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 Paul 교회 주일예배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3-4)
녹취자: 박은희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사도바울이 법정에서 재판을 받으면서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것에 대하여 변증하는 간증 속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도바울은 본래부터 바울이 아니라 원래는 사울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종교지도자를 꿈꾸는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회심을 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사도바울의 회심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변화 받았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사도가 바울이 되었고, 신약성경 전권의 절반가령의 책을 지었고 그리고 기독교신앙의 기초를 놓은 위대한 신학자요, 목회자요, 그리고 선교사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갖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기독교신앙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이 모든 교리의 내용들 중 상당부분의 기초를 사도바울이 놓았다고 하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 그에게는 두 가지의 확신이 있었습니다. 먼저 첫째로 한 가지는 심리적인 편견이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에 유대인만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요, 나머지 모든 백성들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당시의 표준적인 유대주의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만이 선민이요, 나머지 모든 이방 백성들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고 이방 백성들 중 고넬료와 같이 탁월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하나님의 나라에서 이스라엘의 몸종 정도의 역할을 부여받을 것이고, 나머지 많은 이방 백성들은 지옥의 땔감으로 쓰기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사도바울은 사울이었던 청년시절, 바로 이런 그릇된 유대교 가르침을 공유하면서 살아오던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 편견은 신학적인 편견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나사렛에서 태어난 젊은이가 메시야일수 없다고 하는 확신이었습니다. 구약에서의 이 메시야는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로 예표 되었고 그러나 이 청년사울은 당시 표준적인 유대주의의 가르침을 따라서 구약 야훼신앙에서 가르치는 메시야 사상이 아닌 유대주의의 왜곡된 메시야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구약에서 가르치는 메시야사상을 여호와의 종교를 정확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이 메시야이신 것을 알아보기가 쉬웠을 것입니다. 시몬과 안나와 같은 사람은 오염되지 않은 구약신앙을 가진 사람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을 때에 그분이 메시야인 것을 알아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주의는 이 모든 구약의 순수한 신앙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편견으로 왜곡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메시야 사상은 정치적인 메시야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메시야가 이 세상에 오실 터인데 그는 초인적인 존재로서 탁월한 지도력과 능력으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하여 다윗왕국의 위대한 영광을 다시 재현할 것이라고 하는 기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들이 믿고 있던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었던 것입니다. 심지어는 3년 동안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다니던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마지막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실 시점이 되었는데도 바로 예수님께 “그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하고 묻고 있었던 것입니다. 희랍어 성경으로 보면 이 사도행전 일장에 나오는 사도들의 질문은 그 나라인 다윗왕국이 고정되어있고 지금의 이스라엘을 바로 그 다윗왕국으로 회복시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이스라엘왕국의 이 로마에 의해 식민지가 되고 짓밟힌 모습은 원래 하나님이 세우시려고 했던 그 나라와는 거리가 먼 나라라고 하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일을 위하여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병자를 고치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고 능력을 행하셨을 때에, 저 정도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메시야 그리고 하나님나라의 회복의 꿈을 이룰 지도자가 되기에 적합하다고 믿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추종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나라를 말씀하시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왕국이었고 사람들 마음속에 임하여 오는 나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해석을 따르면 구약의 위대한 영적인 왕국, 다윗의 나라는 신약시대의 다시 그것이 재현되어 넓은 땅을 차지하고 주변의 나라를 복종시켜 그들로부터 조공을 받고 모든 나라위에 뛰어난 이 땅 나라의 영광을 자랑하기 위한 그런 나라로 다시 반복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왕국이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서 사라지고 거기서 이 온 땅과 만민을 구원할 하나님의 위대한 나라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도래할 것이라고 하는 선포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지도 못했고 받아들이지도 아니하였던 것입니다. 바로 사도바울은 이러한 표준적인 유대인들의 두 가지 편견을 강력하게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라고 하는 사실은 믿을 수가 없었고 그리고 더군다나 그 메시야가 이세상의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 인간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고 하는 이 혹세무민의 가르침을 그는 동의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허망한 풍설을 목숨을 걸고 퍼뜨리는 일당의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이러한 예수 전파운동이 다메섹에서 강력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이 젊은이는 분노가 치밀기 시작했고 대제사장의 공문을 청하여 이들을 모두 잡아가두기 위해서 다메섹으로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거기서 자기의 인생의 계획에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놀라운 한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두 개의 명제를 함께 맞닥뜨리게 되고 여기에서 커다란 컴플리트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 명제는 나무에 매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누구라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복음서의 기사를 세심히 읽어보면 의문 나는 한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빌라도의 뜰에서 재판을 받으시던 바로 그 광경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백성들에게 예수를 죽이도록 간청하라고 사주하였고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빌라도의 뜰에서 심문을 받는 예수 그리스도 그 주변을 에워쌌습니다. 