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이란 무엇인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라 하더라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사 6:1~8)
녹취자: 김경애
소명이란 무엇입니까? 점점 더 사람들은 소명 의식이 흐려져 가고 있다고 탄식합니다. 많은 사역자는 갈 곳이 없다고 말하고 교회는 사람이 없다고 말합니다. 소명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자신의 책 속에서 소명을 이렇게 깔끔하게 정리했습니다. 소명이란 하나님을 만나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높고 위대한지를 깨달았기 때문에 그 사랑을 모르는 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불쌍해서 도저히 다른 직업에는 종사할 수 없으리만치 그런 연민이 넘치게 되는 그 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힘, 이 또렷한 인생의 갈 길에 대한 길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불타는 마음이 소명이라고 정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소명이 어떻게 오는지에 대해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본문은 우리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이사야가 선지자로 소명 받는 장면입니다. 성전에 들어갔고 거기서 일종의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 소명의 첫 번째 요소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소명은 결코 이런저런 자신의 사업적인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생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목회를 해볼까? 그것이 가장 좋을 것 같아. 이러이러한 기독교적인 사업을 해볼까? 이것이 참 내 적성에 맞는 것 같아.’ 이것은 소명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소명은 하나님을 만남으로써 소명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의 영광은 무엇입니까?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은 크게 세 범주로 분류되어 성경에 나타납니다. 첫째 범주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그것을 본체적 영광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두 번째는 발산적 영광인데 이것은 쉐키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든지 안 계신 곳이 없으시지만 특정한 한 장소에 당신의 임재를 보이심으로써 압도하는 영광의 빛으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보게 만드시는 그런 영광을 쉐키나의 영광 혹은 발산적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모세가 가시나무떨기 사이에서 타지 않는 불꽃을 본 것이나 사도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것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영광의 범주가 바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할 때 사용되는 효과적 영광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이심을 알아보고 그분을 인정하게 되는 것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제가 말씀드리는 것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이든지 결국 마지막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하나님이신 것을 경험하게 만드는 것 그 한곳으로 수렴되는 것입니다. 결국 소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깊이 만남으로써 그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함으로써 전 세계와 인간과 역사와 우주에 대한 예전의 견해가 모두 사라지고 새로운 관점과 견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 관점이 바로 신학 연구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신학에 대한 가장 고전적인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에 관한 학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영광을 봄으로써 모든 것들이 그 하나의 질서 아래 정연하게 배열된 것을 발견한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성경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신약시대의 한 시대를 열었던 사도 바울을 한스킨 같은 신학자는 만약에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없었다면 기독교는 한 지역의 종교로 있다가 사라졌을 것이라고 단언할 정도로 사도 바울은 기독교 초기의 발전에 신학적으로, 선교적으로, 목회학적으로 지대한 공헌은 남겼습니다. 그리고 대학자였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전의 사울과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았을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은 여러 개의 사건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사건을 계기로 그의 인생이 완전히 다른 삶의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다메섹 사건입니다. 다메섹으로 갈 때 그는 당연히 유대 종교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이었고 두 가지 강력한 편견에 사로잡힌 사람이었습니다. 신학적인 편견으로는 나사렛의 젊은이가 메시아일 수 없다는 확신이었고 또 하나는 유대민족 이외의 모든 다른 민족은 쓰레기라는 심리적인 확신이었습니다. 거기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이것은 그에게 청천병력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는 하나님께 저주받아 나무에 매달려 죽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가 살아난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 이외에는 그를 살리실 분이 없는데 하나님이 살리실 분이라면 저주받았을 리가 없어야 하고 저주받은 것이 사실이라면 살아날 리가 없어야 하는데 살아난 그분을 직접 뵈옵고 엎드러진 채 거기서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을 경험하고 거기서 그분과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던 것입니다. 