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든콘웰 새벽예배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시 27:4)
녹취자: 문미경
시편 27편을 언제 기록했는지를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이 27편의 저작의 가능성을 두 가지로 추측해봅니다. 우선 첫째 가능성은 다윗이 고난을 많이 당하던 때 특별히 사울에게 핍박을 받을 때에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그러한 고난을 기억하면서 왕이 된 후에 또 다른 고난을 받아 그 과거의 생각을 회상하면서 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어쨌든 그건 추측에 불과합니다. 이 27편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4절에 보면 이것은 마치 우리의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뿐만 아니라 목회자인 우리들에게 적용할만한 중요한 내용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시편 27편에서 다윗은 큰 고난의 위기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며 구원을 앙망하는 장면을 보여줍니다. 마치 27편의 분위기는 18편에서 다윗이 가드로 갔다가 거기에서 자신의 정체가 탄로나 아히멜렉 앞에서 수염에 침을 묻히며 미치광이 행세를 하고 도망을 나왔던 그리고 노래하였던 그때의 분위기와 아주 유사합니다. 우선 시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을 구하리니 무엇인가 인생의 목표가 아주 분명하다는 것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나는 이 성경을 보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우리의 인생의 목적을 이야기하면서 그 목적을 구분하기를 chief end와 ultimate end를 구분한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없는 목표를 정하게 되는데 그것은 얼티메이트 엔드 ultimate end입니다. 그러나 그 수많은 목표들이 한데 어우러져 궁극적으로 성취해야할 앤드가 무엇이냐, 그 앤드를 췹 앤드 chief end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하기 좀 애매하긴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ultimate end)와 최고의 목표.(chief end)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 최고의 목표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있는가. 그 한 가지만 이루어질 수 있다면 다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라고 할 만한 우리의 인생에 초점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한 가지 목표가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예화) 저희 초등학교 때는 무슨 장난감이나 오락 기구 같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애들이 땅바닥을 기어 다니며 놀았습니다. 그때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는 장난감이 있는데 할아버지 돋보기였습니다. 돋보기를 가지고 겨울에 아이들이 나와서 그 추운데 놀다가 따뜻한 햇볕에 처마 끝에 앉아서 고드름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놀 곤 했습니다. 이때 한 아이가 이만한 돋보기로 꺼내 비춥니다. 날씨는 꽤 쌀쌀한데 검은 먹지를 대고 비추면 연기가 나기 시작하고 잠시 후에 불이 붙습니다. 이것이 바로 빛을 모두 모아서 한 곳으로 집중시키니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다양한 목표를 추구하며 살던 사람들이 아니라 한 가지 목표를 위해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 전까지는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어떤 궁극적인 목표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머지 이루어지는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는 그런 목표가 우리에게 있는지 한번 우리 자신에게 물어보자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인생에 목표를 아주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도행전 20장에서 내가 그리스도의 예수의 복음의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하나니 나의 생명을 조금도 아까운 것으로 여기지 않겠다고 했고, 또는 빌립보서에서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하면서 그 푯대를 구체적으로 말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부활의 능력과 고난의 참여함이 무엇인지 알려하여 푯대를 향해 달려간다고 말했습니다. 심지어는 내 안에 사는 이가 그리스도시니 나는 내가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여긴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무엇인가 그러한 진술을 너머에 깔려있는 공통적인 하나의 칩 엔드 chief end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우리에게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하고 목회를 하고 학자가 되고 혹은 선교사가 되고 하는 것들은 모두 우리의 삶에 양태에 불과합니다. 내가 결혼을 하느냐 독신으로 사느냐, 국내에 있느냐 해외에 있느냐 이런 것들은 모두 삶의 형식이지 본질이 아닙니다. 그 양태를 뛰어넘어서 우리의 인생에 어느 목표를 향하고 있느냐 이것에 의해서 우리의 인생에 품질이 결정되어 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 존엄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깊이 동의하고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는 인간의 우연적인 특징, 직업이나 성별, 인종이나 나이 육체의 아름다움이나 지위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그 인간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을 얼마나 읽어내고 그래서 그를 어떻게 존귀하게 여기느냐 그 깊이가 한 사람의 신앙의 깊이이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깊이입니다. 그것은 매우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 말은 모든 사람이 꼭 같은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책속에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한 의지의 크기에 있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이것을 좀 더 다듬어서 이런 명제를 만들었습니다. ‘한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고 한 인간의 가치는 선한 의지의 크기이다.’ 라고 말입니다. 영혼의 아름다움과 선한 의지의 크기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선한 의지를 아주 크게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시인은 하나님 앞에 바라는 한 가지 최종적이고 최고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의 목표살든지 죽든지 그것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는 그 목표가 여러분들에게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그런데 이 사람이 찾았던 간절한 목표가 무엇이냐 하면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있는 것여호와의 아름다움을이라고 하는 부분이 히브리어 성경에서는 ‘베’ 라는 전치사를 사용했습니다. 희랍어라고 말하면 에이스이고 영어로 말하면 ‘인투’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표면적으로 감상하고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 깊이 꿰뚫고 들어가며 말하자면 look into 룩인투 한다는 것이죠. 그 속에까지 들어가도록 깊이 관통하듯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본다는 것입니다.
