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18일 교직원예배
“많은 사람은 각기 자기의 인자함을 자랑하나니 충성된 자를 누가 만날 수 있으랴”(잠 20:6).
지혜자가 참다운 충성이 무엇인지를 오늘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인자와 충성, 이 두 가지가 언약백성의 최고의 덕목입니다. 진리를 알고 진리를 찾는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믿기 위한 것이고 잘 믿기 것은 결국에는 잘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진리, 은혜, 경험, 등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그것은 배경이 되는 원천적인 것들이고 그것들이 흘러나온 언약백성들의 삶은 하나님을 향해서는 충성스럽게 살고 사람을 향해서는 인자한 삶을 사는 것 그것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두 가지는 결코 나눠지지 않는 것이죠.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충성스럽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사람들만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인자할 수 있고 남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인자한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해 충성된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늘 지혜 자는 우리가 읽은 본문에서 이 인자와 충성이 상극을 이루거나 대치되는 것처럼 묘사해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인자하다고 떠들고 스스로 뻐기지만 그러나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충성된 사람들을 어디서 발견할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마치 인자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충성스러운 삶을 살수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하자면 배치된 묘사를 하고 있는 것이죠. 이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그릇된 인자이지요. 뭐 그때는 지금보다도 더 성격이 좀 칼날 같았으니까 그랬지만 주일학교 전도사를 할 때에 학기말이 되면 아이들을 시상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상품들을 사다놓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아이들에게 시상하는데 아이들이 교회를 안 나오는 날이 있잖아요. 그래서 상을 못주었어요. 그런데 그게 그 당시로써 2,500원짜리 어린이용 가죽성경이었어요. 조그맣게 만들었는데 아주 예뻤어요. 그래서 그것을 주려고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서기 선생님한테 ‘안 선생! 여기에 있던 아이들 주려던 상품 중에서 제일 좋은 성경은 어디 갔어요?’ 우물쭈물해요 그래서 어디에 뒤져도 없어서 없다고 그랬는데 그러더니 ‘저 사실은요.’ ‘사실은 뭐?’ ‘부장집사님이 그냥 저 가지라고 주었습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느냐? 부장집사님이 교회 돈으로 산 것인데 그것을 너에게 줄 권한이 어디 있느냐?’ ‘그래 그냥 주었느냐?’ ‘아니요. 그게 너무 가지고 싶어서 달라고 그랬더니 가지라고 주었어요.’ 아주 심하게 야단을 쳤어요. 그래도 도로 안 갖다 놓더라고요. 나 같으면 자존심이 상해서 얼른 갖다 놓을 텐데……. 잘못한 것이다. 그 형제가 사랑스러웠으면 부장이 자기돈 주고 사서 주어야지 교회 돈으로 아이들에게 상 주려고 사다놓은 것을 그 아이가 다음 주에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것을 선생을 주어버리면 되겠어요? 자, 그렇게 해서 선생이 교회 돈으로 산 주인이 엄연히 있는 아이들의 상품을 그 선생에게 ‘너 가지라.’고 줄때에 얼마나 인자하게 보였겠어요? 그런데 충성스러운 행동은 아니잖아요.
교회에 보면 인간적인 의리 때문에 대의를 그르치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교계에서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불법 같은 것들은 대부분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람들과 사람들끼리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다독거리면서 일을 해나가는데 문제가 터지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이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는 결국은 나쁜 것이 되고 문제가 되지 않습니까? 잘못된 것이죠.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하나님 앞에 옳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이 균형을 잡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어떤 과업이 주어지고 그 과업을 잘 수행해내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사람들에게 까칠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해내는 것이죠. 그래서 일은 훌륭하게 해내지만 일을 잘하는 사람 주변에는 늘 적수들이 많아요. 그것은 공직사회에서도 그렇고 어디가든지 그렇습니다. 또 동료들에게 인정을 받고 늘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람은 일을 하는데 있어서 무능해요. 목표도 없고 되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안 되는 것도 없어요. 그렇게 사는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것은 언약백성의 삶에 바람직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죠. 오히려 언약백성의 삶의 모습은 그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람들에게 인자와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대의를 따라 살아가야 되기 때문에 사람들과 부딪히고 혹은 사람들과 맞서야 되는 경우는 어쩔 수 없는 것이죠. 더 중요한 것은 뭐냐 하면 우리가 개인적인 유익 때문에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뜨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가정설교를 한번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도 똑같이 불신 가정을 두고 고통스러워하는 교인들을 많이 보셨어요. 그 교인들에게 제가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충고를 하셨어요. 그게 뭐냐 하면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언제나 희생하십시오. 그리고 언제나 양보하십시오. 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이 아닌 한 늘 베푸십시오. 그리고 마지막에 그 부분은 양보하지 말고 지키십시오.’ 그것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대부분 거꾸로 하는 것이에요. 신앙의 본질적인 것들은 충분히 양보하고 이익이 충돌을 일으켰을 때에 싸우는 것이죠. 그러니까 늘 열심히 예수를 믿으라고 전도를 하고 살살 웃고 먹을 것을 갖다 주고 그러다가 전기세가 나오면 그 몇 푼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이웃집하고 대판거리 싸우고 (요즘은 그런 것이 별로 없지만 옛날에 우리 집 같은 경우는 한집에 아홉 가구가 살았거든요. 전기세를 낼 때마다 싸우는 것이에요. ‘너희는 덜 냈니.’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이 나왔니’ ‘우리는 출근하고 너희는 불 키는데 왜 그러느냐’ 그러면서 ‘너희 집은 밤늦게까지 책을 보지 않느냐?’ 그러면서 만날 싸우는 것이에요.) 그러니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문제지요. 본질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아주 너그럽게 양보를 하고 개인의 이익을 위한 아주 사소한 일에 있어서는 충돌을 하고 싸우는 것이죠. 그래서 결국은 이것도 잃고 저것도 잃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그대들이 아무리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보일지라도 정말 그렇게 인자하게 보이는 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스럽게 나타나는 것을 헤치지 않느냐?’고 그것을 묻는 것이에요. 그래서 사랑과 자비로 행하되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 때 사람은 늘 잃어버리고 바뀌어도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시잖아요. 15년을 섬기면서 15년을 나와 함께 일했던 사람은 몇 사람이 안 돼요. 다 바뀌었잖아요? 앞으로 15년 후면 더 바뀔 것이에요. 여기 자매들도 다 그때쯤이면 권사도 되고 집사도 되고 다 그렇게 될 것이 아니에요. 다 바뀌잖아요. 그렇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동일하셔서 우리와 관계를 맺고 계시잖아요. 누구에게 잘 보이는 사람이 되어야할지 생각해보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