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3편 강해
(2017년 수요예배 설교)
설교기간|2017년 08월 09일 - 11월 15일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7년 12월 11일
목 차
1. 대적들이 에워쌀 때(시 3:1-3) 2017.08.09 수요예배 7
2. 성산에서 응답하심(시 3:4) 2017.10.04 수요예배 13
3. 두려워하지 않으리라(시 3:5-6) 2017.10.11 수요예배 20
4. 원수를 이기신 하나님(시 3:7) 2017.10.25 수요예배 27
5. 주의 복을 기다림(시 3:8) 2017.11.15 수요예배 34
시편 3편 강해 (2017.08.09._수요예배 1)
시편 3편 강해 (2017.10.04._수요예배 2)
시편3편 강해 (2017.10.11._수요예배 3)
시편3편 강해 (2017.10.25. 수요예배 4)
시편 3편 강해 (2017.11.15_수요예배 5)
시편3편 강해1 2017. 08. 09 수요예배
< 대적들이 에워쌀 때 >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1-3)
I. 본문해설
II. 대적들이 에워쌀 때
A. 나의 방패
B. 나의 영광
C. 머리를 드시는 분
III. 결론과 적용
시편3편 강해2 2017. 10. 04 수요예배
< 성산에서 응답하심 >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셀라)”(시 3:4)
I. 본문해설
-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할 때임
- 많은 대적에게 에워싸여 비난 받음
- 하나님께 구원받지 못할 자로 여김
- 나의 방패, 영광, 머리를 드시는 자
- 그 믿음으로 한 실천을 다짐하였음
II. 기도하기를 결심함
A. 목소리로 기도함
- 목소리의 기도는 간절함을 나타냄
- “내가 나의∼” 중보기도+자기기도
- 스스로 기도함으로 그를 깨우치심
- 떨치고 일어나 기도로 나아가라!
B. 여호와께 기도함
- 기도의 대상이 여호와였다는 사실
- 언약의 당사자이신 하나님께 기도
- 하나님에 대한 앎이 기도를 결정함
- 여호와의 성품을 믿으며 기도하라
- 그리스도를 통해 중보하신 하나님
C. 부르짖어 기도함
- 묵상기도는 인격적인 관계의 즐김
- 부르짖는 기도는 상황의 절박함임
- 억제할 수 없는 마음의 정의 차오름
- 위기 속에는 차오르는 정동들 있음
- 그것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는 믿음
- 살만하면 기도하지 않기에 이끄심
- 마음의 초점 모으고 간절히 기도함
D. 응답하신 하나님
- 성산은 언약궤가 있었던 시온산임
- 거룩한 산지로서 하나님 임재 상징
- 이스라엘 백성들의 성전 신앙 보임
- 삶의 모든 문제를 성전과 관련지음
- 그리스도만을 바라보고 살 것 예표
- 인생엔 문제 있으나 해답은 주님께
-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며 살아가라
III. 적용과 결론
- 우리가 어려울 때 기도하기 바라심
- 우리와 언약 맺으신 하나님 바라라
- 우리가 간절히 기도하기를 바라심
- 우리에게 응답하심을 믿으라!
시편3편 강해3 2017. 10. 11 수요예배
<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시3:5-6)
I. 본문해설
- 많은 대적들에 에워싸여 탄식함
- 저주와 비난을 퍼붓는 대적들임
- but, 그 상황에서 하나님을 경험함
- 간절한 기도로 그것이 가능케 됨
II. 두려워하지 않음
A. 천만인이 에워싸 진 침
- 원수의 수가 많고 강하였음
- 그들의 공격이 조직적이었음
-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을 때
- 신앙보다 이성의 판단이 쉬움
- but, 한 가지 희망이 있었음
B. 여호와가 날 붙드실 때
- 누워 자고 깨어남은 일상생활임
- 일상의 삶에서 은총의 기적을 봄
- 삶의 주권을 하나님께 맡긴 믿음
- 신자는 살아 있는 한 희망이 있음
-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날 붙드심
a.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b.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
c. 나와 관계있는 하나님
III. 적용과 결론
- 나의 목소리로 부르짖을 때임
- 주님은 성산에서 응답하신다
- 모든 평안이 주님께로부터 온다
시편3편 강해4 2017. 10. 25 수요예배
< 원수를 이기신 하나님 >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시 3:7)
I. 본문해설
- 시련과 고난 속에서 감사를 배웠음
- “누워 자고 깨었으니…” 붙드신 주
- 주님과의 교제: 두려워하지 않게 됨
- 시련 속에서 평강을 잃지 않는 믿음
- 하나님께 대한 회고와 간구를 드림
II. 하나님에 대한 회고
- 시련 속에서 주님의 역사를 회고함
- 악인을 어떻게 다루셨는지 생각함
A. 원수의 뺨을 치심
-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 lehi “턱뼈”…대적의 수치를 표현
a. 시드기야: 미가야의 뺨
“그나아나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나” 왕상(22:24)
b. 모욕 받는 욥의 탄식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여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욥(16:10)
- 악인에게 고통 받을 때 원수 갚지 말라
- 하나님이 신원하사 정당히 갚으심
- 고난 중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생각함
- 많은 인내와 묵상 속에서 성숙해짐
- 악인에 대한 증오 아닌 주의 뜻을 바람
B. 악인의 이를 꺾으심
- “이빨”은 짐승의 중요한 공격 수단
- 물어뜯음: 육체적+정신적 공격
- “이빨 빠진 호랑이” 공격 수단 상실
- 나를 해치려는 악인의 도모를 막아줌
- 고통 중에 주님보다 악인 주목 말라
- 악인이 더 크게 보이는 것은 잘못임
이글거리는 복수심은 무가치한 것
때로는 악을 겪으나 주님을 의지함
III. 하나님을 향한 간구
- a “일어나소서”+ b “구원하소서”
- a. 의미 있는 일의 시작을 의미함
- “일어남”과 앉음“은 일과 쉼 뜻함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하나님
- 이것은 인간적인 화법을 적용한 것
- 언제나 일하시지만 그것을 자각함
이러한 간구는 자신을 일깨우는 것
“구원하소서” 고통의 해방만이 아님
구원의 상태: 주님과의 화목+안녕
평안히 하나님을 향해 살게 해 주소서
Ⅳ. 적용과 결론
-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 회고함
- “악인의 뺨을 치심+이빨을 꺾으심”
-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주님을 의지함
섭리 속에서 주님 의지할 것을 배움
- 구원의 상태를 사모해 간구하라!
시편3편 강해5 2017. 11. 15 (수요예배)
< 주의 복을 기다림 >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셀라)” (시3:8)
I. 본문해설
- 시련과 고난 중 하나님의 성품을 배움
- 방패, 영광, 머리 드는 분임을 깨달음
- 자고 깨는 것이 은혜임을 알게 되었음
- 원수들에게 겁내지 않는 담대함을 가짐
- 구원 갈망하며 악인들 다스림을 구함
- 마지막으로 고백과 간구로 끝맺음
II. 여호와를 의지함
A. 여호와께 대한 고백
- 하나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되었음
주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게 함
- 구원의 목표는 번영 아닌 샬롬의 삶
- 샬롬의 생활 전적으로 주님께 있음
- 악인의 대적으로 샬롬이 위협 받음
- 우리 삶의 평온한 질서가 주께 있음
- 고통과 시련을 통해 그 소중함을 앎
- 때로는 시련이 소중한 것을 알게 해 줌
- “구원” 이뤄지고 난 상태는 어떨까?
- 하나님 이웃과 올바른 관계로 생활하는 것
B. 주의 복을 구함
- birkateka “복을 당신 백성 위에…”
- beraka 영혼과 육체를 아우르는 복
- beraka와 asher: 내포와 외연 관계
- 고통 받고 있는 시련의 상태 보여줌
- 언약의 하나님은 복 주시길 기뻐하심
- 언약관계를 따라 살아갈 것 요구하심
- 시련 속에서 기억하라
a. 하나님의 선하심
b. 말씀으로 인도하심
- 말씀이 하나님과 나를 보여 준다
- 믿음/사랑/행함의 순서로 작용
- 믿음은 지극히 주관적으로 작용
- 그래서 인간에게 진리의 빛 필요
- 진리는 참으로 믿을 것을 보여줌
- 온갖 표상에 이끌리는 믿음 파쇄
- 말씀에 이끌리는 믿음을 강화함
- 그로써 참된 삶의 사랑과 지식 줌
III. 적용과 결론
- 하나님의 구원을 다시 갈망하라
- 망망한 바다에 길 잃었음을 생각하라
- 먼저 항해를 멈추고 별자리를 본다
- 해도와 컴파스, 분도기와 자를 찾음
- 시련 속에서 방황치 말고 돌아오라
시편 3편 강해 (2017.08.09._수요예배 1)
시편 3편 강해 (2017.08.09._수요예배 1)
시편 3편 강해 (2017.10.04._수요예배 2)
시편3편 강해 (2017.10.11._수요예배 3)
시편3편 강해 (2017.10.25. 수요예배 4)
시편 3편 강해 (2017.11.15_수요예배 5)
1. 대적들이 에워쌀 때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으니이다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셀라)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시 3:1-3)
녹취자: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시편 3편은 의심할 여지없이 다윗의 시입니다. 그리고 표제에 보면 그의 아들 ‘압살롬을 피할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틀림없이 아들 압살롬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다윗이 도망갔던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가 다윗이 도망하던 바로 그 때에 쓰인 것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반란이 평정된 후 그때를 회상하면서 기록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이 시는 다윗 개인의 시가 아니었습니다. 온 공동체가 이 시를 함께 낭송하며 다윗 개인의 경험을 공동체에 투사해서 어려운 일을 당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신뢰하도록 만들어 주는 시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시편 3편은 역사적으로 다윗이 압살롬에 의해 반역을 당하였던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사무엘하 15, 16장은 어떻게 압살롬이 반역을 행하게 되었는지를 상세히 기록합니다. 아마 다윗의 아들 중 가장 영특한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반란을 준비했습니다. 무기들을 수집하고 은밀히 다윗의 수하에 있던 장군들을 포섭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반란에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더 큰 해결책은 백성들의 마음이 아버지로부터 이반(離反)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인자한 사람인척 하며 성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소송을 하러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그 지파가 어디인지, 무슨 일로 소송하는지 상세히 물으면서 그의 편을 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버지의 잘못된 통치를 은근히 헐뜯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하 15, 16장을 보면 압살롬의 노력의 결과로 많은 백성들의 마음이 압살롬에게로 가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등지게 되었지만, 다윗은 그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예측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자신의 아들을 그렇게까지 악한 사람이라고는 보지 않았던 것입니다. 때가 되자 반란은 본격적으로 일어났고 왕궁이 기습당했습니다. 그는 맨발로 재를 뒤집어쓰며 황망히 도망 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법궤도 내버려둔 채 그는 도망을 갔습니다. 아마 그때의 광경이 여기에 그대로 놓여 있을 것입니다.
Ⅱ. 대적들이 에워쌀 때
“많은 사람이 나를 대적하여 말하기를 그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하나이다.” 라고 하는 2절의 말씀은 실제로 다윗이 도망갈 때 시므이의 저주 속에 나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무엘하 16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 사울의 족속의 모든 피를 여호와께서 네게로 돌리셨도다. 그를 이어서 네가 왕이 되었으나 여호와께서 나라를 네 아들 압살롬 손에 넘기셨도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이므로 화를 자초하였느니라 하는지라.”고 비난하였습니다. 사실 성경을 면밀히 보아도 다윗이 무슨 일로 백성들의 마음을 아프게 해서 이렇게 순식간에 수많은 대적들이 생겨나게 되었는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확실한 사실 하나는 부왕 다윗과 백성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압살롬과 그 일당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무엇에 씌운 사람들처럼 그렇게 한 나라의 왕으로 존경하고 신뢰하던 다윗을 등지고, 깜냥도 되지 않고 선하지도 않은 압살롬을 왕으로 삼겠다고 반란에 가담하였던 것입니다.
넓게 보면 하나님의 큰 섭리 속에서 하나님이 이 다윗을 연단하기 위해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비난이 사실이었겠습니까? 하나님이 진실로 다윗을 바라보시면서 “너는 사울의 집안의 피를 흘린 잔인한 사람이다.”라고 그러셨겠습니까? 다윗은 왕이 되고자 하는 욕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양 떼를 치고 하나님을 찬송하며 살던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물과 같은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다윗의 변명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왕 위를 빼앗기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속에서 사랑하는 아들을 지워버려야 하는 뼈저린 아픔을 당하면서도 다윗은 이 모든 문제를 사람들의 멱살을 붙들고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다윗의 믿음이었습니다.
