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유한 자가 돼라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 5:6)
녹취자: 남궁지선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는 천국을 주시고 애통하는 자에게는 위로를 주시는 하나님이 이제 이번에는 온유한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어로 ‘프라이스’라고 하는 이 말은 원래 자기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기는 감성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칠어지지 않은 그런 상태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 온유함은 타고난 자연적인 성품을 이야기 하는 게 아닙니다. 맥락자체가 타고난 자연적인 성품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천국 백성이 하나님 때문에 변화된 상태, 복음을 듣고 변화된 상태를 이르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성품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말하자면 새로운 본성의 국면들을 보여주는 겁니다.
우리들이 흔히 온유하다라고 하면 착하고 온순하고 누구 말에든지 반항하거나 혹은 대들거나 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이 그 사람으로부터 공격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안 느끼면서 대화를 하거나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들을 우리가 온유하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제 사실은 오늘 성경이 이야기 하는 ‘프라이스’라고 하는 단어는 사용하기는 고전 그리스어에서는 ‘프라에이스’라는 말이 야생동물을 잡아왔는데 그걸 가져다가 잘 집에서 기르니까 말을 잘 듣는 상태가 된다. 그거를 ‘프라에이스’라 했습니다. 기독교권에 들어오면서 예수님께서 천국백성의 특성을 이야기 할 때 이것은 겉으로는 비슷하지만 속으로는 동기 자체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평화와 화목을 누렸기 때문에 찾아오는 자기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성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사람들과 부드럽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사람이 가장 잘 사는 방법 중에 하나는 선이 굵고 섬세하게 사는 것입니다. 선이 굵은 사람은 섬세하지 않고 섬세한 사람들은 선이 굵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지조가 없습니다. 뭔가 줏대가 없다는 이야기죠. 그런게 너무 강한 사람들은 섬세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을 많이 다치게 합니다. 가끔 보면 상남자 스타일의 사람들을 보지 않습니까. 그럼 어떻게 보면 멋있어 보이고 그러잖습니까. 외로워요. 멀리서 멋있다 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가까이 안 갑니다. 가까이 다가가는 사람은 섬세하고 부드러운 사람들에게 가까이 다가갑니다. 그런데 아주 섬세하고 부드러울라 치면 굵은 선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기가 쉽고 또 자기 자신도 뭔가 뚜렷한 신념을 가지고 사는 일에 있어서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자 그러면 이제 선이 굵으면 거칠고 섬세하면 뚜렷한 선이 없는 삶을 살게 된다는 건데 둘 다 적합하지 않습니다. 굵은 선이 없다는 것은 주체성이 없다는 겁니다. 결국 어떻게 할 것인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둥글고 일은 네모지게 그렇게 제가 말씀드렸는데 그게 참 어렵습니다. 일을 네모지게 하는 사람들은 마음도 각집니다. 마음이 둥근 사람은 절대 일을 각지게 못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개발하고 사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드릴 수 있는 건 뭐냐면 젊었을 때는 생의 의욕이 충만하고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뭔가 자신이 삶의 지혜를 발견한다고 믿을 때에는 수많은 신념들을 세웁니다. 그런데 이제 세월이 좀 더 흐르고 좀 더 많은 인생을 숙고하고 나면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겁니다. 신념의 수를 줄여라. 무슨 얘기냐 하면 자기가 개인적으로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운동하겠다. 이런 신념은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신념이라는 것은 남도 자기처럼 해야 한다고 믿는 신념의 수를 나이가 들수록 줄여가야 된다는 겁니다. 자신을 향해서는 어떤 원칙을 세우든지 상관없습니다. 남을 속박하는 신념의 수는 나이가 들수록 줄여가야 합니다. 사실은 그게 아니라 사람들의 현실은 정 반대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까지도 굴복해야 된다는 신념의 수가 점점 늘어나는 겁니다. 그런 사람들은 절대 온유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에도 보니까 50이 넘을수록 까칠하게 살아야 행복합니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보면 알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수록 신념의 수를 줄여야 합니다. 자기 자신만 구속하는 신념은 많이 가져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괴롭히고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신념의 수는 나이가 들수록 줄여야 합니다. 아니 이것은 어렸을 때부터 신념의 수가 적은 것이 좋습니다. 그렇게 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사는 것 그것이 온유한 삶을 사는 한 비결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로 온유함이 무슨 뜻인지 알았으면 그럼 이제 온유한 사람들을 온유한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그랬는데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것을 생각하려면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을 정복하는 걸 기억하시면 됩니다. 가나안 정복을 위한 전쟁을 하기전에 먼저 지파별로 제비를 뽑습니다. 그럼 지역이 확정이 되는 겁니다. 그것을 다시 족속대로 다시 제비를 뽑습니다. 그럼 다시 족속이 나오겠죠. 족속이 다시 제비를 뽑아서 가족 수가 나옵니다. 가족들에게 그 땅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겁니다. 그 배분을 받았고 받은 그대로 정복을 하면 바로 그 지파에게 땅을 갖게끔 주었던 겁니다.
