이 마치 어마어마한 인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진리인 것처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삶이 지긋지긋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생각을 가져야하느냐 하면 그런 것을 볼 때 현혹되거나 설득되지 말고 ‘내가 다 살아본 삶이다. 내가 버리고 돌아온 길이다.’ 라고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첫 번째를 정리하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수세사건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은 것 같이 그의 구속을 받은 너희는 그분의 본을 따라 그렇게 하나님께 사랑받고 사랑하는 자라.’ 이것이 첫 번째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이는 내 기뻐하는 자라’ 했습니다. 이것을 청교도들은 사역에 대한 인침이라고 보았는데 무슨 뜻이냐 하면 예수님이 마음 안에 이제껏 하고 계신 일, 심지어 지금 죄인이 아닌데도 죄인처럼 세례를 받으시는 일, 이것을 레온 모리스는 취임식인 동시에 구원받아야 할 죄인들과 하나가 되시는 의식이라고 본 것입니다. 죄는 없으시지만 낮아지셔서 똑같이 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이후에 펼쳐지는 구원행동을 죄인들 밖에서, 죄인들 위에서, 죄인들과 동떨어진 구원자로서 죄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한 핏줄인 형제들처럼 자기를 여기시면서 그들의 마음으로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이 되게 하신 사건이라고 본 것입니다. 어쨌든 적합한 해석이라고 생각하고 옛날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청교도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고 세례를 받고난 후에 당신이 해야 할 모든 일들에 대한 사역 그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셨다고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받아들이는데 과연 그 1번과 2번이 그렇게 나누어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존 오웬 목사님 같은 경우에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Delight’와 ‘Valuation’을 같이 이야기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기뻐하는 것이고 동시에 소중히 여기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가 나의 사랑하는 아이나 누군가를 보고 사랑하는 마음과 아주 기뻐하는 마음 두 개가 사실은 하나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그 아이의 모든 존재 그 자체가 내 마음속에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의 두 측면을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두 번째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 자신의 존재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보면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은 선합니다. 그래서 누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그러면 사탄도 선합니까? 귀신도 선합니까? 질문합니다. 레이든의 삼인방이 신학시스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는데 자연적으로는 선하고 도덕적으로는 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떻게 보면 존재하는 모든 것은 천사로부터 인간, 악마에 이르기까지 자연적으로는 선하지 않는 것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각각 도덕으로 악을 택했을 때 그것은 하나님께 악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우리는 악인이든지 선인이든지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창조되었다는 점에서는 모두 다 하나님께 기쁜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아까 사랑하고 똑같은 원리가 여기서 성립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존재가 되는 삶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내가 감격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을 행함을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계시다.’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함께 있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동행의 표징이 따라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기쁨과 시간 속에서 당신 자신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기쁨을 일치시킨 것이 예수님의 일생의 삶의 모습입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내가 기도 속에서 열렬히 주님을 섬기고 내가 하나님을 위해 사는 속에서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가 내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기도할 때 그런 관계가 느껴질 때 한없는 감사의 눈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찬양)
이 벌레 같은 나 위해 큰 해 받으셨나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한순간도 그 사랑이 당연하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주 이례적으로 느껴지는 것입니다. 연예도 진실하고 깊게 연애하면 이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한 순간도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입니다. 당연하다고 생각될 때 이미 연애의 감정은 부패한 감정이 되는 것입니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새로운 세상입니다.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역동성입니다. 그런 관계와 함께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고 계시다는 것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로서 그 사랑을 동기로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계획할 때 하나님이 그 일을 너무 기뻐하신다는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미국에 가서 기도를 많이 했는데 청년부에서 지금 시범케이스를 하는데 LBTS라는 것을 만들어서 지금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일을 굉장히 기뻐하신다는 확신을 줍니다. 많은 방황하는 사람들을 삶까지 바꾸도록 성경공부를 통해서 그들을 격려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우려는 우리의 의도를 매우 기뻐하신다는 것을 느끼게 해줍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관계에 방해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닌 것을 행하려는 것이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함으로 하나님을 안 기쁘게 하시는 것도 있고 마땅히 행하여야할 바인데 그것을 안 행함으로써 불순종해서 하나님의 기쁨이 되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지막 두 번째를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노라.’ 그것이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내가 살든지 죽든지, 여기에 있든지 떠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것이 시공간 안에 있는 자신의 인생과 영혼 사이를 가로지르는 변함이 없는 한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고 있는가 여러분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에게 기쁨인가? 그 기쁨이 여러분 자신에게 느껴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정필도 목사님과 여러 번 아주 달콤한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목사님은 기도를 굉장히 많이 하십니다. 그분이 신학적으로 나처럼 이렇게 설명한 것은 아닌데 이런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 목사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잖아 그러면 기도를 하지 않고 생각만 해도 하나님이 응답을 먼저 해주시더라고.” 그런 말씀을 해주시면서 당신이 기도를 많이 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고 있는데 아침에 새벽기도를 하고 강대를 내려오면서 ‘저 강대가 낡았고 안 어울리는데 저것을 바꾸면 어떨까?’ 그러면서 내려오는데 어느 교인이 오더니 “목사님 저 강대가 이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제가 돈을 드려서 저 강대를 바치고 싶으니까 목사님께서 좋은 것 하나 바꾸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나는 그분의 말씀이 논리적으로는 거칠지만 이것을 반영한다고 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가 다 기도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그 일을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주십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사람의 열심 있는 기도보다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의 마음의 소원을 더 소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우리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끔 살아라.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