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레교회 신년사경회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시 23:2-3)
녹취자: 김경애
하나님은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한 다음에 2절에서는 공급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3절에서는 2절과는 좀 다른 이유를 가지고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시라는 사실을 아버지 앞에 고백을 합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의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라고 말입니다. 소생시킨다는 이 단어는 히브리말로 ‘하야’인데 있다. 살아있다. 혹은 살게 하다. 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당신께서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이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나의 영혼을 살아있게 하신다. 라고 했으니까 언젠가는 이 시인의 영혼도 죽은 자와 같았던 때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의미심장한 구절을 본격적으로 해설하기 전에 제일 먼저 시인이 하나님이 자신의 인생에 목자시라는 사실을 스스로 고백하며 그분 앞에 엎드려지게 된 이유가 단지 먹을 것을 공급하시고 입을 것을 채워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살리신 경험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존재는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하나님이 맨 처음 만드실 때에 흙으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아파르’ 라는 티끌로 사람을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티끌은 무가치한 것의 상징이고 허무를 가리키는 대표적인 사물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시편 기자를 비롯한 많은 저자들의 기록 속에 ‘제가 티끌입니다. 티끌같이 흩어지나이다.’ 라는 허무에 대한 고백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 티끌로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만드시고 거기에 후 하고 생기를 부어주심으로써 산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렇게 육체와 영혼이 만나 한 사람이라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육체도 영혼도 모두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이기 때문에 모두 중요하지 육체는 하찮거나 혹은 영혼이 하찮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육체를 주신 용도와 영혼을 주신 용도는 각각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둘을 합하여 한 몸을 만드시면서 이 육체는 영혼의 지도를 받게끔 만드셨습니다. 이 영혼은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이 영혼은 이 물질적인 사물인 육체와는 다른 방식으로 존재합니다. 장소는 한정되어 있으나 그러나 사물처럼 두께와 무게, 부피 이런 크기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아닌 양식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은 언제나 우리를 떠나지 않고 죽음의 순간이 될 때까지 우리의 육체와 함께 있으며 이 영혼으로서 이 육체를 지도하여 사람다운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다. 이 영혼은 하나님이 인간에게만 주신 특성입니다. 바로 우리들이 그렇게 자주 이야기하는 하나님을 닮은 형상이 이 영혼 안에 있고 이로써 인간은 물질인 육체와 완전하고 순결하신 영이신 하나님 사이에 교통을 이룰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 닮은 형상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혼이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있어서 우위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소위 누리는 행복이라는 것도 토마스 아퀴나스가 롬바르디스 라는 사람의 명제집을 해설한 책에 의하면 우리의 참된 행복은 그 장소가 지성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으로서 하나님이 부여하신 참된 복을 누리고 사는 것도 사실은 이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영혼에 대해서 많이 공부하여야하고 그리고 이 영혼이 우리의 육체와 우리의 마음과 그리고 하나님과 이 세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부지런히 탐구하여 하나님과 늘 교통하며 살도록 지어진 영혼의 목적에 부합하도록 우리의 영혼을 사용하며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자, 그렇게 보면 이 시인은 맨 처음에는 육체를 위하여 먹고 쉬고 그리고 연약함을 따라서 인도해주시는 모든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시는 목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제 3절에서는 자기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자신의 영혼을 소생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그 하나님을 나의 목자로 모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베푸시는 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영적인 복과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일반섭리의 복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여서 우리에게 이익을 주시는 것을 가리킵니다. ‘아들이 있었는데 공부를 잘해서 훌륭한 대학을 갔다. 딸이 있는데 얼굴도 못생겼기고 공부도 못했는데 진짜 성격도 좋고 신앙도 좋고 돈도 많은 그리고 얼굴도 잘생긴 형제에게 갔다더라!’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하나의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회사를 정년퇴직할 때가 되었는데 기가 막히게 더 좋은 회사에서 자기를 더 높은 자리로 오라고 그래서 한 십년쯤 더 다니게 되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몸이 아파서 병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놀랍게 교회에 와서 기도만 했는데 나았다더라.’ 이런 것들은 전부 다 일반섭리의 복입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의 영혼과 무관하지는 않지만 직접적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직접 그의 영혼에 내리시는 복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물의 질서를 사용하시기도 하지만 그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문학적인 묘사로 말하자면 하나님이 직접 당신의 손을 그의 영혼위에 어루만지시는 복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은 영적인 복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죽은 자와 방불했던 시인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소생의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일반섭리의 복이 아니라 영적인 복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제가 총신 신대원에 개강수련회를 3일 동안 했습니다.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조금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돈을 주시지만 진짜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그랬더니 기숙사에서 학생들이 모여서 하는 말이 ‘얘야 하나님은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으셔.’ 그런데 그것은 틀림없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모든 물질적인 것과 이 세상에 있는 평판, 우리의 정신적인 것, 문화적인 것,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데 너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결정적으로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놓지는 않습니다. 19평에 살던 사람이 65평 아파트로 이사를 가면 완전히 새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울리는 동네의 주민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24평 임대아파트에 사는 아이들은 그 아파트단지의 놀이터도 못 들어간답니다. 아이디가 있어야 들어간답니다. 바뀌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의 삶의 수준이 바뀌는 것이지 삶의 도덕적인 방향 자체가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까 지게지고 다니다가 죄를 짓던 사람이 이번에는 외제승용차를 타고 다니면서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인생이 바뀐 것입니까? 식인종이 사는 집이 문화주택이라고 하는데 속에 사는 사람들이 식인종인데 어떻게 문화주택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오두막에라도 성자들이 살면 이것은 문화주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의 모든 욕심을 버리고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어루만지시는 이 복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베푸실 수 있는 정말 커다란 복이고 선택된 사람들만 이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역으로 뒤집으면 시인이 자기의 영혼이 소생하여 다시 말하면 살게 되어 이렇게 충만한 기쁨을 하나님 앞에 누리게 되었다고 하면 언젠가는 자신의 영혼도 거의 죽은 자와 방불하던 때가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독교 생활뿐만 아니라 우리의 일반적인 삶에 있어서도 거의 잃어버린 단어들, 잊혀져가는 단어들이 있습니다. 희열, 환희, 기쁨, 감격, 이런 단어들이 거의 잊혀져가는 단어들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시인은 무엇인가 자신의 신앙의 체험 속에서 죽은 자와 방불했던 자신의 영혼이 다시 소생케 됨으로써 그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경험하면서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이실 수밖에 없다고 인격적으로 승복하며 고백을 하고 있는 것인데 도대체 그렇게 시인의 영혼이 깊은 어둠속에 혹은 죽은 것과 같은 상태 속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런 것을 가리켜서 우리들이 영적 침체라고 부릅니다. 영적 침체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모두 이차적인 원인이고 궁극적으로 더듬어 들어가 보면 마지막에 커다랗게 두 개가 제시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무지와 죄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무지는 사실은 청교도신학자들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 무지를 Almost evil 이라고 표현한 사람이 있습니다. 거의 악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데 더 인심이 박한 신학자는 The very evil. 이라고 그랬습니다. 바로 그것이 악이다. 왜? 알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않으려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무지와 죄악은 항상 짝을 이루면서 같이 갑니다. 그래서 참된 지혜와 성결한 삶이 짝을 이루듯이 무지와 죄악은 함께 짝을 이루면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펼치면 많은 시간이 갈 것 같아서 그냥 다 생략하고 죄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고합니다. 