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12일 교직원예배
“제자들이 건너편으로 갈 째 떡 가져가기를 잊었더니”(마 16:5-12).
사람이 무엇을 생각하든지 생각나는 것은 대게 그 사람의 성향과 관계가 있습니다. 생각나는 것만 성향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나는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더더욱 그 사람의 성향과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오늘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건너편으로 갈 때에 떡을 두고 기다란 논쟁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조심해라 그러셨어요. 누룩은 곰팡이죠! 그랬더니 제자들은 떡이 곰팡이 필까봐 조심하라 그러시나보다. 아차!! 떡을 안 가져왔구나!! 이렇게 생각을 한 거죠! 이 제자들의 귀에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이라는 소리는 들리지 않고 누룩이라는 소리만 들렸고 그래서 우리의 떡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구나!! 이렇게 해석을 했던 것이니까 식사 때를 기다리던 제자들의 마음속에 있었던 온----갖 생각은 육신의 음식으로 허기를 채우는 것이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죠.
여러분도 학교 다녔으니까 공부시간에 점심때가 안됐는데 도시락을 밑에다가 까놓고 선생님 칠판에다 글씨 쓸 때 한 숟갈씩 먹던 기억이 날거에요. 제자들이 말하자면은 그런 상태였죠!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믿음이 없냐--!! 만약에 그 떡이 정----말 필요하다면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 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게 몇 바구니였는지 한번 기억을 해 바라--! 무슨 뜻이냐 하면 무엇을 먹을까? -- 하는 이 문제는 너희가 마음을 기울여서 염려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이걸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거죠. 왜 이 먹을 것을 그렇게 염려 안 해도 되는 것은 우선 어----
첫째로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의 인생에 부여하신 하나님의 고유한 존재의 목적을 따라 살면 하나님이 먹여 살린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예수님이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말씀과 마태복음에서 공중에 나는 새,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수고 길쌈 안하고 창고 없어도 아버지께서 먹이고 기르시는데 하물며 그것들보다도 귀한 너희 일까보냐! 그러면서 마치 기도를 안 해도 된다는 듯이 너희 천부께서는 너희가 있어야 할 것을 미리 아시느니라-- 너희는 오직--, 그러면서 사실 그 ‘오직’이 히랍어에서 보면은 역접이거든요. 그래서 'but' 그런뜻이라 이거에요. 그러나 너희들이 해야 될 것이 있는데 그건 바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순서상으로 보면은 그 나라와 의를 위해서 사는 사람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 기도할 필요가 없다. 그 시간이 있으면 더 높은 차원의 것을 위해서 빌어라. 이런 해석이 틀렷다고 누가 얘기하겠어요. 그렇죠? 그런데 그 해석은 이상하게 누가복음 11장에 나와 있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일용할 양식을 우리에게 주옵시고....., 이걸 어떻게 조화를 시킬 것이냐가 문제죠! 그렇죠? 이거는 이렇게 조화를 시켜야 됩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사실은, 잘 들어보세요!! 양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양식을 사용하며 사는 사람의 마음을 위해서 에요. 다시 말씀드리면,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악에서 구해 주시는 거 이 모든 것들은 그거를 위한 거 에요. 진짜 그거를 위한 것이라 이 얘기에요. 진짜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거 에요. 근데 일용할 양식을 주옵소서-- 라고 하는 기도는 그렇게 기도를 해야지만 양식이 주어진다기보다는, 만약에 그렇다면 불신자들이 먹고 사는 것은 기적 아니에요? 태어나서 한 번도 그런 기도 안하는데..., 근데 진짜로 그 양식을 위해서 우리들이 열렬히 기도하며 그 응답이 아니면 먹고 살 수 없다는 그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서 일용할 양식을 위해 하나님 앞에 비는 동안에 몇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 에요.