아무리 심문을 해도 이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사형을 받을만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에게서 죄를 찾을 수가 없다.”고 말했고 그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를 사형시키라고 고함치며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폭동을 일으킬 것 같은 기세로 빌라도에게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예수를 사형시키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성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지만 죽이는 방법도 매우 중요했습니다. 여기에는 유대인들의, 종교지도자들의 거대한 음모가 숨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역사에는 의롭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으나 결국은 모함을 받아서 순교한 수많은 선지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히 사형시킨다고 할 것 같으면 언젠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제시될 것이고 그가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선지자였으나 누군가가 외쳤으나 그러나 사람들이 그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위대한 선지자들을 살해했던 것처럼 예수를 죽였노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은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에게 내려오는 율법에 대한 중요한 믿음하나를 사용하고자 하였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21장에 나오는 말씀 “나무에 매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자니라.”하고 하는 신앙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죽는데 나무에 매달려 죽으면 그 자체가 하나님이 그를 돌이킬 수 없이 저주하셨다고 하는 싸인 이었습니다. 그러면 그 죽음은 재해석이 불가능한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저주 하셔셔 죽으셨기 때문에 그것은 단순히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은 순교나 혹은 의를 위한 희생이라고 재해석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백성들이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였던 이유였던 것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이 십자가처형 제도는 로마제국시대의 만든 사형제도가 아니라 로마 민족이 변방의 야만인이던 시절에 고안해낸 인류역사상 가장 잔혹한 처형 방법이었습니다. 희랍어로 ‘스타오로스’라고 하는 이 단어는 원래 십자가라는 의미는 없고 막대기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사람들을 나무에 못 박아 죽는 이 끔찍한 십자가형벌을 가리키는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국 나무에 매달려 죽었고, 그것은 마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재해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선포하는 재판장의 방망이 소리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과 화합할 수 없는 중요한 한 가지 명제를 다메섹으로 가는 도상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뵙게 된 것이었습니다. 찬란한 빛으로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 분께 음성을 들었고, 그 분께 자기가 무엇인가 말하기도 했고, 그 분께로부터 들려오는 응답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이 예수 부활의 사건이 누군가가 사울에게 전해준 사건이라면 거부하면 되었고 누군가가 자기를 선택하는 사건이었다고 할 것 같으면 받아들이지 않으면 충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가 직접 대면한 사건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바울에게 매우 커다란 지성의 혼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려 죽으신 것도 움직일 수 없는 팩트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것도 부인할 수 없는 팩트였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표준적으로 모세가 부활했다고 그래서 승천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또 모세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구약에서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로 올리었습니다. 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가던 엘리야의 사건을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을 보지 않거나 부활한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신 사람이었고 매우 중요하게 인정해주신 자기에 마음에 드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바울은 이 문제 두 가지 모순된 명제에 대해서 무엇인가 해석을 하여야만 했습니다.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못 박아 죽일 정도로 저주하셔야하는 사람이었다면 다시 살려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고,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 부활하게 하실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인물이었다면 하나님은 저주하실 수 없는 인물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바울은 캄캄한 어두운 지성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에 대한 재해석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도, 부활하신 것도,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라고 한다면 이 모든 것들을 해결할 수 있는 중요한 해결책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규명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바로 그 유명한 대속의 죽음의 이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매달린 것도 사실이고,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진노가 쏟아 부어져 처참하게 죽임을 당한 것도 사실이었고, 그를 향해 하나님이 진노를 쏟아 부어 저주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저주와 그 모든 끔찍한 진노가 예수 자신의 죄와 허물 때문이 아니라 구원받아야할 우리 인간의 죄와 허물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찬양)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면서 유대주의로 말미암아 캄캄하던 그의 지성 속에 한줄기 찬란한 빛이 벼락처럼 임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그 어두움을 찢고 들어온 찬란한 깨달음의 빛은 바로 복음의 깨달음이었습니다. 