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BS 질의응답
녹취자 : 김미현
(질문 1) 엡 1:10의 ‘통일되게’ 하신다는 말씀을 ‘다시 머리되심’이라고 해석하게 된 주석사 배경들을 개괄해 주십시오.
(답변) 원어 해석에서 논쟁이 굉장히 많은 부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화면에 보는 것처럼 원래 이 단어가 에베소서 1장 10절에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 이렇게 나옵니다. 수동태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놓고 벌인 논쟁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에서 ‘아나’(ἀνα)라는 단어는 ‘다시’, 혹은 ‘위로부터’라는 뜻이고, 그 다음 ‘라이오스’(λαιώσ) 뒤에 나오는 ‘아다이’(αθαι), 이것은 수동태이고, ‘오스’(ώσ), 이것은 동사어미입니다. 그러면 ‘케팔라’(κεφαλα)가 무엇이냐 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의견이 나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케팔레’(κεφαλή), ‘머리’에서 온 것이라고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은 ‘케파이온’(κεφαίον), ‘요약하다’라는 동사에서 변형된 것이하고 합니다. 고전 Greek 문학에서는 ‘논증을 요약하다’, 'sum up'이라고 합니다. 스토리가 많이 있으면 그것을 간단히 요약해서 신문에 헤드타이틀처럼 붙입니다. 그것을 ‘아나케펠라이오우’(ἀνακεφαλαιόω)라고 부른다. 이렇게 고전 Greek 문학에서 많이 쓰였습니다.
고대 라틴 교부들에게 와서는 여기에 새로운 의미가 들어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종말이 되어서 이것들을 하나님이 파괴해버리신다고 한다면, 그것은 당신이 선하게 창조하신 만물들에 대한 일관성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죄 때문에 잠시 만물들이 망가졌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모두 새롭게 하신다는 의미에서 ‘갱신’이라는 뜻이 들어오게 됩니다.
세 번째 해석이 있는데, 저는 이 세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헬라 교부이고 누구보다 헬라어에 능숙했던 헬라어의 대가였습니다. 이 사람도 기본적으로 ‘아나카펠라이오’라는 단어가 ‘어떤 것들을 요약하다. 집약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은 아닙니다. 크리소스톰도 그것을 인정 했는데, 이것이 그리스도와 관련되어서 사용될 때는 그리스도 속으로 'sum up' 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요약하다’라는 단순한 동사에서 유래한 활용이 아니라 ‘케팔레’라는 ‘머리’라는 명사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을 지지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을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구절은 ‘그리스도 안으로, 그리스도 속으로’ 이렇게 번역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엔크리스도’, ‘그리스도 속으로 만물들을 통합되게 하려함’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의 머리되심이라는 신학적인 의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지 단순한 동사에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아나케팔라이오사스다이’(ἀνακεφαλαιώσασθαι)라는 단어를 크리소스톰의 방식으로 설명하면 ‘다시 머리 되게’ 이런 식으로 번역이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1장 10절을 “모든 것을 그리스도 속으로 집약되게 하려함이라.” 혹은 “그리스도 안으로 모든 것들을 통일되게 하려 함이라.”라는 번역 자체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만물들이 통합 되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께서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신다고 하는 신학적인 개념이 이 단어 속에 함께 들어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1장 10절을 읽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질문2) 창조의 중보자와 구속의 중보자를 구별하여 명확히 설명해 주십시오.
(답변) 용어 때문에 혼란을 느끼는데 ‘중보’라고 하는 것이 영어로 ‘메디에이션’(mediation)입니다. 그 다음에 그것을 ‘중보자’라고 하면 ‘메디에이토’(mediator)가 됩니다. 여러분이 느끼는 혼란은 구속에서 중보자라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는데 창조에서 예수님이 중보자가 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이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떠한 상태에 계신가에 따라서 그리스도의 신분이 구분이 되는 것입니다. 첫째는 ‘싸르코스’(sarkos)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육신을 입고오신’, ‘싸르크스’(σὰρξ)라는 것이 희랍어로 ‘살코기’라는 의미이고, ‘싸르코스’(sarkos)는 ‘몸을 입은’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태어나셔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습니다. 그때까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으로는 죄가 없으시지만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입으신 분으로서 계시던 상태입니다. 당연히 이런 그리스도는 창조의 중보자가 되실 수가 없습니다. 주전 7년경에 이 세상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이 오래 전에 이루어진 세계의 창조에 대해서 어떻게 중보자가 되시겠느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상태는 육신을 입기 전의 그리스도입니다. 이것을 ‘아사르코스’(asarkos)의 그리스도라고 부릅니다. ‘아’는 없다는 것이고 ‘사르코스’는 몸입니다. 몸이 없으신 그리스도, 이분이 무엇이냐 하면 영원한 성자, ‘로고스’라고 부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1-3)라고 할 때 그렇게 창조의 원인이 되신 그 분이 바로 ‘아사르코스’(asarkos)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가 창조의 중보자라고 할 때 육신을 입으신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구속은 누가 중보자가 되셨습니까? 육신을 입으셨고 우리 대신 희생 재물로 죽으셔서 우리의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구속을 위한 중보자가 되셨습니다. 창조는 육신을 입으시기 전에 ‘아사르코스’(asarkos)의 상태에서 중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 다음 부활하신 후에는 ‘아센수스’(ascensus)입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되는 것입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기 전의 그리스도와는 다릅니다. 인성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육신을 입으신 예수와는 다릅니다. 그때 육신은 불완전한 육신이어서 배고프고 추위를 타는 한계를 가지신 육신이었는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런 것을 겪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모든 만물들을 통치하고 계신다는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mediator'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세계를 창조, 구속, 마지막으로 완성하실 때까지 모든 과정을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모든 경륜들을 이루게 하셨다는 데 중보, 혹은 중재자의 중요성이 있는 것입니다.
