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4일 교직원 예배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창40:14~15)
녹취자: 김경애
직장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일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잘난 척하는 사람입니다. 직장생활에서 왕따가 되는 비결은 잘난 척하면 됩니다. 그러면 정말 자기 혼자 있게 됩니다. 그 잘난 척하는 사람이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으면 그나마 권력이 있으니까 사람들이 그 사람 곁을 떠날 수가 없는데 권력이 없으면 모든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합니다. 잘난 척하는 사람은 비록 권력을 가지고 있어도 주위에 남는 사람은 아첨꾼들만 자리에 남게 됩니다. 그런데 그 잘난 척하는 사람들보다 더 싫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지 알아맞히면 시편 23편 책 한권을 드리겠습니다. 누구겠습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틀려도 괜찮습니다. 말해보십시오. 거짓말 하는 사람? 아닙니다. 은혜를 모르는 사람? 아닙니다. 또? 맞았습니다. 본문을 보면 모르겠습니까? 그렇게 눈치가 없어서 앞으로 어떻게 목회를 하겠습니까? 책임을 전가하거나 고자질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잘난 척하는 사람은 그냥 싫어하는데 싫어하니까 사람들이 피합니다. 그런데 고자질하거나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은 주위에 공격적인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제가 이 요셉을 아주 좋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그것도 또 웃기는 것인지 모른지만 저는 직장생활을 7년 반 정도 했습니다. 3년은 지긋지긋해서 사표를 써가지고 안쪽에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불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치사하고 더럽고 내가 이것 밖에 안 되나? 어디를 다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싫었습니다. 그 후 3년 반은 정말 행복하게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마지막 그만 둘 때 한 몇 달을 제외하고는 정말 행복했고 그때 직장생활 할 때 저는 요셉처럼 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실제로 제가 어느 정도는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이렇게 마음이 끌리는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책임을 전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지금 이 성경의 무대가 어디냐 하면 감옥 속에 있는 것입니다. 이 감옥 속에서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이 이야기가 나왔느냐하면 감옥에 있는데 굵직한 죄수 둘이 들어왔습니다. 그게 누구냐 하면 바로 가까이에서 술을 맡은 관원장과 떡을 맡은 관원장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각기 꿈을 꾸었는데 그 꿈을 해석해달라고 그러는데 요셉이 신령한 사람이기 때문에 꿈을 해석을 잘했습니다. 그래서 해석을 했는데 떡 맡은 관원장은 삼일 후에 왕께 불림을 받아서 목이 잘리고 죽는 것이고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을 하겠다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이제 이 사람에게 입을 여는 것입니다. ‘나는 히브리에서 끌려온 노예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곳에 이렇게 갇혀있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자기의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간곡하게 부탁하기를 ‘바로 곁에 가면 내 이야기를 해서 나로 이 억울한 옥살이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런 이야기입니다.
이 사람이 왜 옥살이를 하게 되었습니까? 보디발의 마누라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이 젊고 준수한 청년을 보며 마음이 동해서 확 덤벼든 것입니다. 그런데 끝까지 거절하니까 앙심을 품고 이 남자에게 누명을 씌운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보디발에게 이 일이 알려졌고 보디발이 분노해서 이 종을 내어 쳤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거기서도 변명하는 말이 안 나옵니다. 사실은 여러분이라면 그럴 수 있겠습니까? 지금 보디발의 집에 왜 감옥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경호실장 정도 되는 사람의 집에 있는 옥이었으니까 구약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추측을 하느냐하면 여기는 중요한 정치범들을 가려서 가두는 아주 엄중한 감옥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단 말입니다. 여기에 들어온 사람들이 잡범들이 아니라 큰 죄수들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면 자기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뻔합니다.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이 옥에 갇히는 사람은 거의 사형 받은 사람들만 갇힙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외칠 것 아닙니까? ‘저 여자가 나를 유혹했는데 끝까지 안 된다고 그랬더니 옷을 팽개치고 도망을 갔습니다. 이게 지금 나의 상황입니다.’ 라고 누가 이야기를 안 하겠습니까? 그게 무슨 고자질입니까? 그것이 무슨 책임 전가입니까? 그랬는데 왜 그랬는지 일체 이야기를 안 합니다. 그러면 동기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왜 말을 안했겠습니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자기를 거두어주고 그리고 그 집에서 이제껏 순적하게 종살이를 하게끔 돌보아준 보디발의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후의에 대한 보답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이 한 나라를 경영할만한 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한 사람의 유능함과 한 사람의 마음의 크기는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유능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실무자로서 일을 하기에는 모자람이 없습니다. 