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3)
녹취자 : 정유선
이제 30페이지의 자유의지론을 할 차례입니다. 이 자유의지론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 제 1권에 실려 있고 이 책은 조나단 에드워즈의 전집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출판된 책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책으로 손꼽히는 책입니다. 얼마나 어려운지 여러분들이 한번 보시려면 가서 1권을 꺼내서 한번 인내심을 가지고 다섯 페이지만 읽어보시면 충분히 어렵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저는 이 책을 두 번 읽었는데 솔직히 말해서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마크 트웨인이라는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술 취한 미치광이가 쓴 책이라고 집어던졌다는 이야기로 아주 유명한 책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여기에서 자유의지론을 썼는데 자유의지론은 여러분 아시다시피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구지요? 어거스틴이 자유의지론을 쓰지요, 그렇죠? 그런데 정확하게 말하면 자유의지론이 아니라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에 관하여> 라는 작품입니다. 이것은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에드워즈의 자유의지론에 대한 해석사에 있어서 어떤 사람들은 에드워즈가 결정론적인 입장에 서있다, 결정론적인 입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미 정해놓고 인간이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가 개입될 여지가 별로 없다, 이런 것들이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라이프니츠라고 하는 철학자가 소위 이야기하는 단자론을 이야기합니다. 라이프니치 철학에서 유명한 한 문장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단자는 창문이 없다’. 무슨 뜻이냐면 오늘날 우리들이 소통을 많이 강조하지만 그 사람이 보는 모든 인간은 각각 자기의 단자로 이루어져 있고 단자는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창이 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소통할 수 있는 창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아무 상관이 없이 절대 못 만날 것 같은 사람인데 어떻게 제가 이렇게 캘리포니아 오게 되고 또 여러분들 만나게 되고 4년 전에도 만나고 같이 밥도 먹고 그렇게 해서 실질적으로 우리들이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냐? 그건 이제 라이프니츠 같은 사람은 어떻게 설명하냐 하면 영원예정설이라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속에 한 사람의 일생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에 대한 신의 모든 계획이 이 안에 내장되어 있고 내장된 그것이 풀려져 나오듯이 전개되는데 그 전개가 나를 여기에 보냈고 여러분들을 여기에 보냈기 때문에 소통이 이루어진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독특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자유의지 문제에 있어서 결정론은 우리들이 보기에는 개혁주의적이고 성경적인 입장이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간에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인데 무한히 자유로운 존재여서 인간의 능력이 타락한 뒤에도 아무 문제가 없다 라고 설명을 하게 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의 의미라든지 우리의 구원에 있어서 성령의 선도적인 역할이라든지 하나님의 주권이라든지 하나님의 작정이라든지 이런 교리들이 모두 깨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매우 난해한 문제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를 놓고도 해석 하는 게 사람마다 너무 다르기 때문에 어쨌든 제가 이해하기 어려운 한 권이었고 다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제 내가 인간의 자유의지의 문제를 가지고 제대로 공부하지 않으면 설교나 모든 목회사역에 있어서 교인들을 헷갈리게 하겠구나 라고 생각을 하고 작심을 하고 몇 년간 공부를 하는 그런 계기를 마련해 준 책이 이 어려운 조나단 에드워즈의 <Freedom of Will> 이라고 하는 책이었습니다.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조차도 세부적인 사항에 있어서는 일치를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거기에 보면 잔 큐스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인데 조나단 에드워즈가 여러 차례 자기의 책 속에서 인용했던 아주 박식하고 매우 철두철미한 그런 신학을 전개했던 그런 신학자였습니다. 레이든에서 교편을 잡았던 프란시스 유니우스 라고 하는 학자가 있었고 이 사람의 제자가 고마루스라고 하는 그 다음에 나오는 인물이고 그 사람의 제자가 페트루스 판 마스트리히트라는 인물인데 그 사이에 아르미니우스 라는 인물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명의 신학자는 신학적으로 연속성이 있는데 아르미니우스는 신학적으로 연속성이 끊어지는 인물이었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 얘기하면 시간이 많이 흐르기 때문에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이 세 사람조차도 자유의지에 대한 견해가 각각 달랐습니다. 그래서 도표를 보면 잔키우스 같은 경우는 자유선택이 곧 자유의지다 이렇게 간단하게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유니우스는 자유선택과 자유의지는 다른 거다. 자유의지는 지성과 의지로 이루어지는데 지성은 타락한 이후에도 자유롭지만 의지는 무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무엇이 올바르고 선한 것인가 라는 것을 타락한 후에도 인간이 생각을 하고 판단을 할 수는 있는데 그것을 실제로 행할 수는 없는 무능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선행하는 은혜가 필요하다 그렇게 주장을 했습니다. 고마루스 혹은 호마루스의 경우에는 타락 전후 모두 의지의 자유가 있다. 그런데 타락한 후에는 외적인 행동과 자연적인 의지, 도덕적인 문제와 상관없는 자연적인 의지 예를 들어서 나 오늘 밥 먹어야 되겠어, 내일은 좀 일찍 일어나야 되겠어, 아니면 오늘은 일찍 잘 거야, 기름진 음식은 피해야지, 학위가 끝날 때까지 난 데이트 안 할 거야, 이런 것들은 자연적인 의지들입니다.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타락해서도 여전히 자유로운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것에 대해서는 타락한 후에는 무능하게 되었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온전하게 그 의지의 요구대로 지성이 요구하는 대로 의지를 행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비슷비슷하지만 아주 약간의 차이가 있고 잔키우스와 유니우스, 고마루스는 약간 다르지만 유니우스, 고마루스는 매우 유사합니다. 그리고 유니우스는 사실은 인간의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외적이고 자연적인 자유를 지성의 자유라고 정리했지만 고마루스는 훨씬 더 상세하게 이것을 거론하면서 인간의 의지의 자유의 문제를 세밀하게 구분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나름대로 철학공부를 하고 신학 속에서 자유의지의 논쟁들을 가지고 공부를 하느라고 애를 썼는데 아직까지도 많은 부족한 것이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러나 그때보다는 훨씬 혼란스럽지 않은, 좀 나은 많은 정리된 상황을 갖게 됐다 라고 하는 것을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마 가장 어려운 주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정도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나오는 문제가 원죄론입니다. 원죄론은 지금 책에서 보시는 것처럼 예일판 전집 제 3권에 나옵니다. 