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22일 새벽예배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히 13 : 9)
녹취자 : 김용재
여기서 음식 이야기가 나오는데 무슨 말이냐면 먹는 규례들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이단적인 가르침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렇게 온전하지 못한 이런저런 교리를 따르는 것이 그것이 옳지 않고 오히려 은혜로써 마음을 견고하게 하는 그것이 정말 믿음을 따라 사는 그 일에 있어서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가지 새로운 진전을 제시를 하는데 그것이 뭐냐면 예수그리스도께서는 아주 독특한 제사를 드리십니다. 어떤 점에서 독특하냐면 제사장이 제물을 가지고 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이 대 제사장이신 동시에 또한 스스로 제물이 되셔서 자기를 드리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제사에 보면 제사를 드리고 거기에 바쳐진 제물들을 제단에서 수족을 드는 사람들이 먹고 혹은 제사를 드린 모든 사람과 함께 먹고 나누는 것도 있었지만 전혀 그렇게 할 수 없이 완전히 하나님께만 바쳐지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야기 하는 그 배경에 두고 있는 것은 속죄 죄입니다. 대 속죄일에 드리는 속죄제사입니다. 그것은 대 제사장이 직접 하나님 앞에 제사를 직접 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그런 제사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때에는 그렇게 드리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오늘 뭐라고 얘기 하냐면 우리에게 한 제단이 있는데 거기에서 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을 먹을 권이 우리에게 없다고 하면서 피는 제사장이 받아서 성소로 들어가고 그리고 그 육체는 영문밖에 불사른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예수그리스도께서 당하시게 될 그 고난을 바라보고 이루어진 구약의 모든 예표적인 사건들이었습니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당신자신의 몸을 스스로 제사장으로써 자신의 몸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서 그래서 우리에게 이 속죄사역 구원의 도리를 예수님이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피는 성소로 들어가고 몸은 영문밖에 불 사느니라. 그 피는 당신 자신이 제사를 드리고 당신의 피로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화목케 하시고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르는 것과 같이 예수그리스도께서 이제 영문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셔서 거기서 못 박혀서 죽으시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들을 보면서 우리들이 깨닫게 되는 것은 뭐냐면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 얼마나 예수그리스도께서 철저하게 고난을 받고 그리고 희생을 치르셨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결국은 그 피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예수의 피로써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히시던 날 밤에 기도하실 때에 그 땀 속에 피가 배어서 핏방울 같이 땅에 떨어지셨습니다. 그 분의 그 영혼의 고통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들이 어떻게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라고 하는 청교도는 자신의 책속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땅에 있는 순교자들은 육체는 한없이 고통을 받으면서도 영혼은 말할 수 없는 기쁨가운데서 죽어갔지만 우리 예수그리스도는 그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짊어졌기 때문에 육체는 고난을 받아도 영혼은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죄가 가져오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분리 그것을 그대로 감당해야 하는 예수그리스도의 위에 하나님의 심판의 고통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던 것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후가 아니라 이미 그 전부터 드리워졌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가 어긴 율법을 지키심으로써 온전한 제물이 되기 위해서 얼마나 치욕스러운 삶을 살면서 일생을 하나님 앞에서 철저하게 낮추시고 죽으신 것이 우리 주님의 생애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께서는 피로 우리를 구하셨지만 그 많은 영혼의 고통을 당하셨어도 그 고통가운데 행하시는 겟세마네에서의 기도의 피로써는 우리를 구원하실 수 없었습니다.
구약에서 이 피는 생명을 의미하고 피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생명이 죽고 그 피를 남겨서 그것을 받았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를 흘렸다는 것은 생명이 모두 쏟았다라고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죽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했다고 할 때 예수님이 우리가 당하여야 할 모든 죄에 대해서 정죄를 받으시고 그리고 그 죄에 대해서 내려져야 할 그 하나님의 커다란 최종적인 형벌인 그 죽음을 감당하지 않고서는 피를 받으실 수가 없었고 그렇게 흘린 피가 아니면 우리를 구원하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우리를 위해 완전히 죽으신 것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여기에서 깨닫게 되는 것은 그 분이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서 그 희생은 참으로 위대하고 컸는데 그 희생의 효과는 그것보다 훨씬 크고 위대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피가 죽은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다시 살 수 있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옛날에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병에 들어서 죽어 가면 그 부모가 죽어 가면 효자가 손가락을 깨물어서 그 새끼손가락에서 나오는 피를 부모의 입에 넣어줘서 회생하고 하는 의학적으로는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그런 이야기도 나오지 않습니까. 마치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죽으심으로 피를 받아서 이미 완전히 죽은 수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발라서 그들을 다시 하나님 앞에 산 사람으로 만드신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은 아까 묘사했던 것처럼 말로 형용할 수 없이 크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착하고 의로운 사람들을 위해서 죽는 이가 가끔 있지만 누가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죽고 누가 죄인들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버리기까지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더욱이 그렇게 사랑한 사람 중에 죄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런 점에서 예수그리스도의 그 죽음은 참 위대한 죽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는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백성들에게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 구속의 은혜를 나누어 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과 은혜를 입어서 그래서 우리도 예수그리스도의 뒤를 따라가며 살려고 할 때에 그 때에 당하는 그 고난과 어려움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생각 없이 세상에 떠밀려서 육체의 욕심대로 살면 이 세상이 우리를 버릴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흐르는 이 한 시대의 물줄기를 따라서 같이 흘러간다면 그 물줄기를 거스르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와 맞서는 고통 같은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 것들이 굉장히 큽니다.