유능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경영하고 사람들을 부리는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개별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유능함 위에 정신의 크기가 커야합니다. 그 큰 정신으로 사물과 사람들 속에 이루어지는 질서를 입체적으로 볼 수 있어야합니다. 그런 정신의 크기가 매우 크도록 요구받는 지위가 무엇이냐 하면 왕이나 대통령입니다. 이것은 보통 커다란 마음의 크기가 있어가지고는 안됩니다. 아주 커서 평범한 사람들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다른 국면들을 보면서 아주 총체적으로 이것들을 다룰 수 있는 지략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잘 나타나는 곳이 어디냐 하면 전쟁터입니다. 우리나라가 육군, 해군, 공군, 이렇게 나눕니다. 각각 거기에 참모총장이 있고 각각 참모총장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지휘를 받으면서 국방부장관의 휘하에서 움직입니다. 전쟁이 딱 나면 다 소용없습니다. 전쟁이 나면 모든 지위가 합참으로 돌아갑니다. 합동참모본부입니다. 거기에서는 레벨이 참모총장 이상 되는 사람이 버티고 있고 모든 3군이 그 합동참모본부에서 떨어지는 지시를 따라서 움직입니다. ‘왜?’ 라는 질문은 허락되지 않습니다. 육군은 육군밖에는 모릅니다. 공군은 비행기만을 띄울 뿐입니다. 해군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전투합니다. 그런데 합동참모본부에서는 그 모든 전력사항이 각자에게는 다 비밀이지만 그런데 합동참모본부에서는 한 번에 다 보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군수물자를 만드는 기지 생산능력까지 종합적인 설계도를 놓고 전쟁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월 며칠까지 보병은 진격하라!’ 그러면 그것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합동참모본부에서는 그 진격이 있기 전에 공군이 폭격을 하고 그 다음에 야포부대가 공격하는 이런 모든 작업들이 있고난 후에 침투를 시켜서 공격을 하게 한단 말입니다. 이러한 입체적이고 총체적인 프로젝트에 대한 이해를 합동참모본부에서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아주 탁월한 그야말로 아주 탁월한 지략가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역사에 보면 불과 몇 만 명의 군인이 수십만 명의 군대를 격파한 예는 언제든지 일어납니다. 그래서 항상 전쟁에서 승리하는 나라의 뒤에는 고도의 지략가가 있는 것입니다. 왕이 그들을 선생처럼 생각하면서 나라를 경영했던 것이니 유비가 제갈량에게 삼고초려를 했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지략과 전략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그것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니 어떻게 저런 여자가 있을 수 있나?’ 그러면서 분노해서 그 여자를 고발해서 처벌하게 하고 그리고 이 보디발에게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그 여자에게 책임을 물을 것이고 그러면 보디발의 집안에는 말할 수 없는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러면 우리가 추측하자면 보디발의 아내가 정실이었을 텐데 그렇게 바람을 피워서 가문의 먹칠을 했다는 이야기가 바로의 궁에까지 퍼지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집안은 말할 수 없는 많은 질서들이 깨뜨려지게 되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많은 일들을 일으키면서 자신 혼자 그 위기를 모면해보고자 하는 그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크기를 보이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도 종종 보면 진실을 가려낸다는 미명하에 교회를 온통 다 박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빈대를 잡기 위해서 초가삼간을 태우는 격입니다. 그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법원에서 옳은 사람이라고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 동안에 교회는 수없이 상처를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뭐라고 그랬습니까? ‘차라리 너희가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고린도서에서 이야기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잡힐 그 당시 가장 격렬한 감정의 상태에서 보디발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도 참 대단한 것이지만 그렇게 세월이 많이 흐르기 전에 곧바로 이 사람이 그 죄수로 들어간 그 감옥에서도 또 간수들에게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 중 이 사람을 총무 비슷하게 삼아서 그래서 맡겨서 그래서 죄수들을 이 죄수인 요셉에게 맡기도 돌아보지도 않는 그런 고난을 준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의 정신과 마음의 크기가 그 도량이 얼마나 활달하고 컸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비록 가정의 상처는 지울 수가 없어서 그렇게 통곡하며 가슴을 찢으며 울었지만 과연 한 나라를 경영하고 남을만한 마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보면서 잘하는 것도 참 많다고 생각하지만 이런 마음의 크기를 가졌으면 참 좋겠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훨씬 편안한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쓰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르고 이제 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때쯤이면 진실을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당신께만 드리는 말씀인데 사실은 그 여자 그런 것입니다.’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그것을 묻어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가지만 가르쳐줍니다. ‘나는 여기에 갇힐 만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고백합니다. 직장생활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고자질하는 사람, 그 다음에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입니다.