한 2년 전인가제가 조나단 에드워즈를 워낙 좋아하고 한 20년 동안 가까이 했기 때문에 그랜드래퀴지에 갔을 때 마침 노틀담에서 오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조지 마스턴 교수가 와계셨었습니다. 그래서 그분을 뵐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같이 강변에서 만나서 몇 시간이나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토론한 적이 있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세계적인 대학자로 저야 무릎을 꿇는 마음으로 배운 것 밖에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때에 우리 함께 나눈 얘기 하나가 무엇이 에센스 오브 미니스트리 essence of ministry 목회사역의 진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을 따르면 목회의 진수는 하나님의 뷰티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논리로서 성경을 기초로 진술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그 아름다움에 심취하게 하는 것이고, 목양은 그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들을 모든 삶에 있어서 그 아름다움을 적용하며 살도록 돌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이해하고 있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말하는 그 목회가 무엇인지를 설명하면서 그 진수가 바로 하나님의 뷰티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고 그래서 목회자는 목회를 하는‘맨 오브 비즈니스 man of business ’ 이기 이전에 ‘맨 오브 뷰티man of beauty’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일종의 심미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을 드렸을 때 그분이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것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목회에 대한 견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이것이 이 시인의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여러분,목회를 하고 전도를 하고 선교를 나가고 그래서 죽기까지 충성하고 마지막에 순교한다고 칩시다. 그러면 우리는 무슨 세상을 꿈꾸면서 그렇게 미친 듯이 헌신하는 겁니까? 내 인생의 목표., 비젼이런 것들을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 모든 사역을 통해서 마지막 꿈꾸는 세상은 하박국 선지자가 말한 것과 같이 물이 바다를 덮은 것같이 지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 땅에 충만하게 되는 그런 지식의 나라, 사랑의 나라를 위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매일 주기도문에서 나라가 임하게 해주옵소서라고 되어있는데 이 기도가 성취되어버려서 더 이상 기도할 필요가 없게 되었을 때 여러분 속에 꿈꾸는 킹덤은 어떤 킹덤입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는 피터 롬바도르스가 쓴 명제집 ‘센텐티아름 리브리’라는 책을 주석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기독교의 참된 행복은 지성의 기쁨이다’ 라고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의 모습은 먹고 입고 마시고 육체의 열락을 즐기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 나라는 바로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심취해서 말할 수 없이 행복해하며 그 하나님이 품으신 관념들이 이 세상 속에서 성취되도록 이바지 하면서 기뻐하며 사는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것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홀리니스거룩함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아름다움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이 결국은 카도슘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두 번째 요점이 분명해졌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의 대체할 수 없는 최고의 인생의 목표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직시하는 것.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 온전히 헌신하는 것 그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으면 눈물을 흘립니다. 그리고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리고 주님을 좋아하게 됩니다. 왜 그런 겁니까? 침체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렸는데 은혜를 받으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들이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 생겨나는 겁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것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중생과 회심은 인간에게 두 가지를 가져다줍니다. 첫째는 영혼의성향의 변화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때 그 성향이 변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사랑하게 되는 성향을 중생과 회심을 통해 부여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만들어주는 능력을 중생과 회심에 부여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인식의 변화입니다. 