이 시인은 사실은 사무엘하 11장까지 세상에 없는 순결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11장 이후에서부터 이제 다윗의 생애에 커다란 범죄가 등장하게 됩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다윗이 저지른 커다란 범죄는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하나님이 금하신 인구조사를 한 사건이었고 또 하나는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여 간음의 죄를 지은 사건이었습니다. 그 첫 번째 하나님이 인구조사를 금하신 사건은 나라의 통치자가 인구를 조사하는 것은 행정적으로나 정치적으로는 문제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신 이유는 동기의 문제였습니다. 그 동기는 정치적이고 행적적인 동기가 아니라 신앙적인 동기였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적인 동기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신앙과 관련된 동기입니다. 당시에는 인구조사를 해서 가용할 수 있는 군인의 수와 말의 수, 병마의 수를 헤아리면서 국가의 국방력을 과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언약백성으로서 다윗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당신만을 전심으로 의지하며 사는 백성들이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그런 인구조사 하는 것을 싫어했는데 사단의 추동을 받은 다윗이 교만한 마음으로 인구조사를 하게 되고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크게 죄를 짓고 수만 명의 백성들이 온역으로 죽어가는 끔찍한 징계를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더 심각한 하나의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이었습니다. 사실 이 부분도 인간적으로 놓고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이 다윗에게는 있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모로부터 특별한 사랑을 받지 못했고 형들로부터도 따돌림을 당했고 아내로부터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후에 일어난 일이지만 자식들도 자신의 아버지인 자기를 만족시켜주지 못했고 심지어는 자기가 낳은 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런 모든 것을 전후를 놓고 보면 이 다윗은 인간적으로 마음을 둘 데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성경은 침묵하고 있지만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보면서 단순한 욕정 하나만으로 죄를 범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하룻밤을 자고 차버렸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한번 사랑하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정말 싫어하시는 불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잔인하리만치 고통스러운 연단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후에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이 사람은 오히려 놀라운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벤저민 휫필드라는 학자는 이 시편 51편을 해설하는 가운데 다윗은 자신의 의지로 끔찍한 죄를 저질렀으나 하나님은 그의 죄를 통하여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깨달을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의 세계를 경험하도록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 다윗이 하나님에 대해서 깊은 지식들을 우리들에게 전달해주게 되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 하나는 이 죄로 말미암아서 다윗은 이전의 거의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가게 됩니다. 제일 먼저 경험한 것은 구원의 기쁨을 하나님이 거두어 가실 것 같은 두려움이었습니다. 죄를 지은 영적인 침체 속에서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기쁨과 희열, 환희, 이런 하나님을 믿은 참된 기쁨들이 송두리째 사라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던 그의 아름다운 목소리는 녹이 슬었고 그의 손가락 끝에서 울려 퍼지던 아름다운 활은 현이 끊어져 소리를 멈추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구속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으로 어린 아이처럼 춤추던 다윗의 몸은 정욕을 따라 흐느적거리는 고깃덩어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속에 있었던 포도주와 같은 기쁨은 사라졌습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성령을 거두실 것 같은 커다란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는 전임자인 사울이 하나님이 주신 성령을 거두실 때 어떻게 비참하게 파멸되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그 두려움은 다윗에게 묘사하는 것 이상으로 커다란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여호와의 신이 거두어지고 하나님이 부리시는 악신이 그에게 임하여 정신병자처럼 파멸의 길을 달려가던 사울을 기억하며 두려움으로 떨었습니다. 이러한 죄들이 이 시인을 영혼의 깊은 침체로 데려갔던 것입니다.
죄에는 크기는 있지만 본질은 똑같고 크기가 다르면 미치는 효과의 크기는 같지 않지만 효과의 방향이나 본질도 똑같은 것입니다. 방금 저녁을 잡수시고 오셨을 텐데 은혜롭지 않은 예화라 여러분들이 양해를 하시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집사람은 이 부분을 설교할 때마다 제발 하지 말라고 저 뒤에서 손을 흔드는데 한번 들어보십시오. 우리교회의 뒷마당에는 커다란 똥통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똥을 교인이 하도 많이 이용을 해서 맨 처음에 와서는 1년엔 한 번씩 펐는데 요새는 두 달에 한 번씩 퍼야합니다. 그러면 새벽에 차가 와서 쫙 빨대로 빨아들여서 커다란 탱크로리에 담으면 맨 뒤편의 유리창이 있어서 보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누런 색깔이 출렁거리면서 도로 위를 달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똥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잘 갈아서 체에 여러 번 걸렀더니 아주 노란 액체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예쁜 스프레이에 담았습니다. 허공에 뿌렸습니다. 노란 수증기가 쫙 퍼져나갑니다. 그 수증기는 아름답기조차 합니다. 그러나 저쪽의 건더기를 잔뜩 집어넣고 출렁거리며 달리는 것은 쳐다보기도 싫게 더럽습니다. 그러나 두 개의 본질은 동일합니다.
죄의 본질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을 향한 적의입니다. Enmity입니다. 적의입니다. 이 적의는 둘로 구성되는데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대적입니다. 반감은 지성과 정서에 관한 것이고 대적은 의지에 관계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의 힘 전체를 동원해서 하나님과 맞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 오웬 목사님은 이런 직설적인 표현을 했습니다. 신자가 죄를 버리는 순간 하나님을 버리는 것이다. 오늘날은 이 우리의 죄를 아주 친근하게 생각하고 옹호하려고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의 교회든지 회개하라는 설교가 멈추면서 교회는 생명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삶을 올바르게 하고 이 세상을 바꾸려고 한다고 하더라고 기독교에서 이 세상을 바꾸는 방법은 사람이 변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하지 않고 변하는 세상은 껍질일 뿐입니다. 우리는 그런 변화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이야기를 더 끌어가자면 한이 없지만 한마디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결국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다른 방식에 의해서도 정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진정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에 합치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한 사람 한 사람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속하려고 하는 그런 인간개조가 영혼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변화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죄가 이제 역사를 합니다. 활동을 합니다. 생물체처럼 살아서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본성과 아주 잘 어울려서 파악이 잘 안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래서 세 가지의 방식을 가지고 작용을 하는데 첫째가 무엇이냐 하면 맹렬함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을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열렬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뭐냐 하면 죄안에는 미친 기운이 있습니다. 광기입니다. 광기라는 것은 뭐냐 하면 Madness 그야말로 이성을 배제한 즉 이성적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미친 기운이 작용을 해서 역사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번째가 무엇이냐 하면 담대해지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로 말미암아 돌아올 결과나 끔찍한 대가에 대해서 아주 하찮게 여기는 담대한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국은 인간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죄는 죄인은 하나님과 화해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죄를 버리면 됩니다. 그러나 죄 자체는 하나님과 화해할 가능성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것을 파멸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죄가 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불쾌함을 보이시고 때로는 징벌을 보이심으로써 우리가 사랑하고 붙들고 있는 이 죄의 심각성을 하나님이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씨에스 루에스라는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죄는 미워하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여야한다.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매일 그렇게 한다. 이해되십니까? 자신에 대해서는 매일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으면서도 그렇기 때문에 나 같은 인간은 사라져야 된다고 잠시는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게 영원한 형벌을 집행할 정도로 담대한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를 고쳐서 살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그렇게 안 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하다가도 하나만 마음에 안 들면 단칼에 날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을 하면 여러분들은 이렇게 반응하실 것입니다. 아니 목사님, 우리가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습니까? 다윗은 그렇게 끔찍한 죄를 저질렀으나 우리는 그런 간음을 한 적도 없고 더욱이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서 남의 남편을 살해한 적은 더더욱 없습니다. 그리고 인구조사를 말씀하시는데 우리가 뭐 인구조사를 할 그런 권력이나 있습니까? 우리 식구들은 헤아려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죄악입니까?
