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2)
녹취자: 김경애
구속사입니다. 구속사는 Volume9 제9권입니다. 미셀러니가 나에게 에드워즈의 통합적인 사상을 보는 눈을 열어주었다면 그 사상으로 역사를 해석하는 시각을 열어준 것이 구속사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역사서술은 에드워즈의 전집 속에 2편이 실려 있는데 구속사라는 책인데 이것은 원래 이사야서의 성경구절을 가지고 연속해서 설교를 한 시리즈입니다. 그리고 구속사 저술을 위한 노트가 있는데 대개 우리들이 구속사라고 이야기하면 인간의 타락 이후부터 구속사가 시작되고 그 다음에 성경 안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구속사를 대개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그렇지 않고 18세기 자기가 살던 바로 직전까지를 말하자면 고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인류를 구속하는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전개를 성경 이후의 시대까지 다 거론합니다. 그러니까 요한계시록이 1세기말 100년 가까이 되어서 쓰였으니까 이후의 2세기부터 교회의 시대를 다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의 구속사의 경륜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점이 비판도 받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이 아닌 성경이후의 역사를 이야기하니까 해석 같은 것이 자의적이라는 평가를 사람에 따라서 내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지만 그런 모든 과정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소위 이야기하는 세속 역사와 그 다음에 하나님의 구속의 역사가 두 개가 따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여기서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학자들은 이런 에드워즈의 역사에 대한 해석이 아마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같은 책을 통해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책이 있는데 이 사람은 260년경에서부터 340년까지 살았던 인물인데 또 한권의 책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입니다. 어거스틴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런 책들에서 아마도 역사서술의 방법들을 참고했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 당시에 마니교, 펠라기우스주의, 도나티누스주의에 대항해서 초기 기독교의 정통적인 신앙을 수호하고자 역사서술을 시도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신국론은 어거스틴이 죽기 직전에 쓴 작품입니다. 그래서 정말 방대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모든 신학이 그 안에 녹아있는 작품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어거스틴의 작품 중에 백미로 치는 것이 신국론과 그 다음에 고백록입니다. 고백록은 46세나 47세 정도에 시퍼의 감독으로 있을 때였는데 사람들이 자기를 너무 존경하니까 자기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고백록을 통해서 말을 했는데 그것 때문에 어거스틴을 더 존경하게 되는 역효과가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아주 대단한 작품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단순한 고백록으로 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매우매우 어려운 책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읽히는데 난센스입니다. 무엇을 알겠습니까? 어거스틴의 고백록은 제가 100회독 이상을 했는데 학창시절에는 거의 외울 정도였습니다. 요즘에는 뜸합니다. 한권의 책을 100회독 이상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아주 가치를 담고 있습니다. 1년 정도 강의를 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내용을 담고 있고 아마 Confession을 그렇게 제대도 누군가에게서 공부를 한다면 눈이 확 뜨여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Confession을 갖다놓고 강의를 하면 몇 번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90분 수업으로 50시간 정도하면 Confession 한권을 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라틴어책 말고 한글이나 영어로 된 책을 본다고 할 때입니다. 4,500분 정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마어마한 내용이 그 속에 있고 사실은 Confession을 읽으면서 ‘아 이제 나는 이해했다.’ 라고 하면 어거스틴의 무슨 책을 읽어도 거의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Confession의 내용보다 훨씬 더 역사적인 전망을 보여주는 것이 사실은 신국론입니다. 이 신국론은 아마 최초의 역사 철학서라고 이야기합니다. 기독교만이 아니라 서양사를 통틀어서 말입니다. 분량 자체가 방대합니다. 그런데 어거스틴의 신국론과 여기서 이야기하는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은 책을 하나 소개시켜드리겠는데 어거스틴의 사상을 보면 신국론은 여러분들이 배운바와 같이 이 세상의 역사 속에 위로 눈에 보이게 역사가 흐르는데 말하자면 이것이 세속의 역사이고 보이지 않게 흐르는 역사가 있는데 이것이 구속사입니다. 세속사와 구속사 사이에 두 개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는 세상 나라입니다. 이것이 소위 이야기하는 두 왕국 이론입니다. 이것이 마르틴 루터에게 영향을 주어서 마르틴 루터의 두 왕국 사상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두 왕국을 해석함에 있어서 루터처럼 이 두 왕국의 철저한 구별을 강조하는 방식도 어거스틴 안에 있고 카이퍼와 같이 이 두 왕국을 본질적으로 하나로 보고 그리고 이것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할 나라라고 보는 카이퍼리안적인 사고방식도 어거스틴 안에서 발견됩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위대한 사상가들은 모든 후에 태어날 위대한 사상가들의 모태가 됩니다. 제가 아우구스티누스에 관해서 많은 책들을 읽었고 제가 어거스틴의 해석과 어거스틴에 관한 책들을 아주 공들여서 수집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 전 세계에서 어거스틴의 정기 간행물 학술지가 20종이 넘습니다. 그런 것들이 대부분 역사가 40년 이상 된 책들입니다. 제가 그중에서 한 60년 된 책을 두 권 정도 선택해서 초창기부터 모두 수집해서 가지고 있는 컴플리치언 한 학술지 두 종류가 있는데 40년, 50년 치를 모았습니다. 굉장히 공들여서 모았고 많은 자료들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서 저에게 소위 이야기하는 두 왕국에 관한 이론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감동을 준 빛을 준 책은 화란의 신학자인 반 오르트라는 사람이 쓴 책입니다. Van Oort입니다. 반 오르트라는 사람이 쓴 ‘바벨론 앤 예루살렘’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분의 박사학위 논문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 출판한 책인데 더럽게 비쌉니다. 한권에 오십 만원입니다. 책 한권에 45만 원 정도 주고 산 것 같습니다. 이번에 가면 오르트 교수를 만나보려고 합니다. 정말 잘 쓴 책입니다. 그것을 읽고 난 다음에 두 왕국 이론에 관한 다른 책들은 허접하게 보일 정도로 그렇게 잘 썼습니다.