예전에는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볼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곳곳에 묻어있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보면서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아름다움이라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심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변적입니다. 이것들이 마음속에서 활발히 일어날 때가 있고 침체되어서 안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육체적이고 감각적인 것들이 아름다워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 세상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까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징후는 아직 성도들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내서 그것을 성도들에게 보여주는 그것이 바로 목회자의 중요한 임무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너무 강렬하게 느끼는데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렇게 예쁘신 분인 줄 모르기 때문에 미칠 것 같아서 들어서는 길이 목회의 소명입니다. 이게 목회 소명의 본질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묻어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세계에 동일한 정도로 묻어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중심이 가장 찬란하게 눈부시도록 묻어있고 중심에서 멀어질수록 약간씩 덜 묻어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그 아름다움에 있어서 일치를 이루며 우주적인 뷰티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눈부시도록 묻어있는 것이 뭐냐면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그 구속사를 기록한 책이 성경이기 때문에 성경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있는 최고의 액기스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들이 주변에 있는 모든 학문들과 연관을 이루면서 심지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자연의 세계발아래 뒹구는 돌멩이 하나이슬을 머금고 있는 풀잎 하나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묻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이런 노래를 지었습니다. ’
(찬양)
온 천하 만물이 그림책 같으니 그 고운 그림 보아서 자랄 수 있어요
그래서 철학이나 인문학뿐만 아니라 목회를 할 사람은 자연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자연세계를 바라보면 자연의 모든 것들이 하나님을 향해 오케스트라처럼 하나님의 뷰티를 노래하는 장면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것을 성경과 어떻게 연결해서 이해하느냐하는 그것이 학문이 주는 해답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는 것은 신학에 있어서 매우 중요합니다. 성경은 그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이것이 다른 모든 신학 활동의 핵심이 됩니다. 그것이 이런 신학의 기둥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성경이나 학문을 통해서 특별히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감격하지 않는 사람들은 기둥 없이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설 수가 있겠습니까? 크게 세울수록 무너질 위험이 매우 큰 겁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되 두 개를 평행해야 합니다. 성경은 작은 부분을 읽으며 깊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게 정독과 묵상입니다. 그것만 하면 안 됩니다. 성경은 많은 분량을 빠른 속도로 읽어가야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최소 한20장가능하면 30장 정도를 한꺼번에 읽으면서 휙하고 굽이치는 성경 속에 있는 커다란 물줄기들을 읽을 수 있어야 하고 더 바람직하다면 아침에 일어나서 창세기 손에 들면 50장까지 모두 읽어버리고 창세기 전체의 책속에서 굽이치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읽으면서 감격하는그래서 만약에 성경을 작은 부분을 읽고 깊이 신학적으로 묵상하는 것이 숲속에 가서 어느 하나를 찾아내서 풀잎하나 열매 하나를 관찰하는 거라면 성경을 읽는 것은 풍경전체를 바라보며 감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아주 친숙하게 우리에게 남습니다. 그게 신학활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신학활동은 결국은 신앙 속에서 질료를 발견하여 신학으로 형상을 부여함으로써 그것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형상이라고 하는 것은 빵 만드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질료는 밀가루 반죽입니다. 밀가루 반죽이 없는데 아무리 현란한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뭐합니까? 무엇으로 빵을 만들고 만들게 없는데 누구를 배부르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모든 신학의 아름다운 질료들이 학문자체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신앙에서 나오는 겁니다.
