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의 위로(2)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롬 16:27)
녹취자: 장미연
서로마 제국이 결국은 멸망하게 됩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듯이 이미 280년경에 로마는 하나의 로마가 아니라 4개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2명의 황제와 2명의 부황제가 로마 제국 전체를 4토막으로 나누어서 서로 다르게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개의 구역 가운데 하나의 구역. 프랑스 지역과 영국 지역을 담당하는 부황제 자리에 있다가 결국은 난을 일으키면서 서로마 제국 전체를 통일하게 됩니다. 서로마 제국이 그렇게 강성했지만 서서히 멸망의 기운이 들어왔습니다. 왜냐하면 지도를 보시면 제국이 효율성이 없이 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발굽 마냥 엄청나게 넓은 땅을. 이 땅을 다 외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인들을 주요 집결지에만 두고 나머지는 용병을 사서 지켰는데 먹고 살기 힘들고 가난했던 게르만족들이 용맹하기로 아주 뛰어나서 용병으로 많이 지원하게 됩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스위스와 독일 이쪽에 살던 사람들로. 게르만족도 사실 처음에 스칸디나비아에서 건너와 게르만족이 됩니다. 언젠가부터 월급이 제대로 안 나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돈을 벌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데 제때 월급이 안 나온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것이지요. 실제로 로마가 게르만족을 무시하거나 그런 것들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 로마가 가난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1세기, 2세기, 3세기 이때까지 만해도 계속 정복이 이루어지면서 엄청난 금은보화들이 로마로 들어오게 되었고 빼앗은 땅이나 여기서 나오는 수입들이 로마를 부유하게 했고 그것들이 로마로 흘러 들어가서 아주 부강한 도시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정복할 땅이 없게 되자 이미 백성들과 귀족들은 사치에 물들어버렸고 더 이상 외부에서 돈이 수혈되지 않는 상태가 되었고 결국 곳간이 비게 되었습니다. 476년에 오도아케르라는 사람이 반란을 일으키게 됩니다. 반란을 일으킨다기보다는 ‘도저히 살 수가 없으니까 이러고 우리가 굶어 죽는다면 너무 비참하지 않냐 그러니까 한 번 항의라도 하러 가자.’ 하며 로마로 들어오게 됩니다.
한편 이렇게 된 이유는 고트족이 있었는데 고트족이 훈족, 역사 속에 보면 흉노족입니다. 흉노족이 이동하면서 공격당해서 고트족이 이동하고 고트족이 이동하면서 게르만족을 치게 되고 게르만족이 또 이동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위기가 찾아오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를 쳐들어갔는데 거의 항거 없이 정복됩니다. 이미 이런 일은 476년이 되기 전에 410년에 알라리크라든지 405년에 라다가이우스라고 하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미 반란이 계속 일어나다가 마지막에 폭발하듯이 터진게 오도아케르의 반란입니다. 그러면 이제 로마 제국이 끝이 나고 그 큰 로마 제국들이 통제가 제대로 안 되면서 각기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분할을 하게 됩니다. 그때가 476년이었는데 그 후로부터 4년. 그러니까 480년에 한 아이가 태어납니다. 그 사람이 보에티우스라는 인물인데 이름이 깁니다. 아니치우스 만리우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라는 사람입니다. 아주 유명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이 사람이 사실상 마지막 로마 제국의 학자였습니다. 이미 기울고 있긴 했지만 아테나에 가서 플라톤 아카데미아에서 공부하고 철학을 아주 깊이 통달하고 아리스토텔레스까지 이해하고 사상가가 되어서 돌아옵니다. 소원은 소박했습니다. 내가 알게 된 이 놀라운 진리들을 글로 남겨서 로마의 무지한 백성들을 깨워야 되겠다고 하는 것이었는데 사람들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그를 계속해서 공식으로 밀었습니다. 그래서 테오도리쿠스왕때 이 사람이 불과 40세가 채 안 된 나이에 재상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너무 청렴하고 훌륭한 말하자면 로마 사람으로서 야만족이지만 이 테오도리쿠스왕의 동고트족 왕이었는데 그 왕을 잘 지도해서 로마에서 꽃피지 못했던 사회적인 이상을 펼쳐 보고자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그렇게 청렴하고 훌륭하게 나라를 개혁할 꿈을 가지고 살았지만 결국 모함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동로마 제국에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그리스에서 유학했는데 그 당시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누스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의 치하에 있었습니다. 