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사경회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
녹취자: 김경애
시편 23편은 다윗의 저작입니다. 이점에 대해서는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저작 시기가 다윗의 생애 중 어느 지점쯤에 해당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대체로 이 시편 23편의 저작의 시기는 초기나 중기가 아니라 훨씬 늦은 다윗의 말기쯤이었다고 봅니다. 저 역시 이러한 견해에 동의를 하는 바입니다. 시편 23편에는 비록 그 분위기는 목가적인 분위기지만 깊이 반복해서 읽어보면 인생의 시련을 겪지 않은 사람이면 할 수 없는 고백들이 군데군데 묻어나오고 있습니다. 이 시편 23편은 크게 세 토막으로 나눠집니다. 총론적인 고백으로써 1절이 첫 번째 토막이고 2절부터 5절까지가 두 번째 토막인데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하는 1절의 고백이 왜 가능한지 그 근거를 5절까지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 토막은 6절인데 여호와를 자신의 목자로 모신 사람의 현재적 확신과 미래의 삶에 대한 결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라서 제가 얼마나 이 23편을 여러분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 제한된 횟수와 제한된 시간 때문에 충분하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시간을 고려해서 이 23편 속에 담겨있는 진수들을 다섯 시간에 걸쳐서 여러분과 함께 나누어볼까 하는 것입니다.
제일 먼저 시편 23편 1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라고 말합니다. 제일 먼저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이 여호와는 누구입니까? 왜 시인은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하지 않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어떻게 보면 말장난처럼 여겨지지만 이것은 시편 23편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기 짝이 없는 질문입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에 관한 이름은 크게 두 가지로 우리에게 제시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라고 번역된 ‘엘로힘’이라는 단어이고 또 하나는 여호와라고 번역된 ‘야훼’라는 단어입니다. 이외에도 주님이라고 번역된 ‘아도나이’도 자주 등장합니다만 앞의 두 단어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라는 단어와 여호와라는 이 두 단어는 모두 하나님을 가리키는 명사입니다. 그러나 이 두 단어는 매우 중요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으며 어떠한 경우에도 성경의 기록자에 의해서 아무렇게나 임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용된 적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라는 말을 먼저 생각해봅시다. 하나님이라는 이 이름은 히브리어로 ‘엘로힘’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하는 것도 학자들 사이에 심심치 않은 논쟁거리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단어가 ‘덜덜 떨다, 두려워 벌벌 떨다.’ 라는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동사 ‘알라흐’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런 해석을 따르면 이 엘로힘은 두려우신 하나님, 우리를 떨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라는 정도의 뜻이 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설득력 있는 이론을 내놓는 학자들은 이 엘로힘의 뿌리가 ‘울’이라는 히브리 단어에서 왔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히브리어에서 이 울은 도토리나무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게 하나님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도토리나무는 상수리나무는 뿌리를 아주 깊게 내려서 바람이 불고 태풍이 불 때 다른 나무들은 모두 꺾어지고 뿌리가 뽑혀도 결코 웬만해서는 꺾어지지 않는 강인한 나무로 중동사람들에게 알려졌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그래서 이 상수리나무를 상서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렇다면 엘로힘이라는 이 단어는 바로 그렇게 강한 하나님, 어떠한 경우에도 변하지 않으시고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불변의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이 하나님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 모든 피조세계에 대해서 월등히 탁월한 권능을 가지신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이라는 이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방에 있는 민족들에게도 계시된 하나님의 존함이었습니다. 이에 비해서 여호와라는 단어는 야훼라는 독법을 가진 단어인데 이것이 어디서 왔는가에 대해서는 이론이 무성합니다. 그러나 그래도 가장 설득력 있는 학설중의 하나는 ‘있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야 동사의 옛 형태에서 왔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렇게 하고 보면 출애굽기 6장에 나오는 ‘나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라고 한 이 말씀을 생각나게 한 단어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많은 명칭들 중 하나가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으로 말하자면 그 사람의 호적상의 본명을 가리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을 매우 꺼리고 자손들을 위한 교육적인 필수성 때문에 한 번씩 부르고나서는 회개를 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함입니다. 그리고 이 이름은 오직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선택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된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 시인 다윗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말할 때 그는 바로 이 하나님이 자신과 언약관계에 있다는 것, 자신은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하나님 앞에 티끌 같은 존재일 뿐이지만 그러나 자신이 바로 그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 아래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이 저명한 시편 23편을 기술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하나님, 혹은 여호와라는 분은 누구입니까? 오늘날은 기독교 신앙을 인간으로서 자신의 삶의 유용성을 위한 수단으로 선택하려는 경향이 농후하고 믿게 되었을 때에는 그렇게 해서 믿게 되는 경우가 있다고 할지라도 믿은 후에는 관점이 바뀌어야하는데 그 관점을 계속 그대로 가지고 신앙과 하나님에 관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잘못된 풍조가 만연해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된다는 것은 지성의 벼락을 맞는 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개입니다. 여러분들은 신약성경에서 회개하라고 나오는 ‘메타노에오’ 라는 희랍어를 기억할 것입니다. ‘메타’는 ‘후에’, 혹은 ‘다시 한 번’이라는 의미이고 ‘노에오’ 라는 단어는 희랍어에서 ‘생각하다’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 회개가 죄에 대해서 슬퍼하고 의지로 결단해서 그 죄로 돌아가지 않는 것이라고 하더라고 이것은 모두 다 이차적인 것이고 일차적인 것은 지성에 벼락을 맞아서 이제껏 까지 자신의 삶과 그리고 모든 세계와 그리고 자신의 행위의 기준에 대해서 인식하던 것들이 통째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진정한 의미에서 신학적 회심이 아니면 그것은 기독교적인 회심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야기를 하면 길어지겠지만 일단 이쯤해서 접고 본론으로 들어가 봅시다.