그런데 이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좀 다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오히려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구속행동이 세속 여파 속에 어떻게 나타났는가하는 것을 관찰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신국론과 비슷하지만 신국론이 훨씬 스케일이 큽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교회를 사용하셔서 어떻게 당신의 구속을 완성해 나가는지에 대한 의미 부여를 성경시대를 뛰어넘어서 마지막에 자신이 살던 시대까지 확장해서 제시하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사실은 어거스틴의 충실한 학생이었습니다. 그리고 칼빈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흔히 루터와 칼빈이 교회를 성경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말하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루터와 칼빈이 어거스틴을 통해서 교회를 성경으로 돌아가게 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역사에서 어거스틴이 재발견될 때마다 Something Happen입니다. 뭔가가 일어났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어거스틴을 공부하면 무엇인가가 일어납니다. 어거스틴은 모두 250여권의 책을 남겼습니다. 모두 읽었다고는 말할 수 없고 라틴어로 읽지만 능숙하지는 않아서 부분적으로 도움을 받지만 영어로 된 책을 중심으로 읽었고 WSA 라는 Work of Saint Augustine 이라는 영어 번역이 가장 권위가 있습니다. 지금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책들을 읽어왔는데 굉장합니다. 그래서 어제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누구도 천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이 사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정말 위대한 천재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서울대에 있는 어느 교수 한사람이 어거스틴의 Confession을 읽고 나서 물론 불신자입니다. 그분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기는 그리스도인은 아니지만 철학을 하면 이런 방식으로 철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시간은 없겠지만 그러나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을 읽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어거스틴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친구입니다. 그 사람들하고 같이 이야기를 하면 시간이 지나가는 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루터가 에르푸르트 수도원에 있을 때 그 수도원이 어느 교단의 수도원이었는지 기억하십니까? 어거스틴 수도회였습니다. 또 칼빈이 파리에 있었던 중에 가장 천착하면서 읽었던 책이 교부들의 전집이었고 그중에서 어거스틴의 전집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습니다. 그래서 로잔에서 있었던 가톨릭과의 토론회에서 거의 암기한 상태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을 인용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어거스틴을 연구하고 공부하면서 제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에 있어서 많은 신비감들이 감소되었습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존재와 가치의 질서, 덕에 관한 이론, 교회와 하나님의 사랑, 아름다움과 통일성, 진리와 선, 이런 것들이 어거스틴으로부터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책은 거의 한 페이지 내지 두 페이지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나오는 저작들을 거의 베끼다시피 한 작품입니다. 보고 베꼈다기보다는 에드워즈가 그것을 말로 옮기면서 거의 어거스틴의 작품을 옮긴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이 구속사와 아주 유사한 책이 한권 있는데 존 오웬이라는 사람의 성경적 신학이라는 책입니다. Theologia pan 이라는 책입니다. 원래 라틴어로 저술된 책인데 나중에 영어로 번역이 되었습니다. 저 책은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700페이지 내지 800페이지 되는 아주 두꺼운 책인데 대단한 책입니다. 저것을 읽으면 존 오웬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존 오웬은 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몇 사람 되지 않는 신학자중의 한사람입니다. 사실은 존오웬을 통해서 제가 진정한 신학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의 저작전집은 지금도 Banner of Truth 사에서 찍혀 나오는데 그냥 계속 찍혀 나올 뿐이지 다시 Textual 크리시티즘을 하고 해제를 다는 이런 일들을 못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 일을 해내서 에드워즈 전집처럼 만들어내면 좋으련만 아시다시피 지금 영국의 교회형편이 그런 작업을 할 만한 형편이 되지못합니다. 그리고 또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신학자들도 제한적이니까 어려운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뭐냐 하면 혹시 콕세이우스라고 아십니까? 콕세이우스라고 하는데 이 사람이 16세기 17세기 사람인데 이 사람이 언약신앙을 신학 속으로 끌고 들어온 유명한 인물입니다. 초창기에는 그것을 두고 콕세이우스 논쟁이라고 해서 전통적으로 신학을 서술할 때 조직신학적으로 서술하던 그 방식 속에 콕세이우스가 이야기했던 그런 언약신학적인 방식의 서술이 조직신학 속에 들어오는 것이 가능하냐는 것이고 그 당시에는 조직신학, 성경 신학이라는 분류가 없었을 때였으니까 하나로 통으로써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서술해가는 방식이었으니까 사실은 종합적인 신학 책이었습니다. 그것이 조직신학적인 방식으로 서술되어오는데 그 속에 언약신학이 들어오는 것이 가하냐는 것을 가지고 논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이 콕세이우스 논쟁 혹은 콕세이우스 논쟁이라고도 합니다. 존 오웬의 성경 신학은 콕세이우스의 신학방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적 신학방식이라고 되어있지만 전체가 뭐냐 하면 언약신학의 관점으로 성경의 역사 전체를 바라보는 그런 시도입니다. 그러니까 언약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언약은 이제 성경신학적으로 보면 우리들은 언약을 통일성이 있는 언약으로 보느냐 아니면 세대별로 나누어서 각각 언약의 성격이 다르냐에 따라서 Dispensationalism의 논란이 나오는 것입니다. 세대주의 논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들이 언약의 통일성을 세대주의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고 언약의 통일성을 이야기한다고 하더라도 확실히 하나님이 경륜하시는 방식에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는 것은 우리들이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간이 없으니까 하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과의 언약과 모세와의 언약을 비교해보도록 합시다. 존 브라이트도 자신의 책속에서 이야기한 것인데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에는 말하자면 언약을 위반할 경우에 어떤 징벌을 가할 것이라는 명시적인 의사표명이 없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언약은 한없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여주는 언약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과 연속선상에 있으면서도 모세의 언약으로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의 은총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이 같이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렇게 행하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소위 이야기하는 키크로스가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고대 근동학에서 그것이 한때 18세기에 기록된 아카도로 기록된 함무라비 법전이 있습니다. 함무라비법전을 실제로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그 코드를 놓고 모세오경을 다 기록하면 문학적인 말하자면 작문방식이 너무 흡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모세오경에 대한 함무라비법전의 의존성을 너무 강조한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의 원 자료이고 거기서 빌려 온 것이라고까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소위 이야기하는 히브리어의 ‘키’ ‘무엇 한다면’ If in부터 Key로 이어지는 If and Then 이라는 이런 방식의 법조문들이 언약 속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것은 확실하게 연속선의 측면에서 보면 아브라함의 언약과 모세의 언약이 일관성을 가지고 흐르는 것은 틀림이 없는데 그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경륜이 다소 다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새벽에 읽었던 창세기 17장에서도 우리가 그런 것을 읽을 수 있는데 아브라함이 굉장히 잘못했습니다. 하갈에게 들어가서 아이를 갖고 불순종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를 엄청나게 징계하셨다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스스로 찾아오셔서 아브라함이 간절히 기도했다는 이야기도 나오지 않고 나타나셔서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너는 내 앞에서 완전하여라.’ 굉장히 하나님이 부드러운 분으로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모세에 와서는 분위가가 완전히 바뀌는 것입니다. 언약에 하나님의 축복과 심판하는 칼을 함께 두시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서로 언약이 단절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아브라함 시대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 시대를 경륜하셨는가 하는 것이 모세의 시대에 하나님이 어떻게 경륜하시는가와 약간의 차이가 난다는 것입니다. 그 경륜의 차이성이 뭐냐 하면 그것을 이해하는 열쇠가 언약입니다. 그런 언약적 관점을 떠나서 성경의 시대를 나누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의 언약과 보편교회의 기독론을 진술해나갑니다. 그런데 두 작품을 모두 읽고 비교해보면 이런 느낌을 받는 것입니다. 뭐냐 하면 에드워즈의 구속사라는 책은 마치 아마존 밀림을 통과하는 강을 배를 타고 지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느낌입니다. 구속사는 경비행기를 타고 숲 위에서 숲과 강을 함께 보면서 비행기를 타고 지나가는 느낌입니다. 에드워즈의 구속사는 오웬의 성경적 신학과는 대조적으로 성경 자체의 진술을 따라 언약들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의 경륜을 해석해 가는데 하나님의 시대적 경륜의 다양성보다는 이 모든 것을 관통하고 있는 우주적인 완성자로서의 하나님의 구속행동에 초점이 맞춰져있습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이 구속사가 너무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하나님이 참 진리이시라는 사상이 모든 학문과 예술 속에 심겨져있습니다. 