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성경신학대학원 부흥회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눅 11:1)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땅의 자원들을 가지고는 육체를 이바지하면서 살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천상의 자원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 천상의 자원이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를 위한 도구가 아니고, 기도는 교회 부흥을 위한 프로그램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명의 문제이고 영적인 자기정체성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일은 몰라도 이 두 은혜의 방편, 굳이 추가하라면 성례까지를 추가해서 이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천상의 자원을 자기의 지성과 마음 안에 풍부하게 부음을 받는 사람이 자기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방법대로 영적인 자원으로 목회를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목회의 훈련을 통해서만 습득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중에서 오늘은 이 말씀을 토대로 기도에 관한 이야기를 잠깐 드리겠습니다.
우선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최소한 예수님의 기도로부터 배울 수 있는 네 가지의 요소를 보여줍니다. 첫째는 ‘예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기도하신 주체가 ‘예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기도하고 예수님도 기도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기도하나요? 또 기도할 필요를 어떻게 해서 느끼게 될까요?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습이다. 그래서 우리는 참회가 필요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의 모든 기도 앞부분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과 함께 자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을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죄를 지으실 수도 없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우리는 능력이 모자라기 때문에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서 기도하기 전에는 없던 능력을 받아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능력이 한없이 많으신 분이었습니다. 누가복음 3장에 보면 주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받으신 분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주님이 기도하셨다는 사실이 우리는 쉽게 납득이 안 가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낮고 천한 인간의 본질을 가진 인간일 뿐이지만 예수그리스도는 몸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그 자신은 신적인 본질이셨습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자원을 자기 마음대로 하실 수 있었기에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열두 영이나 되는 더 많은 군대를, 천군을 이 땅에 보내주실 수 없겠느냐’ 아버지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을 당신이 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분은 누가 가르쳐주실 필요가 없을 정도로 지혜와 지식에 있어서 탁월한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왜 기도하셨을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빌립보서 2장에 나타나있는 사도바울의 기독론의 빛 아래서 풀어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해 집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와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그리스도예수의 생애 전체, 탄생과 삶과 죽음과 마지막에 승귀에 이르는 이 모든 그리스도의 지위의 변화를 주장했던 예수님 안에 있는 이 마음을 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덕스러운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사도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데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를 드러난 그리스도의 외형적 삶을 통해 우리에게 설명해 주었던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케노픽피어리스’에서 주장한 것처럼 신성을 파버리시고 사람이 되셨다기 보다는 하나님이신데 겸손하게 그 하나님의 본성을 인간의 본성아래 감추시고 스스로 자기를 위해서는 그것을 사용하기는 마다하시면서 사람의 모양으로 주 앞에 복종하는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두 가지인데 그것은 죽으시기 위함이었고 우리에게 본을 보이심으로서 아버지의 사랑 앞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주시기 위함이었고, 하나를 더 추가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깊이와 넓이를 성육신하면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이 세 가지 목적을 위해 이 세상에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이 기도는 당신 자신의 본질상 의무였다기보다는 우리에게 연약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한 본을 당신의 성육신 안에서 생생하게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 자신이 실천하신 것이라고 결론을 내려도 신학적으로 무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자기의 전존재, 성육신하신 자신의 전 존재를 교재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참된 인간이 어떻게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아야 되는지 기도의 모본 속에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라고 되어있는 이 기도의 주체의 명사 앞에서 우리는 그런 점에서 겸손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왜 기도안합니까? 