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1일 개혁주의 신학대회.
녹취자: 김은정
사실 제 논문을 논찬하시는 임 목사님께서도 지적 하셨습니다만은 사실 관상기도에 대한 성경적 비평들을 첨가하고 싶었는데 논문 쓸 수 있는 시간을 두주 정도밖에 주지 않았습니다. 밤을 새면서 썼는데 도저히 시간이 안되서 못썼습니다. 부족한 것들은 이미 나와 있는 논문들을 참고하시기를 바라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겠습니다. 관상기도에 대해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도대체 관상기도가 어떤 것인지 영상으로 잠시 보겠습니다.
요즘 이제 관상기도 문제가 대두가 되면서 굉장히 시끄러워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관상기도가 무엇인가라는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습니다. 관상기도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신본주의 철학과 종교에서 행하던 소위 직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성으로 알 수 없는 것들을 체관을 통해서 알게 되는 그런 행위를 기독교적인 행위와 접목한 것이 바로 관상기도입니다. 이러한 관상기도를 광범위하게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광범위하게 받아들이고 특히 요즘은 복음주의적인 교회라고 하는 리딩 처치에서도 이것들을 받아들여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서 관상기도들이 번지는데 모든 운동에는 사상적인 뿌리가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관상기도 운동들이 한국에서 받아들이는 분들이 이런 모든 것들을 다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그 정도로 사상에 대해서 밝지 못하니까 단기적으로 목회에 도움이 되니까는 받아들여서 하는데 사실 그것들이 단기적으로 보지 말고 뿌리를 전체적으로 보면서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 보면은 그것들이 오늘날 나타나는 모습 이면에 어떤 것들이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신비주의 사상입니다. 뉴에이지 사상입니다. 뉴 에이지 사상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 천문학에서 이야기하는 즉 점성술에서 이야기하는 12궁도가 있는데 그 궁도 중에서 특별히 물병자리로 별이 위치하고 이것이 1960년도 시작해서 2000년 정도 계속되는데 이때가 인간이 신과의 합일이 되고 모든 우주의 중심이 되는 인간의 유토피아 시대가 온다는 것이 이쪽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 것이고 두 번째는 중세의 신비주의입니다. 사실 관상주의가 처음 유래된 것은 중세 초기의 한 성 안토니우스 시대니까 한 4-5세기 경 그때에 중동지역에 사막교부들에서부터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보는데 이때에 4세기의 은둔 수도사들에 의해서 세속을 떠나서 침묵과 관상을 강조하면서 그러면서 이런 것들이 발달하게 되는데 이런 중세의 신비주의가 사실은 중세에 갑자기 나온 게 아니라 이미 벌써 초대교회 교부인 오리겐누스 혹은 오리겐 같은 사람에게서 이미 발견이 됩니다. 아시다시피 오리겐은 신 플라톤주의자였고 거기에서 이 사람은 플라톤의 신비주의적인 철학을 가지고 기독교를 설명하려고 했는데 그의 신학 원리같은 책 속에 이런 사상들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세 번째로 유대교 안에 있는 까발리즘입니다. 이 까발리즘이라고 하는 것은 스페인과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에서 시작된 중세 유대교의 신비주의를 의미합니다. 왜 이런 것이 생겼냐면 유대교는 원래 신비주의 종교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통적인 유대교가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계속 민족적으로 고난을 받을 때 그 자신들의 고난에 관한 신정론적인 근거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서 이제 오늘날 당하고 있는 많은 인간의 고난을 전생의 업보로 해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통해서 소위 윤회사상이 유대교 속에 들어오게 됩니다. 유대교의 분파 속에서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르네상스 이후에 유대교의 까발리즘이 크리스쳔 까발리즘으로 전환되면서 기독교 안에 이런 신비주의 관상기도 운동들이 들어오게 됩입니다. 네 번째는 종교개혁 시대와 근대 이전의 신비주의인데 13세기에 카톨릭 안에서 자체적인 개혁운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개혁운동이 무엇이냐면 카톨릭의 중대한 위기를 느끼면서 이 사람들이 본래의 청빈과 그리고 수도자적인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하면서 복음서 속에 나타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하려고 하는 운동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런 것들이 13세기에 일어났던 청빈운동 그리고 종교개혁운동이었습니다. 이런 것들 속에서 굉장히 많은 신비주의적인 것들이 전파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는 이그나티우스 로욜라, 아빌라의 테레사, 그리고 십자가의 요한 여러분들 두란노에서 나오는 책들을 통해서 많이 보급되는 로렌스 형제의 하나님의 임재 연습, 잔느 마리 귀용, 순교사로 유명한 조지 폭스, 이런 사람들에 의해서 이런 사상들이 지속이 되게 됩니다. 다섯째로는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 범신론과 내재신론의 확산입니다. 만물의 근원이 되는 신과 이 모든 세계가 어떻게 관계를 맺는지에 대해서 전통적인 유일신론을 버리고 범신론적이고 내재신론적인 주장들이 광범위한 지지를 얻게 됩니다. 관상기도 운동은 바로 이러한 신관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이루어지게 되는데 바로 유명한 사람이 스피노자라는 사람입니다. 