그러면 이 시인이 하나님 혹은 여호와가 자신의 인생과 관계가 있다고 치고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로 불러내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 하나님이 누구십니까? 중학교 교실에서 어느 학생이 과학시간에 선생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 우주가 얼마나 넓어요?’ 선생님이 하시는 말이 ‘내가 그것을 알면 여기에 와서 너를 가르치고 있겠느냐? 그러나 비유를 해보자면 너의 집이 어디냐?’ ‘목동 아파트에 삽니다.’ ‘온 세계가 아파트로 뒤덮였다고 치고 너희 집에 화장실이 있는데 빨간 전구가 하나 있는데 거기에 하루살이 8마리가 돌아가고 있단다. 그중의 세 번째 하루살이가 지구이고 너는 그 등때기에 붙어사는 세균 같은 존재다.’ 이 우주는 누가 그 크기를 잴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보편적인 과학자들의 학설을 따르면 우주 이 끝부터 저 끝까지 150억 광년쯤 된다고 보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측정이 잘못되었고 960억 광년이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그 150억 광년 크기의 우주에는 약 2000억 개의 은하가 존재하고 하나의 은하 안에는 보통 약 1000억 개에서 2000억 개의 별이 모인 하나가 은하이며 그 은하들이 2000억 개쯤이 모여서 우주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지구가 속해있는 태양계는 우리 은하계 안에 있으며 우리 은하계는 사방이 날개가 달린 바람개비 같은 형태이고 태양은 우리 은하의 중심부로부터 약 26000㎞떨어진 곳에 26000광년 정도 떨어진 곳에서 존재합니다. 우리 은하의 재원을 말씀드리면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약 20만 광년쯤 되고 옆에서 두께가 약 900광년정도 됩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1000억 개의 별들 중 뭐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약 50년에 별 하나씩 사라지고 새별이 태어난답니다. 그리고 그 2000억 개라는 별의 수는 지구나 수성이나 목성이나 토성 같은 이런 별들은 아예 제외하고 태양처럼 항상 불타오르고 있는 항성만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태양계 안에 256개의 위성들이 있으니 똑같은 비율로 태양계 안에 위성이 존재한다면 3조 2500개쯤 되는 별들이 모여 있는 곳이 이 우리의 은하계입니다. 전체 우주의 2000억분의 1인 우리 은하계의 일입니다. 그러면 항성과 항성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겠습니까? 수 금 지 화 목 토 천 해 명을 500원짜리 거북선 동전 속에 다 넣을 수 있다면 태양에서 가장 가까운 항성이 여기에서 대구쯤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북두철성의 7개별들의 디자인 중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별 사이의 거리는 700만광 년 정도 됩니다. 그러니까 하늘을 쳐다보면 쏟아질 것처럼 별들이 잔뜩 이루고 있는데 그러면 모든 별들이 태양과 같은 별들이 아니라 망원경으로 보면 덩치가 조금 커 보이는 눈깔사탕 같은 별이 있습니다. 그것은 별이 아니라 이렇게 길이가 20만 광년쯤 되는 은하를 보고 있는 것이고 그 눈깔사탕 속에 2000억 개 이상의 별들이 모여 있는 것이 우주입니다. 저는 12시까지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목성은 지구를 1000개를 집어넣을 수 있고 태양은 지구를 1000개를 집어넣은 목성을 다시 1000개를 집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불꽃처럼 타오르면서 그러면서 이 모든 태양계를 사로잡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서 있는 운행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우주의 세계를 바라보면 하나님을 안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마어마한 2000억 개의 별들은 어떻게 하고 있느냐하면 여러분들의 생각에는 별들이 제자리에 있으면서 지구처럼 착하게 돌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렇지 않고 이 모든 2000억 개가 넘는 어마어마한 이 별들이 별들 사이의 거리를 정확하게 유지하면서 정확하게 초속 220㎞내지는 640㎞의 속도로 우주를 이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광대하시도다 그 거룩한 하나님 성에서
온 땅과 하늘 위에 계셔 홀로 영원하신 이름
신앙은 온 땅과 우주에 가득한 하나님의 증거, 그 드넓은 우주 자체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있어라!’ 하는 한마디의 말씀으로 이 모든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 우주를 보면서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는 좁힐 수 없는 무한한 질적인 타자성을 인식하면서 그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그때에 두 가지입니다.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그분을 향한 두려움으로 가득한 떨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이끌리는 감정을 느끼면서 나는 당신 앞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렇게 엎드려지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시작입니다. 신앙의 겨우 시작입니다. 요즘은 하나님을 농담할 때도 들먹입니다. 구약 같았으면 다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충분히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농담시간에도 하나님을 들먹거리고 낄낄거리며 웃는 소재로 사용합니다. 사람들이 우리 아버지라는 말 그것도 또 현대적인 독법으로 읽는다고 우리 아빠라고 그럽니다. 그러나 그 앞에 나오는 하늘에 계신이라는 말에 대해서는 집중하지를 않습니다. ‘너희는 땅에 있고 나 하나님은 하늘에 있느니라.’ 하는 전적인 타자성을 인식하면서 어떤 식으로든지 ‘우리는 하나님과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이고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많이 사용되는 말일수록 그 의미를 거의 모르고 사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거룩하신 하나님입니다. 거룩하신 의미가 우리는 흔히 속된 것의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존재의 완전성과 도덕의 완전성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존재에 있어서 우리와는 비교될 수 없는 아주 탁월하고 존재하는 양상 자체를 그냥 견주어 볼 수 없을 만큼 초월해 있는 비교되지 않는 아주 위대하고 무한하신 분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자각할 때 인간은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무한소의 존재로 영으로 수렴하는 무한소의 존재인 존재에 있어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가치에 있어서도 그런 존재라는 사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 그 하나님 앞에 전적으로 자기를 부복하고자하는 경외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요소가 무엇이냐 하면 도덕적 완전성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사랑이 있고 하나님에게도 사랑이 있는데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나면 우리의 사랑은 사랑이라고 불리는 것조차도 부끄러울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과는 너무 거리가 먼 이기심으로 물들고 불완전한 것들로 가득차서 그래서 질적으로 그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름다우시고 인간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닮는 것만큼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 두 가지를 깨닫게 될 때에 인간은 두 가지 감정을 느끼게 되는데 하나는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주 앞에 없는 것과 같사옵나이다.’ 라는 고백이 나오는 것이고 두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주님은 완전하고 아름다우시며 우리는 불완전하고 추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자비로써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시지 않는 한 우리에게는 그런 자비를 힘입을만한 어떤 공로나 자랑거리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대이고 그래서 인간은 처음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면서 살도록 그렇게 창조된 존재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경외의 사상입니다. 신앙의 핵심은 경외입니다. 단순한 사랑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을 인식하고 그분의 지극히 높고 탁월하심 앞에서 자기가 거의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리고 그분 앞에서 그분의 사랑과 자비를 의존하여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모든 의식의 세계 속에서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절대 의존의 감정 속에서 완전 순종의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리겠지만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뭐냐 하면 무한대의 순종입니다. 