오늘 날의 맥락에서는 그게 잘 이해가 안갑니다. 그렇게 가슴에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도 땅 한 평 없으면서도 잘 삽니다. 그리고 땅을 많이 가진 사람이 물로 부자겠지만 어떻게 보면 주식 많이 가진 사람이 더 부자일 수 있지 않습니까. 한참 잘 나갈 때. 예금 많은 사람이 부자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오늘날처럼 3차 4차 산업사회에서 사는 우리 문맥에서 보니까 땅을 기업으로 받는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가 잘 안 들어오는 겁니다.
그런데 이거를 1차 산업시대인 농경사회로 옮겨보면 굉장히 실감나는 겁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그렇게 조상들이 아브라함부터 유리했습니까? 땅이 없어서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그렇게 고통을 받고 멸시를 받는 이유가 뭐였습니까? 땅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애굽을 탈출했습니까? 땅을 주신다고 하니까 간 것입니다. 똑같이 유리방황 한다든지 아니면 가나안에서 종살이를 한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났겠습니까? 얼마나 땅이 생명처럼 소중했나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왜? 농업이 전부이던 시절에 목축이 전부이던 시절에 땅이 없다는 것은 가축을 기를 수 없고 작물을 경작할 수 없는 겁니다. 그 자체가 말하자면 당시의 거의 유일한 생산성이었다는 것입니다. 거의 유일한.
그러니까 땅이 없으면 신분 자체도 뚝 떨어집니다. 땅을 가진 지주, 그 다음에 그 땅을 빌려서 소작을 하는 농부, 지금 말고 옛날로 돌아가서 보면 상상할 수 없는 상전과 하인의 차이입니다. 금년 농사짓고 그대들은 이제 내 논에서 나가게. 그러면 그 사람들은 죽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상전처럼 모시는 겁니다. 어렸을 때도 그런거를 시골에서 실제적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 소작을 짓는 사람들 심할 때는 5대5, 6대4, 7대3 이렇게 비율이 되었는데 말도 못하는 겁니다. 땅을 차지한다는 것이 그렇게 어마어마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도저히 느낄 수 없는 감성을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으면서 당시 청중들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라는 그 말에 대해서 엄청난 뉘앙스를 느꼈을 것이라는 겁니다. 더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잃어버렸을 때니까 더더욱 그랬습니다.
사실은 그럼 온유한 사람들은 진짜 지주가 되느냐? 저도 좀 온유하려고 애쓰는데 한 평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거를 설교를 할 때 어떤 사람은 이 설교를 하면서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다’ 예화를 들면서 막 이삭이 땅을 차지한 이야기도 들고 그 다음에 또 누가 온유하더니 부동산에서 성공했다 설교가 전혀 방향을 잘못 잡은 것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이거는 땅을 그리스어로 ‘겐’이거든요. 영어로 ‘지오’가 됩니다. 지오메트릭 지오그라피 지오폴리티코, 지오폴리티칼 뭐 이런 말이 다 거기서 나온 것입니다. 땅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엘에츠’입니다. 땅인데 땅이라는 뜻도 있지만 땅위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며 이것은 구약 이스라엘 관점에서 보면 물리적인 땅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제 신약의 그리스도를 통해 도입된 왕국의 관점에서 보면 땅 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입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하나님 때문에 온유하게 된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많은 감화력을 끼쳐서 그들을 정복해 가는 그러한 복을 하나님이 주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온유하다는 말이 구약성경에 대표적으로 나오는 게 모세가 구스여인을 취했다고 비난을 받았습니다. 그건 율법적으로 비난 받을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모세가 흑인여자와 함께 사는 것이 그들의 정서에 안 맞았던 것입니다. 어쨌든 대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미리암과 아론과 모세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충동해서 저항을 합니다. 그때 성경이 뭐라 했냐하면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들보다 승하였다 그랬습니다. 그때 온유하다는 말이 히브리어로 ‘아나우’입니다. ‘아나우.’ 그게 정확하게 여기서 이야기하는 ‘브라에이스’라는 말과 동의어입니다. 재밌는 것은 ‘아나우’라는 온유하다는 형용사가 어디에서 나오냐면 ‘아나’에서 나옵니다. 히브리어 ‘아나’ ‘아나’는 뭐냐면 ‘고통받다’ 그게 명사가 돼서 ‘오니’가 되면 ‘고통’입니다. 그래서 ‘아나우’는 가난한 온유한 부드러운 겸손한 고통 받은 뭐 여러 가지 뜻으로 쓰입니다. 어쨌든 온유하다는 말입니다.