자, 그러면 대적들이 다윗을 에워싸고 있을 때 도대체 그의 믿음은 무엇이었겠습니까?
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라고 말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방패, 영광,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부르기 전에 먼저 그 하나님에 대한 호칭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조용히 하늘에 계신 그분의 존함을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야훼’ ‘여호와’였습니다. 계시된 하나님의 여러 이름 중 ‘야훼’ 혹은 ‘여호와’라는 이 존함은 가장 거룩한 이름이고 하나님의 본명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이 본명을 차마 부르지 못하였습니다.
‘여호와’라고 하는 하나님의 존함은 철저히 언약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온 땅과 하늘 위에 높고 위대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을 때는 ‘하나님’을 불렀지만, 우리와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관계에 있는 하나님을 강조하고 싶을 때에는 하나님의 이 존함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니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고백하기 전에 하늘에 계신 그 분을 ‘여호와’라고 부르는 이것은 바로 이 다윗이 시련과 고난을 당하고, 대적에 에워 쌓일 때 그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던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눈 앞에 펼쳐지는 현실을 우리는 보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때로는 기쁨을, 때로는 분노를, 때로는 가슴 아픈 느낌을, 때로는 즐거운 느낌을 가져다줍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그렇게 가져다주는 모든 환경들을 보면서 마음이 출렁거린다면 우리는 결코 굳센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환경 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너무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자만하기까지 그리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기까지 기뻐하지 말고, 분노할만한 일이 있어도 혈기가 솟구치기까지 분노해서는 안 됩니다. 가슴 아픈 일이 있어도 희망이 끊어진 것처럼 가슴 아파해서도 안 되고, 즐거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 보다 더 즐거워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가장 쓰라린 시련과 환란의 날에 그는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상황을 바라보는 대신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자신과 어떤 언약을 맺으셨는지, 그 언약 관계 안에서 여호와는 얼마나 신실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오셨는지를 묵상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마음 깊은 곳에서 환경을 이길 수 있는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A. 나의 방패
첫 번째가 “주는 나의 방패이십니다.”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은 첨단 무기로 전쟁을 하는 시기이니 이제 방패가 쓸모가 없습니다. 포탄이 45cm 두께의 쇠를 뚫고 터질 정도이니까 무슨 방패로 그러한 것을 막아내겠습니까? 그러나 그 당시는 원거리에서 자기의 생명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살상 무기는 화살이었습니다. 어디서 쏘는 지도 모른 채 비가 오듯 화살이 쏟아질 때 목숨을 구하는 길은 큰 방패 뒤에 탁 붙어서 숨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쓰던 방패는 꽤 큰 방패였습니다. 그 방패 뒤에 몸을 움츠리고 숨으면 비 오듯 화살이 쏟아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 고백을 하고 있는 다윗은 일평생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 속에서 그 방패가 얼마나 요긴한 방어물인지를 알았습니다.
저는 이 3절을 읽을 때마다 그러한 그림이 그려집니다. 다윗이 전쟁터에서 하늘에서 새카맣게 비 오듯 쏟아지는 화살을 봅니다. 한방만 맞아도 절명을 할 그 때에 그는 방패 뒤에 숨습니다. 진실로 사울을 해치고자 한 적도 없었고 사울이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죽는 날까지 그를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대우했는데도 한 때 자신을 너무 따르고 존경하고 사랑하던 백성들이 ‘피를 많이 흘린 자’라고 욕을 하였고 ‘네가 사울의 집에 행하던 그대로 하나님이 너에게 복수하실 것이다’라는 악담을 퍼 부었습니다. 한 두 사람이 아니라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입을 열면 피 묻은 독설들을 쏟아 내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마치 화살처럼 하늘이 새까맣게 되도록 다윗에 날아왔습니다. 그는 그 화살을 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추적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추적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다윗을 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그는 조용히 방패이신 주님 뒤에 숨었습니다.
(찬양)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라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리라
그 방패 뒤에 숨었습니다. 그 방패 뒤에서 웃고 까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눈물을 흘리며 ‘아닙니다, 하나님. 나는 사울에게 악을 행하지 않았습니다.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를 내가 모욕하지 않은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그는 조용히 하나님께 호소하며 방패 뒤에 숨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쏟아지는 화살 앞에서 그는 욕지거리를 하면서 화살에 맞아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온전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살인도 하고 간음도 하였습니다. 불순종도 하였고 주님의 백성에게 커다란 누를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받고 있는 이 비난은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조용히 벙어리가 되기로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조용히 방패이신 주님 뒤에 숨었습니다. 그 어릴 때 목동시절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는지를 생각했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다 할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으리만치 자신을 지켜주셨던 주님을 생각하였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B. 나의 영광
두 번째, ‘주님은 나의 영광이시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영광’은 그 어떤 것을 가지고 있음으로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좀 더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도록 만드는 어떠한 효과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것은 어린아이처럼 단순한 고백입니다. “하나님, 내가 다윗입니다. 내 영광이 무엇입니까? 당신이 나의 영광입니다. 나의 영광은 이 나라의 왕위가 아닙니다. 나의 영광은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모아둔 어마어마한 금이나 은, 칼과 무기가 아닙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무엇인가 좀 더 나은 것이 있다면, 다른 사람보다 좀 더 중요하게 생각되는 무엇이 있다면 그것은 내가 주님과 붙들고 있는 관계 때문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다윗은 언제 이 고백을 하였습니까? 주님 때문에 황금마차를 타고 금 사슬을 두를 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때에 이런 고백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도 만약에 수많은 사람에게 박수와 갈채를 받고 영광을 받을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립니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는 신앙적인 예의를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 고백을 언제 하였습니까? 말도 되지 않는 비난이 화살처럼 쏟아 부어지는 것 같은 상황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자신의 새끼 같은 백성들이 자신에게서 모두 돌아서고 천하의 악한 인간들을 우두머리 삼아 자신들의 지도자로 따르면서 거지 떼처럼 몰려다니며 핍박함으로 도망치듯 타국으로 망명의 길을 떠나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니 무슨 얼어 죽을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시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주님과의 관계를 끊고, 주님이 나를 버리시면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인간, 부끄러운 인간이 될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영광은 주님이 주신 것입니다. 인격적이고 신앙적이고 영적인 내면의 것이든, 눈 밖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이든 무엇이든지 간에 그 모든 영광은 주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영광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영광을 버리고 수치스러운 자가 되기를 즐겨할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시인은 가장 고난 받는 그때, 자신의 영광이 오직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래야 합니다. 원수들에게 에워 쌓이고 비난과 욕설을 화살처럼 받으며 방패이신 주님 뒤에 눈물을 흘리며 피했을 그 상황은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때였습니다. 그때에 다윗은 “주는 나의 영광이십니다”라고 노래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 때문에 내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 때문이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주님을 결코 놓을 수가 없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모든 성도는 주님의 사랑을 받지만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카페트 위를 걸어가는 인생을 살아가도록 만드시지는 않습니다. 푹신푹신한 골프장 잔디밭을 걸어가는 것처럼 일평생을 걸어가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때로는 폭풍이 이는 바다에 홀로 버려두십니다. 사막의 길을 걷게 만드시고 돌멩이로 가득 찬 험한 길을 눈물을 흘리며 걷게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풍파 많은 세상을 살면서 오직 주님 밖에는 자신이 의지할 바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서, 그 주님을 놓고는 절대로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그러한 시련과 고난의 길을 걷게 하십니다. 시인은 가장 수치스러운 때에 비 오듯 쏟아지는 그 욕설과 비난의 화살을 피하여 방패 뒤에 숨으며 눈물로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나의 영광이십니다. 저는 주님을 놓을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록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지만, 주님은 나의 영광이십니다.’ 여러분도 이렇게 고백하는 믿음을 가지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C. 머리를 드시는 분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 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왕에게 머리를 숙일 때 두 가지 경우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죄를 지어서 왕의 용서를 구할 때, 두 번째는 너무나 간절히 왕에게 무엇을 간구하며 은덕을 입기를 원할 때에 왕에게 머리를 조아립니다. 시인은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왕들의 역사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뜻대로 산 왕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역대 왕들 가운데 잘 산 왕이 있으면 ‘그는 다윗의 길로 행하였더라’고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허물과 흠이 있고 때로는 끔찍한 죄를 짓기도 하였지만 다윗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볼 때 그는 하나님에게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이 되었을 때에도 항상 자신이 가난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 자주 고백했습니다. 무엇인가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기 원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다윗은 이 큰 시련을 만나며 자신이 그동안 하나님 앞에 지었던 죄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데 하나님께 자신만만하게 ‘당신은 나를 도와주실 의무가 있습니다’라고 할 처지는 안 되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죄에 대한 양심의 깊은 찔림과 후회가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도우심 없이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처지임을 자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조건 주님께 성은을 베풀어 달라고 빌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에게 죄를 지어 두려워 떨면서 어떠한 무시무시한 벌이 내릴까 불안했던 사람에게 왕이 자애로운 음성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죄인은 고개를 들라.” 이것은 무엇인가 은총이 내릴 징조입니다. 도와달라고 왕에게 눈물로 호소하며 땅에 엎드려 있는데 왕의 음성이 부드러워지면서 “그대는 고개를 들고 짐을 쳐다 보거라.”라고 합니다. 이는 응답이 주어질 표시입니다. 다윗은 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신하이기도 하였습니다. 왕 앞에 머리를 조아려 본 적도 있고, 자애로운 군주로 일생을 살면서 여러 번 “죄인은 고개를 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이 시인은 바로 이런 광경을 생각하면서 “주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시니이다.”라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원수들의 쏟아지는 비난 앞에 벙어리가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방패이신 주님 뒤에 숨어 ‘주님을 나의 영광’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언젠가 하나님이 나의 처지를 헤아리실 것이고, 나의 흘리는 눈물과 탄원을 신원하여 주실 것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언젠가 주님이 자신의 머리를 들게 하셔서 “죄인은 고개를 들라. 나는 너의 많은 죄를 용서하였노라. 그대는 고개를 들라. 내가 그대의 간청을 허락하노라.”라고 말씀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는 이러한 주님의 음성이 들리리라는 사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나의 머리가 되시는 분이십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3편 강해 (2017.10.04._수요예배 2)
이것이 바로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하나님을 붙들고 사는 당신의 자녀들이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 쌓였을 때에 인생을 지나는 방법입니다. 주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분이고, 주님은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시비를 가리실 것이며, 주님은 반드시 나를 긍휼히 여기실 분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수시로 솟아나오는 사람을 향한 미움과 끓어오르는 분노는 상대방을 파괴하기 전에 자기 자신을 먼저 파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바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깨달은 사람이었습니다. 다윗과 똑같은 상황을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민수기 12장에서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반역을 하였고 심지어 아론과 미리암이 주동자가 되었습니다. 비난을 받을 때에 그의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그의 온유함이 지면에 뛰어났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는 알았습니다. 그렇게 악의적인 비난과 악한 말들이 난무할 때 마음을 분노로 끓어오르게 허락하는 것은 자신이 죽는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가 그렇게 온유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모세의 기질이 워낙 온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생사 간에 자기를 여기까지 이끄신 그 주님을 믿는 믿음이, 긍휼의 뛰어나신 하나님의 성품을 신뢰하는 그 신앙이 그를 붙들었기 때문입니다.
시인 다윗도 동일하게 그러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십니다. 내가 주님의 주권 아래 조용히 굴복하고 주님을 의지하며 이 시련과 고난의 때를 믿음으로 지난다면 주님이 나의 수치를 벗겨 주시고 내 머리를 들게 하실 것입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시련과 고난을 만난 것이 우리의 영혼을 파괴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또 다른 죄를 짓도록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언제나 당신을 의지하며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십니다. 그리고 그 주님이 그 피난처에 쉬게 하시면서 우리를 당신의 공의로 건지십니다. 그래서 다윗은 또 다른 시에서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합니다.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옵시고 당신의 공의로 나를 건져주시옵소서.”라고 말입니다.