무한대의 순종입니다. 그분이 무엇을 명령하시든지 무한대로 그분께 순종하는 것 그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정초를 세우는 것입니다. 복잡한 칼빈주의, 하나님 주권사상, 그것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왜? 이것은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면 우리에게 절대적인 기준이 되실 것이고 이 세상과 우리 인간 모두를 초월하시는 지극히 위대하신분이 된다고 하고 그분이 한분이시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입니다. 그래서 그분밖에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더 설명하고 싶지만 그러면 오늘 저녁에 여호와 그것으로 끝납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그렇게 시인과는 비교될 수 없는 저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위대하고 무한대하신 하나님을 어떻게 소유격을 써서 ‘자기의’, ‘My’ 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뭐라고 그러느냐하면 '나의 목자시니' 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 나의 인생을 간섭하시는 목자 되시는 하나님과 온 땅과 만물위에 지극히 뛰어나신 하나님, 이 상반되는 두 개의 태제를 연결시켜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앙입니다. 그래서 이 신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무한한 축복입니다. 이 신앙 때문에 이성으로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고 이 신앙 때문에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절대자와 관계를 맺고 이 신앙 때문에 물질의 세계에 속한 인간이 영원한 세계에 속한 하나님 아버지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신앙은 손에서 손으로 쥐어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상담할 때 잘 쓰는 기법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될까 말까 방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목사님, 정말 하나님이 계시긴 계신 것입니까?’ ‘왜?’ ‘이런 일이 있고 이런 일이 있는데 안 계신 것 같습니다.’ ‘진짜 없다는 확신이 오냐?’ 그러면 ‘그것은 아니고 어떤 때는 계신 것 같기도 해요. 계십니까? 안계십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나는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해줄 수 있다. 그러나 그 답은 내 답이지 네 답이 아니다. 그보다도 확실한 방법을 가르쳐주마. 나에게 질문했던 것을 그대로 무릎을 꿇고 주님께 질문을 해라. 안 믿어지면 믿어진다고 거짓말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하나님 앞에 진짜 “내가 기도는 하지만 어젯밤에는 믿어졌는데 오늘밤에는 왠지 당신이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있다면 나도 다른 사람처럼 확고하게 믿을 수 있도록 나에게 확신을 주십시오.” 그 기도를 해라.’ ‘단, 거짓으로 기도하면서 달콤하게 기도하는 것보다 진실 되게 기도하면서 거칠게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이 더 기쁘게 응답해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중에 만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가르쳐줄까?’ ‘아 이제 알았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십니다.’ ‘너 나한테 증명할 수 있어?’ ‘목사님도 증명을 못했는데 내가 어떻게 증명을 하겠습니까?’ 이것이 믿음입니다. 신앙입니다. 다 그러니까 이것은 말할 수 없는 특권입니다. 그래서 그 위대하신 하나님과 없는 것 같은 피조물인 이 시인이 관계를 맺으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도 아닙니다. My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드리겠습니다. 신학교 1학년에서 영어문제가 나왔습니다. 쉬운 작문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다. 작문하시오.’ 한 학생이 죽어도 답을 못쓰는 것입니다. 나중에 소리를 지르면서 ‘아! 생각났다!’ 그리고 답을 쓰고 뛰어나갔는데 답안지를 보니까 ‘The Lord is my cowboy.’ 그렇게 썼습니다. 목자라는 이 단어가 문제입니다. 자, 하나님을 목자라고 했으니까 시인 자기는 누구라는 뜻입니까? 23편 전체를 훑어보아도 아무데도 양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무엇을 근거로 양이라고 이야기합니까? 소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고, 말을 기르는 사람도 목자고, 심지어 요새는 개를 키우는 사람도 목자라고 그러는데 왜 여러분들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라고 할 때 자신을 말이나 소나 개라고 생각하지 않고 양이라고 생각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여러분 또 양도 마음속에 그리는 양이 어떤 양입니까? 그냥 깨끗한 순백의 그것도 늙은 양은 말고 어린양이고 배경은 파란 풀밭이고 하늘은 옥색하늘이 펼쳐지고 솜구름이 둥둥 떠 있고 그리고 이쪽 끝에서 순백의 하얀 양이 슬로우비디오로 뛰어다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자기가 그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는 것은 개떡같이 살아도 자기는 그런 양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Korean Context 에서의 양이 긍정적인 짐승입니까? 부정적인 짐승입니까? ‘저사람 양 같아!’ 그것은 무슨 이야기입니까? 순하고 법이 없어도 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Palestinian Context에서는 양이 반드시 긍정적인 동물은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서 예수를 어린양으로 묘사했지만 양의 모든 특성을 예수께 적용시킨 것이 아니라 항거하지 않고 주인에게 복종하여 희생당하는 순종의 모습으로서의 양을 그려낸 것입니다. 제 동생이 중동에서 오래도록 근무를 했는데 지금도 중동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욕이 있답니다. 그게 양 같은 놈이랍니다. 그 양 같은 놈은 무슨 뜻이냐 하면 지저분하고 분수를 모르고 머리가 나쁘고 눈치 없는 사람을 다 싸잡아서 양 같은 놈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그쪽 지방의 양은 순백의 양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양을 치는 목장에 갔다가 죽을 뻔했습니다. 너무 예뻐서 여기가 어디냐고 그랬더니 양치는 목장이라고 그래서 새벽에 들어갔다가 힘들었습니다. 똥 반 풀 반입니다. 화장실이 없습니다. 멀리서 볼 때 아름다울 뿐입니다. 거기서 누워 자고 거기서 먹고 자서 털이고 뭐고 그냥 누렇다 못해 새카맣습니다. 그게 양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은 지금 기가 막힌 유비를 사용합니다. 인생의 말년에 자기를 어떻게 이끄셨나 보았더니 결국은 자기를 왕을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환란과 시련 끝에 주님의 거룩한 사람이 되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지금 문제를 삼고 있는 것은 관심집중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해서 무슨 복을 주셨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인생을 이끌어 오신 그 방식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그 방식이 자기가 목동이었을 때 양을 이끌던 방식과 아주 유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양을 이끈 것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양을 삼아서 이끄셨기 때문에 자기가 양을 인도하는 방법과 하나님이 자기를 인도하는 방법 사이에 놀라운 일치가 있다는 것을 지금 여기에서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이 구절을 해설하기 위해서는 양에 대해서 이해를 하여야하겠습니다. 양은 하나님이 이 세상에 창조하신 동물 중 가장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동물중 하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각자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기능을 부여받고 태어났습니다. 말은 아주 빠른 발로 포식자를 피할 수 있습니다. 또 카멜레온은 주위의 색깔에 따라서 변신함으로써, 어떤 것들은 날개를 가지고 날아가 버림으로써, 또 어떤 것들은 큰 뿔을 가지고 대적하거나 높은 목으로 미리 경계를 하여 자신을 보호하고 종족들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양은 사방을 돌아보십시오. 자기를 보호할 수 있는 그 어떤 장치도 없습니다. 그렇게 양이 빨리 달리지도 못합니다. 그리고 양은 여러분 동물 중에서 지독한 근시입니다. 