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일 새벽예배
내 의의 하나님이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이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 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시편 4:1~3)
녹취자: 오정민
이 4편도 우리 3편과 마찬가지로 탄원의 시입니다. 탄원의 시라고 하는 것은 시의 내용 자체가 하나님께 대한 간절한 부르짓음이 담겨있는 것을 가르켜서 우리들이 탄원시다 이렇게 부릅니다. 여기에서 이 시인은 이제 그 똑같이 무엇인가 난관에 처해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에워싸여서 그렇게 고통을 받고 있는 가운데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고 있는 가운데에 이 시인이 하나님께 탄원을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제일 먼저 이 시인이 하나님을 매우 독특한 표현으로 불러요. 내 의의 하나님이시여 내 의의 하나님이시여 그러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요. 여기에서 의라고 하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하나님께 받아 드려질 만큼 올바른 그리고 선하게 된 그런 상태를 이야기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정해 놓으신 그 기준에 부합한 삶을 살고 또 그런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옳다고 인정을 받는 거 그거를 가르키는 거예요. 그런데 사실은 비록 이 사람이 주전 10세기 사람이니까 구약 시대의 사람이죠. 구약 시대의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다윗을 포함한 많은 구약의 인물들은 자신이 스스로 노력을 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사실이 그것이 불가능 하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죠.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의 빛 아래에서 자기를 비춰볼 때에는 끊임없이 불결하고 더러운 것이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께 은혜를 많이 받은 성도들에게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그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이 보이고 동시에 자기의 불결과 더러운 죄악이 함께 다 보여요. 불결과 죄악이 다 보여요. 그렇지만 그런 불결과 죄악이 보이지만은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 불결과 죄악이 보여도 자기가 그것을 다 돌이키고 고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할려고 애를 써도 그게 완전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자기의 이런 죄와 불결 더러움들을 필연적으로 제일 먼저 생각하게 되요. 그래서 제일 먼저 이런 죄와 불결을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아주 자신이 불결하고 더러운 것을 보게 되요. 그렇게 자신의 불결과 더러움들을 발견하게 되거든요. 그러니까 기도할 때 마음에 드는 간절한 소원은 내가 하나님의 요구에 부합해서 그래서 내가 의로운 사람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왜냐하면 그렇게 의롭게 될 때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죠. 많은 사람이 기도를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흠없는 사람들과 깊이 교통을 하시지 그렇게 하나님 앞에 불결한 삶을 살고 이러는 사람들과 교통하시지 않으시거든요. 때로는 아주 흉악한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교통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건 뭐냐하면은 자신은 하나님의 법도에 맞게끔 살지 못했지만은 회개와 자기 깨어짐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은총을 입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그 은총으로서 하나님이 그를 올바르다고 생각하고 받아주시는 거예요.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서 이런 것이 바로 여기서 지금 시인이 호소하고 있는 내의 하나님이이여 라고 부를 때 의에 하나님이 바로 그런 뜻이라 이거예요. 그러니까 나는 불결한 것이 많지만 그래서 온전해 질려고 많이 얘쓰지만 결국은 주님께 온전히 열납될 수 없을 그런 사람인데 그런 사람인데 더더욱 더더욱 그런 사람인데 그렇지만은 그렇지만은 열납될 수 없는 그런 사람인데 그래서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은혜를 구했더니 주님의 나의 회개를 들으시고 나를 당신의 의로 덧입혀 주시는 거 이것이 바로 복음적인 의에요. 여기서 이야기하는 내의의 하나님이여 라고 하는 뜻이 바로 그런 거예요. 우리들이 한편으로는 우리들이 어짜피 온전해 질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포기하지 않고 더 온전해 지려고 애를 쓰는 그런 삶을 우리들이 살아야 그런 삶을 살아야 하고 그런 삶은 살면서도 우리의 힘으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라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를 의롭게 인정해 주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구하여야 되는 거죠. 그때 하나님이 그런 사람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불러주시고 기도에 있어서 깊은 교통의 세계로 데려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그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어떻게든지 온전해질려고 애를 써야지만 그렇게 할 때에 비로서 그렇게 할 때에 비로서 그 사람의 마음 안에서 그 하나님의 의를 덧입고 싶다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열망이 생겨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간절한 열망은 우리들이 그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많이 애를 쓸때에 은혜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지 그렇지 않을 때에는 은혜에 대한 갈망이 생겨나지 않아요. 두 번째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시인을 에워싸고 그 시인의 영광을 욕되게 하고 있었어요. 여기에서 영광이라고 하는 것은 사물이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좋은 장점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을 가르키는 거죠. 그런데 그것을 자꾸 빼앗아 예를들어 볼까요. 자 가만히 있으면 어떤 사람에 대해 소문이나요.