Ⅲ.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런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때로는 원수들이 우리를 에워 쌀 때가 있습니다. 양심은 끊임없이 매질하고,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송사하는 일이 생겨납니다. ‘너는 악한 자요, 하나님의 은총을 입을 수 없는 자요, 지금 하나님은 진노로써 너에게 복수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함성을 내면에서 듣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행실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셔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을 우리의 방패삼아야 합니다. 그분 뒤에 피해야 합니다. 그분이 그 모든 것을 막아주십니다.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는 피난처이십니다. 거기에서 주님이 자신의 영광이라고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이 가장 적합하게 여기시는 때에 주님이 나의 머리를 드실 것이고, 오늘의 수치를 벗겨 영광으로 바꿔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의지하며 살 때 우리의 마음속에 의심의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하고 가까이 하기에 너무 멀리 계셨던 그분이 내 마음 속에 와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으며 살아가는,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아는 신앙의 비밀입니다. 이 비밀을 꼭 붙들고 시련의 때에 예수와 동행해서 이기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성산에서 응답하심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시 3:4)
녹취자: 조경훈
I. 본문 해설
이 시는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을 피할 때에 지은 시입니다. 시인은 많은 대적에게 에워 쌓여 비난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 가슴 아팠던 것은 그런 상황에서 신앙이 있다고 자부하는 어떤 사람들은 이 시인이 이렇게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징벌을 내리시는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그는 여호와께 구원을 받지 못한 자라고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이 때 우리의 시인은 하나님을 조용히 우러러 보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어떤 분인지를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방패, 나의 영광, 내 머리를 드시는 자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이는 그 시련 속에서 자기를 보호해 주실 분이 하나님 한 분이며 자신의 삶에 모든 명예가 그분께 있으며 또한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서 자신이 올바르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셔서 부끄러움을 면하게 하실 분이 하나님 한 분이시라고 하는 고백이었습니다.
II. 기도하기를 결심함
이어서 시인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리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뒤에 나오는 셀라는 음악적인 부호이기 때문에 읽지 않습니다. 그는 이렇게 어찌할 수 없는 비참한 상황 속에서 한 가지를 깊이 결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기도하기를 결단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네 가지를 말하였습니다.
A. 목소리로 기도함
첫째는 자신의 목소리로 하나님께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나의 목소리로 기도하겠다.” 라는 표현은 시편에서 여러 번 등장합니다.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간절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내가 나의 목소리로 부르짖으리니 라고 말입니다.
신앙생활을 해 본 많은 사람들은 중보기도의 능력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해 우리가 대신 기도해 주는 섬김기도의 능력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놀라운 능력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주는 사람이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어버이날이 되면 늘 어김없이 흘리는 눈물이 있습니다. 한 편으로는 제가 우리 부모님들에게 잘 못 해드렸다고 하는 부끄러움의 눈물과 또 한편으로는 제가 그렇게 어린 시절에 삶과 죽음을 오가며 방황하고 몇 번을 죽을 결심을 하면서 청소년 시절을 통과했지만 우리 부모 중 아무도 저를 위해 하나님께 빌어주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야 다시 없겠지만 만약 다시 한 번 태어나는 것이 허락된다면 제게는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부잣집에 태어나거나 권력자의 집안에 태어나서 금수저를 입에 무는 것이 아니라 제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님들이 살아있는 날 동안에 저를 진심으로 사랑해 주고 저를 위해 눈물로 기도해 주는 엄마 아빠가 있는 가정에서 태어나고 싶었습니다. 왜냐하면 살면서 그러한 섬김기도의 큰 능력을 너무나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화) 제가 언제 한번 말씀드렸었는데 신학교에 선생을 할 때에 학생 한 명이 강의가 끝나면 늘 찾아와서 감화를 받았다고 말하면서 꼭 한번 식사 대접을 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 얼굴을 보면 밥을 같이 먹고 싶지 않았습니다. 얼굴에 깊은 칼자국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식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 학생은 먹지도 않고 저 혼자 음식을 시켜주고 본인은 건너편에서 저를 쳐다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왜 같이 식사를 안 하냐고 물었더니 교수님을 뵈올 기회가 없어서 자기가 더 뵙고 말하고 싶어서 음식을 안 시켰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초밥을 한 개씩 먹고 있는데 이분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유명하게 알려진 조직폭력배의 보스 중에 김태촌 이라고 있었는데 지금은 죽은 그 사람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그들과 함께 다투다가 세력에서 밀려나게 되어 결국 서울로 올라왔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에 빠칭꼬 업점을 돌면서 돈을 수거하고 있었답니다. 그때부터 저는 빠칭꼬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당히 많은 돈을 수거해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술을 진탕 먹고 돌아가는 길에 집골목을 지나가는데 불현 듯 교회에 가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들어가려고 교회 문을 여는데 열려있어서 교회 문을 들어가자마자 벼락을 맞은 것처럼 고꾸라졌습니다. 코와 입에서 피가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그는 술이 취했는데도 거기서 데굴데굴 구르며 회개하고 옛 생활을 청산하고 신학교에 들어온 것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평생을 기도하는 분이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능력입니다. 중보기도는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기도이기 때문에 신학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사람을 위한 중재의 기도입니다. 그것을 충분히 인정하고 저도 어버이날이면 그런 부모님을 생각하며 눈물이 흐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여러 곳에서 다른 사람이 날 위해 기도해 주는 섬김기도가 본인이 기도할 필요성을 없이 하지는 못합니다. 더 쉽게 얘기하면 본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시인은 한동안 평안한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천하의 다윗이지만 그 시로 말하자면 거룩한 예수의 자손이 아니라 죄인인 아담의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부패한 인간입니다. 죄와 사탄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겠습니까? 마음에 어둠이 쌓이고 무엇인가 하나님을 우러러보게 하지 못하는 무엇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너무 사랑하시기 때문에 한 번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아서 하나님이 그에게 예언하신바 나의 모든 뜻을 이루게 하리라고 하는 그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다윗의 심령이 갱신되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런 큰 시련을 한 번 주시는 것입니다. 아들이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이었기 때문에 다윗은 대비 같은 것을 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황망하게 남의 나라 땅으로 도망을 치면서 망명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 속에서 자기를 어버이처럼 따르던 백성들이 욕을 하고 침을 뱉고 흙을 던지며 자기를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시련을 통해서 다윗으로 하여금 자기 스스로 기도하도록 깨우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부모의 기도 아들의 기도 남편이나 아내의 기도 너무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하나님의 보좌 앞에 나아가 기도하기를 원하시는 분이니 여러분도 자신의 목소리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B. 여호와께 기도함
두 번째는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내가 나의 목소리로 부르짖으리니 라고 말합니다. 기도의 대상이 여호와였습니다. 여호와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계시해 주신 언약의 당사자의 성함이었습니다. 이 여호와라는 말은 곧 하나님의 백성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변함없으신 인자와 선하심으로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임을 계시해 줍니다. 그들이 기도한 것은 막연한 신이 아니라 자신들과 언약관계를 맺으신 그 주님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기도하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본다고 칩시다. 젊은 처자가 상대방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무엇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는데 선보러 나가겠습니까? 누가 그 사람에 대해서 그럴듯하게 설명을 해주면 비로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래? 그렇게 멋있데? 그렇게 사람이 성품이 괜찮데? 그렇게 좋은 직장에 다닌데? 그렇게 신앙이 뛰어나데? 그러면 한 번 만나볼까?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것만큼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은 개인의 결심도 물론 중요하지만 매일매일 말씀의 은혜를 받으며 내가 기도를 올려야 할 그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될 때에 우리는 그 기도생활을 계속하기에 아주 좋은 위치에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성품을 깨달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여러분들의 기도를 들으시는 여호와가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C. 부르짖어 기도함
세 번째는 부르짖어 기도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리니. 히브리어로 하더라도 똑같이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를 질러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가지 기도방법만을 우리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서서하는 기도 앉아서 하는 기도 엎드려 드리는 기도 부르짖는 기도 침묵하는 기도 읊조리는 기도 많은 기도방법을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그 중에서 어느 것이 우월한 기도라고 성경은 못 박지 않습니다. 그러나 차이는 있습니다. 묵상하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관계를 고요히 즐기는 기도이지만 부르짖는 기도는 그 마음에 절박함을 표현하는 기도입니다. 인간은 시련을 만날 때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그 시련이 매우 커고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동반할 때에 마음에는 수많은 정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마음이 출렁거리며 두려움 슬픔 공포 분노 염려 기대 이런 것들이 모두 섞여서 마음을 잠시도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우리가 놀이기구 하나만 타도 가슴이 시린 것 같고 주저앉는 것 같으면서 가슴이 움직이는데, 하물며 실제 우리의 삶이 그렇게 출렁거리고 이제껏 경험해 보지 못한 커다란 변화를 동반할 때 어떻게 우리의 마음이 출렁거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특히 깊은 위기 속에는 마음에 차오르는 아주 독특한 정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그때는 한편으로는 기회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위기이기도 합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풍랑이 이는 바다에서 베드로에게 물 위를 걸어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걷는 동안에는 그도 예수님처럼 걸을 수 있었지만 출렁거리는 파도를 보며 두려움에 사로 잡혔을 때에 그는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믿음과 의심 평안과 불안 기대와 공포 이런 것들이 대부분 함께 섞여있는 상태에서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은 의심과 공존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믿음과 의심 소망과 두려움 투지와 포기 이런 것들이 종이 한 장 사이처럼 우리마음에 겹겹이 쌓여있습니다. 매순간 우리가 주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위기 속에서 자신의 요동치는 마음을 묶는 것은 신자의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릇 지킬만한 모든 것보다 너희 마음을 지키라고 말입니다. 특히 입술을 조심하라고 하는 이유는 말이 마음에 생각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요동치는 정동들을 믿음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래서 종종 우리 인생에 너무 기막힌 일이 일어나고 너무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날 때에는 우리 자신의 인생을 마치 제 삼자의 인생을 보는 것처럼 삶에 소용돌이 한 복판에서 빠져 나와서 우리 자신의 인생을 3자적 입장에서 관조하는 것처럼 봐야 할 때도 있습니다. 오히려 그때 놀라운 지혜가 생겨납니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보다는 모든 것을 잃어버려도 내게 주님만 있으면 나는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질 때 요동치고 두려움과 공포 속에 흔들리던 마음은 잔잔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바로 빌립보서에서 말한 모든 지각 위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 속에서 초점을 모으는 것입니다. 햇빛은 늘 있지만 언제나 퍼집니다. 하나의 렌즈에 그 빛을 모으면 놀라운 열을 냅니다. 종이도 태우고 나무도 태우며 심지어 쇠도 녹입니다. 이것이 바로 집중입니다.
여기서 부르짖어 기도하는 이 부르짖음은 그렇게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고정되고 집중된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 시련과 고난 속에서 가고자 하는 길이 분명하게 있어서 그리로 가게 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비는 것입니다. 오늘날 모래알처럼 많은 그리스도인들 중에 진정으로 기도의 능력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소수라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다이내믹한 삶이 얼마나 놀라운지 그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너무나 소수이기 때문에 아주 소수의 사람만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존 오웬 목사님은 신자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동행하는 삶의 요소는 두 가지인데 하나님에 영광을 갈망하며 사는 것과 하나님과의 온전한 평화를 누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스페포드라고 하는 목사는 사랑하는 가족들을 태평양에서 조난사고로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견딜 수 없는 슬픔 속에서 가족들이 자신과 작별했던 그 드넓은 바다를 배를 타고 지나가며 불러도 대답 없는 가족들의 이름을 목 놓아 불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모든 지각에 뛰어난 놀라운 평화를 그에게 주었습니다.
(찬양)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해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모두 그냥 놀다가 받은 것이 아닙니다. 간절히 주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신 평안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환란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 어떤 것도 흔들어 놓을 수 없는 그 평안은 바로 이러한 간절한 부르짖음 끝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큰 믿음의 사람도 때로는 작은 환란에 마음이 흔들리고 무너져 두려움이 음습할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으라고 하는 표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렇게 주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빕니다.
D. 응답하시는 하나님
마지막 네 번째는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 도다.” 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여기서 성산은 거룩한 산입니다. 예루살렘을 에워싸고 있는 산지 시온산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기에는 바로 언약궤가 있었습니다. 시온은 하나님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특별히 임재하시는 장소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거룩한 성 시온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지시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모든 희망이 성전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이 지어지기 전에는 성막을 향하여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갈 때에 광야를 지나야 했습니다. 제일 먼저 성막이 자리를 잡으면 열두 지파가 그 성막을 중심으로 에워싸며 원형으로 진을 쳤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삶의 모든 문제를 성전과 연관지어서 생각했고 개인적인 일이든지 국가적인 일이든지 명예에 관한 일이든지 심지어는 아주 작은 신상에 관한 문제라도 그것을 하나님 앞에 토하고자 할 때에는 그 성소로 올라오거나 혹은 그 성소를 향해 하나님께 빌었습니다.