화란 사람인데 가내 수공업을 하면서 부업으로 철학을 했는데 세계적인 학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화란교회에서 파문을 당합니다. 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신과 자연은 본질적으로 하나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거대한 범신론을 만들어 냅니다. 이러한 것들이 내재신론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데 panentheism이라고 하는 내재신론은 어떤 것이냐면 예전에 범신론이 신의 신성이 무의식적으로 유출이 되어서 세계에 스며들었다고 그리고 이 세계와 신자체가 하나의 일체를 이룬다고 본다면 이 범신론의 성격은 세계 속에 스며든 신의 인격체적인 성격을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내재신론은 거기에 인격적인 성격을 가미를 한 것입니다. 기독교에서 이것을 받아들이기에 아주 좋은 연관관계를 갖고 시간이 없어서 다 설명드릴 수 없지마는 이것은 엄청난 뿌리를 기독교 역사 속에 가지면서 교회를 사실은 괴롭혀 왔던 것입니다. 바로 이 스피노자라든지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17세기와 18세기에 미국의 옥스퍼드와 캠브리지를 중심으로 다시 일어났던 새로운 신 아우구스티누스주의 운동 속에서 펼쳐진 도덕 신비주의자들이 대부분 이런 내재신론주의자들이었습니다. 또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던 프리드리히 슐라이에르마허 이런 사람들에 의해 발전이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이 19세기에 자유주의가 부상이 되면서 사실은 고전주의적인 기독교 유신론이 아주 심각한 공격을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전에는 기독교는 하나님이 창조세계를 만드셨지만 하나님 자신은 본질적으로 이 세계와 완전히 구별되시는 분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초월성이 기독교 교리의 근간을 형성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이러다가 보니까 무엇이 문제가 나오냐면 악에 대한 설명,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극도의 제약, 시간과 영혼 사이에 존재하는 단절성에서 대한 설명의 미흡 이런 것들에 대한 많은 문제들이 철학계에서 공격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이성적으로 설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많은 기독교 철학자들이 내재신론을 따르게 됩니다. 특별히 이런 사상들은 개신교는 학문이나 이런 수준에 있어서 훨씬 뒤지고 카톨릭 쪽에서 엄청난 발전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에게 이름이 좀 생소할지 모르지만 떼이아르드 샤르뎅이라고 하는 카톨릭의 사제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카톨릭 안에서도 엄청난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고 앙리 뒤 리박이라고 하는 카톨릭 철학자와 함께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 발전하냐면 기독론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에는 기독론 자체가 위로부터의 기독론입니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어떻게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리고 만물을 통치하고 우리를 구속하시고 부활하셔서 그리고 다시 오실 주가 되시고 우리의 신앙의 대상이 되시고 그리고 이 온 우주를 마지막 때 까지 통치하시는 하나님이 되시느냐 이런 설명입니다. 설명의 중심점 자체가 굉장히 존재론 적입니다. 이런 것들이 1950년대 이후로부터 커다란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이제는 그런 식의 하향식 기독론 가지고는 이미 절대적인 가치를 부정하면서 인간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는 현대인들과 접촉할 수 없다는 사상을 가집니다. 이제 상향식 기독론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기독론 출발자체를 존재론이 아니라 기능론으로 시작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어떤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는가? 그리스도에 대한 어떤 설명이 이 사회의 개선에 도움이 되는가를 염두해 두면서 기독론에 대한 전개방식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상향식 기독론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운동들이 일어나게 되면서 떼이 아르드 샤르뎅 같은 사람, 이 사람은 원래 사상적 배경이 중세의 두스코스 투스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면서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 해드 같은 사람들이 과정신학자입니다. 과정신학이 무엇이냐면 아까 말씀드린 이런 세계와 신과의 일치를 신학 속으로 받아들여서 그래서 인간이 함께 참여함으로 하나님도 성장해 가고 발전하고 하나님의 발전과 형성이 세계를 형성하는 것과 순환을 이룬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우리와 함께 당신 자신이 배워가시고 알아가시고 보다 더 완전해지시고 하는 이런 사상이 오늘날 전체적으로 현대를 지배하고 있는 사상입니다. 이런 사상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직접적으로 우리에게 영향을 준 것은 사실 레노바레 운동입니다. 레노바레라는 말은 라틴어 레노바레 "새롭게 하다" 영어의 renovation에서 온 것입니다. 이 레노바레 운동을 우리나라에서 이름만 되면 알 수 있는 아주 복음주의의 명망있는 지도자들이 거기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저의 판단입니다만 거기에 참여한 존경할만한 복음주의 한국교회 지도자들 합동측부터 시작해서 통합측까지 모두 다 연루가 되었습니다. 레노바레 성경이 나올 때 추천서 쓴 사람은 한국에 있는 복음주의적 신학대학교 총장들은 다 추천서를 썼습니다. 