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29일 교직원예배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요 19:17).
이 부분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직전, 못 박하시기 직전의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제 제일 먼저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결국 하나님은 당신의 하늘의 뜻을 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시는데 그 이루시는 하나님의 일은 사람들의 희생과 고난에 가득한 수고를 통해서 이루시는 것이죠. 하나님이 당신의 하늘 뜻을 이루심에 있어서 당신이 직접 영원한 지혜 속에서 구속에 관한 경륜을 계획하셨지만 당신 홀로 이 일을 이루시지만 사람을 이 구속의 사역을 이루는 역사에 동참하게 하시고 사람만 동참하게 하실 뿐만 아니라 당신 자신이 성육신의 형태로써 이 위대한 구원사역에 함께 참여하시는 이유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이 위대한 일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목회를 하다보면 은혜를 안 받았다고는 말할 수 없는데 이렇게 반질반질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은혜를 받았어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마치 공의를 피하여 미끄러지는, 절구에 넣어서 빻아지지 않는 곡식과 같이 그렇게 삐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된 특징은 뭐냐 하면 주님을 위해서 자기의 마음을 다 드려 헌신한 적이 없다는 것이죠. 주님을 바르게 잘 섬기면 자신도 반드시 변화되게 됩니다. 그 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일을 하는 동안에 마음을 하나님 앞에 쏟아놓을 때에 교통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한 시대를 뒤흔드는 위대한 설교자라 할지라도 한 교회의 마룻바닥을 쓸고 있는 그런 봉사자들만도 못할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일이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관계하고 있는 하나님이 그를 변화시키시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이 위대한 사역에 참여하게 하실 때에 모든 사람들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당신의 십자가를 지고 하나님이 이루려고 하시는 이 구속의 대업에 참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그랬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대로 예수님이 행하신 것이죠. 주님이 제자들에게 친히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좆을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추종하는 삶이야말로 예수님이 강조하셨던 삶이고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기에 앞서 당신 자신이 친히 모본을 보인 것이죠. 주님의 일을 하면서 고통이 오고 괴로움이 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생명에 참여하게 하시는 훌륭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느 인간을 끝까지 사랑하려고 할 때에도 사랑의 달콤함과 함께 의무의 무거운 짐, 또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의무를 피할 수 없는 희생과 고통이 따르게 되고 그런 남다른 희생과 고통 속에서도 그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이 사랑의 특성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어떤 한 사람을 사랑할 때에 한없이 행복하고 기쁜 감정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 이어져온 희로애락의 수많은 순간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어요. 내가 진정으로 사랑한 사람이 나를 분노하게 하고 내가 진정으로 분노했던 사람만이 사실은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려고 했던 사람이지요. 이렇게 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가지고 있는 기억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기억보다 훨씬 더 큽니다. 관계가 없는 사람들과 10년을 지낸 기억보다는 사랑의 관계 속에서 한 달을 지낸 사람에 대한 기억이 더 많고 그 기억이 회상될 때에 수많은 정동들이 우리의 마음속에 자주 일어나서 이성으로는 끊어지고 헤어져야 되겠는데 감정으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또 감정으로는 식어질 때가 있어도 이성으로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끊지 못하는 것이 사랑이 가지고 있는 숙명적인 연결이에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게 하시는 것은 당신과의 이런 사랑의 특성을 잘 이해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깊이와 넓이는 그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깊이와 넓이에 정확하게 비례합니다. 비록 그가 천사의 말을 입에 달고 온유한 미소를 그 얼굴에 가득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가 주님을 얼마나 깊이 만났는지는 그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얼마나 오래 참는지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의 말에 달린 것이 아니라 능력에 달린 것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은 사랑의 능력인 것입니다. 모든 은사와 그리고 다른 모든 특별한 하나님의 재능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모든 좋은 특징들은 그것이 기독교 신앙과 경건에 한 부분을 이루지만 사랑은 그 모든 것들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파리는 가지와 다르고 열매는 꽃과 같지 않지만 땅속의 뿌리로부터 빨아들여 남은 구석구석에까지 모두 퍼지는 그 나무의 진액은 동일하게 잎이나 줄기나 뿌리나 열매나 꽃잎파리 모두에게 스며들어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처럼 그런 관계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어떤 자연적인 은사는 이파리일수도 있고, 또 어떤 영적인 은사는 꽃일 수 있고, 또 어떤 영적인 은사는 열매일수 있습니다. 모양은 각각 다르나 그 모든 것들의 생명의 근원은 보이지 않는 나무의 진액인 것처럼 그렇게 보이지 않는 사랑이야말로 그 모든 기독교적인 생명의 진액이 되는 것이에요.
