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령이 가난한 자 돼라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마 5:3)
녹취자: 허혜숙
많은 설교를 해도 마음이 뜨거워지는 대목이 산상수훈입니다. 요즘 산상수훈 공과 공부를 만들고 있는데 다시 한번 옛날에 받았던 은혜의 세계로 데려가시는 것 같아서 마음이 기쁩니다. 아시다시피 아주 한때는 성경을 극단적으로 비평을 해서 성경은 모두 문헌들의 쪼가리에 불과하고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러던 사람들조차도 이것만큼은 오리지널 하나님의 말씀일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면 이것은 진짜 예수의 남기신 고유한 말씀일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이것은 더 이상 요약할 수 없는 초기 원시 기독교 공동체의 신앙의 고백일 것이다, 라고 생각할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임마누엘 칸트 같은 사람도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이 여태까지 생각해 오던 존재에 관한 탐구, 그것을 일반 형이상학이라고 부르는데 ‘존재란 무엇인가?’ ‘있는 것이란 무엇인가?’를 1부에서 탐구하고 그 다음에 2부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특수 형이상학 ‘신이란 있는 것인가?’ 그리고 ‘세계 자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면서 그것을 있다 없다 이야기하지 않고 그것을 증명하고자 했던 역사 이레의 모든 철학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샅샅이 다 까발립니다. 그것으로 순수이성비판이 끝이 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책입니다. 결국은 우리들이 신에 관해서 오류에 빠지는 것이 뭐냐 하면 신 자체는 우리의 감각과 이성에 인식범위에 안 들어오는 것인데 감각과 이성의 범위에 들어오는 이런 물건을 측정하는 것과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신을 측정하고 증명하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결국은 사기다. 이것이 결론입니다. 그 사람조차도 인간이 도덕적으로 살아야 된다는 것은 아주 명백하게 이야기를 하면서 내미는 기준이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인 산상수훈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순수이성비판을 읽었어도 실천이성 비판을 읽지 않고서는 칸트를 읽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을 요청하게 됩니다. 그럴 정도로 이 산상수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삶에 대해서 아주 광범위하게 모든 인류가 동의할 수 있는, 거의 반박이 불가능한 삶의 표준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산상수훈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삶은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라 모든 종교가 말하는 이상적인 인간의 삶을 거의 모두 포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렇게 되어있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산상수훈을 잘못 생각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죽~ ‘원수를 사랑해라’ 하는 것에서 시작해서 구체적으로 7장까지 그것이 나오잖아요? 그것을 말씀하기 전에 팔복이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간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은 사람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그것에 주목하지만 사실 예수님은 관심이 바깥에 행위로부터 시작해서 안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안에서부터 시작해서 바깥으로 나오는 관심사를 가지고 인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팔복입니다.
이 팔복은 ‘beatitude’라고 이야기하는데 그냥 복이 아니라 여덟 개이기 때문에 팔복이라고 그러지만, 이 ‘beatitude’ 속에는 8자가 없습니다. 복인데 무슨 복이냐 하면 지복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더 이상 도달할 수 없는 완전한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칸트가 이런 고민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덕스럽게 행동하면 인간은 행복한가?’ 그렇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두 개가 모순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내가 지금 아주 가난합니다. 돈이 간신히 생겼습니다. 그런데 김성구 형제가 3일째 굶었다고 합니다. 나도 간신히 돈 몇 푼이 생겼는데 할 수 없이 이것을 떼어서 자기 먹을 것 조금 남기고 형제한테 그 돈을 줍니다. 그때 그렇게 한 행동은 매우 덕스러운 행동이지만 고통을 느끼는 것은 피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돈을 내가 쓰는 것이 만족이 크지, 주는 것은 내게 부족과 고통을 감당하게 한다는 점에서 두 개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두 개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두 개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결국은 최고의 선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만 혹은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난을 받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에서 앞문으로는 하나님을 내쫓고 뒷문으로는 하나님을 다시 들어오라고 했다는 비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최고의 선을 찾아갈 수밖에 없고 그 문제는 