사실 에드워즈가 이 책을 쓸 때에 원죄론에 대해서 차분하게 앉아서 원죄론 전체를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줄까를 생각하면서 책을 썼으면 굉장히 읽기 편했을 텐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원죄론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지금 사전에 나오는 존 테일러라는 인물입니다. 이 사람이 당시의 사람인데 1694년에서 1761년까지 살았던 인물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자유와 선천적 도덕성을 매우 강조하면서 반칼빈주의적인 가르침으로 영국교회를 공격하고 있었습니다.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 당시에 미국에서도 팽배해진 유사한 사상에 대해서 이제 성경의 교리를 변증해야 될 필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서로 관련이 있는 세 편의 논문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원죄론>, <참된 미덕의 본질>, 그리고 <천지창조의 목적> 이 세 권이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원죄에 관한 에드워즈의 견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세 권을 같이 연구하고 3권의 원죄론을 중심으로 하되 미셀러니와 설교집에 흩어져있는 원죄에 관한 교리들을 기록한 내용들을 모두 함께 모아서 살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에드워즈는 이 원죄론에서 모든 인류가 아담의 죄책과 오염된 본성을 전가 받았고 인류의 타락과 인류의 총체적인 불의 그리고 스스로 구원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성경이 직접적으로 증거하고 있고 이러한 주장들이 어떤 경우에서나 인간의 이성이나 인간의 경험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강조했습니다. 원죄론이 이런 동기와 목표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어떤 논점에 있어서는 아주 깊이가 있지만 좀 산만하고 전체적으로 체계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와 유사한 것이 존 오웬의 소위 이야기하는 <복음의 변증> 이라는 작품입니다. 이게 존 오웬 전집 16권 중에서 12권에 나오는 내용인데 사실은 존 오웬의 책들을 조금 읽었다고 하더라도 12권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12권이 존 오웬의 전집 가운데서 가장 어려운 책입니다. 동시에 가장 중요한 책이고 존 오웬을 단순한 영국의 청교도가 아니라 17세기 대륙과 교통하고 있었던 개혁파 정통주의 신학자로서의 오웬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12권 <빈디카이 에반잘리카이, 복음의 변증>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쓰게 된 요인도 비슷한데 소키누스주의자 소키누스라고 하는 인물인데 이 분은 아주 극단적인 이성주의자였습니다. 이성으로 용납될 수 없는 모든 것은 거부하는 그런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데 소키누스주의자 가운데 존 비델 이라고 하는 사람이 펴낸 <요리문답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발렌티노스 스말키우스 라고 하는 사람이 <라코비안 교리문답>이라는 문답집을 펴내게 됩니다. 이것들은 모두 소키누스주의에 기초하고 있는, 그래서 성경 진리를 모두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환원해버린 말하자면 자유주의 신학이었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신성, 위격, 삼위일체 이런 것들을 다 부인하는 논지들을 교회에서 교리문답의 형태로 가르치기 시작했는데 심각한 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존 오웬이 작심하고 이것을 통렬하게 반박을 했습니다. 역시 이것도 그 상황의 논쟁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기 때문에 깊이는 있는데 체계가 적고 이 논쟁의 중심적인 주제들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해하기 좀 어려운 문제들을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이런 식으로 에드워즈가 원죄론을 썼지만 원죄론에 관한 신학자들의 평가는 존 오웬이 칼빈주의 신학자라고 하는 것을 아주 유감없이 보여준 그러한 인간의 total depravity, 인간의 전적인 타락에 관한 확고한 에드워즈의 신념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그리고 이제 에드워즈의 설교집이 나옵니다. 에드워즈의 설교집은 상당히 많습니다. 제가 정확한 권수가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일곱 권 이상 되리라고 봅니다. 에드워즈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소홀하게 여기는 장르 중 하나가 에드워즈의 설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어떤 신학자의 신학을 공부하는 가장 좋은 방법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의 설교를 같이 읽는 것입니다. 그것도 많은 양을. 무슨 뜻이냐면 신학 책을 쓸 때에는 하나의 주제밖에 설명이 안 나옵니다. 그런데 설교는 설교를 할 때에 수많은 주제들이 함께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성경 본문에 대한 지식, 해석사에 대한 지식, 철학적인 지식, 교리의 역사에 대한 지식, 교회사에 대한 지식, 심지어는 자연과학에 대한 지식,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지식 등 여러 가지 많은 해석들이 들어오기 때문에 그 설교야말로 그 사람의 모든 면모를 한꺼번에 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훌륭한 장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의 설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일단 그 설교를 깊이 있게 신학적인 토대 위에서 전개해 나갈 수 있는 대가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의 설교만이 그런 신학적인 컨텐츠를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날 설교를 보면 설교가 그냥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때에는 자기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성경을 끌어들여서 이야기하는 경우, 최악의 경우입니다. 그런가 하면 성경을 해석하면서 설명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해석해서 나온 것이 괴상한 논리를 가지고 있거나 성경을 해석했다고는 하는데 뼈대가 없어서 흐물거리는 그런 낙지와 같은 해석의 결과들을 가지고 설교단 앞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설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목적을 구현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할 때에는 설교 속에 여러 가지 요소들이 함께 공존하고 있어야 됩니다. 그중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신학적인 뼈대의 요소가 있어야 되고 그 다음에 그것들이 우리 속에 감화를 끼칠 수 있는 은혜의 요소들이 있어야 하고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지성적인 요소와 함께 의지를 자극해서 실천할 수 있는 실천의 열매도 그 설교 안에서 기대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러면 한 사람이 설교단에 올라가서 설교를 할 때 저 사람이 저 성경 본문과 그 성경 본문에서 해석한 결과를 이끌어 내어서 마지막에 우리에게 폭풍과 같이 삶을 결단하게 만들어주는 데 있어서 모든 것들을 꽉 잡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을 탄탄하게 버티게끔 만들어주는 요소가 세 가지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독수리와 같은 눈, 지성입니다. 사자와 같은 심장 이것은 말하자면 spirituality 혹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파워입니다. 마지막 세 번째는 섬세한 여자의 손길 이런 것들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호소할 때 진정한 변화가 일어나고 그게 없으면 안 됩니다. 