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3
목 차
근심과 마음의 빛(시 13:1-4) 19
악인에게 고통 받는 자의 소원(시 13:5-6) 26
근심과 마음의 빛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
내가 나의 영혼에 경영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쳐서 자긍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저를 이기었다 할까 하오며 내가 요동될 때에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시 13:1-4)
시인이 근심하는 이유
이 시편 13편도 탄원시입니다. 즉, 간절한 기도의 제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진심을 토해놓으면서 주님의 은혜와 응답을 바라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자신이 근심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시인의 근심은 원수들이 자기 주위에 많이 우겨쌈에서 비롯됩니다. 원수들이 자기를 에워싸서 근심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원수들이 역사하는 것만큼 하나님이 응답해주시는 것 같지 않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큰 근심에 휩싸이게 된 것입니다.
우리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환란과 시련을 만납니다. 그런 어려움은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어떤 때는 자기를 미워하고 박해하는 사람들 때문에 고생하고, 어떤 때는 물질이 없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고생하고, 어떤 때는 자신의 마음을 지키지 못해서 고생하고, 어떤 때는 주와 더불어 싸우는 데도 진전이 없어서 고생합니다. 이 모든 일들이 마음을 고통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우리를 에워싼 원수들을 파멸하시고 시련과 고난 속에서 우리를 구해주시면 그렇게 근심하고 괴로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시련과 고난의 종류는 많아도 답은 하나이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면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문제로 돌아가라
시인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가 잘못 될까봐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이 모자라서 당신의 자녀들이 원수의 발 앞에 꺾어지고 시련 앞에서 부러지는 일들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것이 일어나기 힘든 일이기 때문에 “만일”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 하겠는가하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우리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 갔다고 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르지 못한 사람이 다른 곳으로 간다고 해서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왜 이 현실 속에서 고통당하고 불행하게 사는지에 대한 원인을 하나님의 관계에서 찾지 않습니다. ‘내가 불행한 것은 이렇기 때문인가 보다 저렇기 때문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하위에 있는 것들 속에서 자신의 불행과 고통의 근원을 찾으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는 결코 그가 행복 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뿌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뿌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은 그 모두 하나님과의 관계의 반영일 뿐입니다.
비가 많이 쏟아지면 댐이 더 이상 물을 저장할 수 없어서 수문을 엽니다. 그러면 평상시에는 별로 물이 흐르지 않던 강에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 물이 흐르면서 장관을 연출합니다.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물이 흘러들어가면서 강 주변에 있는 땅들을 물에 잠급니다. 그리고 물이 교각을 휘감으면서 흘러갈 때 어마어마한 소리를 냅니다. 그러한 엄청난 변화는 수문을 연 것에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수문을 닫으면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 옛날로 돌아갑니다.
우리의 인생에 고난과 시련, 괴로움과 아픔 이런 모든 것들은 양태입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흘러가는 물과 같이 현상과 더불어서 싸우려고 하지 그 근원인 수문을 막으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아주 소중한 인생을 낭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잘못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고 바르지 못한 자신의 삶의 태도를 바꾸고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계속해서 변명하면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유를 찾고 타인에게 계속 고통을 주는 삶을 살아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인생이 계속해서 막장으로 내려갑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니까 그 인생의 방황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젊을 때는 방황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도 역시 고민하고 방황합니다. 정상적이라면 고민하고 방황하는 종류가 나이가 들면 어릴 때와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는 공부 안하고 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계속 공부를 강요하면 학원에 보내서 고민을 합니다. 그리고 중고등학교 가면 담배도 피고 싶고 도색 잡지도 보고 싶고, 파마도 하고 싶고, 마치 어른처럼 행세하고 싶은데 부모님과 선생님이 못하게 해서 고민을 합니다. 그런데 정작 성인이 되어서 모든 자유가 주어지면 이제 고민하는 내용이 틀려져야 되잖습니까? 머리가 희끗희끗한 인생의 노년이 왔는데 가출이나 하고 술 담배를 하고 싶은 것 때문에 고민을 하면, 그 인생이 쓰레기 같은 인생의 길로 마감하게 됩니다. 이 세상은 죄와 슬픔이 가득 찬 곳이기 때문에 언제나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실존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항상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계에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고난이 일어나고 어려움이 일어나면 물론 생각합니다. “왜 이런 어려움이 일어났을까? 저 사람이 나한테 왜 저렇게 대할까? 그리고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왜 하나님의 축복이 없을까?” 이렇게 고민하면서 지혜를 찾을 것입니다. 물론 지혜를 찾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보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아니하면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이것을 통해 하나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도대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 앞에 나가서 나의 죄를 자복할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러면 비로소 이렇게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나 때문이라는 고백이 생겨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 깊이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축복은 한없는 용서입니다. 언약 아래 있는 선택된 백성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이 바로 용서입니다. 어제 설교한 바와 같이, 우리가 성령 충만할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칭찬합니다. 우리가 침체에 있을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쓰레기라고 합니다. 우리가 충성스럽게 섬길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정말 진실한 일군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침체에 빠져서 주의 일을 게을리 할 때 만난 사람들은 우리를 악하고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모두는 지나가는 것이지 우리 모습의 전부는 아닙니다. 하나님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키시고 미끄러지는 자를 붙드셔서 하나님 앞에 살게 하시는 분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면 마치 수문을 막은 것처럼 당장은 아무런 변화가 없는 것 같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상황들이 모두 변화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먼저 붙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근심하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말입니다.