제가 잘 안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꽃을 선물 받았을 때 벽에 거꾸로 걸어두는 것입니다. 거꾸로 걸어두면 물기가 모두 내려오면서 말라요. 그러면 오랫동안 두고 볼 수 있는 마른 꽃이 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그대로 화병에 꽂아두면 그 마지막이 예쁘지를 않습니다. 시들고 꺼멓게 색이 바라고 냄새가 나고 그럽니다. 그래도 나는 그 후자로 꽃을 처리하는 것이 지극히 식물적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에게는 인간적인 것이 필요하듯이 식물에게는 식물적인 종말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왠지 가엾어요. 그래서 그대로 자기의 생명을 마지막 순간까지 다하게 하다가 죽는 것, 그것이 추해보여도 어떻게 보면 또 있는 것들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서 소멸되어지는 자의 아름다움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신앙생활이 저런 조화와 같은 신앙생활이 있고 생화와 같은 신앙생활이 있어요. 조화는 처음부터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저렇게 활짝 핀 꽃처럼 그렇게 있을 수 있어요. 그렇지만 참된 생명을 가진 나무라면 시들고, 꽃피고, 다시 열매 맺고 죽어가고 아마 저 꽃이 여기에 있는 동안의 기간이라면 수백 번도 더 그런 변화가 일어났을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똑같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어떤 때는 우리에게 충만하고, 어떤 때는 식고, 어떤 때는 더 뜨거워지고, 어떤 때는 소멸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긴장 속에 우리들이 있기 때문에 누구도 지금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의 시대가 안전하다고 말할 수 없고 누가 오늘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 때문에 주님의 은혜가 덜 필요하다고 고백할 수 없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불완전한 우리의 신앙의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우리가 의지할 분이시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자기에게 맡겨진 십자가를 지게 하십니다. 누구에게나 다 있는 십자가입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다 짊어지는 십자가는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고 어떤 사람은 잠시 그 십자가를 벗어놓고 살아가는 것처럼……. 지난 화요일인가 금요일인가 강 교수님이 오셔서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해서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점심을 먹으러 차를 타고 가면서 그런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들은 많고 매 순간순간 우리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분투하면서 살아야합니다. 노는 삶은 삶이 아닙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휴식과 그리고 노는 것의 필요에 대해서 말하지만 그런 필요에 해당되는 사람은 극히 극소수에요. 다른 사람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늘 일하는 것 같아도 늘 노는 것이고 늘 분투하는 것 같아도 사실은 마음의 진정한 분투가 없기 때문에 늘 휴식이에요.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들을 휴식의 시간을 주면 곧바로 미끄럼을 타듯이 부패하게 됩니다.