표에 나오는 것처럼 육신을 입기 전에 그리스도가 바로 창조의 중보자, 혹은 중재자입니다. 그분이 바로 로고스였다는 말입니다. 로고스가 하나님 안에 있는 모든 창조 세계에 대한 관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이 세계가 창조된 것이지 창조된 세계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마음 안에 있는 창조 세계에 대한 관념들은 하나님이 먼저이고 관념이 나중이지만 그 관념은 영원하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무 생각도 없다가 어느 한순간 바깥에서 생각이 들어왔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창조세계는 유시(有時)하고, 시원(時源)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세계에 대한 관념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다고 봐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창조의 영원한 관념이 바로 로고스이고, 그 로고스가 바로 육신을 입기 전의 성자이시다.” 이렇게 해석을 하는 것이 신학의 기본적인 입장입니다. 성부는 모든 창조세계의 원천이시고 성자는 하나님 안에 있는 관념들을 실제로 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 실제 하게 하시는 'arranger'이십니다. 직접 그것들을 정돈해서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을 시간과 공간 속에 있게 하신 중보자이시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될 것입니다.
창조의 중보자, 구속의 중보자라고 하는 것이 구속의 중보자의 개념으로, 피 흘리고 죽는 것들을 통해서 창조도 이루어졌다는 식으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모든 창조세계는 성자 없이 하나님 안에 생각으로 존재한 적도 없고, 그리스도 없이 시간과 공간 속에 태어난 적도 없고, 성자 없이 시간과 공간 안에서 지탱된 적도 없고, 그리스도 없이 이 모든 것들이 구속된 적도 없고, 성자 없이 모든 것들이 완성된 적도 없고, 영원 세계에서도 성자를 통해서 이 모든 것들은 지탱된다는 것입니다.
아까 이야기한 것과 똑같은 생각의 오류인데, 구속에 있어서 중보라는 개념을 창조에서의 중보, 혹은 중재의 개념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구속에 있어서 중보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는 완전한 단절이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제사장으로서 당신 자신이 헌제자가 되고 동시에 헌제의 제물이 되고 동시에 제사장이 되어서 자기 몸을 영원히 산제사로 우리를 위해서 드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창조에 있어서 중보자, 혹은 중재자라는 개념은 그런 개념이 아닙니다. 성자에 의해서 하나님 안에 있는 영원한 관념들이 성자를 통해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생겨나게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 육체를 입고 존재합니다. 육체도 무엇인가에 의해 지탱이 되어야 합니다. 영혼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영혼도 무엇인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지는 생명이 있고 지탱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구속에 있어서의 중보가 특이한 이유는 인간이 이러한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육체에는 죽음이 침투하고 영혼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져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하고 망가진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통할 수 있는 여지가 죄 때문에 없어져버린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는 고난을 통해서 중보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지금과 같이 타락한 죄인이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 앞에 나간다는 개념이 없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질문은 그런 식으로 설명하면 안 되고, 죄인들이 구속받는 방식으로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 아닌 방식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칼빈이 기독교강요에서 중보를 구속과 관련해서만 한정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중보자직이라는 것이 목사님이 만든 새로운 용어가 아니냐고 생각을 합니다. 아까도 설명했지만 중보 혹은 중재의 의미는 창조, 구속, 완성, 영원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각각의 차원들은 각각 중보, 중재라는 의미를 각각 약간씩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책이 하나 보입니다. 이것이 지금 총신을 은퇴하신 서철원 교수님의 박사학위논문입니다. 화란 자유대학에서 받은 박사학위 논문인데 이 논문은 유럽에서 쓰여진 100대 신학논문 중 하나입니다. 유럽학생들도 받기 힘든 'cum laude'라는 최우등으로 뽑힌 논문입니다. 스페이커르 교수님이 30여명을 넘는 사람을 지도했지만 한사람 밖에 배출을 못했습니다. 그렇게 대단한 논문입니다. 박사학위논문 목차를 보면, 아브라함 카이퍼, 'The Eternal Word'(영원한 하나님의 말씀), 'the Mediator of Creation'(창조의 중보자), 이렇게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본문을 보여드리겠습니다. 'The Son: the Mediator of Creation' 그러면서 쭉 나옵니다. 이것은 제가 만들어낸 새로운 교리, 새로운 용어가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기억하시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머리라고 할 때 언약과 관련해서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두 개의 대표적인 머리가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아담이 머리가 되고 그 다음에 두 번째 아담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머리가 됩니다. 첫 번째 아담은 언약을 파기함으로서 죽음이 들어오고 두 번째 아담은 그 언약을 지킴으로서 율법을 성취해서 생명이 들어오게 합니다. 그래서 언약적으로 아담의 실패한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언약을 다시 수립하여 새 언약의 시대로 접어들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신다는 사상이 바로 그런 것입니다.