지성에 있어서 성경 본문과 자기가 전개하려고 하는 주제에 대해서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 가운데는 자기를 따라올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이해와 지적인 확신을 그 안에서 갖고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유롭게 전개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다른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성경의 진리를 진술할 때 유연성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것들을 누구한테 전달하느냐에 따라서 동일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다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안드레아스 휘페리우스 같은 신학자가 이미 1500년 중반에 1세대 종교개혁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미 전개했던 소위 이야기하면 대중적 해석과 스콜라주의적인 해석의 방식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냐면 진리를 전달할 때에 논쟁적 방식과 대중적 방식입니다. 만약에 학문적으로 논쟁을 하고 논적들과 싸울 때에는 스콜라주의적으로 나갑니다. 스콜라주의가 뭡니까? ‘스콜레’라는 희랍어에서 옵니다. ‘스콜레’는 ‘한가한’ 그런 뜻이고 여기서 영어의 스쿨이라는 단어가 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한가한 사람들입니다. 학교에 다니니까. 스콜라짐, 스콜라피시즘 하면 그것은 스콜라주의의 거대한 체계를 완성한 사람이 토마스 아퀴나스잖습니까? 그가 스콜라주의를 완성하게 되는데 그 스콜라주의가 바로 질문하고 대답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세분화되어서 들어갑니다. 그런 식으로 하고 그 다음에 논쟁적인 저술들 그 다음에 대상은 신학적 목회자입니다. 대중적인 방식은 스콜라주의적인 방식으로 치열하게 논리를 전개해가지 않고 훨씬 더 두루뭉술하게 만들어서 대중적이고 교화적이고 수사학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달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교훈적인 저술이고 대상은 성도들입니다. 그러니까 신학자들과 논쟁할 때와 성도들에게 설교할 때는 당연히 내용은 불변하지만 전달하는 방식과 그것을 어떤 식으로 전달할 것이냐 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었던 것입니다. 설교집은 바로 이렇게 논쟁적인 방식이 아니라 대중적인 방식으로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대단하고 솔직히 이야기해서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문을 어디를 펴든지 간에 한 번 펴서 쭉 읽고 나서 감동을 받고 나면 오늘날 돌아다니는 설교집은 책도 아닙니다. 어디를 읽어도 성경 전체를 보게 만들어주는 광대한 안목을 선사합니다. 이럴 수 있잖습니까? 설교를 수없이 들었는데도 별로 성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못 주는 설교가 있고 한 편 딱 설교를 들었는데도 꽝 하고 충격이 와서 성경 전체를 보는 눈을 열어주는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것들은 그 설교 안에 신학이 들어 있을 때 그것이 가능합니다. 설교 안에 들어있는 신학이 그렇게 성경을 보는 눈을 열어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에드워즈를 공부하면서 항상 즐겁고 행복했던 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에드워즈와의 갈등도 있었고 그 중에서 특별히 에드워즈가 소위 얘기하는 파넨데이스트(Panentheist) 만유내재신론자인가 하는 문제, 그 다음에 자유의지에서 결정론을 택한 게 아니냐는 문제, 그리고 왜 에드워즈가 그렇게 어쩌면 자기 목회의 자랑이 될지도 모르는 수많은 회심한 사람들의 간증과 이런 것들을 책으로 남겼을까 하는 것들은 나에게 많은 갈등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더 많은 책과 다른 학자들의 견해를 읽으면서 어느 정도는 해소하게 되었고 또 일부 그에게 결점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를 위대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전혀 모자람이 없었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4명의 위대한 스승이 있는데,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존 캘빈, 존 오웬, 조나단 에드워즈 그리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저작들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나는 이 위대한 저자들의 작품을 다 읽으려고 노력을 했고 애를 써봤습니다. 특히 철학적으로 그들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중심적인 작품들은 어쨌든지 읽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이레나에우스, 테르툴리아누스 그리고 중세의 신학자들 중 중요한 인물들 그리고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과 계몽주의 그리고 18세기 케임브리지의 신플라톤주의자들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에드워즈의 사상을 이해하는 폭도 넓어져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아우구스티누스, 존 칼빈, 16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 특히 이 사람이 자주 인용했던 인물들 히에로니무스 잔키우스라든지 패트루스판 마스트리어트, 그리고 프란시스코스 튜레틴 이런 사람들에 대한 이해, 아까 오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르네상스로부터 계몽주의로 이어지는 인류 지성의 대대적인 변화 이런 것들을 이해하면서 그 문맥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를 봐야 됩니다. 이것은 너무 너무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존 오웬이나 이런 사람들의 이해를 가지고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할 때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수 있다. 특히 18세기의 신플라톤주의자들과 심지어는 공맹사상조차도 조나단 에드워즈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런 말씀을 지난 시간에 드렸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복잡한 인물이지만 그러나 사실은 거대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러분들에게 다른 학문과 조나단 에드워즈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는 미학적 신학입니다. 에드워즈의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는 철학을 포괄하는 우주적인 신학의 구축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식을 우주적으로 통합함으로써 그 지식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것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우신 분이신지를 이해해서 그 하나님을 사랑하게 하고 그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천지창조의 목적에 따라 사는 것을 인생의 보람으로 여기도록 그렇게 만들어주는 것이 에드워즈의 신학의 궁극적인 목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지난 아침에 제가 설명했던 과학철학이 그렇게 중요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아름다움을 두 가지 세계를 매체로 해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의 세계가 자연세계, 그리고 또 하나의 세계가 도덕세계입니다. 도덕세계는 영적인 세계와 관련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 얼마나 논리적입니까? 인간은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잖습니까? 흙으로 사람을 빚어서 몸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육체이고 그것은 물질로부터 왔습니다. 그리고 또 영혼은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창조된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영혼은 도덕세계 그리고 인간의 육체는 물질세계에 속합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결정을 통해서 지상적인 존재가 천상과 맞닿아 생각하고 사유하고 천상의 가치를 따라 살 수 있는 그런 유일한 존재가 인간입니다. 