직장을 다닐 때의 일입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은 특히 공무원들은 감사를 제일 무서워합니다. 감사를 하면 처벌을 내리니까 그러니까 가벼우면 주의, 주의가 제일 가볍습니다. 경고, 그 다음에 견책, 견책부터는 승진에 지장을 받습니다. 감봉이면 월급이면 깎이고 승진에 지장을 받습니다. 그 다음에 파면, 이것은 그 당시에 퇴직금의 절반이 몰수당합니다. 그러니까 그리고 보통 불명예가 아닙니다.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제가 직장에 있는데 감사를 내려옵니다. 그런데 그때 상사가 있었는데 내가 있던 부서는 아니었는데 하는 것을 이렇게 보니까 리더십이 두 종류에요. 한 사람은 그래도 꾀 높은 사람이었는데 감사가 내려와서 감사에 지적이 되었습니다. ‘너는 왜 이것을 이렇게 했느냐?’ ‘우리 과장님이 그러라고 그래서 그렇게 했습니다.’ ‘과장을 오라고 그래라.’ 과장이 왔습니다. ‘왜 이것을 이렇게 하라고 그랬습니까?’ 그 감사 앞에서 싸우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 그러라고 그랬느냐?’ ‘언제 그러라고 그랬잖아요?’ ‘그거야 그것 말고 딴 것을 이야기한 것이지!’ 그러면서 싸웁니다. 감사가 끝나고 나서 모든 직원들이 ‘저 자식, 저거!’ 리더십이 완전히 깨지는 것이에요. 그중의 한사람이 있었어요. 그중의 한 사람이 처세하는 것을 보면서 ‘야, 참 똑같은 인생을 사는데 어떻게 저렇게 차이가 날까?’ 생각했습니다. 감사를 하는데 평소에 고래고래 소리도 지르고 직원들한테 막합니다. 아주 심할 때입니다. 계속해서 여직원들이 손님 상대를 하면서 일을 하는데 전화가 오거든요. 전화를 받으면 ‘거기 어디죠?’ ‘네.’ ‘직원 중에 아무개 좀 바꿔주세요.’ 그럽니다. 이런 전화가 수없이 오니까 이 사람이 짜증이 나니까 ‘걔 죽었어요.’ ‘무슨 소리에요? 어저께도 만났는데!’ ‘걔 오늘 아침에 죽었습니다.’ 그러면서 전화를 끊는 것입니다. 뒤집어지는 것이죠. 자기네끼리 모여서 저 과장님은 나를 죽었다고 그랬다고 인간이 그럴 수가 있느냐고 그럽니다. ‘직장 근무시간에 전화 좀 오게 하지 마라.’ 그렇게 불만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내일이면 감사가 나옵니다. 그러면 이제 제대로 했는지 걸릴 것이 있는지 전전긍긍하며 있습니다. 그래서 일주일 전도 아니고 삼일 전도 아니고 긴장이 최고도로 달했을 때 언제가 하면 그 다음날이 감사 날이니까 아침에 일찍 옵니다. 일찍 오라고 그러면 마음에 달달 떨 것은 없지만 어쨌든 지간에 굉장히 마음이 긴장된 가운데 왔을 때 전 직원이다 감사를 받으니까 일찌감치 오라고 그래서 그때 이야기합니다. ‘오늘 드디어 감사를 받는다. 어쩌면 오늘 감사에 지적을 받아서 어떤 사람은 큰 견책을 받거나 잘못한 것이 있다면 더 큰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믿는다. 감사를 받다가 할 말이 없거나 뭔가 잘못된 것이 발견되었으면 무조건 내가 시켜서 했다고 그래라. 뒷감당은 내가 한다. 옷을 벗어도 내가 벗고 나간다.’ 간략하게 딱 연설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감동 그 자체입니다. 감사를 내년에 오는데 금년에 ‘내년에 감사받을 때 내가 보호해줄게.’ 하나도 감동이 안 됩니다. 긴장이 최고도로 달했을 때 ‘가서 감사받다가 잘못된 것이 나오고 뭔가 실수한 것이 나오면 무조건 내가 시켜서 했다고 그래라. 내가 책임진다. 옷을 벗어도 내가 벗는다.’ 나는 그 말을 나는 뻥이라고 보거든요. 아니 여직원이 잘못했는데 자기가 옷을 벗고 나갈 공직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같은 말을 해도 그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바보입니까? 얘가 돈을 해먹은 것이 뻔한데 ‘이 사람이 시켰습니다.’ 그러면 ‘네가 시켰으니까 너는 그만두고 네가 나가라.’ 그럽니까? 경위서, 진술서, 조사서, 다 거쳐서 책임 소재가 판단되는데 밝혀집니다. 다 밝혀집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순간에 한사람은 감사관 앞에서 둘이 여직원하고 투덕거리고 싸우고 한 사람은 ‘내가 그랬다고 그래라.’ 그때 여직원들의 눈에 아주 멋있게 비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가 다 끝난 다음에 가서 한번 거하게 저녁을 사주면서 ‘정말 고생했다.’ 그때 그렇게 힘든 감사를 통해서 그 조직의 리더십이 그 사람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은혜를 입었다고 봅시다. 뭐 그렇게 어마어마한 비리도 없습니다. 어마어마한 비리가 있으면 그게 그렇게 책임이 전가될 일이 아닙니다. 뭔가 잘못했습니다. 그러면 다 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가서 사정을 하고 한번만 봐달라고 그러면 견책을 받을 것이 경고로 떨어지기도 하고 경고 받을 것이 주의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다 압니다. ‘너 견책이 내려올 것 같다.’ 