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5월 27일 교직원예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리라”(고전 13:7).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세 번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며>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티끌 같은 저희들 주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면 존재할수도 없고 살아갈수도 없는 저희들을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오늘 이 아침에도 생명을 주시고 주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도움이 될 때나 도움이 되지 않을 때에나 우리에게 새날을 주셔서 우리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오늘 이 아침의 시간에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으로 찾아오셔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그리하여 저희들이 그 말씀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사랑하기에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나 사랑하는 자기 자신안에서나 끊임없는 소망을 발견하게 하는 힘이예요. 그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힘이예요. 하나님 자신의 사랑이 성향이시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사랑의 성향은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이 땅의 인간들을 향해 항상 소망을 갖게끔 만들어 내는 힘이 있어요. 반대로 미움은 미워하는 대상을 향해서도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고 그를 미워하는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더 이상 요구하는 것이 없는 상태예요. 그래서 사랑은 끊임없이 생명을 낳지만 미움은 죽음을 낳는 거예요. 사람을 미워하게 되면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죠. 그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에게 대한 모든 희망이 사라지는 것이 미움의 본질이기 때문이예요. 화가 나면서도 기대가 남아있는 것은 그를 미워하면서도 사랑이 남아있다는 증거예요. 이해되죠?
그런데 권력이 없어서 그 사람을 제거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그 다음에는 그 사람에게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절망이 자신에게로 환원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권력이 없어서 미워하는 사람을 죽이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제거함으로써 그와 함께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을 거절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자살은 인간이 얼마나 살고 싶어 하는가를 보여주는 그런 대목이다 이거에요. 그런데 사람은 그와는 정반대로 끊임없이 바라는 것들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게 사람이예요. 예전에는 왜 그렇게 남자들이 빨리 죽었는지 몰라요. 40년대에 우리, 30년대에 우리 나라 남자의 평균 나이가 42였다 그래요. 그러니까 남자들이 일찍 죽고 여자들의 오래 살았어요. 그래서 여러분 그런 얘기 들어본 적 있죠? ‘여자는 약하다 그러나 어머니는 강하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아세요? 여자는 약해요. 근데 어머니는 강해. 왜 어머니가 강할까 여자에게는 목숨처럼 사랑해야할 대상이 없어요. 어머니는 그런 사랑의 대상을 자식 안에서 발견하게 되요. 그러니까 그 자식을 끊임없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에 대해서 갖는 소망이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아들을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신의 소망이 그 아이의 존재와 합치되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그 아이에게 기대하고 바라는 것이 자신을 향해 바라는 것이 되는 거야. 그래서 결국은 그 소망에서 끊임없는 힘이 나오는 거에요. 그래서 남편을 여였는데도 그 자식 하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까지 수고하고 애쓰면서 그러면서 그 삶의 고난을 헤쳐 나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랑의 힘이다’ 이런 이야기예요.
몇 주 전에 제가 절망에 대해서 여러분들에게 가르쳐주면서 ‘절망의 마지막 끝은 시작이 어디에서 되었던지 원인이 무엇이던지 그 절망의 마지막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것이다’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결국은 머냐면 자기 자신을 향한 절망은 하나님을 향한 절망을 포함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해서 더 이상 기대를 걸지 않는 건,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는 상태. 그것이 곧 자기 자신을 향한 절망의 상태에요. 그 지점이 바로 인간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다하는 지점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남아 있는 동안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을 절대 접지 않아요. 그리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망을 접지 않는 한 자기 자신을 향해서도 끊임없이 소망을 잃지 않는 것이예요. 이것이 복음적 소망이예요. 복음적 소망. 오늘 사도바울이 <모든 것을 바라며> 그랬거든요. 무슨 뜻일까요? 모든 것을 바란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 것을 마음에서 요구한다’ 그런 의미가 아닌거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겠죠? 그쵸? 그게 어떻게 사랑일수가 있겠어요. 참된 사랑은 언제나 정결하고 깨끗한 것인데, 모든 것을 바란다. 그럴 수 있겠어요? 우리가 주님의 양떼들을 돌보면서 그 양떼들에게 영혼의 잘됨도 바라지만, 돈도 바란다. 그래서 모든 것을 바란다 그게 참사랑일 수가 있겠어요? 그런 의미가 아니예요. 무슨뜻이냐면은 바라볼 수 없게 만드는 희망이 끊어진 것 같은 모든 상황속에서도 그것을 딛고 사랑 속에 고요한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희망을 갖는 것을 가르키는 거예요. 낙관은 천적낙관이 있고, 그 다음에 지적 낙관이 있어요. 지적낙관은 모든 낙관의 시작이 본인의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생각하고 자기 스스로 암시하여 만들어 내는 낙관이예요. 천적인 낙관은 계시를 통해서 주어지는 낙관이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러한 자기 암시을 통해 주어지는 낙관이 아니예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계시를 통해 주어지는 낙관이예요. 그래서 끊임없이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바라는 거죠 하나님이 따라서 하나님에게는 절망이 없어요. 이 세상의 인간들이 아무리 타락하고 어느 한순간 창조의 목적을 거스르는 것 같아도 하나님에게는 절망이 없어요. 한 순간도 이 땅에 있는 인간존재에 대해서 더 이상 희망이 없으니 모든 인간들이 차라리 없었으면 하는 그런 종류의 절망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그 속에서 하나님 자신이 그런분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서 끊임없는 소망들을 발견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험악한 세상을 이기면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는 것이예요. 이렇게 해서 사랑과 소망은 떼어놓을 수가 없게 되는 거예요. 믿음과 어떻게 떼어놓을 수 없는 지는 다음에 가르켜 드리죠. 소망과는 이렇게 해서 믿음 소망 사랑은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같이 있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그게 소망입니다.