이 인간의 지위는 매우 탁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설교할 때에 경솔하게 인간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그렇게 설교하면 안 됩니다. 칼빈주의에서 인간을 하찮게 여길 때 그것이 하나님의 거룩한 현존에서 그리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총과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 구원에 도달해보려고 하는 인간의 노력 이런 것들을 대조할 때 인간이 하찮게 보이는 것이지 인간 존재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여러분들이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창조에 대한 거대한 개념들 그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해야 합니다. 장혜영 전도사님한테 제가 시디를 한 장 드렸습니다. 제가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을테니까 복사해서 보셔도 됩니다. 거기에 ‘레카토탈라치오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다시 머리 되심’ 이라는 제목이 붙은 강론이 다섯 개짜리인가가 거기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들이 그 강론을 꼭 한번 들어보기를 바랍니다. 소위 이야기하는 ‘레카토탈라치오 크리스티’ 라고 하는 교리는 에베소서 1장에 아나카펠라이오오 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되게 하려하심이라. 그런데 그 번역이 전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다시 머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나’는 다시이고 ‘카펠’은 희랍어로 머리이고 ‘오오’는 동사의 서픽스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라틴어로 될 때는 ‘카피티스’ 이렇게 변합니다. ‘레’는 다시, ‘카프트’는 머리, ‘라치오’는 동사의 어미, ‘크리스’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되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 우주를 창조하신 것과 그리스도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리고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인류와 교회의 존재, 이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이 어떤 관계가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엄한 교리를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고 오늘날은 거의 잊혀져가고 있는 교리입니다. 그런 것들을 봐야지만 기독교 세계관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존 오웬이 그의 전집 1권을 크리스토로기아 기독론에 할애를 합니다. 이 사람의 기독론은 아주 독특합니다. 기독론에서 창조론과 신론을 다룹니다. 그것은 설명하면 이유가 굉장히 긴데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두 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 그리고 두 세계는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실체와 미러처럼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상의 세계와 지상의 세계는 영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상의 세계는 당신이 직접 천사들과 함께 다스리시고 이 지상의 세계는 인간을 당신 대리자로 세우셔서 그 인간이 위로는 천상세계를 알고 천상의 하나님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자기의 지상세계를 이해하고 인류를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지성과 지혜와 사랑을 따라서 그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이 세계 속에 구현하기 위해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지위는 하나님 바로 다음입니다. 천사들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신학이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지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신학은 철저하게 하나님의 위대하고 광대하심과 함께 인간의 존엄과 가치 이것을 철저하게 도전하고 드러내는 방식으로 이 신학이 전개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어떤 spirituality를 가지고 있든지 간에 그것이 정말 하나님 앞에서 형성된 spirituality라고 하면 그것이 보일 수 있도록 나타나는 그것은 뭐냐 하면 인간에 대한 존엄의 인정, 인간에 대한 깊은 존중과 사랑 이것들로 나타나야 됩니다. 너무너무 중요 합니다. 신학을 하면서. 그것이 끊임없이 견지되고 실현되어야 할 신학의 원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신학을 우리들이 미학적 신학으로 이야기 하는데 하나님이 당신의 아름다움을 자연 세계를 통해서는 자연적 질서를 통해서 당신의 아름다움을 보이시고 도덕적 세계를 통해서는 도덕적 질서를 통해서 아름다움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인간은 그 모든 것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의 육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원리를 따라야 됩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 되고 배고프면 밥을 먹어야 되고 기운이 없으면 영양주사라도 맞고 기운을 차려야 됩니다. 그래야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은 하나님이 정하신 도덕적인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서 아름다움 이라고 하는 것은 곧 균형과 질서, 이것이 아름다움입니다. 그래서 그런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미학적으로 신학으로 서술해 내는 것입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누구도 에드워즈를 따라올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제가 읽은 사상가들 가운데.
그러한 것들이 사실은 원조가 누구냐 하면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을 한 마디로 요약해서 신학자들이 흔히 사랑과 영혼의 신학이라고 부릅니다. 그 사람의 신학이 그런 미학적 신학이 어떤 의미에서 원조를 이루게 됩니다. 그전에 없었다는 게 아니라 그렇게 광대하게 미학적 신학을 펼치고 종합하고 집대성한 사람이 바로 아우구스티누스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상을 잘 계승하면서 이 사람은 풍부하게 발전시킨 것입니다. 이것은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시기와 관계가 있습니다. 에드워즈가 활동하던 시기가 이미 근대 미학이 시작되던 시기였고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지암바티스타 비코, 조셉 에디슨 이런 사람들이 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질서, 조화, 균형, 합리성을 특징으로 하는 고전주의 거부하는 운동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이런 운동들이 18세기 말에 일어나는 로만티스즘 낭만주의로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18세기에 옥스브리지에 신플라톤주의와 새로운 아우구스티누스 운동들은 이러한 자연주의적인 요소들이 에드워즈의 미학적 신학과 우주론, 정동이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가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학자들은 에드워즈의 탁월한 이 미학적인 신학은 1722년 그가 뉴욕에 있었을 때 건강을 위해서 말을 타고 숲속을 산책했습니다. 그러다가 거기서 디모데전서 1장 17절 ‘홀로 하나이시고 썩지 않으실 하나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라는 구절을 생각하면서 거기서 탁월한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게 됩니다. 