바로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한 것이었고 예수 자신이 바로 당신 자신을 성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성전이 무너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성전인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서 허무시고 보이지 않는 성전을 지어셨으니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교회의 탄생입니다. 진정한 교회는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모든 믿는 자들의 연합입니다. 이는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연합을 구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인류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보좌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들을 위해서 흘리신 그 보혈의 공로를 힘입어 하나님의 임재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자신들은 불결하고 더럽고 아무리 하나님 앞에 많은 의를 행했어도 그것으로서 주님의 임재 앞에 나아가지 않습니다. 세상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뇌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살 수 없으며 하나님이 모든 권력의 권원이시기에 세상의 권력으로 우리 주님을 겁박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불결하고 더러운 우리들이 당신 앞으로 나아오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의의 신발을 벗고 나 자신의 의의 옷을 벗고 주님이 입혀주시는 의의 옷을 입고 보좌를 향해 난 그리스도의 피 뿌리신 그 길을 걸어 보혈을 지나 하나님의 보좌 앞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나 거기 계셔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죄인이었기 때문에 기도를 거절하시거나 쌓은 공로가 모자라기 때문에 기도를 외면하시는 법은 없습니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하나님에 대해 잘못 가리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주님은 죄인들의 친구이시고 버림받은 자들의 이웃이십니다. 문제는 우리의 의로움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부족입니다. 그분이 나를 위해 흘리신 보혈 그분이 나를 위해 죽으신 십자가의 고난 그분이 흘리신 모든 보혈 이것이 나를 깨끗케 하여 그분 앞에 나아가게 한다는 믿음의 부족입니다. 그러나 그 믿음으로 나아오는 모든 사람들의 기도를 주님은 들으십니다. 그 기도를 들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우리에게 당신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간구하고 부르짖은 믿음이 허공을 치는 것과 같은 믿음이 아니요 하나님의 마음에 담긴 기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랑을 받으며 사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행복한 사람입니까? 오늘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분이 거기 계시다는 것 그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입니까? 우리 신자는 그래서 외롭지 않습니다. 우리는 결코 절망이라는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언제나 우리에게는 기도라는 해독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간절히 기도하며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당신께 기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당신의 따뜻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사랑의 인격을 전달받게 하십니다. 그 인격적인 교제 속에서 우리는 슬픔이 있는 곳에서 희망을 발견합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기도가 되게 하십니다.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게 하십니다. 원망이 변하여 감사가 되도록 만드시고 상처가 변하여 영광이 되게 하십니다. 모두 바꾸시는 하나님이 거기 계시기 때문입니다.
III. 적용과 결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많이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항상 당신을 의지하며 어린 아이처럼 주님의 품에 기대어 살게 하시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에 기도하기를 바라십니다. 만약 기도가 없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잘 된다면 우리는 교만하여 넘어질 것이고 잘 안된다면 절망하여 쓰러져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히 기도할 때 우리의 형통함이 우리를 교만하게 하지 못하는 해독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기도 속에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주님의 은혜 없이 살 수 없는 자신임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면서 은혜의 때가 왜 없겠고 침체의 때는 왜 없겠습니까? 은혜의 때에는 언제나 자기 깨어짐의 기도가 있습니다. 저도 여러분처럼 그랬습니다.
시편3편 강해 (2017.10.11._수요예배 3)
생애에서 정말 그런 기도를 풍성하게 드렸던 때가 생각이 납니다. 결혼을 한 그 해 부터 여러 해 계속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니는 교회가 멀어서 새벽마다 가까운 교회에 다녔을 때의 일이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은 교장 선생이시고 교편을 잡으시면서 목회를 하는 분이셨는데 새벽에 가면 교인도 그렇게 많지 않고 목사님 혼자 기도하시거나 성경을 읽고 계셨습니다. 저는 남의 교인인데도 가서 앉으면 그렇게 눈물이 났습니다. 새벽기도에 나가면 삼분의 이쯤은 자신에 대한 기도입니다. 무슨 어마어마하게 하나님께 소원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언제나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는 것이 하나님께 죄송했습니다. 아마 제 생애에서 여러 번 있었지만 그 어린 나이에 늘 생각이 나는 풍부한 자신을 위한 기도 속에서 살았던 때 같습니다. 아무 어려운 일이 없고 모든 것이 태평해도 기도하는 사람은 언제나 눈물이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습니다. 세상 것들과 어울리고 또 그것들을 붙들고 살아가지만 기도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버릴 수도 떠날 수도 있다는 마음이 언제나 거기에 있습니다.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마지막 낙심은 하나님께 버림을 받는 것인데 하나님은 그러실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눈 앞 에는 엄혹한 현실이 전개되고 숨이 멎을 것 같은 무서운 상황이 전개되어도 일단 눈을 떴을 때 뿐 이고 눈을 감으면 상황은 사라지고 거룩하신 주님을 뵙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셔서 당신의 위대한 능력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간절히 기도할 때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게 됩니다. 우리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며 낙심하거나 교만하지 맙시다. 오히려 오늘 시인처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고 간절히 기도함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언제나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바라며 사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대적들이 에워쌀 때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아지 아니하리이다”(시 3:5-6)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시편 3편을 지은 시인은 비록 이 때의 일이 지나가기는 하였습니다만, 여전히 그렁그렁한 눈물로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이 시를 노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탄식하던 때를 기억하며 하나님 앞에 이 노래를 부릅니다. 저주와 비난을 퍼붓는 대적들이 있었고 이 시를 주 앞에 올리는 순간에는 아마 과거에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회상은 기억의 기능입니다. 오래전에 일어났던 일들도 어쩌면 그렇게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생생히 우리의 마음에 실어 나르는지 모릅니다. 특히 깊은 감동을 느낀 때나 혹은 말할 수 없었던 고통을 받았던 때의 기억은 수십 년의 세월이 흘러도 그 세월의 흔적이 남지 않으리만치 선명히 우리의 마음에 깃듭니다.
과거의 기억 속에서 실어 나르는 그 고통 받던 가슴 아픈 장면들은 시인의 마음을 녹였고 그래서 이 시인에게서 눈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악인들이 저주와 비난을 퍼부을 때, 이 시인은 벙어리가 되었고 귀머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슴 아픈 상황 속에서 이 시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깊이 경험하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고통이 저절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고통하는 이 세상에는 거룩한 성자들로 가득차야 했을 것입니다. 고통 그 자체가 아니라 고통 받는 상황에서 하나님께 시선을 고정하는 간절한 기도가 있었기에 이 시인은 그 시련의 고통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성품을 경험하고, 주님을 아는 지식 속에서 기쁨을 누렸던 것입니다.
Ⅱ. 두려워하지 않음
그런데 시인은 오늘 회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원수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고 온통 자기를 둘러싼 대적들에게 승리의 노래가 들려올 그때에 그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였습니다.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천만인이 에워싸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A. 천만인이 에워싸 진 침
실제로 천만 명이 되지는 않았겠지만, 이 표현은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대적들이 다윗을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대조가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어디에 가든지 승리해 주셨던 사람, 하나님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았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그가 나라를 세울 때 대대적인 군대 모집 캠페인을 벌리지 않았습니다. 그를 존경하고 좋아하는 많은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였습니다.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고 고생하던 사람, 억울한 자, 빚진 자, 한 맺힌 자, 상처받은 자,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새로 세우신 다윗이야말로 이스라엘의 희망이라고 노래하며 그를 에워싸며 모였습니다. 그때에도 천만 인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였을 것입니다. 그랬는데 이 시인 다윗이 백성들에게 무슨 모진 나쁜 일을 하였겠습니까? 비록 그가 우리아의 아내를 간음하고, 하나님께서 금한 인구조사를 하여 순결한 그의 생애에 뚜렷한 오점을 남기기는 하였겠지만 다윗이 백성들을 괴롭혔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습니다. 모든 백성들을 부역에 동원하고 전쟁터에 휘몰아 패전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로서 하나님의 왕국을 종처럼 섬겼던 인물이었습니다. 무엇을 그렇게 잘못하였기에 비루하기 짝이 없는 더러운 자식이 애비를 죽이고 왕이 되겠다고 정변을 일으켰을 때 어떻게 그 백성들이 그 자식 편에 설 수 있단 말입니까? 수많은 모욕을 다윗에게 퍼부었습니다. 원수의 수는 많고 강하였고 그를 따르던 수많은 사람들은 졸지에 다윗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들의 공격은 조직적이었습니다. 무엇을 보아도 결코 승리할 것 같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상황을 해석해 보아도 이길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었기에 그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는 황망히 망명길에 도망치듯이 올랐습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을 가지고 있지만 인생을 살면서 삶의 모든 상황을 신앙으로 해석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에게 항상 언제나 충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성은 언제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련과 환란이 우리를 에워싸게 되면 제일 먼저 이성이 작동합니다. 자기가 가진 군대의 수를 헤아려보고 적군의 수를 헤아려 봅니다. 그때 비교할 수 없이 엄청난 숫자의 차이가 납니다. 그러면 우리는 덜컥 낙심합니다.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기도도 잘 되지 않습니다. 왜 이런 상황으로 하나님이 나를 내모시는지 슬그머니 섭섭한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의 원인을 제공하였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미워지기 시작합니다. 마음에 온갖 복잡한 생각이 오가며 하나님을 향해 간절히 매달리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그러나 시인에게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정말 누구도 의지할 수 없는 자신도 이 시련과 환란에서 벗어날지 어떨지 알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믿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의뢰하면 그 하나님이 나를 지키실 것이며, 그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가장 인생의 큰 시련의 때에 가장 크게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벤자민 워필드라고 하는 유명한 지난 세기의 개혁 신학자는 다윗의 생애에서 그가 받았던 징계를 해석하면서 다윗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깊은 죄악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분이신지, 자비로우신 분이신지를 경험하여 오늘날 우리가 아는 다윗이 되었다고 해석하였습니다.
B. 여호와가 날 붙드실 때
그가 믿는 것이 단 하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붙드신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워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잤는데 어떻게 나에게 새 아침이 올 수 있을까, 무슨 뜻입니까? 지난밤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 같이 그렇게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시인이 다른 곳에서 노래한 것처럼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하였다는 것입니다. 저녁에는 기숙할지라도 아침에는 은총이 있으리라고 했던 시인처럼 다윗은 누워 자고 깨는 것이 신비하게 느껴졌습니다. 어쩌면 나에게 이 밤이 마지막일 텐데,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삶을 에워싸고 있는 견딜 수 없는 시련의 깊이와 커다란 환란의 크기가 어쩌면 이 시인으로 하여금 저녁에 눈을 감으면 아침에 이 세상에서 눈을 뜨지 않기를 바라게 만들었을지 모릅니다. 암튼 확실한 사실 하나는 이 시인에게는 내가 누워 자고 깨어난 것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직면하고 있는 고난과 고통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몸은 통증을 느낍니다. 통증이 다 같은 통증이 아닙니다. 꾹 누르듯이 은근히 아픕니다. 그리고 불편합니다. 움직이는데 너무 힘들고 시간이 듭니다. 많이 움직이지 못합니다. 기력이 떨어집니다. 그러나 죽을 정도는 아닙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누워있는데 곡괭이 같은 것으로 확 찢고 내리쳐 누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곡괭이가 등뼈를 깨고 들어가서 그 속을 누르면서 피가 쿨쿨 쏟아져 버린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고통은 인내하고 참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 설교를 오늘 새벽에 일찍 일어나 설교를 준비하면서 아주 가슴 깊이 다가왔습니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얼마나 괴로웠으면 누워 자고 깨어난 것이 기적처럼 느껴졌을까 말입니다. 우리 중에는 이 깊이를 헤아릴 사람이 없을지 모릅니다. 왕궁을 잃어버릴까 염려하는 것, 물론 그것도 큽니다. 왜 하나님께서 맡기신 나라이니까 말입니다. 반란을 일으킨 괴수가 자신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일생을 함께하였던 피를 나눈 동지들이 반란군의 주모자가 되었습니다. 한번 우리가 사랑하고 기대하던 사람이 말 한마디만 차갑게 대해도 마음이 쓰린데 한번 그 상상할 수도 없는 배신과 반역, 그 자식을 반역의 괴수로 대하게 되었다는 생각을 한번 해 보기를 바랍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그러한 속에서 이 시인이 느꼈을 그 고통의 깊이를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데 오늘 무엇이라 말하는가 하면,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시는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 어느 목사님이 그런 표현을 쓰는 것을 들었습니다. 깊은 병에 걸리셔서 설교단에 3년 가까이 못 서셨답니다. 성도들이 거의 죽음 가까이에 있는 목사님을 위해서 전심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답니다. 목사님이 고백하기를 “자신은 성도들의 눈물 끝에 매달려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인이 바로 그렇게 기도의 눈물 끝에 매달려 있는 사람처럼 내가 누워 잤는데 죽지 않고 눈을 뜬 것은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기적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너무 허황된 것에서 기적을 바랍니다. 그런데 이것은 모든 욕심을 내려놓고 우리의 삶을 살펴보면 아침에서부터 밤에 잠드는 순간까지 숨 쉬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이 기적의 연속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리기까지는 사람들이 그것을 기적이라고 알지 못합니다. 온 몸에 마비를 경험한 사람이 하는 고백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걸어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나는 내 힘으로 먹는 줄 알았습니다. 사람이면 모두 다 스스로 걸어가서 자기 볼일을 보는 줄 알았습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 많습니다. 시인이 거기에까지 내려간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누워 자고 깨는 것이 기적이 아닌데, 이 사람에게는 기적이었습니다. 왜? 너무 커다란 고통을 만나니까 그렇게 누워 자고 깨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기적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구나. 내게 은혜를 베푸시는 구나.’ 그러한 감사로 눈을 뜨고 하루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도 나에게 하루를 살아갈 힘을 주셨으니 감사합니다.’ 이것이 은총의 고백이었습니다.