3, 4m까지는 보지만 그 앞은 직시를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양을 떼로 몰고 다니는 이유가 이게 앞에 있는 친구들을 계속 따라가면서 그 대열 속에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길을 잃어버린 양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나오지만 스스로 돌아온 양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양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저희는 어렸을 때에 가난해서라기보다는 그저 취미삼아서 돼지를 한 마리 길러보았습니다. 이 돼지가 얼마나 재미있느냐하면 돼지가 아닙니다. 이 돼지가 없어졌습니다. 밤새도록 마실을 돌아다니다가 새벽에 자기 집에 들어와서 자는 것입니다. 신기합니다. 양은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한번 대열을 이탈하면 눈이 어둡기 때문에 자기 대열을 스스로 찾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탕자는 스스로 돌아왔지만 잃어버린 양은 목자가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것이 15장의 그림과 같은 비유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충격적인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존재가 하나님 앞에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자 보십시오. 어떤 사람은 동물을 둘로 나눕니다. 사냥 당하는 동물과 사냥하는 동물입니다. 사냥하는 동물이 인간입니다. 사냥 당하는 동물들은 그야말로 동물입니다. 이 세상에는 인간보다 몸집이 큰 동물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그것들은 모두 이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 의해서 포획되고 수효가 조절되고 생태적인 환경들이 조절되면서 인간에 의해서 사육되고 다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그야말로 만물위에 가장 뛰어난 영장입니다. 그런데 이 존재의 양상 중에 재미있는 것은 뭐냐 하면 고등한 동물일수록 하나님을 더 많이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식물은 불완전하고 동물은 완전하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도 베그르송(Henri Bergson) 같은 사람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의 편견입니다. 왜? 보십시다. 딱 서서 공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특별한 경우가 아닌 식물의 경우에는 배고픔이나 굶주림 같은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물의 근원이 마르거나 양분을 누가 빼앗아가지 않는 한 말입니다. 그런데 동물들은 사방을 유리하면서도 배가 고파서 굶어죽거나 잡혀서 먹혀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하나님이 양을 볼 때 아무런 자기 보호 장구가 없습니다. 뿔이 하나 있는데 만두처럼 이렇게 말려서 붙어있는 디자인상의 뿔이지 그것은 무슨 생명의 유지를 위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뿔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렇게 하고많은 이 세상의 동물중 양에다가 우리를 비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 인간은 모든 만물위에 탁월하게 창조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너희는 이 세상 모든 만물보다도 나를 더 의존하며 살게끔 창조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모든 죄의 기원을 지성에서 찾았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휘브리스(hybris)’라는 소위 교만입니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그러는데 하는 것입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은 하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내 판단이 당신 판단보다는 훨씬 더 좋습니다.’ 그것이 자기 사랑과 경합하여 죄를 짓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비교적 깨끗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며 씩씩하게 사는 사람보다는 죄를 짓고 주님 없이 못산다고 울며 매달리는 사람을 더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는 이것을 훔치고 저 나쁜 짓을 하고 누구에게 손해를 끼치고 하는 것이 죄가 아니라 자기를 이 온 우주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고 자신을 이 모든 가치 판단에 있어서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가장 커다란 죄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양은 그렇게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 창조될 때부터 인간 가까이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고 인간에게 돌봄을 받으며 인간을 위해 이바지하고 인간과의 교제 속에서 살도록 창조된 것입니다. 그것이 싫어서 우리를 떠나는 순간 그는 맹수의 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시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라고 고백하면서 하나님은 자기가 양이라는 정체성을 인식하는 것은 이러한 양의 약점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영화에서 카우보이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대규모로 말이나 소를 방목합니다. 그리고 밤에는 카우보이들이 총을 쏘면서 여러 명이 원을 그리면서 말들을 휘몰고 총을 쏘면서 개들이 짖으면 말들이 한곳으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축사에 집어넣고 문을 잠그면서 카우보이들의 하루가 끝납니다. 그러나 양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양은 그렇게 키우는 동물이 아닙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을 여행했던 어느 여행객이 수기를 썼습니다. 천여마리 되는 양을 이끌고 어떤 목동이 길을 건너는 것입니다. 이쪽이 풀밭이고 가운데 길이 나있고 이쪽이 풀밭입니다. 중간쯤 걸쳤는데 목동이 소변이 마려운 것입니다. 화장실이 있을 리 없으니까 그래도 길가니까 저쪽으로 뛰어가서 볼일을 보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차들이 섰습니다. 그래서 경적을 울리고 깜빡이를 깜박거리면서 양들을 비키라고 해도 일체 움직이지도 않고 요동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잠시 후 목동이 와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노래도 아니고 말도 아닌 것처럼 신호를 하니까 그 음성을 듣고 양들이 일제히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항상 목자가 앞에 서서 자기 가는 길을 보면서 따라 오도록 인도해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이나 소를 사육하는 것과 양을 인도하는 사이의 차이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교훈을 깨닫게 되는데 하나님은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경험했겠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실 때 시간이 없어서 급하게 인도하실 때도 있고 시간이 있어서 천천히 인도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도 하나님이 우리의 본성을 떠나서 우리 밖에서 우리를 이끄시지는 않고 그것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청교도 신학자 존 오웬은 아주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없이, 우리 밖에서 일하지 아니하시고 우리 안에서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 성령을 통해서 그렇게 인도하심으로써 우리를 바꾸시고 우리를 인격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녀를 대부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자녀를 인격적으로 교육하라는 충고를 많이 받습니다. 그러나 인격적인 교육이 가능하려면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합니다. 첫째가 뭐냐 하면 자식과 부모 사이에 이야기가 통해야합니다. 