심지어 고신대학교도 거기에 다 나왔습니다. 무엇을 의미하냐면 심각하게 잘 생각하고 받아드린 것이 아니라 이분들이 바쁘니까 유력한 교회에서 내 놓을만한 사람들이 간판으로 쓰고 하니까 좋은건가보다 하고 도장찍고 쓰신 것입니다. 실제로 그 중 어느 한 분에게 물어보니까 어떻게 그런 불건전한 레노바레 운동에 거기에 다리를 들여놓고 지지자가 되었습니까 하니까 난 그렇게 복잡한 줄 몰랐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문제가 무엇이냐면 여러해 전에 리처드 포스터가 기도란 책을 두란노에서 내놓았습니다. 그런데 엄청나게 팔렸습니다. 그 책이 나올 때만 해도 이 사람의 사상적 배경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저도 읽어 봤는데 우리가 이렇게 버리고 이래야 될 것이 없을 정도로 아주 건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리차드 포스터의 레노바레 운동이 전개되면서 이 사람들의 실체들이 들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이 원래 누구냐면 퀘이커 교도입니다. 교회사속에서 퀘이커 교도들은 아나뱁스트와 관련이 된 사람들이고 이 사람들은 성경계시 그 자체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내적인 광명을 직접 받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입니다. 무교회 주의자들이 대부분입니다. 모여서 같이 예배들이다가 갑자기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서 지금 주님이 내게 말씀하시기를 그리고 스토리를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 주님의 말씀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런 위험한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근데 이 사람을 누가 전파하는데 앞장 섰냐면 빌 하이벨스와 또 한 사람이 릭 워렌입니다. 이 사람이 스승처럼 떠 받드는 사람이 리차드 포스터와 달라스 윌라즈라는 기독교 철학자입니다. 이사람도 역시 내재신론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이 또 스승처럼 존경하는 그 위에 세대가 있는데 여러분이 잘 아는 헨리 나우웬입니다. 이런 책들을 두란노에서 많이 보급했습니다. 헨리 나우웬은 제스윗트 신부였는데 이 사람은 동성애주의자였고 동성애자원주의자 였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일류대학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장애인과 함께 살다가 죽은 휴머니즘적인 것들이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이 사람을 따랐는데 이 사람이 또 깊이 존경하는 사람이 누구냐면 토마스 머튼입니다. 토마스 머튼이 사실은 현대 관상기도 운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관상 기도가 현대에 아주 놀랍게 먹이는 아주 커다란 이유는 첫째는 현대 사회 속에서 현대인들이 자아를 상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 살면서 아침서부터 밤까지 바쁘게 움직이면서 자기가 누구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둘째는 신비주의의 동경입니다. 물질문명의 발달과 과학만능주의의 사회에 살다보니까 염증이 느껴지는 겁니다. 신비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이 발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극도의 과학주의적인 시대입니다. 해리포터가 저렇게 열광을 하는 거 보십시오. 해리포터를 써서 7조원을 벌었답니다. 반지의 제왕, 아바타 이런 식의 신비주의적인 작품이 확 빨려들어가는 이유는 역설적으로 가장 신비주의적인 것들을 배격하는 과학 만능주의에 살기 때문에 그런 욕구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자아중심의 실용적인 사고들이 이런 것들을 받아들이게 하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이 대부분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자기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거의 완벽하게 사라진 설교의 제목이 있습니다. 거듭났습니까? 회개없이는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의 죄가 당신을 불행하게 합니다. 이런 종류의 설교들이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게 설교자 자신을 그것을 모르는데 현대 정신 속에 함몰되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현대정신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자아가 중심입니다. 이 인간이 이성주의 시대에는 신과 인간이 대립을 했는데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 이성주의 이후의 후기현대주의에서는 어떻게 하든지 인간을 신에게로 합치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이 자기자리를 버리고 포기하고 깨어지고 신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그냥 있으면서 신과 관계를 맺어서 결국에는 신이 자기 속에 스며들어오고 자기가 신속으로 스며들어 가기 때문에 회개라는 개념이 설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지금 회개해야될 분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시대가 바뀐 것을 알고 인간을 향한 태도를 바꾸어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으니까 그런 식으로 복음을 만들어낸 것은 모든 인간의 원시적인 사고 방식들이 신화처럼 만들어 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게 현대정신의 핵심입니다. 이런 속에서 최근에 나온 블랙스완이란 영화를 보셨습니까? 한번 꼭 보십시오. 거기에서 보면 커다른 감동을 현대인들에게 주는데 죽음을 초월해서 모든 가치를 던져서 자기의 꿈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교회마다 당신의 꿈을 이 교회에서 펼치십시오 드림이야기, 꿈이야기를 수없이 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현대정신에 스며든 것입니다. 