예수님보다 한 수 위에 있나요? 진실하지 않는 사람의 특징을 한 가지만 말하자면 하나님께 말하는 시간보다 사람에게 말하는 시간이 훨씬 길고, 하나님 앞에는 말할 때에는 할 말이 없는데 사람 앞에 떠들 때는 거품을 품고 할 말이 많다는 것입니다. 주님도 기도하셨으니 여러분도 기도하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는 ‘한 곳에서’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헨토퍼티니’라고 나옵니다. 그래서 어느 영어 성경에서는 ‘In a certain place'라고 했습니다. 확정지을 수 없는 어떤 곳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은 복음서 속에서 거의 일정하게 나옵니다. 새벽 미명과 깊은 밤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도하신 장소는 일치를 이루지 못합니다. 어떤 곳에서는 예수님이 감란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산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어떤 곳에서는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고, 또 어떤 곳에서는 강에서 기도하셨다고 되어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기도하신 시간은 거의 동일한데 장소가 일정하지 않게 나온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요?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습니다. 주님이 스스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건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느니라’
잃어버린 영혼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사마리아 땅이든지 갈릴리 지방이든지 찾아가셨습니다. 병들고 아픈 자들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촌이든지 도시든지 찾아가셔서 그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하셨고 그저 깊은 밤이면 아무 곳에서나 주무시고 또 잡수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의 생애는 그야말로 종처럼 사신 순례자적인 생애였습니다.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지만 여러 가지 주기도문의 수요와 관련된 복음서들의 유사한 정황을 수집해서 판단할 때 제 심정적으로는 스토리가 이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늦은 밤까지 병자들을 고치거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제자들과 함께 어느 곳에서 잠드셨는데 예수님은 당신의 습관을 따라서 새벽미명에 일어나시고 제자들은 퍼질러 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제자들이 깰까봐 살금살금 발꿈치를 들고 나오셔서, 어디론가 한적한 곳으로 가셨고, 거기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어두움이 물러가고 새벽이 지나 환한 아침이 될 때까지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이 일어나보니까 예수님이 안 계셔서 예수님을 찾은 것입니다. 그래서 다가가보니 가까이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혼신의 마음을 쏟으며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기도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예수님이 기도를 끝내시니까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준 것처럼 ‘예수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런 크로놀로지가 되지 않겠나.. 성경은 침묵하지만 제 느낌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그런데 이렇게 예수님은 일정하지 않는 상황 속에 살면서도 정해진 시간에 주님 앞에 나아가 습관을 따라서 기도하셨습니다. 우리가 환경 탓을 많이 하는데 그리스도인의 삶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의 그런 변명이 상당히 많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자신의 글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정체를 영적인 전투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따라서 주님의 뜻을 좇아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는 사람들에게 홈그라운드가 아닙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적당히 살기 위해서는 별도로 노력해야 할 것이 없고 육체가 시키는 대로 살면 되지만, 불법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의롭게 살고, 경건하게 살고, 저마다 자기를 위하며 사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면 전쟁을 하는 군사의 심정으로 살아야 합니다. 가깝게는 자기 안에 있는 죄와, 이 세상의 풍조와, 하늘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의 궤계와 능력과 더불어 싸우며 살아야 되는 사람입니다. 