거기서 개인적인 큰 부흥을 경험하면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에 대한 탁월한 인식을 갖게 되는데 그러한 영적인 경험 이후로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이해하면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사랑하게 되었고 그것을 묵상하는 것이 행복이 됩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일기, 묵상집, 레잘루션, 설교 모든 것들을 보면 하나님에 관한 미학적인 묘사들이 굉장히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sweetness, excellency, beauty, fitness, sensibility, harmony, loveliness, propotion, regularity, relation, concent, agreement, love 이런 단어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결국은 에드워즈의 1722년 부흥에 대한 경험이 한 계기가 되었다 라고 보는 것입니다. 이런 속에서 이제 창조된 자연 세계 안에도 놀라운 질서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놀라운 질서들이 바로 이 우주와 세계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원인이다 우리는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신 증거이고 하나님이 이 세계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흔적인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하고 그런 자연적인 질서들을 우리의 창조세계 속에 구현해 갈 사명도 우리는 받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연을 아주 폭압적으로 지배하고 파괴하면서 과도한 소비를 하는 것은 잘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아름다운 질서들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름다움은 이제 아침에 말씀드린 바처럼 구속사 안에서 잘 나타나 있고 그런 것들이 도덕세계 속에서 적용될 때에 그 때에 결국은 우리의 마음도 모든 하나님이 원래 인간을 창조할 때 의도하셨던 영혼과 정신의 질서를 올바르게 갖추고 있을 때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에 그 얘기를 했잖습니까? 인간의 아름다움은 영혼의 아름다움이며 한 인간의 존재의 가치는 그가 가진 선한 의지의 크기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하나님을 향해 점점 더 아름다운 인간이 되어 가고 이 세상에 있는 인간들을 향해서는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자연세계를 향해서는 하나님이 원래에 주신 아름다움의 발전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키는 사명을 인간이 갖고 태어나고 인류 역사가 고민해 온 모든 철학적인 고민들은 바로 어떻게 하면 그런 삶을 구현하며 살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탐구였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을 이해함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존재의 본질에 관한 문제입니다. 형이상학적 존재에 관한 문제입니다. 에드워즈는 사물의 존재의 본질을 성향이론으로 설명했습니다. 여기 그림에 나온 이상인 박사는 프린스턴에서 오래도록 가르쳤던 한국인 학자로서 세계적인 조나단 에드워즈 연구가입니다. 이 분이 자신의 책 속에서 소위 이야기하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사물을 성향이론, disposition theory로 설명한 것이 아주 혁신적인 해석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스티븐 홈즈 같은 사람들의 평가에 따르면 성향이론은 결코 그만의 독창적인 것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 안에 있었던 내용들을 반복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신학의 역사를 공부하게 되면 우리가 쉽게 말할 수 없는 말이 있습니다. 유명한 격언입니다. Never say never, never say first. 결코 쉽게 최초라고 말하지 마라,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언젠가는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절대로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몰라서 그렇지 찾아보면 있다. 그래서 우리 조동준 교수님처럼 역사신학을 한 분들은 포용성이 있고 신중합니다. 대개 역사신학을 하면 이렇게 우리들이 마음이 넓어지고 자기와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그래서 무슨 공부를 하든지 간에 역사에 대한 공부는 반드시 하라, 지혜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서 꼭 필요한 공부다 그 얘기를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제 존재에 관해서 말하자면 이런 도표가 성립이 됩니다. 하나님은 존재, 본질, 실존이 다 같습니다. 이것은 나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같은 인간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은 존재, 본질, 실존이 다 일치합니다. 존재는 being이고 본질은 essence고 실존은 existence입니다. 실존이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 시간과 공간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실존주의에서 실존은 본질에 선행한다 그러는데 이것은 굉장히 무서운 말입니다. 뭐냐면 예전에서부터 어떤 사물을 유추할 때는 본질로부터 시작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 본질에서 실존이 어떻게 돼있는가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이번에는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 무슨 뜻이냐면 인간이 누구인가, 나의 본질이 무엇인가, 내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나는 어디로 가는가 이런 질문 다 집어치워라,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여기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현실이고 그리고 나는 나의 삶의 상황과 맞닥뜨리고 있다는 이 현실 이것이 본질에 대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피조물의 경우에는 존재, 본질, 실존 다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있다 칩시다. 그러면 being 이라는 존재가 상정이 됩니다. 그러면 본질이 있을 것 아닙니까? 실존은 우리들이 인간은 계속 변합니다. 예를 들자면 내가 태어나서 얼마 안돼서도 내 이름을 김남준이라고 붙였습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도 김남준이었고 많은 지식이 성장해서 대학생이 됐을 때도 김남준, 늙어가는 지금에도 김남준입니다. 그럼 도대체 한 사람을 동일한 사람이 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이냐? 누구도 대답 못합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그것을 기억에서 찾습니다. 그럼 우리가 또 질문합니다. 한 사람이 부분적으로 기억상실에 걸리면 그럼 그 사람이 아닌가요? 그럼 아니라고 치자. 그럼 그는 누구인가? 기억이 다시 돌아왔을 때는 그럼 어떻게 되는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다 다릅니다.