가서 손이 발에 닿도록 사정을 해서 경고쯤으로 떨어지면 이 여직원은 평생 그 상사를 못 잊습니다. 그냥 늘 옆에서 해바라기가 됩니다. ‘야, 너 이것 좀 하고 늦게 퇴근해라.’ ‘예스.’ 합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기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요셉이 바로 그런 마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요즘 말로 하면 그렇게 쫀쫀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렇게 큰 나라를 경영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 요셉의 마음의 씀씀이의 크기는 어디에서 나타나느냐하면 흉년이 들면서 곡식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땅들을 다 삽니다. 그래서 바로의 것으로 다 만들어 버립니다. 그렇게 해놓고도 ‘주십시오.’ 그러면서 오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또 줍니다. 빌려줍니다. 종자도 줍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상기시키느냐 하면 ‘이 온 세계를 보존하고 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런 큰마음의 크기를 가진 사람입니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황제들은 늘 불안 속에서 떨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죽임을 당할지 모릅니다. 600여명의 황제들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는데 평화롭게 황제의 위가 물려진 적은 손꼽을 정도고 모두 피비린내 나는 죽음으로 정권이 이양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황제는 어마어마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만 말할 수 없이 두려움 속에서 떨던 사람입니다. 오늘날 TV에서 보면 요만한 방에 황제가 있고 사람들이 쭉 오순도순 모여서 조회를 서듯이 국사를 의논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것이 아닙니다. 황제의 가까이에는 올 수 없었습니다. 상당한 거리를 떼어놓고 어떤 왕조에서는 사람마다 왕 가까이 올 수 있는 거리의 한계를 정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불의의 자객이나 단검 같은 습격으로부터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상황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끊임없이 어느 놈이 황제인 나를 향해 모반을 꾀하는가를 감시할 조직이 필요한 것이에요. 그래서 감시하는 조직을 만들어요. 그러면 고자질이 수없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왕은 그것을 절대로 신뢰했느냐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고자질을 하면 고자질을 해서 지적된 사람들을 정리하고 고자질한 사람을 또 고자질 할 수 있는 반대편의 사람을 세워서 균형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을 또 고자질합니다. 제거합니다. 보세요! 제거하지 않아도 될 사람을 제거해서는 문제가 별로 안 생깁니다.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갑니까?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가 역적모의를 했고 한사람은 아리송합니다. 그런데 둘 다 목을 쳤어요. 그러면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반드시 목을 쳐야 되는 사람인데 살려두었습니다. 그러면 문제가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합니까? 고자질이 들어오면 다 정리하고 고자질하는 사람을 고자질하기 위해서 반대편에 세우고 또 반대편에 세웁니다. 끊임없이 세웁니다. 이북도 지금 그렇게 통치를 하는 것입니다. 들리는 이야기에 의하면 1994년도에 김정일이 들어서고 나서 북한의 고위층의 사람들이 이만사천명이 숙청되었답니다. 싹 날려버립니다. 무시무시합니다. 그렇게 안하면 권력의 권좌가 유지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렇게 고자질을 하면 그 사람은 그런 고자질을 들으면서 그 자리에서는 그 사람에 대한 전적인 신뢰를 보내지만 사실은 언제든지 그 사람이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다는 개연성에 대해서 눈을 뜹니다.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의 특징이 뭐냐 하면 누구에게도 신뢰감을 주지 못합니다. 끊임없는 핑계 속에서 자기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들은 누구에게도 신뢰를 받을 수 없습니다. 