캄캄한 그의 무지를 깨고 복음의 빛이 그를 뚫고 들어왔을 때 그가 죽으신 것이 자기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저주 받으셨고 그래서 예수가 부활하신 것이 모순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모든 인류 역사의 계획에 접힘이고 모든 역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지혜의 펼침이라는 사실을 신학적으로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사상이 씨앗처럼 발전해서 바울에 대한 기독교의 해석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잘 정리해서 쓴 논문이 1975년에 나왔던 김세윤 교수의 「The Origin of Paul’s Gospel」 책입니다. 훌륭한 논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이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나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위대한 사상가 두 사람만 뽑으라면 나는 단연코 어거스틴과 토마스 아퀴나스를 뽑겠습니다. 나머지 학자들은 그 아래 있는 작은 산들입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용어를 빌어서 설명하자면 소명은 이런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방황하면서 인생을 삽니다. 그런데 너무 사는 것이 도대체 살아갈 수 없어서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저도 무신론자 시절을 거쳤기 때문에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선교를 하기 위해서 예수를 믿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이유는 개인적인 이유였습니다. 왜? 살 수 없어서 무엇인가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마음에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예수를 찾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게 된 것입니다. 그것을 어거스틴은 그 동기 자체를 에로스적인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자기 사랑이니까 말입니다. 그 에로스의 사랑 때문에 하나님을 믿게 되는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니까 출발은 에로스의 사랑에서 출발했는데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 하나님의 아가페를 발견하고 나니까 그 사랑이 얼마나 큰가 하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아가페 사랑의 어마어마한 크기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결국 나 같은 인간이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의 대상이 된다는 것에 대해서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 전능하신 하나님 아래로 모든 사물들이 그분과 연관지어 존재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론적으로 깨닫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에로스에서 출발한 사랑이 아가페를 만나고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고 나면 이 두 개의 사랑이 지평 융합을 이루면서 새로운 종류의 사랑이 생겨나는데 그것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부르는 사랑입니다. 나는 지순애라고 번역하는데 가톨릭에서는 애덕이라고도 번역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가페 사랑에 대한 나의 반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그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의 마음속에 까리따스를 가질 때 모든 인류를 바라보면서 한없는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아마레데움’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는 것 ‘아마레데오’를 포함합니다. 그런데 그중에 어떤 사람들은 그 감정이 너무 커서 도저히 다른 일에 종사할 수 없습니다. 그랬다가는 자신에게 화가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이 중요한 일을 위해서 모든 세속적인 직업을 포기하고 온전히 자기를 다 바쳐서 불행한 인간들의 상태를 하나님을 알게 하여 고쳐주지 않으면 도저히 너무 고통스러운 마음을 견딜 수 없는 이것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마틴 루터는 소명을 이야기하면서 소명이 완전히 성직자의 소명과 평신도의 소명이 별개의 소명이 아니라 똑같은 것인데 층차만 다르다고 설명했습니다. 동질의 소명인데 층차만 다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여러분들이 신학교에 다니는 이유입니다. 그것이 선배들에게는 너무나 선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 흐려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거스틴의 경험을 보겠습니다. 그가 따가스티에서 태어나서 카르타고로 유학 가고, 마니교도로 변신해서 다시 따가스티에서 전도자가 되고, 사생아를 낳은 미혼부가 되어서 다시 카르타고로 가고, 가르타고에서 다시 로마로 가고, 로마에서 율법학 선생이 되고, 로마에서 다시 밀라노로 가서 정부 고위직 관료가 됩니다. 황제의 연설문을 담당하는 아주 굉장히 높은 고위직의 관료가 됩니다. 최고의 문법학자로 날리게 됩니다. 거기에서 두 가지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암브로시우스라는 존경스러운 목회자와의 만남이고 신플라톤주의와의 만남입니다. 그때 자기가 회심했던 광경을 고백록에서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쁘띠치아누스라는 궁정의 높은 관리를 지내던 사람이 와서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연히 성 안토니우스의 순결한 삶에 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 어거스틴의 마음이 불꽃처럼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직까지도 신앙에 들어올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암브로우시스의 설교를 들으면서 갈등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 유명한 회심의 사건이 있고 나서 ‘홀레레게’ ‘집어라. 읽어라.’ 그리고 방으로 뛰어 들어가서 펼친 책이 로마서였고 거기서 로마서 12장을 읽으면서 생애적인 회개를 경험하는데 그가 표현하기를 ‘내 눈에서 눈물이 강물처럼 쏟아졌나이다.’ 