물론 이것을 사용하는 목사님은 그것을 모를 수 있습니다. 알든지 모르든지 원격조정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영성이라고 쓰셨는데 이것을 쓰면 안됩니다. 이것은 개혁신학에서는 용도 폐기해야할 용어입니다. 모라토리옴을 선언해야되는 용어입니다. 왜냐하면 영성이라는 것이 경건이 기독교적이고 유일신적인 그리스도적인 사고를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게 다른 종교를 융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포기하고 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저렇게 영성이란 것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이런 현대정신 속에 스며들어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관상기도 운동의 신학적인 문제점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저는 이 논문에서 나름대로 공헌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이냐면 여태껏 까지 논문들을 보면 사실적으로 모든문제들을 비판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표준적 개역신학을 조직신학의 잣대를 가지고 이것을 논제별로 인간론, 신론 이렇게 비평을 하려고 했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연구들이 있어야 되겠지만 나름대로 그점에 있어서 저는 생각합니다. 인간론에 대해서는 인간 존재의 개념 자체가 비성경적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인간은 이미 하나님과 연합된 존재며 관상기도는 그런 인간존재에 대한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다." 쉐논도 마찬가지입니다. "신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사는 것이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은 오히려 인간이 참된 신앙을 갖게 되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한 격차를 인정하고 그 앞에 두려움으로 떨고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인데 그게 경건입니다. 이러다 보니까 인간이 신과 본질적으로 혹은 실체적으로 하나라고 보기 때문에 죄가 설 때가 없는 것입니다. 인간이 죄가 있으면 신이 죄가 있는 것이 되기 때문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어떻게 보느냐? 토마스 키딩 역시 이런 사람들은 원죄자체를 부정합니다. 인간에게 있어 불행한 문제가 무엇이냐면 인간이 원래 신적 본질을 가진 존재인데 거기에 인간의 욕망과 세상의 죄들이 이것들을 순수성을 더럽힌 것입니다. 문제는 무엇이냐면 이것들을 걷어내는 것입니다. 걷어내면 인간의 드러나는 참된 자아가 있는데 이것이 하나님의 본질과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하나님과 일치하지 않을 뿐 아니라 죄와 타락으로 깊이 오염되어 있어서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돌이킬 수 없는 존재라고 보는 것 아닙니까? 이런 문제들을 갖고 있는 겁니다. 인간의 영혼을 신적본질의 일부로 보는 사상은 최근에 사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아우구스누스 시대에 뱅상 빅토르라는 신학자가 있었습니다. 이사람은 아우구스누스와 논쟁을 많이 하게 되는데 창세기에 보면 "후"하고 숨을 불어 넣어서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십니다. 뱅상 빅토르는 이것이 하나님의 전체적인 영혼 속에서 일부가 빠져나와서 사람의 영혼이 된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면 육체라고 하는 껍질에 갇혀서 그렇지 육체의 껍질을 벗어버리면 신의 본질과 인간의 영혼이 일체를 이룬다고 보는 이러한 사상이 이교적인 해석을 통해서 끊임없이 기독교를 괴롭혀 왔던 것들이 관상기도를 통해서 재현된 것에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구원론에 있어서도 구원개념 자체가 결국은 비참한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구원을 받는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돌아갑니까? 인간의 모든 불행은 거짓된 자아를 여전히 지니고 있어서 신과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참된 자아로 나아가지 못하는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벗어버려서 신과 합일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걷어내는 작업은 복음으로만 되느냐?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참선을 통해서, 기독교에서는 관상기도를 통해서, 신비주의에서는 체관을 통해서, 플라톤철학에서는 직관을 통해서 그렇게해서 나아갈 수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종교다원주의적인 개념을 갖게되는 것입니다. 영지주의적인 구원관도 여기에 가미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지식자체가 깊이 아주 신비한 차원의 지식으로써 비의적인 내용들로써 우리에게 전수된다고 보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은 성화관에 있어서도 결국은 우리의 기본적인 성화관은 거듭났지만 아직 남아있는 죄의 본성들을 예수님을 끊임없이 의지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에 의해서 본성이 정결하게 되어가는 것이 성화의 교리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순전한 인간이 되어갈 때 인간이 되어간다라고 하는 것은 신이 되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초적으로 부여하신 당신을 닮은 형상을 회복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형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형상은 형상입니다. 