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지혜(3)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녹취자 : 오지윤
두 시간에 걸쳐서 설교를 했는데, 간단하게 요약하고 오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바울이 고린도 지방으로 전도하기 위해서 가기 전에 들렸던 곳이 철학으로 유명한 도시인 아데네입니다. 아데네에서 그 사람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철학적으로 논쟁했지만 열매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적었습니다. 그것을 성공한 것이냐, 실패한 것이냐 평가하기에 앞서서, 그 결과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고린도에 왔을 때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고 했습니다. 한 가지 중요한 결정을 마음에 하게 됩니다. 내가 전도할 때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겠다. 그래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달린 것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오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에서는, 고린도가 당시에 아데네 못지않게 교만하고 지적인 도시였는데, 여기서는 복음의 큰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그렇게 얘기해놓은 것을 다시 한 번 뒤집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의 없어질 통치자의 지혜도 아니요” 여기서 “그러나”를 사용함으로써 앞의 이야기를 뒤집어버립니다. 그것이 그러나 입니다. 문법에서 이것을 역접이라고 합니다. 문장을 이어주는데, 앞의 것을 뒤집어버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뒤집습니까? 내가 이제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만 하겠다고 했는데, “그러나”를 사용함으로 뒤집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지혜를 말하겠다고 말합니다. 이 지혜는 철학입니다. 여기에 “소피아”라는 말이 그 당시에 로마에 사는 모든 사람들 입장에서는, 지혜는 곧 철학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필로소피아”라는 단어를 역사상 처음 쓰는 사람이 피타고라스라고 알려져 있고, 후에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라는 작품을 읽으면서 같은 단어를 어거스틴이 발견합니다. 그리고 큰 충격을 받습니다. 내가 이렇게 허기지고 목말라하는 이유가 “필로소피아”, 참된 지혜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참된 지혜를 찾아가려고 몸부림치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밀라노에서의 일 이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 때 이미 욕정에 빠져있었고, 마음으로는 진리를 사랑하고 싶으나 몸으로는 육욕을 쫓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자기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을 느낄 때 그는 19살이었습니다. 밀라노에 가기 이전입니다. 이것을 깊이 깨달으면서 밀라노에서 다시 한 번 큰 각성을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고민하는 시간을 갖게 됩니다.
두 가지의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데네에서 내가 복음 전도함에 있어서 철학자들, 스토어 학파의 학자들과 당시에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에피쿠르스 학자들의 방식대로 논쟁을 해서 이겼지만 성과가 없었습니다. 그것을 깊이 자책하면서 뉘우친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직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말하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지혜를 말한다고 합니다. 다시 철학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그렇게 하는지 한정이 되어있습니다.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입니다. 그리스어로 다 자랐다는 뜻입니다. 저는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자라고 더 이상 키가 안 컸습니다. 그 키가 계속 유지되었습니다. 그렇게 full grow, 더 이상 성인으로서 몸이 더 자랄 수 없도록 도달한 사람, 그 사람을 가리켜서 온전한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이야기하면, 신앙이 상당히 성숙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나는 지혜를 말하겠다. 왜 그랬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보는 커다란 두 시각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적인 커다란 교회들이 있는 곳이 다섯 군데가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아프리카에 중심지에 있고, 콘스탄티노플이 있고, 안디오키아가 있고, 로마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크게 예루살렘이 있고 안디오키아 학파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복음의 발생지였지만 신앙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안디오키아 학파 사람들은 오직 이성만으로, 신앙만을 강조합니다.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 모순됨으로 진리다. 이렇게 신앙 일근도로 나가는 사람이었고, 알렉산드리아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신앙과 이성 사이에 분명히 조화를 찾아가는 길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이성도 하나님이 주셨고, 신앙도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참된 이성이라면 참된 신앙과 충돌하지 않을 것이다. 충돌한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없기 때문에 충돌한 것이고, 참된 이성이 아니기 때문에 참된 이성과 충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역사적으로 승리는 알렉산드리아에게로 돌아갑니다. 알렉산드리아에 의해서 기독교의 정통성들이 유지되오며, 발전 돼오고 기독교가 존속되었던 것입니다. 안디오키아는 나중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립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기독교 교리의 역사도 그렇게 전해 내려온 것입니다.