결국은 히브리 사람들도 사람이 온유해 지는 것과 고난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냐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구원받는 순간 하나님이 이러한 여덟까지 본성을 인간에게 심어주십니다. 심어주시는데 이 심겨진 것이 성화의 노력을 통해서 더 무럭무럭 자라기도 하고 거의 말라비틀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고 깊이 그 구원의 은혜에 감사할 때 이 사람은 필연적으로 온유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온유는 크게 두 대상에 대해 온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입니다. 예전에는 자기의 인생이 뭔가 자기 뜻대로 안되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하나님 앞에 대들면서 ‘에이씨’ 하고 대들면서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내 인생을 당신 맘대로 이끄십니까? 아니면 내 인생에 간섭하지 마세요.’ 이런 하나님을 향한 저항심 같은게 생기는 겁니다. 예수를 믿는 그 순간에 싹 사라집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온유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프라에이스’ 자기를 지나치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감성에 치우쳐서 거칠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자신의 인생에 부딪히는 현실들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온유한 것입니다. 거기서 하나님 앞에 순종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사람을 향해서 그런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그 사람과의 관계에서만 해석했습니다. 나한테 나쁜 놈은 나쁜 놈이고 좋은 사람은 좋은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은 잘해주는 사람이고 못해주는 사람은 못해주는 놈입니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이제 구원받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기 인생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 물어볼겠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것을 통해서만 좋은 것으로 인도하십니까? 아니면 나쁜 것을 통해서도 좋은 것을 인도하십니까? 좋은 것을 통해서 좋은 것으로 인도하는 것보다 나빠 보이는 것을 통해서 좋은 것으로 인도 하실 때가 더 많은 겁니다. 수많은 연단 속에서 목회자로서의 심성을 키워가십시오. 고난 속에서 겸손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실연 속에서 강인함을 배우십시오. 끔직한 어려움을 당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무능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배우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의 깊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자기 눈높이에서만 보는 게 아니라 일어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생각의 전환하는 속도입니다. 그게 신앙의 깊이예요. 영적인 순발력입니다. 그러면 결국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를 당신께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사람을 향해서 그 사람이 때로는 나에게 악하게 해도 결국 이 일이 하나님의 수중에 있구나 라는 것을 배우면서 결국 사람을 향해서 굳이 미워하고 악을 행해야 할 마음을 안 갖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나에게 무얼 하든지 그냥 참는 것이 온유냐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양보할 수 없는 신념. 양보할 수 있는 신념이 있고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난 아침을 안 먹는다. 그게 건강에 좋다.’ 그런 신념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리고 특히 간이 안 좋은 사람은 아침 안 먹으면 안됩니다. 간에 반드시 무리가 가 아침 꼭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간이 튼튼하고 저처럼 간이 30% 40%큰 사람들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근데 기운이 없습니다. 그런 거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자기 혼자 고이 간직하는 신념으로 사는 것입니다. 요새 한 끼 먹는 사람도 있더라구요. 나는 의학적으로 동의 안 해. 좋은 결과가 올 거라고 생각 안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굳게 먹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는 그 사람을 존중해 주고 그 사람은 나를 존중해주고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내가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이 있습니다. 신앙과 인생에 있어서 그거는 남이 정해준 게 아니라 내가 정한 겁니다. 내가 주체적으로 내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 그런 거라 이겁니다. 그런데 그걸 나에게 침범하려 들어, 그거에 대해서 부드럽다. 