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섬긴 정치가(국회 조찬 기도회)
“그들이 왕 앞에서 대답하여 가로되 왕이여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그 다니엘이 왕과 왕의 어인이 찍힌 금령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하루 세번씩 기도하나이다 왕이 이 말을 듣고 그로 인하여 심히 근심하여 다니엘을 구원하려고 마음을 쓰며 그를 건져 내려고 힘을 다하여 해가 질 때까지 이르매 그 무리들이 또 모여 왕에게로 나아와서 왕께 말씀하되 왕이여 메대와 바사의 규례를 아시거니와 왕의 세우신 금령과 법도는 변개하지 못할 것이니이다 이에 왕이 명하매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는지라 왕이 다니엘에게 일러 가로되 너의 항상 섬기는 네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하니라”(단 6:13-16).
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창조하실때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를 창조하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이 지상에 세계를 창조하시고 인간이 타락한 후에는 교회와 국가를 세우셨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관계는 인간의 몸과 영혼의 관계와 유사합니다.
그래서 우리에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 깃들었을때 그 사람을 온전한 사람이라고 부르는것처럼 국가가 건전하고 힘차고 그 안에 끊임없는 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교회가 건전하게 자리잡을때 그 국가와 교회는 각각 구분되지만 모두 한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면서 그 국가전체가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에 이바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상에 있든지 지상에 있는 성도든지 모두 우리 하나님을 섬기고 영화롭게 하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에 있든 속해 있든지 혹은 이 나라에 속해있든지 우리는 나뉘어지는 사람들이 아니고 함께 한 하나님을 섬겨서 그래서 이 땅을 창조하시고 이 국가를 세워놓으신 하나님의 목적에 이바지하게 하기위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모든 일 가운데에는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따로 있는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도 교회도 모두 궁극적으로 한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국가는 올바른 법을 세우고 그 법을 집행함으로써 시민생활의 유익을 기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세계의 질서를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국민들의 공유와 행복의 증진에 이바지해서 궁극적으로 그 편안한 삶을 통해 인간의 인간다움을 아릅답게 실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계를 빛나게 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서 교회는 끊임없이 그 사람에 정신과 영혼속에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 수 있는 은혜의 힘을 부여하는 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래서 아직은 모순과 갈등이 많은 이 세상속에서 때로는 고난과 박해를 받으면서도 보이는 이 나라보다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그리움을 간직한채 하나님을 섬겨서 궁극적으로는 보이는 국가의 행복에도 이바지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입니다.
오늘 그러한 본분을 따라 살았던 다니엘이라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사람은 약 주전 605년경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유대인 포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죄때문에 나라가 망했지만은 그러나 가장 어두운 역사의 칠흑같은 한 밤중에도 믿음으로 살아가면서 결국은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예언하였던 훌륭한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동시에 아주 뛰어난 정치가요 또 관료였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에게 끌려가고 벨사살 왕을 거쳐 메대와 바사의 다료왕에게 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주권자가 바뀌고 왕이 죽임을 당하는 정변까지 일어났는데도 이 사람이 그 모든 통치자 밑에서 일할수 있었던 것은 얍쌉한 정치의 수단이나 보신주의 때문에 그런것이 아닙니다.
이 사람 자신이 워낙 탁월한 정치력과 행정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념을 초월해서 이 사람이 아니면 이 바벨론과 메대 바사의 나라를 올바로 세울 수 없다고 믿었기에 이 사람이 그렇게 왕이 바뀌어도 지속적으로 쓰임을 받았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각각 섬기는 위치는 다르지만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따라 믿음으로 살려는 사람들은 그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이든지 간에 부분적으로는 사람들로 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지만 부분적으로는 도전과 박해와 시기를 받게 마련입니다.
다니엘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그에 출세를 시기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그에 틈을 보고자하였으나 어디에서도 그 잘못과 허물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아무리 털어도 먼지가 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교만하게 꾀를 내어 왕을 지극히 높이는 것처럼 떠받들며 왕 이외에 신이나 사람에게 기도하는 사람은 사자굴에 집어넣자고 법률을 세웠습니다.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줄 알면서도 다니엘은 평소에 하던 그대로 예루살렘을 향해 난 창을 열고 집에가서 하나님께 하루에 세번씩 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빌미가 되어서 그는 체포가 됐고 왕도 어쩔 수 없이 이 사람을 사자굴에 던져넣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다니엘을 사자굴속에 던져넣으면서 왕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니엘에게 대해서 한 말입니다. 그는 다니엘을 향해 말하기를 '사시는 하나님의 종 다니엘아,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 슬퍼하며 사자굴속에 던져 넣었던 것입니다.