첫째가 뭐냐 하면, ‘자기’라고 하는 이 존재가 얼마나 약한 존재인지를 깨닫는 거 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양식을 하루세끼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양식 의존적인 존재라는 거, 그거를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아버지의 나라를 위해 봉사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는 다만 티끌일 뿐임을 깨닫게 되는 거죠. 두 번째는 뭐냐 하면, 그렇게 해서 자신의 육제의 생명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에 의존해 있기는 하나님이 손을 펴시매 물고기와 모든 짐승들, 산천의 초목들이 살아있는 것처럼 내가 비록 하나님을 닮은 형상을 가진 인간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육체의 차원에 있어서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한 존재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세 번째는 육체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 한다면 따라서 자신의 영혼은 얼마나 하나님을 더 의지하겠는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하기위해서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반드시 넣도록 가르쳐 주신 것이다 이거죠! 그래서 결국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예수님의 관심사는 떡을 가지고 염려하지 마라-- 만약에 안 가져와서 정말 필요하다면, 그러면 예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기적적으로도 너희에게 먹이신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정말 말씀하시고자 했던 것은 뭐냐 하면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의 ‘누룩’ 이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그릇된 교훈’ 이었어요. ‘그릇된 교훈’. 그 그릇된 교훈이..... 그 그릇된 교훈이 예수님께로부터 가르침을 받는 제자들에게 조차 영향을 끼쳐 예수님이 주신 순수한 진리가 누룩으로 곰팡이가 슬어서 문제를 일으키는 이런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거든요.
여기서 우리는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되는 거죠. 적어도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말씀인데 뭐 그렇게 힘이 없냐! 썩지 말아야지--- 예수님이 가르져 주신 교훈이 순전한 떡인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가짜 떡에서 나온 누룩 때문에 그 참 떡이 곰팡이가 슨다고 해서야 그게 참된 교훈일수 있느냐 라고 하는 이성적인 발론이 제기되는 거 에요. 근데 사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아요. 무슨 뜻이냐 하면은, 얼마든지 예수님의 이 염려가 현실화 될 수 있다는 거 에요. 예수님의 참된 교훈은 절대적인 참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누가 거기에 무엇을 섞으려고 해도 그것을 부패하게 할 수 없어요. 부패되는 것은 객관적인 예수님의 교훈이 부패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부패되어 순전한 것이 들어가도 그것이 이 속에서 부패된 채 자신에게 받아들여지게 되는 거죠. 제가 떡 장사를 할때 일이었어요. 떡을 하러 새벽에, 그날도 인제 새벽에 인제 쌀을 싣고 자전거를 타고 가는데, 어... 가래떡을 뽑는... 가래떡인지 절편인가를 뽑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인제 찰떡이었는데, 그거를 인제 다 해서 하얀 찹쌀을 다 찧어서 집어넣었어요. 내 순서가 된 거에요.. ‘야!! 오늘은 기다리지도 않고 빨리 일이 끝나는 구나’ 하고 내심 기분이 좋아서 기다리는데 쭉----나오는데, 하-----얀 찹쌀가루를 집어넣었으니까 하-----얀 떡이 나와야 되는데 누르스름한 떡이 나오는 거 에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그랬더니 거기 있는 사장 아주머니가 그래요. 앞사람이 옥수수떡을 했는데 조금만, 앞에 조금만 나오면 아마 인제 깨끗하게 나올 거 에요 그러는데 웬걸!!! 이게 한 덩어리가 그 속에 들어가서 한꺼번에 샥----나오면 좋을텐데 어느 구석에 배겼다가 살----살-----나오면서 떡 전체를 노랗게 만들어버리는 거 에요. 그거를 누가 먹겠어요. 그 노란 거를...