그거는 자기 신념이 없는 겁니다. 계속해서 자기 신념을 파괴하면서 살아야 하는데 내가 나중에 공중분해 된다고. 아닌 건 아니라고 선을 딱 그어야 합니다. 내가 목사로서 당신에게 여기까지 해줄 수 있지만 여기부터는 안 됩니다. 하고 줄을 딱 그어야 합니다. 그것이 있을 때까지는 섬세하고 부드럽게 사람을 다뤄야 합니다. 그 선에 닿을 때에는 아닙니다. 하고 뚜렷하게 굵은 선을 그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선이 굵으면서도 섬세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제일 좋은 건 뭐냐면 최악의 삶은 신념도 짓밟히고 인간관계도 다 엉클어진 채 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거보다 더 나은 삶이 신념을 지키거나 사람을 잃지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굵은 선이 없으면 사람도 곁에 없습니다. 굵은 선만 있어도 사람이 없고 굵은 선이 없어도 안 붙어 있어요. 왜? 매력이 없구요. 그 사람에게 중요성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뭐든지 시키는 대로 하고 뭐든지 하자는 대로 하고 자기의 어떤 주체성과 주관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서 무슨 매력이 나올 수가 있겠습니까? 노예죠. 그래서 가장 좋은 것은 뭐냐면 굵은 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섬세한 삶을 사는 사람이 신념도 안 잃어버리고 사람도 안 잃어버립니다. 그것이 좋은 믿음의 삶입니다.
사람을 향해서 온유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신념의 개수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너에게는 너의 삶의 양식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삶의 양식이 있다. 그러나 내가 너를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나와 함께 공존하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 이런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존중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설득하고 이해하기 위해서 대화할 수 있으면 더 좋은 길을 보여주고 내가 설득되면 내가 더 좋은 길을 택하고 그렇지 않으면 각자 한 사람은 다섯 끼 먹고 한 사람은 한 끼 먹어도 충분히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그런 마음의 상태 온유함입니다.
대게 만나보면 섬세한 사람은 선이 없고 선이 굵은 사람은 사람이 없습니다. 멀리서 ‘아이고 상 남자네. 아이고 까칠한 여자네. 매력 있네.’ 가까이 가기 싫습니다. 정말 똑똑하시죠. 별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멀리서 너 혼자 똑똑해라. 만나면 자기얘기만 끝까지 하는 사람 있지않습니까. 외롭게 삽니다. 은퇴해도 아무도 안 불러줍니다. 현직에 있을 때는 모릅니다. 아무도 안 불러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별로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온유한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능력은 사랑으로 온유한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내가 가까이 가면 저 사람이 나를 받아줄 것이다’라고 생각되는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사람들이 많이 있지 그렇게 신념이 있다고 아주 거칠게 수시로 굵은 선을 그으며 이 선밖에 없다고 그러고 사는 사람은 사람들이 좋아할 리가 없는 겁니다. 선이 굵고 섬세한 사람들이 되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어디에 가든지 좋은 소문이 나게 해주시고 그리고 떠나고 만나고 헤어지고 나면 어떤 깊은 울림이 그 사람의 마음속에 남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류에 빠질 때는 진리 가운에 있었던 그 사람의 거룩함이 생각나고 내가 힘들 때는 강해 보이는 그 사람이 생각이 나고, 그리고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는 겁니다. 그게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신앙생활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쳐서 ‘저 사람이 저렇게 온유한 삶이 어디서 나왔을까? 그게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오는 거구나’라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하는 이게 그리스도인의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이 굵은 사람이 되십시오. 섬세한 사람이 되십시오. 신념의 개수를 줄이십시오. 자기에 대해서는 신념의 수를 늘려도 상관없습니다. 남을 속박하는 신념의 수를 줄이십시오. 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내적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용납하시는 것처럼 다양한 사람들을 용납하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오늘부터 그런 마음을 가지십시오.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들을 볼 때 선이 굵고 뚜렷하다. 그러나 그 선 때문에 사람들에게 거칠어지는 사람은 아니다. 그런 인상을 주면서 이렇게 감화력을 확장해 가는 그 사람들이 땅을 얻는 사람들입니다. 땅은 곧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