그 친구들하고 어울린다는 그런 정보를 캐고 거기에 모함을 씌우고 등등하면서 굉장히 신뢰가 깊었던 테오도리쿠스왕인데 이 왕이 결국은 마지막에 의심하게 됩니다. 테오도리쿠스왕은 아리우스주의자였습니다. 당연히 보에티우스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정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감옥에 갇힙니다. 그리고 일체의 변론할 기회를 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얼마나 논리와 학문에 유능한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재판정을 열면 반드시 그 사람의 옳은 것이 드러날 것이라는 염려 때문에 재판정을 열지 않고 곧바로 사형 언도를 해버립니다. 그래서 사형수의 몸으로 갇히게 되었을 때 쓴 책이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입니다. ‘철학의 위안’만이 아니라 이 사람이 쓴 책이 대표적인 게 크게 4그룹쯤 있는데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이 압도적으로 대표적인 책이고 그다음에 ‘신앙 논문집’ 그다음 ‘음악에 관하여’ 음악과 철학에 관하여 쓰고 그다음에 ‘산술학의 관하여’라는 책을 씁니다. 특히 ‘철학의 위안’에서는 사실 철학이 아니라 ‘신학의 위안’입니다. ‘철학적 신학의 위안’입니다. 이 책과 신앙 논문집. 신앙 논문집에서는 영원성, 삼위일체 그다음에 신의 본성, 자연 그다음에 예정 등등 이것을 철학의 위안에서 다루고 있는데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아주 심대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그의 영원성이라든지 본성이라든지 위격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한 개념들을 보에티우스에게서 배우게 되고 알리기에리 단테에게도 보에티우스가 매우 커다란 영향을 주어서 르네상스의 원인이 될 정도의 그런 단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얘기를 하다가 말았는데 ‘철학의 위안’이라는 책이 5부작으로 되어 있는데 1부작은 각각 1부는 시로 되어 있고 2부는 산문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시와 산문 속에서 여러 가지를 다루는데 예를 들자면 행복이 무엇인가? 그리고 행운과 하나님의 섭리는 무엇인가? 자유의지는 무엇인가? 필연성은 무엇인가? 이성은 무엇인가? 그다음에 궁극적인 선은 무엇인가? 하는 것들을 다루기 때문에 신학책입니다. 그래서 가장 초창기에 물론 그 이전에 오리게네스나 어거스틴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아주 소박한 조직 신학자들이 쓴 책들이 쓰여지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조직 신학책들이 이 사람에 의해서 철학과 신학을 모두 아우르면서 쓰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작법으로 쓴 것입니다. 감옥에 갇혔는데 웬 여인이 들어오는 겁니다. 이 사람이 lady philosophy입니다. 철학의 여인, 철학 여신이라고 하면 이상하지만 철학의 여인 그런 사람이 들어오는 것으로 가정을 해놓고 그 여인이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너는 그동안 많은 덕을 추구하고 잘살아본다고 애를 썼는데 이 정도 어려움에 그렇게 한숨을 쉬고 괴로워하는 걸 보니 너는 아직 수양이 덜 되었나보구나.”라는 식으로 기분 나쁘게 말을 거는 것으로 시작해서 말을 거는 것도 보에티우스고 대답하는 것도 보에티우스이지만 그렇게 하면서 인간의 선과 악. 그다음에 불행, 신의 섭리 그리고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할 때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는가? 세상이 왜 이런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가? 하는 것들을 쭉 이야기식으로 진술합니다. 마지막에 보에티우스는 그렇게 자기 생각을 정리하면서 자기가 모든 걸 바쳐서 충성해서 아름다운 나라로 일구려고 했던 그 소망이 오히려 자신에 대한 죽음으로 돌아오는 울분과 분노를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대한 깊은 명상 속에서 이겨내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 전혀 그리스도인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게끔 썼는데 실제로 내용에 들어가 보면 철학적 신학에 대한 깊은 묵상입니다. 그 책이 중생 철학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이 사람이 마지막 불꽃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혹자들은 이야기하기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보에티우스 이 세 사람이 로마가 망하기까지에 서양 사상을 세운 세 개의 기둥이라고 말하고 진정한 중세는 보에티우스에게부터 나왔다고 말할 정도로 그렇게 심오한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이야기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인간이 원하지 않는 불행한 일을 당하고 모함을 당하고 할 때 끓어오르는 분노 같은 것들은 여러분 어떻게 느껴지겠습니까?