우리들이 사람을 향한 사랑이 식지 않을 때에는 그 안에서 끊임없는 희망을 발견해요. 사랑이 식으며 아 저인간은 희망이 없어 하고 그 인간에 대해서 마음을 접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의 정반대의 모습이다 이런 것이예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완전히 절망하고 그리고 아무 희망이 없어서 이제는 나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 앞에서 제거되기를 원할 정도로
절망을 하던 사람들도 주님의 사랑을 받고나면 그 안에서 무안한 희망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랑이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예요. 그러면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에 그 하나님을 많이 사랑하게 되면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망이 생겨서 그래서 주님 안에 있는 소망이 우리에게 전이되는 거죠. 전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분하게 임하게 되면은 영혼들에 대한 평가 인간존재에 대한 평가, 그리고 나든지 다른 사람이든지 인생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겠죠. 그게 머냐면 무한한 가능성과 소망을 가진 인간도 우리에게 다가오는 거죠 뿐만 아니라 사랑이 남아있으면 그 사람은 끊임없이 소망을 가지려고 해요 그게 바로 사랑이예요.
제가 시편 42편을 새벽에 설교하면서도 그런 얘기 했죠 시인뿐만이 아니라 신약의 사도들과 성도들까지 절망을 극복하면서 사는 경건의 기법이 하나 있었어요. 그것이 머냐하면은 회고하는 것이었어요. 회상하는 거 그래서 가장 절망적일 때에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능력을 나를 위해 베풀어 주셨던 그 때를 기억하는 거죠 그때는 예외없이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때였어요.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 났을수도 있지만, 반대로 그 놀라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위대함을 믿게 되니까 사랑이 생겨나는 적이 더 많았어요. 이렇게 해서 믿음과 사랑은 다시 나뉘어지지가 않는 것이예요. 믿음도 사랑도 은혜라고 하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거거든요. 그렇게 회상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위해 행하신 그 크고 놀라운 일 그리고 위대하고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은 나의 영혼 속에 찾아오셔서 내게 허락하셨던 그 친밀하고 신비스럽고 사랑으로 가득한 교제, 이것들을 회상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반추하게 되는거죠. 그 안에서 새로운 소망을 발견하게 되요. 지금 그 일이 일어났던 상황과 그 일을 회상하고 있는 시점은 다르지만 회상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하나님 앞에 경험하고 있는 이 하나님의 큰 사랑 이것들을 통해서 소망을 갖게 되는 거예요. 그러기 때문에 인생을 행복하게 사는 것은 이 소망을 잃지 않으면서 사는 것이예요. 그게 이 세상에서는 불가능해요. 기껏해야 이 세상엔 이렇게 소망을 가졌다가 세상을 통해서 그 소망이 배신당하는 경험이 소망을 성취되는 경험보다 훨씬 더 많은 거예요. 돈을 좋아하면 그 돈에 속고. 사람을 사랑하면 그 사랑 때문에 울고 그리고 또 높은 지위를 탐하면 언젠가는 그것이 나를 붙들지만. 언젠가는 그것이 나를 버리는 때가 있어요. 그때의 상처를 얻었을 때의 기쁨을 능가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이 세상에서는 사람자신이 갖는 소망은 이 세상이 끊임없이 배신해요.
