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0
목 차
악인에 대하여 드리는 기도(시 10:1-4) 119
악인의 마음과 길(시 10:5-10) 124
경건한 자가 핍박을 받을 때(시 10:11-14) 128
교만한 자와 경솔한 자(시 10:15-18) 131
악인에 대하여 드리는 기도
“여호와여 어찌하여 멀리 서시며 어찌하여 환난 때에 숨으시나이까 악한 자가 교만하여 가련한
자를 심히 군박하오니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악인은 그 마음의 소욕을 자랑하며
탐리하는 자는 여호와를 배반하여 멸시하나이다 악인은 그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치 아니하신다 하며 그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시 10:1-4)
여호와여 깨소서
시편에 자주 나오는 표현 중 하나님을 향해 무례하게 보이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호와여 깨소서.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여호와여 주무시나이까.” 분명히 성경은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신다고 되어 있는데 마치 하나님이 태만한 잠에 빠진 것처럼 “주무시나이까. 깨서 일어나소서.” 등등의 표현들을 씁니다. 성경을 기록할 때 성경 말씀을 보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기록하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읽고 보는 대상도 사람입니다. 성경은 두 개의 관점 사이를 오가면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관점을 본질적인 관점이라고 한다면, 또 하나의 관점은 현상적인 관점입니다.
예를 들면, 아침이 되면 그 날이 환하게 밝아 오고 저녁이 되면 해가 집니다. 그런데 본질적으로 보면 해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지구가 움직이는 것입니다. 해는 가만히 있고 지구가 움직이는 것인데 사람들은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고 이야기합니다. 지구가 한 바퀴 자전을 했다는 것은 본질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고, 다시 동쪽으로 떠오른다는 것은 현상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말입니다. 본질은 잘 모르지만, 현상적인 것은 인간의 경험을 통해서 잘 아는 바이고, 본질적인 것은 사물의 본래의 원리가 어떠한가를 보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서로 교차하는 것입니다. 본질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은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돌보시지 않는 것 같은 시간들을 현상적으로 경험할 수가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인간들, 특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악인에게 고통을 받을 때 경험하는 현상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혹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기 위해서 인생의 길을 걸어가는데, 고난과 시련이 닥치고 악인들이 괴롭게 하고 자신들에게 고통을 주고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난과 압박을 가하고 시련이 닥쳐오게 됩니다. 고난과 시련이 닥치고 어려움들이 찾아오게 될 때 원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빨리 간섭하셔서 자신을 건져주시고 악인들을 멸하셔서 하나님의 공평하심을 보여주시기를 원하는데 그 일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조급해진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어찌하여 숨으시나이까?”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표현입니다. “어찌하여 현실을 외면하시는 것처럼, 하나님 당신의 공평을 펴시지 않으십니까?”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바로 그 때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악인들이 처처에 횡행하고 믿는 당신의 자녀를 박해하는 것을 하나님이 모르시거나 못 보셔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더 큰 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일들을 이루어 가고 계시거나, 당신의 자녀로 하여금 더 간절히 매달리게 하시고 고난 가운데 건져주시는 과정을 통해 그들을 놀랍게 변화시키시려는 마음과 뜻을 보이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기가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그러면서 두 번째 나오는 이야기는 “빠지게 하소서” 악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이 주신 인간이 걸어가야 할 길을 택하는 게 아니라, 자신들이 생각해낸 수많은 인생의 꾀들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한 꾀들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꾀들을 따라 살아가는 악인들이 시인을 압박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제가 게으름이라는 설교 시리즈를 할 때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은 항상 똑바른 길을 걸어가려고 애를 씁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실수로 인해 무엇이 잘못되었을 때도 정면으로 승부를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했으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사람에게 잘못한 게 있으면 정식으로 용서를 빌고, 일이 잘못되어서 편법으로 흘러갔으면 즉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돌아와서 정도를 갑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안 합니다. 항상 쉬운 길을 걸어가려고 합니다. 편법, 불법을 행하고 양심을 속여서 적은 힘을 들이고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습니다. 그게 바로 악인들이 걸어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쉽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해진 원칙을 따라 올바른 길을 도리대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고난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한 점에서 악인들은 하나님의 자녀,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과 인생을 승부할 때 항상 유리한 고지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쓸 수 있는 방법은 많고, 한 쪽은 쓸 수 있는 방법이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비슷한 힘을 가진 두 사람이 경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전혀 반칙을 쓰지 않고 규칙대로만 경기를 해야 하고, 나머지 한 사람은 얼마든지 반칙을 써도 괜찮다고 하고 경기를 진행한다면, 그 경기가 누구에게 유리하겠습니까? 두 말 할 필요도 없이 반칙을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도 그렇게 살고자 하는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42.195Km 마라톤 경기를 하는데 한 사람은 계속 뛰어야 하고, 한 사람은 가끔 자전거를 타도 괜찮다고 만약에 한다면 누가 이기겠습니까? 그 때 유혹을 느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자녀들도 똑같은 유혹을 느낍니다.