상사에게서 뿐만 아니라 동료에게서도 입니다. 피해를 당한 부하직원 누구에게서도 신뢰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관계가 깨뜨려지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직원들이 두렵고 긴장하고 있을 때에 ‘다 내가 했다고 그래라.’ 그럴 때 그 직원들의 마음을 한번 생각해보세요. 또 자신이 위기 속에 몰렸는데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감사받는 사람 앞에서 싸우는 그 상사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이미 리더십은 설 수 없고 신뢰는 모두 부서져버린 것입니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보디발의아내는 그 이후로 성경에 더 이상 등장하지 않지만 아마 요셉이 그렇게 또 그렇게 그 고난을 모두 거치면서 국무총리가 되는 광경을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그가 무엇을 느꼈을까요? 그런데 이제 더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애원을 했는데도 이 배은망덕한 인간이 또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신경을 안 썼다는 것입니다. 요셉이 해석을 해주어서 결국은 희망을 갖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경을 안 씁니다. 그래서 세월이 많이 흘러간 다음에 그때서야 바로가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 사람이 요셉이 생각나서 불러오는데 그때 요셉의 나이가 30세였습니다. 후에 애굽에서 나온 고고학적 자료를 뒤져보니까 당시의 공무를 담당할 수 있는 최소의 연령이 30세로 나옵니다. 하나님이 그때까지 감춰놓으신 것입니다. 그전에 감옥소에서 풀려나왔으면 다시 노예로 컴백해서 버벅거리다가 인생을 마쳤을 것입니다. 30세까지 감옥소에 딱 묻어두셨다가 섭리 속에 꺼내놓으실 때에 공직에 취임할 수 있는 나이가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앞에 국무총리로 불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다른 사람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그렇게 올바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간 사람의 마지막 결과입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내가 잘못하지 않았는데 애매하게 당해본적 있지 않습니까? 그게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중학교 1학년 때 미술시간이었는데 아주 유별난 아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렇게 떠듭니다. 미술선생님이 굉장히 순하신 분이셨는데 몇 번을 경고했는데도 계속 떠들었습니다. 옛날에는 분필이 있어서 나무상자에 분필을 넣어서 선생님들이 들고 다니셨습니다. 칠판에 나두면 애들이 다 가지고 가니까 물자가 아까워서 가지고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이 너무 화가 나니까 분필통을 힘차게 던져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앞의 아이가 정통으로 맞은 것입니다. 혹이 이만큼 나서 애가 막 우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그냥 걔한테 찾아가서 부비면서 얼굴은 뒤의 아이를 쳐다보면서 ‘너 때문에 그랬잖아 인마!’ 다른 사람이 당해야할 것을 내가 당했을 때 얼마나 억울하겠습니까? 옛날에 지금 부산에 내려간 안 연주 자매가 교리 반에서 공부를 하는데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날 남편이 오더니 ‘여보 삼십만 원만 줘.’ 그러더랍니다. 그때 삼십만 원이면 꽤 큰돈이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뭐 그리 많이 받았겠습니까? ‘뭐하려고?’ ‘우리 친구가 이혼하는데 위자료를 주어야하는데 친구들이 삼십만 원씩 걷어주기로 했어.’ 그러니까 이 자매가 열을 받아서 ‘아니 그 자식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는데 왜 당신이 위자료를 보태? 죽은 것도 아니고 조의금도 아니고 못줘!’ 그랬답니다. 그때 마침 교리 반에서 무엇을 공부하고 있었느냐하면 대속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혼자 묵상을 하는데 기가 막힌 일이었답니다. 아니 그녀석이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하는데 왜 우리가 이 생활비에서 삼십만 원을 떼어서 줘야 되는지 기가 막혔답니다. 묵상을 하는데 ‘우리 주님이 그러셨겠다! 아니 저 자식들이 죄를 지었는데 왜 내 목숨을 내놓아야 됩니까? 예수님이 그러실 수도 있으셨겠다.’ 그러면서 그 삼십만 원을 친구통장에 부쳐주면서 이 대속이 얼마나 어려운가하는 것을 느꼈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우리들이 뱃살을 잡고 웃다가 뒤에 가서는 숙연해졌습니다. 적용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식으로도 그게 설명이 되는구나 하면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속하십시오.