“아 그분이 참 그렇게 신실하신 분이래”
“아 그분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하신다네”
“그분이 그렇게 사람이 성품이 너그러우시고 그리고 사람들을 그렇게 사랑해 주신다네”
“그분의 성품이 그렇게 정직해서 누구한데 뭐 하나 빌리면 안 갚고는 못 베기는 그런 성품이래”
“그런 분에게는 집 문서를 맡겨도 아마 상관없고 유산을 맡기고 죽어도 아마 공정하게 관리를 해 줄거야.”
이렇게 소문이 나면 그러면은 그렇게 이야기를 전해주는 사람이 상당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예요. 그럼 그 사람을 신뢰하는 어떤 사람은 아까 얘기하는 그 사람은 보지 못 했는데도 들으면서 아 그런 분이 있었구나 야 그런 분이 우리동네에도 하나 있으면 참 좋겠다. 야 정말 그분 좋은 분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될꺼 아니예요. 이게 바로 영광을 받는 거죠. 그 사람이 딱 그 만약에 어느 계기가 있어서 자기와 만나게 되었다라고 할 때 아마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면 고개를 까닥할 사람이 고개를 더 많이 숙일 꺼고 그쵸 다른 사람이면 종이컵에 물 갖다 줄 사람이 아마 유리컵에다 잔 받쳐서 갖다 줄거에요. 이런게 영광이예요. 그런데 다들 그렇게 알고 있는 사람 알고 있어서 그 사람을 그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고 있는데 근데 누가 나타나서 근거도 없이 그에 그 영광을 훼손하는 거죠. 그게 바로 명예를 더럽히는 거죠. 이 세상에서 가장 비열한 짓은 그 사람들의 명예를 더럽히는 거예요. 그걸 보호해 줄 주 모르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근거도 없이 사람들을 막 비난하고 나중에 누가 거 안 그렇다 그러던데 아님 말고 이거는 굉장히 비열한 짓이고 성경에서 경고하고 있는 죄를 짓는 거예요. 근데 아무 근거도 없이 비난을 하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감정이 나빠서 그 사람을 비난 할 수도 있고 또 어떻죠 어쨌든 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감정이 생겨서 누군가에게 한마디를 들었는데 거기에서 그 거를 전달하는 과정에서 둘 셋 넷 보태어 가지고 더 그 사람의 영광을 욕되게 할 수 있죠.
“아니래 너그럽긴 뭐가 너그러워”
“그 뭐 듣자하는 얘기에 의하니까 성깔이 보통이 아니래”
“정직하긴 뭐 개코가 정직해 안 그렇데”
“나도 어디서 들은 이야기인데 엄청 해 먹었데”
이런 식으로 해가지고 그 사람의 영광을 욕되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이 배경도 사실은 다윗이 생애에 있어서 몇 번 있었지만은 압살롬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요. 압살롬의 반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을 가능성이 참 많죠. 한 나라를 찟어서 자기가 왕이 되고자 할 때에는 전임자인 왕을 그 비난하지 않고는 안되는 거죠. 우리도 정권 바뀔 때 마다 정말 비열하고 더러운게 그 자신들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앞에 있는 정권은 나라를 다 말아 먹고 아주 나쁜 놈들만 모였던 거처럼 그렇게 묘사를 하를 거예요. 그리고 돌아가면은 그 다음 정권이 나타나서 그 다음에 자기를 그렇게 씹어요. 그래 가지고 모든 국민의 마음속에서 아무도 존경하는 사람이 없어요. 이렇게 인생들을 사는 거예요. 시인이 왕위에 있었으나 압살롬이 반역을 일으켰을 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았겠어요. 압살롬 혼자만이 아니라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리들이 그렇게 악소문을 내면서 그러면서 결국은 반란을 일으킨거죠. 그러니까 다윗이 도망갈 때 시모이라는 작자가 나타나서 흙을 던지면서 그렇게 감히 저주를 퍼 붙잖아요. 그렇게 해서 영광을 다 빼앗기는 거죠. 그럼 그 영광이 자신들에게 돌아가냐 그건 아니예요. 그래서 자신을 의롭게 보이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을 헐뜯고 비난하는 것은 더더욱 비열하기 짝이 없는 짓이예요. 그것은 돈을 훔치는 것도 보다 더 더러운 죄예요. 시인이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거예요. 깊이 그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시인이 당한 거예요. 그 영광을 욕되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백성들이 다윗을 정말 아버지처럼 여기고 그렇게 따랐어요. 그런데 이제 그 마음 찟어 놓으면서 수많은 무리들이 인제 그 발란에 동참하면서 다윗을 개같이 여겼어요. 