어느 계곡에서 군인들이 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휘관으로 보이는 사람이 병사 세 사람에게 자루를 하나씩 주면서 지시를 했습니다. ‘각각 50㎏씩 돌멩이를 담아온다. 실시!’ 병사들이 흩어져서 한사람은 미련하게 50㎏짜리를 찾아다녔습니다. 한 개를 집어넣어서 메고 왔습니다. 두 번째 사람은 30㎏짜리 하나 20㎏짜리 하나 그렇게 두 개를 담아왔습니다. 세 번째 사람은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아니 이것을 가지고 오라고 그랬지만 분명이 이것을 지고 어디론가 이동을 해야 하는데 무엇 하러 그렇게 큰 돌멩이를 가져갈까 하면서 자잘한 공깃돌 50g짜리 천개를 모아서 50㎏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는 각자 지휘관 앞에 갖다놓으니까 저울에 달아보더니 ‘잘했다.’ 그 다음 명령은 이 군인들을 황당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모두 이 돌멩이를 제자리에 갖다 둔다. 실시!’ 한 사람은 정확하게 자기가 가져온 곳을 아니까 가져다 놓았습니다. 두 개를 가져온 사람은 좀 헷갈리는 것 같다가도 가보니까 돌멩이를 빼낸 자리가 있어서 갖다놓았습니다. 이 사람은 천개의 공깃돌을 어디서 주웠는지 생각도 안 나는 것입니다. 대학 실험실에서 이런 비커에 차가운 물을 떠놓고 일초에 0.02°만 온도가 올라가게 해놓고 그 접시위에 물을 붓고 거기에 개구리 한 마리 큰 것을 올려놓았습니다. 당연히 개구리가 마음만 먹으면 한 번에 펄쩍 뛰어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정확하게 1시간 20분후에 푹 삶아진 채로 발견되었습니다. 만약에 미지근 물에 개구리를 집어넣으면 개구리가 쑥 들어가면서 시원하다고 그러겠습니까? 튀어나옵니다. 이 인간이 미쳤나 그러면서 튀어나옵니다. 똑같은 것입니다. 급격하고 커다란 죄를 지으면 한순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뜨려지고 수렁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죄가 쌓이고 영혼의 무감각이 더해져가면서 어느 한순간에 기도를 해도 주님과의 교통이 없고 말씀을 들어도 말씀의 미각이 없는 그것입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진리의 말씀에 대한 사모함이 생기지 않습니다.
여러분 가끔 보면 자매들이 입맛이 없다고 그러고 형제들이 요새 봄이 되어서 밥맛이 없다고 그럽니다. 그것은 다 배불러서 하는 소리입니다. 가서 노동을 시켜보십시오. 아니면 그냥 15㎞를 걷다 오라고 그래보십시오. 15㎞를 걸으려면 세 시간 정도를 부지런히 걸어야합니다. 돌아오면 밥맛이 없는 게 어디 있습니까? 막 먹습니다. 육체를 움직이면 식욕이 당깁니다. 그래서 잠언 16장 18절에 보면 노동하는 자는 식욕을 인하여 애를 쓰나니 이는 저의 입이 그것을 재촉함이라. 그랬습니다. 식욕이 당기는 것입니다. 똑같습니다. 영혼의 양식은 진리입니다. 진리를 막 사모해야 하는데 사람들이 싫어합니다. 그리고 예배가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그렇게 행복한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는 동안에는 그렇게 우울할 수 없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영혼이 진리를 당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가 밥이 안 먹힐 때에는 노동을 시키라고 그러는데 굶기고 노동을 시키면 되는데 이것은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똑같습니다. 영혼이 움직여야합니다. 그래야지 진리가 막 당기는 것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책속에서 인간의 감정이라는 것은 영혼의 움직임이라고 그랬습니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것이 열정입니다. 영혼이 막 움직이면 누구도 영혼이 진리를 향해 막 움직이게 되면 진리에 대한 욕구들이 막 생겨서 하나님의 말씀을 막 먹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가장 종교적인 삶을 살면서도 영혼은 거의 안 움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배에 나옵니다. 예배에 나오는데 아무 기대 없이 ‘집사님 오늘 교회에 왜 안 나오셨어요?’ 이런 전화를 받기 싫어서 할 수 없이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와서 예배당에 앉았습니다. 예배가 시작됩니다. 보따리를 놓고 계속 조는 것입니다. 그리고 뭐냐 하면 졸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을 향한 아무런 갈망이 없습니다. 그리고 내 평생의 소원은 한 시간 안에 예배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도 드리고 기도회도 하고 권찰모임에도 나가고 성가대 밥도 하고 교회 청소도 하고 교회의 프로그램을 따라서 다 움직입니다. 그런데 한 번도 영혼은 안 움직이는 것입니다. 육체만 계속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똑같이 운동을 하라고 그랬더니 가만히 누워서 운동하는 광경만 연상하는 것입니다. 밥맛이 돌겠습니까? 몸을 움직여야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신앙이 미끄러지면서 진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가 비록 교회봉사가 아니라 집안에서 기저귀를 빨고 설거지를 하면서도 영혼이 하나님을 우러르면서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일하면 집에서 설거지를 하면서도 영혼이 막 출렁거리면서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설거지가 끝나고 나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그리움이 막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게 그런 원리입니다.
그런데 이 시인이 죄에 빠졌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신앙을 기쁨과 희열, 환희, 모든 것들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영혼에 깊은 어두움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해결책은 두 가지도 아니고 딱 하나입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조국교회는 회개하라는 설교를 거의 안합니다. 이것이 커다란 재앙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라는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뉘우치는 이 회개 자체가 생명적인 신앙을 갖는데 있어서 얼마나 치명적으로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시인은 범죄로 소문이 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회개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서 참다운 회개에 대표적인 특징이었습니다. 이 회개는 둘로 나뉘는데 하나는 율법적인 회개이고 하나는 복음적인 회개입니다. 율법적인 회개로 끝나는 것은 자기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당하게 될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기 때문에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의 목적 자체가 자신의 행복입니다. 그러나 복음적인 회개는 율법을 통해 자신의 죄의 심각성을 발견한 다음에 복음을 발견하고 그리스도께서 내가 지은 이 죄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하나님 앞에 통절하도록 자기의 죄를 뉘우치는 것입니다. 이 회개의 열매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까리따스의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전하게 주님을 사랑하고자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회개가 바로 영혼을 소생시켰고 이 시인은 죄를 지었을 때에 눈물로 침상을 띄우며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렸습니다. 한 나라의 왕이었으나 아주 하찮은 자가 되어서 벌레만도 못한 자신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 용서를 빌었고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가 죄를 짓지않았더라면 알 수 없었을 보다 깊은 하나님의 헤세드 즉 자비의 세계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찬양)
우리 죄악과 강퍅함 주님께 기도하니
우릴 불쌍히 여기사 치료의 은혜 허락하시네
그래서 이 시인은 이 죄의 용서를 통해서 찬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온 땅과 하늘에 가득한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진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깊이 사랑했던 믿음의 위인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께 먼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의 사랑을 무엇을 통해서 경험했느냐하면 용서를 통해서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일반섭리의 복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 것은 죄를 지은 자가 용서를 통해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찬란한 빛과는 비교할 수 없는 광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사도가 된지 3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고 이제는 젊고 풋풋하던 그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패고 백발이 찾아올 때 순교의 종소리가 들려오고 있는 인생의 황혼에서 그는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힌 죄수로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하려 이 세상에 임하셨다. 함이로다. 내가 죄인 중에 괴수로다.’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이 일평생 하나님의 그 찬란한 사랑을 다메섹 체험에서 찾았습니다. 그렇게 자기 의로 가득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요, 열심히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핍박하던 자기 같은 죄인 중의 괴수를 용서해주셔서 그리고 새 삶을 살게 만들어주시고 자기가 그토록 미워하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일군으로 삼아주셨다는 사실을 일생동안 회고하면서 그는 그의 사랑에 빚진 자로 살았던 것입니다.