신앙이 어렸을 때는 단순한 복음을 가르쳐서 예수를 믿게 만드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아데네에서 실수했던 게, 철학자들의 논쟁 속에 휘말려 들면서, 그 프레임 속에서 논쟁을 했던 것입니다. 몇 사람은 믿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도바울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떠는 마음으로 고린도를 오게 된 것입니다. 신앙이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왜 우리가 이것을 믿는 것이 합리적인 것인지 설명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굉장히 성숙한 형태로 쓴 것이 로마서이고, 더 성숙한 형태로 쓴 것이 에베소서이고, 가장 완성적인 형태로 쓴 것이 골로새서입니다. 나는 온전한 자들에게는 지혜를 말해야겠다. 철학을 가르쳐야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거기서 다시 한 번 한정을 합니다. “그 지혜는 세상의 지혜가 아니다.” 세상의 지혜는 하나님 없는 지혜입니다.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혹은 하나님은 하늘에 있을 뿐, 아무것도 우리를 위해 하시는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기의 이성을 하나님의 자리에 올려놓고 철학을 추구하며 가는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닙니다. 통치자들은 누구입니까? 가깝게는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만 포함되는 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자기에게 이런 사상이 있다고 선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주 머리 나쁜 사람이 군사정권을 통해서 나라의 국권을 강탈했습니다. 그리고 별 두 개에서, 별 네 개를 달고 대통령이 됐습니다. 주위의 머리 좋은 사람들의 두뇌를 빌려서 끊임없이 그럴싸한 통치 철학을 만들어냅니다. 백성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것이 정당하고, 우리가 무엇보다도 나라를 생각하며 똘똘 뭉쳐야 되고, 집권자의 지시에 복종해야 된다는 식의 사상을 우아한 말로 가르치면서 장기 집권을 획득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권력을 공고합니다. 이런 것이 통치자들의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이것에 세뇌가 됩니다.
북한에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일행이 관광버스를 타고 이동하는데, 많지도 않았습니다. 통일부에서 한 명이 같이 탔는데, 이 사람을 못 믿으니까 국정원에서 한 사람을 보냈습니다. 국정원에서 온 사람은 감시하기 위해서 온 사람입니다. 모두 보고를 하고, 무엇을 하겠다고 한다면 안 된다고 제재를 하는 사람입니다. 저녁 늦게 버스로 이동하는데, 앞자리에 앉아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김일성 대학을 나온 인재라고 합니다. 김일성 대학을 안 나오면 보위부에 소속될 수 없을 것입니다. 저녁이 돼서 눈물을 글썽이며 노래를 부릅니다. “어버이 수령님 보고 싶습니다. 김일성 수령님 보고 싶습니다.” 그것을 마치 고향을 그리는 노래를 부르듯이, 그리스도인이 찬송가를 부르듯이, 그 정서에 흠뻑 젖어서 노래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통치자의 철학에 세뇌된 모습입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슨 지혜인지 물으면, 감추어져 있던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여주기를 원했지만, 두 가지 점에서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한 번에 다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조금씩 보여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 계시의 점진성이라고 합니다. 천천히 보여주십니다. 그리스도 예수에게서 활짝 꽃피게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죄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햇빛은 비추는데 눈을 감고 있어서 여전히 어두운 것입니다. 그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감추어져 있던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만세 전에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9절을 같이 읽어봅시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이 지혜는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정치가, 문화의 권력을 가진 사람, 학문의 권력을 가진 사람, 예술가 이 모든 사람들이 단 한 사람도 이 철학은 알지 못했다. 이 한 마디 말로 내가 믿음이 다 큰 자들에게는 철학을 가르치겠는데, 이 철학은 너희들이 세상에서 들었던 철학과는 완전히 다른 철학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가르칠 만큼 아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정말 그 철학을 몰랐던 사람들인 증거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 설명을 하는 것이 한 사람도 알지 못했는데, 만약에 그 지혜를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결국 지혜의 핵심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한 인류의 구원, 그것이 철학의 핵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철학은 하나님의 지혜인데, 그 지혜가 뭉쳐진 것이 그리스도이고, 그 지혜가 펼쳐진 것이 구원의 역사입니다. 그 구원의 역사는 이미 아담과 하와가 타락될 때부터 시작해서, 천국에서까지 이루어지는 게 구원의 계획인데, 모든 계획을 두루마리로 접으면 하나로 뭉쳐지는데, 그것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만약에 이렇게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철학을 알았더라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을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 어리석음에 빠진 사람이 자기였기 때문에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신 있게 나도 그 지혜를 몰랐기 때문에 예수를 대적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여, 스데반을 죽이는데 같은 투표하는 무리에 섰었다고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몰랐는데 스데반이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요 우리들의 구원이라는 것을 선포했기 때문에, 견딜 수 없이 괴로워하고 그 사실을 인정하기 싫었기 때문에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지키면서, 마음으로 같은 투표를 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지혜는 세상의 철학으로 대치될 수 있는 지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상의 철학은 참된 지혜를 찾아가지 못하는 철학이 되어버렸고, 그래서 철학만으로는 우리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참된 신앙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이 지혜가 무엇인지 아는 철학의 방식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을 여기에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세기를 살았던 안셀무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영국 런던에서 아래쪽으로 한 시간 반 정도 내려가면 캔터베리이라는 성당이 있는데, 거기에 안셀무스라는 사람이 주교로 목회를 하던 곳입니다. 안셀무스는 프랑스 노르망디에 베크람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다가, 란브란쿠스라는 스승이 캔터베리의 주교로써 목회를 하다가 돌아가십니다. 그 후에 만장일치로 훌륭한 분을 모셨습니다. 천재였습니다. 이태리 사람입니다. 그렇게 캔터베리에 오게 됩니다. 거기서 목회를 하십니다.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을 사시다가 결국은 귀향해서 돌아오시고 죽으십니다. 왜 그러셨냐면, 캔터베리에 와보니까 교회가 너무 부패한 것이었습니다. 독신 제도도 성립이 안 되어있고, 사제들이 축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려면 돈을 걷어 들여야 되지 않습니까? 부당한 방법으로 교회 돈을 걷어들여 낭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면서 개탄을 하고 있는 가운데 끔찍한 상황을 만나게 됩니다.