결국 이 시인은 이 속에서 자신의 모든 삶의 주권을 우리 주님께 맡기고 자기를 내려놓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자가 누구입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소망은 생사 간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총에서 우리들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들이 믿는 것입니다. 새벽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정말 내가 감사를 아는 사람인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정말 우리가 때로는 너무 괴로워서 눈물을 흘리는 적은 있지만, 너무 감사해서 어떻게 나 같은 인간을 하나님이 이렇게 선하게 대해주실까, 그 사실을 생각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린 적이 있습니까? 성경은 그것을 열매라고 말합니다. 열매는 무엇입니까? 제사드릴 때 추수하고 나면 그렇게 추수된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바치는 그것이 열매입니다. 작은 일상에 감사하지 않는 사람은 주님이 큰 것을 주셔도 절대로 감사하지 않습니다. 자랑할 수는 있지만 감사하지 않습니다. 한번 우리들의 신앙을 되돌아보십시오.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가 충만하였을 때 그때에는 우리에게 항상 이러한 다른 사람들은 너무나 당연히 생각하는 일상이 우리에게는 감사의 제목이었습니다.
(예화) 제가 교수가 되고 이듬해, 나이로 따지면 35살 될 때 부흥을 깊이 경험했습니다. 아직도 그것이 책에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어느 날 가슴이 미어지듯이 기도가 폭포수처럼 쏟아졌습니다. 과장이 아니라 이러한 기도가 진심으로 나왔습니다. “하나님, 전 괜찮으니까 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하여 신경을 너무 쓰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해 더욱 힘을 쓰십시오. 우리는 아무래도 괜찮습니다.” 그때 우리는 눈에 펼쳐지는 모든 것이 감사의 이유가 됩니다.
성경을 보면 시편 많은 곳에서 기도의 문을 감사로 먼저 엽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하나님 앞에 자신을 인도하신 은총을 전심으로 찬양하면서 땅에 붙었던 마음을 떼어내어 하늘을 향하게 합니다. 마음을 고양시킵니다. 영혼의 모든 시선을 하나님께 향하면서 변하는 이 세상보다 불변하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그 빛 아래서 자신이 어떠한 자인가 생각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우리는 너무 감사가 인색합니다.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 보아도 정말 감사가 이 속에서 넘쳐나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십시오. 이 시인은 하나님의 은총을 원수들이 벼락을 맞고 거꾸러졌다더라, 원수들이 오다가 큰 홍수를 만나서 병사 10만이 강에 떠내려갔다더라, 그러한 소식이 있어야지만 겨우 ‘아, 하나님이 나를 붙드시는구나’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저녁에 자고 아침에 눈을 떴습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붙들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이런 일들이 가능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런 시인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래서 신자는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실 때에는 처음부터 사탕같이 우리에게 주신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메마른 땅을 걸어가는 것 같고 폭풍을 헤치고 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면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손을 붙잡고 걸어갑니다.
(찬양) 폭풍 후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날 인도 하소서
지나갑니다. 눈물로 기도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상황은 절망적인데 근원을 알 수 없는 기쁨을 주십니다. 왜 기쁘냐고 현실적인 근거를 설명하라고 한다면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알 수 없는 기쁨과 소망이 살아납니다. 결국 그 먹구름을 통과하고 그 눈보라와 비바람을 통과하고 나면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아름다운 풍경이 나타납니다. 거친 가시밭길 대신에 푸른 풀밭, 꽃피는 동산, 그리고 파란 하늘, 아름다운 동산들이 등장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하나님을 어린아이처럼 신뢰하면서 살아갈 순종을 배웁니다. 그래서 고난은 순종의 학교이고, 기도의 학교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존함은 가장 거룩한 존함입니다. 우리가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존함이 떠오를 때마다 여러분들은 언약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나와 협상합시다.’ 라고 해서 생긴 언약이 아닙니다. 이 언약은 하나님이 어느 날 오셔서 선택하셔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내가 너를 정말 복 줄게, 내가 약속을 했는데 너를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 약속했는데,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고 약속했는데, 지킬 거야’라고 하시면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 약속을 안 지키면 어떻게 될지 보여주신 것이 있는데 쪼갠 짐승 사위를 불길로 지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해석적으로 볼 때 어떻게 말하면 신성모독적인 부분이 담긴 해석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고대근동에서 언약을 맺을 때 큰 소와 같은 짐승을 반으로 갈라 넣습니다. 언약서를 씁니다. 누가 씁니까? 대개 큰 나라의 왕이 작은 나라의 왕을 굴복시키며 ‘너는 나에게 충성해라.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를 지켜 주마.’ 그러면서 신하와 군주로서 동맹을 맺습니다. 그것을 세 장을 작성해서 한 장은 신당에, 한 장은 왕이, 한 장은 신하가 가지고 밟고 지나갑니다. 무슨 뜻입니까? 둘 중 누군가가 언약을 깨면 이렇게 짐승이 반쪽 나서 죽임을 당한 것처럼 언약을 맺은 우리도 그렇게 되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그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남아있는 언약체결 의식을 따라서 당신이 그렇게 쪼갠 짐승 사이를 지나가셨습니다. 해석을 하면 ‘나 꼭 지킬게. 안 지키면 날 죽여라.’ 그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죽이겠습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웅변적으로 하나님의 언약은 신실하며 변함이 없다고 하는 보증을 그림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 하나님은 누구를 의지해서 계신 분이 아니라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온 땅과 만물 위에 높이 계시면서도 아주 미천한 나 같은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면서 계시는 분이십니다.
언제나 기댈 수 있는 하나님, 높고 위대하시기에 무섭도록 떨리는 두려운 하나님이시지만, 또 한편으로는 무한하게 이끌리는 하나님, 사랑 때문에 이끌리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사실을 확신하였을 때 이 시인은 두려워할 것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있었고 누구도 여호와를 멸하지 아니하고서는 자신을 해칠 수 없다고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은 항상 매일 매일 신나고 좋은 일만 일어난다고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 시련과 고난 속에서 틀림없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징계를 받았을 때 예고되었던 하나님의 그 예고를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당할 많은 고통을 생각하며 이미 회개한 죄였지만 다시 회개하였을 것입니다. 이러한 압살롬의 반역은 짧게 보면 하나님의 징계였지만, 다윗은 이 사건이 일어나기 이전에 이미 회개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다윗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일찍이 다윗이 들어가본 적 없는 정말 치열한 이 시련의 불도가니 속에 들어가게 하심으로써 정금같이 시인을 빚어낼 뜻이 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많은 시련을 당해도 오늘 시인과 같은 정도는 아닐 것입니다. 또 많이 양보해서 거의 거기에 근접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무엇입니까? 천만 인이 에워싸 진을 치고 있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이 시인을 건지셨습니다. 여호와의 손으로 그를 붙드셨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이 다른 여호와입니까? 그 하나님이 다른 주님이십니까? 그 주님이 바로 지금도 우리의 삶의 주재권을 가지고 계신 그 주님이시고, 그 여호와가 지금도 우리를 선택하고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도록 우리를 관계를 맺고 계시고 오늘도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고 계시는 여호와이십니다. 차이는 시인은 이 큰 고난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아무 존재도 아닌가 하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누워 자고 깨는 것도 하나님의 비상한 은총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손이 자신을 붙들지 아니하였다면 나는 누워 잤으나 아침에 깨지 못하였을 것이라고까지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살아있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총의 웅변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이 시인처럼 의식하든지 못 하든지 하나님은 매일 매일 당신의 손으로 여러분들을 붙드십니다. 그리고 은총을 베푸십니다. 작은 잘못, 작은 실수, 작은 허물 하나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끝장난 것처럼 절망으로 떨어지는 것은 어떤 식으로도 성령의 역사가 아닙니다. 성령은 죄를 깨닫게 하지만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을 줍니다. 그리고 주님께 돌아갈 선한 마음을 갖게 하십니다.
(예화) 강아지에 대한 경험이 큽니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 중 하나 ‘선택’에 대해서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선택을 합니다. 얘가 며칠 전에 중성화 수술을 하였습니다. 안 했으면 좋겠는데 안 하면 강아지에게 커다란 고통을 주기에 하였습니다. 기력이 다 빠져서 반갑다는 표시도 잘 짓지 못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틀 지나니까 좀 나아져서 까불고 다니고 말썽도 피웁니다. 정말 밉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이 강아지가 개다운 개로 자라줄 수 있겠다고 하는 소원이 있습니다. 막대 먹은 개가 되지 말아라. 그렇지만 그 개가 무슨 잘못을 하든지 팔아버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령은 우리에게 정결하게 하시고 우리의 잘못과 허물, 죄에 대해서 눈뜨게 하십니다. 그런데 항상 성령의 역사는 그렇기 때문에 나를 신뢰하던 것을 버리고 예수를 붙잡게 만듭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이 언약의 보증인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아갑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하기를 원하시는 일이고, 복음은 하나님이 이미 하신 일입니다. 이미 하신 일을 기초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성령은 이 두 가지를 같이 깨닫게 하십니다.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그 일을 생각하며 자신을 신뢰하던 마음을 버리고 그 그리스도를 붙잡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시편3편 강해 (2017.10.25. 수요예배 4)
Ⅲ. 결론과 적용
지금은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 일상 속에서 하나님의 은총의 기적을 발견해야 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깊이 감사하십시오. 감사가 마음 깊은 곳에서 안 나오면 형식적으로라도 감사를 하십시오. 계속 반복하면 마음으로 스며드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감사하십시오. 매일 ‘하나님, 어제 누워 자고 오늘 새벽에 눈을 떴습니다. 다윗은 이것을 은총의 기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도 우리 주님을 찬송하며 감사합니다.’ 그리고 요동치는 이 세상 보다는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시인이 고백하였던 것처럼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노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4. 원수를 이기신 하나님
“여호와여 일어나노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시 3:7)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시인은 자기 뱃속으로 낳은 아들에게 반역을 당하여 황망히 망명의 길을 떠나야했습니다. 시련과 고난 속에서 그는 감사를 배웠다고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녁에 눕고 아침에 깨는 것 자체가 여호와께서 그를 붙드시기 때문이었다고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의 찬송을 드렸습니다. 시련과 고난이 가득하였지만 주님과의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시인은 두렵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더욱이 이 사건을 통해 그는 더욱 하나님 한분에게만 속한 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잃어버린다 해도 시인은 두려울 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던 사람들도 때로는 이 세상에서 시련을 당하고 마귀가 올무를 놓기도 하고 악인의 공박을 받아 깊은 고통을 받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서 빼앗아 갈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진정으로 갖고 싶어 하는 것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고 하나님을 그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시인으로 하여금 시련 속에서 평강을 잃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주었습니다. 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열렬히 믿으면 꽃길만 걸어가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약속합니다. “네가 어느 길을 걸어가든지 나 여호와는 너와 함께 하리라.”고 말입니다. 그러한 깊은 시련 속에서 이미 마음이 요동치는 때는 지났습니다. 시인은 잠잠히 하나님 한분을 우러러봅니다. 많은 회개의 시간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던 시인의 사랑은 더욱 순수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자신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자 그를 에워싸고 일어난 수많은 시련들은 이제 그에게 마치 제 3자의 일처럼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하는 것과 함께 하나님에 대한 회고를 하고 있습니다.