(찬양)
예수의 넓은 사랑을 어찌 다 말하랴
그 사랑 받은 사람만 그 사랑 알도다
그래서 우리는 회개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앞에 하나님 말씀의 찬란한 빛이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는 우리를 공정하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악을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런데 진리의 밝은 빛은 우리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보게 만들어주고 우리가 무슨 일을 행했는지를 알게 만들어주어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죄를 회개하게하고 그때에 아무도 경험해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경험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인이 그렇게 죄로 말미암아 거의 죽은 것과 같은 자신의 영혼의 상태에서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경험했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회개시키셔서 진리의 말씀으로 돌이키게 만드셔서 소생하게 해주시는 확 살아나게 해주시는 그런 영혼의 새 생명을 주셨기 때문에 이 시인은 하나님을 자신의 목자라고 고백하며 인격적으로 그분의 선하심 앞에 승복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제 이 시인은 이렇게 하나님이 죽은 자와 방불한 영혼을 다시 살아나게 하시는 원대한 계획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을 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의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이름으로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의의 길이라고 그랬습니다. 히브리 성경에 ‘데레크’라고 나오는 이 길은 우리들이 걸어 다니는 실제의 길을 가리키기도 했지만 비유적으로는 한 인간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인생길 한 민족이 한 나라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며 걸어간 발자취들을 은유적으로 가리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 길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의로운 삶으로써 걸어가는 그 길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의의 길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면 째덱, 혹은 째데카 라고 나오는데 째덱은 의로운 삶의 내적인 질을 가리키고 이게 여성명사로 사용되면 밖으로 드러나는 의로운 삶의 모양을 가리킵니다. 이 의라는 것은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율법에 부합한 삶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불의한 삶에 반대입니다. 불의한 삶과 의로운 삶의 대조는 아주 날카롭습니다. 의로운 삶은 규칙을 따라야하지만 불의한 삶은 기준이 없습니다. 그 규칙을 따르지 않는 나머지 모든 삶이 불의한 삶입니다. 미에는 기준이 있습니다. 여자가 적당한 키가 있고 그 다음에 얼굴이 우선 형태가 이렇게 좀 동그란 모양이어야지 이렇게 사각형이라든지 그러면 아무리 예쁘게 해보려고 해도 안 됩니다. 그리고 다리의 길이는 반드시 여기부터 아래까지의 길이보다는 길어야합니다. 그것이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것에는 반드시 기준이 있습니다. 미에는 기준이 있는데 추에는 기준이 없습니다. 그 기준을 이탈하면 나머지는 모두가 다 추한 것입니다. 의로운 삶은 아주 좁습니다. 그래서 의의 길이 좁다는 것 생명에 이르는 길이 협착하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망에 이르는 길은 그 길이 아니면 모두 사망에 이르는 길입니다. 불의를 행하기 위해서 노력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버려두면 불의한 길로 저절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길을 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의 삶을 조정하고 영혼의 상태를 돌아보면서 올바른 길을 가려고하는 그 자세를 가져야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이 시인이 이야기하는 의로운 길입니다.
그러면 그 의는 무엇이냐 하면 결국은 이 의는 이 세상과 특별히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과 지성과 의지의 표현입니다. ‘나는 이렇게 하기를 너희들이 이렇게 믿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들이 이러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너희들이 이러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라고 하는 그 기준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 기준을 따라서 걸어가는 삶은 의로운 사람이며 따라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고 그 길을 이탈하는 사람들은 불의한 사람이고 불법한 사람들이고 그 불법과 불의의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것은 무슨 대가를 우리에게 바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거저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날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학교를 가면서 엄마한테 그러더랍니다. ‘엄마 내가 간 다음에 이 편지를 펴봐.’ 그러더랍니다. 그래서 아들이 간 다음에 편지를 뜯어보니까 요만한 쪽지가 나오는데 청구서라고 나옵니다. 아래와 같이 청구하오니 조속히 입금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 그랬더니 엄마 없을 때 동생 봐준 것 두 시간 300원, 아빠 구두 닦은 것 세 번 600원 쭉 해놓고 마지막에 1,800원 속히 입금해주시기 바랍니다. 은행계좌 어쩌고저쩌고 엄마가 그 다음날 애를 도시락을 싸주면서 ‘도시락에 편지가 들었으니까 학교에 가서 한번 펴봐라.’ 학교에 가서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도시락을 펴놓고 엄마의 편지를 뜯어본 것입니다. 아들에게 보내는 청구서 네놈을 뱃속에 두고 아홉 달 반 동안 고생한 것 공짜, 너 병나서 업고 병원으로 뛴 것 공짜, 이제까지 열한 살 될 때까지 먹여주고 재워준 것 공짜, 아들아 엄마는 너에게 청구할 것이 없단다. 사랑해. 그런데 그날 밤 까불다가 학교 유리창을 깨뜨려서 된통 엄마한테 얻어맞은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그러는지 이해가 갑니까? 문학적인 상상력이 이렇게 없습니까? 까르륵 웃어야지 재미있습니다. 이해가 안갑니까? 아니 그렇게 아홉 달 반 동안이나 넣고 다니고 병원에 업고 뛰고 11년 동안 먹여 살리고 나는 다 공짜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그랬는데 왜 패냐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아들이니까 다 공짜로 해줄 수 있는데 엄마가 이 아이가 이렇게 자라기를 원하는 것을 실망시켰을 때 그때는 때리는데 돈 내놓으라고 때리는 것이 아니라 똑바른 사람이 되라고 때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조그만 봉고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의사 딸내미가 있었는데 한 6살때쯤되었는데 방금 뽑은 봉고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길거리에서 울퉁불퉁한 돌멩이를 하나 주워서 그것을 봉고에 대고 계속 돌았습니다. 새 봉고를 계속 돌았습니다. 몇 바퀴를 돌았습니다. 어느 한 부분을 수리할 수 없고 360도를 돌았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그 아이를 때리지 않았습니다. 조용히 그 애의 엄마를 찾아가서 공업사에서 삼십만 원을 부치랍니다. 아이를 때릴 때 부모의 마음은 먹여주고 재워준 것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먹여주고 재워준 것은 다 공짜였는데 공짜로 베풀어준다고 해서 아무 계획도 없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자식을 키우면서 내 평생소원 우리 아들 100㎏만드는 것이다. 그런 소원을 품는 부모가 있습니까? 그것은 사육하는 것이지 아이를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두당 100㎏씩 아니면 한 근에 얼마씩 팔려고 그럽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자기의 백성들에게 거저 주신다고 할지라도 아깝지 않으시지만 그러나 그 백성들을 향한 기대가 있는 것입니다. 그 기대가 무엇이냐 하면 의로운 삶입니다. 이사야서 5장에 보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은 포도원이요.’ 그랬습니다. 그리고 의와 공평의 열매를 맺기를 바라서 포도원에 포도를 심었는데 의와 공평은커녕 썩은 열매만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이 포도원을 쓸어버리고 싶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신학적인 강조점을 개신교에서 특별히 한국이라는 상황에서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신학적인 강조점의 균형을 너무 상실했습니다. 그래서 뭐냐 하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구원을 얻는다.’ 