어려서는 무지하고 아는 것이 없어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조금 배우고 나면 젊은 시절에는 정욕이 들끓어서 그대로 못살고, 나이가 조금 더 들어서 이제는 정욕도 죽고 지식도 쌓이게 되면 몸이 말을 안 들어서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처럼 젊었을 때 못하는 모든 것은 정신의 문제라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이것을 해야 한다고 정신을 집중하면 이틀 밤도 꼬박 세웠습니다. 최고기록이 책상 밑에 오강을 갖다놓고 에세이를 쓴 적이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드니까 지금도 하면 할 수는 있는데 22시간을 쓰면 220시간을 누워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왜 환경은 우리를 도와주지 않을까요? 언제 환경이 좋은 환경이 되겠어요? 그런 속에서 갈등을 하던 2003년도였는데 주님이 말씀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하다보면 새벽에 일어나기가 참 힘듭니다. 새벽마다 유혹을 받을 때마다 이불 속에서 ‘충성’하면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체력이 더 떨어지니까 ‘충성’할 수가 있는데 안 좋은 사건이 뒤에 일어나 병원에 실려 가면서 역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 속에 있는 인간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연약한 자들을 이해하는 마음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보면서 어느 날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예수님은 하필이면 한 열시쯤 기도를 하시면 9시에 교회에 출근해서 기도시간이 근무시간 속에 들어 갈텐데 하필이면 새벽, 그것도 미명에 그것도 캄캄할 때 기도하시고, 또 깊은 밤에 기도하셨을까? 깊은 밤에 기도하시고 새벽에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는 앞뒤로 수면을 압박해서 덜 잤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을 며칠 동안 그 이유를 규명하기 위해서 묵상도 하고 성경도 뒤지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이 새벽과 깊은 밤에 기도했다는 것은 아무 뜻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슨 뜻이 있었느냐 하면 낮에 기도하실 수 없어서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낮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고 싶어 하고 진리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고 그리고 주님의 돌보심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니 그 사람들이 돌아가 잠자서 아직 오지 않는 그 시간에 당신은 기도하심으로 당신의 마음과 영혼을 아버지께 바치고 그 은혜로 충만하게 채워지시고 그들이 깨어 나오는 시간에는 일을 시작하실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해서 앞으로 밀치고 뒤로 밀쳐서 기도 시간을 모두 잠든 깊은 밤과 아직 잠자리에서 사람들이 깨지 않는 새벽시간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주님이 우리의 섬기는 종으로 사신 사연을 우리는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환경에 핑계를 대지 마십시오. 그리고 온 마음을 다해서 어디서든지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종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니고 초창기에 교수생활을 할 때까지, 교회가 커진 다음에는 그 원칙에서 조금 물러났지만 그 목표가 세 시간이었습니다. 마음을 쏟아서 세 시간을 기도하자. 새벽에 두 시간, 밤에 한 시간이든지 아니면 밤에 두 시간, 새벽에 한 시간, 금요기도, 수요기도 그런 것말고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자 개인적으로 기도하는 시간을 마음을 쏟아서 기도하자, 힘들고 어려울 때가 많고 몸이 약할 때보다는 목회를 하다보면 마음이 상하고 힘들어서 주님 앞에 기도하기 어려울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목회는 험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시골길을 가다가 속이 뻥 뚫린 커다란 고목나무를 보았답니다. 그 목사님이 다가가 그 고목나무를 어루만지면서 말했답니다. ‘얘야 너는 목회도 안했는데 왜 속이 뻥 뚫렸느냐’라고 했답니다.
마음이 어둡고 괴로울 때 주님 예수님을 나 생각해요
머리 둘 곳조차 없으시던 혼자 기도하시던 주님 생각해요
주님을 생각하며 괴롭고 힘들 때는 사람 만나서 한 타령 하지 말고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간절히 기도해야 합니다. 얼마 안 되는 목회에 저는 체험을 해보니 목사가 강대에 엎드려 눈물을 쏟고 가슴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 그 눈물을 바닥에 스며들어서 쓴 뿌리들은 그 눈물을 머금고 스러지고 주님이 뿌린 씨앗들은 거기에서 싹이 나게 됩니다. 죠나단 에드워즈는 자기의 한 논문 속에서 이런 고백을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영광을 받으시는 장소는 주님을 전심으로 의지하는 인간의 마음 안에서입니다.’