이제 종교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뭐냐 하면 인간의 지복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만 보신 것이 아니라 최고의 지복은 하나님 안에서만 있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사람들이 그러한 하나님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 지복의 맛보기를 이 안에서 누리며 살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칸트가 가진 두 개의 미덕스러운 행동과 만족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을 내가 쓸 수도 있는데 누구도 강요하지 않는데 내가 쓸 수 있는데 강탈당했다면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고통을 무릅쓰고 3일을 굶었다는 김성구 형제에게 모두 주었을 때 그때 그것을 내가 그 돈으로 많이 사 먹지 못해서 아쉬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주는 이 기쁨이 이것을 결코 충분히 상쇄시키고도 남기 때문에 남을 주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마음에 큰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을 위해서 환란과 시련을 당하면서도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이고 윤동주도 ‘십자가’라는 시에서 ‘행복했던 사나이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가시는 분을 ‘행복했던 사나이’라고 묘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를 표준으로 제시하는 것인데 예수님은 그 삶은 사람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행동함은 사람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두 개를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사람 됨됨이만큼만 살 수 있고 사는 것만큼만 그 사람 됨됨이를 입증하기 때문에 둘은 삼투압 평상과 같이 어느 것이 됨됨이만 못한 삶을 잠시 산 것처럼 보였다 할지라도 결국 두 개는 평행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한 인간이 못 되는데 뭔가 다른 목적으로 특별히 잘 사는 것처럼 보이려고 할 때 이것을 위선이라고 말하는 것이고 원래는 나쁜 사람인데 무슨 이유로 엔싱클레어처럼 그렇게 위장되어서 악한 행동을 보여서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위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래 못 갑니다. 그것은 반드시 동일하게 되게끔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결국 신념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념’이라고 번역된 단어가 우리는 흔히 ‘마음’이라고 하는데 마음은 그리스어로 ‘칼디아’입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마음이라고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마음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것은 ‘퓨뉴마’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혼’, ‘영혼’, ‘정신’ 여러 가지 뜻으로 많이 쓰입니다. 어떻든 ‘퓨뉴마’가 의미하는 것은 인간의 정신과 감정 모든 ‘지, 정, 의’라고 하는 이 작용의 가장 심층부에 있는 인간 인격의 핵심을 가리킵니다. 가장 내밀한 곳을 이야기합니다. 그것을 ‘푸뉴마’라고 했고 이것을 우리는 마태복음에서는 ‘마음’이라고 번역하지 않고 ‘심령’이라고 번역을 했는데 아주 탁월한 번역입니다. 그러한 마음의 깊은 속으로부터 천국복음을 말씀하시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것이 두 번째 복부터 시작해서 여덟 번째 복까지 나가는데 그것이 두 번째부터 여덟 번째 복까지는 전부 다 천국에서 누리는 어떤 부분적인 특성들입니다. 예를 들면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천국에는 위로받는 특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하늘과 새 땅속에 들어갈 때 예수님이 거기에서 눈물을 다 닦아주시는 것입니다. 거기는 다시는 눈물이 없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위로의 나라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다음에 또 땅을 기업으로 받습니다. 그 땅은 평수를 이야기하는 그 땅이 아닙니다. 나는 스펄전의 해석을 지지하는데 ‘지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감화력입니다.’ ‘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배부르게 됩니다’. 다 천국의 특성들입니다. 그런데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고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기업으로 주시고 청결한 자에게는 하나님을 뵙게 해 주시는데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십니다.
결국은 심령이 가난한 것, 그것이 순서로 보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고, 질로 보자면 그것이 천국 잔치를 누리는 것이고, 그 가난함의 토대 위에서 애통이 나오고, 가난함의 토대 위에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마음이 나오는 것이지 가난한 것은 안 나오는 것입니다. 그 토대가 됩니다. 그 특이한 구조를 이 팔복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슨 의미이냐? 가난하다는 것이 ‘푸토코스’라고 하는 단어인데 파산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뜻으로는 ‘구걸해야 먹고 사는’ 이런 의미를 그리스어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하다’라는 것도 문학적인 형식이 예수님의 창조물이 아닙니다. 구약성경 시편 1편에 나오는 문학적인 양식이 그대로 말씀하신 것이고 이것을 옮긴 것입니다.