그 빛이 그가 알고 있던 구약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 사이를 관통하면서 구약의 모든 역사들이 바로 이 한 지점을 향하여 달려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예화) 미국은 어떤지는 모르겠는데 한국에서는 오래전에 100볼트와 220볼트를 겸용하던 시기가 잠깐 있었습니다. 그때에 이런 예배당에 한 1000개의 전구가 달려있다고 치고 100볼트 전기가 들어옵니다. 그런데 잘못해서 거기에다가 1000개정도의 전구를 220볼트에서 사용하는 맞지 않는 전구를 끼었습니다. 그래도 불은 들어옵니다. 100와트라고 되어있는 전구에서 들어오는 그 불빛은 한 5와트 정도밖에 안됩니다. 그러니까 아마 그걸 1000개를 켜놓아도 우리교회 예배당 같은 경우에는 예배를 드릴 수가 없을 정도의 불빛 밝기입니다. 그런데 이쪽에서 기계를 작동해서 220볼트로 승압을 시키는 것입니다. 달카닥하면 그러면 1000개의 100와트전구에서 10만촉광의 빛이 확 쏟아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변화가 이 안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는 성령에 근거해서 바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세상의 인간들이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모든 철학자들이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찾고 싶어 했던 인간의 사는 방법이요, 하나님의 위대한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것이 당신 자신의 죄가 아니라, 구원하시고자 하는 이 인류의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한 끔찍한 죄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의 그 끔찍한 고난은 인간들이 지은 죄의 크기가 얼마나 무한한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이 탁월하게 높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사건의 의미가 사실은 이 모든 우주와 세계의 중심이고 우리 모두가 배우는 학문과 하나님을 아는 이 모든 지식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있는 최고의 통합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분이 오히려 우리 구원받을 모든 사람들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셨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이 오히려 그것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만물로 그 발아래 부복하여 그 분을 ‘주’라 부르게 하시는 사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면서 사도바울은 예전에 가지고 있었던 이 두 가지 편견들이 한꺼번에 부서져 내리는 커다란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유대인만이 선민이요 나머지는 지옥의 땔감정도라고 믿었던 유대인이었는데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구나.’ 그리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귀한 인간들이라는 사실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어둠속에 살아가고 있는 이 비참한 인간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이 복음에 매인 사람이 되었고 이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열망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사도바울더러 “네가 내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너에게 커다란 재앙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서 사도바울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만천하에 전하고 싶어 하는 열정을 갖게 되었고 그러면서 그 사람이 실제로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들고 전파하면서 복음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이 내적인 확신은 정도를 더하게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위해서 일평생 살고 일평생 이 복음을 위하여 죽고자 하는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복음의 핵심은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셨습니다. 그리고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죽음의 의미는 부활사건을 통해서 규명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가 규명이 되자 그 빛 아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가르쳤던 모든 삶의 교훈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해석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가져다주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어느 한순간 구약의 이스라엘과 제사, 그리스도와 신약의 교회,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나라 그리고 이 모든 지상의 나라와 천상의 나라, 지상과 천상의 나라와 온 우주의 담겨진 이 하나님의 지혜의 비밀들이 한줄기 빛처럼 선명하게 스쳐 지나갔으니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향하여 가지고 있는 위대한 지혜였고 그리고 구원의 지혜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혜안에서 구원받아야할 이방백성들을 이스라엘과 함께 뜨겁게 사랑하게 되었으니 이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보여준 뜨거운 구원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그의 마음속에 사랑의 감화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재해석하게 되자 이제는 유대인 종교지도자의 길을 걸어가고자 했던 그 모든 삶의 목표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었고 가장 허망하고 불쌍한 목표를 따라 사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새롭게 발견한 소명을 따라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제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파해야겠다고 하는 불붙는 소명이었습니다.
오늘날 종교와 인종, 문화를 불문하고 모든 인간이 살아있는 한 공통된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행복하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많은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 중산층들이 누리는 물질생활이 17세기 왕족들의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끔찍하게 증거하고 있는 이 자살률은 후진국 가난한 나라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부유하고 복지제도가 잘된 나라에서 자살률이 높다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이미 널리 알려진 통계입니다. 그들은 불행하기 위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지극히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하는 아주 선명한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자살의 심리학은 우리에게 이렇게 존재하기를 원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고, 그 의지로 자기의 현실적인 삶의 환경을 바꿀 수 없을 때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자살은 자기사랑의 최고의 표현입니다.
