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4일 새벽예배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녹취자 : 김세나
인내로써 자신에게 당한 경주를 경주하는 것에 대해서 어제 말씀을 드렸고요, 그렇게 경주를 하려고 할 때, 그 때에 굉장히 커다란 노력이 필요하고 엄청나게 힘이 든 거죠. 여러분 이렇게 걸어갈 때에는 팔을 들고 걸어가도 모르지만, 차를 타고 한 100km정도 달려가면서 손을 한번 내 밀어 보십시오. 손을 펴고 들고 있을 수 없을 정도로 바람의 저항이 느껴집니다. 한 150km 정도 달리면서 팔을 내밀면 위험합니다. 실험을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비행기가 날라갈 때, 그렇게 얕은 곳에서 손을 내민다면, 아마 손이 부러지고, 목을 내민다면 목이 꺾어 질 것입니다. 가만히 이렇게 평상으로 살아갈 때에는 사실 무슨 세상이 그렇게 우리에게 커다란 저항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일단 목표를 세워놓고 바람을 가르고 경주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어서 일정한 목표를 향해 달려가려고 할 때, 그 때에 느껴지는 이 저항은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마치 나 이외에 모든 것이 내가 달려가는 길을 막으려고 저항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벌 떼처럼 일어나서 그렇게 저항해서 달려가고 있는 나에게 저항하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고난을 많이 받게 됩니다. 인생에 있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어떠한 한 목표 지점을 향해서 최선을 다해서 다름질 치지 않는 그래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면서 살아가는 그러한 사람들 그러한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러한 저항적인 고난 같은 것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세상적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강하게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제 거룩하게 살고자 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려고 할 때, 그 때 강력한 저항에 부딪히죠. 그래서 믿음의 사람은 경주의 사람이요, 인내의 사람인 동시에 또한 고난의 사람이에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거론했던 그 수많은 믿음의 사람들 중에는 아주 평화로운 환경에 태어나서 평화롭게 살다가 평상적으로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치열하게 고난을 받은 사람이었고 심지어는 그 고난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죽어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강력한 저항을 받을 때, 신자가 무엇으로서 그러한 강력한 저항을 이길 수 있을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한 사람이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 사람의 본성 자체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와는 달리 바뀐 것은 아니에요. 한번 하나님을 믿고 거듭난 후에 본성이 바뀌기는 하지만 그 후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이 무슨 천사가 된 것이고, 혹은 신이 된 것은 아니란 말이죠. 그저 평범한 사람에 불과해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그렇게 목표를 향해 달려가려고 할 때 부딪히는 어마어마한 저항 앞에서 자기가 끊임없이 그 달려갈 길을 경주하게 만드는 그 모든 자원들은 자신 안에서 공급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 밖에서 공급 되는 거예요. 하나님께로부터 공급 되는 거라는 거죠.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러한 믿음의 사람이 그러면 어떻게 이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경주하면서 살아갈 수 있겠느냐. 그것을 여기에서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선 먼저 바라본다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인가. 바라본다라고 하는 것은 그냥 쳐다본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찬양) 시시 때때로 주만 봅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구약에 보면 그 하나님을 바란다라고 하는 표현이 많이 나옵니다. 영어로 말하면 hope in God입니다. 하나님께 희망을 두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다. 또 많이 쓰이는 단어가 히브리 단어의 바타하 인데, 그것도 역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탁하다. 의뢰하다 그러한 뜻이에요.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있는 거죠. 마치 시인이 시편 42편 같은 데서 내가 주를 찾기에 갈망하니이다. 내 영혼아 내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오히려 너의 하나님을 바라라 할 때에 그러한 의미의 바라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그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자신을 거스리는 수많은 저항들을 물리치고 그렇게 빛처럼 살면서 또 자기 자신의 안에 있는 죄를 죽이고 저항하는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로우며 그것들을 이기고 살아갈 수 있는가. 끊임없이 위로부터 공급되어지는 그 하늘 자원의 신령한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게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예수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 그래서 그 분 안에 모든 희망이 있다고 믿는 것, 그 분안에 모든 생명이 있고 그 분안에 인간의 기대가 있다라고 믿는 것, 그것이 바로 경주에서 오는 그 모든 저항을 이기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이죠.