그 때 자신도 그러한 방법을 택하면 두 가지 문제가 생겨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인생 가운데 가장 커다란 재산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것이 보장이 안 됩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어떤 가정은 돈 때문에 싸우다가 깨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돈이 많습니다. 그러면 행복합니까? 돈 많은 가정도 깨어집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들에게 돈을 유산으로 물려주면 결코 그 가정의 행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공부를 많이 시키면 되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이게 무엇으로도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은혜를 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떤 사람이 나를 굉장히 가슴 아프게 합니다. 화가 나고 속에서 견디기 힘듭니다. 싸우지는 않았지만 ‘그래. 너라는 인간이 그런 놈이지. 오늘이 끝이다. 이제부터 너라는 인간과 상종을 안 한다.’ 그러면서 마음의 문을 쾅하고 닫아 버립니다. 은혜가 필요 없습니다. 무슨 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들 때 ‘너 같은 인간과는 이제 끝이다.’ 하면서 마음을 접어 버렸는데 무슨 은혜가 필요하겠습니까? 안 보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정말 밉다. 저 사람은 어떻게 저렇게 생겨 먹었을까? 정말 못 됐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안 기뻐하시지. 어떻게 하든지 사랑하면서 내 마음을 다스려야지.’ 그 다음은 어떻게 됩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고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항상 좋은 일만 일어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지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면 그 문제들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계기가 됩니다. 그런데 문을 닫아 버리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좌절감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시인이 그러한 것들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저희로 자기의 베푼 꾀에 빠지게 하소서”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하는 많은 무리들은 자신에게 고통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는 무리들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세워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도 악한 꾀를 써서 같이 궤휼을 행하려고 하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악한 꾀에 빠지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 앞에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의 정체를 하나님 앞에 호소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멸시하며 하나님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인정하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매우 작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이 없으면 인간은 모든 것을 다 행할 수 있는 폭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하는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손해 보는 것 같아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으면서 매일 매일 인생을 걸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악인의 마음과 길
“저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저의 안력이 미치지 못하오며 저는 그 모든 대적을 멸시하여
그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요동치 아니하며 대대로 환난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나이다
그 입에는 저주와 궤휼과 포학이 충만하며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저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이며 그 눈은 외로운 자를 엿보나이다
사자가 그 굴혈에 엎드림 같이 저가 은밀한 곳에 엎드려 가련한 자를 잡으려고 기다리며
자기 그물을 끌어 가련한 자를 잡나이다”(시 10:5-10)
악인의 마음
하나님의 자녀, 의로운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고통을 때때로 하나님께서 침묵하시는 때가 있습니다. 본문을 보면 악인이 어떤 마음의 상태이며, 어떤 일을 행하며, 그 결과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이 어떻게 고통을 당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일 먼저 그의 마음의 상태는 “나는 영영히 요통치 아니하리라”고 한데 나와 있습니다. 즉, 자기의 길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기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하며 걸어가는데, 그 길이 형통하기 때문에 마음에 안심을 합니다. “그것이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죄악 중에 형통하게 사는 데 그 상태가 흔들리지 않고 영원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끼는 평화는 두 가지 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와 자신으로부터 오는 평화입니다. 첫째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는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오는 평화입니다. 이것이 ‘샬롬’입니다. 하나님과의 화목을 통해서 마음에 놀라운 평화가 오고 마음에 찾아온 놀라운 평화의 질서가 자기 삶 안에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진정한 평화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평화의 정체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고 회개하려고 애를 쓰려고 하는 이유는 우리 죄를 참회하고 은혜를 받으면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마음에 평안이 옵니다. 평안이 오면 두 가지 일이 일어나는데, 첫째는 나 밖에 있는 많은 사물들의 질서를 보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평화가 옵니다. 마음의 평화가 이뤄지지 않았을 때는 ‘우리 엄마는 왜 저럴까? 내 자식은 왜 저럴까?’ 하면서 그런 관계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목이 이루어지고 나면 그런 관계를 받아들일 수 있는 평화가 생겨납니다. 그래서 평안하게 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지고 놀라운 평화가 이루어지면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사물들의 질서가 바뀝니다. 하나님이 화목을 주시면 내가 받아들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사물들의 질서를 바꿔주십니다. 이것을 섭리 속에서 베풀어지는 축복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열어 가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내적인 평화를 주심으로써 평안이 이루어지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평화입니다.
