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3일 새벽예배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히 12:5)
녹취자: 이한슬
여기 갑자기 징계에 대한 이야기가 꽤 길게 나옵니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이 앞에 나오는 낙심하지 말고 예수를 바라보면서 살아야지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는 삶이고, 그렇게 될 때에 온전케 되는 삶을 살 수 있고, 또 그것이 곧 믿음으로 살아서 죄와 더불어 싸우되 피 흘리기까지 싸우는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미끄러지지 않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해 나가면서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미끄러집니다.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죄와 더불어 싸우는 것 같지만 피 흘리기까지 싸우고 그러지는 않고, 믿음이 없는 것은 아닌데 믿음이 매우 약해져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살지 못합니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자꾸 미끄러지면서 범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것들이 반복 되면은 하나님이 그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끼? 올바르게 살도록 많이 격려하시고 힘을 주시지만 그러나 계속해서 죄를 선택하고 미끄러지고 그러면은 하나님께서 그를 책망하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렇게 책망을 맞고 나니까 ‘아 이러면 안되겠구나, 내가 하나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해드렸구나, 아 이렇게 살면 안되겠구나, 이렇게 살지 말라고 하나님이 나를 책망하시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심기일전해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그러면 되는데 그게 아니라 이번에는 전에는 하나님이 책망과 징계가 없어서 방종하게 살다가 이번에는 하나님이 야단을 치시면 아예 낙심해 버리는 것입니다. 낙심해 버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낙심해버리면 더 이상 신앙적으로 하나님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서 애쓰고 투정하고 하는 그런 것들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저앉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낙심하지 말라고 여기서 사도가 꾸지람과 하나님께 받은 그 징계가 그 정체가 무엇이고 그리고 징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상세하게 설명해서 하나님의 징계가 하찮지 않게 생각하지도 말고,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 한번 책망과 징계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께 낙심하고 ‘이제 하나님이 나를 버리셨나보다, 그리고 그 하나님과 나 사이에는 이제 좁힐 수 없는 불화가 생겨났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다시 일으켜 세워서 격려해서 다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그리고 예수님이 자기를 거슬러 죄를 짓는 사람들을 향해서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지를 생각나게 만들어주고 그래서 자신도 또한 이 죄와 더불어 싸우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가는 과정이 힘들고 어렵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잘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주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결국은 하나님 뜻대로 다시 죄와 더불어 싸우고 예수님을 추구하며 사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런 의도를 여기 깃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이렇게 그 모순된 행동들이 적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있을 때는 모순된 행동들이 적고, 모든 것이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어서 비교적 질서로운 삶을 삽니다. 그리고 감정의 기복도 비교적 적고 그리고 은혜 가운데 있을 때에는 물론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갈망이 생겨나고 슬퍼하고 또 한편으로는 그런 것이 채워지지 않을 때에 아파하고 또 하나님에 대한 은혜가 많음으로 기뻐하고 그런 면에 대해서는 신령한 면에 대해서는 오히려 감정이 풍부해 집니다. 그렇지만 세속적인 면에서는 감정의 기복이 오히려 줄어듭니다. 그런데 은혜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그러면 이제 모든 것이 다 헝클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아주 충동적이 되어서 주님을 위해서 한번 살아볼 마음을 갖게 되고, 또 어떤 때에는 갑자기 뒤로 물러가서 낙심하고, 어떤 때는 의심을 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이 그런 사람입니다. ‘죽는데까지 따라가겠습니다’하다가 다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고 그러고 또 밖에 나가서 통곡하면서 울고 그러고 또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해서 끌려갔을 때 다시 또 어디론가 사라져서 안보입니다. 이런 기복이 아주 심하고 일관성이 없는 그런 모순된 행동들이 많이 나타납니다. 전에는 하나님께서 적절히 그에게 간섭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자꾸만 뒤로 미끄러지고 죄를 짓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런데 죄와 더불어 피흘리기까지 싸우지도 않고 그리고 또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니까 뒤로 미끌어 집니다. 그리고 자기 죄의 육신 대로 행합니다. 그리고 범죄 합니다. 하나님의 개입과 간섭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징계는 이것에 대한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하나님께서 야단치십니다. 