에드워즈는 어떻게 보냐면 본질 그 자체가 경향성이라고 봅니다. 예전에는 고전적으로 본질 속에 성향이 있다 이렇게 봤는데 그게 아니라 본질 그 자체가 성향이다 이렇게 본 것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도 에드워즈의 해석자 가운데는 논쟁이 많습니다. 대표적인 논쟁은 에드워즈가 성향이론을 말했다 아니면 아니다, 말하지 않았다. 천지창조의 목적을 보면 하나님이 이 세계를 창조하실 때에 타자와 관계를 맺으려는 당신 자신의 성향에 의해서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말합니다. 그것을 놓고 플라톤적인 유추설이다 라고 강조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어떻든지 간에 이러한 것들을 보면서 영혼 안에 있는 성향, 기능, 행위 이런 것들이 단어가 각각 다른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우리의 정신세계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 라고 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자세한 내용들은 복잡한데 거기 42페이지에 있는 내용들을 읽어보기를 바라고 그림 하나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에드워즈의 중생과 회심에 관한 이야기인데, 중생이 있고 회심이 있습니다. 중생은 저 밑에 땅 속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되고 회심은 여기 선에 그려진 것을 의식세계라고 표현을 하면 중생은 의식세계 저변에 있고 회심은 의식세계 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는 거냐 하면 중생한 사람만이 회심한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중생은 하나님의 동력적인 사역이다. 중생이 회심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동력적인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인 사역이다. 그래서 성경은 중생 하라고 요구하진 않는데 회개하라고는 말하고 믿으라고는 말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도 회심은 하나님 앞에서의 자신의 죄에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들이 왜 중요하냐 하면 조나단 에드워즈는 17세기 개혁파 정통주의자들의 신학적인 견해를 따르면서 이렇게 중생하고 이것이 회심함으로써 그럼으로써 인간의 마음 안에는 새로운 성향이 생긴다 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두 가지 커다란 변화가 오게 되는데 하나는 존재론적인 변화이고 인식론적인 변화입니다. 존재론적인 변화는 자기밖에 사랑할 줄 모르던 인간이 변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이고 인식론적인 변화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인간의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의 신령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미적 미감의 능력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생과 회심을 경험하고 나서 성경을 읽으면 은혜롭고 그 속에서 눈물이 나고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시는 모든 일들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런 능력이 생겨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과 영혼의 변화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영혼의 기능이 마음 지성 의지가 있는데 영혼에는 사랑의 경향성이 변화됩니다. 그래서 자아를 사랑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마음은 행동을 산출하는 기능이고 지성은 지혜와 미에 대한 감각입니다. 그러니까 미에 대한 감각이 감정이 아니라 그것은 결과고 지성 속에서 그것들을 이해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의지는 선택한 것을 행하는 능력인데 예전에는 없었던 하나님의 은혜가 부어지기 때문에 천지창조의 목적을 따라서 선한 것을 선택할 수 있는 파워가 생기게 됩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악을 행하는 데는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 없습니다. 인간이 충분히 악을 행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데에 있어서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야지만 선을 행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종교적인 선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통해서 이제 중생과 회심의 중요성을 아주 강조했습니다. 일평생 강조했습니다. 그래서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고 영혼이 거듭 나야지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하다 라는 사실을 조나단 에드워즈는 강조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인간의 마음의 정동론, 우리가 신앙 정동론을 하면서 잠깐 공부했는데 이것도 한번 생각을 해 볼 여지가 있습니다. 에드워즈의 책만을 읽었을 때에는 정동이론의 의미가 명확하게 들어오지 않았고 논리적으로 굉장히 허술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런데 신플라톤주의자들의 도덕심미주의의 대한 이해를 갖게 되면서 신앙정동론이 매우 중요한 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정동론은 대개 이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에드워즈 신앙정동론은 성경과 개혁신학을 기초로 하면서 로크의 오성론 어느 것도 그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이외에. 로크의 오성론, 아우구스티누스의 심리철학, 아리스토텔레스의 덕이론, 18세기 도덕심미주의자들의 도덕심미이론, 이런 것들이 참고 되면서 에드워즈의 독특한 신앙정동론이 나오고 이것들은 사실은 never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에드워즈만큼 저렇게 상세하게 인간을 해부해서 어떻게 진리에 대한 인식이 그 사람의 지성 속으로 들어오게 되고 그것이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전달해서 인간의 감정과 의지를 변화시키는지에 대해서 저렇게 상세하게 설명한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에드워즈는 상당한 기여를 한 것이고 존 로크가 나오는데 그 뒤에. 존 로크가 이 사람과 갖는 관련성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거론된 책이 <An human understanding, 인간오성론>이라고 불리는 책입니다. 이 책은 꼭 한번 읽어볼 만한 책입니다. 매우 중요하고 여기서 사실은 존 로크는 예전에 바라보던 인간관과는 전혀 다른 인간관을 제시하게 됩니다. 그것을 지금 여기에서 다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인간오성론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대학원시절 때 읽으면서 존 로크의 경험주의가 하나의 절충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신학을 개진하는 데 도구로 사용됐다 그렇게 보는 것이 표준적인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것이 뉴턴주의입니다. 뉴턴주의에 관한 해석과 판단에 관한 문제인데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은 원래 하나였었는데 이것이 15세기에 와서 구분이 되기 시작합니다. 칼빈에게도 영향을 미쳤던 르테부르데타블, 그 다음에 16세기에 개신교 신학자인 단네요 이사람이 제네바신학교 출신인 이태리의 목회자입니다. 17세기의 홀베르당, 들레이, 레기우스 등에 의해서 나뉘어졌고 데카르트는 <철학의 원리> 라는 자신의 책에서 형이상학과 자연철학을 구분하지 않았지만 뉴턴은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이 사람이 유명한 책인 <프린키파아>라는 책을 씁니다. 이 책인데 이게 뭐냐 하면 자연 철학의 수학적 원리에 관해서 라는 책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자연 현상들이 수학적인 원리를 가지고 모두 설명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근대 과학의 발전에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됩니다. 뉴턴은 철학에서 말하는 운동에 관한 이론 즉 관성과 충돌 이런 운동만이 아니라 자연학의 모든 내용을 철저히 수학적인 법칙을 가지고 설명했는데 이것이 물질이 아주 기계적인 인과관계를 가지고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이제 더 이상 자연의 세계는 놀라울 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신비한 세계는 아니다, 그래서 만유인력의 법칙도 결국은 물체 사이에는 반드시 힘이 존재한다, 힘은 운동의 원인이다 이런 식으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뉴턴의 차이를 보면 데카르트의 관심사는 인식의 주체인 인간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인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식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인식의 주체이고 인간이 최종적인 판단자다 라고 하는 것을 강조했고 뉴턴은 인식의 대상인 자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데카르트는 이 모든 것들의 인과 관계에 관심이 많았지만 뉴턴은 인과 관계 속에 있는 수학적인 법칙의 관계를 발견하고 싶어 했습니다. 