두 번째는 거짓된 평화입니다. 자기 스스로 그런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평안이 그런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의지하는 데서 오는 평화이고, 후자는 내가 중심에 서있으나 고난과 환난을 받지 않는데서 오는 평화입니다. 악인에게도 그런 종류의 평화가 있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영원한 것처럼 생각하고 나는 견고하고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악인의 길
그리고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야기 하는데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악이라는 것은 자기가 중심에서 서서 자기의 생각을 가지고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질서와 모든 것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데 그것에 방해가 되는 사람들을 정복해나가는 방법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입니다. 악인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믿는 의로운 백성들을 싫어하는 이유는 자기 질서 속에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아주지 않으니까 강력하게 핍박을 하는 것입니다. 힘으로써 의인을 굴복시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악인들이 의로운 자를 박해하고 의로운 자는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악인들에게 고난을 받도록 내버려 두십니다. 그게 바로 “여호와여 주무시나이까, 여호와여 깨어나소서”라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세상에서 악인들도 당신의 용도에 합당하게 쓰여지도록 창조하셨습니다. 병원에서 병원체를 보관해서 그것으로 예방주사를 놓고 사람들을 건강하게 하듯이, 하나님도 악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의로운 백성들을 더 정결케 하시고 당신을 의지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십니다. 그들의 악을 사용하셔서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 이 세상에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것입니다.
고통을 통해 드리는 기도
본문을 보면 시인이 부르짖습니다. “어찌하여 악인이 의로운 자를 핍박하고 엎드러지게 하시고 올무를 놓을 때 걸리게 하시고 고통을 받게 하십니까?” 이것 자체가 의로운 백성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을 보여줍니다. 악인들의 박해와 고난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을 사람들이 악과 고통 속에서 아파하면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은 고통을 받으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랑하면서 살려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마음에 안 듭니다. ‘나쁜 놈, 미운 녀석’ 그러면서 마음의 문을 쾅 닫아버렸습니다. 괘씸하고 상종도 하기 싫습니다. 하지만 자꾸 마음에 ‘이게 내가 살아야할 삶인가?’ 반문이 생깁니다. 그 때 주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사랑하라.’ 마음에는 보기 싫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명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데 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모든 방면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게으르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게으름이 몸에 배었지만 이렇게 살면 안 될 것 같습니다. 노력을 해도 안 됩니다. 8시까지 자지 않고는 움직여지지 않고 시간만 나면 요령을 피우고 게으름을 부립니다. 이러면 안 되겠기에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자신에게 있는 나쁜 습관, 자신에게 속한 격한 미움이 오히려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는 은혜의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악인들로부터 받는 박해와 핍박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시험하셔서 참으로 당신에게 속한 자식인지, 아니면 부패하고 뒤로 물러간 사람인지를 드러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깊이 뉘우치고 깨닫도록 만들어주십니다. 그래서 고난도 슬픔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 고난과 아픔을 통해 주님을 더 굳게 붙들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자가 핍박 받을 때
“그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하나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옵소서
하나님이여 손을 드옵소서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옵소서 어찌하여 악인이 하나님을 멸시하여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주는 감찰하지 아니하리라 하나이까 주께서는 보셨나이다
주는 재앙과 원한을 감찰하시고 주의 손으로 갚으려 하시오니 외로운 자가 주를 의지하나이다
주는 벌써부터 고아를 도우시는 이시니이다”(시 10:11-14)
악인들로부터 핍박과 박해
11절에서 악인이 어떤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박해하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눈을 떠서 자기들을 살피시고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감찰하지 아니하시며 하나님이 우리를 판단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바로 실천적 무신론자의 삶입니다. 이것은 믿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자신의 삶 속에 간섭하시고 생각하시고 판단하신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행위를 감찰하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판단하신다는 그런 생각이 없다면 실제의 삶은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악인들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시인이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녀들을,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쓰디쓴 고통을 당하도록 내버려두시는 것 같아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판단하시지 않는다거나 악인을 두둔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심으로서 자기의 사랑하는 자녀들이 고통과 핍박 속에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게 하시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 안에 있는 죄의 찌끼들을 깨끗이 씻어 순전한 사람들로 만드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많은 당신의 자녀들이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 아니라 그의 내면의 세계까지도 순전해져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람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다양한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들을 거룩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니까 이것들이 하나님을 믿는 자녀들에게는 하나의 짐이 됩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은 이것을 십자가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신자를 성숙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모든 고통과 환경들, 이것을 십자가라고 본 것입니다.