(질문3) 그리스도가 창조의 머리되신다는 것을 우리는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답변) 우선 성경의 가르쳐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 만물이 창조하실 때 머리이시라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성경이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영광스러운 존재이시라는 것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소위 이야기하는 ‘에스겔렌띠아 크리스티’, ‘그리스도의 탁월성’이라고 할 때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존재로서 온 땅과 모든 만물 위에 초월해 계신 영광의 왕입니다. 그렇게 보면 영광스러운 왕이신 그분이 당신이 창조하신 세계와 아무 관계가 없다면 그것은 영광일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서 왕이 앉았는데 황금으로 만든 면류관을 쓰고 앉았습니다. 그것이 사진관에서 사진을 찍기 위한 분장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진짜 금의자를 갖다 놓았더라도 영광이라는 것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에게 권위가 있어서 “너희들은 이렇게 하라.” 하면 전국이 그 명령을 따라 움직일 때 그 영광이 진짜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고 영광과 존귀가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어지어다.”라는 찬양이 진실한 찬양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과 모든 만물들에 대해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높은 곳에 계시고 모든 만물들이 그 아래 복종하고 그분의 뜻이 모든 만물들에 의해 실현된다는 연결 구조를 가지고 있어야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영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은 공부를 아주 많이 했지만 그런 경험을 못한 사람보다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훨씬 더 직접적인 이해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질문4) 천사도 도덕적인 피조물인데 천사가 타락하였을 때는 만물이 흩어지지 않았고 인간이 죄를 짓자 만물이 흩어진 이유가 무엇입니까?
(답변) 하나님은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를 창조하십니다. 천상세계와 지상세계는 거울처럼 모든 실체를 마주보는 것 같은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상세계를 창조하셔서 직접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천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일부가 타락했고 하나님에 의해서 제압이 되었습니다. 천상 세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다스리라고 주신 세계가 아닙니다. 그러나 지상 세계는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셔서 인간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기계적인 노예로서 세계를 맡기신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그 지위가 어느 정도냐 하면 당신의 대리자로 맡기신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영혼을 가지고 지상에 있는 존재이지만 천상세계를 알 수 있는 유일한 피조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천상의 하나님과 생명적인 교통을 누림으로서 천상 세계의 영향을 받고 또 천상의 세계를 향해서 자신의 지성과 의지에 있는 생각들을 하나님께 전달하고 교통할 수 있는 특권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위대한 존재로서 천사의 지위도 인간에게는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늘나라에서 천사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종들에 불과합니다. 지상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그런 존재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대신해서 다스리게 하셔서 통치권과 모든 것들을 위임하셔서 하나님처럼 자기 결정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경배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하셨습니다. 기계처럼 다루시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을 이해해서 그 뜻을 펼칠 수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존재의 타락이 세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천사들이 타락했기 때문에 만물이 흩어질 이유는 없었지만, 인간이 죄를 짓자 만물들은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된 인간의 중심성, 존재의 존엄과 가치, 위대함, 이런 것들을 보여줍니다. 결국은 모든 만물들이 회복되는 것도 인간들이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지, 하늘에서 천사들에게 변화가 일어난다고 되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거기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보게 됩니다.
(질문5) 그리스도를 만물의 머리로 삼으신 것과 인간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은 어떤 관련성으로 이해해야 합니까?
(답변) 사람들이 헷갈리는 이유가 무엇이냐 하면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리스도도 영이십니다. 교회를 이루고 있는 신자들은 영적인 존재입니다. 불신자와는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살아있는 영을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영이신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살아있는 영을 받은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영적 관계는 매우 독특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 나와 있는 사람들이 불신자들인데 불신자들은 교회와도 접붙여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리스도와도 접붙여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세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회개하고 뉘우치고 돌아와서 그 생명에 연합될 가능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 개념과 연결되는 것입니다.