라고 하는 그 자체가 공짜에 대한 사상을 양산해냅니다. 그래서 제가 교역자들과 교인들에게 늘 가르치는 것이 공짜는 구원을 빼고 모두 나쁘다. 그리고 공짜를 받으려고 하지마라. 사랑의 빚을 져도 좋은 것이지 너는 나를 사랑해야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다. 부자연스럽게 생각해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주시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 목적을 따라 살지 않으면 이게 은혜의 소비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많이 주시면 이 은혜의 가장 생산적인 사용은 무엇이냐 하면 이 은혜를 받아서 낭비하지 않고 이 은혜를 가지고 성결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의로운 길을 걸어가면서 이 세상을 고치고 치료하면서 살아가는 일에 이 은혜를 사용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는 좋은데 은혜를 사모하는 것은 좋은데 이 은혜를 받아서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별로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셔도 이 은혜가 스스로 이안에서 부패하거나 아니면 자기의 헛된 정욕과 더불어서 속에서 갈등을 하기 위해서 거의 소진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리스도인이면 이렇게 살아야한다고 그러는데 기독교인의 삶은 깡다구로 사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만약에 기독교인의 삶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삽질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유장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아무것도 선한 것을 할 수 없는 그 절망적인 존재로 묘사하고 그런 신학을 칼빈이 계승하면서 전적인 타락의 교리를 강하게 내세우면서 그 교리를 기초로 ‘솔라 그라티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을 외치는 그런 이상한 신학을 만들어낸 사람들이 정말 어떻게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그 의의 길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게 결국은 성경에 계시되어있는 기독교인이 마땅히 살아가야할 바입니다. 그것입니다. 의의 길이라는 그 자체가 이 세상이 불의하다는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때 어떤 생각을 해야하느냐하면 진정으로 자신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가치관이 변한 사람이면 자신의 삶의 이유가 여전히 자기의 행복이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변화되지 않은 그리스도인과 변화된 그리스도인의 차이입니다. 변화되지 않은 그리스도인 즉 소위 이야기하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은 여전히 자신의 행복이 주된 관심사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예전에는 자기 혼자 행복해지려고 하다가 이번에는 예수의 덕을 보아서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복해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그 관점 자체는 변하지지 않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적인 것들을 거기다가 더덕더덕 매달아도 이 중심 자체는 움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신학적으로 이 회심은 사랑의 중심축이 바뀌는 것입니다. 변화된 그리스도인은 삶의 중심적인 목표가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해지는 것입니다. 첫날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의 지극히 위대함과 광대하심 앞에서 자기가 다만 티끌인줄 알고 겸손해지고 그리고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 자기가 정말 더러운 죄인인줄 알아서 그분의 은총을 사모하는 그게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불의하기 때문에 의롭게 산다는 것은 쉽지 않고 또 용기를 내어서 의롭게 살아도 부흥사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것처럼 오늘 의롭게 살면 내일 그 의롭게 산 것에 대한 결과가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불의한 세상에서 불의를 행했더라면 살아남을 수 있는데 의롭게 행했기 때문에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의 길을 가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
제가 요즘 사실은 그렇게 많이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교회에 붙어있고 연구하고 글을 쓰는 일에 전념하려고 하는데 잘 안됩니다. 그래서 꼭 필요한 일들만 외부에 나가서 하는데 제가 교회를 개척하고 나서 초기까지는 정말 많이 다녔습니다. 일 년에 오만키로 이상 자동차를 운전할 정도로 다녔습니다. 그리고 주일에는 본 교회에 나타나서 설교를 하고 월요일부터는 집회를 다니고 그랬습니다. 그때의 일이었습니다. 지방에 있는 어느 대학에서 강의를 해달라고 저를 불렀습니다. 기독교청년들이 한 400명이상 모인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차를 몰고 가는데 고속도로에서 다른 차가 사고가 났습니다. 막 구름처럼 엉긴 것입니다. 그래서 간신히 풀려서 나와서 지방도로로 빠져나왔을 때에는 시간이 아주 빠듯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속도를 냈습니다. 그런데 저기 언덕위에서 경찰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도를 줄이고 80㎞에 맞추고 갔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경례를 하더니 차를 세우는 것입니다. ‘검문하겠습니다.’ 그럽니다. ‘무슨 일입니까?’ 그러니까 ‘속도를 위반하셨습니다.’ 그래서 ‘무슨 소리냐? 지금 여기서 80㎞로 왔는데 무슨 소리냐?’ 여기서는 잘 오셨는데 언덕 뒤에서 위반을 했다는 것입니다. 아니 당신이 언덕 뒤에서 위반을 했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그랬더니 자기 친구가 거기서 스피드건을 쏴서 속도를 측정해서 무전을 쳐서 여기다 알려주었는데 100㎞로 달려오셨답니다.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다고 그러고 그냥 딱지를 끊어달라고 그랬는데 뭐하시는 분이냐고 그래서 저는 대학의 선생인데 강의가 있어서 가는 길입니다. ‘아, 교수님이십니까? 걱정 마십시오. 교수님!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잘 몰랐습니다. 시간이 없었으니까 빨리만 해주면 좋겠다고 해서 막 긁어서 써주었습니다. 그것을 햇빛가리개에 꽂고 그냥 갔습니다.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시간에 맞추어서 도착해서 설교를 은혜롭게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은행을 갈 일이 있었는데 어제 딱지가 생각이 나서 교회의 직원을 시킬까하다가 ‘내가 내지 뭐’ 그러면서 내가 가지고 갔습니다. 가서 돈을 내려고 보니까 범칙금이 액수가 너무 작습니다. 보통 그렇게 딱지를 띠면 그 당시에는 이만원정도 되었는데 육천 원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육만 원은 너무 비싸지 않습니까? 이상하다. 그런데 밑에 납기 후에는 칠천 이백 원입니다. 20%가 붙으니까 딱 맞는 금액입니다. 참 이상하다.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교수님 너무 걱정하지마세요. 싼 것으로 끊어드릴게요.’ 그랬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았더니 범칙내용에 ‘담배 피다가 걸렸음.’ 아니 그것을 교회의 직원에게 주었으면 진짜 교회에 큰 시험이 들었을 것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어디 가서 담배를 피다가 걸려서 딱지를 끊었을까 그러면서 우리 목사님 알고 보니까 이상한 사람이구나! 그러지 않겠습니까? ‘어쩐지 가끔 담배냄새가 나!’ 그랬을 것입니다. 은행에서 그 범칙금을 놓고 내 인생의 전기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물론 내가 그것을 끊어달라고 그런 적도 없고 그리고 그것을 내가 원한적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까지 그렇게 살면 희망이 없다. 그 다음부터는 운전에 있어서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뭐냐 하면 할 수 있으면 위반하지 말자. 그러나 위반해서 걸리면 법이 정하는 정확한 처벌을 요구하자. 그러고 나서 몇 달 있다가 그때는 지하실에서 교인 몇 십 명을 데리고 개척할 때니까 제가 운전기사였습니다. 여전도사님 한분이 처음 교역자로 들어오셨는데 나보다 연세가 많으시지만 제자인데 이분은 차만 타면 주무십니다. 도움이 안 됩니다. 그날도 차를 타고 가는데 유턴을 해서 심방을 가야하는데 유턴차선을 직진하려는 차들이 다 가로막은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저쪽의 신호등이 끊겼기에 이렇게 돌았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거기에 서있어야지 지하도에 숨어 있다가 올라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경례를 붙이면서 ‘검문하겠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도로교통법 몇 조를 위반하셨습니다.’ 