그런데 특별히 그런 모든 일반학문 속에 이런 것들이 심겨져있지만 그러나 그것들은 파편들이고 이것들이 아주 엑기스처럼 모여 있는 정수가 있는데 이것이 성경입니다. 이 성경도 성경 모든 부분이 동일한 광채의 계시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 중심을 관통하고 있는 가장 풍부한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찬란하도록 담고 있는 스토리가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인류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행동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윤리학적 저술에서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한 것은 악한 것이었지만 타락한 인간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하나님은 인간의 범죄를 통해서 영광을 받으신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입니다. 만약에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의 사랑, 마음을 녹이는 하나님의 사랑, 인간의 통렬한 회개와 하나님에 대한 처절한 구원의 갈망 이런 것들은 없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충분히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기 때문에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목적이 좌절되는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합니다. 어쨌든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구속행동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의 성품의 아름다움을 계시하는 수단입니다. 이런 해석들이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어쨌든 오늘날 우리에게 성경 전체를 볼 수 있는 눈과 성경시대 이후의 오늘날까지 역사를 바라보는 관점을 기독교적인 시각에서 갖게끔 만들어주는 훌륭한 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제가 아주 흥미롭게 읽은 책이 과학철학에 관한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전집 제 6권에서 The Scientific and Philosophical Writings 라는 작품들을 모아서 한권의 책을 만듭니다. 물론 후대사람들이 만든 것이지만 이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은 자연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와 아주 큰 능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번 보겠습니다. 영상으로 나옵니까?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에드워즈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연의 모든 역사 중 천둥과 번개만큼 달콤한 것은 없다. 이전에 그것은 나에게 끔찍한 것이었다. 나는 천둥을 몹시 무서워하던 사람이었고 뇌우가 일어나는 것을 보면 공포에 사로잡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반대로 지금은 즐거움이 되었다. 나는 뇌우가 시작되면 하나님을 느낀다. 그래서 그런 때에는 구름에 시선을 고정하고 번개의 연주를 보면서 장엄하고 두려운 하나님의 천둥음성을 듣는 기회를 갖는다. 이것은 종종 나를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에 대한 달콤한 묵상으로 인도하는 엄청난 즐거움이 된다. 이것을 감상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내가 묵상한 것을 노래하는 것이 내가 생각한 것을 독백으로 말하고 노래하는 음성으로 말하는 것이 내가 보기에 언제나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들이 아시다시피 그쪽도 평지가 많으니까 번개가 치면 어마어마하게 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예전에는 그 사람이 당시의 지성인들이 그랬듯이 알미니우스주의자였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대학원시절에 깊이 하나님을 만나고 영광을 경험하면서 칼빈주의자가 됩니다. 그런데 그때에 이제 엄청난 번개를 치면 굉장히 무서워하고 두려운 마음이 있었는데 그렇게 주님을 깊이 만나고난 다음에 천둥치고 번개 치는 창가에서 그 광경을 즐기는 것입니다. 커다란 천둥과 번개가 때리면서 일어나는 자연의 현상들을 보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위엄, 영광, 이런 것들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서가 여기에 나오는데 이것은 오늘날에 이야기하는 토마스 쿤이나 칼퍼프가 이야기하는 그런 종류의 과학철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책 전체에서 집중하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뉴턴이즘입니다. 당시에 뉴턴이라는 사람이 나와서 프린끼삐아 라는 책을 씁니다. 프린시플이라는 책인데 라틴어로 쓰였습니다. 그 프린끼삐아라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연과학의 수학적 원리라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뉴턴이 평생 혼자 사는데 그 사람이 미적분을 발견합니다. 라이프니찌가 먼저 발견은 했지만 이 사람이 미적분을 발견하게 됩니다. 현대 수학이라는 것이 전부 미적분의 변형입니다. 그래서 이 미적분이 남긴 업적은 어마어마합니다. 여러분들이 들으셨는지 모르지만 위상수학이라든지 천문학에서 사용되는 새로운 차원의 수학들은 모두 미적분을 토대로 해서 이루어지는 말하자면 고차원적인 수학입니다. 그런데 이 뉴턴이 어떤 시도를 했느냐하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모든 세계는 자연 사물들 간의 아주 정확한 법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법칙은 수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제 말씀드린 데카르트주의하고 만나면서 사실은 똑같은 인본주의사상이라도 데카르트의 관심사와 뉴턴의 관심사는 달랐습니다. 뉴턴의 관심사는 자연적인 면이었고 데카르트의 관심사는 도덕적인 면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의 관심사는 자연 속에서 법칙을 발견해내는 것이었고 데카르트의 생각은 이제 모든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주체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유사성과 차이점을 함께 가지면서 이 두 이론이 근대문명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엄청난 물질적인 진보를 이루는 사상적인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가 굉장히 천재였고 과학에 상당한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록을 보니까 16살 때 이미 자연과학에 관한 논문을 영국의 유명한 왕실학회지에 게재를 받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이 사람이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도 과학을 끊임없이 관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이제 이런 방식으로 연구하면서 이 책에서 무엇을 다루고 있느냐하면 뉴턴에서 발견되는 많은 뉴턴의 법칙들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면서 기독교신앙을 훼손하는 계기로 삼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무엇인가 과학에서 발견된 것들을 가지고 이렇게 수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법칙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없다. 그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 아니라 자연현상의 법칙들이 움직이는 것이라는 소위 이야기하는 자연주의 내지는 기계론적 자연관을 이야기했는데 이러한 당시의 지성인들의 뉴턴적인 설득이 성공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에드워즈는 그런 것들에 대해서 새로운 해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로운 해석을 통해서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런 시도들에 대해서 모두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300년이 넘는 시대 이전에 과학이 아직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의 사고방식이고 우리는 과학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는 상식이 에드워즈를 이미 상당히 능가한 부분들이 있기 때문에 볼 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자연과학에서 발견한 사실을 신학으로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서 굉장히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이때에 그리스시대의 사유방식 즉 그리스시대의 사유방식은 무엇이냐 하면 모든 지식을 통활 하는 소위 이야기하는 팜페디아 방식이었습니다. 범 교수학적인 방식입니다. 그래서 제일 처음에 피지카 자연철학 자연학을 통해서 어떤 자연현상을 발견해내고 노기카 이것을 논리학으로 전개한 다음에 에티카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를 최종적으로 규정해내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사실은 동양에서는 굉장히 풍부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를 들자면 물이 흘러갑니다. 그것을 보면서 ‘아! 물이 흘러가는구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막히면 기다렸다가 그것을 뛰어넘으면서 흘러가는 것이 물이구나!’ 그 다음에 피지카는 거기에서 ‘아 그러면 인간사회에 존재해야하는 법도 바로 이런 물이 흐르는 원리와 같구나!’ 그러면서 법이라는 물水변에 지나갈 去자라는 法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에티카에 적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존재는 아무렇게나 막 살면 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이 만들어놓은 질서의 법을 따라서 육체도 정신도 그렇게 흘러가야하는 존재다.’ 라는 생각을 갖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을 보면서 굉장히 커다란 자극을 받게 되었고 이러한 자극은 ‘성경만 신학의 해석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문들이 신학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구나!’ 그리고 그 해석이 올바르기만 하다면 일반학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진리의 빛이 참으로 놀랍게 드러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천문학, 생물학, 의학, 이런 것에 대해서 공부하고 싶은 욕구를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는 양자역학을 비롯해서 현대과학에 대해서 조금 눈을 뜨면서 그러면서 어떻게 이 조나단 에드워즈가 당대에 뉴턴주의를 새롭게 해석해서 그 시대 사람들을 설득한 것처럼 이번에는 포스트 뉴턴이즘적인 그런 과학의 발견들을 설명해서 뉴턴주의를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어서 과학 때문에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방해되었던 사람들의 마음을 오히려 반대로 과학을 이용해서 돌려놓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을 제가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에게 커다란 지적인 자극을 주었습니다.