어떻게 감히 왕이 지나가는데 흙을 뿌리면서 저주를 퍼 부을 수가 있어요. 근데 참 훌륭한 신앙이잖아요. 그렇게 저주를 퍼부으니까 단칼에 가서 저놈의 목을 베겠습니다. 장군이 애기하니까 다윗이 그러지 마라 그러면서 하는 이야기가 더 인상적이죠. 혹시 아냐 하나님이 저 사람을 시켜서 욕을 하게 하시는지 누가 알겠느냐. 하나님의 그 섭리를 믿는 거예요. 크고 넓은 틀 안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거예요. 그러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거예요. 하나님이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저 사람이 저렇게 비난하는 것은 사실이 아니지만은 그러나 그렇게 해서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 일도 사실은 하나님이 나를 정결케 하시기 위해서 일어나는 일인지 누가 알겠는냐. 그러면서 믿음의 반응을 보이는 거예요. 그러니 정말 그 휼륭한 신앙이죠. 저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 정말 이 사람 같을 수는 없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걸 뭘 보여주냐면 원수들이 그렇게 자기의 명예를 더럽히고 그 명예가 더렵혀질 때에 우리야 뭐 쥐뿔도 명예도 없었지만은 우리라 해서 미안하지만은 사실 이 사람은 한나라의 왕이예요. 왕이예요. 온 백성이 우르는 왕이예요. 근데 한번 생각해 보세요. 어떤 마음이겠는가. 옛날에 제가 알고 있었던 코미디언이 한 사람 있었는데 굉장히 잘 나가던 사람이었어요. 뭐 옛날 얘기죠.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인기가 하락을 하는거예요. 그런데 우리야 뭐 그렇게 인기가 높아져 본적도 없으니까 잘 모르지만은 왜 자기가 크리스찬인데 매일 자살 하고 싶더래요. 인기가 곤두박칠 쳐서 없어질 때 그 때 매일 자살하고 싶더래요. 인간의 영광이라는 것이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그러니까 아이들 같은 경우도 보면은 자살하고 그런 아이들을 보면은 영광과 관련이 있는 거죠. 자기가 잘 못했는데 엄마 아빠가 완전히 짓밟아 버리는 거예요. 그 한마디가 콱 꼿히면서 그 자신이 마지막으로 버티고 있던 자존심 같은 것들이 와르르 무너져 버리는 거예요. 그러면은 죽어버리는 거예요. 죽어버리는 거예요. 여러분도 한번 경험하셨을꺼에요. 남편이 돈도 못벌고 뭐 좀 무능한데 어느날 아내가 아주 포독스럽게 몇마디 콱 쏘아 붙였는데 가슴에 확 박히면서 모든 것이 무너지는거죠. 부모가 아이들을 잘못 그렇게 말하면은 그 부모까지도 죽여버리잖아요. 그래서 존속 살인 죄들이 일어나잖아요. 그렇게 무서운 거예요. 이 명예라는 게 내가 그래서 지난 시간에 명예는 생명이라고 이야기 했던게 바로 그런 의미예요. 우리들은 흔히 이렇게 볼 때 아구 쓰레기처럼 살면서 명예는 무슨 얼어죽을 명예 이게 자기를 버티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도 경험했겠죠. 자기가 분명히 잘못하긴 잘못 했는데 남편이 말 한마디로 자신을 떡을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그 때는 죽어버리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거예요. 가난할 때 죽어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게 아니라 힘들 때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게 아니라 그렇게 무서운 거에요. 그게 여러분들이 얼마나 알까 그런거를 나는 잘 모를 꺼라고 생각해요. 그냥 가르칠 뿐이지 얼마나 알까 근데 이 시인이 그렇게 영광을 원수들에 의해서 영광이 욕되게 될 때 그때 나라를 잃어버리고 죽고 무슨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그게 문제가 아니예요. 존재의 기반 자체가 흔들리는 거예요. 그러면서 불같은 시련을 시인이 통과하는 거예요. 지난 주일날 이야기 했던 목사님의 예화 같은 것은 아주 극단적인 경우에 속한 거예요. 그렇게 때문에 한꺼번에 영광을 빼앗기는 그런 뼈아픈 경험이죠. 그 것만큼 인간을 고통스럽게 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그때에 정말 신앙이 없으면 살인도 하는 거죠. 여러분 한번 이렇게 생각을 해보세요. 누가 와서 몰래 돈을 훔쳐간 것과 여러분들의 명예를 그렇게 실추 시켜서 욕되게 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웃음꺼리가 되었을 때 돈을 많이 훔쳐간 사람은 용서해 줄 수 있지만 두번째 사람은 용서가 안될꺼예요. 적어도 첫 번째 사람은 자기를 고통스럽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도 너무나 필요해서 그 물건의 위치를 이동했으니까. 누가 그러더래요.