루터파에서는 인간이 타락함으로 하나님이 인간에게 본래 주셨던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상실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개혁파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루터파는 너무 비관적이고 카톨릭은 너무 낙관적이고 개혁파는 중도를 취합니다. 만약 카톨릭의 견해를 취해서 건재하다고 이야기하면 인간이 충분히 하나님을 찾아갈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계시가 얼마나 필요한가? 그리스도의 중보,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 이런 것들이 모두 다 훼손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루터파처럼 나아가면 무슨 문제가 됩니까? 타락한 인간은 짐승과 구별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잃어버렸는데 그 사람들을 존귀하고 존엄하게 대해주어야 할 근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그런 인간관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칼빈 같은 경우에는 그런 극단적인 해석을 자제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여전히 인간이 영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담지하고 있고 그것은 대단히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할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인간이 범죄를 저지르고 인간 이하의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그는 존중히 여김을 받아야 할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좁은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교회의 머리이실 뿐입니다. 더 넓게 보면 모든 인류의 머리이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방의 작가들도 무엇이라고 합니까? 우리 모든 인간은 신의 소생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로마서에서는 “하나님을 알만한 것들이 사람들 속에 있다”라고 합니다. 세멘스 렐리기우니스, 종교의 씨가 있다. 센스 드 디브니따띠스, 신의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인간은 자연세계와 구별이 됩니다. 그러나 영적인 연합을 이루는 고유한 의미에서 그리스도는 오직 머리일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들 중 어느 정도는 잠재적으로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과 연합을 이루고 나머지 사람들은 멸망에 처해질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불신자들과 그리스도가 맺고 있는 관계는 직접적인 의미에서는 영적인 관계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자연세계와 맺고 있는 관계와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들을 통치하시지만 영적인 면에서 보면 고유하게 이 사람들과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고 영적인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세계와 그리스도가 영적인 연합을 갖는다고 이야기하면 오리겐이 이야기하는 영지주의적인 요소가 뒤범벅된 소위 범신론적인 입장으로 기울어질 가능성을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의 머리가 되신다고 할 때 그것은 이 모든 세계를 통치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모든 세계를 통치하지 않으신 적은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죄를 짓고 하나님이 자연세계를 벌주심으로써 하나님이 만물의 지정하신 그런 온전한 조화와 균형, 완전함, 이런 것들을 자연세계가 상실하도록 내버려 두셨습니다. 그런 점에서 결함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존재의 결함들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구원받을 인류들을 모두 구원하셔서 영적으로 연합시키신 후에 이 모든 피조물들을 원래의 선함과 아름다운 상태로 회복시키셔서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때 모든 만물들이 완전한 쉼과 행복의 상태로 돌아가게 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자연 세계의 머리되신다고 하는 것을 교회의 머리되시는 것 같은 영적인 연결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질문6) 구속은 만물을 모으시기 위해 먼저 인간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로 모으시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현재”, 인간이 그리스도의 머리되심 아래에 모이는 것이 인간 이외의 다른 피조물들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것입니까?
(답변) 시간적인 순서를 가지고 이야기해보겠습니다. 그리스도가 계시고 인간이 있고 그 다음에는 만물들이 있습니다. 어떤 식으로도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는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결국은 타락이 들어오면서 인간들이 전부다 흩어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만물들도 역시 흩어집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를 가져옵니까?
지금도 장마입니다. 비가 와야 하는데 안 옵니다. 어떤 곳에서는 폭우가 쏟아져서 홍수가 나고, 어떤 곳은 비가 없어서 농토가 거북이 등처럼 갈라집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 모든 만물들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로부터 흩어진 상태를 보여줍니다. 이것들도 잘 해석해야 합니다. ‘인간이 타락하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어찌할 수 없이 모든 만물들이 이탈해버린 것이구나. 결국 이것은 하나님의 무능이구나.’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 징벌적인 의미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땅이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사람이 잘못했습니다. 그런데 땅과 인간은 하나의 운명 공동체처럼 창조가 된 것입니다. 히브리어에서 땅을 의미하는 단어가 있는데 ‘에레츠’라는 단어입니다. 공교롭게 ‘에레츠’라는 말에 ‘땅’이라는 뜻도 있고 ‘사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 땅에 사는 거민도 땅, 에레츠라고 부릅니다. 운명공동체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영적인 관계가 깨어진 것이 흩어짐이라면, 그것으로 인해 도덕, 악들이 들어옵니다. 하나님을 몰라보고 이웃을 몰라보고 자기를 몰라보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데서 온갖 방탕이 생겨나고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신처럼 떠받들고 행복해지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 깨어지고 찢어지게 됩니다. 똑같은 일들이 자연세계 속에서 일어납니다. 질서, 조화, 균형, 이런 것들이 깨어집니다.
기상학에 관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어떤 때는 엄청 춥습니다. 이상한파라고 합니다. 미국 같은 곳에서는 차를 타고 가다가 얼어 죽기도 합니다. 어떤 날은 겨울에 파카가 안 팔릴 정도로 따뜻합니다. 이렇게 고깔모자처럼 생긴 콜드 캡이 지구 윗부분을 덮고 있습니다. 이것이 일정하게 유지되어야 하는데 이동을 하는 것입니다. 콜드캡이 씌워지는 위치에 변화가 생깁니다. 그러면 여기는 따뜻해야 하는데 갑자기 한파가 밀어닥치고, 여기는 눈이 오고 추워야하는데 봄 날씨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균형과 조화가 깨져서 인간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자연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저지르는 악은 도덕악이라고 합니다. 이런 것들은 결국 만물이 흩어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세 번째, 구속이 들어오게 됩니다. 구속을 받습니다. 구속이 들어오면 그리스도께로부터 찢어졌던 인간들 중 어떤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여전히 찢어져서 안 들어오는 인간들이 있습니다. 불신상태의 인간입니다. 반대로 이 경우는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인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올바른 신학을 배우고 성경을 배우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합니다. 그러면 자기가 온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고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만 있고 이웃만 있는 것이 아니라 피조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피조세계와 관계를 맺게 됩니다. 예전에는 이런 개념이 없었습니다. 물질문명이 발달하니까 ‘얼씨구나 좋다.’ 하고 돈을 열심히 벌어서 사서 쓰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막 쓰는 것입니다. 그 후에 구원을 받고 창조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 깨닫게 되고, 하나님이 당신의 영광을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세계에 대한 생각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여기에 그림이 하나 있는데 연필로 그리고 낙서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보더니 “야! 너 미쳤니? 그거 피카소 그림이야.” 그러면 깜짝 놀랄 것입니다. 한 장에 1000억입니다. 지우개로 지우고 “손대지 마.” 그러고 보관할 것입니다. 창조 세계가 그런 것입니다.