한 목회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산다고 할 때에 그 삶의 내용과 질은 그 목회자 안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를 능가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안에 이미 이루어진 하나님나라의 질과 내용만큼만 자기 바깥에 있는 세상에서 주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갈망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이 한 곳에서 기도하셨다고 하는 이 부분을 보면서 우리는 요동치는 수많은 상황 속에서도 기도의 줄을 놓지 않으신 살 깊이 뼈 깊이 배인 주님을 묵상하고 주님께 자기 자신을 의지하는 아들의 아름다운 마음 안에서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을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 깊이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제가 안수를 받을 때 제자들 보다 늦게 안수를 받았습니다. 안수를 기다리고 있는데 목사님들이 한 사람씩 위해서 기도를 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극히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이 쓸데없는 인간을 구원해 주신 것도 감사한데 목사로 불러주셔서 이제 그리스도의 대사가 되게 해주셨으니 이 얼마나 몸 둘 바를 모르는 감사의 조건이었겠습니까? 그래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는데 제 옆에 있는 선배 목사님이 제 옆에 있는 강도사의 등을 두드리면서 ‘야 이 사람아 기도해라 좀 울어라, 오늘이 무슨 날이냐 너희가 예수 위해 죽으러 가는 날이 아니냐 그런데 니 마음에는 눈물도 안 나오냐’하며 등을 세게 때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자기가 원하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늘 기도의 은혜 속에서 살 때 영적인 순발력을 갖게 됩니다. 기도 많이 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웬만하면 매일 수학적으로 계산할 수는 없지만 세 시간 이상씩 무릎을 꿇고 유서라도 써놓고 새벽기도를 나가십시오. 김연아가 온 나라를 행복하게 하고 사람들이 피겨의 여왕이라고 하는데 그 다리를 보니까 노예였습니다. 수없이 두들겨 맞은 상처와 멍투성이였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환경을 능가하는 기도의 본을 보이셨으니 여러분도 그렇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기도하고 마치시매’라고 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에파우싸토’라고 나오는데 ‘마치시매’ 라고도 번역될 수도 잇지만 더 좋은 번역은 ‘쉬시매’입니다. 이 ‘에파우싸토’의 정확한 희브리어 동치어가 ‘샤바트’이고 여기에서 여러분들이 아는 안식일 ‘a Sabbth day’가 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단어는 곱씹어보면 예수님의 기도의 시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공중전화를 하는 것 같은 그런 간단한 기도가 아니라 이 새벽에 주님 앞에 드리는 기도는 마음을 쏟아 붓는 장시간의 기도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종종 성경과 교회의 역사에서 간단한 기도로 하늘의 큰 응답을 불러왔던 믿음의 위인들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변형된 기도이긴 하지만 귀신들을 내어 쫓고 병든 자들을 고치던 바울과 사도들의 기도, 또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하늘의 별과 달을 멎게 하던 여호수아의 기도, 같은 것들은 짧은 기도로 큰 능력을 이 땅에 불러온 대표적인 본보기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우리가 그것을 한 번 흉내 내어 보려고 하면 별로 응답되는 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한 순간이라도 심리적인 센 믿음을 가지고 ‘ㅆ’ 발음을 하면서 세게 기도하면 똑 같이 그런 이적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이 인간들을 섭리하시는 방법이 시대가 다르기 때문에 다르게 나타난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지만, 기도에 관한 더 깊은 진실은 우리에게 다음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짧은 시간에 위대한 하늘의 능력을 땅에 불러 내리는 일에 익숙했던 많은 사람들은 다른 시간에 장시간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 기도에 헌신해 오던 기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증거를 여러 가지가 있지만 하나만 여러분들에게 보여줌으로서 여러분들을 설득하고 싶습니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타락했을 때 하나님이 이 백성을 쓸어버리고 나는 가나안에 올라가지 않겠다 그러셨습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뉘우쳤고 모세는 회막을 하나 세워서 주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거기에 나아가서 기도하게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최고의 지도자였지만 밤을 세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가 근력이 약해졌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고 돌아왔지만 광야 교회의 부목사인 여호수아는 계속 남아서 그 회막에서 주님을 경외하는 자들과 함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적용을 한다면 부목사님들이 좋아할 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그렇게 여호수아는 장구한 세월 동안 기도로 단련된 사람이었기에 하늘의 달과 해를 향해 명할 때에 멈추는 기적을 응답으로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의 길이는 기도의 목표가 아닙니다. 목표는 깊이와 친밀함인데 그런 깊은 기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당한 시간의 길이가 필요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와 그 사람의 사람됨은 일치를 이룹니다. 기도가 경박하면 사람의 인격도 경박합니다. 기도가 진지하면 사람도 진지합니다. 기도 앞에 진실함이 느껴지면 그의 삶도 진실합니다. 