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3일 새벽예배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녹취자 : 김세나
이 편지가 쓰여지던 로마 시대 때에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있는 스포츠가 둘이 있었다면 하는 희랍어로 팔레라고 불리워졌던 격투기였습니다. 팔레라고 하는 격투기는 이 에베소서 6장에 보면,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둠의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라고 나오잖아요. 우리의 씨름은 그게 아니다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반대로 행해지던 씨름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혈과 육에 속한 씨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검을 가지고 격투기를 할 수도 있고 혹은 검 없이 맨손으로 격투할 수도 있는데 그 싸움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을 쳐 죽여서 피 흘리기까지 쳐 죽일 때까지, 그 때까지 이루어지는 그러한 싸움입니다. 그게 가장 인기 있는 것이 격투기였고 거기에서 이제 변형된 것들이 그 콜로세움에서 행하던 짐승을 풀어서 사람을 잡아 먹는 격투기라기 보다는 그 잔인한 장면들이었죠.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고 한다면 달리기였단 말이죠. 달리기. 당시에는 마라톤 이었단 말이죠. 그런 것인데 그 경주들이 집대성이 되어서 그게 이제 올림픽으로 탄생되지 않습니까. 그 경주는 달음박질이에요. 그래서 성경에 보면 몇 번 경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경주를 보면서 이 글을 기록했을 것이라고 믿어지는 이 사도는 굉장히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 같아요. 그래서 그 다른 서신에서도 달리기에 관한 것을 이야기 하는데 그 달리는 선수들이 그 혼신의 힘을 다해 달리면서 그러면서 땀을 뻘뻘 흘리면서 그러면서 그것도 무조건 도착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경쟁을 하면서 그들보다 더 앞서서 달리기 위해서 그 몸부림치는 그 혼신의 노력을 보면서 깊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아요. 이 달리는 선수들은 그 목표 자체가 빠른 시간에 남보다 더 빠르게 올바른 방법으로 지정된 지점에 도착하는 것이 달리기 선수들의 꿈이죠. 그래서 그것을 100미터에서 0.1초라도 단축하기 위해서 피나는 초인적인 노력을 하고, 그리고 과학적으로 동작을 연구해서 기록을 높이기 위해서 많이 애를 씁니다. 당시도 마찬가지이죠. 달리기 선수의 목표는 언제나 1등이에요. 2등도 아니고 3등도 아니고 함께 달리는 모든 사람을 재치고 첫 번째로 골인 한 사람들에게 상이 있는 거죠. 그런데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모든 것들이 그 목표에 맞추어 진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래서 참된 그리스도인, 참된 참된 그리스도인의 결정적인 특징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산다라고 하는 인생의 목표를 가지고 있고, 그 모든 삶의 모든 것들은 그 목적을 위해서 살도록 재편된 사람이 바로 재뉴인 크리스찬, 순전한 그리스도인이에요. 그러니까 그는 늘 깨뜨려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일수도 있고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뜨겁게 사랑한 사람일수도 있고, 마음을 쏟으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사람일수도 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흔히 경험된다 하더라도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서 삶의 모든 구도들이 거기에 적합하도록 재편된 사람이 아니면 그는 재뉴인 크리스찬이 아니에요. 여기에서도 그것을 이야기 하는 거죠.