프랑스 국왕과 영국 국왕들은 세력이 크지 않습니까? 교황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자기 나라의 주교를 임명할 수 있는 서임권을 요구합니다. 나중에 파문까지 당합니다. 그렇게 협의를 본 것이, 교황이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안셀무스를 임명합니다. 성가대들이 노래를 부르며 주교의 관습대로 옵니다. 교황이 보낸 팔리움이라고 하는 주교가 두르는 목도리가 있습니다. 그것을 항상 영국 국왕이 착좌식에서 씌워주는 것이 그때의 관례였습니다. 국왕은 그것을 씌워주기 위해 와서 앉아있던 예식이었습니다. 여기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캔터베리의 대주교로 갓 임명된 안셀무스가 들어오더니, 왕이 그것을 입혀주려고 엉거주춤 하고 있는데, 뚜껑을 열더니 그것을 집어서 스스로 쓴 것입니다. 그리고 남긴 유명한 말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신의 신부인 교회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은 교회가 당신의 자유로운 신부가 되기를 원하시지, 당신의 나라의 신하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이 사건 때문에 발칵 뒤집히고, 두 번이나 예배를 가고 마지막에는 돌아가십니다.
안셀무스가 이런 말을 남깁니다. ‘나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 신앙이 없는 철학은 오만이며, 이성이 없는 신앙은 태만이다. 철학하지 않는 신앙은 나태한 것이다.” 이렇게 못 박으며 참된 신앙을 위해 이성이 존재하며, 믿는 것이 먼저이지만 믿은 후에는 왜 그것을 믿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공부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이성과 신앙 사이의 관계를 확정 짓습니다. 그것이 기독교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람도 십자군 운동을 단호하게 반대했습니다. 그런 비이성적인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니라며 단호하게 반대해서 왕따를 당합니다. 그리고는 맞았습니다. 이 지혜는 세상 사람들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째 설교를 마치며 정리를 하자면 이런 것입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쉽고 은혜로운 설교라고 생각하는데,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립니다. 설교가 쉬우면, 쉽고 은혜로운 것은 너무 좋습니다. 그런데 쉬운 설교가 반복되면 신앙이 자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쉽기만 하면 이해할 것이 없습니다. 이해하는 것이 없는데 은혜롭다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경험하는 착각 이거나 혹은 모순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깊이 있는 설교이면서 은혜로운 설교를 해야 오래도록 설교할 수 있습니다. 은혜로운 설교는 무엇인지 알겠는데, 한 사람의 설교를 들으면서 깊이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요소가 무엇입니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철학의 깊이입니다. 단어 하나를 읽어도 큰 사상 속에서 읽어내면서 의미를 풀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에게 철학 공부가 매우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안 합니다. 너무 힘들고 재미없는 작업이니까 안 하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청년들이 3-40명, 장년들이 3-400명 정도 모이는 교회인데, 부목사가 저를 만나서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이 사람들이 언제부터인가 인문학책 읽기 부흥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근데 이게 통제가 안 된다고 합니다. 너무 말을 잘하고, 교역자가 들어도 잘 모르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으면서 흠뻑 빠지는데, 신앙하고 점점 멀어지게 만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물어보셨습니다. 당신이 못 다룰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부터 공부해서 다뤄야 되는데 쉽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신앙이 깊고 그런 것을 이해하는 사람의 지도를 받으며 읽었으면 괜찮은데, 그런 것 전혀 없이 오히려 기독교에 가진 반감을 가진 청년들이 모여서 읽기 시작하면서 잘못된 철학들과 사상들을 받아들이니까 이해하면 이해할수록 기독교에 대해서 반감이 생깁니다.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고 사상으로 무장되면서 확신범들이 되어버립니다. 왜 그렇게 됐습니까? 그렇게 오랜 세월을 교회에 다녔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안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거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어느 한순간에 가슴에 작렬하듯이 와닿는 것입니다. 죽이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아주 철학이 없는 가벼운 설교들로 유행을 하는 것입니다. 책 한 권도 어려워서 교인들이 못 읽는 것입니다. 이것이 설교를 깊게 만드는 철학입니다.