기도가 뜨겁고 열렬하면 그는 삶 속에서도 불을 간직한 사람으로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거의 기도하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 없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그런데 오늘날 젊은 목사님들의 기도생활이 현저하게 약하고, 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40년 전의 한국교회의 기도생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뒤로 물러나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제시하는 수많은 프로그램이 주님 앞에서 마음을 쏟아 붓는 간절한 기도 말씀 앞에서 주님을 만나고 인격적으로 변화되는 신앙의 본질적인 차원들을 대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온통 뷔폐 식당처럼 수많은 class 심지어는 탁구교실, 골프교실, 꽃꽂이교실, 종이접기 교실까지 만들어놓고 원하는 대로 와서 들어라 하는 것이니 이것이 어떻게 목회가 되겠습니까? 목회의 영광은 죄인들이 교회 마당에 들끓는 것도 아니고, 목사가 훌륭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교회의 영광은 그 교회의 거룩함이고 목회의 꽃은 영혼들이 변화되어서 주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완고한 죄인이 변화되어서 주님이 세상을 사랑하듯 인간이 주님을 사랑하고, 자기밖에 모르던 인간이 이웃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를 온전히 주는 희생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어떤 영적인 역사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장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영국에를 갔더니 그 전설적인 18세기 설교자 존 웨슬레가 목회하던 교회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감리교 목사님들이 구경을 왔답니다. 그곳을 안내하던 어느 집사에게 그 목사님 중 한 분이 질문을 했답니다. ‘집사님, 웨슬레 목사님이 그렇게 전설적인 역사를 일으켰는데 그 목회의 성공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했더니 그 집사님이 목사님께 ‘목사님 제가 그 비결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하면서 교회를 Tour 한 뒤에 교회에 가서 ‘목사님, 강대에 올라가십시오. 뒤로 도십시오. 무릎을 꿇으십시오. 두 팔을 올리십시오. 고개를 묻으십시오. 이제 됐습니다. 목사님, 이제 우십시오. 그것이 웨슬레 목사님의 전설적인 복음사역의 비결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주님이신데도 장시간 기도하셨으니 여러분들도 오래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네 번째는 예수님의 기도는 감화가 있는 기도생활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어느 목사님이 계시는데 컴퓨터를 아주 잘 하는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런데 저한테 하루는 웃으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목사님, 저는 제가 사역하던 교회에서 꼭 도와달라고 연락이 옵니다. 그런데 그런 연락을 받을 때마다 기분이 그렇습니다. 제가 그 교회에서 사역하다가 갔는데 그 목사님의 설교가 그리워서 부흥회를 와달라든가, 아니면 학문의 지식이 뛰어나서 세미나에 와달라든지 해야 하는데 전화가 와서 OOO 목사님, 우리 컴퓨터가 고장이 났는데 어떻게 고치면 됩니까?’ 라고 한답니다. 저도 부끄러워서 다 말할 수 없지만 이 부분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을 합니다. 우리가 함께 사랑하던 동역자들과 함께 교회를 섬기다가 언젠가 주님의 부르심을 있어서 흩어져 헤어질 때 우리의 동역자들은 우리에 대해서 어떤 인상을 가질까요? ‘아, 아무개 목사 맛있는 것 좋아하던 먹보 쟁이, 아무개 목사 아이구 그 샌님처럼 책 보던 것 좋아하던 그 목사, 아무개 목사 영화 새 프로만 나오면 아무리 바빠도 달려가던 목사,’ 우리 교회 부목사 한 사람이 있는데 교역자 시간에 어떻게 되어 가냐고 물었더니 ‘목사님, 사역이 너무 바쁩니다. 눈 코 뜰새 없이 바쁩니다. 화장실 갈 시간이 없습니다,’ 그 날 저녁 극장에서 만났습니다. 자기 하고 싶은 것 다 합니다. 아무 말 안하고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비록 사도바울처럼 살지 못하고 한 번 설교에 수많은 사람들을 뒤흔들어 놓았던 전설적인 설교자들 같은 모습은 남기지 못했어도 ‘박목사님, 최목사님, 김목사님, 이 목사님 그 분은 나에게 한 번도 말해 주신 적은 없지만 나는 그 분을 보면서 기도가 무엇인지 배웠어. 그 분은 아무 말 없이 교회에서 나를 보고 웃으시지만 배울 때마다 아, 내가 기도를 안 하는구나 이런 느낌을 받았어’ 라고 여러분들의 제자들이 고백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작은 교회를 목회 하고 있어도 여러분들은 실패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님 앞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와서 예수님께 꼭 컴퓨터를 배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영화 프로를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패션을 물어보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맛있는 일식집을 소개받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예수님,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이 새벽 미명에 나와서 이 아침에 이르기까지 범접할 수 없는 은혜의 분위기 속에서 우리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나요?’ 거기에서 주기도문이 탄생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동역자 여러분, 특별히 여러분들은 신학의 도상위에 있습니다. 제 경험으로는 모든 지식이 사람을 교만하게 합니다. 신학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신학지식이 기도의 은혜의 물에 깊이 잠겨 질 때 그 지식이 주님을 아는 지식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양떼들에게 기도의 본을 남기는 신실한 종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