이야기가 대화가 성립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대화가 서로 통해야합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자식이 부모에게 혹은 부모가 자식에게 무엇이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청할 수 있는 통로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진정한 인격적인 관계는 부모의 마음이, 자식에게 자식의 마음이 부모에게 스며들어서 서로가 서로를 마음을 공유함으로써 인격적인 관계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 자기를 이렇게 이끌어 오신 모든 인생의 과정을 살펴보니까 이 사람도 완전한 인생만을 산 사람은 아니었지만 매순간마다 하나님이 당신이 원하시는 길로 시인을 이끄실 때에는 항상 하나님의 설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하나님이 오래도록 기다리시면서 우리의 마음이 설득될 때까지 기다리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를 설복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지성이라는 손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사람들은 쉽게 설복이 되는데 그런 지성적인 태도를 안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설복이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적을 의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의 고집대로 갈 때까지 가보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살다가 어마어마한 시련을 당하고 죽을 고비를 만났다는 간증은 감정적으로는 드라마틱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줄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신에게는 그리 자랑스러운 간증이 아닙니다. 가장 커다란 간증은 매순간 하나님의 말씀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온 삶, 그것입니다. 이 시인을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 자신을 설득하시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 제발 내 심정 좀 이해해주십시오.’ 그것이 신앙이 아니라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주님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말씀과 기도를 통해서 터득하며 그분의 심장을 자신이 소유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이유가 내가 살아있지 않았더라면 이루어질 수 없었던 그 일들을 이룸으로써 그분의 마음에 티끌만한 기쁨이라고 드리면서 사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겠다고 하면 내버려두시지 군화발로 조인트를 까서 관절을 부러뜨려서 그렇게 무릎을 꿇게 하지 아니하십니다. 엎드려 경배하라고 하시는데 안하면 그냥 놔두시지 머리채를 끌어당겨 땅바닥에 처박으면서 군화발로 뒤통수를 눌러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존심이 상해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항상 교인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신앙생활을 하기 싫으면 그만두어라. 당신이 하기 싫다면 누구도 그것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내가 엄청난 수사력을 동원해서 당신에게 공포심을 일으켜 여기에 앉혀놨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니다.’ 그것입니다. 우리 개신교는 가톨릭도 마찬가지지만 이 인격적인 결단이라는 것에 있어서 너무 약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자기 자신은 마치 하나님의 거대한 예정의 봇물에 둥실둥실 떠서 떠내려가는 그런 나무토막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가 안 믿은 것도 다 하나님의 예정 때문이고 믿은 것은 자기가 잘나서 믿은 것입니다. 모든 영광은 자기에게 모든 불만은 주님께 돌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인격적으로 다가오셔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은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인도하시는 것을 절실하게 경험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모든 인간들을 획일적으로 대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나는 애들을 교육시키면서 절대 그런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 엄마친구 아들 좀 보아라. 그것이 엄친아입니다. 엄마 친구가 있는데 그러면 애들은 벌써 귀를 막고 다른 데로 갑니다. ‘엄마친구 딸이 있는데 그 애는 과외도 안 시켜주고 공부하라는 말을 안 해도 그렇게 공부를 잘하더라!’ 그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럽니다. 청소년 사역을 하면서 ‘여러분 애들 신앙생활을 잘하게 하십시오. 애들이 은혜를 받으면 공부를 얼마나 잘하는지 아십니까?’ 내가 그럽니다. 제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고 그럽니다. 왜냐하면 진짜 은혜를 받아서 공부를 잘하는 애들도 있는데 은혜 받아도 못하는 애들이 더 많습니다. 원래 안 되는 애들은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마치 요술이 일어나는 것처럼 왜 그럽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그런 유혹을 받습니다. 저 친구는 둘이 등록을 했는데 하나는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장로까지 되었는데 저것은 요새도 그냥 교회를 왜 안 나오시느냐는 전화를 해야 하고 저 친구한테 뿌렸던 수고를 다른 사람에게 뿌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많은 교회가 있는데 하필 여기에 와서 목회 에너지를 고갈시키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중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는 전도사를 한 적이 있습니다. 25년 전의 일입니다. 그 교회가 크지는 않았지만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이 모여 있었습니다. 하루는 남자 선생님 한사람이 끝났는데 갈 생각은 하지 않고 저 구석에서 어느 집사님과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저 선생은 왜 그래?’ 그랬더니 ‘전도사님 왜 그렇겠습니까? 아들이 공부를 안 해서 속이 터져서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 그 집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전도사님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왜?’ ‘아니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하지요?’ 이 친구는 제주도에서 중, 고등학교를 나오고 서울대를 들어갔습니다. 대학원을 들어가고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한 후에는 남들이 군대에 가서 박박 기는데 시험을 쳤더니 합격해서 6개월 만에 중위를 달고 제대를 했습니다. 이 친구가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자기는 태어나서부터 여태까지 운전면허까지 포함해서 한 번에 붙지 않은 시험이 없었답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고3때 다른 애들은 4시간을 자고 어쩌고 그러는데 자기는 체질적으로 8시간을 자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서 8시간을 자면서도 서울대를 들어갔습니다. 지금 서울대 교수입니다. 그런데 나는 애들이 공부를 못하는 것이 이해가 잘되는데 얘는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속으로 ‘그래! 잘났다!’ 그리고 두 달쯤 지났는데 하루는 기운이 하나도 없습니다. 속으로 ‘공부 못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 왜 저렇게 기운이 없나?’ 그러면서 ‘왜 그러나 이 사람아!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아휴 전도사님 저는 이제 살맛이 안 납니다.’ ‘왜? 공부 잘하는 사람이 왜 살맛이 안나?’ 공부를 하도 하니까 체력이 다운되니까 그 당시에는 테니스가 아주 유행이어서 테니스를 배우러 다녔는데 학교 앞에 등록을 하고 테니스를 배우는데 일주일을 동안 계속 서브만을 가르쳐주었다는데 ‘전도사님 애들이 왜 공부를 못하지요?’ ‘못할 수도 있잖아!’ ‘저는 이해가 안가요. 책에 다 나와 있고 모르는 것은 선생님이 가르쳐주는데 어떻게 일부러 못하려고 애를 쓰지 않는 한 못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더니 어떻게 되었느냐고 했더니 일주일 동안 테니스를 배웠는데 어느 날 코치가 라켓을 던지고 걸어오더니 어떻게 그렇게 못 치느냐? 내가 여기서 7년을 가르쳤지만 당신처럼 못하는 사람을 처음 봤다고 그러면서 교본에 다 나오고 내가 가르쳐주는데 왜 못 치느냐고 그러더랍니다. 그때 자기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 인간이 공부를 못할 수도 있겠구나! 꼭 될 것 같은데 안 되는 테니스를 보니까 다른 애들도 그런 심정이겠구나!’ 그런 생각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제가 9년 동안 신학대학에서 교수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열린 교회를 개척했는데 그리고 그만두었지만 말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있을 때 제 별명이 검찰총장이었습니다. 제가 학교 교실에 들어가면 장학생 분포도가 바뀌었습니다. 시험 감독을 철저히 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저는 Cheating을 아주 혐오합니다. 그래서 국가의 최고의 사명은 백성을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정의 최고의 가치는 생식이 아니라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기관이 가정입니다. 이 국가가 정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국가의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우리나라에는 그렇게 Cheating이 유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짓말이 만연해있습니다. 