그래서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실선으로 끊어진데 하얀데서 돌아야지 노란데서 돌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도로교통법 1조를 보아라. 이 법은 교통소통을 원활하게 하기위한 법이라고 그랬다. 아니 이게 무슨 애들 땅따먹기냐? 직진하는 차가 여기 서면 안 되는데 막지 않았느냐?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돌았는데 안 되느냐고 그랬더니 안 된다고 그래요. 너무 야박하지 않느냐고 그랬더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벌점 없는 싼 것으로 끊어드리겠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너 이리 와봐라. 네가 그렇게 해줄 권한이 있느냐? 너는 여기에서 걸린 대로 끊어주는 사람이고 봐주는 것은 법원에서 하는 것이지 네가 하는 것이냐?’ 그랬더니 이 사람이 위 아래로 훑어보더니 ‘알았어요. 끊어주면 될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벌점 15점에 육만 원짜리를 끊어주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웃으면서 지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얼마 있다가 생전처음으로 집을 사게 되었습니다. 집을 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데 건너편 집에 있는 사람이 우리는 그 건너편에서 세를 들어서 살고 있는데 건너편 집에 있는 사람이 남편은 교수이고 어느 교회의 집사입니다. 그러더니 우리 집사람에게 그러는 것입니다. 그때는 목사안수를 안 받았는데 ‘제가 기도를 많이 했는데요. 사모님! 어제 꿈을 꾸었는데 하나님이 이 집을 사모님께 팔라고 그러십니다.’ 그러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도 참 이상하십니다. 살 사람에게도 동시통보를 하셔야지 왜 팔 사람에게만 통보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돈도 하나님이 준비하셨대?’ 그래서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방배동에 있는 허름한 40평정도 되는 빌라를 샀습니다. 그렇게 비싼 집은 아니었습니다. 제대로 된 집은 태어나서 처음 샀습니다. 나는 그렇게 세금이 비싼 줄을 몰랐습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비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집사람이 법무사에 가서 세금이 얼마냐고 그랬더니 어쩌고저쩌고 하니까 우리 집사람이 놀라니까 여직원이 ‘아줌마 비싸요?’ ‘그까짓 집에 세상에 이렇게 세금이 비싸서 어떻게 집을 사요?’ 그러니까 여직원이 ‘그러면 반만 내세요.’ 그러는 것입니다. ‘세금은 뭐 그런 세금이 있습니까?’ 그러더니 요령을 가르쳐주는데 집을 판 사람과 산 사람이 둘이 협의를 해서 요새 계속 문제가 되는 다운계약서를 ⅔가격으로 줄여서 작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절반으로 세금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사람이 와서 그러는 것입니다. ‘여보,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우리 돈도 없는데 어떻게 할까?’ ‘여보 그것을 말이라고 하냐? 로마서 13장에 보면 국세를 바칠 자에게는 국세를 공세를 바칠 자에게는 공세를 그랬는데 아무리 이것이 지방세라고 그래도 그렇지 내!’ 진짜 솔직히 말해서 돈이 너무 없어서 아들 동전이 들어있던 벙어리저금통까지 찢었습니다. 그래서 짝을 다 맞추어서 돈을 냈습니다. 법무사에 돈을 내러갔습니다. ‘아줌마 비싸다고 그러더니 계약서 새로 써오셨어요?’ ‘아니!’ ‘어떻게 하시려고요?’ ‘다 내려고요.’ 그럴 때 그 여직원의 표정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정말 선생님 같은 분이 계시기 때문에 나라가 존속합니다. 이런 표정이었겠습니까? 아니면 아이고 병신! 되게 잘난 척 하는구나! 전자입니까? 후자입니까? 몇 백만 원을 더 내고 그런 눈총을 받았습니다. 이것을 만약에 그 당시에는 거의 80%가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내면서 우리 집사람을 교육을 톡톡히 시켰다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지하실에서 나와서 남의 교회에 세를 들어가게 되었는데 200명이 갔는데 한 3년 만에 예배당이 꽉 차서 도저히 그 예배당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다니면서 땅을 구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런 곳으로 가리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는데 명색이 서초동에 있다가 평촌으로 가야 겨우 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 평의 땅을 사는데 얼마냐고 그랬더니 36억이라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러면 좋다고 계약을 하자고 그랬습니다. 그때 돈이 어디 있습니까? 1,500만원이 통장에 있었는데 간절히 기도했더니 어느 성도가 계약금을 빌려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계약을 하고 그나마 33억은 어떻게 주는지 앞에 하얗습니다. 그냥 믿음으로 걸어가면 하나님이 해결해주시겠지 그러면서 기도하면서 가는데 이 할아버지가 사업을 하시다가 은퇴를 하시는 분이었는데 전혀 나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습니다. 5억을 받고 명의이전을 다해주고 인감도장까지 나를 주었습니다. 설마 내 돈을 떼어먹겠냐고 교회에서 마음대로해서 다 대출을 받아서 잔금을 갚으라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5억을 받고 36억짜리 땅을 그냥 등기이전을 해주는데 안주고 버텨도 할 수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분이 그러시는 것입니다. 36억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조건이 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것이 뭐냐고 하니까 30억은 계약서대로 주고 6억을 비자금으로 달라는 것입니다. 그때는 한참 비자금 때문에 시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너무 의외여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그랬더니 이 할아버지 이야기가 땅을 팔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그래서 땅을 안내놓았는데 가서 팔라고 사정을 한 것인데 딱 잡아떼고 안판다고 그러다가 지나가는 말로 도대체 내가 땅을 주면 여러분은 이 땅에다가 무엇을 하려고 그러느냐고 그러니까 교회를 짓는다고 그러니까 ‘교회를 짓는다고?’ 그러면서 팔십 먹은 할아버지가 두 번이나 물어보더니 ‘일주일만 생각해봅시다.’ 그러는 것입니다. 일주일후에 가니까 이분이 그러는 것입니다. 옛날부터 마음속에 여기에 교회가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답니다. 나두면 계속 올라가는 땅인데 그때 400만 원짜리 지금 천이백만 원이 되었습니다. 그냥 놔두려고 했는데 그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그것입니다. 대출을 하고 이렇게 저렇게 했더니 당신들에게 36억에 이 땅을 넘겨주면 자기가 2억을 집어넣어야지만 청산이 된답니다. 내가 땅을 그냥 줄 수는 있지만 없는 내 돈 2억을 낼 수는 없다고 그러시는데 무엇 때문이냐 하면 세금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건축위원회 회의를 했습니다. 거기는 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있고 부동산을 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목사님 85%가 그냥 그렇게 거래합니다. 그냥 거래를 해도 문제가 안 됩니다. 여러 사람이 대세였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도 신뢰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깐깐한 공인회계사를 불렀습니다. 어떻게 생각을 하느냐고 하니까 대부분 그렇게 하기는 한다는 것입니다. 아주 굴지의 몇몇 회사를 제외하고는 그렇게 한다는데 그런데 목사님 문제가 있습니다. 장부를 두 개를 써야합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못하겠다고 통보를 했습니다. 세금이 얼마냐고 하니까 3억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3억을 더 주어서 36억을 달라는 땅을 39억을 주고 산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당시에는 36억짜리 땅을 계약했는데 교회의 돈 통에는 1,500만원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3억을 빚을 내어서 주어야하는 것입니다. 그때 나는 지금으로 따지면 30억 정도의 압박감이었습니다. 그런데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무엇을 느꼈느냐하면 한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사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그러니 이것은 목숨이 오고가는 것이 아닌데도 이렇게 힘이 드는데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때 사실은 그 사실을 내가 교인들에게 고백을 했는데 그때가 저희 교인들에게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아주 놀라운 실습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그 사건이 있고나서 교인들 속에 정직하게 세금을 내기 위한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거기서도 에피소드가 무지하게 많습니다.