오늘 저녁에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리기로 한 주기도문에 보면 양자역학과 아인슈타인과 하이젠베르크, 쉐링거 이런 사람들의 논쟁을 통해서 우리가 배운 신학적인 교훈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실제로 여러분들이 지금 쓰고 있는 스캐너라든지 자기부상열차라든지 탄소섬유 이런 것들은 뉴턴의 과학만을 가지고는 결코 나올 수 없는 제품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양자역학을 토대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양자역학에 대해서 공부를 하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신학적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신학적인 견해에 대해서 아주 깊이를 더할 수 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물론 양자역학을 평생 전공한 학자들이 보면 ‘저렇게 써먹는 것이 아닌데’ 그러면서 투덜댈지 모르지만 그것은 자기네들은 그것밖에 모르니까 자기들의 이야기이고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충분히 그런 지식들을 진리를 옹호하는데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하면 재미있는데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해야하니까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윤리학의 저술이라는 ethical Writing 이라는 것이 제 8권에 등장합니다. 여기에 보면 시장바닥 같은 곳이 나오는데 이곳이 에드워즈가 살던 시대가 18세기입니다. 그러면 18세기이면 영국에서는 막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시작하던 때였습니다. 영국의 산업혁명과 그 다음에 더 잘 알려면 14세기 15세기 북유럽 국가들의 해양진출 그것과 경제사 그 다음에 18세기의 영국의 산업혁명 그 산업혁명이 사회를 어떻게 바꿔놓았고 인간의 정신구조를 어떻게 변화시켰는지에 대한 이해 그리고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의 현대 사회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주 치명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꼭 읽어야할 책 중에 하나가 데이비드 웰즈의 4부작 시리즈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을 전공하든지 꼭 읽으라고 내가 강력히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래서 윤리실종, 신학실종, 위대하신 하나님 거룩하신 하나님, 탁월하신 그리스도, 더 나아가서 용기 있는 기독교인이라는 4부작 내지 5부작 시리즈들을 가능하면 역사책을 같이 참고하면서 읽어 가면 현대사회를 보는 커다란 개안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데이비드 웰즈도 제가 교분이 있고 자주 가서 만나 뵙고 같이 교제도 하고 하는데 굉장히 귀한 분입니다. 그러니까 개혁신학을 제대로 공부한 개혁신학자로서 복음주의를 깊이 이해하는 정통적인 신학자로서 이렇게 광범위한 지식으로 미국의 현대사회를 연구하고 그 사회에서의 기독교의 관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렇게 포괄적이고 해박한 설명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런 분들의 책은 영어가 더 편할 수도 있지만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으니까 어쨌든 책을 읽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런 것들이 목회를 하는데 있어서 커다란 힘이 됩니다.
그 사람을 읽기 전에 이제 프란시스 쉐퍼의 책들을 여러분들이 모두 읽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전집도 나와 있는데 특히 프란시스 쉐퍼의 책들 중에 이성으로부터의 도피 그리고 ‘How should with live.’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책들은 굉장히 중요한 책이고 탁월한 책입니다. 이런 프란시스 쉐퍼가 70년대에 활동하던 분이지만 그러나 프란시스 쉐퍼의 책들을 깊이 접하면 신학교 다닐 때 ‘에스케이 후럼 리즌’을 읽으면서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쉐퍼를 사랑하게 된 동기였는데 지금은 쉐퍼의 제자들 중에서 쉐퍼를 능가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또 난시 엔돌피어시 라든지 이런 사람들이 아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세계관에 대한 이해를 견고히 하고 더 깊이 이해하려면 헤르만 도에비에르 라든지 볼렌호벤이라든지 아브라함 카이퍼 라든지 슈피어라든지 이런 학자들의 글을 읽으면서 기독교세계관이 형성되는 근대적인 기반에 대한 기초를 단단히 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공부가 되겠는데 문제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책들이 대부분 한글로 번역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읽는 수고를 많이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제 굉장히 중요합니다. 헤르만도에비라든지 볼렌보레 같은 사람들의 책들은 매우 중요합니다. 이러면서 세계관을 형성하고 이 세계관 속에서 윤리학이 나오게 됩니다. 이 윤리학이 철학사에서 보면 개인의 도덕적인 삶은 윤리학이고 이것이 공동체에 적용될 때에는 이것이 정치학을 나옵니다. 지금은 정치가 윤리와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생각하는 시대이지만 소위 이야기하는 마케아벨리적인 하나의 기술통치 같이 이해되지만 그러나 고전적으로는 그렇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의 목적은 한 나라의 사회가 정말 도덕적으로 건전하고 인간의 인간됨을 한없이 펼치면서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사회가 되게 하는 것 거기에 목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국가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2차적인 사명입니다. 국가의 가장 중요한 존재의 가치는 정의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교회의 가장 탁월한 가치는 사랑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가정의 가장 탁월한 가치는 참된 인간의 덕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3개의 기관이 힘을 합하면서 참다운 인간사회를 건설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면서 절망했던 것 중의 하나가 뭐냐 하면 어떻게 국가가 이럴 수 있을까? 뭐냐 하면 물건을 많이 팔아서 국민소득이 늘어나고 그러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가 참 정의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르쳐줄 때 국가다운 국가가 되는 것입니다. 그 틀 속에서 사실은 가정도 가정다운 가정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국가의 존재의 가치를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 너무 희생시켜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의에 대한 올바른 개념을 배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치학이 올바로 서지 못하니까 그런 속에서 생겨나는 가정들이 온전한 가치를 찾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굉장히 아쉬운 대목입니다.