또 다행히 소망을 품었다고 합시다. 낙심하지 않고 소망을 품었다고 칩시다. 그게 하나님을 아는 경험에서 나오지 않는 복에 근원이신 하나님과 단절된 그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육욕을 가져다 주지 않아요? 그래서 결국은 모든 소망의 원천이신 하나님과 단절되게 만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소망을 스스로 찾아내도 문제도 그 소망을 성취해도 여전히 문제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소망은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발견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바깥에서 행복을 얻어버리려 하는 그 순간 하나님을 버리게 되는 거 ,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참 소망이 없이 살아가는 거죠.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절망할 때가 있잖아요. 사역을 하면서도 절망할 때가 있잖아요. 대부분이 그 이전에 하나님 바깥에서 희망을 많이 가졌기 때문에 그 쓰라린 댓가를 치루는 것이예요.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그말은 무슨뜻이냐 하면은 ‘세상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지 말아라 만약에 세상안에서 소망을 많이 발견할수록 너희들이 내 안에서 소망을 발견하지 못할것이다. 그러면 나를 사랑할 수가 없을 것이다’ 이런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매 순간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낙관적으로 사는 비결이예요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끊임없이 하나님안에서 사랑하고 사랑하면 그를 향한 소망이 끊임없이 생겨나고 자기안에서도 소망이 생겨나 그래서 아우구스투누스는 말하기를 이런 인상깊은 말을 남겼어요. ‘누가 누구에게 악을 행하면 그 사람에게 입힌 손해보다 더 큰 악이, 악을 행한 그 사람안에 생기게 된다’ 우리가 만약에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면 선을 입은 그 사람이 받은 유익보다 더 큰 유익이 선을 행한 그 사람 안에 생겨나게 되는 것이죠. 그것이 바로 끊임없는 사랑 그 안에서 생겨나는 소망이예요.
그래서 사람을 향한 사랑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그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죠.그에게 끊임없이 희망을 갖는 것이예요. 그리고 그에게 기대를 거는 자기 자신이 대해서도 절망하지 않는 것이예요. 그게 사랑이예요. 그 사랑이 끊임없이 우리 안에 있어서 세상이 버리고 가족과 이웃이 버리고 자신도 스스로를 버린 사람들을 사랑하고 그에게 남아있는 소망을 그에게 일깨워 주고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살게하는 것이 우리의 사역의 본분이 아니겠어요? 그러면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소망안에 사는 사람이 되야하는 것이예요. 비유를 하자면 절망의 끝은 하나님을 욕하고 죽는 것이기 때문에 처음에는 아주 무성한 숲속 같지만, 끝에는 아무 것이 없는 광야로 이어져요. 그러나 소망은 처음에는 가시덤불 같아 보일지 모르죠. 눈에 보이는 절망의 증거를 끊임없이 부인하고 자기 위식과 싸우며 하나님 말씀을 의존하는 가운데 소망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지. 그러나 황무하고 건조하고 이성적이지 않을 것 같은 입구를 지나고 나면 저 끝에는 저 멀리에는 끝이 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그 크고 놀라운 숲이 있어서 그 안에서 진정한 행복과 소망을 누리게 되는 것이죠. 우리가 그 길을 걸어갈 뿐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해야 할 사람들을 거기로 데려가서 끊임없이 소망을 갖게 만드는 그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 이예요. 그래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소망안에서 살아가는 그것은 가장 훌륭한 선교예요. 가장 훌륭한 선교예요. 이게 가장 훌륭한 선교예요.
상담학자들은 머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은 난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인 이 마실의 개념이 그 공동체를 통합하고 인간으로 하여금 암울한 상황속에서 극복하게 하는데 아주 커다란 기능를 했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화롯가에 모여 앉아서 혹은 아낙네들끼리 모여 앉아서 집안에서 쌓인 많은 것들을 쏟아놓으면서 그러면서 스스로 감정적으로 배설하고 그리고 절망속에서 낙담하고 있을 때에 마음의 상태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자기 상황을 새롭게 해석받고 도움을 받는 그런 과정을 통해서 사회를 이끌어 가게 하는 큰 기여를 했다고 생각되는 거죠. 자연적인 의미에 있어서 희망도 우리에게 그런 역할을 했다면 계시적인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는 복음안에 주는 참된 소망과 사랑, 우리에게 얼마나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겠어요. 그걸 믿으면서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