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아침예배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42:1)
녹취자: 김경애
히브리인들은 시편에 나오는 이 표제를 히브리어 성경에서 1절로 잡습니다. 그리고 이 표제를 상당히 권위 있는 구절로 인식하는 것입니다. 표제에 보면 고라 자손의 시라고 되어있는데 이 고라는 여러분들이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있을 때에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던 반역의 무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매우 잘못한 것으로 판단하셨고 그들이 진을 치고 있는 그곳에 땅이 갈라지면서 고라의 자손들이 땅에 묻혀버리고 땅이 다시 닫히는 전대미문의 끔찍한 심판을 당하게 됩니다. 기록을 보면 아마도 이때 모든 고라의 자손이 멸망을 당한 것은 아니고 일부가 살아서 이스라엘 공동체 속에 남아있었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역사 속에서 모세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던 무리들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부끄러운 종족의 역사를 계속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역사 속에서 주어지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에 의한 다윗 왕국의 건설이었습니다. 알다시피 다윗은 사회의 상층부를 데리고 나라를 세운 사람이 아니라 사울의 정권하에서 억눌리고, 고통 받고, 빚지고, 원통한 사람들을 모아서 그래서 그들을 목자처럼 돌보는 가운데 함께 새로운 나라의 건설의 주역들이 되게 했습니다. 이때에 고라의 자손들이 함께 참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왕국을 세운 다음에 다윗은 그들의 공로를 어여삐 여겨서 성전에서 수종을 들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게 됩니다. 그래서 광야시절에 하나님께 반역하고 모세에게 대들다가 전대미문의 종족의 심판을 당하였던 반역의 무리라는 오명은 점차 씻기고 하나님의 집에 수종을 드는 사랑스러운 일꾼들로 부각되는 것입니다.
학자에 따라서 고라 자손의 시라는 이 말을 고라 자손이 썼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이것을 다윗이 지은 시인데 고라의 후손들이 그것을 간직해왔기 때문에 고라 자손에게 속한 시라는 표제어가 내려오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얼핏 읽어보면 사실은 다윗의 문체를 많이 닮은 것은 사실입니다. 초창기에는 저는 이것이 고라 자손의 시라는 것을 확신했지만 세월이 좀 지나면서 그 확신이 조금 흔들립니다. 왜냐하면 외적인 증거는 우리들이 명확하게 찾을 수 없는데 내적인 문체들이 다윗의 다른 시를 너무 많이 닮았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확신이 좀 흔들리기는 하는데 아직까지 확실하게 제 마음속에서 이것이라고 결정은 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해석을 하든지 간에 그 결론은 마찬가지라고 느껴집니다. 모든 주석가들의 공통된 의견은 이 42편의 문맥이 압살롬의 반역을 받아서 트랜스요르단으로 망명을 갔을 때 이 고라의 자손이 혹은 다윗이 겪은 일을 기록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망명의 길을 떠나기는 했지만 그래도 일국의 국왕이었으니 혈혈단신으로 도망을 갔을 리는 없고 수종을 드는 사람들이 있었을 테니까 그중에 바로 고라의 자손 그 한 사람이 수종을 들고 있었던 여러 사람 중에 하나로서 이 시를 직접 지었거나, 혹은 다윗이 읊은 것을 자기가 기록하였거나, 혹은 다윗이 지은 시를 자신의 마음처럼 읽으면서 보관을 했다고 해석하면 어느 쪽이든지 우리는 그렇게 큰 문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누가 썼다는 것이라기보다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고 고백합니다. 압살롬의 반역은 면밀하게 계획된 것이었고 다윗은 그런 반역이 일어날 가능성조차도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반역은 정말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이미 반역을 일으키기 여러 해 전부터 압살롬은 성문 앞에서 재판을 받으러 나아가는 억울한 백성들의 마음을 도적질하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부친이 나라를 잘못 다스리고 있고 자신은 그 잘못 다스리는 구조 속에서 고통 받은 사람들을 치료하고 돌보는 자애로운 주권자라는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의 수하에서 충성하던 사람들이 배신을 하고 무기를 모으기 시작했고 3년 내지 4년 동안 면밀히 준비된 반란을 어느 날 일으켰을 때 다윗은 그것이 너무나 뜻밖의 일이었기 때문에 벗은 발로 황망하게 감람산으로 도망가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에 지은 시가 바로 시편 3편에 나오는 가운데 ‘여호와는 나의 방패시오, 내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라고 하는 그 시편의 노래입니다. 아무튼 그런 반란을 일으켰을 때 지은 시입니다. 알다시피 당시에는 이미 성소의 중앙화가 이루어져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하신 성소 이외에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었고 제사가 아니면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트랜스요르단으로 쫓겨 와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법궤도 두고 오지 않았습니까? 이런 속에서 시인은 하나님 앞에 마음속에 많은 고통과 억울함이 있었을 것입니다. 왕권을 빼앗기고 사악한 인간들이 마치 하나님이 사울을 버리고 다윗으로 새 나라를 세우신 것처럼 똑같이 다윗이 하나님 앞에 버림받은 사울처럼 하나님의 신은 떠났고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 압살롬에게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다고 하는 인상들을 사람들에게 강력히 심어주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이 시인은 저 원수들을 도말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몸부림치며 기도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기 전에 제일 먼저 자기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커다란 갈망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으로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찾기에 갈급합니다.’ 