이 에드워즈의 윤리학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에드워즈의 책 8권은 크게 3가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유명한 논문 그 다음에 그에 못지않게 뛰어난 논문은 The nature of true 버츄. 그것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3번째 담고 있는 책이 바로 채리티안 익스포트 라는 고린도전서 13장 설교가 담겨있습니다.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저는 앞의 2개의 논문은 여러 번 읽었고 여러 번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채리티아 익스포트는 내가 일부러 읽지 않았습니다. 읽지 않은 이유가 워낙 어려우니까 내가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하기 전에 저것을 읽으면 임플란트 되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한번 확인해보리라 생각하고 아직까지 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서른세 번에 걸쳐서 저도 33회 평균 60분내지 70분짜리 설교로 33회에 걸쳐서 고린도전서 13장을 설교했고 그것이 책으로 나오면 1,000페이지 정도 되는데 제가 2년 내에 출판을 목표로 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마 생애적인 저작으로 내놓고 싶은 마음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정말 위대한 장입니다. 이것을 위악적인 저서에 넣은 이유는 무엇이냐 하면 그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모든 윤리의 완성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삶의 최고의 열매, 최종적인 열매는 사랑이다.’ 지식이나 탁월한 신비한 체험이나 혹은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 열매로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천지창조의 목적과 참된 미덕의 본질은 쌍둥이 논문입니다. 쌍둥이 논문인데 이것들은 에드워즈의 과학철학이 자연세계에서의 질서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다면 이 윤리학적인 저술은 도덕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앞에 있는 이 두 논문은 아주 짧습니다. 그저 40~50페이지정도 밖에 되지 않는 짧은 글입니다. 부흥과 개혁사에서 한글로 번역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내용이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번 읽어보십시오. 읽다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면 나는 신학공부하기에는 현저하리만치 철학적인 이해가 모자란다고 반성을 하고 그리고 다시 도전을 해서 읽어야합니다. 그런데 이 두 권의 책은 전자의 책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의 도덕의 기준이 되는가? 하는 것을 두 개의 동일한 논문을 다뤘는데 한권은 성경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사변적 접근이고 두 번째 논문은 신학적인 접근입니다. 그래서 후자가 조금 쉽습니다. 그런데 전자를 읽을 수 있으면 좋습니다. 읽으면서 이것을 천지창조의 목적을 이해하게 되면 학문과 모든 우리의 소위 이야기하는 목회활동이 어떻게 모두 함께 어우러져서 하나님이 세계를 만드신 천지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두 번째 나오는 The Nature of True virtue. 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소위 이야기하는 그리스 철학 이래로 계속 되어왔던 덕 논쟁을 기독교적으로 해결한 책입니다. 아주 탁월한 책입니다. 이 덕이라는 것은 희랍어로 ‘아레떼’라고 소위 이야기하는 탁월함과 연관되어있는 것인데 라틴어로는 비르투스 라고 합니다. ‘비르’는 힘 남자 이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덕이라는 것은 영혼의 힘입니다. 단서가 붙어야할 것이 올바른 영혼의 힘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덕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이런 덕이 선을 지향하는데 이것이 말하자면 Spiritual Goodness 영적인 선을 기초로 참된 선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고 그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도덕감각에 기초해서 선을 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발생할 초기로 보면 그 두 개가 별로 차이가 일어나지 않지만 그러나 그것이 계속해서 확장되어갈 때에는 둘 사이에 좁힐 수 없는 거리감이 생겨나게 되고 심지어는 적대감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에드워즈가 덕을 일차적인 덕과 이차적인 덕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론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것 모두를 성령님의 역사로 해석하면서 소위 이야기하는 정화라는 일반은총 차원과 성화라는 특별은총 차원을 나누어서 이야기를 하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런 연관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과 같이 교회 안에 도덕적인 설교가 만연합니다. 그리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어떤 사람이 착하게 산다고 할 때 그것은 이제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는 도덕과 그 다음에 어떤 본성적인 도덕과 신령한 도덕 사이의 구별이 거의 무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에서 중생과 회심에 대한 담론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지금 그것을 설교하는 교회가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을 말하자면 사회에 적응하면서 살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목회사역에 하나의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아침에 임원들하고 식사를 하면서 잠깐 그런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 제가 하고 있는 담론들은 기독교사역을 위해서 아주 필수적인 이해들입니다.
조금 더 설명해보자면 이런 것입니다. 요즘 서점에 나가보면 스피노자의 책이 엄청나게 많이 쏟아져 나와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사람들과 유럽 사람들이 스피노자에 대한 책을 엄청나게 쏟아내고 두께도 만만치 않습니다. 600페이지 700페이지 되는 책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스피노자는 역사적으로 이미 17세기 때에 화란교회의 출교선고를 받고 파문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사람들의 책이 소위 기독교국가로 알려진 미국사회에서도 엄청나게 환영을 받고 있는가 하는 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커다란 관심사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스피노자가 사실은 과거에 있어서는 전통적인 도덕관념들을 완전히 바꾸어놓은 결정적인 역할을 스피노자가 합니다.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호나투스’라는 개념인데 이것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기분이나 행복감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이 사람은 판 데이스트였습니다. 그래서 신의 본질과 자연의 본질은 하나다. 그래서 그것들이 어떤 형체를 가지고 나타나느냐에 따라서 이런 자연의 많은 사물들이 되고 인간도 그 속에 속해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사유관은 굉장히 노장사상적입니다. 비슷한 면이 많이 있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느냐하면 전통적으로는 Evil 즉 악과 선의 관념이 있습니다. 죄는 바로 절대 악이라고 신학에서 규정했었던 이유는 바로 절대적인 개념으로서의 Evil 이 있었기 때입니다. Evil, Good 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도덕의 기준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이런 것들이 이미 모든 신의 본질과 이 세계의 본질이 하나이기 때문에 사실은 Evil 이나 Good 자체도 현상적이고 잠시적일뿐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서 뭐냐 하면 코나투스를 이야기하면서 결국은 Evil, Good의 개념을 Bad and Good 의 개념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뭐냐 하면 나라는 사람이 기준이 되어서 나의 기분은 좋게 하는 것은 Good이고 나의 기분이 썩 좋지 않을 때에는 Bad가 되는 것입니다. Evil은 의미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절대적인 윤리의 기준이 사라진 상태에서 나에게 어떤 느낌을 주느냐는 것이 Good and Bad의 기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Good Bad 라고 생각하는데 저 사람은 다르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전통적인 Evil과 대척점에 서있는 Good 이것을 염두에 두고 전개되는 윤리학을 대폭 수정해서 새로운 윤리학을 제시하는데 이것이 바로 그의 에티카라는 유명한 작품입니다. 그의 정치철학도 역시 이런 사상에 기초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현대사상은 정확하게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계승되면서 꽃피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교회를 보면 교리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진리가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만이 유일한 진리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성경만이 하나님의 진리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이런 식의 주장들이 현대코드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포기하면서 뭐냐 하면 ‘너에게 좋은 것이 그에게 좋은 것이다. 너에게 달려있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 죄라는 것은 책임지고 심지어는 죽음에까지 이르러야할 형벌을 불러오는 범과라고 보지 않고 연약함, 환경에 대한 부적응성 이런 것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소위 오늘날 우리에게 유행하고 있는 상처나 치유라는 말도 그것이 결국 무엇을 보여주느냐 하면 내가 어떤 악을 행했어도 그것도 결국은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행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군가로부터 상처를 받았다. 