그런데 교수가 되고나서 학생들에게 리포트가 수없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리포트를 보는데 교수에게는 감각이 있어서 어디서 읽은 것인데 그런데 수백 장이 있어서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교수실에 펼쳐놓고 조교하고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찾아내는 것입니다. 찾아내서 방을 붙였습니다. 1번 리포트는 72번 리포트와 유사하고, 3번 리포트는 25번 리포트와 유사하며, A반 1번 리포트는 B반 32번 리포트와 유사한데, 그리고 C2번 리포트는 8번과 9번 리포트와 합한 것과 매우 유사하다. 양자가 와서 해명을 하지 않는다면 이 모든 사람들 모두 낙제처리를 하겠다고 방을 붙였습니다. 학생들이 발칵 뒤집힌 것입니다. 그런 교수는 없었는데 웬 유별난 젊은 사람이 하나 와서 쑤셔놓는다고 그랬는데 그래서 학생들이 왔는데 다 오면 우리 반 애들은 다 압니다. 내가 지도교수니까 이 녀석은 반죽이 좋은 녀석입니다. 벌써 웃으면서 ‘교수님 안녕하세요!’ 반성의 눈빛이 하나도 없습니다. ‘들어와.’ 그러면 페이스에 말리는 것입니다. 그럴 때는 화가 덜 났어도 격한 표정을 지으면서 문을 열고 들어올 때 리포트를 한줌 잡고 던져서 기를 팍 꺾어놓는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던 사람인데 깜짝 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속사포처럼 퍼부어야하는 것입니다. ‘너는 어떻게 된 놈이냐? 너는 신학교에 와서 목사가 되겠다는 놈이 친구 리포트나 베껴 쓰고 말이지 나는 너 같은 놈과 상대하고 싶지 않다. 너를 신학교 가도 좋다고 도장을 찍어준 목사님 전화번호를 대라 내가 목사님과 오늘 직접 통화를 해야겠다. 너의 무엇을 보고 도장을 찍어주었는지 통화를 해야겠다.’ 그러면서 수화기를 드는 것입니다. ‘몇 번이야?’ 그때 사태파악을 하고 이게 심상치 않구나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너는 소용없어 너는 이 과목을 과락 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참에 너는 이 신학교에서 추방이 되어야해. 장로님이나 목사님 전화번호를 대라.’ 조교한테 그 교회 전화번호를 알아보라고 그러면 막 살려달라고 그럽니다. 그 다음 학생이 또 들어옵니다. 그 학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면 옆에서 조교가 있다가 ‘너는 이제 혼났다.’ ‘거기 서있지 말고 여기 앉아라.’ 그러면 여기 소파에 앉습니다. 내가 일하던 것을 멈추고 내려와서 ‘커피, 홍차, 녹차, 사이다, 콜라가 있는데 뭐 마실래?’ 그러면 항상 ‘괜찮습니다.’ 그래요. ‘그리지 말고 한잔 마시자.’ 그러면 ‘그냥 물 주십시오.’ ‘아내가 인쇄소를 다닌다고 그랬지?’ ‘네.’ ‘아직 인쇄소를 다니냐?’ ‘네.’ ‘밤에 늦게 오겠네.’ ‘네.’ ‘힘들지?’ 눈물이 주르륵 흐릅니다. 사람이라도 우리같이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사람을 한 결 같이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공평의 문제가 아니라 기질의 문제입니다. 그 학생은 그렇게 기선을 제압해야지만 조금 반성하는 학생입니다. 그런데 이 학생에게 리포트를 집어던지면서 ‘그따위로 하려면 그만둬!’ 그러면 내려가다가 1층에서 자퇴서를 쓰고 나갈 학생입니다. 그 말을 그대로 믿고 나는 그만두어야 되는 사람이구나 하면서 나갈 것입니다. 그러니 모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획일적인 방법으로 다룬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만히 우리의 인생에 살아온 길을 돌아보면
(찬양)
주님과 같이 내 마음 만지는 분은 없네
오랜 세월 찾아 난 알았네 내게 주밖에 없네
주님을 믿고 착하게 따를 때뿐만 아니라 주님을 거역하고 멀리 떠날 때조차도 우리를 비인격적이고 동물적인 학대로 우리를 다루신적이 없습니다. 그리고는 때리시고 어루만지시고 치시고는 싸매셨습니다. 문을 박차고 들어오시는 것이 아니라 안으로 걸어 잠근 우리의 마음을 피 묻은 손으로 두드리시며 우리를 인격적으로 마음의 문을 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런 가슴 저미는 사랑을 경험한 것입니다. 하도 궁금해서 양이 도대체 얼마나 되냐고 한 15년 전에 호주에 가서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당시에 200불 정도면 산다고 합니다. 그때 돈으로 계산하니까 160,000원 정도였습니다. 이 시인 다윗은 양을 가격으로 계산하지 않고 사랑했습니다. 털을 깎거나 잡을 때는 잡더라도 그 양을 사랑했기 때문에 짐승이 오면 그 짐승과 목숨을 걸고 싸웠고 사자에게 빼앗길 때에는 그것을 빼앗아 올 수 있을 정도로 전투적인 삶을 살면서 양을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인생을 살아보니까 하나님이 자기를 그렇게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깊이깊이 경험한 것입니다.
이 목자라는 말은 우리에게 또 한 가지 가르쳐주는 사실이 있습니다. 이 그림 같은 목자와 양의 관계가 요한복음 10장에도 나오지만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것에 대한 비유가 세 개가 등장하는데 드라크마의 비유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숙명적으로 잃어버린바 된 자를 묘사합니다. 양의 비유는 연약해서 잃어버린바 된 것을 뜻합니다. 탕자의 비유는 자기의 의지를 가지고 잃어버린 자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양의 비유에서는 어떻습니까? 집에 돌아와 양을 헤아려보니 한 마리가 없습니다. 때는 틀림없이 뉘엿뉘엿한 오후 늦은 시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99마리나 돌아왔으니까 99%가 돌아왔는데 그냥 자면 되는데 그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어두운 길을 걸어가다가 발목이 삘 수도 있고 혹은 강도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목숨을 잃어버리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치료비가 양 값보다 더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개의하지 않고 그 양을 찾아 나선 것은 양이 한 마리에 얼마라는 양의 가격이 시킨 것이 아니라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찾아 나섭니다. 그래서 결국은 발견합니다. 그리고 찾아서 옵니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그 다음에 나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어깨가 복수로 나옵니다. 양을 이렇게 맨 것이 아니라 이것은 죽은 짐승을 메는 것이고 사랑의 표시로 양쪽에 무등을 태우고 오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그 다음에 나옵니다. 요즘 말하자면 빌라의 창문이 다 열려있습니다. ‘어이’ 동네사람들이 봅니다. ‘저녁 먹었어?’ ‘아니.’ ‘조금 있다가 내려와.’ ‘잔치를 벌일 거야!’ ‘왜? 무슨 일 있어?’ ‘잃어버렸던 나의 양을 찾았어!’ 설마 잃어버렸던 걔를 바비큐를 해주겠다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그 동네사람들이 모두 내려와서 잔치를 하려면 그 양이 아니라 소를 잡아야지만 잔치를 할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계산을 초월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방식입니다. 어느 날 제가 곰곰이 생각해보았습니다. 청년 하나가 있는데 ‘저는 요새 하나님이 불쌍해 죽겠습니다.’ ‘왜 인마!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냐!’ ‘아니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왜 그래?’ ‘왜 아들의 피를 주셔서 간신히 구원해놓으셨는데 구원받은 우리는 주님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계속 마음 아프게 해드리고 나쁜 일만해서 오히려 우리 같은 사람이 구원받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이 더 깨끗해졌을 텐데’ 그리고 가만히 보니까 설득이 되었습니다. 집에 가서 고민에 잠겼습니다. 도대체 이것은 무엇인가? 그런데 깊이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우리는 자식을 낳을 때 계산으로 낳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딸을 하나 낳으면 비행기를 탄다니까 둘을 낳으면 두 번 타고, 셋을 낳으면 세 번 타고, 넷을 낳으면 네 번 타고, 그렇게 계산하고 낳습니까?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비록 하나님을 믿고 잘못하면서 살 때가 있어도 없는 것보다는 우리를 이 세상에 태어나고 구원받게 하셔서 당신과 관계 안에서 살아가게 하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의 구원 그 자체가 하나님에게 어떤 효용 가치를 위한 구원이라기보다는 구원받은 우리가 당연히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고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을 따라 살아야한다는 소명을 내포한다는 것은 틀림없지만 그 소명을 다 성취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하나님이 살려두십니다. 그리고 그 구원을 취소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소명은 소명대로 있지만 사실은 소명 하나로만은 우리 구원을 설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소명은 구원의 결과적인 것이고 오히려 더 큰 우리의 구원의 원인은 하나님 안에 있는 당신 자신의 박애적인 사랑이 시킨 것입니다. 사랑입니다.