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고 그래서 그때도 기지를 딱 발휘해서 아-- 그러면 이거는 기름 묻혀서 팔지 말고 콩가루 묻힙시다 그래서 콩가루 확----묻히니까 노란건지 하얀 건지 알게 뭐야! 그죠? 그때 내가 하나 깨달은 교훈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야--- 이게 줄을 잘서야 되는 구나!! 다음에는 절---대 옥수수떡 하는 사람 뒤에 서나 봐라. 그 피해를 그대로 보는 거 에요. 만약에 그 앞에 누군가 한사람이 했으면 그거 다 묻어서 깨끗이 치워버리고 그 다음에 내 떡이 들어갔을 거 아니에요. 말하자면 그런 거라 얘기에요!! 떡 자체는 하얗게 들어갔는데 바리새인의 그릇된 교훈을 먹고 마음이 뒤틀린 거라!! 그러니까 이게 순전하게 떡이 들어갔는데 계----속 누룩이 묻으면서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거 에요. 들어가면서 부패하는 거죠. 마음 자체가 부패하기 아주 좋게끔, 마음 자체가 참 떡에 맞는 마음이 아니라 곰팡이에 맞는 마음이 되어버리는 거 에요. 들어가면서 확-------썩는 거 에요. 그래서 결국은 많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이 곰팡이가 심각하게 퍼져서 이 사람을 누룩으로 가득 찬 사람으로 만드는 거라 이거죠. 성경에서 이 누룩은 긍정적인 뜻으로도 쓰이고 부정적인 뜻으로도 쓰여요 이렇게... 예수님 때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백성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단 말이죠. 서기관과 함께.... 그러니까 예수님의 참된 교훈을 받을 때 방해가 되는 누룩의 역할을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의 유대교적 그릇된 가르침이 누룩의 역할을 했다 이거죠! 지금은 바리새인, 사두개인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온----갖 잡스러운 이 세상의 성공주의, 다원주의, 자기 최고주의, 지상행복주의, 그다음에 인간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이런 심리학, 목회의 성공을 위한 그런 경영의 기술들, 그리고 교회 와서 사람들이 즐거움을 찾으려고 하는 오락주의, 이런 것들이 마음속에 우후죽순처럼 돋아나서 주님은 순전한 떡을 넣어주셔도 들어가는 즉시 그 곰팡이에 묻어서 변질된 사람이 되어버리는 거 에요.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우리가 현재 싸워야하는 싸움은 이당시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에 의해 영향을 받기 때문에 싸워야했던 이 당시 제자들의 복음사역 현장보다는 훨씬 심각하고 힘겨운 싸움을 싸우게 되는 거라 이거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면은 이--- 자아에 대한 생각이, 한 예를 들자면 'self', 이 자아에 대한 생각이 이게 이 전통적인 기독교에서는 말이죠, 은총아래서 복종하고 굴복되어야 할 자아였단 말이죠. 근데 지금은 뭐냐 하면 숭상 받아야 할 자아에요. 자기가 죄를 지어도 자신을 피해자로 생각을 해야 되는 거 에요. 목표는 뭐냐 하면은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을 신격화 하는 거 에요. 그래서 오늘날의 상호 호해주의적인 사회분위기는 민주화 됐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제가 몇 주 전에 어느 신학대학원에 갔어요. 그랬더니 그 어느 교수님이 그래요! “목사님, 이렇게 교단도 다른데 집회도 와주시고 섬김의 날도 해주시고 너무 감사합니다” 그래서, “교단이 달라도 그리스도 안에 한 형제인데 우리가 본을 보여야지요. 그래야지 우리 후배들이 극복을 할 거 아닙니까?” 그랬더니 그 교수님이 그래요. “허긴! 목사님 요새는 참 시대가 좋아졌습니다” “왜요?” “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구별이 없이 다-- 잘들 지냅니다” “ 교수님! 그게 좋은 게 아닙니다.” “왜요?” “그 잘 지내고 갈등이 없다는 뜻이 그게 서로 그리스도 안에서 깊-----은 사랑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감리교는 더 이상 감리교다워지질 않고, 성결교는 더 이상 성결교답질 않고, 장로교는 더 이상 장로교를 고집하지 않는 탈사상화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설교를 들어보십시오. 아침마당처럼 설교하는데 장로교하고 감리교하고 싸울 일이 뭐 있습니까? 어차피 진리가 그 속에 별로 없는데....” 그러니까 그 교수님이 “아---정말 말을 듣고 보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다”고... 오늘날의 이 화해의 분위기가 사실은 교리를 모----두 포기 했기 때문에 생겨나는 화해의 분위기라 이거에요. 그러니까 이런 속에서 우리들이 지금 싸우고 있는 거 에요. 