그래서 그런 상처를 받았기 때문에 나는 이렇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사형 제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가 몇 되지 않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사형 제도를 인정하기는 하지만 그 국제 엠넷의 눈치를 보면서 현실적으로 사형을 집행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엄청난 저항이 들어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나라들이 사형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스웨덴이라는 나라에서는 아무리 말도 되지 않는 죄를 저질러도 20년인가 이상을 감옥에 가둘 수 없습니다. 끝입니다. 그 감옥은 거의 2급 호텔 수준입니다. 그 안에서 탁구도 치고 당구도 치고 tv도 보고 국립호텔입니다. 그런 상황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점에 있어서 뒤떨어져 있습니다. 그런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한 사람이 살인죄를 저지르고 방화를 하고 할 때에 그 사람도 어찌할 수 없는 성품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인데 그것은 공동체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결과물로 우리 모두가 함께 공동으로 부담해야한다는 사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시대이기 때문에 사실은 윤리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기준 자체가 모호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작품들은 이런 상대주의적인 사고방식에 젖어있는 사람들에게 확고하게 말하자면 윤리철학적인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 하면 제가 오늘 저녁때까지 강의하면 언급되는 책들이 거의 4, 50권이 될 것입니다. 그 책들이나 저자들 중에서 한권이라고 가서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다 읽지 못하면 몇 페이지라도 읽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저의 서재에 총신대 총장을 지내시던 김 의원 박사님이 오셨습니다. 저를 가르치고 저를 좋아하는 선생님이셨는데 이제 은퇴하십니다. 같이 역사이야기를 하면서 제 서재를 돌아보시고 가시면서 그런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김 목사님 나는 일평생에 구약밖에 학문이 없는 줄 알았는데 참 학문의 세계가 넓군요.’ 구약이나 신약이나 조직신학이나 그런 것들은 인류 지성사가 만들어놓은 어마어마한 학문의 한 귀퉁이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학문을 만약에 텍사스 주라고 한다면 이것은 학교캠퍼스의 방 하나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공부할 수는 없지만 그런 지식의 세계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공부를 하는 것과 이것밖에 없는 것처럼 생각하고 공부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사유의 방식의 차이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박사를 잘못하면 얇을 薄자의 薄士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깊이 공부한다는 것은 항상 인접학문들에 대해서 눈을 뜨고 인접학문들을 생각하면서 혹은 공부하면서 그러면서 자신의 학문의 세계를 쌓아야하는 것입니다. 윤리학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윤리학적으로 우리가 왜 그렇게 살아야하는가 하는 기반들이 다 허물어진 것입니다. 미국의 학자 가운데 피터징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동성연애를 가지고 논란이 심해집니다. 유럽에서는 게임이 이미 끝났습니다. 신학학자들이 무슨 논문을 쓰느냐하면 동성연애가 얼마나 성경적인가 하는 것을 규명해내는 박사논문들이 속속 발표되는 것입니다. 신약학자들이 구약학자들이 말입니다. 그런 상황이고 영국은 이미 차별금지법에 나와 있는데 남자 둘이 와서 목사에게 ‘우리 주례를 서주십시오.’ 할 때 ‘노’ 하면 그 목사님은 현행범으로 체포됩니다. 실화입니다. 이런 심각한 상황인데 그래도 미국은 아직도 논쟁중이니까 덜한 것입니다. 그런데 피터징어 같은 사람들은 이미 동성연애의 논쟁을 뛰어넘었습니다. 왜 당신들은 결혼이 사람인 남자와 여자 혹은 사람인 여자와 여자 사이에만 결혼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느냐? 사람과 소, 사람과 개 사이에도 부부관계는 성립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피터 징거는 유명한 사람입니다. 가서 쳐 보시면 피터 징어의 책들이 쫙 나옵니다. 여러분들은 웃습니다. 동성연애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에도 40년 전에 그렇게 웃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베르그송을 읽으면서 모든 진리가 땅에 떨어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결심했다. 일생동안 남은 모든 진리를 허물어버리면서 살아야겠다고 말이다.’ 이 사람들은 진리를 허무는 일에 헌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그렇게 헌신되지 않았습니다. 공부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희생도 훨씬 더 많이 합니다. 그리고 진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지성도 후집니다. 윤리도 후집니다. 무슨 행동을 해도 신념이 없습니다. 그러니 진리가 빛나지 않습니다. 신학은 머리통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할 때 웃으면서 죽을 수 있어야합니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신학을 하다가 죽은 사람들입니다. 온몸으로 신학을 해야 합니다. 이방신에게 절해라. 절하면 됩니다. 그런데 신학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해라. 신학이 그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죽어갑니다. 이런 속에서 책들을 읽으면서 깊이를 더해가는 것은 너무 너무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입니다. 더 이야기를 할 것이 많이 있는데 넘어가겠습니다.
그 다음에 삼위일체론입니다. 그러니까 21권에서 삼위일체, 은혜, 신앙이라는 주제들을 모아서 이것을 만들게 됩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분량이 크거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에드워즈의 관심사는 삼위일체론을 다시 재 진술해 내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엇인가 자기가 보태고 싶은 이야기들만 기록했습니다.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다른 17세기 정통파주의자들의 신론해석에 비춰보면 탁월해보이지는 않습니다. 용어, 진술의 정교함과 깊이 면에 있어서 이런 사람들의 저작에 미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진술을 보면 이 사람들이 뒤에 나오고 있는 보편교회 신학자들 아우구스티누스, 페트루스, 피터롬바르드라는 유명한 인물이고 이 사람의 유명한 책이 The Sentence 라는 명제 집으로 싼뗀띠아 명제집이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중세시대의 신학교과서였습니다. 도서관에 가보면 찾아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책을 저술한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토마스 아퀴나스 그 다음에 기롤라모 잔키우스 17세기에 아주 정교한 개혁신학을 진술한 사람이었습니다. 마스트리히트, 콕세이우스, 이런 사람들의 삼위일체론으로부터 다양한 내용들을 차용하고 있었습니다. 삼위일체를 설명할 때 어떤 식으로 설명하느냐가 크게 서방교회와 동방교회가 차이가 있습니다. 서방교회의 경우에는 삼위일체라고 할 때 일체가 뭐냐 하면 우리말로 하면 한 몸뚱어리인데 그게 몸뚱어리가 아니라 그 체가 신적본질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라틴어로 에센띠아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적본질이 하나라는 것부터 시작해서 Unity로 시작해서 신적본질이 하나인데 그래서 한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삼위로 존재할 수 있느냐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 서방교회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공부하는 신학이 대부분 이런 방식을 따라서 전개되어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한 가지 방식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동방교회에는 다르게 접근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하면 하나님은 삼위이시다. 그런데 세분은 아니고 삼위이시다. 라고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서로 다른 삼위 즉 세 위격이 어떻게 일체일수 있는가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동방교회의 방식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얼핏 보기에는 서방교회 방식은 플라톤적인 접근을 선호했던 것처럼 보이고 동방교회의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접근방식을 선호했던 것처럼 보입니다. 동방교회에서 이렇게 삼위 즉 세 위격이신 하나님이 세 위격이심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나의 단일한 신적본질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설명할 때 페리코레시스라는 특별한 개념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성부 성자 성령 사이를 모두 연결시키는 페리코레시스 상호교류, 상호유통이라는 뜻인데 그것을 타고 위격은 각각 다르지만 본질은 공유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세 개의 그릇이 있는데 따로 물을 담아놨을 때에는 세 개가 각기 다르지만 관으로 연결하면 그 물이 모두 흘러서 누구의 소유라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렇게 소유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삼위일체에 관한 설명에 접근할 때 서방교회의 방식을 따랐느냐 동방교회의 방식을 따랐느냐는 논쟁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동방교회의 방식을 따랐다고 봅니다. 물론 스투드 베이커 같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학자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그게 아니라 그렇게 보이지만 사실은 에드워즈는 철저하게 서방교회의 삼위일체의 설명방식을 따랐다고 이야기하는데 저는 그 논문이 Accept 되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여러분들이 따로 공부해야할 문제입니다. 