형이상학적으로 이 사랑이라는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자하는 성향입니다. 없는 관계는 맺고, 맺은 관계는 유지하고, 유지되고 있는 관계는 돈독히 하여 일체를 이루려고 하는 감정이 사랑입니다. 더군다나 박애적인 사랑은 사랑을 받는 타자의 가치나 장점 때문에 불러일으켜지는 사랑이 아니라 이 자신 안에 나오는 그 사랑 때문에 사랑이 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결혼하지 전까지 사랑은 되니까 하는 사랑이고 결혼한 다음에는 해야 하니까 하는 사랑인 경우도 많이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 그렇다고 그러면 결혼한 자매들이 너무 상심합니다. 그런 것을 포함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사랑은 우리의 장점 때문에 사랑한 것이 아니라 당신 속에서 본성 속에서 끊임없이 피조물과 관계를 맺고 그 관계를 돈독히 하고 그리하여 사랑으로 일체의 관계를 이루려고 하는 그 하나님 자신의 자비하신 성향에서 우러나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중독되듯이 자기사랑을 포기하는 경험이 일어납니다. 그러면서 예전에 자기를 움직였던 사랑이 아닌 또 다른 사랑이 이 속에서 솟아나는데 이것을 신학에서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아주 재미있으니까 조금만 더 설명을 하겠습니다. 한 사람이 자기 혼자 힘으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로 예수를 안 믿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결국은 자기 혼자는 도저히 살 수 없는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래서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때에 복음을 듣고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하나님께로 갑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가는 길이 아닙니다. 나 살려고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런 사랑을 에로스의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신이 살고자가는 길입니다. 다만 그 방식이 예전에는 자기를 주인삼은 삶이었는데 말씀을 듣고 이제는 나를 주인을 삼아서는 결코 행복해질 수 없는 것을 생각하고 자기중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갔는데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아가페의 하나님입니다. 그러니까 그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아가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좋은 점이나 장점 때문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 사랑으로 충만하시기 때문에 그렇게 우리를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 아가페의 사랑이 이 사람의 지성에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지성이 벼락을 맞는 그 순간 사랑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지성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열린 교회를 목회하면서 꿈꾸고 매일 그리워하는바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뜨거운 사랑에 빠진 지성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래서 우리교회 교인들에게 항상 이야기합니다. ‘Studeo ergo Sum’, ‘공부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래서 처음 들어오는 사람부터 빡세게 공부를 시킵니다. 기독교강요 2400페이지를 거의 암독하지 않으면 결코 투표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공부합니다. 이 지성과 사랑은 함께 가는 것입니다. 이 아가페의 사랑을 만나면서 자기가 자기의 모든 불행이 나를 주인으로 삼으며 나를 가치의 기준으로 삼으며 산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며 사는 삶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거기서 회개를 하는 것입니다. 그 회개 속에서 중대한 변화가 생기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신뢰를 포기하는 것입니다. 나를 믿는 것입니다. 나를 신뢰했는데 나를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를 포기하고 나면 엄마를 믿겠습니까? 아빠를 믿겠습니까? 그분들은 나만 못합니다. 나에 대해서 내가 더 잘 압니다. 내가 나를 못 믿겠다고 버렸는데 그래서 엄마를 믿고, 아빠를 믿고, 사장님을 믿고, 무슨 왕을 믿는다면 정신병자입니다. 내가 양보할 수 없는 마지막 보위입니다. 그것을 버렸습니다. 그것을 의지할 수 있는 분은 내가 알게 된 그 하나님 한분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아가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눈부신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껏 살았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것입니다. 한 번도 하나님이 우리가 지은 죄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주지 않았어도 자신이 죄악의 덩어리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찬양)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Was blind but now I see.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에 내가 하나님을 찾아간 그 사랑도 아니고 하나님 안에 발견한 그 사랑도 아닌 또 다른 사랑이 내안에 생겨나게 되는데 이것을 까리따스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사랑처럼 완전하지는 않은데 동질의 사랑입니다. 그런데 그 사랑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런 사랑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는 방법이 무엇이냐 하면 아까 찬양한 것처럼 gratia, grace,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란 무엇이냐 하면 인간으로 하여금 마땅히 행할 의무를 이행할 수 있도록 하시는 하나님 사랑의 감화입니다. 이것이 grace,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런 은혜를 확 받을 때 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지순애(至純愛)라고 합니다. 순결한 사랑 이것이 하나님과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하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이 다시 나눌 필요가 없이 그 안에서 완전한 통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까리따스의 사랑은 아가페와 에로스의 사랑의 지평의 융합이라고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시인이 ‘하나님은 나의 목자이십니다.’ 라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그러한 놀라운 아가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21살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방황하는 젊은이였고 죽음에 대해서 끊임없이 유혹을 받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등학교 때 공부를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매일 아침 일어나면 내가 사람이라는 사실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가난해지는 것은 두렵지 않고 고생하는 것은 무섭지 않은데 오늘도 내가 사람으로 하루를 살아야한다는 것이 너무 힘겹고 두려워서 들에 핀 이름 모를 풀, 발아래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부러워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나의 구원은 독서였습니다. 공부를 안 하고 문학책등을 읽는 것입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니체, 버트란트 러셀, 카프카 그런 사람들의 책들을 막 읽으면서 읽을 때는 막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를 것 같은 때 책장을 덮고 현실을 보면 내게 별로 도움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니체의 생애를 보니까 그 사람도 별로 행복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면서 방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마다 공부를 하는데 저 넓은 들판이 우리 집 뒤에 펼쳐져있었는데 밤새워 공부하고 새벽에 잠깐 나와서 심호흡을 하면 종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뎅그렁, 뎅그렁 아무도 전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뎅그렁, 뎅그렁…….