소의 평균연령이 15년에서 25년 정도, 길면 30년까지 삽니다. 그러면 젖소의 생존기간은 3년에서 4년입니다. 3~4년 만에 죽습니다. 우유를 짜려면 소가 계속 임신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새끼를 낳고 바로 접붙여서 바로 새끼를 갖고 새끼를 낳습니다. 정상적으로는 소는 상당 시간이 흘러야 가임 할 수 있는 소가 됩니다. 그런데 성장촉진제를 넣어서 금방 새끼를 가질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젖이 많이 나오도록 약품을 씁니다. 그렇게 소의 몸에 변형이 옵니다. 그 상태에서 몸이 완전히 망가지다가 3~4년이 되면 소가 일어서지를 못하고 주저앉습니다. 그러면 죽기 직전에 육우로 팔아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전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들어오기만 하면 스위치를 켜서 환하게 밝혀놓습니다. 그러니까 원전을 짓자고 하는 것입니다. 원전이 후쿠시마에서 터져서 난리라 났지만 시뮬레이션에 의하면 포항에서 원전이 한 개만 터지면 350km가 오염된다고 합니다. 한강 이북과 제주도, 전라남도 서쪽해안을 빼놓고는 전부 오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원전을 자꾸 짓자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반대주의자입니다. 제가 원전반대를 위해서 데모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전기세를 싸게 받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지금의 전기세의 4배는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도 지금처럼 전기를 사용하면 50만원씩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밥해먹고 기본적으로 생활하는 것은 거의 돈을 안내도, 그것보다 조금 더 호사스럽게 불을 켜고 살려면 상상할 수 없는 금액이 나오게 해야 합니다. 그것이 유럽에 있는 나라들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원전을 짓지 않고 오히려 원전을 해체하면서도 버티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인간이 구속되면서 창조 세계도 관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우유를 먹지 말라는 이야기는 안 나오지만 하나님이 창조하신 성경 전체의 정신을 놓고 볼 때 하나님이 창조하신 젖소를 그런 식으로 학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좋아하는 닭 가슴살, 그것도 인터넷에 들어가서 ‘음식 주식회사’(Food Inc)라고 하는 다큐멘터리를 보십시오. 정상적으로 닭으로 양육되려면 75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는 수지타산이 안 맞습니다. 촉진제를 놓아서 45일 만에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키우는 것입니다. 닭 가슴살이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고 비싸게 팔리는 부위입니다. 조작을 해서 가슴만 커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화면에서 보니까 병아리가 걷지를 못합니다. 가슴이 커져서 앞으로 자꾸 고꾸라집니다. 고꾸라진 상태에서 계속 사료를 먹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들을 그런 식으로 학대하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KFC에 있던 사람이 쓴 책에 보니까 닭을 채 죽이지도 않고 털을 뽑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다 증언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위로하는 말이, 닭은 고통을 못 느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 것이 어디 있습니까? 지각이 있는 동물은 두려움 같은 감정을 느낍니다. 그러니까 만물의 머리되심을 제대로 이해하면 자연세계를 다루는 것 자체가 달라져야 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입니다. 모든 것들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만물의 회복을 위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환경윤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4대강 공사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측면도 있겠지만 자연이라는 것은 가능한한 조금씩만 손대고 최대한 그대로 두어야 자연입니다. 수많은 부작용들이 일으키고 8조원이 빚더미가 되어서 매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세금 폭탄으로 떨어집니다. 손을 댔더라도 최소화했어야 합니다. 그래서 환경을 파괴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 것을 보면 속에서 분노하게 됩니다. 내가 예수님 안 믿고 다시 머리되심의 교리를 몰랐더라면 그렇게까지 분노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너무 자연을 학대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총체적인 사고 속에서 살아야 합니다.