(예화) 달리는 경기자가 있는데 그의 목표는 빠른 시간에 경쟁자들을 채치고 첫 번째로 골인 지점에 도착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달리기를 시작하면서 마지막 끝날 때까지 모든 것들이 그 목표를 이루기에 적합하도록 모든 것들이 재편된다 말이죠. 그래서 어떻게 해요. 평상복을 다 벗어 버리고 달리기에 적합한 옷을 입죠. 그 때에는 이 옷을 입으면 사람들이 부저처럼 볼까, 가난한 사람처럼 볼까. 우아할까. 아니면 촌스러울까. 아니면 이렇게 입을 때에 패셔너블할까. 유행에 맞는 옷일까. 아니면 유행에 좀 뒤 떨어진 옷일까. 화려하게 보일까. 아니면 너무 수수하게 보일까. 그런 것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리고 이 옷을 입어서 혹시 넘어지더라도 무릎이 상하지 않도록 보호해야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죠. 오직 모든 자기 입는 그 옷과 신는 신발, 그리고 모든 자신의 체력은 그 달리기만을 위해서 비축하고 거기에 적합하도록 모든 장비들을 갖추는 거죠. 실제로 한 그 20-30년 전만 해도 인간의 힘으로는 100미터 벽을 10초 안으로 도저히 끊을 수 없다. 그게 신이 내린 인간의 한계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9초 8이 나왔습니다. 거기에는 고도의 과학적인 훈련도 있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뭐냐 하면 이 신발의 변화와 신발의 과학, 육상화의 과학화가 이 기록을 줄이는데 기여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 목적에 적합하도록 엄청난 공을 들여서 과학적으로 신발을 만드는 거예요. 아마 제가 알아보지는 않았는데 어마어마하게 비쌀 것입니다. 알피니스트들이 등산을 할 때, 그 코스를 그려가지고 가면 등산화 만드는 사람들이 그 코스에 맞춰서 그 등산화를 만든답니다.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래요. 그렇게 철저하게 등산이면 등산, 달리기면 달리기, 그 목적에 맞게끔 모든 것이 준비되는 거예요. 그러한 사람들이 일등을 하는 것이지, 집에서 파자마 바람으로 있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퍼 자가지고, 맨발로 나와서 맨 땅에 세워놓고 준비 땅 한다고 해서 그 속에서 세계적인 기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에요.
사도는 그것을 본 거예요. 그 달리기 하면서 미친 듯이 달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들을 거기에 적합하도록 갖춘 거예요. 첫 번째는 목적이 있고, 그 목적에 맞게 모든 것이 재편된 거예요. 마지막 세 번째는 뭐가 있을까요.
사력을 다 해서 그 일에 힘쓰는 희생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도 달려보시면 알지만, 달리기 하지 않다가 달리기를 한참 하면 심장이 터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마라톤 선수들이 2/3까지는 어떻게 제정신으로 달리는데 나머지 1/3은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 달리고 마지막의 그 골인지점에 가까워서 스타디움의 함성소리가 들릴 때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고 해요. 그리고 골인을 하고는 그 자리에 뻗어 버리는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선.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는 최선, 그것을 모두 쏟아 붓는 것, 그게 바로 경주라 이야기에요. 그게 바로 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믿음을 소유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믿음은 언제나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것이에요. 그래서 믿음이 있으면 이 믿음은 끊임없이 우리를 어디론가 몰아가요. 어디론가 우리들을 데려가고 어디론가 우리들을 달음박질 하게 만들고, 무엇인가 우리들이 쏟아 붓게 만들고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몰두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이 믿음이 가진 역동적인 성격이에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안일한 삶을 산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예요. 믿음은 오히려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고히 갇혀있는 그 것 자체를 믿음은 용납하지 못하는 거예요. 길들여지는 것, 습관에 길들여지고, 환경에 길들여지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떠한 울타리 안에 가만히 갇혀있는 것, 이런 것은 믿음은 이런 것을 용납할 수 없어요. 믿음은 용납할 수 없어요. 왜, 그 믿음을 가진 사람이 그 초점이 있고 인내함으로써 거기로 달려가려고 하는 역동적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단코 그런 정태적인 상황에 갇혀 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역동적인 것이 믿음이기 때문에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항상 사고 자체가 현실에 안주하지 않아요. 역동적이라고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 정말 내가 주님의 일을 많이 했구나.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추구점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이미 한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이루지 못한 일을 생각하는 거예요. 이미 붙잡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붙잡지 못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죠. 그러한 믿음이 어디에 잘 나와 있어요? 빌립보서에 나와 있잖아요. 이미 내가 붙잡았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해서 달려간다. 언제쯤 끝날까요? 내년에, 후년에? 아니에요. 죽기까지 죽기까지 그게 사도바울이 보여줬던 신앙이에요. 그러니까 한 사람의 신자가 그러한 역동서이 없이 정태적이고 안일하다는 이야기가 그가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줘요.