어쨌든, 그렇게 악인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경건한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의지하고 사랑하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도구들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혼자 힘으로 아등바등 살려고 했던 독립하는 마음, 죄를 좋아하는 부패한 마음,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는 분산된 마음들을 하나님께서 고난을 통해서 바꾸고 고치시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악인들은 ‘거 봐라 하나님이 없지 않냐? 우리가 아무리 이렇게 행한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간섭하신다거나 그런 것 없다’고 말하면서 마음 놓고 악을 일삼습니다.
신자들이 하나님을 의지함
14절의 기도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고아와 같이 외로운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분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의지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신자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시는 가장 기본적인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신자의 의존 안에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의존하는 것은 곧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사랑은 항상 의존의 감정을 포함합니다. 의존의 감정을 포함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사랑을 제외하고는 모든 인간의 사랑은 반드시 의존의 감정을 포함합니다. 그 대상이 하나님이든지 인간이든지 항상 의존의 감정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을 많이 의지하는 사람은 그 신앙 안에서 하나님 없이 살 수 없다고 하는 의존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존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모두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마음으로부터 시작이 되어서 마음에서 열매를 맺고 마음을 통해서 삶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신자가 안팎이 모두 똑같은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 크나큰 은혜, 절대적 의지함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늘 의지하면서 하나님을 붙들며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만한 자와 경솔한 자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여호와께서는 영원무궁하도록 왕이시니 이방 나라들이 주의 땅에서 멸망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셨사오니 그들의 마음을 준비하시며 귀를 기울여 들으시고
고아와 압제 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시 10:15-18)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10편의 마지막 부분에서 시인은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소원을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 이 소원은 자신에게 물질을 많이 주셔서 부귀와 영화를 달라는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이 소원은 하나님이 공평하게 행하시는 분이심을 보여 달라는 탄원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살아계심으로서 이 모든 세상을 통치하고 다스리고 계시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보여 달라는 간구였습니다. 그것을 두 가지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악인의 팔을 꺾어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구약에서 ‘팔’은 ‘권능과 힘’ 이런 것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사야 53장의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는 ‘하나님의 능력이 누구에게 나타나셨느냐’는 뜻입니다.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에서 악인의 팔은 활동하는 팔입니다. 힘이나 완력이 행사되는 팔을 꺾어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힘이 센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팔을 꺾어버리면 그의 완력의 대부분을 꺾여 버립니다. ‘팔을 꺾어주시옵소서’ 왜냐하면 악인은 자신의 힘을 고아와 과부와 같이 약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압제하는데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힘으로 자기를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위할 수 있는 한도 까지는 최대한 이익을 확보합니다. 그래서 아무 저항도 할 수 없는 사람부터 먼저 공격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팔을 꺾지 아니하시면 힘이 없고 연약한 사람들이 강탈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들의 팔을 꺾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호소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두려워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힘과 자원이 있어도 제 멋대로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절제하고, 자신의 힘이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힘을 행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두려워하게 되면,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향해서도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서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갖고 있게 되면 그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데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에게 주신 힘과 자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자원을 빼앗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께 ‘그들의 팔을 꺾어 주십시오.’라는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아뢰고 있는 것입니다.
겸손한 자의 소원을 들으소서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시오.’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악인과 겸손한 자가 둘이 대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 앞에서 자기가 얼마나 큰 사랑과 은혜를 많이 입은 사람인가 깨달은 사람입니다. 또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 앞에서 용서의 은총을 깨달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묵상하면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깊이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깊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성찰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은혜를 받게 되면 은혜 자체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깊이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구나.’ 그리고 자신이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를 더 받으면 받을수록 점점 더 겸손해집니다.
은혜, 그 자체는 사랑의 감화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해 보십시오. 누군가로부터 사랑을 받을 때, 사랑해주는 이의 지위나 존재가 여러분들보다 뛰어나면, 사랑해주는 사람 앞에서 나갈 때 겸손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은 그 사랑을 받으면서 자기가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 하는 것을 깨닫는데서 오는 겸손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자기 같은 죄인을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모르면서 자기를 한없이 낮춘다면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비굴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비굴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겸비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결론과 적용
여기에서 우리는 어떤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악인이 자기 힘을 가난하고 연약한 사람에게 행사하면서 제멋대로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 앞에 교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가 떨어지고 나면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주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은혜에는 그렇게 놀라운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우리들이 하나님께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하나님을 계속 의지하며 살게 만들어 주는 은혜의 힘은, 곧 의지하는 힘입니다. 은혜를 받게 되면 하나님께 대하여 아주 의존적이 됩니다. 은혜가 없을 때에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으로 제멋대로 살 수 있다는 의욕이 넘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주님을 깊이 의존할 수 있도록 마음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하지, 은혜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기도를 많이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존하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고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매일매일 나가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시편10편 강해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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