그것은 에쉐르의 복과 베라카의 복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바라카의 복은 광범위합니다. 아들 딸 낳고 잘 사는 것부터 농사가 잘 되는 것부터 복권을 샀는데 당첨이 되고 풍년이 든 것부터 시작해서 주식 시세가 오르는 것부터 시작해서 마음이 평안하고 하나님을 잘 믿게 된 것까지 다 포괄해서 베라카의 복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누릴 수 있는 복입니다. 요셉 때문에 보디발의 집이 누렸던 복이 바로 베라카의 복입니다. 그런데 에쉐르의 복은 시편 1편에 나옵니다. 그것은 이렇게 이렇게 하는 사람의 행복들이여 라고 행복이 맨 앞에 복수로 나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할 때 ‘마까리오스’라고 하는 단어의 복수가 나옵니다. ‘복들이여’라고 똑같이 나옵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의 복들이여’,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시편 1편의 형식을 그대로 따릅니다. 오래된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말하고자 하는 나의 핵심은 ‘복이 있다’라고 하는 이 ‘복’은 세상 복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만 받을 수 있는 영적인 복입니다. 혹은 그 영적인 복을 가리키는 것이고 초점 자체가 세상의 일반 섭리의 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이 행복에 대해서 우리들이 ‘덕을 베푸는 사람이 행복하냐 아니하냐?’ ‘예수를 닮은 사람들이 행복하냐 아니하냐?’라고 할 때 그 잣대를 에쉐르의 마카리오스의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고 베라카의 관점에서 접근하면 이상한 논리의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결국은 아무것도 없이 핍박을 받아도 그리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가는 순간에도 이 마카리오스는 가능합니다. 베랴카의 측면에서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것임이요’라는 것은 소유입니다. 소유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든지 내가 누릴 수가 있는 것이 ‘소유’입니다. 그리고 그 상태가 불변해야 합니다. 그것이 소유한 것입니다. 자동차 할부로 차를 사면 내가 사용은 하지만 소유는 아닙니다. 두세 달만 할부금이 밀리면 바로 빼앗아 갑니다. 사용권만 주는 것이지 소유권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들의 것임이요’ 할 때는 언제든지 그 천국을 우리 마음대로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천국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행복의 기본입니다. ‘그 천국을 소유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의 삶인가?’라고 하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이 한 절을 제가 시리즈에서 설교를 할 때 3주를 설교를 했습니다. 결국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이 구절은 도저히 이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천국은 하나님의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 성질은 각각 다르고 성향은 각각 다른데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면에서는 모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교향곡 같은 것입니다. 음악회에 가면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순서대로 악기가 바이올린 소리를 내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보에 소리, 저 뒤에 콘트라베이스까지 자리를 잡지만 하나도 똑같은 소리를 내는 악기가 없습니다. 각기 다 다른데 심지어 같은 악보이지만 각기 다른 연주를 하지만 다르기 때문에 너무 아름답게 보이는 것입니다.
캄보디아가 한 때 지식인들을 다 죽이고 책을 없애고 농사짓는 사람들만 최고로 여겼습니다. 그 나라에 제가 처음 갔을 때 애들이 화성을 몰랐습니다. 노래를 부르는데 모두 군가 같은 노래입니다. 단음으로만 부르는 것입니다. 무섭습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울려 퍼지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나가 되면서 다양성이 서로가 서로를 빛나고 아름답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마치 니체가 신의 의지가 각기 살아남기 위해서 분투하는 의지인데도 이것이 서로를 충돌해서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놀라운 조화를 이루면서 서로의 힘을 상승하고 강화하면서 아름다운 생명의 세계를 만든다고 본 것처럼 그런 하모니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사랑의 나라입니다. 그 천국을 예수님께서는 너희들이 잘 믿고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면 저 나라에서 황금면류관을 씌워주고 그 길을 걷게 하고 옥으로 뿌려진 물 위에서 살게 해주고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사랑의 나라를 지금 누리면서 살게 해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힘으로 우리 삶을 명랑하게 사는 것입니다.