그래서 거룩하게 살려고 하니까 우리의 육체가 반란을 일으키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 우리의 마음이 반기를 듭니다. 시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구별하고 살려고 하니까 그것을 위해서 살려고 하니까 거기에서 오는 많은 어려움들이 뒤따라 그리고 거기에서 많은 저항들이 있습니다. 때로는 그것이 너무 커서 우리의 믿음이 이 세상에서 결국은 이렇게 약한 것인가 이런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까 매일매일 영문 밖에서 우리를 위해서 피 흘리시고 육체는 영문 밖에서 못 박혀 죽으신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지 아니하고는 우리들이 신앙의 길을 한시도 걸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걸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껍데기는 걸을 수 있겠지만 우리의 몸과 마음을 모두 하나 되게 묶어서 좋으신 하나님께 드리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마음에는 항상 예수님이 살아계셔야 합니다. 그래서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나니 사나 죽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한시도 그 예수님의 생각이 마음에서 떠나지 않아서 그래서 그분께 붙들려 살고 그 분과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그런 경험들이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세 번째는 이것을 통해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고난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 뒤에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으로 나간 장면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능력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여기서 영문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성을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것을 비유로 사도는 영문 안에 만약에 교회라고 한다면 그 영문 밖은 세상이라고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이 교회에서 주님과의 만남이 있는 지성소에서 많은 은혜를 받은 후에는 괴로움과 슬픔이 있는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영문 밖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자의 참된 도리입니다. 은혜를 받고 그것을 주님과 함께 아름다운 주님과의 만남이 있는 은혜의 동산에서 계속 살고 싶지만 하나님이 괴로운 세상에서 할 일이 많아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향해 나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죄의 용서를 받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많은 은혜를 이렇게 영문 안에서 받았을 때에 그것은 이 영문 안에서 단지 그것을 즐거워하고 그것의 유익을 누리기 위해서만 우리에게 주신 것이 아니라 이제 많이 그리스도의 피로써 용서와 은혜를 받았으니까 실제의 삶은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주치고 구원받지 못한 가족들과 끊임없이 맞닥뜨리고 그래서 거기에서 힘든 것을 경험하고 왜? 거기가 바로 우리에게 주신 사명지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를 지고 영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그리스도를 끊임없이 묵상하면서 그것을 자신의 삶속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놀라운 사랑,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된 이유와 목적들을 깨달으면서 그래서 영문 밖에서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참 어렵지 않습니까.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때로는 십자가가 너무나 무겁고 힘이 들면 그래서 하늘나라를 사모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 십자가를 우리들이 타락해서 잠시 버릴 수 있지만 이 십자가가 없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늘 그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고 그리고 그 능력을 지면서 고통을 받을 때 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릴 위해 어떤 고난을 지시고 우리를 건지고 그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하셨는지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고 그래서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래서 무한정 우리들이 그렇게 영문 밖에서 십자가만을 질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식물을 먹느냐 마느냐 하는 이러한 거짓된 규례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써 마음을 굳게 하고 그리고 다시 그 은혜를 받은 후에 영문 밖으로 나아가서 그들을 위해 죽으신 주님을 생각하면서 주님이 이 땅에 계셨더라면 계속 하셨을 그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많이 주실수록 우리들은 은혜와 상관없는 세상으로 가야하고 또 세상에서 주님의 사명을 감당하면서 우리는 은혜의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을 수록 이 세상에서는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혜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 세상의 많은 악과 고통을 보게 됩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것이 주님이 가셨던 길이고 악과 고통으로 얼룩진 이 세상이 주님이 그렇게 사랑하신 세상이었으니 우리도 그렇게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하며 그리고 죄 많은 이 세상에서 분투하며 살면서 우리들은 최종적인 안식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일 장을 살았던 믿음의 증인들의 삶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예수그리스도를 추구하면서 사는 삶이 바로 영문 밖에서 죽으신 예수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삶이라고 사도는 명백하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 앞에 나와 은혜를 구하면 주님이 또 다른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