그러면 어떻게 예수를 바라보는 것으로서 경주의 길을 달려갈 때에 경험하게 되는 수많은 난관과 저항을 이기는가. 이기는가. 우선 첫 번째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온전한 의지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러한 저항을 이기게 만들어주는 모든 힘들을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에게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중보자이시다라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인격 안에서 이 세상이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 온 세상이 유지되고 또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들이 선택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구원받고, 구원받은 인간도 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구원받을 때에만 중보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이후에도 우리의 모든 삶에 있어서 중보자가 되시고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것들은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죠.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됨됨이에 참여함으로써, 그럼으로써 그리스도가 누릴 수 있는 것들을 그에게 접붙여져 있음으로써 누리는 것이다 하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예수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그러한 저항을 이길 수 있는 하늘의 힘들을 공급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바라보고 기대해야 된다는 것.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이 세상에서 자신과 같이 경주하시며 고난을 받으셨는가 하는 것들을 알 수 있는 것들이에요. 이것은 아주 굉장히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지금 예수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진 자신이 믿음의 길을 경주하기 위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을 이상하지 않게 생각하게 되고 새로운 경험인 것처럼 생각을 하게 되고 오히려 그 고난을 탕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구나 하는 것을 그 고난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자신이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할 때에 끊임없이 당하게 되는 그 고난과 저항, 거기에서 오는 고통을 통해서 자신이 예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과연 자기를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위해 죽으실 때 자신도 또 그 죽음에 참여하였던 것을 현재적으로 actualism 실현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에 참여하게 되는 거예요. 그 때에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께 속했던 사람들은 무한한 감화를 받게 되는 거죠. 그래서 그 고난을 통해서 자신이 오직 예수께 속했다는 것, 그리고 자신이 오직 예수께 속했다는 것 뿐만 아니라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사실을 거기에서 깊이 깨닫게 되는 거죠. 거기에서 예수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공급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능력을 맛 보게 되는 거죠. 은혜의 능력을 맛 보게 되는 거죠.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거든요. 내가 신앙생활을 올바르게 하려고 하는데 박해를 받아요. 그 때 예수를 좀 똑바로 믿어 보려고 하는데, 와 이 못된 사람들이 나를 괴롭히는 구나. 아니 나쁜 놈들이다. 진짜 한판 해 볼까. 이렇게 마음을 먹으면 고난이 계속해서 고통으로만 남아요. 그런데 박해를 해. 핍박을 해. 고난을 당해. 괴롭힘을 당해. 그 때에 주님을 생각하는 거예요.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묵상하고 나면 그 사람들이 자기에게 퍼붓는 핍박과 고난 때문에 그리스도와 합일을 발견하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정말 그 고난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된 사람이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도 더 많은 고난을 받고 죽으셨기 때문에 여기에 나는 이렇게 정말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래도 나는 혼자가 아니다. 그것을 깨닫게 되는 거죠. 그리고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고 주님을 더 바라보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오히려 용서를 빌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스데반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종류의 정신이에요.
세 번째는 그 예수를 바라보는 방법이 뭐냐 하면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렇게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의 경주를 하기 위해서 사시는 동안에 고난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결국이 어떠했는가가 문제에요. 마지막 결국이 어떠했는가. 마지막 결국이 어떠했는가. 마지막 결국이 어떠했습니까. 그렇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더니 하늘보좌에 앉으셨어요. 부활의 영광을 경험하죠. 그래서 지금 우리가 당하는 이 잠시 동안의 믿음을 따라 살기 위해서 당하는 이 고난과 이 세상의 저항은 잠깐 사라질 것이에요. 이 속에서 믿음을 지키며 살았을 때에 우리가 이후에 받게될 그 영광은 지금 우리들이 경험하는 이 고난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예요. 그리고 깊이 감격하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보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거기에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놀라운 힘들을 얻게 되는 것이에요. 우리에게 이러한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하겠습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