마음이 기쁜 이유도 없는데 명랑하게 사는 것은 잠깐은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항상 계속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자기 마음에 기쁨의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명랑한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명랑한 삶을 살아가는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진정한 행복입니다. 기본적으로 명랑한 삶은 하나님 나라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유는 우리가 자꾸 하나님 아닌 것에서 기쁨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방식으로 행복해지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이 나타리우스의 행복이 아닌 다른 행복을 찾으려고 기웃거리는 것에서 인간의 모든 고통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심령도 알겠고 복도 알겠고 천국도 알겠는데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제시하시는 말씀 속에 푸토코스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이런 복을 받는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런데 모든 주석을 아무리 찾아봐도 지금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써 놓은 주석은 없습니다. 이것은 사실 말로 설명을 해서 가난한 마음이 되는 길이 여기에 있다,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렇게 가난해 지게 되는 비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을 안 하십니다. 가장 심오한 종교적인 진리는 논리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것입니다. 이심전심으로 전달되는 것입니다. ‘아, 그것이었구나’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그렇게 기도하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유를 ‘게을러서 그렇습니다’ 그러는데 그것도 맞습니다. ‘바빠서 그렇습니다’ 그것도 맞습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는 마음에 가난함이 없기 때문에 기도를 못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안 하는 것은 못 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고 못 하는 것은 마음이 가난함이 없기 때문에 못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경험해보셔서 아시겠지만 마음이 가난해져가지고 파산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되어서 살아는 가야겠는데 도저히 살길이 없다, 희망이 없다, 마음에 파산선고를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로 끝이면 그것이 죽음에 이르는 길입니다. 절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인간은 털끝만 한 희망이 있으면 절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희망을 걸어보는데 결국은 털끝만 한 희망도 없다고 생각될 때 객관적으로가 아니라 주관적으로 나는 ‘무슨 소리냐 니가 희망이 있지 뭐가 희망이 없냐? 봐라 이것도 있고 이것도 있고 나는 너보다 더 못하지 않냐? 너는 결혼도 했지만 나는 이혼을 했고 너는 애도 있지만 나는 애도 없고 너는 직장도 있지만 나는 직장도 없고 너는 차도 있지만 나는 차도 없고 넌 건강하지만 나는 폐결핵에 걸렸고’ 이렇게 이야기를 해도 나는 희망을 갖는데 이 사람은 수천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고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희망이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주관적인 요소가 들어있는 것입니다. 일단 주관적으로 좁쌀만 한 삶의 요소가 있어도 생의 불꽃은 꺼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모든 것이 희망이 없고 나는 파산선고를 받았다’라고 딱 될 때 그때 조용히 절망 속으로 들어갑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30년 전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20억 빚을 졌습니다.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그 사람이 죽은 다음에 가족들이 재산을 계산해 보니까 40억이 있었습니다. 절망이 객관적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우리 같은 사람은 다 팔아서 정리해서 20억을 갚아도 20억이 남잖습니까? 그런데 그것은 우리 같은 가난한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왜? 20억이 아니라 2억도 없으니까 큰돈으로 느껴지는데, 그런데 이 사람은 사업을 하다가 실패를 하니까 그 사람 존재에 대해서 절망을 느끼는 것입니다. 정신신경과적인 면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희망이 이만큼이라도 있으면 안 죽습니다. 삽니다. 그런데 이것이 딱 끊어질 때 하나님을 찾으면 가난한 마음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을 못 찾으면 절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음에 이르는 절망과 하나님께 이르는 가난한 마음의 사이는 딱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그것을 갈라놓는 것이 결국은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딱 절망할 시점까지 갔는데 죽음을 생각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지금도 내가 한 번 이야기 했습니다.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와 ‘명랑한 삶에 관하여’ 두 설교를 듣고 한 자매가 편지를 썼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에서 적어도 한 사람을 살렸습니다. 6개월 동안 자살을 생각했는데 그 설교를 듣고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절망이 가난한 마음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순간이 엄청난 희망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상황은 똑같은데 달칵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삶의 모든 상황을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삶의 모든 방식이 그렇습니다. 뜻밖에 사업이 잘돼서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욕망으로 어떻게 이 재물을 바르게 쓸 수 있을까? 내가 하나님을 더 의지할 수밖에 없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목회사역을 하는데 끊임없이 어려움이 닥칩니다. 그때 살고 싶지 않고 죽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그 때에 믿음은 그것을 하나님 의지할 기회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믿음으로 바꾸고 나면 하나님을 열렬히 찾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87년도 신학대학원 3학년 때 내수동 교회에 갔습니다. 사실 그렇게 큰 교회로 간다는 것이 변두리 교회에서 돌던 저에게는 큰 행운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평소에 내가 존경하던 목사님 교회니까 그랬습니다. 88년도에 제가 교수가 되고 중등부를 맡았습니다. 그때 아이들이 계속 줄었습니다. 내가 74명을 인계를 받았는데 36명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한 달에 한 번씩 설교를 하러 오셨습니다. 그때 9시 예배인데 제가 8시 15분에 교회로 갔으니까 그때 내 생각에는 그렇게 늦게 간 것이 아닌데 캄캄한 지하실에 내려가서 불을 켜니까 지하실에 사람이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보니까 목사님이 혼자 앉아 계셨습니다. 목사님이 저 구석에 조그만 불을 켜 놓고 혼자서 성경책을 읽고 계셨습니다. 한 시간 전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담임목사로서 심의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너무 괴로웠고 주일마다 죽을 것 같았습니다. 화장실에 앉으면 피를 한 사발씩 쏟고, 학교는 학교대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심지어 강의 준비까지 해야 되고 공부하러 다녀야 되고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만두겠다고 기도를 했더니 하나님이 분명하게 조금만 더 기다려라 무슨 희망이 있을 것 같은 메시지를 기도를 통해 보여주시고 꿈으로도 보여주시고 우리 부부의 기도가 일치했습니다. 결국 살아야 되겠다.