내 눈을 밝혀주소서
시인이 근심 중에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원수들을 다 죽여 버리십시오. 나에게 어마어마한 복을 주십시오.” 이런 기도를 하나님 앞에 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한 소원은 “내 눈을 밝혀 주십시오.”하는 기도였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어두움을 물러가게 해달다라는 기도였습니다. 이 어두움은 다른 것으로는 극복될 수가 없습니다. 창이나 칼, 돈, 물질, 명예 이런 것에 의해서 극복될 수 없습니다.
만일 빛이 모두 사라지고 캄캄한 어두움이 되었다고 칩시다. 세계에서 제일 좋은 칼을 가지고 이 방에 들어오면 어두움을 물릴 칠 수 있겠습니까? 돈 다발이 교회에 쌓아 놓으면 어두움이 물러 갈수 있습니까? 유명한 학자가 들어오면 어두움이 물러갈 수 있겠습니까? 높은 지휘를 가진 사람이 들어오면 어두움이 사라질 수 있겠습니까? 어두움을 물러가게 하는 것은 오로지 빛, 하나 밖에 없습니다. 빛이 들어오면 칼 휘두르지 않아도 어두움은 물러갑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시인이 “자기의 눈을 밝히소서.”라고 기도할 때 직면했던 어두움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두 가지 어두움입니다. 하나는 우리 위에 있는 어두움이고, 또 하나는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입니다.
첫째, 우리 위에 있는 어두움은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우리가 무지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위에서 내려서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할 바를,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두운 것입니다. 아직 우리가 배운 적이 없고 터득한 적이 없기 때문에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 그 중에 참 무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데 아는 것이 너무나 없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기뻐하면서 “아멘, 아멘”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그 사람이 처하고 있는 어두움이 객관적인 어두움입니다. 시편 119편에서 시인이 “주여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에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십시오.”라고 탄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객관적인 어두움은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하고 특별히 교리를 공부하면 물러갈 수 있는 어두움입니다.
둘째, 또 하나의 어두움은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입니다. 이 어두움은 주관적인 어두움입니다. 분명히 전부 배웠지만, 자기가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속에서 자기를 어둡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죄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 지 올바른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죄를 사랑하기 때문에 어두움이 내려서 영적으로 그것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어두움입니다. 이러한 어두움을 하나님께서 빛을 밝히심으로써 물러갈 수 있습니다. 이 빛은 진리에서 비추는 빛입니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이 빛을 잘 깨달을 수 있도록 우리를 조명해주십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러한 어두움들을 우리에게서 물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한편으로는 신자의 일생이 이 진리를 배우며 걸어가는 길이 되어야 합니다. 현재적으로 배우고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깨닫고 있는 진리가 있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 앞에 늘 깨어 기도하고 성령의 충만을 받음으로써 이미 내가 깨달은 진리들이 빛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끊임없이 우리의 지성을 헌신해야 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태만하게 자신을 버려두고 육욕에 치우쳐서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물결이 치면 물결이 치는 대로 흔들리면서 자기 욕망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고 자기는 연약하기 때문이랍니다. 그것은 연약한 것이 아니라 악한 것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일생 전체는 끊임없이 자기의 마음을 지키면서 사는 일생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칼빈 선생도 말하기를, 신자가 신앙의 길을 걸어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대적은 사단이나 원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이 최고의 대적입니다. 거기에 이제 우리 인생의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매 순간 우리는 그런 속에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데, 그런 길은 1년이나 2년을 걷고 끝나는 길이 아니라 일평생 가야되는 길입니다.
그 길이 어려운 길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버리고 세상 속으로 걸어가는 길은 더 어려운 길이기 때문에 우리가 손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로 나왔던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었는지를 잊고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들이 뒤엉켜 거기에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겠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금도 우리가 돌아가고 싶어 하는 세상으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손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옵니다. 세상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나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맛본 후에, 우리들이 다시 세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면서도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은 그건 미친 사람의 마음입니다. 절대로 두 가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세상이 있으면 주님은 안 계십니다. 여러분들의 마음에 주님이 계시면 세상은 없습니다. 주님 자신을 놓고 밤새도록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서 생명과 평안을 누리면서 하나님께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예전에는 세상에 있는 것들로 행복해지려고 했지만 이제는 세상이 있는 것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 자신을 인하여 행복해지려고 갈망하며 걸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악인에게 고통받는 자의 소원
“나는 오직 주의 인자하심을 의뢰하였사오니 내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나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3:5-6)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함
앞 절에서 하나님께 두 가지를 간절히 구했습니다. 하나는 근심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자기의 눈을 밝혀 달라는 기도였습니다. 그런 간절한 기도를 드렸는데도 악한 대적들이 쉽게 물러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 인생의 모든 고난과 위기에서 벋어나는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했다고 해서 그 고난이 즉시 우리에게서 물러나는 가지는 않습니다.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때로는 우리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면 즉시 고난을 물러가게 하실 때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들이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해도 한동안 예전에 우리들 고통스럽게 하던 상황들이 그대로 남아있을 수 있습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을 멀리 떠나서 외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먼 곳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에 돌아오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 탕자의 몸에는 세상에 사는 날 동안에 생기게 되었던 질병, 아울러 마음속에 깊은 상처 이런 것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집에 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으면서 천천히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탕자가 아버지의 집에 돌아와서 이런 질병들을 치료하고 고쳤던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그래도 여전히 원수들이 고난을 줄지라도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고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루만지시면서 다시 고치시고 치료하십니다. 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 눈을 밝혀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원수들로 인해서 제가 넘어지지 않게 도와달라고 기도했지만, 여전히 원수와 대적들이 자기 주변에 있고 여전히 고통은 계속됩니다.