어느 한의원에서는 그 일에 너무 감동을 받고 세무사를 불러서 당신은 이제 나에게 세금을 적게 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말고 법대로 세금을 내는 길로 나를 인도하라고 그랬습니다. 연말에 다른 한의원의 두 배의 세금을 납부했습니다. 그러면 세무서장이 오라고 그래서 무엇을 주겠습니까? 세금 잘 내는 사람에게 표창장을 줄 것 같습니까?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아직도 현실을 모르는 것입니다. 표창장을 준 것이 아니라 특별감사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들이닥쳐서 자료를 다 뒤지는 것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그랬더니 와서 하루 종일 와서 뒤지더니 이상이 있냐고 그러니까 200,000원이 차이가 납니다. 그게 문제가 됩니까? 문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돌아가는데 싸늘한 표정이더랍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자식은 왜 이렇게 튀느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동네의 모든 한의원이 고만한 크기의 한의원에게 예를 들면 오천만원씩 세금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크기의 한의원이 일억 원을 낸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이야기냐 하면 나머지 모든 한의원이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가나는 것 이것이 담당자로서는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이것을 설명할 구실을 찾으니까 시키는 대로하지 뭐 잘났다고 하면서 감사가 덮쳐서 샅샅이 뒤진 것입니다. 정말 그러면서 우리들이 살아가는 사회가 얼마나 부도덕하고 하나님의 공의와는 거리가 먼 것인가 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실은 그것이 우리교회에서는 ‘올바르게 살아야한다는 것 그리스도인까지 그렇게 살면 이 세상은 희망이 없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한 아주 확실한 교육의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면서 이후에도 교회를 경영하는 모든 것에서 그 룰을 철저하게 적용시켜서 그래서 교회를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로 보자면 이 의로운 길을 걷기위해서 때로는 한번만 고개를 숙이면 되었는데 장렬하게 죽었습니다. 여러분 주기철 목사님의 경우 마지막 자료를 읽어보니까 일본경찰이 목사님이 하도 말을 안 들으니까 석방시켜 줄 테니까 가다가 차문을 열어 줄 테니까 이렇게 까딱만 하라. 눈길을 주고 까딱만 하면 당신 건강이 안 좋다는 이유 때문에 신사참배를 한 것으로 봐준다. 주기철 목사님이 그것이 무슨 소리냐? 까닭을 하던 고개를 숙이던 넙죽 엎드리던 중요한 것은 경배의 의미인데 아주 엎드린다고 그것이 큰 죄가 되고 살짝 고개를 까딱한다고 그러면 되느냐고 말 같지 않은 소리라고 발로 쳐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입니다.
(찬양)
뜻 없이 무릎 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매여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그 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그 일이 너무 어렵고 고통스러운 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세상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스러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것이 바로 날마다 우리의 영혼을 은혜로 소생시키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오늘날 엄청난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는 것은 나는 다만 윤리적인 생활 하나 때문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모든 종교와 사상은 다원주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원으로 말하자면 동그란 유리구에 아무데나 점을 찍으면 보기에 따라서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 종류의 진리를 원하지 평면에 점을 찍어놓고 이것 이외에는 진리가 없다는 종교와 사상은 기독교가 아니라도 모두 현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기각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빨리 종교다원주의가 확산되어가는 것입니다. 이런 것 때문에도 사실은 비난을 받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렇게 우리들이 믿는 신앙 사상이 구조적으로 현대 사상과 화합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들이 믿는 이렇게 시대와 상반되는 이 진리의 체계가 참다운 진리라는 확신시키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가 믿고 있는 바에 대한 거룩한 확신과 그리고 그 확신하는 가치의 체계를 따라 사는 윤리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위대한 힘은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입니다. 그리고 이 사상의 힘과 윤리의 힘은 허공에 매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힘이라는 이 연결고리에 매달려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와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반영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교육함으로써 우리가 누구이고 어디로부터 왔고 하나님은 누구시고 이 세계는 무엇이고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하는가에 대한 확고한 지식 그것도 지식의 쪼가리 떨어진 나부랭이가 아니라 구조물처럼 튼튼하게 흔들릴 수 없도록 세워진 구조적인 체계로써의 지식 그리고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이렇게 살수밖에 없는 윤리적인 생활, 그러나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영적인 원동력으로써의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런데 보시면 이 사상과 윤리는 가시적입니다. 사상은 그리스도나 신앙고백을 통해서 외적으로 표명이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지식적으로 알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윤리적인 삶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의 신조가 무엇이지 몰라도 거짓말 하나? 안하나? 세금을 제대로 내는가? 안내는가? 비겁한가? 그렇지 않은가? 이런 삶을 보면서 눈으로 모두 드러납니다. 그러나 은혜는 이 세상 사람들은 모르는 영역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와 머리되신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은혜를 받는다, 사랑을 받는다, 혹은 성령을 받는다고 할 때 일대일로 하나님과 대면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머니에 찔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은혜의 체계가 아닙니다. 원래 우리가 개인적으로 느끼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사랑, 그 은혜, 그의 은사, 그리고 그가 성령의 감화로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신령하고 좋은 것들은 하나님이 일대일로 우리의 주머니에 찔러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을 통하여 교회에 부어주신 그 부요함에 우리들이 참여함으로써 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큰 사랑은 원래 하나님이 아들을 통하여 아들에게 부어주시고 그 아들을 통하여 아들의 신부된 교회에 부어짐으로써 우리가 그 교회에 참여하여 한 지체가 되었기 때문에 그 사랑을 분여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사랑을 받으면서도 항상 두 가지 이 사랑이 교회를 통해서 왔다는 것과 교회의 이 사랑이 그리스도위에 하나님이 부어주신 사랑이라는 것, 더 위로 올라가서 그리스도께 하나님이 부어주신 그 사랑은 당신 자신의 무한한 사랑의 성품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라고 하는 이 신앙고백이 확고해서 그렇게 해서 사랑과 은혜를 경험했기 때문에 이것은 내 것이 아니라 교회의 공동소유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돈을 버는 것은 남을 주려고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위를 얻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지위를 얻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지식이 많다고 칩니다. 그러면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무지한 사람들에게 종노릇을 하라고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구역질나는 것이 교회에 와서 돈 많고 높은 지위라고 거들먹거리고 생각 없는 성도들은 거기에 고개를 숙이는 것 이런 것이 가장 구역질나는 교회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하나님이 그렇게 주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과 교회 안에서 울리는 모든 예배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거룩하고 경건한 삶, 이 모든 것들은 칼빈의 표현에 의하면 성례전적으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봉헌되는 삶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혜는 바로 그리스도를 통하여 교회위에 부어주신 은혜이고 그 은혜를 내가 받았으면 나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이름표를 붙이고 이 세상에서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직장에 있는 상사로서, 부하직원으로서 그리고 이 시장의 점포의 주인으로서 종업원으로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런 모든 삶속에서 순간순간 의로운 길을 선택하며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살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혀 주시지 않는 영혼의 소생, 신비한 은혜의 비밀들, 진리의 찬란한 빛, 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목격하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지만 세상에서는 굳이 미움을 받을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도 사랑을 받고 세상에서도 귀여움을 받고 싶은 것입니다. 소금이 되기보다는 설탕이 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하나님이 의의 길을 걸어가면서 살도록 우리에게 주시는 그 모든 자원들은 소비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교회에 소비주의를 비난합니다. 교회가 돈만 생기면 땅을 넓게 사려고하고 화려한 건물을 지으려고 하고 그럽니다. 비난을 받아야합니다. 그런데 똑같이 비난을 받아야할 것은 은혜의 소비주의입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그런 식으로 소비하라고 주신 것이 아닌데 하나님이 오늘도 말씀의 종들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주시는데 이것들을 이렇게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데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속에서 부패함으로 소진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에 진전이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이 너무 악하고 죄가 보편화되었고 흔히 잘 쓰는 말이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상이 대중적이던 시대가 지구상에 존재했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으면 너무 튀어서 이웃에서 손가락질을 받던 그런 시대가 과연 존재 했습니까? 언제나 어둠은 다수였고 그리고 언제나 빛은 소수였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일이었습니다. 문학 소년의 기질을 타고났는지 겨울방학동안에 섬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래서 섬으로 갔습니다. 돈도 별로 없었을 때인데 섬으로 가서 그냥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면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공부를 끝내고 서울로 나올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바다에 나가보니까 풍랑이 엄청 일어납니다. 대게 그런 날은 폭풍주의보가 날리고 배가 뜨지 않는데 배가 옵니다. 풍랑이 아무리 일어나도 기상청에서 폭풍주의보상에서 운항정지를 하지 않으면 일단 갑니다. 탔습니다. 불안하게 탔는데 아니나 딱 절반을 갔는데 그런데 파도가 쳐서 절반 갔는데 끝까지 가는 시간이 걸린 것입니다. 벌써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중간까지 갔는데 무전이 왔는데 폭풍이 온다고 빨리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그러면 몇 시간 전에 알려주지 내 생각에는 그냥 인천으로 가면 되겠는데 지시대로 한다고 배를 돌린 것입니다. 그 사이에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것입니다. 저는 그때 정말 죽는 줄 알았습니다. 160톤 정도 되는 여객선이었는데 파도가 이쪽을 때리면서 포물선을 그리면서 반대편으로 날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구명조끼를 입고 배 밑창으로 내려가서 이제 조난사고 당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막 토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얼마를 씨름했는지 내 생각에는 밤10시 가까이 된 것 같은데 어쨌든 그 항구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너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때 그 섬이 발전소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가톨릭교회에서 발전기를 돌려주면 그것을 뽑아서 돌려서 쓰는데 불이 나가니까 캄캄한 밤바다입니다. 딱 등대 하나가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많은 배들이 항구로 대피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조명탄을 쏘아 올리는 것처럼 항구를 구석구석 보여주어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괜찮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의 등대만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어도 그 불빛이 던져주는 의미를 해석하면서 사람들은 그 항구로 피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합니다.