이런 식으로 설명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지금 시간에 삼위일체를 이야기할 시간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인격이 몇입니까? 하나입니까? 셋입니까? 큰일 났습니다. 몇입니까? 셋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서로 독립되는 이유가 서로 다른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기서는 그런 독립성을 가져오는 인격으로만 획일적으로 설명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한 하나님이라는 것이 무너지는 삼신론이 되기 때문에 저것은 삼위일체 안에서 서로의 교통을 위한 위격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페르소나라고 부르는데 원래 페르소나가 그리스시대 때에 연극배우들이 쓰고나오는 가면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의 사랑, 신적사랑, 질서, 관계 이런 것들을 중시한 특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저의 판단으로는 에드워즈가 이 모든 접근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아마도 후자의 접근방법이 에드워즈에게 훨씬 더 좋은 통찰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에드워즈의 관계론적인 삼위일체론은 하나의 신적 본질 안에서 세 위격이 어떤 관계를 맺는지를 설명할 뿐만 아니라 또 나아가서 피조물들이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모상이라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가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모두가 연합하는 이것이 삼위일체의 이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어떤 도덕적인 집단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사물들은 단순한 것이 없습니다. 모두 복합적인 것으로 이루어져있습니다. 단순하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들은 어느 하나도 하나로 이루어진 것이 없습니다. 물도 H2O로 이루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가 아니라 다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는 복합적인 것들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함께 연관을 이루면서 서로 다른 사물의 양태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에드워즈의 생각에는 모든 사물들이 아무것도 피할 수 없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본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가지고 에드워즈는 이러한 삼위일체론에 입각해서 교회와의 관계를 그림과 같이 설명합니다. 이것은 굉장히 여러분들이 주의 깊게 들어야할 제목입니다. 뭐냐 하면 사실은 우리는 기독교를 미국을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정확하게 말하면 서구문화를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대부분 미국을 통해 받아들였기 때문에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를 통해서 받아들였기 때문에 사실은 그런 미국 개인주의가 준 영향이 큽니다. 우리들은 예를 들어서 오늘 내가 하나님께 은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런 사랑을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사랑을 받은 것이 나에게 어떤 전리품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예를 들자면 키에르 케고르의 언급,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홀로 선 단독자다.’ 라는 실존주의적인 언급들을 오해하는 나머지 이것을 극단주의적인 개인주의로 몰고 가서 내가 구원도 직접 하나님과 상관해서 직접 받고, 사랑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고, 하나님의 은사도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고,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매우 성경적이지 않은 해석방법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하면 삼각형이 보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으로서 피조물이 있기 전에도 하나님이 사랑이셨는데 그 하나님이 당신의 사랑을 아들에게 부어주시니까 그 아들에게 부어진 사랑이 신부인 교회를 향한 사랑이 되고 그리고 우리 모두 그 신부인 교회 속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에게 부어진 사랑이 신부인 교회에 부어지고 그 사랑이 흘러내려서 그래서 모든 몸을 적시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여진 우리가 그 사랑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 은사, 모든 것들이 말하자면 하나님의 공동체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바로 조나단 에드워즈가 갖고 있는 삼위일체와 교회의 개념의 방식입니다. 이런 전통들은 멀리는 이미 신약성경에 교회론에서 에베소서에서 등장하는 것이고 그것이 여러분들이 잘 아는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이 사람은 아주 굉장히 심오한 학문을 갖춘 신학자였습니다. 끌레르보의 베르나르도 같은 사람이 신랑 신부의 유비를 강조하고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런 것을 받아들이면서 아주 풍성하게 설명해놓았습니다. 이런 것들을 보면 오늘날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교회에 대한 생각이 얼마나 피상적이고 교회를 자기신앙을 위해서 이용하는 그런 수준의 신앙생활을 해나가는 것인가 하는 것은 아주 굉장히 불결한 신앙생활입니다. 그러니까 교회가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서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이제 21과에서 끝나게 되고 이제 신앙정동론이 나오는데 신앙감정론이라고도 하는데 지금 사진에 나옵니다. Religious of Affections 이라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이 신앙감정론이라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실 설명하면 굉장히 긴 내용인데 이 책은 에드워즈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이얀 머레이라는 영국의 목회자는 이 책을 평가하면서 20대 때에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무슨 소리인지를 몰랐는데 40대 때에 읽으니까 너무 탁월한 책이더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에드워즈 당시의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특히 18세기 유럽의 철학은 영국이 주도하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역사적으로 영국에서 무슨 철학이 일어납니까? 경험주의 철학이 등장하게 됩니다. 로크, 홉스, 슘, 이런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어나게 되는데 18세기의 이런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이것은 사실은 17세기 중반부터 후반에 걸쳐서 중후반에 일어났던 소위 낭만주의운동하고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간을 18세기 초 중엽에 인간의 가장 중요한 요소를 이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면서 인간이 기분, 감정, 이것이 실질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제도 제가 꼬기또 에르고 숨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끝까지 회의할 수 있는 데까지 회의적으로 생각해도 마지막에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도달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회의하는 내가 있다는 것과 그리고 어떤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해도 더 이상은 의심할 수 없는 명석 판명한 사실에 도달하게 될 때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어려움이 없다고 했는데 같은 시대에 파스칼 같은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도대체 그렇게까지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 사실 그렇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런 이야기입니다. 꼬기또 에르고 숨이라는 것을 바꿔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지논 꼬기또 논 에르고 숨’ 만약에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됩니다. 실제로 데카르트는 자기의 책속에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동안에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니까 파스칼 같은 사람이 듣기에는 너무 황당무계한 것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나는 그러면 존재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동안에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 시간과 공간속에서 우리의 삶을 영위해가야 하는 존재다 그러면 실제로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것은 사실은 그렇게 명석 판명한 머리 좋은 당신 같은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끊임없는 회의를 통해서 도달한 최종적인 결론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욕망과 감정의 출렁거림이야말로 오늘 나로 하여금 죽지 않고 살아가게 만드는 인간으로서의 삶의 근원이고 원동력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상당히 이치가 맞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다음시대에 이어서 나타날 낭만주의와 경험주의를 예고하게 만듭니다. 그러면서 경험주의 물결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에 18세기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소위 도덕심미주의 Moral Estheticism 이라는 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의 마음속에 어떤 도덕행동을 할 때에 그것은 인간의 마음속에 호 불호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입니다. 