주의 인자를 바라보며 살리라
고통이 계속 될 때 시인이 하나님 앞에 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인자를 바라보며 살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기도이기도 하고 또한 자신의 마음의 결심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분에 넘치도록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친절한 사랑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그것을 바라보면서 살겠습니다.”라고 시인이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간절히 고백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시는데 이것이 신앙생활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시련이 오고 고난이 오면 자신의 상황이 너무 괴롭고 힘듭니다. 그때가 신앙이 필요할 때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신앙이 필요할 때는 우리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우리의 힘으로 도저히 살아갈 수 없고, 더 이상 어떻게 이길 수 없을 때, 아주 절실하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원수들이 에워싸인 가운데 고난의 가운데서 우리를 건져내십니다. 아무리 고난이 많이 겹치고 어려운 일이 많이 밀려와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지 않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가장 큰 어려움입니다. 솔직히 애기해서 고난이 아무리 많고 시련이 많아도 내가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할 수 있으면 그건 고난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만 할 수 있으면 하나님이 기도 속에서 고난을 이길 힘을 주십니다. 그리고 고난이 넘치면 넘칠수록 하나님이 위로를 더욱 더 주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기도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과 교통하는 것은 신음하는 우리 영혼의 해독제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비관적이 되고 성품이 굽어지고 사람들을 불신하게 되고 외로움에 빠집니다. 다시금 하나님 앞에 깊이 회개하면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입니다. 곧 인자를 바라는 삶입니다. 나는 정말 부족한 것이 많고, 모자란 것이 많아도 내가 주님을 꼭 붙들면 주님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자에 대한 아주 신실한 믿음, 그것을 꼭 붙들고 주님 앞에서 살아가는 것이 바로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 하는 바입니다. 시인은 다음을 고백합니다. “그 인자를 바란다는 말과 하나님이 나를 인자하게 대해주신다.”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는 어떻게 나타나겠습니까? 건지시는 구원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 때문에 독생자를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인자를 사모한다는 이야기는, 하나님이 자기를 이러한 고난 가운데서 건져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당신을 의지하게 하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후대하심
이어서 시인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다. 왜 하나님이 나를 후대해 주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후대는 아주 후히 대해주시는 것입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부족한 것과는 어울리지 않게 나를 후대해주셨습니다. 후대는 결국 사랑입니다. “저 사람은 나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지만, 내가 그것을 똑같이 갚아서 저 사람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저 사람은 나를 많이 아프게 했지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나는 그 사람의 처지에 넘치도록 대해주리라.” 하나님의 큰 사랑을 깊이 깨닫게 되는 것이 대부분 크고 넓은 집을 얻게 되었을 때, 사업이 잘될 때, 그런 때도 물론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은혜를 깨닫습니다. 그런데 더 많이 깨닫게 되는 때는 고통을 받을 때, 죄 가운데 있어서 곤고했을 때, 하나님 앞에 깊이 그 회개하고 돌아오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이 고통의 학교에서 사람이 되어가고 고쳐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본받고 싶은 아름다운 신앙을 가진 사람, 그토록 순수한 영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지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들은 예외 없이 고난의 사람입니다. 이 고난은 물리적으로 집이 망하고 사업이 도산하고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그런 종류의 고난이 아닙니다. 이 세상에 눈에 보이는 환란과 시련이 많아도 마음이 기름진 사람이 있고, 별로 큰 시련이 없는 것 같은데도 날마다 죽음의 골짜기를 넘나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훌륭한 신앙과 살아있는 영성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끊임없이 날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날마다 주님께서 자신을 후대해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원수들에게 에워싸이고 고난당할 때도 시인 다윗이 고백한 바와 같이 “주는 나의 방패이시며 영광이시며 내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당신을 사랑하는 자의 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후대하심을 경험합니다. 그런 사랑을 경험하고 나면 어떤 마음이 생깁니까? ‘하나님만이 내가 의지하며 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구나’ 그렇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사랑하게 될 때, 순종하는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고난이 왔을 때 사람들에게 손을 벌리며 도움을 구하면, 추해지기 시작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시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 것이다.”라는 결연한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시편13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