이 당시 바벨론 왕의 권세는 오늘날 전 세계의 모든 대통령의 권세를 합쳐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거의 신과 같은 권세였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있는 총리에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다니엘. 아마 모든 부하들은 신하들은 그 임금앞에 황제앞에 완전히 부복하였을것이고 그리고 그것은 가히 신을 떠받드는것과 같은 그러한 경배의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마음속에 일편단심 이 왕만을 경배하고 공경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다니엘도 아마 그래야 했을 것입니다.
그는 마음을 다하여서 남에 나라이긴 하지만 국사를 돌보았고 이것이 도도하게 흐르는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한 물줄기 속에 자기가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후일 예레미야의 편지를 통해서 바벨론 포로에서 해방될 날이 얼마되지 않았단 것을 깨닫기 까지 그는 갈길을 모르는 역사에 한 밤중에도 하나님 한 분을 의지하며 그 분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실것과 당신의 교회가 지금은 파괴된것 같으나 하나님은 그 그루터기를 남겨 역사속에 하나님이 교회를 창조하신 그 뜻을 이루실 것이라는 굳은 신념을 가지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러한 신념을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되새기는 일이 바로 하나님앞에 기도하고 율법을 상고하는 일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경건생활에 충실하면선 믿음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록 황제와 같은 권세를 가지고 모든 사람을 마음대로 하였고 다니엘도 자기에게 마음을 다해서 충성하였지만 이 왕은 다윗의 정체성에 관해서 생각할때 자기의 신하로써 자기에 명령을 따르기는 하지만 그는 자기의 종이 아니라 사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이 다리오왕에 마음에 잊혀질 수 없도록 각인된 다니엘에 대한 인상이었습니다.
지극히 공손하고 나라를 섬기기위해 충성스럽게 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과정일 뿐이고 그가 궁극적으로 헌신한 것은 왕인 자신과 바벨론 나라가 아니라 그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였다는 사실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왕앞에 '사시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정체성에 대한 인상을 깊이 깊이 아로새겨 주었던 것입니다.
자, 그는 하나님의 종이었습니다.
의원님들 뿐만 아니라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각각 서있는 자리는 다르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주님에 의해서 거기에 우리가 있는것이 아름다우시기 때문에 다른곳이 아니라 거기에 세워두셨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국사를 돌보고 교회일을 돌보고 직장에 일을 돌보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섬기는 것은 나라와 그리고 또 직장과 그리고 교회건물 자체가 아니라 그 모든것을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심을 명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 마음을 따르며 산다면 우리가 섬기는 자리는 달라도 아름다운 일치를 이루면서 서로 달라도 하나님을 섬기는 아름다움에 있어서 통일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는 다리오의 마음속에 그는 '사시는 하나님' 즉 '생존하시는 하나님' '살아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이었습니다.
우리에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것, 하나님이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 역사를 움직이시고 또 지금도 친히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순결한 영이시니니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움직이시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그들의 정신과 영혼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은 그 하나님이 우리에 마음속에, 우리에 신앙안에, 우리에 삶속에 살아있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신것을 보여주는 신자의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아주 신실한 형제의 이야기 하나를 하고 오늘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그에 직업은 토지를 감정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토지를 감정을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어느날 감정을 하기 위해서 지방에 내려갔더니 그 어느 기업이 토지와 건물을 굉장히 큰것을 감정을 부탁을 하면서 감정을 잘 해서 대출을 받게해 달라고 많은 대출을 받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대요. 그러더니 식사를 하고 나서 조용히 사무실에 앉았는데, 가방을 꺼내더니 아주 낡은 낡은하게 다 헤어진 만원권을 이천만원 두 다발을 신문지에 싸서 주면서 무릎을 꿇고 "당신의 감정에 우리 기업에 존폐가 달려있습니다.잘 봐주십시요" 그러더래요.
그래서 이렇게 열어보니까는 추적도 안되는 다 낡은 돈이예요.
그래서 이 형제가 그랬어요. "이 어려운 시기에 사업하시느라고 얼마나 어려우십니까? 제가 잘 봐드리겠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당신 회사에 유익이 되도록 법에 테두리 안에서 감정을 해드리겠습니다." 사장이 너무 감격을 해서 돈다발을 계속 밀었어요.
그러니 그 형제가 "최선을 다해서 누구보다도 잘 해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이 사장이 펄쩍 뛰면서 받아달라고 부탁을 하니까 "제가 이돈을 너무 받고 싶습니다. 저도 돈이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돈을 받을 수 없는 단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그게 뭡니까?" "제가 기독교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 소리를 들었을때 이 사장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정말 살아계신것처럼 느껴지더란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지시는 것이예요.
우리 모두 우리 서있는 그 곳에서 이런 저런 일을 하지만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볼때 결국은 우리에 섬겼던 외형들은 잊혀져도 결국은 그 사람람들 마음속에 우리가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들로 기억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