Ⅱ. 하나님에 대한 회고
크게 첫 번째로 그가 하나님께 회고하고 있습니다. 시련 속에서 주님의 역사를 회고하였습니다. 그것은 악인을 어떻게 다루시는지에 대한 회상이었습니다. 성경은 오늘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라고 말입니다. 이 구절의 히브리어는 다양한 번역이 가능합니다. 완료시제로 되어 있는데 히브리어에서는 현재-과거-미래가 없습니다. 과거든 현재든 미래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되는 곳에서는 완료를 사용하고, 진행되고 있는 게 과거 진행형이든, 현재 진행형이든, 미래 진행형이든 미완료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완료시제입니다. 그러면 어떤 해석이 가능한가 하면 시인이 가만히 생각을 하니 지금은 악인이 저렇게 날뛰지만 미래의 어느 시점이 되면 ‘이렇게, 이렇게 당하였을 것이다.’고 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보다 더 자연스러운 해석은 과거에 일어난 일을 회고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시인은 이것을 장구한 이스라엘의 역사를 가지고 이야기하기 보다는 자신의 생애의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그 경험의 요점이 뭐냐 하면 ‘나의 원수의 뺨을 치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원수’라는 말이 복수(오예바, )로 나옵니다. 원래 그 뜻은 ‘미워하는 자’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많은 자들의 뺨을, 사실은 턱뼈입니다. 턱뼈를 때리시고 악인들의 이빨들을 부수어 버리셨다고 하는 것이 히브리어의 번역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두 가지 사실을 회상합니다.
A. 원수의 뺨을 치심
‘원수의 뺨을 치시며’.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시인을 미워하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공적인 봉사의 시기에 접어들기 전,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기 전에는 시인은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은 이후에는 정권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 사울에게 미움을 받았습니다. 항상 자객이 따라다니고 정적의 위협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많은 원수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성경에 의하면 다윗은 비교적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굳게 믿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기에게 고통을 주거나 괴롭히는 사람들을 복수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손에 맡기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사울을 대하는 그의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으며,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옷자락을 칼로 베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하는 순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니 하나님이 그를 괴롭게 하던 많은 원수들을 결국 하나님이 뺨을 때리셨습니다.
‘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히브리어로 ‘레히’()인데 이 단어는 정확히 말하면 턱입니다. 혹은 턱뼈를 가리키기도 합니다. 이 단어가 쓰인 곳 중 하나가 어디인가 하면 사사기 15장에서 블레셋과 싸우는 삼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는 무기도 없이 나귀의 턱 뼈 하나를 가지고 일천 명의 군사를 때려 죽였습니다. 그리고 이제 완전히 힘이 다 소진한 후 그 턱 뼈를 던지며 “내가 이제 목말라 죽게 되었나이다.”라고 탄식합니다. 그때 천여 명의 시신이 쌓여 있는 그곳을 가리켜 ‘라마트 레히’라고 부르는데 ‘턱 뼈의 언덕’ 혹은 ‘턱 뼈의 산’이란 뜻입니다. 성경에서 ‘뺨’이라고 번역된 이 ‘레히’는 인간의 존엄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22장 24절에 보면 패역한 시드기야 왕이 자신에게 불리한 예언을 하는 미가야 선지자를 향해 이렇게 행동합니다. “그나야의 아들 시드기야가 가까이 와서 미가야의 뺨을 치며 이르되 여호와의 영이 나를 떠나 어디로 가서 네게 말씀하시더냐.” 친구들에게 모욕을 받을 때에 욥이 행했던 탄식하는 말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잘 보여줍니다. 욥기 16장 10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무리들은 나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리며 나를 모욕하며 뺨을 치며 함께 모여 나를 대적하는구나.” 그래서 이 뺨을 맞는다고 하는 것은 큰 수치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에 사용된 이 단어는 ‘나하’()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나하’는 때리는 것인데 강하게 사용될 때에는 죽기까지 때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모욕을 주기 위해 뺨을 살짝 살짝 건드리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말로 심하게 말하면 아귀 창을 날려버리는 것입니다. 큰 힘의 주먹으로 한방을 날려 턱 뼈가 돌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시인이 자신의 생애를 돌아보았습니다. 자기를 괴롭히고 미워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시인이 입에 거품을 물고 싸우거나 칼을 갈아서 목에 겨누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자기를 그렇게 미워하고 근거없이 비난하고 이유없이 자기를 괴롭히던 많은 사람들의 뺨을 하나님이 때리셨습니다. 뺨을 톡톡 건드린 것이 아니라 턱 뼈가 돌아가도록 아귀 창을 날려버린 것입니다. 그렇게 회고의 회고를 한 것입니다.
그렇게 나를 미워하던 많은 사람들이 결국 여호와께 그 턱이 부수어 지도록 얻어맞고 쓰러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한편으로서는 수치, 그리고 한편으로는 파괴를 의미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 앞에 전개된 이 상황, 이 상황은 지금 다윗의 원수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상황이 아닙니다. 다윗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황급히 망명길로 도망을 가고 법궤도 버려두고 궁궐도 버려두고 자기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의 저주와 비난의 목소리를 들으며 언제 돌아올 지도 모르는 망명의 길을 떠나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그는 회상합니다. ‘아, 내가 지금은 할 말이 없고 그리고 내가 나에게 이 악을 행하는 내 원수를 향해 무엇을 할지 알지 못하지만 지나온 세월을 보니 하나님이 나를 그렇게 미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뺨을 때리셨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셔서 반란이 일어났구나, 그리고 지금 망명의 길을 떠나는구나, 이 반란을 어떻게 하랴,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다윗이 뭐라고 말할 수 있었겠습니까? 반란의 수장이 자신의 뱃속으로 나온 새끼입니다. 무엇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조용히 처분을 하나님께 맡기며 지난날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렇게 자기를 미워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 살 때 하나님은 결국 돌아보니 그 악인들의 뺨을 치셨습니다. 그래서 턱 뼈를 날려버리셨습니다. 그들은 큰 수치를 당하고 그리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고난 중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이 생각하며 눈앞에 전개되는 현실 보다는 여기까지 자기를 인도해 오신 하나님이 어떻게 자신을 불같은 시련 속에서 지키고 보호 하셨는지 회고하면서 위로와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께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믿음이라면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믿게 만듭니다. 이전에 그분이 자신에게 어떻게 행하였는가 생각하며 현재의 난관을 극복할 희망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으면 주님과 함께 했던 과거도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회고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사랑의 경험합니다. 마음속의 불신앙은 현재를 주목하게 만들고 좌절하고 절망하며 마지막에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게 하는 유혹을 받게 합니다. 시인은 하나님이 신원하사 정당하게 갚으실 것을 기억하였습니다. 그러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는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원수를 갚는 대신 신원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많은 인내와 묵상 속에서 주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악인에 대한 증오가 아닌 악에 대한 미움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바라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습니다. 문제는 얼마나 많은 원수들이 여러분들을 에워싸고 있는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때로는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여러분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입니다.
B. 악인의 이를 꺾으심
시인이 하나님께 대하여 회고한 두 번째 사실은 악인의 이를 꺾으신 것이었습니다.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이 그 뺨을 때리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셨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고 보기 보다는 악인이 곧 원수이고, 뺨을 치심으로써 이빨이 부러진 것을 보여줍니다. 여기에서 사용된 ‘꺾으시며’라고 번역된 이것은 히브리어 성경에는 ‘시팔타’()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샤파르’()에서 왔습니다. 질그릇 같은 것들을 위에서 떨어뜨려서 박살이 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빨을 꺾는 것이 아니라 큰 충격을 가해서 이빨이 와르르 부서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더욱이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림처럼 아주 생생한 묘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큰 주먹이 쾅하고 아귀를 때립니다. 그리고는 아귀가 돌아갑니다. 모하마드 알리같은 사람이 한 번 때릴 때 2톤이었다고 하니까 평범한 사람이 맞으면 그 순간 뇌가 울려서 졸도합니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이빨들이 우지직하면서 쏟아집니다. 그 광경을 그림처럼 그려보십시오. 이빨이라고 하는 것은 짐승에 있어서 중요한 공격의 수단입니다. 물어뜯는 것은 곧 육체를 손상하게 만들고 목숨을 빼앗을 정도의 위험성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신에 대한 공격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이름은 남아있지만 별로 무섭지 않은 존재를 가리켜서 ‘이빨 빠진 호랑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공격의 수단을 상실해 버린 것, 짐승을 표현합니다. 다윗의 이 표현은 아주 극단적이고 생생한 그림 같은 묘사입니다. 와르르 부수어지는 이빨을 생각해 보십시오. 다윗이 이렇게 압살롬에게 반역을 받아 이전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깊은 고통 속으로 들어가면서 과거를 회상해 보니 자기를 해치려는 많은 악인들을 하나님이 이렇게 다루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자신은 헤하지 않았으나 하나님이 치셔서 공격의 수단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빨이 부수어져 버리는 이런 엄청난 일들을 시인이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신자는 어떠한 어려움을 만나거나 악인을 만나도 항상 그 어려움이나 악인이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 보다 더 악인이 크게 보인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더욱이 시련과 고통을 당할 때 이글거리는 복수심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은 자신의 영혼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이며 아무 유익을 가져올 수 없는 무가치한 것입니다. 혈기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미증유의 큰 고통을 경험하면서 고요히 지난날을 회상하였습니다. 미래에 자신이 어떻게 될까 생각하면서 두려움에 떠는 대신 그 옛날 이렇게 악인들에게 에워싸였을 때 하나님이 그 악한 자들의 뺨을 치시고, 이빨을 부수어 뜨려 버리신 일들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 순간도 내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그분 앞에 바르게 서 있기만 한다면 나를 에워싸고 있는 이 원수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다룰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윗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당시 다윗이 요구 받던 것 이상을 하나님께로 요구받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세상에 오셨고, 우리가 어떻게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대하여야 하는지를 당신이 가르침과 모본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윗이 이러한 큰 시련과 배신을 당하며 한 없이 고통을 받을 때 악인들의 뺨을 때리시고 악인의 이를 꺾으신 과거를 생각하며 지금도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악인들의 뺨을 그렇게 치시고 이빨을 부수기를 원하였다면 우리는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오히려 그들이 나에게 행한 악은 미워하되 오히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원수를 갚는 대신 원수를 갚아주기를 하나님께 호소하여 주님의 무력을 간구하는 대신, 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하시기 전에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히는 병사들을 위해서 저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비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러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악인의 악의, 그리고 나를 미워하는 자의 악한 행동 때문에 고통을 당하지만,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 것이 나로서 끝나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고통스럽게 했던 악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고 하나님의 뜻이 자기의 이웃에게 이런 일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 일이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속에는 악에 대한 미움은 언제나 충만해야 하지만 사람에 대한 미움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우리에게 회복할 수 없는 큰 손해와 고통을 남겨 주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시편에 나오는 악인을 향한 무자비한 복수와 불의를 향한 하나님의 과격한 진노를 구하는 모든 기도들은 오늘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사람에 대한 미움이라기보다는 그 사람들을 사로잡고 있는 악, 하나님의 복음을 거절하는 이 세상의 죄가 가져다주는 완고함에 대한 미움입니다. 궁극적으로 그 모든 악을 장악하고 있는 마귀의 세력에 대한 미움이어야 합니다. 저들에게도 밝은 빛이 있었다면, 저들에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다면, 저들에게도 주님의 사랑을 아는 깨달음이 있었다면 빛 가운데 살았을 것이라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오히려 자신에게 악을 행한 사람들을 향해 긍휼히 여김을 보여주셨던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 악인에 대한 모든 처벌을 맡기되 우리는 그들의 안녕을 빌어 줍니다. 악을 미워하고 그 악을 궁극적으로 퍼뜨려 모든 인간을 오류와 죄악으로 몰고 가는 마귀에 대한 분노, 이 세상에 종식되지 않은 악에 대한 절절한 미움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의 영적인 특징입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단순히 다윗을 본받는 것 그것을 넘어서는 신앙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시인은 그렇게 큰 고통과 배신의 시간을 보내면서 조용히 자신의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셨던 바를 회고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때마다 역사하셔서 자기를 미워하는 자의 뺨을 때리시고 이빨을 꺾으셨던 일들을 회상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눈앞에는 모든 좋은 것들이 보이지 않지만, 그렇게 나의 인생을 이제껏 인도하신 하나님이 이번에도 그렇게 인도하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에 불타며 평안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도 살면서 도처에서 악을 만나고 악인을 만나지만, 하나님 앞에 이렇게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Ⅲ. 하나님을 향한 기도
