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은 자의 행복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셀라)”(시 32:1-4)
녹취자: 권정윤
시편 32편은 다윗의 시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를 아마 밧세바와의 간음 사건 다음에 그 죄의식에서 벗어나는 용서의 과정에서 기록을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추측일 뿐이지, 확실하게 그 둘이 연관된다고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존 오웬의 표현에 의하면 은혜의 지배의 시대가 끝나고 죄의 지배를 받고있는 상태에서 자기가 얼마나 곤고해졌는지를 토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1절과 2절에서는 전체적인 일종의 선언을 하게 됩니다. 마치 시편 23편에서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것이 총론적인 선언인 것처럼 여기서도 일종의 선언을 하게 됩니다. 1절과 2절의 내용은 표현은 다르지만 똑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어떠어떠한 사람의 행복이여 라고 말합니다. 마치 심령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처럼, 똑같은 형식의 이러이러한 사람의 행복이여 라고 말합니다. 그 행복이 무엇이냐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도다 행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아무리 행복을 이야기하고 명랑한 삶을 이야기해도 일단 하나님 앞에 죄를 짓는 삶을 살아가면 그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죄는 결국 빗나간 사랑,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 때가 있습니다. 그 길을 위해서 하나님이 은혜의 수단을 예비하십니다. 그것이 용서입니다. 은혜 언약 아래서 두 가지가 약속되는데,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는 무한한 은혜의 공급이고 두 번째는 범죄했을 때 그 죄에 대한 무한한 용서 두가지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시인이 행복을 말하며 허물의 사함을 받고 죄가 가려진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하는 것을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가운데 많은 고통을 받으며 비로소 이 사실에 대해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3절, 4절을 다시 보면,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토설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정직하게 아뢰고, 그것을 하나님 앞에 토해놓는 것을 여기서 입을 연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의 죄를 고하며 토설하지 아니할 때는 종일 신음했기 때문에 내 뼈가 쇠하였습니다 라고 말합니다. 뼈들이 쇠한다고 복수로 나옵니다. 구약에서 뼈라고 하는 것은 우리 몸을 형성하는 가장 중요한 골격입니다. 그래서 에스골 골짜기에서 죽은 자들이 다 말라버렸는데 살아날 때 제일 먼저 일어난 일이 뼈가 일어나 뼈가 맞춰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살이 입혀지고 군대가 되는 것입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이 하와에 대해서 선언할 때 이는 나의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고백을 함으로써 뼈가 먼저 나옵니다. 그러니 인간 존재의 가장 중요한 골격을 형성하고 은유적으로 사용되면 이것은 인간의 마음에 가장 깊은 곳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실제로 회개하지 않고 살았기 때문에, 말라서 뼈까지 쑤시고 아파서 신음하는 광경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시인의 깊은 내면의 세계에서 녹아내리듯이 양심의 참소를 당하고 율법에 의해 정죄를 당하고 있는 고통스러운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은 헤어날 수 없는데 이미 사건은 벌어졌고, 자신은 그 죄를 지었다는 사실은 확실한데, 이것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는 막혔고, 예전과 같이 하나님 앞에 즐겁게 묵상하고 찬송하며 자신의 중심을 쏟아놓으며 기도할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기도의 문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기도의 문이 열려 있는 사람이 성경 말씀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불이라면, 기도는 그 불씨를 간직하는 따뜻한 재가 담겨있는 화로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해 말씀을 받고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개인 경건의 통로가 다 부서져버린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십니다 라고 표현합니다. 이는 자신을 완전 목을 누르듯이 위에서 엄청난 힘으로 누르는 것을 가르킵니다. 숨을 쉴 수 없게끔 그렇게 주야로 하나님의 손이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졌습니다. 진액이란 말이 성경에서 자주 나오는데, 이는 육체의 생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그러한 자신 안에 있는 에너지입니다. 그 진액이 남아 있을 때 몸을 돌면서 우리를 사람답게 살게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두 다 빠져버려서 마치 여름 가뭄에 모든 도랑과 웅덩이가 다 말라버린 것처럼 더 이상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에너지가 없어져 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고백을 하면서 셀라 라고 나옵니다. 이는 음악적인 구어인데 여기까지 일정한 어조로 낭독하고 그 다음에는 높은 코드로 넘어가는 그런 의미라고 추측합니다. 어쨌든 하나님 앞에 진액이 모두 빠져서 여름 가뭄의 마름과 같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우선 첫 번째로 배우는 것은 결국 우리가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 생활을 누리며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범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매우 큰 것에 이르기까지 범죄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우리가 잘못하지 않을 수는 없지만, 내가 모르고 한 범죄와 알고 한 범죄는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충만한 교제 생활 속에서 기도의 은혜와 말씀을 누리는 사람들을 가로막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일한 수단이 범죄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다른 시편에서 너희는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라고 몸서리 쳐지듯이 그렇게 범죄 하면 깜짝 놀랄 정도로 생각하며 죄에서 멀리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으로 죄의 모양과 외모까지도 다 버리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가장 커다란 이유는, 이 시를 쓴 다윗도 마찬가지로 그런 감각들이 무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 안에 있을 때는 우리 마음 자체가 이러한 자기를 향해 다가오고 있는 시험과 죄에 대해 안테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기가 막히게 무엇이 오는지를 다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에서 멀리 떠나고, 마음은 태만해졌고 생각은 정욕에 이끌려지기 시작하면서 다윗은 본래의 아름다운 신앙을 잃어버리고 깊은 영혼의 침체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시는 죄를 지었고 그로 인해서 그는 일찍이 자신이 가보지 못한 영혼의 깊은 사망의 골짜기를 들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우신 분인지, 죄를 지은 것은 정말 잘못된 것이고, 그리고 그 속에 깊이 들어간 것은 더더욱 잘못된 것인데 그런데 그 속에서 자신이 하나님과 누리고 살았던 교제의 시간들을 기억하면서 어쨌든지 영혼의 침체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 속에서 시인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결코 알 수 없었을 죄인의 심리와 하나님의 은혜의 깊이를 아주 깊이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아는 그런 위대한 신학자요 철학자, 선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교훈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것. 