“감옥소에 왜 들어왔냐”
그러니까
“아이 그 줄 하나 잘못 잡았는데, 날 그게 뭐 큰 죄라고 여기까지 집어 넣네”.
“줄 끝에 뭐가 달렸는데”
“남의 집 소가 한 마리 달렸다고나 할까”
그러니까 필요해서 가져갔으니까 그것도 가슴 아픈거지만 명예를 훼손한 시인이 그런 뼈저림을 당하는 거예요. 뼈저린 고통을 당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적으로 보면은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명예를 하나님이 보존해 주세요. 이것도 굉장히 커다란 주제예요. 하나님의 영광과 그 명예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 하나님이 그 명예를 보존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를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높여주시는 거예요. 그게 신앙이예요. 하나님께서 움직이시고 이끄시는 하나의 방법이예요. 하나님이 이끄시고 또 움직이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예요.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이 시인이 그걸 경험한 거예요. 그런 상황속에서 그 시인이 그래도 하나님이 자기를 받아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을 갖는 거예요. 주께서 경건한 자의 강구를 들으신다 라는 거죠. 그래서 경건한 자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 말로 하시드인데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자 그런 뜻이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의 간구를 하나님이 들어주신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들의 편이다. 은혜를 입은 자들의 편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항상 모든 사람에게 거져 주어지는 은혜예요. 거져 주어지는 은혜인데 그래서 이 은혜는 창기와 세리와 같은 흉악한 죄인들도 이 은혜를 받아요. 올바르게 똑바로 도덕적으로 산 사람들은 못 받는 은혜를 정말 짐승처럼 살아온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이 은혜를 베푸세요. 그러면 무엇을 보고 하나님은 이런 은혜를 베푸시는가 이 은혜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물이지만 하나님은 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베푸실만한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세요. 비유를 하자면 좋은 비유가 하나 생각이 났는데 이런 비유가 생각이 나요. 오래간만에 바짝 가물어서 물이 없는데 하늘에서 단비가 막 내리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사람은 큰 양동이를 갖다 놓고 어떤 사람은 작은 사발을 갖다 놓았어요. 어떤 사람은 넓고 넓적한 그릇을 어떤 사람은 길고 뽀죡한 그릇을 갖다 놓았어요. 어느 그릇이건 간에 양의 차이는 있지만 빗물이 담기죠. 업퍼놓는 그릇에는 담길 수 가 없어요. 업퍼놓는 그릇에는 비가 윽스로 쏟아져도 그릇에 물이 담길 수가 없잖아요. 그런거에요.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만한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실만한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거예요. 은혜를 많이 받았어도 자신이 은혜를 받기에 합당하다라고 하는 것으로 자랑할 수가 없어요.(29:12) 자랑할 것은 오직 은혜의 단비를 내려주신 주님을 자랑하게 되는 거죠. 그래서 이 마음이 중요한 거죠. 솔직히 다윗이 이런 일을 당한 것이 성경은 완벽히 이야기 해요. 하나님의 징계라고 이야기 해요. 잘못한 거거든요. 잘못했는데 다윗보다도 덜 잘못한 사람들이 다윗의 원수들 가운데 많았을 지 모르겠지만은 그러나 이 사람은 비록 죄를 지었으나 그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고 있는 사람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면서 그래서 참회하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은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편이예요. 은혜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께로 기울진 마음이예요. 그러지 않은 사람들은 올바로 살면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이예요. 의지하는 사람들이예요. 그래서 시인의 애절한 소원이 5편에 이렇게 녹아나죠.
(찬양)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내 심사를 통촉하시고
부르짓는 소리 들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내가 주께 기도하니
주께서 내 소리 들으시리
오 주여 아침에 내가 기도하고
주께 바라리다.
죄 가운데 있으면서도 시인은 내 심사를 통촉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거예요. 이거 뭐냐하면 깨끗하고 의로워서가 아니라 비록 내 안에 죄가 있을지라도 내 마음의 깊은 소원은 당신께 기울어져 있습니다. 내가 어떤 때는 부분적으로 하나님보다 죄가 좋아서 선택한 경우가 있지만 그러나 내 마음의 깊은 본성은 당신 앞에 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을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깊이 매달리면서 처절하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죠.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거예에요. 그러니 이 간절한 부르짓음 그게 가능해지는 거죠.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즐겨 들으시는 거죠. 오늘날 사람이 왜 그렇게 기도하지 않아요. 마음이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울지 않으니까 기도하지 않는거예요.. 왜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온 마음을 다 드리지 않아요 그러니까 그 마음을 드릴 수 없어요. 마음이 고장난 거죠. 드릴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정말 깊이 하나님 앞에 매달리면서 그렇게 주님께로 가까이 가는 거예요.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 매우 필요한 거죠. 기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