그런데 그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열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신앙 없이 그런 일을 계속당하면 마음의 한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이 사람이 신앙이 없다면 마지막에 감옥 속에서 먹지도 않고 입지도 않고 아니 죄수복은 입었겠지만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있다가 이제 고혈압이나 이런 것이 걸려서 마지막에 죽어가면서 꽉 이를 깨물었습니다. ‘보디발의 아내 그년!’ 그러면서 피가 쭉 흐르면서 눈을 부릅뜨고 죽었을 것 아닙니까? 그러면 누가 행복해지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랬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렇게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불행해질 수 있는 상황이었잖습니까? 보디발은 직위를 잃어버릴 수도 있고 보디발의 아내는 당연히 사형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서 하인들은 고통을 받으며 뿔뿔이 흩어질 것이고 자기는 감옥소에 들어가고 이런 상황 속에서 모두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이 사람에게 이를 악물고 피를 흘리면서 두 눈을 부릅뜨고 화병으로 죽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그런 섭리를 믿는 신앙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눈에 보기에는 다 이해할 수 없는 가슴 아프고 고통스러운 일이 일어나지만 그러나 역사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이 주인이 되시면 내 인생도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시다는 신앙을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에게 모함을 당해서 감옥소에 끌려왔는데도 즉시 쾌활하게 살아가는 이 신앙적 낙천주의를 이 안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서 매일 기쁘게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감옥 속에서 많은 사람들을 섬기고 거기에 있는 간수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사실 감옥밖에 있을 때에는 이 간수들하고 요셉의 신분하고 그렇게 겨룰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 가정의 총무를 삼고 보디발에게 말할 수 없는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사람이니 비교가 안 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가서 다시 간수들에게 고분고분하면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면서 살아갔습니다. 이게 정말 신앙 안에서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러면서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바라보고 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억울함을 푸시고 그가 겪었던 고통을 능가하는 기쁨을 안겨주십니다. 아무도 잃어버리지 않고 자신도 하나님 앞에 발견되는 이런 복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한번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의 삶의 태도를 생각해보십시오. 그래서 결국은 보디발도 보디발의 아내도 모든 사람들도 죄수들도 간수들도 요셉은 죄수로 끌려온 사람이었을 뿐인데 모두 그에게 신세를 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안에서 복의 근원으로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사람은 틀려요. 뭐가 틀려도 틀립니다. 한번 가슴에 손을 얹고 내가 정말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가? 생각해보세요. 그런 사람들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