사람들은 인간의 불행의 원인을 가난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물질이 부요하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질병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지식의 부족에서 찾습니다. 무지야말로 인간불행의 원인이라고 말입니다. 깨어진 인간관계에서 찾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하나의 증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감기에 걸리면 기침도 하고 콧물도 나고 눈물도 나고 열도 납니다. 그 자체가 감기가 아니라 감기라는 바이러스에 걸린 징후가 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가난, 질병, 편견 그리고 폭력, 압제, 독재 그리고 불만족과 이 모든 것들은 죄라고 하는 단일한 뿌리에서 우러나온 하나의 열매요 그리고 결실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모든 문제들에서 아무리 훌륭한 해결책을 내놓아도 인간의 근본적인 불행의 뿌리는 인간들의 손에 의해서 나올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을 이 세상에 입고 이 세상에 오셨고 당신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에서 피 흘려 죽으셨던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비로소 이모든 세계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 세계를 본래의 창조의 목적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하여 구속하시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는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전파하는 일을 이 세상에 있는 우리의 이웃들을 향한 최고의 사랑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을 불사르게 내어주면서까지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신명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이 주는 의미는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만약에 이 부활사건이 2000년 전에 단순히 일어난 사건으로 끝난다면 우리는 예수와 상관이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한순간 당신의 부활의 영광을 사도바울에게 비추셨고 그것으로서 사도바울은 인생자체가 변하는 혁명적인 변혁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십자가의 사건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의 적용 점을 발견하게 해줍니다.
우선 첫째로 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을 통해서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사는 삶이어야한다는 강력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우리의 삶이 항상 행복하고 평안한 길만 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신앙을 가지면 금시발복할 것처럼 우리에게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의 달콤한 측면들을 제시하지만, 사실 예수를 믿고 보면 그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은 우리 모두가 다 아는 바입니다. 어쩌면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였더라면 평안하게 살았을 사람이 고난과 시련의 길을 가야 할 적도 있고 시련과 핍박과 박해를 받으며 눈물을 흘려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예수와 더불어 죽고 예수와 함께 사는 체험들을 갖게 하시고, 이로 말미암아서 영원한 하늘나라에 예수 생명이 유한한 세계 속에 살고 있는 우리의 마음과 삶속에 역사하여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신 계획을 따라 살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수많은 어려움들을 만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을 때에는 이 어려움과 시련을 우리의 힘과 자원으로 이기고자 하였습니다. 시련을 이기지 못하면 파멸이 올 것이고 이기고 나면 그것을 견뎌야 했던 아픔 때문에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분과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 줍니까?
저는 21살에 회심했고 그리고 회심한지 5년 후에 소명을 받았고 그리고 지금은 우리 7명의 성도들과 함께 열린교회를 개척한지 19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다양한 모습의 삶을 때로는 직장인으로서, 때로는 교수로서, 때로는 목회자로서 다양한 양식의 삶을 살았지만 한 가지 공통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어떤 삶의 처지에 놓여 있든지 간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붙들 때 하나님은 모든 나쁜 것들을 사용하셔서 나를 좋게 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목회를 하거나, 혹은 신학공부를 하거나, 직장에 다닐 때나, 언제나 저에게는 십자가가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와 고난을 그 십자가는 바로 내가 그 모든 삶의 여정 속에서 만나는 어려움이었고 하나님은 이것을 사용하여 나를 성숙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이것은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분 모든 사람들에게 있는 십자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당할 때에 우리가 예수를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이 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 큰 고난을 생각합니다. 그때에 우리는 바로 나에게 이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신 것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기 위해서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고난을 당할 때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면 그 2000년 전에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 죽음이 오늘 우리의 마음과 정신 속에 스며들게 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 이 어려운 십자가를 지고 불순종하고 반역해야 되겠다고 하는 모든 마음들이 그 십자가의 죽음의 기운에 삼킨바 되어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고린도후서 4장 10절에서 “예수 죽음을 우리의 몸에 짊어진 것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의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들어와 내안에 있는 정욕과 죄를 죽이게 될 때 죽은 그 곳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는 현재적인 부활을 우리의 정신과 마음속에서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가득할 때
(찬양)
뉘 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하고 나면 어떤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놀라운 위로와 기쁨이 내 마음속에 솟아납니다. 그것이 바로 영적 생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예수를 위해 살면서 고난과 어려움이 만날 때 이것이 마치 자신의 몸에 무슨 암이나 생긴 것처럼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인생이 원래 이런 고난과 시련을 친구삼아서 살게 되어있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들을 마치 암 덩어리처럼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불행해지지만 오히려 우리는 그것들을 끌어 앉고 예수도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고난을 당하셨으니 내가 예수를 위하여 예수를 향하여 살면서 이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께서는 지금 당하는 나의 이 모든 고난 때문에 당신을 의지하게 해주시고 당신을 믿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 할 것입니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을 보면서 우리에게 적용하여야할 중요한 우리의 삶의 지침입니다.