(찬양)
이곳 어두운 세상에 빛으로 부르셨네! 주의 얼굴 구할 때 역사하소서!
정말 교회는 하나님이 그렇게 빛의 공동체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중요한 목적인 것입니다. 그때에 어쨌든 일련의 사건을 통해서 제 가슴속에는 복음이라는 이 불명료한 은혜의 교리에 두둥실 떠밀려서 적당하게 흘러가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커다란 각성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험은 내내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에 은혜를 주시는 목적이 이 어두운 세상의 빛으로 살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한 아주 또렷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길이 얼마나 어려운지 아십니까? 저는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는 커다란 사업을 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렇게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하면서는 심각하게 어렵습니다. 자, 저런 방송장비를 하나 삽니다. 혹은 피아노를 삽니다. 얼마냐고 물어보니까 오천만원이랍니다. 그래서 오천만원으로 삽니다. 영수증을 주십시오. 영수증을 주는데 거래명세서 아니면 간이영수증을 주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 사람은 이 물건을 팔고 세금을 낼 의지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 영수증은 통용이 안 됩니다. 법적인 효력이 있는 세금계산서를 주십시오. 그러면 방금까지 오천만원이라던 것이 오천칠백만원을 달라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하면 오백만원은 부가가치세고 소득세 신고를 하면 3%가 올라가기 때문에 이백만원이 더 들어가니까 오천칠백만원이 드는 것입니다. 그때 그냥 오천만원만 주고 가져오면 되는데 말입니다. 교회는 감사를 나오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은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물건을 사는 최종적인 부가가치세는 소비자가 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포탈하면 저 사람은 안 팔았다고 그러고 재고로 잡고 세무서에 신고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금을 안내는 것은 마지막으로 법적으로 물건을 구입한 최종소비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사업자이면 다른데 물건을 넘기고 이 돈을 돌려받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돌려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일 년에 지출되는 수십억 원을 지출하면서 그런 세금계산서를 챙기기 위해서 1/10을 냅니다. 그 사람들이 무슨 멜기세덱도 아닌데 십일조를 받아가듯이 그것을 낼 때 그게 정상적으로 사고를 하지 않으면 이것은 아까워서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고통을 겪으면서 이것이 나는 모든 교회가 이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분명하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에게 교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교회가 말로 진리를 엔조이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우리가 모든 삶에 있어서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우리들이 피 흘리기까지는 고사하더라도 고뇌하는 한도까지는 우리들이 살아야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최소한 하나님과 교회와 양심 앞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그렇게 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닙니까?
주님은 오늘날의 우리 시대에 교회의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계시겠습니까? 신학사상을 연구한다, 새로운 사상을 개발한다. 다 좋습니다. 그러나 그런 말씀의 은혜를 받은 성도들이 피 흘리기까지 분투하며 살아야 되겠다는 결연한 의지가 없으면 이 가르침은 모두 정신적인 유희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도 이것은 소비 중심의 은혜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디틀리 보에프라는 사람은 우리와 신학사상이 다르기는 하지만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복음서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얘들아 나를 따르라. 우리 모두 함께 죽자구나!’ 한 시대의 교회가 간절히 진리를 외칠 때 그 진리가 사람들에게 호소력을 지니고 그 짧은 진리의 한 선언이 한 시대에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기 위해서는 그 진리를 외치기 전까지 교회가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피를 머금으면서 살아온 발자취가 있어야지만 그 선포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세상이 그러니까!’ ‘그래도 어떻게 우리가!’ 이런 변명으로 끊임없이 양보하는 가운데 마치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그 참치를 메고 온 노인처럼 상어들이 달려들어서 다 뜯어먹고 마지막에 뼈만 가지고 돌아오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교회의 모습입니다. 개혁! 이 세상을 바꾸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따라서 의로운 길을 걸어가고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이 일을 위해서는 그 정도가 아니라 매순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고자하는 그런 각오와 결단, 그리고 바로 이런 일들을 위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남이 모르는 은혜의 세계를,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랑의 비밀을, 그 은혜를, 우리에게 주셨다는 믿음으로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자손에게도 그것을 가르쳐야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사람들이 황금빛으로 칠해진 성경을 들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원래 이 성경은 붉은색으로 칠해져있습니다. 이 성경이 여기에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이 복음이 머금었다는 뜻입니다. 가상적으로 상상하면서 고난을 받는 것은 대리만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순교의 기회는 오지 않고 또다시 공산당이 쳐들어와서 신사참배를 하라는 강요 때문에 그런 일이 올 것이라고 기대할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에 목숨을 던진 사람들은 사소해 보이는 순간에 신앙의 절개를 지키면서 살려고 가혹하리만치 긴 세월동안 몸부림쳐왔기 때문에 결정적 순간에 자기의 목을 십자가 아래에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이 살아가라고 오늘도 하나님은 죄 때문에 침체에 빠진 영혼을 용서하셔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고 은혜를 부어주시고 계속 새사람을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만신창이가 된 그리스도의 교회를 온전케 하는데 티끌만큼이라도 우리들이 이바지하는 삶을 살라고 하나님 오늘도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위로를 주시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인생을 마름하는 날이 올 것입니다. 그때에 우리는 주님을 믿고 골방에서 그 은혜에 감격한 것 때문에는 상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주신 은혜를 어떻게 사용했는가? 그리고 피 흘리기까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를 지고 고난을 받는 삶을 택하면서 살았는가?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은혜들이 우리의 삶속에서 핏빛으로 써가는 우리의 고백이 되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을 판단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주님은 당신의 뜻대로 살고자 그렇게 살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들이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뜻대로 살고 싶사오니 나에게 은혜를 주십시오!’ 라고 빌 때 그들이 죄가 있으시면 죄를 용서해주시고 연약하면 힘을 주시고 자원이 없으면 자원을 주셔서 그 삶을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내가 의롭게 살기위해서 분투하는 이 한발자국 한발자국의 삶은 거대한 바위에 계란을 던지는 것처럼 당장은 아무 소득이 없는 일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일의 결실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으면서 살아가는 매순간순간 삶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과정 그 자체를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런 원대한 계획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은혜를 주셨으니 우리가 얼마를 살든지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어두운 세상을 불꽃처럼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