그렇다고 해서 죄 가운데 계속 있고, 자기의 죄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그런 진실한 참회나 깨달음 없이 어느 한 순간에 능력만 주시고 은혜만 주시고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로 돌아와야지 그렇게 돌아오게 하는 것 그것 차제가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다른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할 때에는 그 은혜가 위로와 격려, 용기 이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범죄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납니다. 세상을 더 사랑합니다. 그러니 그 은혜가 하나님의 책망 하나님의 징계 하나님께서 거리감을 두시고 가까이 하지 않으시는 그런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깨달으라고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아이들이 워낙 잘못하고 그럴 때 야단칩니다. 사랑의 한 표현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또 아이들을 야단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떤 때는 마음이 아프고 아이에 대해서 아이가 옳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면 한동안 침묵합니다. 그러고 아이를 지켜보면서 침묵하거나 혹은 일부러 그 아이를 향해서 가지고 있는 부모의 따뜻한 마음이나 배려를 다 거두지 않습니까? 무엇입니까? 아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게 징계라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께서 징계하고 계시다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복수하고 계시다는 이야기와는 다릅니다. ‘네가 이런 죄를 짓고 내 마음을 아프게 했지? 그럼 너도 한번 아파봐라’ 하는 것은 복수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징계하는 것은 복수가 아닙니다. 그건 복수가 아닙니다. 징계는 죄를 짓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불순종을 하고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잘 들리지 않음, 12:05) 죄 때문에 죄 가운데 있고 불순종하기 때문에 죄와 더불어 싸우지도 않고 오히려 죄를 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 자녀들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개입하시는 것입니다. 야단치시는 것입니다. 그건 무엇이냐 하면 아직까지도 그렇게 불순종하고 죄를 선택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계획을 가지고 계시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계획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특권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특권입니다. 뭐가? 이런 징계가 말입니다. 그래서 뒤에 나오기를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징계하시지 않는다면 그러면 우리는 사생자입니다. 남의 집 아이를 가지고 남의 집 부모가 야단을 치겠느냐? 그럴 수 없습니다. 또 노예에게서 낳은 자식을 가지고 야단을 치겠느냐? 노예에게서 자식을 낳았다고 쳐 봅시다. 그러면 신분은 노예입니다. 노예로 태어난 아이가 자기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까? 노예로 태어난 그 아이를 그 대갓집에 주인이 그 아이를 친절하게 불러다가 왜 이런 장난을 하니 왜 이렇게 하니 하고 야단을 치겠느냐 말입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고 죄를 짓고 할 때 하나님이 야단치시고 개입하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커다란 특권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징계를 받아서 낙심을 해서 그것 때문에 뒤로 물러나고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않는 이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대단히 오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잘못살고 하나님의 뜻대로 못살고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 야단을 맞았다면 ‘그것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다시 아직까지도 하나님이 나를 향해 뜻을 가지고 계시구나,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아버지 이시구나, 왜 이렇게 하나님이 나를 향해서 노여워하시는 것을 보면 내가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구나’ 이렇게 격려를 받으면서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지 그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야단치시는 것이지 어리석게 하나님께서 참 아들이기 때문에 징계를 하고 야단을 치면서 그를 다시 격려를 해서 예수를 바라보며 살게 하시니까 그 야단을 맞은 것 때문에 뒤로 물러가서 오히려 낙심해서 이제는 하나님이 나에게 복수하시나보다 이제는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모든 길이 차단됐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을 기회로 해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지 않고 죄와 더불어 타협하고 오히려 그 죄 가운데 스스로 낙심해서 그 죄 가운데 거해버리는 그러한 삶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낙심하고, 어떤 이유에서 든지간에 낙심하고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징계나 책망 속에서 이제는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그 모든 낙망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할 때 항상 양심에 거리끼는 죄가 없이 순종하고 하나님 사랑하고 그리고 살아야합니다. 그 유익은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모든 삶은 기도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치열하게 분투해서 살면 하루를 살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할 때 우리에게 힘이 솟습니다. 그러면 뒤로 물러가고 불순종하고 살면 많은 죄를 짓게 됩니다. 