(질문7) 지상 세계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말은 이해가 되나 천상 세계는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시는데 화해된다고 하는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변) 성경은 십자가의 보혈로 만물 곧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이 화목을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말합니다. 제 이야기가 아니라 골로새서 1:20에 나오는 성경 구절입니다. 하나님이 세계를 창조하시는데 천상세계와 지상세계가 서로 구분되지만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예를 들면, 구속언약 같은 것도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언약인데 그 언약이 지상세계 속에서 실현됩니다. 그리고 다음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와도 연관관계를 갖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화목으로 말미암아 이 모든 지상의 세계의 모든 만물들이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그렇게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화목하게 되신 것이 천상의 세계에서도 영향을 끼쳐서 천상 세계와 지상 세계 사이에 완전한 하나님의 통치가 실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보혈이 땅에 있는 것이나 하늘에 있는 것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8) 신약의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렇다면 구약의 교회에서도 그리스도는 머리이셨을 텐데 구약의 교회에서의 머리되심은 어떻게 드러났습니까?
(답변) 구약에서의 영원한 언약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구속하십니다. 한사람 한 사람이 오실 메시야를 바라보고 구속을 받게 됩니다. 구속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영적인 연결을 갖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속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를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구원이 실제화 됩니다. 성령이 오심으로써 모든 것들이 완전한 영적인 연결을 이루고 그리스도의 교회의 몸이 됩니다. 구약에도 구원이 있고 구약에도 교회가 있지만 신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생생한 영적인 실제는 구약의 사람들은 아직 못 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을 가리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눅 7:28) 그것이 세례요한보다 위대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광스러운 연합, 영적인 축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질문9) 그리스도가 다시 머리되심으로 처음 위치를 회복하셨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시 머리되심으로 처음 머리가 되셨을 때보다 그 위치와 영광이 더 높아지셨다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까?
(답변) 그리스도는 항상 머리이셨습니다. 모든 인류의 머리이시고 창조의 머리셨는데 그리스도가 낮아지고 높아지는 이동을 한 것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떨어져나간 것입니다. 먼저 인간에 관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구약시대의 제사와 메시야에 관한 약속과 인간의 죽음을 유보하시는 축복을 통해 하나님과의 한시적인 교통의 길을 열어주시고 구원의 여망을 주십니다. 그래서 부분적으로 생명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에 의해서 충만한 생명이 들어오게 됩니다. 흩어졌던 것들이 그리스도께로 다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높아지고 낮아지시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의 핵심은 “창조의 머리이실 적에는 그리스도가 그렇게 영광스럽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구속을 통해서는 그리스도가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입니다. 인간이 죄를 짓고 모든 만물들이 흩어지게 되었지만 만물이 찢어지고 흩어진 것이 오히려 모으는 과정에서 하나님이 당신의 위대한 사랑과 능력, 영광, 은혜, 이런 것들을 보여주는 도구가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창조 시에 그리스도가 저녁에 빛나는 별처럼 보였다면 구속의 때에는 캄캄한 하늘에 빛나는 별이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타락을 오히려 하나님이 창조의 목적을 인간들에게 알리시는 위대한 기회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타락한 것 매우 잘못된 것이지만 인간이 그 죄에서 돌이켜 처절하게 회개하는 과정에서 깨닫게 되는 하나님의 가슴 저미는 사랑,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애틋한 애정, 완전히 타락하고 망가진 인간도 버리지 아니하시는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사랑, 이런 것들은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으면 알 수 없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질문10) 빌 2:9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에 뛰어난 이름을 주셨다고 하시는데 이 말씀은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답변)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창조의 머리가 되십니다. 모든 창조의 머리가 되시고 인간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그것이 ‘아사르코스’(asarkos)의 상태입니다. 그분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십니다. 육신을 입으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구속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자기를 헌신하십니다. 그리고 우리 마지막에 죽기까지 복종하사 십자가에서 죽으십니다.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이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을 입고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과 동등하셔서 더 높아질 수가 있습니까? 어디까지 더 높아집니까? 그러나 높아졌다고 하는 의미를 어디에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안에서 보면 예수님은 더 높아지실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를 아무리 영화롭게 하셔도 그렇습니다. 피조세계 입장에서 보면 아사르코스의 상태, 육신을 입기 전의 성자는 사람들이 모릅니다.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을 입고 오셨습니다. 눈에 보입니다. 그런데 비천한 모습입니다. 훌륭하신 랍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 때 피조물들이 알 수 없었던 아사르코스 상태의 성자와 육신을 입고 오신 그리스도와 비교를 해볼 때 그분은 어마어마하게 높아지신 분으로 우리에게 인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시적인 피조물들이 자신들의 비천함과 비교할 때 위대한 영광이지 그것이 새롭게 주어진 영광이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빌 2:6a)라고 했는데 어떻게 더 높아지냐는 것입니다. 피조물의 영광과 비교할 때 그렇게 탁월하게 높아지신 것이라고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아사르코스 상태에 있을 때 육신을 입기 전의 그리스도는 볼 수 없었는데 육신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지 못했지만 성경의 기록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이 모든 만물 위에 뛰어나셔서 부활하시고 인성을 가지시고 승천하시는 것을 봄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의 몸을 입으셨을 때와 비교하니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게 높으신 분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성자의 영원한 영광을 더욱 더 잘 볼 수 있도록 구속의 사업의 성취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탁월하게 높아지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성자의 지위는 더 높거나 낮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을 입고 이 세상에 비천하게 내려오셨을 때도 성자의 신성은 편재하기 때문에 삼위일체 안에 영광을 그대로 가지고 계시면서 육신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늘에도 모든 세계의 초월하는 존재로서 성자는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의 몸을 오셨으니까 하늘의 보좌는 비워졌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하늘의 삼위일체가 빠져서 잠시 이위일체가 되었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신성은 모든 만물 위에 충만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은 제한 없이 무한하시고 인성은 제한이 있으신데 제한된 인성을 입고 내려오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비천해보일 때도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 너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신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시므온과 안나가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히 탁월하신 위대하신 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질문11) ‘재창조’라는 말은 흔히 신자 개개인의 거듭남을 지칭할 때 사용하였는데, 본문에 나오는 ‘재창조’라는 말은 세계의 완성(종말)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둘 사이를 어떻게 이해하면 될까요?