(찬양)
깊이 스며와 닿는 구원의 저 종소리
그러면 마음속에서 기도가 솟아나는 것입니다. ‘절대자가 계시다면 나를 굽어 살펴주십시오.’ 나는 인간으로 태어나 원하지 않는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사람인 나에게 인간의 길이 무엇이라고 말해주는 이들이 없습니다. 절대자여 저는 누구입니까? 어디로부터 왔습니까? 그리고 어느 해 가을에 혼자서 이 교회의 1/3도 채 안 되는 조그만 예배당을 찾아갔습니다. 어느 수요일 저녁이었고 누덕누덕 기운 방석에 20여명의 교인들이 앉아서 톱밥난로를 때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삐거덕 거리는 오르간 풍금소리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들어간 그 순간 아무도 나를 안내해주는 사람은 없었지만 교회의 구석에 가서 앉아서 찬송소리를 듣는 순간 생전 처음으로 평화라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찬양)
때리시고 어루만져 위로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오오! 어서
그날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이 저는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나의 모든 고통은 그 좋으신 목자이신 그분을 떠나 멀리 방황하고 살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주님을 멀리 떠나 주님 없이 사는 날 동안 당했던 나의 고통과 괴로움은 나를 향해 그분의 선하심이 변함이 없기 때문에 내가 겪었던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어서 주님 없이 사는 날 동안에 내가 받은 고통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비난받으실 이유가 추호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주님을 알기 전 너무 오래전부터 내가 주님께 돌아와 내가 예쁘게 회개하고 당신을 믿겠노라고 다짐하기 아주 오래전부터 사실은 그분이 나를 먼저 아셨고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그날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필설로 다해도 기록할 수 없고 그렇게 위대하고 높으신 분이 우리 같은 인간과는 관계가 없으신 분이시건만 그분은 만물위에 초월하고 뛰어나면서도 이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관계를 맺으시고 이 더러운 죄인의 괴수와 같은 사람들에게 아버지라고 불리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사랑으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셔서 이제까지 이끄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부럽다고 말하지만 저는 누군가가 저에게 다윗과 같은 생애를 살아보겠냐고 말한다면 30초도 망설이지 않고 ‘아니요.’ 라고 말 할 것입니다. 부러운 것이 한 가지 있기는 있습니다. 그것은 구약의 최대의 철학자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한 신자였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였습니다. 궁창에까지 이른 하나님의 진리와 그의 신실하심을 목도했던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이 온 우주 안에 깃들인 하나님의 위대한 아름다움과 영광을 보는 지식과 안목에 있어서는 그가 매우 부럽고 그리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습니다. 그러나 땅에서의 그 사람의 삶을 생각해보면 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위대한 믿음의 영웅,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갈채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고 어머니의 이야기는 별로 나오지 않고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많은 형들에 비해 아버지께 사랑을 받지 못했던 편애에 멍든 상처받은 자식이었습니다. 그는 형들을 진심으로 사랑했지만 형들은 그들 끼워주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자기를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했지만 결혼한 그 여자는 하나님과 자기 사이에 있는 영적인 관계의 비밀과 아름다운 세계에 대하여 무지하고 그리고 천박한 이해를 가진 여자였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단 한번 눈길에 사랑에 빠진 여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하게도 하나님이 매우 미워하시는 불륜의 관계였습니다. 자식들을 낳았지만 그들은 아버지의 신앙심을 티끌만큼도 물려받지 않았습니다. 보는 앞에서 자식들이 자식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어느 날 어느 사내 녀석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딸을 겁탈하였는데 겁탈당한 딸은 자기의 친딸이었고 또 그 딸을 겁탈한 강간범도 자기의 친아들이었습니다. 자기의 왕위를 노리고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이 있었는데 그 괴수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새끼였습니다. 아마 이런 일들 중 한 가지만 우리의 생애에 일어났어도 우리는 그 비참함과 불행에 바닥까지 내려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인은 오늘 I shall not want.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불행한 삶을 산 사람이 I shall not want. 나에게는 모자라는 것이 없습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겠습니까? 상황이 그를 둘러싼 환경이 그런 고백을 하게 만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경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사랑, 사연 많은 인생사에서 만나는 고통스럽고 가슴을 에는 것 같은 모든 시련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인생의 어느 계곡에서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도 자기를 버리지 아니하시는 목자 되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그는 ‘나는 부족한 것이 없사옵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 이외에 다른데서 기쁨을 누리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영혼이 병든 증거이고 우리의 참된 만족은 오직 우리 하나님 한분 그분에게로 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목자는 계십니까? 지금도 여러분 가슴에 손을 얹고 ‘그렇습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이시고 나는 당신을 따르는 한 마리의 어린 양입니다. 나의 사랑은 당신께 있고 어린양 같은 나의 마음은 당신을 의존합니다. 나의 인생에 모든 살고 죽는 것과 기쁨과 슬픔이 당신을 의존합니다. 어느 청교도가 말했던 것처럼 당신 없이 천국의 정원을 걷기보다는 당신과 함께 지옥의 불길 가운데를 지나겠나이다.’ 라는 임마누엘의 고백이 있습니까? 그럴듯한 도덕적 생활, 대를 물려가는 든든한 뼈대 있는 교회생활,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 확고히 정해진 그리스도인의 자세, 너무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생명은 아닙니다. 온 땅과 하늘위에 가득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하고, 그 아름다움 때문에 감격해하고, 나 같은 사람을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하셔서 나를 사랑하사 자녀 삼으신 그 은혜에 감격하면서 사는 것, 내가 나의 의지를 가지고 아무데도 갈 수 있고 무슨 일이든지 다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 전혀 기쁘지 않기 때문에 주의 사랑의 줄에 매여 주님은 나를 자녀로 부르셨으나 나는 스스로 주님의 집에 가장 천한 노예로 자처하며 주님의 집에서 내가 이 세상에 살아서 주님을 섬기는 것이 티끌만큼이라도 주님의 창조하신 이 세계에 아름다움이 되기를 갈망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지성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고 그분께 순종하며 그분을 의지하면서 한 마리의 양처럼 살아가는 삶, 비록 역사를 움직일 위대한 위인이 되는 것이 우리의 비전은 못될지라도 그렇게 이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의 한 모퉁이에서 그렇게 주님을 즐거워하고 좋아하며 사랑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지성과 의지가 이 세상에서 구현되기를 하나님처럼 그렇게 꿈꾸고 사랑하며 먹고 마시고 숨 쉬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 하나님께는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주님을 목자로 모시고 살아가는 주님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