회개하고 그는 다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의 지혜를 찾는 이 일에 몰두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어거스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거기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 시대를 지나면 여러분들이 존경하는 조나단 에드워즈 같은 사람도 1733년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우연히 말을 타고 숲길을 산책하던 도중 거기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을 경험하게 되면서 찬란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말에서 내려서 엎드려서 한없이 영광에 감격하며 두려워 떨고 하나님 앞에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자기를 회개하고 그는 알미니우스주의자에서 철저하게 칼빈주의자로 돌아서고 일평생 하나님의 영광을 변증하는데 자신의 학문과 철학을 모두 사용해서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이성주의에 외롭게 도전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 사람뿐입니까? 감리교의 창시자인 요한 웨슬레 역시 만약 올드 스케이트 거리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는 사건이 없었다면 우리가 아는 웨슬레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제2의 축복이나 Second Blessing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정도는 다르지만 모든 소명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광은 하나님의 거룩함에 대한 경험입니다. 그 영광을 경험하면서 결국 자기가 존재론적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유한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고 도덕적으로 아름다우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얼마나 추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그것이 바로 소명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감동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야기를 전함으로써 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려고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야말로 천재였습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요성은 개신교에서는 무시되고 있지만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어거스틴보다 더 지속적인 영향을 현대에까지 미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고 그가 남긴 신학대전이라는 이 책은 철학서에서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어마어마한 인생에 대한 지혜를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굉장히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부유한 귀족인 지체 높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도미니코 수도원에 어려서 입학하게 됩니다. 몬테카지노라는 베네딕트회 수도원인데 거기에 있다가 황제군과 교황 사이의 알력 관계에 의해서 그 학교가 폐쇄되게 되고 그때 그는 자기 고향인 아퀴노라는 마을로 돌아오게 됩니다. 아퀴나스라는 것이 자기가 살던 동네가 아퀴노였기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그때 가까이에 나폴리대학이 있었는데 나폴리대학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나폴리대학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세운 대학이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를 아주 제한 없이 가르치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기에서 열네 살부터 열아홉 살까지 약 5년 동안 있다가 파리대학으로 가게 되고, 거기에서 위대한 스승 알베르토를 만나게 되고 알베르투스를 만난 후 그는 쾰른이라는 곳으로 그 선생님을 따라가게 되고, 거기에서 어마어마한 학습을 통해서 파리대학교 교수로 추천받아서 법정 연령보다 두 살 어린 나이에 파리대학의 교수로 부임하면서 결국 기독교 역사에 장대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 사람은 아주 순결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전에 나오는 이야기이니까 약간의 과장이 있었겠지만 어느날 채플실에 아퀴나스가 와서 지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간절히 엎드려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을 때 몇몇 학생들이 저 기둥 뒤에 숨어서 아퀴나스의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천재 아퀴나스는 어떻게 기도하는지 보자는 마음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데 강대 뒤에 있는 십자가에서 소리가 들리더랍니다. 그때 바로 아퀴나스는 얼마 전 중요한 한 논문을 완성했는데 그 논문의 제목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에 관한 논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셨답니다. ‘아퀴나스야 너는 어쩜 그렇게 나에 대해서 탁월한 글을 썼느냐? 정말 잘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너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길래 그렇게 눈물로 나를 찾느냐?’ 할 때 아퀴나스는 주님께 대답했습니다. ‘도미네 논 니시 떼. 주님이시여 당신 말고는 나에게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무엇을 주시려거든 당신 자신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이 위대한 신학자도 역시 공부 잘하는 천재성을 가지고 위대한 신학자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그렇게 위대한 신학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분이 거지수도회로 알려진 도미니코수도회의 수사라는 것은 여러분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일생을 하나님을 사랑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위대한 작품들을 남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말씀드리고자 하는 요지는 이것입니다. 소명의 핵심은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하고 자기가 얼마나 미천한 존재이고 자신이 얼마나 불완전한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것 그것이 소명의 시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소명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면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울부짖듯이 이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난 다음에는 탄식합니다. 