획일적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섭섭해 할지도 모르지만 저는 호주에 있는 교회에 여러 번 가보면서 그런 것을 느꼈어요. 호주장로회의 교회 같은 경우에는 법으로 목사가 의무적으로 4주, 한 달을 설교하지 말아야합니다. 그게 노회의 법으로 나와요. 무척 부러운 법이죠. 그렇지요? 우리 노회도 그런 법을 만들면 그래서 목회자가 4주 동안 강단을 비워야 되요. 그게 목회자의 의무에요. 자기네들은 그렇게 함으로써 굉장히 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반대에요. 그래서 거기에서 목회를 한 10년 하면 전 세계, 전 오스트레일리아를 안 가본 곳이 없는 것이에요. 이렇게 얘기하면 그분들은 나를 싫어하겠지만 평소의 사역도 우리가 여기에서 하는 것에 비하면 노는 것같이 해요. 그런데 무슨 휴식이 또 필요해요? 예수님도 ‘너희도 잠시 쉬어라.’ 말씀하실 때에 제자들이 어떤 상황이었는지 기억해보십시오. 주님과 함께 쉴 새 없이 분투하였습니다. 쉴 새 없이 분투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갈망이 살아있고 십자가를 지며 걸어갈 때에 그 때에 일이 너무 많을 때에 일의 멍에를 벗겨주면 시선이 활기를 얻어서 주님을 온전히 바라봅니다만 그렇습니다만, 평소의 삶이 십자가를 지고 분투하지 않을 때에 여유가 주어지게 되면 미끄러지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조금도 이상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합니다.
(찬양)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
항상 우리의 하는 일이 예수의 하신 일의 뒤를 잇는 일이라면 우리가 어떻게 항상 행복할 수 있겠으며 우리가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가 어떻게 하는 일마다 우리의 뜻대로 되는 경험을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새벽에도 좀 일찍 깨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아, 하나님이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당신이 사랑하고 당신의 마음에 기뻐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이 그를 축복해주시지만 그 축복은 십자가 없이 쉽게 일하는 축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면서도 하나님이 동행하심을 느끼게 만들어주는구나!’ 하는 것을 깨달아요. 그래서 강 교수하고 차를 타고 오면서 우리들이 최선을 다해서 주님의 일을 하면서 살지만 그러나 그것도 모두 티끌 같은 것입니다. 에드워즈를 배우면서 제가 깊은 감화를 얻고 부러워했던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삶의 모든 순간에 그는 천국을 소망했던 사람이에요. 있는 모든 것들 너머에 계신 하나님, 참으로 있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기에 진정으로 계신 분이신 그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과 갈망을 자연 속에서, 성경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삶속에서, 그리고 성경의 가르침 속에서 발견하고 그 하나님 때문에 행복해 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우리 모두 그 고백에 동참해야 된다고 말이죠. ‘내가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라고 말이죠.
두 번째는 예수님이 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에 나타나셨습니다. 이 갈보리라고도 불리는 골고다 이곳이 바로 예수님이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기로 작정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관한 모든 것은 작정되었습니다. 그를 죽일 사람들도 작정되었고, 그가 죽으실 시간도 작정되었고, 그가 죽으실 장소까지 확정되었습니다. 구약을 연구하는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이 골고다가 바로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쳤던 모리아산일 가능성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어느 정도의 진정성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성지순례도 안 해보았고 고고학을 전공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어떤 일단의 학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면 뭔가 그래도 나름대로의 근거를 가지고 얘기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어쨌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이 골고다 언덕은 주님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서있으시라고 하는 자리였습니다.