예를 들어 가이사가 자기얼굴 찍힌 동전을 찍어 냈으면 동전이 가이삽니까? 가이사의 형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관상기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형상과 하나님 사이의 일치를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신의 형상을 회복하면 우리가 신이 된다는 사상을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은 개혁신학과 양립할 수 없는 사상입니다. 더 가관인 것은 개혁신학에서 이야기하는 그리스도와 연합의 교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내가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리적으로는 구원받음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서 연합을 이루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고난을 받고 그 안에서 십자가를 묵상하는 가운데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며 내안에 죄가 죽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안에서 재현되는 죄에 대한 죽음, "은혜 살림을 통해서 우리가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칼빈 신학에 있어서 성화론의 정수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이렇게 이해하는 것이 개혁신학의 기본적인 이해인데 여기서는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복잡한 과정을 통한 이런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참된 자아로 돌아가면 그것이 곧 예수이다.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루면서 세계의 충만한 영적인 기운들이 그리스도의 분신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집에가서 읽어보십시오. 범신론적 기독론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지금 발표는 못하지만 신론에 나오는 범신론과 내재신론 문제는 제가 상당히 공을 드린 작품입니다. 적어도 4-5년간 연구결과가 집약된 내용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많이 하시고 집에 가셔서 읽어보시면 좋으리라 생각됩니다. 보다 더 전문적인 내용들은 비켜가겠습니다.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마지막에 대안을 이야기를 하자면 이런 모든 문제는 어디에서 오냐면 참된 경건에 대한 체험이 사라지는데서 이런 문제가 옵니다.
이번에 논문을 쓰면서 조사를 해봤더니 너무 재미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무엇이냐면 기도라고 하는 기독교의 경건행위를 80년대 한국에 종교 다원주의가 들어오면서 가장 먼저 배격했던 그런 자유주의에 속한 사람들이 관상기도를 받아들이는데 제일 열심이었습니다. 저는 나름대로 신학적으로 어떻게 정리하냐면 관상기도는 그리스도의 복음과 화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전통적으로 기도의 방식을 버리고 택한 제 3의 선택이다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기도는 복음과 화해하지 않고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만나고 영적으로 변화 받지 않고는 기도의 문이 열릴 수 없습니다. 오늘부터 기도하자고 해도 그는 기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개혁주의 전통신학자 히스 베리투스 피치우스 화란신학자는 말하기를 우리의 경건의 확실한 표는 하나님을 향한 진실하고 열렬한 기도라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없습니다. 기도 안합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기도의 진실한 체험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십자가의 복음과 확실한 중생과 회심, 이것을 통해서 기도의 문이 열립니다. 그래서 청교도 존 오웬은 그 중생과 회심의 순간이 하늘의 은혜의 샘이 터지는 순간이라고 했습니다. 거기에서 열렬한 기도들이 쏟어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회심을 하려면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가 죄인이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위한 유일한 구원의 길이고 너희는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야 된다는 것이 회심을 위한 기본적인 선포입니다. 교회에서 들을 수 가 없습니다. 우리 다 목회자들이니까 터 놓고 이야기 합시다. 최근에 여러분 내 이 설교단이 오늘 설교하고 이 교회에서 쫒겨 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러나 죄인들을 구원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누구도 눈치 보지 않고 죄에 대해 담대히 설교한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설교를 들었을 때 교인들이 어느 예배인지 좋으니까 아 정말 목사님 말씀 듣고 나니까 정말 죄인이구나 하고 회개의 눈물로 얼룩졌던 예배가 언제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분위기 속에서 거의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교회당을 메우고 그들은 본질적으로 참된 복음에 대해서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변형된 것들이 들어오니까 사람들이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미흡하지만 발표를 1/3밖에 못했지만 다행히 원고를 정성들여 다 썼으니까 집에 꼼꼼하게 읽어보시면 도움이 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