(답변) 둘 다 사용합니다. 우주적인 재창조와 개인의 재창조, 개인의 재창조는 그리스도 없이 죽은 자 되었던 영혼이 다시 중생과 회심을 통해서 다시 깨어나서 생명과 성령의 법이 원리로서 심어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우주적인 재창조는 이러한 일들이 구원받을 모든 인류와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총체적인 갱신의 형태로 일어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종말도 두 가지입니다. 개인적인 종말은 죽는 것입니다. 우주적인 종말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계를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도 인간을 우주 전체와 조화를 이루고 있는 한 부분이라고 보지, 그것과 단절된 단자로서 인간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질문12) 그리스도께서 다시 머리가 되실 때 인간이 이루어 놓은 문명과 문화가 사라져서 폐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건재하여 지금보다 더욱 더 발전을 거듭할 것이라고 주장을 개혁주의 종말론의 교리로 받아들여도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이 천국으로 변한다는 말입니까?
(답변)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교역자 스터디에서도 이야기했는데 성경에 보면 불에 타서 없어지고 그 다음에 하늘의 별들이 떨어지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결국 이 세계는 파괴되는 것이 아니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류는 아닙니다. 그런 해석은 잘못하면 신학적으로 위험합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는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더럽혀진 것은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인간이 더럽히고 망가트렸다면 그것의 본래의 선하고 아름다운 상태를 하나님이 회복하셔서 당신이 창조하신 선한 세계를 지속적으로 보존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는 것일 것입니다. 인간이 더럽혔기 때문에 파멸시켜버린다고 한다면 그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 됩니다. 그러면 하늘의 별이 떨어지는 것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말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전에 일어날 재앙의 징조를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보고, 별들이 떨어지고 하늘의 천체가 떨어지는 것들은 주석가들이 하나의 상징으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위, 권력자들, 이런 사람들이 떨어지는 것으로 묘사한다고 봅니다. 종말론적인 묵시 문학에 관한 것들은 상징적인 해석을 조금 더 조심스럽게 해석을 해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창조된 세계가 완전히 단절되고 파괴된 상태에서 하나님이 새롭게 창조하신다고 한다면 그대로 유비를 따져서 인간의 재창조도 동일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에 내가 죄를 지었다면 파멸해 없애버리고 재창조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망가진 인간을 고쳐서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창조세계도 그럴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들이 확신할 수 있는 것은 그 세계는 지금과는 비교되지 않는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세계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든 문명이 완전히 파괴되어서 없어져버리고 완전한 자연의 상태에서 아담과 하와의 시대처럼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우리가 이루고 있는 문명과 연속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신 그 때가 되면 젖소를 약탈해서 피고름을 짜먹듯이 우유를 빨아먹거나 주사를 맞고 앞으로 쓰러지는 닭고기의 가슴살을 먹고 사는 세상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닭과 모든 피조물들이 함께 행복하고 만족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에 따라서 견해가 다릅니다. 장소 이동을 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고, 이 세계가 새로워질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천문학자들의 이야기를 인용하면 20억년 후에는 안드로메다와 우리가 속한 밀키웨이가 합쳐서 밀코메다가 된다고 합니다. 서울대 천문학과 과장으로 있는 교수님과 이야기를 해보니까 두 개가 합쳐지면 별들이 충돌을 하고 불벼락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수 천 억 개의 별들이 있는 두 개의 은하가 만난다고 하더라도 별과 별이 부딪힐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합니다. 별 사이가 워낙 멀어서 수 천 억 개가 엉킨다고 하더라도 직경 자체가 수십만 광년의 덩치를 가지고 엉키는 것이기 때문에 부딪혀서 만날 확률은 희박하다고 합니다. 지구와 달 사이의 거리도 383000km이고 지구 반지름은 6400km밖에 안되는데, 그것이 부딪힐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땅이 계속 영원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뭐라고 단정적으로 이야기할 수는 없지만 이것은 분명합니다. 개혁신학에서는 ‘토포스’(τόπος)라는 단어에 주목합니다. 장소, 처소입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요 14:2) 할 때 토포스라는 것이 공간을 가진 장소라는 것입니다. 관념이나 이상, 판타지 속에 있는 가상현실이 아니라 실제로 공간을 가진 장소성이 있는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것은 개혁신학에서 합의를 봅니다.