(예화) 우리 교회 똑똑하게 공부를 아주 잘하는 지체들이 많잖아요. 그 중에 어떤 지금은 시집가서 애기도 낳고 엄마가 되었지만,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항상 내가 어느 날 10등이다. 내 뒤에 30명이나 있다고 생각해요. 그 지체가 이야기해요. 자기 동생보고 5등을 했다나, 6등을 했다나. 야, 너 잠이 오냐? 왜? 네 앞에 네 명이나 있는데. 그게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에요. 끔찍하지 않냐 이거예요. 너보다 더 잘하는 사람들이 같은 밥 먹고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이 네 명이나 있다 이거예요. 끔찍하지 않냐 이거예요. 공부 못하는 사람들은 뒤에 36명이나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것은 추구점이 없는 거죠.
신앙도 마찬가지에요. 사람을 향해서만 경쟁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해 지기를 힘쓰는 거예요. 그게 믿음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항상 치열하게 타오르는 갈증이 있어요. 오늘 새벽에도 4시 15분에 일어나서 잠이 안 와요. 피곤하니까 쉬기는 해야 하는데, 그래서 밤중에 누워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다가 갔고, 성경도 말하기를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많이 있다고 했는데, 그 중에는 지금 내가 갈등하고 있는 이 신앙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그리스도와 온전한 합의를 이룬 사람들, 그리고 더 뛰어난 영성을 소유하고 더 뛰어나게 창조의 목적에 부합하고 거룩하게 진실한 사람을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과연 내 인생은 여기에서 뒤로 물러날 것인가. 이것은 교회가 얼마나 커지느냐, 교육관을 사느냐. 얻느냐, 뭐 교회를 다시 부수고 짓느냐 마느냐 이런 거와는 비교될 수 없는 문제에요. 열린 교회가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어요. 저 죽으면 끝이에요. 여러분 천국에서나 다시 볼까, 이 세상에서는 다시 볼일이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을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았느냐 하는 문제는 영원한 문제에요. 왜, 이 땅에서 무엇을 심고 뿌리느냐 그것이 영원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이에요. 그것을 전심으로 생각을 하면 이 자기가 하고 살아온 일들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것 느낄 수가 있죠. 언제 그것을 하고 있느냐는 거예요. 가지 못한 길이 수없이 많은데. 그래서 삶의 모든 방면에서 온전해지기를 사모하고 삶의 모든 방면에서 자신의 전 생애가 주님의 것이 되기를 원하고 삶의 모든 방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여기에 존재하는 것이 선해 보이고 그래서 아름다워 보리고 그래서 주님이 보시기에 탁월해 보이는 그러한 존재가 되기를 사모하는 것이 그것이 믿음을 가진 성도의 갈망이라는 거예요. 그것이 없으면 살았다는 이름은 가졌으나 그것은 사실 죽은 것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믿음을 이 세상에서 예수 때문에 성공하고 부자가 된 것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것은 이것은 마치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금소와 버러지와 같이 썩어질 우상과 바꾸는 것과 다른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그 모든 추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결국은 뭐가 필요하면, 치열한 인내가 필요한 거예요. 그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은 the power of love, 사랑의 힘이에요. 그것만이 이 인내를 가능하게 해요. 그렇기 때문에 이 히브리서를 썼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 하면서 결국은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견딘다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 없는 사람은 사랑이 없는 거예요. 사랑이 없는 사람은 도저히 그 믿음을 행사할 수가 없어요. 무엇 때문에, 무엇 때문에 우리가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우리의 육신의 경향을 포기하냐 이야기에요. 나는 새벽에 자고 싶다 이거예요. 그런데 왜 이 새벽 시간을 포기하고 새벽에 하나님 앞에 기도하러 가느냐는 거예요.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 왜 내 행복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느냐고. 그러냐 이거예요. 왜 그러냐는 거예요. 그렇게 그렇게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싶어요.