그것이 깊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어떤 두려움이었습니까? 자기가 너무나 부정한 사람인데 그리고 입술이 부정한 자들 가운데 거하는 인간인데 그런데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뵈옵기 때문에 나는 이제 큰일 났다는 깊은 두려움입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위엄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경험을 동시에 가져다 주는데 언제나 이 위엄에 대한 경험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높고 위대하신 그 하나님을 보면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인간이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존재인가 하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경험하는 것이 소명의 핵심입니다. 자기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아주 더러운 인간일 뿐이며 자신은 그리스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깊은 고백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 됨에 대한 깊은 자각, 이것이 일회성의 자각이 아니라 매일 매일 그 자각이 자신 안에서 재현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의 경험입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쓸 때는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난 지 20년쯤 되던 때였습니다. 다메섹 가는 길에서 예수를 만나면서도 결국은 그분이 자기를 위해 행하신 대속적인 죽음 때문에 자기가 정말 커다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는데 20년 후에 갈라디아서를 쓸 때도 똑같이 자기 자신이 그렇게 죄인이라는 사실과 그래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그 후로부터 정확하게 20년 후에 그는 유언적인 편지를 씁니다. 디모데전서입니다. 그때 고백한 것과 똑같이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라는 고백을 합니다. 이것이 일회성의 고백이 아니라 매일 매일 현재적으로 자신 속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경험하는 그 경험 속에서 소명이 발견되고 유지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에 대한 자각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망하게 되었도다.’ 이때에 제단에서 천사가 숯불을 가져와서 입술을 지지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모든 부분이 모두 거룩해져야 하지만 특별히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할 계시의 선지자이기 때문에 제유법적으로 온몸의 상징으로써 입술을 불로 지진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만을 말하고 하나님에 관해서만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설교를 잘하고 싶을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다음 세대가 아무리 변한다고 할지라도 설교를 잘하는 교회는 사람이 모일 것이고 설교 못하는 교회는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노력하겠지만 소수의 교회를 제외하고는 별 성과가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금도 교회가 안 되는 때이지만 지금도 설교를 잘하는 목사님들이 있는 교회는 위치에 상관없이 성공합니다. 설교를 잘하고 싶을 것입니다. 잘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지식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에 대해서 유창한 언어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감동시킬 수 있도록 설교하는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설교입니다. 불신자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고 신자들을 설득해서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만드는 것이 목회의 본질입니다. 그것이 설교를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입술을 지지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신이 사람이 바뀌는 것만큼만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독교의 교양론이라는 책 ‘독트리나 크리스티아나’ 속에서 유명한 이야기를 합니다. ‘모두스 디벤디’ ‘삶의 방식에 의해 가르침의 풍부함이 달려있다.’ 자기가 어떤 식의 삶을 사느냐에 따라서 가르침의 풍부함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치열한 전도자의 삶을 살면 전도에 대해서 설교할 내용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거룩하게 살면 거룩함에 대해서 설교하고 싶을 것이고, 가난한 자를 도우면서 살면 가난한 자를 돕는 선행에 대해서 설교할 것이 많을 것입니다. 삶의 모든 방면에서 그렇게 철저한 삶의 ‘모두스 디벤디’가 받쳐줄 때 거기에서 꼬삐야의 삶이 나오는 것입니다. 가르침의 풍부함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전심으로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을 추구하면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용서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시는가를 풍부하게 가르칠 수 있는 것입니다. 소명 받은 자는 그래서 이 용서의 경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가 바로 하나님이 그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할 때 그때 비로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자신감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신적인 강제력으로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소명의 증거입니다. 그것을 김세윤 박사는 ‘디바인 앤 홀스먼트’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강제력을 사용해서 그 자체가 그의 숙명이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는 다른 일을 할 수 없게끔 만드는 그 무엇 그것이 그 사람 안에 작용하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자기가 한번 해볼 수 있다고 손을 드는 것이 아니라 어떤 피할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혀서 손을 들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 소명입니다.