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우리의 욕망에는 비대체적인 욕망이 있고 대체적인 욕망이 있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싶은 욕망은 향기가 아주 뛰어난 홍차를 보면서 차를 마시고 싶은 마음으로 대치될 수 있고 공부를 하고자하는 욕망은 목회사역에 대한 욕망으로 바뀔 수 있습니다. 결혼을 하고자하는 욕망은 독신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 독신으로 살고 싶은 욕망으로 바뀔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욕망 가운데는 대치할 수 없는 욕망도 있습니다. 무엇에 의해서도 대치할 수 없는 비대체적인 욕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중의 하나가 목마름입니다. 목마름은 목마른 것 대신 예쁜 것을 보여준다고 목마름을 잊을 수도 없고 목마름 대신 아주 맛있는 음식을 준다고 해서 목마름을 상쇄시킬 수도 없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욕망은 좀 더 뚜렷하게 우리의 마음에 다가오면서 우리의 전 존재를 불태우는 욕망이 됩니다. 이 시에는 지리적인 그리고 문화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가을철이 사슴의 교미기입니다. 가을철이 되면 사슴들이 짝짓기를 나옵니다. 그런데 이때 수사슴이 발정기가 됩니다. 사슴이 발정기가 되면 짝을 찾아나서는 것입니다. 그래서 혹은 암컷 사슴을 한 마리를 놓고 다수의 사슴들이 그 뿔로 서로를 겨루면서 목숨을 거는 투쟁을 벌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대치될 수 없는 그런 성적인 욕망을 짐승들이 느끼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사슴이 그런 발정기가 되면 사슴의 신체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 변화가 바로 타는 듯한 목마름입니다. 처음에는 짝짓기를 하려고 들판에 나왔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타는 듯한 목마름을 느끼는 것입니다.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짝짓기가 문제가 아니라 이번에는 대치할 수 없는 목마름이 이 사슴 전체를 엄습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팔레스타인은 어디를 가든지 물을 먹을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때부터 물을 찾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찾다가 찾다가 나중에는 신기루가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들판을 가로지르면서 그 물을 찾아서 달려가 보면 그 신기루는 사라지고 저만치 물러갑니다. 그런 일을 반복하다가 어느 시점에서는 사슴이 쓰러지면서 결국은 거품을 물고 팔레스타인의 뙤약볕 아래서 죽어갑니다. 죽어갈 때는 본능적으로 앞발로 땅을 파면서 죽는다고 합니다. 그런 사슴의 시체를 이 시인은 어려서부터 많이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자신 속에 있는 간절한 갈망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한 Metaphor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마임 즉 물이라는 것은 구약과 신약을 관통하면서 의심할 여지없이 한 가지 사실에 대한 은유로 사용됩니다. 그러면 그 한 가지 사실이 무엇이겠습니까? 구약에 많이 나오지만 이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신약으로 넘어가봅시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자와 대화를 나누셨습니다. ‘네가 길어가려는 이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지만 내가 주는 이 생명의 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사마리아 여자가 ‘나에게 그 물을 주셔서 나로 다시는 여기에 물을 길러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예수님께 탄원을 드렸을 때 예수님은 갑자기 ‘네 남편을 불러오너라.’ 그러셨습니다. 그러자 여자가 ‘내게는 남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셨습니다.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남편이 없다는 네 말이 옳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생수에 관한 비유의 말씀은 구약에 내려오는 이 생수, 마임하임에 대한 그 모든 해석사적인 전통을 그대로 물려받아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에 나오는 그 생수라는 것은 그게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것은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최소한 두 가지 사실을 의심할 수 없이 우리에게 제시하는데 하나는 이 물과 생명의 연관이고 또 하나는 이 물과 하나님과의 연관입니다. 생명과의 연관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 물이 많은 물들이 있습니다. 목욕할 때도 물이 필요하고 빨래를 할 때도 물이 필요합니다. 마당에 먼지가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뿌리는 물도 필요합니다. 이것은 생수가 아닙니다. 이 생수는 무엇이냐 하면 음용하는 물이고 그래서 이 물이 생명을 지탱시켜주는 아주 중요한 생명유지의 수단으로써의 물의 개념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알다시피 우리의 몸속에 전해질과 영양소의 분해라든지 그 모든 작업 속에 물이 없으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물을 어느 정도 먹지 못해서 탈수현상이 일어나게 되면 심각한 몸의 균형이 깨뜨려지고 위기가 오게 됩니다. 