두 번째는 거기서 주님을 깊이 만난 것, 본인이 그것을 직접 깊이 체험하고 삶으로 살아낸 것, 그것이 설교를 들을 때 깊이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열렬하게 눈물을 흘리며 전도지를 돌리면서 사는 사람은, 다른 설교는 몰라도 전도 설교만큼은 교인들이 정말 감동적이다, 깊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이 말했듯이, “포르마 비벤디 꼬피아 토켄디” 삶의 형태가 가르침의 풍부함을 결정한다는 말입니다. 삶을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가르칠 것이 많은 것입니다. 목회자들이 목양을 하지 않습니까? 눈물로 목양하는 사람들은 목양이 무엇인지 말할 때 절절한 생각이 마음속에서 솟아나서 말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구역장들, 순장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을 평신도에게 적용하면, 지혜와 믿음은 함께 추구해야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믿음이 우리에게 목표가 무엇인지 제시해주고, 우리의 마음에 타오르는 불길을 일으킨다면 이성은 그 길을 똑바로 갈 수 있는 것을 성경 말씀을 통해서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책을 읽을 때 자기가 95퍼센트쯤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읽으면서 5퍼센트의 이해가 안 되는 것을 가지고 고민해야 됩니다. 저자에게 묻고 싶고, 선배에게 묻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읽으면서 하나씩 지혜를 배워가서, 사람들에게 인간이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을 통일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계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설명할 수 있어야 됩니다.
저는 어제 아사밤 전시회를 하는 곳에 갔습니다. 여러분들도 시간이 나면 한 번 가보시길 바랍니다. 거기에 다녀오는 것을 외출로 해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 곳에서 몇 사람과 대화를 나누며 이러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예수를 안 믿었으면 90퍼센트는 자살을 했을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가 없는 것은 고생을 하는 것보다 더욱 무서운 것입니다. 의미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확실하게 자살했을 것 같습니다. 자살은 결심하기까지가 어렵지, 결심하고 나면 실행은 쉽습니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것을 가지고, 기도와 찬송, 말씀 속에서 은혜를 받는 생활을 계속해야 하고, 부지런히 배워가야 합니다.
요즘 격려가 되었던 것이 있습니다. 게으름 개정판이 나오고 후기들이 엄청나게 많이 올라왔습니다. 어제 한 후기를 보았는데, 거기서 가슴을 찢는 것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책의 백미는 9장입니다. 저자는 말합니다. 게으른 사람은 고집스러운 사고가 폐쇄적입니다. 신앙에 대해 더 많이 배우려 하지도 않습니다. 지성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편협한 틀 속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리한 면도칼로 내 살을 저미어놓고, 소금을 뿌리는 것 같은 극심한 환각통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를 짓눌렀습니다. 어쩜 이렇게 강력할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단순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아니었구나 하는, 자기가 잘못 생각했다는 것에 대한 확실한 획을 긋는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을 바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철학은 어려운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철학입니다. 플라톤을 반복하거나 아리스토텔레스를 되뇌이는 게 철학이 아닙니다. 그것은 철학 공부이지, 철학을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사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해서 배우는 것이 똑같습니까? 극장 구경을 하는 것과 영화를 보는 것이 똑같습니까?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깊은 깨달음이, 이성적으로 자기가 확실하게 잘못됐다는 것에 대한 묘사가 얼마나 절절합니까? 생살을 면도칼로 찢어서 연어처럼 벗겨낸 다음에 굵은 소금을 뿌린 후에 다시 덮어서 문질렀을 때 마음이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것을 이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입니다. 몇 페이지를 읽을 때마다 똑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스스로 철학을 하면서 깨어나는 과정입니다.
자기가 어리석다는 사실을 깨닫는 날이 없는 시간들이, 자기가 어리석어져 가는 날들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의 결론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믿는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믿기 위해서는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참된 철학이 모순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래 교회 다니고, 예수를 신실하게 믿으며 사는 어른들을 보시길 바랍니다. 그들은 아리스토텔레스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아까 말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신앙생활을 해온 것입니다. 알고, 믿고, 더 잘 알기 위해 믿고, 더 잘 믿기 위해 알면서 신앙이 온전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중심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십자가가 모든 세계에 역사를 펼치는 하나님의 지혜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