마틴 루터가 자기의 어느 책속에서 ‘그러므로 한사람의 신학자가 되는 것은 공부하고 사색함으로써가 아니라 진리를 향해 죽고 다시 태어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아름다움의 진수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의 진수를 눈부시게 나타나주신 분이 바로 사람으로 입고오신 예수 그리스도님이시기 때문에 예수님이 ‘I am the way, and the truth, and the life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신적인 심미주의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깊이
(찬양)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마지막 세 번째‘사모하는 그것이라고 하는데’ 여기는 목적어인 여호와가 생략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전으로 해석하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사모하는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원인은 아름다움입니다. 아름다움이 사랑의 원인입니다. 그것이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사랑하는 겁니다. 그것이 진짜 아름다움인지 잘못된 아름다움인지에 따라서 더러운 사랑과 순결한 사랑이 되는 겁니다. 진리가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데 자기가 그것을 예쁘다고 생각하고 죽어라고 사랑하면 추한사랑이 됩니다. 그것이 악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이란 잘못된 질서에 대한 사랑이다’라고 했습니다. 신학을 하면서 사람들이 경건이 없고 심지어 어느 신학교 갔더니 신학을 하러 와가지고 이혼하고그리고도 여전히 목회를 합니다. 학교에서도 모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수 있습니까? 어디 그뿐입니까? 맨 처음 신학교 올 때는 사람이 겸손하고 뜨거웠었는데 몇 년 흐르니까 거칠기 짝이 없고 무례하고 뭔가 마음이 엉킨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게 왜 그렇습니까? 경건이 없기 때문입니다. 경건이 왜 없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 사랑하지 않습니까? 공부는 많이 했는데 아무것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가르쳐준 게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사역을 한다고 하지만 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쳐서 먹고 사는 거나 성경을 가르쳐서 먹고 사는 거나 뭐가 다를 게 있습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스스로 느끼고 그를 매일매일 사랑하는 경건이 없다면 모두 다 같은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매일매일 발견하고 그분을 이전보다 더 사랑하는 것. 바로 이것을 위해서 우리들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마지막 네 번째.근데 그 일이 어디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라고 그랬습니다.
‘야샤브’라는 단어인데 히브리어에서 야샤브라는 단어는 ‘샤칸’이라고 하는 단어와 다릅니다. 샤칸에서 ‘세키나’가 옵니다. 샤칸은 ‘일시적인 있음’인데 야샤브는 ‘항구적으로 거주한’ 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시편 일편에 보면 ‘복이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쫒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라고 쭉 나옵니다. 점층법으로 되어있는데 그 마지막이 바로 이 ‘야샤브’입니다. 그러니까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악인의 꾀를 쫒지 아니하며 마지막에 오만하다에서 이 오만은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기 때문에 오만하다고 가리키는 겁니다. 그런 사람의 자리에 주저앉지 않는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길에 서는 것은 잠시입니다. 그보다 발전하면 악인과 함께 예찬데 카운스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서로 교통하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발전되면 주저앉는 겁니다. 여기서 ‘야샤브’는 하나님의 집에 대한 사랑을 함께 가지고 있는 항구적인 주거의 형태입니다.
신학의 사람이 되려면 교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인간의 오류와 잘못에 의해 더럽혀져도 교회가 그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풍부히 전달해주는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서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의 몸인 교회를 완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신학은 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는것이 신학입니다. 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그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사용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공부 바빠도 교회생활 잘 안하면 마지막에 좋은 신학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어디든지 교회에 소속되고 그 교회를 자신의 생명처럼 사랑하고 거기서 자신만 못한 성도들을 무릎을 꿇고 주님처럼 존중하는 마음으로 섬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내게 지식이 있다면 지식이 없는 사람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서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겁니다. 재능이 있다면 우월감을 느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재능이 없는 사람을 섬기고 종노릇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내게 돈이 있다면 이것으로 돈 없는 사람들에게 존중을 받도록 하기 위해 주신 것이 아니라 돈 없는 사람에게 내 돈이 흘러가게 하기 위해서 나에게 소유를 주신 거라고 생각하면서 일평생 살아야 하는데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것이 뭐나 하면 하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얼마나 많이 읽어내느냐에 의해서 그 사랑이 지속성과 깊이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많이 묵상하고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이것이 전달하는 도구가 신학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을 아무리 잘 가르쳐도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신학이 아니면 그것은 그저 인간의 공부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