우리들이 몸의 탈수현상이 일어날 때 병원에서 황급히 우리에게 링거를 주사하는 이유가 균형이 깨지면서 우리의 몸속에서 물이 빠져나갈 때 몸이 건강에 치명적인 위험을 맞이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의 생명과 관련된 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물이 생명유지에 있어서 대치할 수 없는 필수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지시하는 단어가 바로 생수라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유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육체에 대한 것만이 아닙니다. 육체의 생명은 물리적인 물에 의해서 육체의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 하나의 비유이고 물에 대한 육체의 관계는 영적 생수에 대한 영혼의 관계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육체의 물에 비유할 수 있는 영혼의 생수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도식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나의 이런 설교를 들으면서 이런 질문을 제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에서 보나 아니면 구약에서 신명기 8장의 전통으로 보나 모든 면에서 볼 때 육체와 물의 관계는 영혼과 말씀의 관계와 맞아떨어지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육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육체의 양식과 그 양식 속에는 이미 물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육체를 위한 원동력이 양식이라면 영혼의 양식은 말할 필요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모세가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너희에게 먹이신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이라고 그랬습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이제 해석은 이런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구약에서도 하나님을 만나는 가장 확실한 방편, 하나님이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게 해주시는 방편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되찾게 만들어주는 비결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지적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함의하고 있는 바를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생생하게 경험하게 될 때 그것이 험한 세상을 이기며 살아갈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을 구약에서 율법이라고 혹은 하나님의 진리라고 혹은 규례와 계명이라고 가르쳤던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것이 함의하고 있는 신학적인 의미의 셰이드들이 다르기는 하지만 총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리, 혹은 율법으로 대변되는 것입니다.
특히 이 율법이라는 말이 시편의 전편에 그 하나님의 계시와 관련해서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이 구약에서 이 율법의 개념은 두 가지입니다. 크게 분류할 때 두 가지인데 하나는 고유한 의미의 율법입니다. 그 율법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살아야할 것을 규정해주는 그러한 하나님의 법적인 요구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항상 그런 의미에서 좁은 의미의 율법은 언약관계에 기초하고 율법은 항상 우리에게 우리의 삶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그 기준에 도입할 때 우리는 항상 율법을 어긴 자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율법의 기능이 바로 정죄하는 기능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보면 마틴 루터는 예수를 믿기 시작한 사람에게 곧바로 십계명을 가르치면서 해설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깊고 유장한 의미를 해결해주면 마지막에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느냐하면 ‘내가 율법을 하나도 못 지키고 하나님 앞에 죄인이구나!’ 라는 사실에 도달하면서 그리스도 예수께 피할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 십계명을 가리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요한 칼빈은 반대였습니다. 다 가르치고 마지막에 십계명을 가르치면서 의미를 해석해줌으로써 그것이 우리의 구원받은 성도의 삶을 어떻게 살라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등대의 불빛처럼 우리의 삶을 지로해주는지를 가르치는 용도로 율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사실은 두 가지 다 용도인데 율법에는 세 가지 용도가 있습니다. 그런 율법의 용도를 따라서 우리들이 어느 쪽을 사용하든지 모두 다 유용한 것이겠지만 고유한 의미의 율법은 어쨌든 우리를 정죄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양심은 그 율법을 사용합니다. 양심은 송사하고 송사할 때 이 율법에 호소해서 송사하고 마지막에 이 율법에 의해서 우리들이 정죄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율법을 돌 판에 새기시고 또한 우리의 마음에 새기셔서 율법을 모르는 사람도 스스로 그 양심이 율법이 되어 자기의 행한 바에 대해 판결을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구약에서 시인과 경건한 언약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전달해주는 수단이 되었던 율법은 그런 의미의 율법이 아닙니다. 