(질문13) 그리스도가 다시 머리되시는 교회의 완성의 날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서 앞당겨질 수도, 늦춰질 수도 있습니까?
(답변) 우선 이 말은 조금 어패가 있는 것이 그리스도가 머리되실 날이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모든 인류가 모두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받을 사람도 있고, 혹은 구원 못 받을 사람도 있는데 구원받을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가능성 있는 개연으로만 남는 것입니다. 그것들이 모두 실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모두 실현이 되면 교회가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될 사람들은 영원한 멸망 속으로 들어가고, 모든 구원 받은 인류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완전한 연합을 이룬 상태가 됩니다. 문제는 신자들이 모두 성화되어서 완전한 존재는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결을 가지고 있어도 그리스도의 머리되심이 전적으로 복종하고 있습니까? 안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아침에도 기도하면서 회개하는 것 아닙니까? 어떤 때는 빤히 알면서도 안합니다. ‘나는 그렇게 하기 싫다.’ 그리스도만 사랑해야 하는데 안하려고 합니다. 그런 부분이 인간의 성화의 노력에 의해서 완전히 성취가 안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께서 주권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모두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완전에 이르는 것이고, 그것을 동방 교부들이 신화 상태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신화라기보다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주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이루게 되는 것을 영화라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머리가 곧 모든 인류의 머리가 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때는 교회와 이 세상의 구별이 다 폐기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된 형태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아래 있는 모든 피조물들의 저주도 풀리게 됩니다. 그러면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받을 해를 두려워하거나 혹은 자연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행복을 도모하는 모습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환경을 다루는 것은 미친 짓입니다. 일회용 쓰레기를 한없이 사용해서 태평양 한가운데 한반도의 몇 배가 되는 어마어마한 플라스틱이 바다 밑에 일정한 수위를 두고 뭉쳐서 돌아다닙니다. 그것이 다 분해되어서 물고기가 먹고 그것을 작은 물고기가 먹고 큰 물고기가 먹어서 모든 바다가 오염됩니다. 이런 식으로 사는 것이 정상적인 형태냐는 것입니다. 전기를 싸게 쓰기 위해서 후쿠시마 원전에서 오염된 물들을 바다에 퍼부어서 모든 고기들을 다 오염시켜 먹지도 못하게 만들면서 이러한 재앙이 언제 끝날지도 모른 채 이어지는 일들이 과연 행복한 삶이냐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만물들의 머리가 되셔서 구속이 완성되는 그날이 인간의 수고와 노력에 의해 앞당겨질 수도 있고 늦추어 질 수도 있느냐는 질문이지요? 이렇게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작정이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이 X년도에 이 세계를 모두 완성시켜야겠다고 했는데 인간들이 열심히 전도해서 X-3년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얘네들이 열심히 했네. 할 수 없이 완성시켜야겠다.’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천적인 측면에서는 모든 경건했던 사람들은 그런 신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우리가 열심히 전도하고 온전히 헌신된 삶을 살면 하나님의 나라는 앞당겨질 수 있다.’ 이런 믿음을 가져야지만 선교의 열심을 내지, ‘주님의 뜻대로 언제 하실 텐데.’ 그러면 전도하겠습니까? 앞당길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살아야 할것입니다.
(질문14) 신자의 ‘신화’와 ‘영화’는 어떤 관련성이 있습니까?
(답변) 좋은 말도 사람들이 자꾸 잘못 사용하면 우리가 피해야 하듯이, 신화라는 말도 사실은 좋은 말이고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사용을 안 했는데 ‘사람들이 하도 이 말을 잘못 사용하니까 나는 잠정사용중단하자.’ 저는 이런 주의입니다. 신화의 과정은 이렇습니다. 제일 먼저 ‘카타르시스’(catharsis)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앞에서 정화하는 과정입니다. 그 다음에 ‘테오리아’(theoria), 죄와 모든 정욕의 잡념으로부터 지성이 정화되는 것입니다. ‘테오리아’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생각이나 어떤 진리들을 방해 없이 맑은 지성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겨나는 것이 ‘테오리아’입니다. 마지막 단계는 ‘테오시스’(theosis)입니다. ‘테오스’는 ‘신’이고 ‘테오시스’는 ‘신화’ 된다는 것입니다. ‘신화’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합니까? 'deification', 'deify'에서 온 것입니다. 'deity'는 ‘하나님의 신성’입니다. 우리가 신화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한 덩어리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 부여된 하나님 닮음을 온전히 회복하는 것을 ‘테오시스’, ‘신화’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것을 베드로 사도가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신화의 상태는 영화의 상태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입니다. 머리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모든 만물의 온전한 머리가 되실 그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에 포함되는 것은 성화의 과정입니다. 성화는 인간이 협력해서 이루어지지만 결국은 마지막에 인간이 못 이루는 것을 하나님이 영화라는 방법으로 일시에 그 성화를 완성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신화의 과정 속에 들어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화는 성화의 과정 끝에서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완성해 가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