그리고 결심한 것이 ‘내가 나이가 들어서 중등부를 맡아서 얘네들과 다 호흡은 할 수 없지만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는 하겠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토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밤을 샜습니다. 거의 2년을 했습니다. 토요일마다 철야기도를 한 것입니다. 가서 강대 앞에 스티로폼을 펴 놓고 추운 날 더운 날 가서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40일을 작정기도를 했습니다. 정말 많이 울었습니다. 돈을 빌리는 것 같으면 어디 가서 돈을 꾸어서라도 오겠는데 이 아이들을 어디에 가서 꾸어 오겠습니까? 애들이 말을 듣습니까? 설교도 잘 안 듣습니다. 너무 괴로워서 토요일마다 가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습니다. 나는 어디선가 배운데도 없으니까 애들을 하나씩 하나씩 심방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래도 조금 괜찮은 애들한테 “얘 니 친구 좀 데려올 수 없냐? 전도사님 좀 살려주라.”그랬더니 “전도사님, 제가 사실 전도는 할 자신은 없구요. 교회까지 애들을 데리고 올 자신도 없습니다.” “그러면 학교 대문까지만 데려와라, 그러면 우리가 인계할게” 그러고 나서 선생님과 애들과 작전을 짜서 데려오는 애들을 데리고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중국집으로 갔습니다.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사 준다는데 애들이 안 갈 이유는 없었습니다. 거기에 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너무 놀라운 것이 그렇게 몸부림치면서 기도를 하고 토요일마다 밤을 새우면서 기도를 하는데 진짜 미치겠는거에요. 놀라운 것이 36명 모이던 것이 40일이 지나니까 물론 36명 모이던 것이 그 다음날 시작한 것은 아니니까 나도 정신 차리느라고 한 달쯤 있다 씨름을 하다가 결단을 내리고 한 것 같아요. 하나님이 어떻게 위로를 해 주시냐면 40일 작정기도가 끝날 때 96명이 모였습니다. 애들이 못 들어와서 계단에 쭈그리고 앉았습니다. 목사님이 나보다 더 너무 감격하시는 것입니다. 36명 모일 때 설교를 하시는데 “애들아 그 많던 니 친구들은 다 어디 갔니?”그래서 저는 죽고 싶은 것입니다. 교역자 회의 때 목사님이 당회 시간에 중등부를 좀 보라고 저렇게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이 부어주시지 않느냐고 그때부터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러분,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가난해지라고 주시는 일입니다. 그것을 방탕의 기회로 삼을 것이냐 절망의 기회로 삼을 것이냐 마음이 가난해져서 하나님을 찾는 기회로 삼을 것이냐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지만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의 그림하고 명랑한 사람의 그림하고 조화가 안 되는 것입니다. 핵심만 이야기하면 하나님 앞에서 방금 찢어지는 마음으로 가난하게 살던 사람이 눈물을 싹 씻고 밝게 깔깔대고 웃을 수 있는 인간 정신과 마음의 순발력 그것이 명랑한 삶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명랑한 삶과 하나님 앞에 찢어지는 마음으로 가난하게 매달리는 그 삶은 두 개가 모순이 아니라 이런 삶을 사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명랑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왜? 사랑이 세상에 있지 않으니까 그렇습니다. 그래서 여름행사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는데 목회자들은 자신의 목양을 삶의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양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운 일들을 하나님 앞에 마음이 가난해지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뒤로 물러서서 ‘언제 때려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더 쉬운 일이 없을까’ 그런 생각을 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주신 이 어려움을 어떻게 내가 믿음으로 승화해서 이렇게 파산 선고를 받은 심령이 될까? 애통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돌파구를 찾아야 합니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조원들에게 적용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처해있는 가정사,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목양, 하고 있는 모든 일, 그리고 심지어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존재의 그 무게 그 자체를 하나님 의지하는 가난함의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그때 기도는 간절해지게 되고 여러분들의 마음은 칼끝처럼 덜 휘어져서 현실이라는 허공을 가르고 날아가는 날카로운 화살이 되는 것입니다. 휙 날아가면서 팡 하고 과녁에 꽂히는 화살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이 하나님 백성들이 살아가야 하는 삶인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