넓은 의미의 율법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세계와 이 모든 인간들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총체적이고 흠 없는 계시를 가리켜서 율법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하나님의 율법을 찬양했던 시편 여러 곳에서 특별히 119편에서 ‘고난당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라.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길의 빛이요 내 발의 등불입니다. 고난을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고난을 당한 후에는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 율법과 율례에 대한 찬송이 울려 퍼지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던 것입니다. 아무튼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그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 율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서 나오는 이 한 모금의 생수라는 물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또 그 하나님과의 만남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 이루어지는 만남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은혜언약과 행위언약 사이를 가로지르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할 때문에 사람들은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죄를 깨닫기도 했지만 말씀을 통해서 또한 자신들을 용서하고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그 큰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만남을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처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만나는 가장 커다란 위험은 처음에 신학을 공부할 때는 하나님을 더 잘 알고 섬기고 싶어서 신학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과는 관계없는 하나의 과업이 되어버린다고 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이런 위험을 다소 피할 수 없지만 그러나 이런 삶을 반성 없이 계속하게 되면 마지막에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서 영혼을 고장 나게 하여야하는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그래서 신학을 공부하는 속에 깃들여야할 예수를 아는 지식의 함양, 그리고 자신이 예수를 배우며 예수를 닮아가는 영혼의 기쁨, 인격적인 변화, 이런 것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1999년도에 제가 동부에 왔을 때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세미너리에서 제가 설교를 했습니다. 한국 학생들이 모여서 그때 한국 학생들이 지금은 별로 없었는데 그때는 4, 50명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필라델피아에 있는 한 교회에서 집회를 하는데 그때 만났던 학생들을 지금 만나면 머리가 허연 중견목회자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설교가 끝나고 복도에서 어느 학생이 오더니 나를 붙들고 어린아이처럼 펑펑 우는 것입니다. 왜 그러느냐고 그랬더니 ‘목사님, 우리는 너무 곤고해요!’ 지금도 그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너무 곤고합니다. 영혼을 팔아서 신학을 공부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학교 원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러지 마십시오. 그것은 자기의 개인적인 문제입니다. 물론 학교에도 책임이 있겠지만 학교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래서 여러 가지 이야기로 위로를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결국은 무엇이냐 하면 신학을 공부하면서 마음속에 이 생수의 물이 흘러야합니다. 여러분! 하천에 물이 흐릅니다. 우리들이 하천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물이 흐르게 되면 막 생태계가 형성되면서 수초들이 생겨나고 개울 주변에 아주 아름다운 생태환경이 조성됩니다. 그런데 강수량이 부족해서 물이 마릅니다. 우리들이 Wadi 라고 그럽니다. 무수천이라고 그러는데 무수천이 되면 생태계가 완전히 없어지느냐 하면 아닙니다. 생태계가 변합니다. 많은 물을 먹으면서 잎과 가지, 줄기를 내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식물들이 사라지고 수초사이에 깃들어 살던 그 많은 수중생물들이 사라지고 가시 같은 것들이 돋아나면서 몸에 습기를 거의 빼앗기지 않는 거친 식물들이 자라기 시작합니다. 똑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없으면 죽습니까? 삽니다. 은혜가 떨어져서 죽었다는 사람을 보았습니까? 잘 삽니다. 그런데 어떻게 삽니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생태계가 이 마음속에서 형성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아가서 5장에 보면 동산의 중앙에 우물이 있고 우물에서 봉한 샘이 나오면서 그것이 휘돌아 개울이 흐르면서 왕의 동산을 만드는 것입니다. 고벨화와 그 다음에 많은 이름도 다 거명할 수 없는 수많은 아름다운 약초들과 진귀한 꽃들이 열매들이 맺히면서 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물이 말라버리면 그 모든 것들이 다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주 거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혹시 프란시스 쉐퍼가 쓴 Evangelical Disaster 라는 책을 읽어보셨습니까? 거기에 보면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신학교에 입학했는데 불행하게 그 신학교가 극자유주의 신학교였습니다. 