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올바르게 잘하려고 했는데 마지막에 돌아오는 것이 억울한 일밖에 없다고 생각할 때 분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고통을 이기면서 살아가는 길이 결국 진리를 묵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불완전한 세상 속에서 우리 인간의 삶이 얼마나 연약하고 힘이 없는가를 묵상하면서 그걸 극복하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쉽게 얘기하면 인간의 불행과 행복이라는 것이 한 토막을 끊어놓고 보면 너무너무 억울하고 분노하고 하지만 좀 더 넓게 보면 사실 그런 시간도 우리 인생에서 필요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더 먼 영원으로 놓고 생각해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많은 일들이 결국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끌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커다란 섭리 속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시 성경으로 돌아가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진정한 위로가 무엇인가? 그것이 뭐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보다 무한히 지혜로우시기 때문에 결코 실수하시지 않는 하나님이고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은 나쁜 것 같아도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폐기할 수 없으며 나쁜 것 같아도 그 나빠 보이는 그것을 통해서 좋아 보이는 것을 통해서 하는 것보다도 더 큰 일을 하신다. 그 믿음이 바로 지혜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한없는 위로를 받았던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지혜로우심입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사실. 그리고 또 하나는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은 깊은 생각을 가지고 이 세계를 인도하시고 내 인생도 하나님의 그 지혜의 얼개 안에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를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데서 위로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항상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고정적인 생각을 깨뜨리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한 단계 상승시키시기 위해서는 항상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는 방법으로 당신이 가지고 계신 지혜를 보여주십니다. 마음을 비우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측량할 수 없는 신묘막측한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이끄심에 있어서 결코 실패하시는 법이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분을 의지하면서 살 때 결국 마지막에는 이런 식으로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어지이다.” 그분의 지혜가 얼마나 놀랍고 탁월한지를 세월이 흘러가면서 비로소 물이 빠지고 육지가 드러나듯이 그렇게 감춰져 있던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 지혜로우신 하나님이 나보다 훨씬 지혜롭게 내 인생을 인도하실 것이고 나의 일생은 그분의 보호 아래 있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도 그분을 원망하거나 미워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어린아이처럼 그분의 손에 자신의 인생을 맡기며 그 놀라운 지혜를 알게 해달라고 하나님이 선하심과 신실하심을 믿노라고 고백하며 주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살 때 우리의 이성의 조건을 초월해서 그 하나님의 탁월한 지혜와 사랑을 찬송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찬송하면서 하나님 의지하면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가져야 할 믿음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어떤 상황을 만났든지 간에 참된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을 생각하라고 주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모든 일을 통해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러면 하나님은 당신이 가지고 계신 뜻을 당신의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일어나도 그 일을 겪으면서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대답해주시고 하면서 우리가 변화무쌍한 세상에 살면서 불변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이끌려 살아갈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이런 하나님의 위로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