그렇게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자 할 때 우리의 양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네가 이렇게 죄를 짓고 이렇게 불순종하고도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느냐,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봐라 이렇게 하나님이 야단치시고 징계하시는데 이것은 바로 네가 한 모든 일들에 대한 정당한 대가이다, 그리고 양심도 송사하고 율법도 송사합니다. 그것은 어떻게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을 계기로 해서 오히려 하나님께 나아갈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러고 나면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하나님께 나아갈 모든 길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두말할 필요도 없이 죄를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는 양심의 가책을 안 느끼는 사람들만 죄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지나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들도 죄에 빠집니다. 그래서 지나친 양심의 가책과 율법의 송사를 받으면서 결국은 그것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해서 두려운 마음을 품고 모든 희망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낙심한 마음 때문에 죄 가운데서 거하는 자신의 삶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그러지 말아야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를 바라보고 믿음을 따라서 사는 그 일에는 항상 승리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니지만 너희들이 범죄하고 낙심해서 뒤로 물러갈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인격적으로 하나님이 부르시면 어느 순간에는 하나님이 야단치십니다. 그때 너희는 깨달아야 합니다. 아 주님이 이렇게 야단치시는 것 보니까 우리가 잘못 살았구나, 그리고 여전히 주님이 내 인생을 향해 계획을 가지고 계시는 구나, 내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구나, 일어나야겠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구나, 결심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ㅎ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새 힘을 얻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의 삶입니다. 절대 하나님은 우리가 무언가 잘못 했을 때 보복하시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시고 그런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학교는 참 많이 때렸습니다. 공부 잘하라고 때린 것 일 겁니다. 지금도 잊혀 지지가 않는데 어느 선생님이 그 아이가 너무 잘못했습니다. 화가 나가지고, 마음씨도 좋은 선생님이었는데 너무 열을 받으셔서 애들을 막 칠판에다가 엎어놓고 펑펑 때렸습니다. 요즘 그렇게 때렸으면 아마 경찰서에다가 전화하고 난리가 났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 학교에서는 아이들 때리는 그 방망이를 매년 목공소에 맞춰가지고 한박스씩 들여았습니다. 박달나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야 임마 내가 너 사람되라고 때리는 줄 아냐? 그게 아니라 내가 신경질이 나서 너를 팬다’이러면서 패는 것이었습니다. 그거 진짜 무서운 일이었습니다. 빗말로라도 선생님이 안그래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한 선생님이 있었는데 그 선생님이 수학선생님이고 동경대를 나왔습니다. 실력이 있는 선생님이었는데 할아버지셨습니다. 항상 학생들이 뭘 잘못하면 엎어놓고 때리십니다. 그런데 깎듯이 경어를 쓰십니다. 선생님이 펑펑 대 여섯대 때리고 나서 하시는 말씀이 학생은 이제 가서 다음에 올 때 통닭 한 마리 사가지고 와야됩니다. 왜냐하면 내가 학생을 이렇게 몇 대 때리고 나면 집에 가면 팔이 아파서 견디지를 못합니다. 그러니까 다시 통닭사가지고 와서 나를 잘 공경하면 그거 먹고 네가 잘못하면 다시 때리도록 힘을 축적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똑같이 때리는 건데 맞는 분위기가 완전 다릅니다. ‘내가 너 사람되라고 때리냐? 나는 너가 사람 되던지 말던지 상관없다, 나는 너무 열이 받아서 너를 패는거다’ 라고 그렇게 때리는 선생님하고 그 선생님보다 천천히 때리는 건 아니지만 힘차게 때리면서도 대 여섯대 때리면서도 빙긋이 웃으면서 ‘다음에 올 때 반드시 통닭하나 사 오셔야 합니다. 내가 얼마나 힘든 줄 아십니까? 사람 되라고 그러는 겁니다.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똑같지만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한 고도의 체험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아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책망해주시는 그 징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죄를 짓고 올바르지 않은 길을 가면서도 흐느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영성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의 영성입니다. 그것이 영성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것. 그래서 그 신령한 하나님의 심정과 교통할 수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영성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신령함, 관계에 관한 신령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들이 잘 살고 있으면 더 격려를 받아서 잘못살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징계를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 더더욱 올바로 살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하시면, 징계하셨다면 그래서 올바르게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징계를 통해서 낙심하지 말고 오히려 더 격려를 받으면서 아직까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지키시는구나 하고 다시 일어나서 하나님을 붙들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