데카르트는 계몽주의를, 뉴턴은 과학주의를 불러 오는데 이것은 결국 무신론이나 이신론을 가져오는 견인차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데카르트, 뉴턴, 에드워즈의 관계를 잠깐 보겠습니다. 데카르트는 사물의 인과관계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뉴턴은 수학적인 법칙, 인식론 중심이고 법칙중심, 기교론적 세계관, 에드워즈는 모두 인정하고 그 법칙 속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강조했고 힘은 곧 하나님의 영향력이다, 그래서 데카르트와 칸트는 사물과 사물이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원인 결과 이렇게 연결되었기 때문에 어떤 초자연적인 것들이 비집고 들어갈 영역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는 이것을 모두 인정을 하면서도 그 법칙 속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 법칙을 깨고 기적을 일으키실 수도 있고 신비한 일들을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개방적인 세계관을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칸트나 데카르트나 특히 칸트에 의해서 수립된 새로운 세계관은 엄청난 계몽주의에 기름을 뿌리는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예전에는 어떤 자연현상이 일어나면 의미를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오랫동안 가뭄이 계속 될까?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슬퍼하시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뉴턴은 간단하게 설명을 합니다. 이것은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자연법칙에 의해서 설명이 된다. 이렇게 하면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냐 하면, 두 가지인데 하나님이 없다 라고 하는 사상과 18세기에 이르러서 지적인 설계자로서의 하나님의 개념을 제시하기 시작해서 중세와 종교개혁의 구원자 하나님이 이신론의 하나님, 멀리 계셔서 세계를 간접적으로 움직이도록 법칙을 만드셨지만 당신 자신은 손대시지 않는 이러한 자연적으로 돌아가는 세계가 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자연적인 세계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도덕 세계에까지 들어오게 되는데 여러분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소위 이야기하는 성숙한 세계관 특히 독일에서 순교한 신학자 본헤퍼 같은 사람이 이야기하는 성숙한 세계관이 바로 그것입니다. 세계에 간섭하셔서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살아라 하고 이렇게 하시는 것은 저 구약시대에나 하시는 것이고 지금은 성숙한 세계다. 그렇기 때문에 성숙한 세계에서는 하나님이 니들끼리 알아서 잘 살아라 그러시기 때문에 간섭하지 않으신다. 그러니까 만약에 나치가 저렇게 나쁜 짓을 하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놈을 죽여서 없애버려야 된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의 우리들이 현실을 살아가는 책임이요 사명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의 빛으로 보면 뉴턴주의에 대한 해석은 이상한 것도 많고 동의할 수 없는 것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에드워즈의 시도를 통해서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입증하려고 했던 신학자로서의 절박함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변증함에 있어서 과학까지도 사용해서 과학이 주는 미신 속에 감염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노력 같은 것들은 우리들이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에드워즈에게서 또 하나 어려운 문제가 하나님의 내재성과 초월성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세계와의 관계를 보면 무신론이 있고 유신론이 있습니다. 유신론은 범신론, 만유내재신론, 초월신론 이렇게 나뉘게 됩니다. 잘못된 생각들만 얘기한 것입니다. 그 다음 넘어가보면 존 쿠퍼라고 칼빈대학교 철학적 신학교수인데 이 사람이 쓴 책이 <Panentheism-The Other God of the Philosophers: From Plato to the Present> 라는 책입니다. 제가 살 때만 해도 번역이 안 돼서 힘들게 읽었는데 나중에 얼마 있다가 한글로 번역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책 속에서 존 쿠퍼 교수는 조나단 에드워즈를 판앤데이스트로 분류합니다. 판앤데이스트는 뭐냐 하면 모든 만물 속에 신이 있다, 하나님의 존재가 있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범신론의 일종입니다. 그것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한 주장은 결국은 스피노자 같은 사람에게서 나오게 되는데 스피노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의 초월한 하나님만이 하나의 실체이며 인간은 영원히 개별적인 실존을 보유한다는 주장을 조나단 에드워즈가 하게 됩니다. 이런 주장은 결국은 스피노자가 이야기하는 범신론적인 일원론이나 판앤데이즘의 비난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드워즈의 저작 가운데 몇 개 구절이 에드워즈가 혹시 판앤데이스트가 아닐까 의심하게 만드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해석할 때에는 18세기라는 맥락을 잘 이해하면서 해석을 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우리 시대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신비주의적으로 신타령을 해서 문제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드워즈 때에는 뉴터니즘의 사상에 감염이 되어서 하나님이 온 세계 어디에도 없다 라는 사상이 유행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중대한 해독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어디에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했던 결과다 이렇게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여기서 다 설명 할 수 없지만 에드워즈의 기본적인 저작만이 아니라 그가 동료들과 주고받았던 수많은 편지들의 모음이 있습니다. 그 편지들을 모두 찾아서 그 속에서 관련된 글들을 연결하면서 읽어보아야 하는데 이렇게 하고 보면 사실은 에드워즈가 판앤데이스트였다라고 쉽게 결론을 내릴 수 없다 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는 처음에는 판앤데이스트에 대해서 혐의를 많이 두었는데 지금은 완전히 자유로워졌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다. 특히 그가 이런 것들을 발표하고 판앤데이스트가 아니냐고 질문을 받은 편지 속에서 자기를 변호하는 과정을 보면서 이것은 당시 18세기 문맥 속에서 조나단 에드워즈가 기독교의 참 하나님을 증거하기 위한 중요한 것이었지 결코 그가 판앤데이스트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에드워즈의 신론 변증의 주목적이 있는데 소극적으로는 뉴턴의 이신론을 잠재우기 위한 것이고 적극적으로는 세계 안에서의 하나님의 편재성을 주장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에드워즈의 신론은 대개 이렇게 이루어지게 되는데 성경이 주가 되고 개혁신학이 주가 돼서 신론이 형성이 되고 그 다음에 계몽주의를 공격하기 위해서 플라톤주의와 특히 유대 카발리즘의 형식을 빌어서 계몽주의를 공격하고 뉴턴에 대한 새로운 해석들을 통해서 계몽주의가 이야기하는, 이렇게 자연법칙만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실상 없다 라고 하는 사상에 대해서 공격을 하기 위해서 이것들을 사용을 한 것이다 이렇게 저는 에드워즈의 신론을 해석을 합니다.