어젯밤에도 교육관을 위해서 제가 고심을 하니까 빚이나도 얻었다가 주랴고 어느 성도가 우리 집에 찾아 왔대요. 그 왜 그래요. 그게 그게 정말 사랑이 없으면 주님을 위한 사랑이 없으면 그 믿음을 행사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이 두 개 자체가 분리될래야 분리될 수가 없는 거예요. 다 쓸데없는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은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거예요. 하찮은 사람이라는 거예요. 그 사람이 이 사회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고 엄청난 지위를 누리고,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혼신의 힘을 다해서 자기의 몸을 불사르게 하나님을 섬겼다고 할지라도 아무것도 아닌 라고요. there is nothing.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믿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그런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그 치열한 삶을 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인내에요. 이것을 인내하게 하는 거예요. 그러므로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은 언제나 위로가 있고 평화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히브리서 11장을 신약성경에서 찢어 버리는 거예요. 안일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이 히브리서 11장에 어디 있어요? 환란과 핍박과 기근과 그리고 톱으로 켜고 죽임을 당하고 채찍질 당하고 맞고 유리하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살았던 사람이에요. 안일하게 살았던 사람이 없어요. 그래서 주께서 불러 주셨을 때에 주님께 가기에는 너무나 이 세상이 행복합니다라고 말했던 사람은 히브리서 11장에는 아무도 없다 이거예요. 모두 인내의 사람들이었어요.
중국에서 이번에 우주선 쐈다고 해서 대게 부러워했잖아요. 저도 부럽더러고요. 이게요. 그게 왜 그렇게 어렵냐 하면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우주에서 대기권 바깥에서 이게 지구를 도는데 거의 한 두 시간에 지구를 한 바퀴씩 들어요. 공기가 없는 진공이니까 속도가 어마 어마하다고요. 그런데 그렇게 빠른 속도로 돌던 것이 대기권으로 진입을 합니다. 대기권은 이 산소가 쭉 축척되어 있어서 대기권으로 진입을 하게 되면 이 공기와 부딪히면서 열이 나는데 말이죠. 이게 2300도까지 올라가요. 쉽게 이야기 하면 그 지구로 진입할 때 아주 시뻘겋게 불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어가지고 이 지구도 돌진하더라고요. 대기권으로 뛰어 드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이냐 말이면 하나님을 추구하기는 하는데 하다말다 하는 것은 불타지 않아.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고, 뒤에 나오는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추구하는 사람들은 마치 지구를 두 시간에 바퀴씩 돌다가 대기권으로 진입하는 그 이 우주선처럼 시뻘겋게 타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을 전심으로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그 부딪히는 저항과 그 속에 있는 각양 수많은 죄의 저항들은 어마어마하다는 거예요. 그리고 거기에서 마치 이 믿음의 사람은 살이 찢어지는 것 같은 통증을 경험하는 거예요. 그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이를 악무는 것 같은 인내가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처절하게 피를 먹으면서 고행을 가는 사람들처럼 그들을 그렇게 남겨두지는 않아요. 왜, 하나님이 거기에서 위로를 주시기 때문이에요. 위로를 주셔요.
(찬양)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염려할 게 없어요. 왜냐하면 가장 불행한 일이 일어나거나 가장 엄청난 사건이 일어나면 죽는 것인데, 그 날은 이 치열한 추구속에서 자기를 소진해 오던 고단한 인생의 길과 인생의 길에서 해방되는 순간이에요. 무엇이 무섭겠어요. 무엇이 두렵겠어요. 이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을 살았던 믿음의 증인들이 그렇게 이 세상에서 약한 자 같았으나 사실은 강한 자로 살 수 있었던 이유에요. 오늘도 우리에게 이러한 삶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삶이 필요해요. 난 지금도 저 자신을 포함해서 정말 주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지 않고 널부러져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렇게 슬플 수가 없어요. 저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인생인지를 저 사람이 알았더라면, 저렇게 살지 않았을텐데. 그래서 그 한 푯대를 향해서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그리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거기에 적합하도록 재편하고 그리고 한 목표만을 위해 달려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믿음인데, 그 목표가 온전케 하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거예요. 어떻게 살아야 할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피를 쏟는 기도가 있어요. 그리고 그러한 치열한 몸부림 속에서 주를 추구해 가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니고는 그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어요. 그래서 히브리서 11장에서 시작하기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 하나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치열한 추구점을 가진 사람들이에요. 안일하게 살았던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어요. 치열하게 사는 사람들이에요. 그들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었어요. 우리도 우리의 남은 인생을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한없는 기쁨을 드리며 그러한 인생을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