두 번째는 기억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느냐 하면, 죄의 결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를 유혹할 때는 언제나 자신이 꼭 필요한 것처럼 유혹합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로 일어날 많은 일들을 감춥니다. 음식도 보면 요즘 사람들은 모두 먹고 살만해서 식사를 해보면, 식사에 대해 탐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적정하게 먹고 끝냅니다. 그러나 그런 식탐에서 못 벗어난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먹고 있는 것이 자신 몸 속에 들어갈 때 무슨 일을 일어나게 하는지에 대한 생각이 거의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치즈 팩토리라고 하는 유명한 디저트 집이 있습니다. 미국 전역에 있는데 모두 똑같은 모양의 이집트 모양의 건물을 지어야 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디저트 집입니다. 우리와 같이 스테이크를 먹었던 자매들이 넷이서 우르르 오더니, 케잌이 수백 개이고 법에 의해서 칼로리 표시를 다 해놓았고 한 조각에 1800칼로리인데, 그것을 쟁반에 수북이 담습니다. 만 칼로리가 넘을 정도를 서넛이 앉아서 다 먹고, 콜라를 다 마십니다. 그리고 몸이 의자에 콱 끼어서 일어나면 의자가 함께 일어날 정도로 살이 찌는 것입니다. 외모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그 당시의 즐거움에 취해서 먹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건강에 해로운 결과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결과를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파괴되고 자신과의 관계도 파괴되는 그것이 시인이 자기 자신이 어디 있는지를 찾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어거스틴의 고민이 그것이었습니다. 내가 어디에 있습니까? 이렇게 욕망으로 자신의 마음이 흩어져버리고 나면 자신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찾기 가장 좋은 때는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을 질서로 설명했는데 그 질서가 존재와 가치의 질서입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하위에서 상위까지 피라미드 모양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존재 중에 최고의 존재이고 그 다음에는 조금씩 모자라는 것으로 이루어지고 맨 밑바닥에 모든 물질의 재료가 되는 질료가 오는 것입니다. 사랑을 할 때 하나님을 사랑해야지만 모든 것들에게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사랑해야 할 정도를 그 가치와 존재의 질서를 따라서 부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정확히 부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사랑해야지 할당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금 있는 것을 많이 사랑하고 많이 있는 것을 조금 사랑할 때 그때 그것이 정욕이 되는 것이고, 그때 이 사람 정신에 혼란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똑바로 최고의 존재이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 입장에서 모든 사물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립니다. 그래서 무엇을 더 많이 사랑하고 무엇을 덜 사랑해야 하겠는가 하는 것이 결정됩니다. 그 분량에 맞게끔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죄의 고통을 기억하라입니다. 시인이 이런 사건을 거의 경험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건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 아래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행복인가 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같이 되었습니다. 내 뼈가 쇠하였습니다. 도저히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살 수 없는 처지를 말해주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이탈하고 깊은 죄의식에 빠지게 되면 소위 얘기하는 삼탈 현상이 생겨납니다. 탈물, 탈인, 탈현 현상입니다.
탈물은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이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공허한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일등석 비행기가 어디서 어디를 날아간다더라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돈이 없어서 못 타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물질과 모든 것들에 대해서 완전히 탈출해버린 것 같은, 관계성 자체가 없는 것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굉장히 중요한 것이, 사람이 살아가는 행복이 사실 물질과 관계된 데서 사람이 참 많이 느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너희의 분복을 누려라 할 때는 신령한 것에서부터 육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에 대해서 건설적인 생각을 가지고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이러한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커다란 행복입니다. 그것들이 우리에게 많은 위로를 줍니다.
두 번째는 탈인 현상입니다. 사람으로부터 마음이 이탈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와도 관계를 갖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인간관계의 의미를 상실해 버리는 것입니다. 예전에 만나면 행복했던 사람들을 더 이상 만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우울증을 진단할 때 가장 중요한 지표 중 하나가 매일 만났던 사람들이 보기 싫어지는 것입니다. 예전에 정다웠던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겁게 느껴질 때 우울증의 전조입니다. 사람을 회피하게 됩니다.
마지막 세 번째가 탈현 현상입니다. 현실을 이탈해 현실감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현실 그 자체가 자신에게 매우 낯설게 느껴지고 그 현실에서 자신이 뿌리를 내리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겠다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결론을 내리자면, 시인이 얘기하는 이러한 지경으로 들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어떻게 시인이 이러한 깊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적으로 이러한 상황에 들어가지 마라. 그리고 죄를 짓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매 순간 마음을 모두 쏟아놓으면서 언제 하나님을 불러도 그 하나님이 친근히 응답하시는 그러한 교제의 세계 속에 살기를 힘쓰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