한 사람이 그런 신학을 공부하면서 얼마나 비참하게 망가져 가는지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마지막에는 Spiritualism 에 빠져서 강신술을 쫒아가는 사람으로 무너져가는 장면을 그리면서 마지막에 그의 고백을 들려줍니다. ‘나는 생명의 떡을 얻기 위해서 신학교를 들어갔지만 신학교는 나에게 돌을 주었습니다.’ 그렇게 공부해서는 안 됩니다. 누구를 위한 공부입니까? 그까짓 것이 누구를 위한 공부입니까?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느냐하면 하나님 앞에 주님을 만나고자하는 마음을 가져야합니다. 지금은 다 은퇴하셨는데 주선애 교수라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바로 이 동부에 와서 교육학을 공부했는데 옛날에 지금 내가 말한 것처럼 똑같이 너무 곤고해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때는 한국 학생들도 거의 없을 때인데 새벽마다 일어나서 창고에 가서 새벽에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많은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친구들이 묻습니다. ‘너 그렇게 생기 있고 생명력 있는 삶의 비결이 무엇이냐?’ ‘나 새벽에 기도한다.’ ‘우리도 한번 가자.’그러더니 캄캄한 새벽에 그 자매가 창고에 들어가서 거기서 하나님 앞에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외국학생들이 하나씩 둘씩 따라와서 새벽에 기도를 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갈망이 있는지를 자기를 점검해보십시오. 주님을 향한 간절한 갈망,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목마른 것같이 그런 타는 듯한 갈망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첫마디를 이렇게 도입하셨습니다. ‘마까리호이호이 푸토코이’ 푸토코스는 희랍어 원어로 ‘파산선고를 받은’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슨 뜻이냐 하면 부자였다가 조금 가난해진 것이 아니라 재산을 모두 다 날리고 완전히 파산선고를 받아서 티끌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입니다. 이런 사람이 예수님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복은 그냥 일상적인 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에서 대표적인 복이 베라카의 복과 아쉐르의 복이 있습니다. 시편 1편에서 보는 ‘복이 있는 사람은’ 하고 나오는 그 복이 바로 아쉐르의 복입니다. 베라카의 복은 일반 섭리의 복을 포함하는 총체적인 광의의 복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꼭 언약백성들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방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셔서 받는 복입니다. 그러나 아쉐르의 복은 Spiritual Blessing입니다. 이것은 언약백성들에게만 주시는 복입니다.
오늘 이 시인이 목마른 것은 베라카의 복에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아쉐르의 복에 목마른 것입니다. 그 아쉐르의 희랍어 동의어가 마카리오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음이 온유한 자에게는 땅을 주시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게는 배부르게 하셨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는 천국을 통째로 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갈망하며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공부를 잘하게 해주십니다. 정말입니다. 개인적으로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 사람은 나에게 개인적으로 오십시오. 수많은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박사논문을 잘 쓴 사람들은 기도하다가 응답받아서 쓴 사람들이 진짜 잘 쓴 사람들입니다. 모티브를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꼭 기도해야합니다. 히스베리투스 휘치우스라는 17세기 화란의 정통개혁주의 신학자는 자기의 ‘아세티카’ 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경건한 종교심의 최고의 발현은 열렬한 기도이다.’ 간절히 하나님 앞에 매달리는 것입니다.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짖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이다.’ 그래서 꼭 기도를 열심히 하십시오. 그리고 다 뿌리치고 하나님 앞에 깊은 밤에 기도하십시오. 여기가 기도원이지 학교입니까? 방석 하나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기도할 수 있겠습니다. 여기는 기도원입니다. 엎드려서 밤이슬을 맞으면서 혹은 새벽에 혹은 저녁시간에 하나님 앞에 간절히 나를 도와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마음의 무거운 짐 모든 것에 대해서 주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달라고 매달려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이 되어야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Summa Theological 을 쓴 토마스 아퀴나스를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경건한 수도사였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니까 수도원에서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그리고 철야하면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는 하나님이 나타나셨답니다. ‘아퀴나스야 나의 사랑하는 아퀴나스야!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주랴?’ 그랬더니 아퀴나스가 대답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나에게 울며 간구하느냐? 어찌하여 금식하며 나에게 슬픈 얼굴로 매달리느냐?’ ‘하나님 저에게는 아무것도 필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주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면 주님 자신을 나에게 주시옵소서. 나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은 나의 것이옵나이다.’ 그렇게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왜 그 위대한 작품 Summa Theological 을 완성을 하지 않았을까? 완성을 안 하고 하다가 그냥 툭 하고 끊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쓰다가 아퀴나스가 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고 상당한 기간 동안 그 후에도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면 왜 Summa Theological 을 멈추었습니까? 어느 날 뚝 하고 절필을 해버린 것입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가톨릭 안에서도 해석이 많습니다. 그런데 친구에게 보내는 한 편지 속에 아퀴나스의 고백이 들어있습니다. ‘그날 이후 내가 주님을 만난 그날 이후 나는 나의 쓴 Summa Theological 이 하나님의 영광에 비해 너무 초라해서 속편을 계속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게 진짜 신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영광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영혼이 천국의 은혜와 단비로 흠뻑 젖을 때에 그 사람의 손에서 정말 구도자의 길을 가게 만드는 신학이 생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주님의 부요하심 앞에서 자기의 가난함을, 주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자신의 비천함을, 주님의 위엄 앞에서 자신의 하찮음을, 주님의 사랑 앞에서 자기의 악함을 끊임없이 대조하게 될 때 그때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자랑으로 들리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럴 의도가 추호도 없습니다. 이 말씀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1987년에 저는 신학대학원 3학년 학생이었습니다. 민주화 시위가 극에 달하던 때였고 결혼한 지 7년 만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은 총신대 옆에 살았는데 퍼붓는 최루탄의 가스를 마시고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수입이라고는 한 달에 15만원 밖에 없는데 이 아이가 매일 병원에 가는데 한 달에 15,000원 내지 20,000원이 들었습니다. 끼니가 간곳이 없고 너무 가난해서 그래서 영양실조로 제가 연구실에서 몇 번을 쓰러졌습니다. 그때 이상근 교수님의 조교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길을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학교는 휴강을 하고 학교는 텅텅 비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주셔서 ‘그래! 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게 하시기 위함인 것 같아!’ 그리고는 새벽에 와서 이때 정말 공부 많이 했습니다. 하루에 15시간씩 공부를 했습니다. 공부를 하고는 저녁때 채플실로 올라가면 아무도 없습니다. 휴교중인 학교에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거기에 앉아서 기도를 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마음이 가난해지게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러면 원래 성격이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는 것을 싫어하는데 인생이 워낙 막다른 골목에 곤고하게 서있으니까 하나님 앞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길면 세 시간 짧으면 한 시간 반쯤 기도를 하고 내려오면 그때가 여름이었는데 기도가 끝나고 내려오면 티셔츠, 러닝, 내복, 바지가 땀에 다 젖었습니다. 비 오듯 땀이 쏟아지는 것입니다. 티셔츠를 벗어서 짜면 땀이 국물처럼 뚝뚝 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나의 환경이 갑자기 변화가 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서 그 총신대학교 5층의 계단을 걸어 내려갔습니다. 그때 부르던 찬송이 그것이었습니다.
(찬양)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잡고 나를 인도하소서.
계단을 내려오다가 다시 주저앉았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달라고 은혜를 달라고 울면서 또 기도하고 또 찬송을 부르며 계단을 내려왔습니다. 그렇게 그해 늦은 봄과 여름을 지났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 앞에 말할 필요는 없지만 내 생애에 잊히지 않는 하나님을 그 텅 빈 채 실에서 만났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이 신학을 사랑하고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껜띠아보다 앞서야 할 삐에따스 즉 경건의 비밀입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선 단독자로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부터라도 입술을 굳게 깨물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 자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제일 큰 벌은 기도하기 싫은 마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합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주님의 은혜에 목마른 사람들이 되면 하나님이 도서관에서 여러분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은혜의 놀라운 비밀들을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그해 여름은 나에게 잔인했고 행복한 여름이었습니다. 여러분도 금년에 그런 은혜의 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