호 불호는 좋다 나쁘다는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데 그 좋다 나쁘다는 결정은 결국 무엇을 통해서 이루어지느냐하면 어떤 것을 아름답다고 보느냐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학생의 본분은 공부를 하는 것인데 컴퓨터게임을 하고 싶습니다. 공부하는 것이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오늘은 예뻐 보이지 않고 컴퓨터게임이 예뻐 보이는 것입니다. 컴퓨터게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이것이 두 개가 찢어질까? 찢어졌을 때 사람들은 왜 선한 것보다는 아름다운 것에 마음이 끌려서 그리고 가는 것일까? 이것이 플라톤이 했던 고민입니다. 그런 고민을 재연해낸 사람들이 18세기 옥스퍼드와 캠브리지의 도덕심미론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책들을 쏟아냅니다. 이 사람들이 전통적인 기독교사상을 가진 사람들은 아니었고 약간의 층차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회의주의자들과 극단적인 이신론자들과 비교적 온건한 이신론자들이 섞여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샤프트 베리, 조셉 버틀러, 라프컷, 워드, 샤프지벨리 이런 사람들이 등장하게 되고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엄청난 자료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그러면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런 사상들을 섭렵하면서 무엇을 했느냐하면 그들의 정동이론을 빌어서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는 일과 그 다음에 은혜를 받는 일이 어떻게 도덕적으로 산출되는지의 사이에 관계를 설명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에 대한 답을 찾아내기 시작한 것입니다. 에드워즈도 그런 것들이 굉장히 궁금했을 것입니다. 왜 어떤 사람은 어마어마한 영적인 경험을 동반하는데도 믿음대로 살지 않고 어떤 사람은 그런 체험이 적은데도 확고한 삶을 사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을 규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성과 마음, 의지, 감정 이것 사이에 복잡한 연결이 어떻게 이루어지고 이것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진리와 아름다움에 눈뜨고 그에 부합하는 마음의 성향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이런 것들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책만 가지고는 부족하고 아까 이야기한 미셀러니에 나오는 이 부분을 보충해주는 많은 자료들을 동반하고 설 교속에 나오는 구체적인 내용들을 동반하면서 신앙정동론을 읽는다면 훨씬 더 탁월한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런 책을 읽으면서 제가 느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우리는 너무 부정확합니다. 그래서 설교할 때에 그 설교를 계속 힘 있게 끌어갈 수 있는 사고와 사상 그 다음에 틀들이 부족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열심히 기도해라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해라. 좀 깨어져라.’ 그러면 깨어지는 것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그런 것들을 외부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헌금 많이 할 걸.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라면 네가 근심하지 않을걸.’ 이것은 현상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현상 말고 하나님을 의지할 때 인간의 마음에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가?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의지하지 않는 마음의 구조가 어떻게 다른가를 밖에서 현상가지고 설명하지 말고 그 속으로 들어가서 인간의 마음을 해부해서 뭔가 설명할 때에 인간이 자기 자신들의 지식들이 증대되고 변화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그렇게 쉽게 하지는 못합니다.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이런 어떤 성경적인 심리학의 기반, 정동이론, 이런 것들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설교나 목회를 이야기할 때 한 사람이 기독교를 가르치거나 설교할 때 이것은 풍선과 같은 목회가 있고 빙산과 같은 목회가 있습니다. 풍선과 같은 목회는 말하는 것이 아는 것의 모든 것입니다. 풍선을 물위에 띄우면 잠기는 부분이 없습니다. 그런데 빙산은 10/11정도는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제한된 시간에 설교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누군가가 그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를 공격하면 9/10을 꺼내어서 그것을 변증하고 그 사람의 사상이 얼마나 깊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합니다. 그러니까 깊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신학을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깊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깊이는 넓이를 보장합니다. 그런데 넓이는 깊이를 보장하지 못합니다. 깊은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여기에 그림을 보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정동론은 기본적으로 성경으로부터는 왔지만 도움을 받은 것이 신플라톤주의입니다. 그 다음에 소위 이야기하는 당시 18세기에 일어났던 경험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어거스틴과 신플라톤주의운동이 화려하게 부활합니다. 그래서 ‘스콜라 아우구스티니아 모데르나’ 라는 운동이 일어납니다. 말하자면 ‘새로운 어거스틴 학문운동’이라는 뜻입니다. 그런 운동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본인 자신이 부흥에 대한 영적인 경험을 합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종합해서 에드워즈의 신앙정동론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앙정동론의 책을 읽으면 뭐 이렇게 어렵나 재미없다고 할 수 있지만 꼼꼼하게 잘 읽으면서 이것들이 이렇게 다른 범주에 있는 지식들과 어떤 연관관계를 이루는지 생각하면서 공부하게 되면 엄청난 유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함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도 추천하고 싶은 책입니다. 같은 맥락의 책들입니다.
그래서 결국 오늘 오전 강의는 여기까지 마치려고 합니다. 이 신앙정동론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학문이라는 것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위키피디아처럼 계속 연결 연결되어서 존재합니다. 그 연결의 범주를 많이 이해하면서 공부할수록 정확한 지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넓이와 깊이를 어떻게 균형을 맞출 것인가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 여하에 달린 것이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그것만 달랑 안다는 것은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면 신학 쪽에서 역사신학을 공부한다고 하면 우선 기본적으로 일반역사를 알아야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언제가도 이야기한 것처럼 역사신학을 공부한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부르크하트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그랬습니다. ‘어떻게 부르크하르트를 모르냐?’ 일반역사에서 중세와 근대 사이에 관계에 대한 모든 이론들을 종합한 대가입니다. 스위스 사람인데 스위스의 제네바에 가면 부르크하르트 스트리트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신학에서 역사신학을 한다면 그것은 일반역사를 아는 그 안에서 신학이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것 없이 어떻게 이해가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예를 들자면 여기 말고 Southern Baptist 에 활동하던 찰스 에드윈 다간이 쓴 History of Preaching이라는 아주 유명한 고전적인 책이 있습니다. 100년이 지나도 교과서로 쓰이는 책인데 내가 깜짝 놀란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의 설교학자인데 지나온 세기의 정치, 역사, 경제, 문화, 사회 모든 역사를 이해하면서 설교가 그 속에서 어떻게 역사의 선을 긋고 지나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저술의 방대함과 다루고 있는 수준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선 넓은 것을 공부하고 좁은 것들을 공부하면서 이것들이 조화를 이루어야합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 식으로 공부해 나가야합니다. 그때에 우리들이 우리와 똑같은 생각을 갖지 않은 사람들도 이해할 수 있는 폭이 넓어지고 그리고 그들과 그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어떤 논리적인 힘이나 변증의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감정론은 신앙적으로 개인적인 깊은 체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해가 훨씬 더 빠를 것이고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들은 책을 읽으면서 그런 점에 있어서 자신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아주 중요한 책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 하면 학문의 세계가 한없이 넓다는 생각을 가지면서 겸손 하라 그리고 어느 학문도 다른 학문과는 상관없이 자기 전공분야만해서 인류의 유익을 끼칠 수 있는 학문은 없다. 그러므로 학문의 문맥에서 학문을 하라. 그리고 학문의 목적은 결국은 교회를 이롭게 하고 인류를 모두 진리의 빛으로 인도해내기 위해서 유익한 학문이 되어야한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이 학문이 목회적인 적용을 통해서 목회적으로 꽃을 피울 수 있는 학문이 되어야한다. 이런 것을 염두에 두면서 학문을 하고 그 훌륭한 한 전본을 우리들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보게 되는 것입니다. 저녁때 그 유명한 자유의지론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결론을 내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시간이 남았는데 질문이 있으면 받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