마지막 두 번째는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전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교인 하나가 기도를 하는데 옛날 아주 오래전에 헤어졌던 어떤 선배생각이 나더랍니다. 자매인데. 그래서 간절히 기도를 하다가 갑자기 그 사람을 위한 기도가 나와서 기도를 많이 하고 그냥 샅샅이 찾아보니까 어디엔가 전화번호가 나와서 그래서 그 선배한테 전화를 했습니다. “언니, 나야.” “오! 그래 너 웬일이니?” “기도하다가 언니 생각나서 전화를 했어” 전화를 잡고 막 울더랍니다. “왜 그래? 언니” “나 동맥 끊으러 화장실 들어가는 중이었어. 네가 전화가 온 거야”
교수 생활을 하면서 전도사를 하던 1992년도의 일이었습니다. 일곱 명 청년들이 모이는 교회에 부임을 했는데 그래도 잠깐 사역을 했는데 60명 청년들이 모이게 되었습니다. 마음속에 ‘주기도문을 한번 설교해야 되겠다.’라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날 4월 5일 날로 기억이 되는데 주기도문 첫 번째 시간을 설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약간 늦게 저기서 어떤 자매둘이 걸어 나오는데 하나는 우리교회 다니던 자매였고 하나는 잘 모르는 자매이었습니다. 화장을 예쁘게 한 자매입니다. 그러더니 그 친구가 자꾸 밀어서 맨 앞자리에 갖다가 앉힌 것입니다. 나는 이 자매가 신앙이 아주 독실한 자매인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앉자마자 손을 무릎에 탁 모으고 쫙 쳐다보면서 설교자 얼굴에서 눈을 떼지를 않는 것입니다. 나는 굉장히 신앙이 독실한 사람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불교신자였습니다. 그러고 26년 동안 절에 다니고 온 집안이 불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한 15분쯤 설교 했는데 그 눈물이 쫙 흐르면서 얼굴에 화장이 지워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주 이상한 모습이 되었습니다. 그날 그 자매가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열린교회 창립한 멤버 중에 한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요즘시대에 누가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겠냐고 말합니다. 그리고 전하려고 안합니다. 그리고는 친구처럼 지내다가 어떻게 그냥 어떻게 어떻게 하다가 은근슬쩍 교회에 나와 그냥 그 사람이 커다랗게 그 뭔가 이렇게 예수를 만나는 그런 사건이 없더라도 어쨌든 교회에 신자가 되는 그런 길이 있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다양성에 비추어본다면 구원의 모습도 다양하겠습니다. 그렇지만 그러면 안 됩니다.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다가 이웃이 복음을 안 믿으면 복음전도에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복음을 전도하는 것은 마치 지뢰를 탐지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자, 적군이 도망간 그 지역을 공격하려고 하는데 수없이 지뢰를 매설하고 적군이 도망쳤습니다. 그러면 거기를 어리석게도 탱크를 몰고 수만 명의 군대들을 돌격시키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어마어마한 희생이 따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폭발물 제거반원들이 수십 명이 탐지기를 들고 이 지뢰를 찾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계를 흔들어도 지뢰가 안 나옵니다. 그러면 그게 탐지에 실패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탐지를 하다가 한 시간에 하나를 찾아냈어도 그 임무는 다한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믿게 하려고 준비한 사람들을 찾아내는 과정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입니다.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담대하게 전해야 합니다. 그것입니다.
그래서 만약에 오늘 우리가 이 그리스도 예수의 부활사건의 의미를 사도바울처럼 마음깊이 담고 만약에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대하고 그들을 위해 뜨겁게 기도하면서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를 전해준다면, 모든 사람은 아니겠지만 그들 중 하나님을 믿기로 준비된 사람들은 놀랍게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 입니다.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하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리고 교회는 바로 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복음 선포의 기관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미를 우리의 모든 삶속에서 체험하고 그 복음을 통해 우리 같은 죄인을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을 체득하면서 실제적인 우리의 삶속에서 이 복음을 전파하여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이 빛으로 돌아와 이제는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이 되도록 자기를 향해 죽어가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해 사는 사람들이 되도록 생명의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인다면, 우리의 교회는 잃어버린 영혼들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들의 마음속에는 우리주님의 은혜가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르심을 감당하는 교회가 되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빕니다. 우리 같이 주악에 맞춰서 같이 한번 우리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