그러니 그런 사상이 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쓰레기 같은 수-----많은 사조의 영향을 받는 거 에요. 사실은 엄밀히 말하면 교회를 통해서 영향을 받는 거 보다는 아마 TV를 통해서 받는 영향이 압도적으로 크리라고 나는 생각을 해요. 그렇게 가치관이 형성되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될 것이냐? 라고 하는 거 에요.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뭐냐 하면 두 가지에요. 두 가지가 필요한데, 하나는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가 없고 성공을 일으키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고난을 당하거나 외톨이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끝까지 어리석어 보이는 그 일을 하여야 한다. 낙심 될 때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이라고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야 된다는 거 에요. 두 번째는 뭐냐하면, 그렇게 할 뿐만 아니라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을 전폭적으로 바꿔놓으시는 그 심령의 강력한 초자연적인 변화!! 그거를 하나님 앞에 기대하고 빌어야 하는 것이에요. 빌어야 하는 것이에요. 한 20년 넘었어요. 신 대원 다닐 때 일이니까-- 기도원을 갔는데 젊은 목사가 설교를 해요. 근데 감리교 목사래요. 하여튼, 참, 기도원에서는 못 듣는 설교를 그날 했어요. 기도원에 모였던 사람들이 전-----부 예배를 드리고 내려가면서 “야!!! 정말 오늘 설교다운 설교를 들었다. 어디서 저런 설교가 나오냐!!” 십자가에 대한 설교였어요. 감리교.... 그때 사실 80년대 감리교는 심각했거든요. 문화신학인지 뭐 한다고, 다 팽개치고 뭐 교수들이 거기 나와서 예수의 피와 돼지 피가 뭐가 차이가 나냐고 그랬다가 왜 출교까지 당하고 그랬잖아? 그런 상황인데 저 사람은 어떻게 됐나 그랬더니 그 사람이 설교 속에서 간증을 하는 거 에요. 자기가 원래 진------짜 날라리 목사였다 이거에요. 그래서 복음이 그렇게 미련해 보일 수 없고 그래서 그렇게 표현은 안했지만, 자유사상을 전하는 재미로 산거야. 대정부 투쟁하고.... 기도원에 올라와서 기도를 한 거 에요. 근데 성령의 불을 받은 거 에요. 어느 날 막 자기의 죄가 생각이 나서 생----전 처음으로, 내가 보기에는 그 사람 그때 회심 한 거 같애. 목사 되고 나서.... 막 그------------ 기도를 했는데 온-------몸에 충만하게 임한 성령을 경험한 거 에요. 그리고 기도가 끝났는데 일어나보니까, 나는 실제로 본건 아니에요. 그 사람 얘기를 믿고 그러는 거거든요. 손을 폈는데 자기 손에서 십자 모양이 된 상태에서 피가 철철 흐르더라는 거 에요. 그게 무슨 돌에 부딪혀서 그랬는지 뭐 어째 그랬는지 나는 모르지만은 어쨌든 그 이야기는 다 거두절미하고 그렇게 열려히 기도하고 일어났는데 딱 손을 펴보니까 여기 십자가 모양이 그려지고 피가 철철 쏟아지더라는 얘기에요. 뭐 그 얘기를 난 액면 그대로 다 믿지는 않는데, 뭐 기도하다가 손을 흔들고 난리를 치고 뭐 바위에 부딪혔는지 진짜 기적이 일어났는지 난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확실한 거 하나는 그 사람이 거기에서 십자에 대해서 깨닫게 된 거 에요. 자 그랬더니 어떤 일이 일어났냐 하면은 십자가에 대한 경험은 불과 몇 십 분이었는데 그 감리교에서 자유주의 신학을 먹은 그 물은 십 여년이상 쌓인 물이야. 한 번에 확----지워져 버리면서 십자가가 새겨지는 거 에요. 우리가 기도해야될 거 하나가 바로 그거라 이거에요. 그거라 이거에요.
누구든지 다-----자기는 순수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고 그 말씀이 자기의 마음속에 달게 느껴지지 않을 때는 자기의 마음에 누룩이 있다고 생각 안하고 말씀이 순수하지 못하고 개떡 같다고 생각 한다 얘기에요. 누구든지 이렇게 생각한다 이거에요. 근데 확------밀려들어오는 거 에요. 신학의 역사에 보면은 그렇게 복음을 만나서 완전히 변화된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아브라함 카이퍼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이잖아요. 그리고 이사야 53장을 읽다가 유대교 학자에서 개신교 신학자로 혹은 카톨릭 신학자로 전환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거에요. 그런 건 바로 한순간 하나님의 역사가 그렇게 고질병과 같은 누룩을 한 번에 태워버린다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거라 얘기에요. 그러니 뭘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겠는가 생각해 보라 얘기죠. 그죠? 교회적으로, 자기의 사역에 있어서, 또 자기 자신의 영혼에 있어서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