마지막 크게 두 번째로 하나님을 향한 간구가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일어나소서’라고 하는 간구와 ‘구원하소서’라는 두 개의 간구가 중첩되어 나타납니다. 여기에서 ‘일어난다.’라는 표현은 하나님이 의미 있는 일을 시작하시는 것을 뜻합니다. 일어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뜻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 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하였습니다. 일하시는 것입니다. 보좌에 앉으신다는 이야기는 일이 끝났다는 뜻입니다. 일어남과 앉음은 일함과 쉼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언제 쉬신 적이 있으십니까? 보좌에 앉으신다는 의미는 통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성경에 의하면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면 ‘일어난다.’는 표현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적인 화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쉬지 않고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고 이스라엘을 위해 일하는 분이시지만,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인간 편에서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을 자각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이여, 일어나소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하시니까 하나님을 일하라고 재촉하는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일하시는 것에 대해서 자각을 하도록 시인 자신을 일깨우는 화법입니다. 이러한 간구는 시편에서 자주 나타나는데 이것은 시인 자신이나 이스라엘을 일깨웁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자각이 필요합니다. 원수들이 에워싸고 시련과 고난이 가득할 때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여전히 살아계시고 나를 위해 일하고 당신이 선택한 백성들을 위해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잊고 있거나 혹은 그것이 마음속에 느껴지지 않을 때 우리는 불신앙으로 흐르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매일 매일 일깨우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제 제가 이런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고 하나님이 나의 상황을 주의 깊게 살피시고 당신이 가지고 계신 뜻을 나의 인생을 향하여 펼치셔야 할 때입니다.’라고 간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서 시인은 이러한 신앙이 있을 때에는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 간섭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일어나소서.’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구원하소서.’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악인에게 이렇게 고통을 받고 있으니 거기에서 나를 건져주셔서 평안한 상태에만 있게 해달라는 것이 아닙니다. 악인의 횡횡함으로 말미암아 깨어진 평화가 다시 회복되고 악인으로 말미암아서 잠시 상실한 마음과 육체의 불완전한 상태가 회복되어 성경이 이야기 하는 ‘샬롬’의 상태가 되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해 전심으로 그분을 섬기면서 사는 삶이 가능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고통당할 때 우리 모두 그 상황이 싫습니다. 그리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는 그렇게 깊은 고통이 환경적으로 영적으로 다가올 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도와달라고, 거기에서 건져달라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묻고 싶은 것은 이것입니다. 건져주시면 무엇 하겠습니까? 어떻게 하겠습니까? 단지 그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기도, 그것은 성도의 온전한 기도가 아닙니다. 건져주시면 무엇 하겠습니까? 그리고 어떻게 살 것입니까? 왜 하나님은 그 시련과 고통에서 건져주시는 것이 내버려두시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까?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구원은 훨씬 더 적극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평안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온 마음으로 그분을 섬기며 살게 해달라는 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나를 그 큰 시련에서 건져 아무 염려와 산만한 정신없이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이 내게 맡겨주신 그 부르심에 순응하며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시인은 큰 고난 속에서 마음을 에이는 것 같은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하신 일을 조용히 회고하였습니다. 지금 눈앞에 일어난 일은 너무 충격적이어서 과거에 일어난 어떤 나쁜 일도 지금의 상황과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악한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제나 그러한 큰 시련과 고난의 때에 그러한 시련과 고난을 일으켰던 악인의 뺨을 치시고 뼈를 꺾으신 것을 회고하였습니다. 그는 그러면서 조용히 하나님을 앙망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행하신다는 확신을 갖도록 스스로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구원을 호소하였던 것은 단지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 아니라 변함없이 주님을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리고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우리 주님을 깊이 의지하십시오. 오늘 하루 평안히 잠들고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하나님이 여러분들을 붙들고 계시다는 증거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여러분들을 향하여 그분은 방패가 되어 주실 것이며, 영광이 되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들의 머리를 드시는 자가 되실 것입니다. 시인이 그러했던 것처럼 악인들의 악이 없다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그렇게 뼈저리게 깨닫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배신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신실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악인은 다윗에게 나쁜 것을 주기 위해 많은 악을 행하였으나 그중 아무 것도 다윗에게 악이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허사였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를 그 큰 시련 속에서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하고 지켜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악인의 공교한 꾀로 인하여 당한 큰 재앙을 통하여 그는 섭리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어떠한 처지에서든 자신과 함께 해 오셨다고 하는 확신을 갖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행하셨지만 잠시 잊고 살았던 신실하심을 회고하며 지금 자신 앞에 전개되고 있는 이 큰 고통과 시련의 시기들도 그렇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믿도록 만들어 주었습니다.
Ⅳ.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악을 악으로 갚지 마십시오. 그리고 악을 미워하는 것과 악인을 미워하는 것을 혼돈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오늘도 당신의 날개 그늘 아래 피하는 모든 어린 양떼들의 구주이십니다. 당신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참맛을 보게 하시고 그 속에서 악인이 행한 모든 나쁜 것들을 통하여 하나님께로부터 온 모든 좋은 것들을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생사 간에 우리에게 유일한 위로가 하나님이시며 주님은 나에게 일어난 모든 나쁜 일들을 통하여 좋은 것을 주시는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이 큰 시련에서 나를 건져주신다면 나는 변함없이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살겠다고 다짐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하겠습니다.
5. 주의 복을 기다림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시 3:8)
녹취자 : 김세나
Ⅰ. 본문 해설
시편 3편은 다윗이 왕이 된 후, 다윗의 생애에 최대의 위기 중 쓴 시입니다. 시인은 아들에게 반역을 당해서 황망히 망명길에 올라야 했던 가슴 찢어지는 아픔 속에서 견디고 참아왔던 과거를 회상하며 이 시를 쓰고 있습니다. 그는 커다란 시련과 고난을 당했지만 하나님은 그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당신의 빛나는 성품을 이 시인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지켜 주시는 방패이며 부끄러운 자기를 다시 빛나게 해 주시는 영광이시며, 거룩한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 수 없을 때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이제껏 살아온 날들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고 깨는 것이 예전에는 자신의 힘으로 되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자기를 붙드시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시 상상하기 싫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시련을 통해서 행복한 날들이었으면 결코 주실 수 없었던 보석과 같은 큰 영적인 축복을 시인에게 주셨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시인은 시련 앞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으로 승리하면서 원수들을 겁내지 않는 담대함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를 갈망하며 악인들을 하나님의 통치로 다스려주시기를 간구하였습니다.
Ⅱ. 여호와를 의지함
이제 마지막으로 그는 고백과 간구로 이 아름다운 시의 끝을 맺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그의 신앙을 보여줍니다.
A. 여호와께 대한 고백
첫 번째 고백은 여호와께 대한 고백이었습니다. 그 고백은 아주 단순했습니다. “하나님,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옵나이다.” 입니다. 시인은 시련을 통해서 연단될 대로 연단된 사람이었습니다. 항상 많은 시련과 고난, 그리고 애매하게 원수들에게 에워싸여 고통을 받을 때 늘 경험한 결론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악인이 아무리 자신을 에워싸 진치고 자기를 박해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구원하신다, 그 구원은 오직 하나님 자신에게로 온다는 믿음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어린 시절에 가장 사랑했던 성경중 하나가 시편이었습니다. 어린 시절이라고 해봐야 20대 후반이지만 말입니다. 저는 시편에서 특히 다윗의 시를 읽으면서 사실 칼빈주의를 발견했습니다. 그 칼빈주의 가운데 어떤 요소를 발견했는가 하면, 눈앞에는 수많은 웃기고, 울리고 가슴 아파하게 하고 허망하게 만드는 수많은 사태가 우리 앞에 전개되어도 결국 마지막에 그 사태가 전개되어서 마무리가 되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수중에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태들을 만드는 당사자들은 도저히 알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역사의 섭리를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며 감탄한 적이 있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많은 시련을 통해서 예전에 배웠지만 잠시 안일한 삶 속에서 잊고 있었던 신앙의 한 신조로 돌아갔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구원이시라는 믿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깊은 시련을 통해서 다윗에게 다시 한 번 이 사실을 가슴에 새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건져내 주시는 구원의 여호와이시고, 그 구원은 자신의 잘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은총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임을 확신하였습니다. 그 구원을 통해서 시인은 자기가 주님과 올바른 관계 속에서 살게 된다고 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시인이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 칠 때, 수많은 대적들에게 에워싸여 있었고, 사랑하는 아들은 반란의 괴수가 되고, 목숨을 같이 하며 나라를 일으켜 세웠던 동지들과 부하들은 발꿈치를 들고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그때 여호와께 구원을 호소하고 있는 이 시인의 의도는 무엇이겠습니까? ‘번영하게 해 주십시오.’ ‘왕궁의 보화를 많게 해 주십시오.’ ‘우리 왕국이 주변의 수십 개국을 굴복시키게 해 주옵소서’와 같은 기도제목이 아니었습니다. 시편에서 시인이 탄식하며 구원을 부르짖을 때 그것은 세상의 번영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샬롬의 삶’입니다.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그 언약의 백성들과 평화를 누리며 아버지의 자비와 사랑을 자신이 받은 것처럼 이웃에게 그것을 펼치면서, 또한 받으면서 사는 샬롬의 삶이었습니다.
사실 우리의 욕망이 자꾸 넘치기 때문에 우리는 불만이 많아지고 우리가 못사는 것처럼 느낍니다. 하지만 욕망을 줄이고 나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악인들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시인은 그러한 샬롬이 위협을 받았습니다. 삶의 평온한 질서가 깨졌습니다. 이 시인은 이러한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사랑하는 백성들과 평화를 누리며 사는 샬롬의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때로는 하나님이 시련을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 깨닫게 해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종종 우리에게 이 고백을 다시 한 번 받아내시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곳으로 데려가시고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으면 안 되는 삶의 변두리에 우리를 두시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의 외아들을 우리를 위해 속죄의 제물로 주시기까지 사랑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를 위해서 당신에게는 아까운 것이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항상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다시 당신께로 향하도록 때로는 고통을 통해, 시련을 통해, 가지고 있는 많은 것들을 때로는 잃어버리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샬롬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깨닫게 하십니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했다고 믿었던 많은 일들이 사실은 한순간 한순간 하나님이 붙잡아주신 은혜 때문이었음을 깨닫게 하십니다. 자고 웃고 아침에 일어나고 깨어나는 것이 자신의 힘으로 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여호와께서 자신을 붙들고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자, 어느 모로 보든지 이 시편 속에 흐르는 눈물과 울부짖는 간절한 기도는 왕의 위엄과 풍모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재위에 베옷을 입고 그 옷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서 하나님이 아니면 나를 구원할 분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나를 구원해 주시는 분이시라는 가난한 마음의 고백이 넘치고 있습니다. 다윗이 위대한 인물이었음에는 틀림없지만, 우리와 똑같이 타락한 아담의 피를 물려받은 사람 중 하나였습니다. 그에게도 번영한 시절에 나태함이 깃들였을 것이고, 왕궁이 커졌을 때 하나님보다 자신의 군대를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다윗의 몸과 마음에 붙은 더러운 찌꺼기를 이 시련을 통해 털어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심령에 다시 한 번 부흥을 주셨습니다. 왕이지만 가장 가난한 자가 되어 “여호와만이 자신의 구원입니다.”라고 노래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고백에 동참할 이유를 아주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처럼 온 땅과 하늘 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까지 깊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도 아닙니다. 더욱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제왕의 위치에 있는 사람도 더더욱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한 그가 보지 못하였던 것을 우리는 보았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사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었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나시기 전에 이미 예수였고 그 이름 예수는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즉, 그 아들 예수는 오직 한 가지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으니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죄와 이 세상에 넘치는 죄의 결과인 비참에 에워싸여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을 위해서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시인에게 이 고백을 받아내고 싶으셨던 것처럼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고백을 받아내고 싶어 하십니다. 우리가 마음속에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우리가 받은 구원이 익숙해지는 그 순간, 바로 우리가 신앙에서 물러간 시간입니다. 그래서 매일 매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고 우리를 위해 구원하신 이 사실이 부자연스러워야 하고 익숙해지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 안에서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바깥에서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구원할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것도 당신의 외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는 희생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 능력이 우리를 구하셨고 그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이제 우리는 어떠한 처지에서든지 생사 간에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께, 우리 주 예수께 있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는 믿습니다, 이 고백으로 돌아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B. 주의 복을 구함
두 번째는 마지막으로 주의 복을 구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주님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려주옵소서.”라고 말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비르카테카’라고 되어 있습니다. ‘바라크’라는 복을 주다라는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명사는 ‘베레크’ 혹은 ‘베레카’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복’입니다. 단순한 영적인 복만이 아니라 육체와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복입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쉐르’라고 하는 똑같은 의미를 갖는 복이 있는데, 그 복이 중심이라면 베레카는 이것을 외형으로 확장한 복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특히 언약 백성들에게 이 베레카라는 단어가 사용될 때에는 언제나 아쉐르의 복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신령한 복이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확장되어서 건강과 물질과 그 사람으로 하여금 영육 간에 샬롬의 삶을 살게 하는 모든 복을 포괄적으로 포함하는 용어가 ‘베레카’라는 단어입니다. 시인이 그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주의 베레카를 주의 백성에게 내려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동사로 나오지만 말입니다.