이제 마지막에 중요한 것 하나 하겠습니다. 사물의 실존방식에 대해서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제가 나누어드린 주기도문 중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는 구절을 3챕터로 나누어서 다루었습니다. 제일 먼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세 챕터로 나눠드렸는데 그 중에서 두 번째 챕터인 ‘계신’ 이라는 것을 해석을 하면서 하나님은 정말 계신 것인가 이 문제를 거기서 다룹니다. 그 때에 거기서 이것을 가지고 설명을 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신학에서 이야기하는 modes existent라고 하는 주제입니다. modes는 양식 혹은 방식이고 existent는 실존의 그런 뜻입니다. 실존의 방식이 사물에 따라 다르다. 그러면 어떻게 다르냐?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말하기 전에 먼저 프란시스코스 튜레틴이라고 하는 제네바 아카데미의 학자이고 17세기의 개혁파 정통주의자인데 아주 유능한 신학자였습니다. 이 사람이 로마 가톨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고 이 사람이 쓴 <변증신학강요> 라는 책이 있습니다.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라고 하는 세권으로 된 책인데 엑셀런트한 책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책을 꼭 사십시오. 돈이 없으면 다른 책을 팔아서라도 책을 사셔야 합니다. 제 책은 팔지 마시고. 그런데 이제 이 책 속에서 그는 사물을 modes existent에 따라서 세 카테고리로 구분합니다. 첫째가 circumscriptively하게exist한 존재. 그게 뭐냐면 circum은 둘레고 script는 그리는 것이잖습니까. 둘레를 그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이게 요렇게 그리면 circumscriptive가 되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면 A지점에는 물통이 있고 여기는 물통이 없습니다. 물통의 존재를 테두리를 그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하는 사물들이 있는데 돌, 나무, 책상 이런 것들이 바로 한정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의 육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제한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definitively exist. 그건 뭐냐 하면 우리의 몸 안에 우리의 영혼이 있겠지요? 내 영혼이 빠져서 저 사람에게로 들어가지는 않잖습니까? 그러니까 어디라고 테두리를 지어서 규정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제한된 공간 안에 존재하는 것. 이건 뭐냐 하면 영혼, 마귀, 귀신, 천사 이런 존재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한정적인 존재가 있느냐 없느냐는 판단의 기준만을 가지고 보면 제한적인 존재는 파악이 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배를 갈라 뒤집어 놓고 어 영혼이 없네 이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그런 방식으로 존재한 게 아닙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방식으로 존재하느냐? 첫 번째나 두 번째 방식으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니까 하나님이 아무데도 없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어디든지 있다고 하면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존재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릅니다. reflextively하게 exist한. 그것은 충만하게 존재하는 것. 그럼 무슨 뜻이냐면 한정적인 존재나 제한적인 존재를 측정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측정하면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해부학적으로 갈라서 영혼을 찾을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은 이 세계 아무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충만적인 방식으로는 이 세계 어디도 안 계신 곳이 없고 이 세상에 어떤 사물도 하나님만큼 가까이 있는 사물은 없습니다.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헷갈려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이제 맺겠습니다. 마지막 결론을 내겠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와 나의 목회의 마지막 결론 내리겠습니다. 에드워즈에 대한 탐구가 나의 목회에 준 영향이 많이 있지만 그 중에서 몇 가지를 보면 첫 번째 회심 목회의 중요성. 무슨 뜻이냐 하면 목회를 할 때에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정말 거듭나고 구원을 받는 것 그래야지만 그가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에 굴복하면서 참된 인간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 두 번째는 설교 사역의 중요성. 그래서 에드워즈의 부흥은 설교에서 경험되는 부흥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답게 선포할 때 무엇인가 거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러한 기대를 가지고 설교했습니다. 조수미 씨가 소프라노 가수인데 나는 그렇게 썩 좋아하진 않았습니다. 옛날에는 좋아했는데. 그런데 이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는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때 객석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쓰러질 것을 기대하면서 노래를 부른다. 설교를 하는 사람들이 설교를 할 때 그런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설교 하는 이 시간에 황홀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과 영적인 충격이 사람들을 쓰러뜨릴 것이다 라는 기대와 마음을 가지고 설교해야 합니다. 자기를 바쳐야 합니다. 또 하나는 신앙교육의 중요성. 한 사람 한 사람을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일의 중요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영광.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의 섬기는 사역과 모든 것들이 그 자체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이 우리의 만족이 되어서는 안 되고 그 모든 일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찬란하게 드러나는 것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고 이 모든 시도의 한복판에 성경이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성경을 깊이 천착하고 그 성경을 사랑하면서 그것들을 이루어가는 것, 결국 그런 많은 학문과 지적인 헌신, 철저한 영적인 생활과 경건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야 한 시대를 뒤흔들어 깨우고 물론 50대 중반의 나이에 천연두 예방주사를 맞고 결국은 하나님 나라로 가게 되지만 그 때가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주 헌신되고 철저한 삶을 살았던 이 땅의 한 성도로서의 생활을 우리들이 생각해 볼 때에 우리는 본받을 만하다 그래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하고 싶습니다. 에드워즈의 책을 읽어라. 그리고 사랑하라. 시간이 없습니다. 물론 없겠지요? 그래도 인간이라는 것이 자기 좋아하는 것을 하게 마련입니다. 너무 너무 사모하고 기도하면 없는 시간도 생깁니다. 하루 한 시간씩 덜 자고 읽으면 한 2년만 읽으면 얼마든지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깊이 몰입하면서 정말 아름답다, 마지막에 고백하는 얘기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학은 참 예쁘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지금부터 아직도 젊으니까 열심히 노력해서 공부를 끝내고 사람들 앞에 섰을 때 영적인 대가다운 면모를 갖출 수 있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