여러분이 플라톤의 국가론을 읽어보면 유명한 동국의 비유가 나오는데 제가 40대 후반에 읽으면서 충격을 받았습니다.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평생을 동굴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는데 사람들이 벽면을 바라보면서 삽니다. 거기에 그림자들이 나타납니다. 그것만 보면서 삽니다. 쉽게 각색해서 말하자면 그림자를 보면서 저것이 무엇인지? 다음에 무엇이 나타나는지? 알아맞히면 알아맞힐수록 돈도 많이 벌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다가 그중 한 사람이 도대체 저 그림자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하고 뒤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 뒤를 돌아보게 할 수 있는 힘이 무엇이냐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는데 저는 그것은 진리 자체가 이끄는 힘이라고 봅니다. 봤더니 불이 켜져 있고 불 앞에 요만한 쪼가리들이 왔다 갔다 움직이면서 그림자들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림자는 아무것도 아니고 결국은 이 앞에 있는 불빛과 어떤 물체의 형상의 조작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거기서 충격을 받고 그 모종의 사람이 더 뒤를 돌아다보니까 위로 올라가는 층계가 나옵니다. 그 층계를 따라 올라갑니다. 이것이 ‘아나바이노’라고 하는데 올라갑니다. 올라가서 보니까 이 지하동굴에서 보았던 그림자를 만들었던 그 조각물들의 실체가 실제 바깥세상이 보이는 것입니다. 거기서 보았던 나무, 동물, 이런 것들이 햇빛과 함께 모두 찬란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그 사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이데아와 모상의 세계에 대한 비유입니다. 그렇게 해서 올라가서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림자를 보다가 그림자의 원인을 파악하고 그림자의 원인을 보다가 마지막에는 올라가서 실체를 보게 되니까 이제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소원이 다 이루어졌습니다. 아, 이것이었구나! 하는 사실을 깊이 깨달으면서 동굴에서 평생 사는 동안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모든 진리가 완벽하게 드러나는 찬란한 기쁨을 맛봅니다. 그 기쁨을 맛보는 순간 ‘아망케’가 주어집니다. 숙명이 주어집니다. 어떤 숙명이 주어지는지 아십니까? 그 사람은 거기에 그냥 있지를 못합니다. 왜? 지하에서 아직까지도 그림자를 보고 사는 사람들이 자기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 삶이 얼마나 비참한 것인지를 알고 위대한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어떤 자기도 거역할 수 없는 숙명에 이끌려서 다시 카타바이노 동굴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너희들이 보는 그림자는 조작된 것이고 그 조작은 형체들로 이루어져 있고 저 밖의 세상에는 이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아름다운 실제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목숨을 다해서 전파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그 사람의 운명은 거기서 많은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것이 ‘아나바이오 카타바이노’입니다.
똑같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깊이 경험한 사람들은 그 영광을 경험하고 그 영광을 엔조이 하면서 혼자 즐길 수가 없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경험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할 세계와 사람들도 사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 숙명에 매여서 다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세계 속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거기서 자기가 만난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비참함과 죄의 용서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보카치오’ 소명을 주셨다는 사실을 전파하면서 그러면서 어떤 사람은 핍박 받고 죽어가고, 어떤 사람은 피를 흘리고 그러면서 보람을 찾고, 어떤 사람은 살아서 그 열매를 보면서 보람을 찾고 그러는 것이 목회의 소명이고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 사람의 행복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시점에 있는지 한번 깊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학교마다 신학생이 줄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제 생각에는 더 줄어드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명이 있는 사람들만 남고 소명이 없는 사람들은 과감하게 세속적인 직업으로 돌아가서 거기서 하나님을 섬기면서 한 교회의 충성스러운 일꾼으로 살아남는 것이 정상적인 삶이 아닙니까? 저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경쟁률이 MDiv가 20:1이었습니다. 1200명이 와서 60명을 뽑았습니다. 졸업하는 학생들이 거의 1/2이상 아니 약 60%는 개척하는 것이 기정사실이었습니다. 지금은 점점 그런 숫자는 드뭅니다. 물론 거기에는 사회적으로도 개척하려면 어마어마한 돈이 필요하다는 것도 있지만 그런 소명이 점점 흐려져 가는 이때에 우리는 깊이 반성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깊이 몸부림치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 앞에 살려고 여러분들이 결단을 내릴 때 그때에 시대가 아무리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적이고 세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왜? 여전히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진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면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그 손을 붙들고 결국은 교회가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붙들고 자기가 어느 지점에 와있는지 생각하고 진정으로 자기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확인하면서 한 번밖에 없는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하고 싶은 일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면서 사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