이것은 “주의 백성에게 내려 주옵소서.”라고 할 때 이것은 아마도 두 가지 의미일 것이라 봅니다. 하나는 시인 자신을 하나님의 백성 중 한 사람이라 보고, 하나님이 당신이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그 자비 때문에 나에게도 복을 내려주시옵소서 라는 의미입니다. 뒤집어 이야기 해 보면 “혹시 내가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거나 혹은 죄를 지었어도 하나님이 당신의 언약 백성을 향해 인자하신 분이시니 나를 언약 백성 중 한 사람이라고 여기셔서 나에게 복을 주옵소서.”라는 의미입니다. 또 한 가지는 시인이 지금 이 상황이 자기 개인적인 상황이 아닙니다. 나라가 뿌리 채 흔들리는 정변을 맞이했습니다. 쿠데타 세력이 나라를 정복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 백성들 중 어떤 사람들은 다윗을 미워하며 왕국을 무너뜨리도록 협조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다윗을 따르고 있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속에서 이 시인은 자신을 이 시련에서 건져달라는 기도를 드리다가 문득 가엾은 백성들에게까지 생각이 미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복, 영적인 복 뿐만 아니라 육신의 삶과 모든 것에 있어서 샬롬을 누리게 하시는 그러한 복을 백성 모두에게 베풀어달라는 자신의 인민을 위한 기도였던 것입니다.
언약의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 관계에 있는 모든 백성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백성들을 돌보고 싶어 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랑이 넘치는 자비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러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서 언약관계를 따라서 살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자녀들이라도 때로는 이 시련과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고 시련과 고난을 통해 당신과의 관계로 돌아오게 하십니다. 시인이 겪은 시련은 원수들이 조롱하기에는 그가 악을 행했기 때문에 갖는 인과응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큰 시련 속에서 다윗의 영혼을 다시 한 번 청소한 것과 같습니다. 즉, 다윗의 온 영혼을 다시 한 번 세탁하신 것입니다. 말년에 쏟아지는 하나님의 계시를 순결한 글로 남기게 하시기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쏟아지는 자비와 은혜의 성품들을 깨닫고 그 나라를 온전히 다스리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한 번 이 다윗의 영혼에 큰 부흥을 주시고자 하시는 계획이었습니다.
깊은 시련 속에서 다윗은 두 가지를 신뢰하였습니다. 하나는 어떠한 처지에서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과 그리고 또 한 가지는 하나님이 어떠한 경우에도 말씀으로 자기를 인도하신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다윗의 시편으로 여겨지고 있는 시편 119편을 생각해 보십시오. 시편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그 보다 더 풍부한 경험을 담고 있는 시편이 흔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깨달음과 기쁨, 영광을 노래하고 있는 이 시는 곳곳에서 피 흘리고 신음하고 고통하고 아파하는 비명소리가 함께 묻어져 있었습니다. 모두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순결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시인이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 또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119:67)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과 나를 보여줌으로써 나를 새롭게 합니다. 인생의 어떠한 처지에 있다고 한들 하나님의 말씀을 소홀히 여겨도 좋은 상황은 없습니다. 그러나 특히 시련과 고난 속에 있을 때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할 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의 영향을 받고 그 말씀이 우리의 마음과 행함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다음과 같이 그림처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모든 오류와 잘못은 믿음에서 생겨납니다. 여러분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왜 믿음이 우리에게 나쁜 것을 가져다주는지 말입니다.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믿음인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여기에서 말씀드리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는, 그런 종류의 영적인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 순간 수많은 사람들을 봅니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모든 사물들은 단지 객관적으로 우리 눈에 들어오지 않고 대부분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자, 배가 고플 때 음식점 앞을 지나가면, 견본 식품으로 보이는 맛있는 요리는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먹고 싶은 마음을 갖게끔 만들어 줍니다.
이처럼 모든 사물들이 항상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고 다가옵니다. 그 의미를 붙잡는 것이 믿음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우리는 매 순간 매 순간 믿음으로 인생을 살아갑니다. 그것은 좋은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나쁜 의미에서도 그러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물을 볼 때에 ‘저 것이 좋다, 갖고 싶다, 저 것이 내 마음을 끈다.’고 하는 판단이 생겨나기 이 전에 먼저 내 마음 속에 그러한 사물들과 화합하는 인상이 우리 속에 일어납니다. 그것을 우리들이 욕망이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그쪽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이 있을 때에는 이 욕망이 어떤 사물들의 의미를 해석하게 만들어 줍니다. 우리는 그것을 붙듭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하는 생각 없이 단지 좋아하기 때문에 그것을 덥석 붙들고 싶고 취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굉장히 많은 경우에 우리는 그러한 것들이 거의 이성의 판단을 거치지 않고 사진이 찰칵찰칵 찍히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다가오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은 진리의 빛입니다. 진리의 빛. 그래서 그 진리의 빛이 비췰 때 우리에게 그 사물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우리는 깨닫습니다. 마음은 갖고자 하고 마음은 거기에 끌리는데 진리가 우리를 설득합니다. 그것은 썩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녁 때 어느 신학대학교에 가서 특강을 하고 집에 오는 길에 너무 배가 고파서 교회 근처에서 밥을 먹고 왔습니다. 음식점을 가보면, 처음 갔는데 너무 맛이 있어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두 번 가고 싶을 정도로 맛이 있지는 않은 그런 집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맛이 있습니다. 맛은 있는데 먹으면서도 이성이 계속 작동합니다. 튀겼습니다. 설탕을 뿌렸습니다. 설탕에 볶습니다. 계속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떠오릅니다. 너무 맛이 있는데 이성은 항상 작동을 하면서 ‘너무 많이 먹으면 안 되는데.’ 하면서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보면서 마음이 확, 확, 확 끌립니다. 그냥 아무런 제약 없이 그렇게 마음이 끌리는 대로 살면 그 삶은 결국 짐승 같은 삶이 됩니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뭐냐 하면 진리의 빛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의 빛이 확 비취면서 그것이 무엇인지, 마치 우리가 그런 음식을 먹었을 때 마지막에 우리의 몸이 어떻게 되게 만드는지, 모두 보여줍니다.
(예화) 지금도 금연학교에 들어가면 보여 주는 것이 담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의 마지막 모습, 짜장에 범벅된 것 같은 폐의 사진을 보여줍니다. 다 알고 나면 엄청난 혐오감이 듭니다. 모든 사물들은 우리에게 본질적인 것을 감추면서 다가옵니다. 저 또한 담배를 굉장히 좋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회심하고도 한 4년 동안 담배를 피웠습니다. 너무 유익한 것이 많았습니다. 없이 살 수 없을 정도로 말입니다. 후배들이 저를 보면서 “형님은 정말 담배와 혼인한 사람 같아요.” 말할 정도였습니다. 멋있고 맛있고. 그런데 그렇게 즐기는 사람은 애써서 담배가 우리에게 주는 무시무시한 해악들을 피합니다. 마약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여주지 않습니다.
진리는 전말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결국 무엇입니까?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버리게 하고, 그리고 내가 가던 길을 멈추게 하는 효과를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그 진리의 빛이 우리에게 정말 값어치 있게 사랑할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줍니다. 진리의 유익은 뭐냐 하면 그 진리의 빛을 받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앞에 있는 사물들의 질서를 올바르게 잡도록 하는 것이 바로 진리가 가지고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되던 순서를 진리의 빛이 비췄을 때 이렇게, 이렇게 바꿔 줍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가 가져다주는 힘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할 때 자기가 좋아하던 사랑의 순서를 버리고 진리가 가르쳐주는 순서를 따라 그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됩니다. 성령이 우리의 마음에 오실 때 하시는 가장 결정적인 작용은 진리를 사랑하게끔 해 주십니다. 그 진리는 아주 가까이 있는 성경이 바로 진리입니다. 진리인 성경을 사랑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바르지 않은 우리 마음의 사랑의 질서들을 올바르게 잡아줍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그것은 힘입니다. 사랑하지 않을 때에는 발휘되지 않던 힘이 사랑하면 발휘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행동으로 산출할 수 있는 힘을 그 사랑이 가져다줍니다. 그래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인데 사랑이 그것을 하게 합니다.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좇고 용기를 주고 행위를 산출할 수 있는 힘을 줍니다. 믿음은 너무 주관적인 작용이기 때문에 그래서 인간에게는 아무거나 믿지 않을 수 있도록, 자기가 믿고 마음에 끌리는 것이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하게 하려면 진리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때, 온갖 표상에 끌리던 거짓된 믿음들이 파쇄 되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짜 아름다운 것을 향하여 우리를 이끕니다. 모든 이 세상의 아름다운 것들은 하나님 때문에 아름답고, 모든 추한 것들은 인간들 때문에 추합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의 원천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항상 그 말씀은 우리를 아름다운 것으로 데려가고 아름다운 것들이 있는 모든 그럴싸한 아름다움이 결국 완전한 아름다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이끌려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고 영육 간에 샬롬을 누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시인이 구하고 있는 주의 복입니다. 하나님이 복 주신 삶이 어떤 삶이겠습니까?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큰 복을 내려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부어 주셨을 때 여러분들은 어떤 상태가 되겠습니까? 어마어마하게 받은 재물?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샬롬을 가져다줍니까? 수많은 사람들을 발아래 굴복 시키는 권력? 그것이 우리에게 샬롬을 가져다줍니까? 그 자체는 결코 샬롬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마음을 올바른 믿음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가장 큰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 아름다움 때문에 행복하게 만듭니다. 말씀은 우리의 마음이 그쪽으로 끌리도록 만듭니다. 다른 쪽으로 끌려갔던 마음을 올바르게 붙들어 줘서 그곳으로 돌아오게 해 줍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결국 우리의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 주님과의 관계를 누리는 것임을 깨닫게 만들어 줍니다.
Ⅲ. 결론과 적용
시인은 이러한 깊은 시련에 있을 때마다 언제나 자신을 깊은 웅덩이에서 건지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그의 어두운 영혼을 찬란하게 비취는 말씀의 지식으로 그에게 임하였습니다. 한 번의 시련이 지나가고 소나기같은 환란이 지나가고 나면 그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무지개가 떴습니다. 예전보다 더 큰 시련을 겪었지만 예전보다 더 아름다운 하나님을 만났고 더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비록 죄 짓고 악을 행하고 불순종하고 악인들에게 짓밟히는 시련을 견뎠지만 결국 한걸음 한걸음 주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성도가 되어 갔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시련을 통해 결국 이 두 개의 고백을 하나님은 이 시인에게 받아내십니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복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라는 고백 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은 주님 없이 씩씩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세상에서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어린 아이 같은 불안해하는 마음입니다. 매순간 인파 속에서 어린아이가 꼭 잡은 엄마의 손을 놓지 않기 위해서 엄마의 손가락을 더듬는 것 같은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가 주님이 주신 많은 재산과 재능, 권력, 좋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것들이 나의 구원이 아닙니다.”라고 고백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손을 내밀어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 인파 속에서 오직 주님의 손을 붙잡고 싶어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다시 한 번 하나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떠한 이유에든지 영혼의 곤고함 속에 있는 사람들은 망망한 바다와 같은 인생길에서 길 잃었음을 생각하십시오. 자, 네비게이션도 없고 발달한 항해 도구도 없었던 시절에 배가 항로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풍랑을 만납니다. 그때, 제일 먼저 뱃사람들이 무엇을 하겠습니까? 아마 풍랑이 멈추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하늘의 구름이 걷히고 별이 초롱초롱한 밤하늘이 나타나기를 기다릴 것입니다. 그리고 황급히 배 밑바닥에 감추어 두었던 해도와 컴퍼스, 분도기, 자, 망원경을 찾을 것입니다. 별자를 보고 각도를 재고 자를 그려 선을 이으며 항로를 찾지 않겠습니까? 시련 속에서 방황하지 말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컴퍼스, 분도기, 자를 찾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홀로 조용히 하나님의 말씀 앞에 무릎을 꿇고 내가 어디에 와 있는지 보게 해달라고 간구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십시오. 어쩌면 하나님이 이러한 시련과 고난을 통해서 오늘 시인 다윗처럼 그 영혼을 새롭게 하사 남은 인생을 하나님의 영광 위해 살게 하시기 위함인 줄 누가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을 꼭 붙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변화 받고 다시 한 번 이 단순한 고백을 여러분들의 고백으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