사역을 하면서 주님을 섬기면서 끊임없는 괴로움과 고통이 밀려올 때 그 때 우리는 순간순간 이 자리를 회피하고 싶은 욕망을 갖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에서 잘하는 것 보다는 주님이 원하시는 곳에서 잘못하는 것이 주님에게는 훨씬 더 훌륭한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곳에서는 잘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들이 자녀를 기른다면 자녀에게 원하는 것이 학업의 때에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인데 그 아이가 만약에 길거리에서 그 나이에 장사를 잘한다면 부모인 여러분들의 눈에는 그가 장사를 잘하기 때문에 공부를 잘하는 것보다는 훨씬 훌륭한 대안이라고 느끼겠습니까? 마음이 찢어지고 괴로움이 심할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서있으라고 하시는 그곳에서 조금 잘하는 것이 하나님이 서있기 원하지 않는 자리에서 많이 잘하는 것보다 훌륭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서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큰 힘이 들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원하는 그 자리에 사람을 두셔서 그래서 자기의 일을 감당해 나가려고 하는 사람을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을 세워주신 자리가 여기입니다. 그러니 여기에서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를 여기에 두실 리가 있겠습니까? 때로는 하나님이 우리를 죽여서 데려가시거나 헤어지게 하시거나 혹은 다른 길을 가게 하실 텐데 그러한 모든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곳에서 사명을 감당해나가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자신의 자리를 주님이 세우신 자리라고 확신하는 것, 이것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생활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에 나타나셨고 거기서 당신 자신의 사명을 다 감당하셨던 것처럼 여러분도 자기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그 자리에 굳게 서서 자기의 부르심을 감당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에는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드디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처형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하려고할 때 모든 고난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모든 고난은 대부분의 모든 고난은 사람을 통해서 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참고 견디기 힘든 고통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견고해지기 위해서는 자기의 기쁨의 근원을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수시로 변하기 때문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 뿌리를 두고 그 하나님의 아름다우심 때문에 기뻐하고 감격하는 생활을 해야 돼요. 사람은 어제의 동역 자가 내일은 방훼 군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내일은 나의 심한 원수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변함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한번 우리를 붙드신 그 손을 놓지 않으시고 우리는 주님을 배반하나 주님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주님을 향한 사랑이 식고 의무에 불성실해지는 때가 있지만 주님은 우리를 향해 그러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붙들고 매달리면 끊임없이 요동치게 되지만 주님을 붙들고 매달릴 때 수없이 요동치는 상황이 되어도 주님 때문에 강한 사람이 되는 것이죠. 그래서 너무 본질이 아니 것에 연연해하지 말고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을 붙들고 의지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주님이 크게 쓰시는 사람일수록 더 혹독한 시련을 만나게 되고 극악한 인간들의 배척에 직면하게 됩니다.
500주년이 다가오는 칼빈의 삶을 조명해보더라도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야비하고 치열한 대적하는 자들에게 에워싸여서 고난으로 가득한 일생을 살았기 때문에 그의 설교와 글이 하늘나라의 소망으로 넘칠 수 있었고 그도 역시 부패한 인간인데 그 고난의 아픔 때문에 자신의 순수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또한 하나님께 사랑을 받으면 고난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사람들을 통해서 옵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를 사랑하는 자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자는 막대하라고 말하시지 않고 오히려 주님께서는 너희가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사람을 통해서 우리에게 고난이 와도 우리는 그 사람들을 미워할 수 없고 또 미워해서도 안돼요.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람을 미워하고 싫어하는 쓴 뿌리, 내 사역에 고난과 어려움을 더해주는 사람에 대한 분노의 감정을 품으면 그 사람이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 망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우리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이 맡기신 일과는 어울리지 않는 마음이 되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우리의 섬김의 길에 끝없이 고난을 주고 아픔을 주는 사람들을 우리들은 진심으로 마음속에서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서 그래서 원수를 사랑으로 갚는 그런 사람들이 되어야합니다. 그 일은 너무 어려운 일이고 자기를 사랑하는 인간의 본성에는 화합할 수 없는 일이에요. 그래서 그 일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찬양) 주님도 때로는 울기도 하셨네! 살든지 죽든지 뜻대로 하소서
누가 나에게 왜 그런 편한 교수생활을 그만두고 교회를 개척했느냐고 물으면 나는 항상 두 가지로 답을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의지 때문이고 두 번째는 나의 의지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목자 잃은 양같이 유리하며 고생하는 양떼들을 살피시라는 의지였습니다. 그런데 내편의 의지는 그 모든 것을 수용하면서도 또 다른 곳에 기대가 있었어요. 교회를 개척하기 일 년 전에 서울에 있는 어느 교회에서 제가 전도사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이제 제가 교수생활을 하면서 전도사생활을 했는데 부교역자들이 가장 나이 많이 든 부목사가 나보다 몇 살 어렸어요. 부교역자가 일곱 명인가 여덟 명인가 되었는데 어쩜 그렇게 싸워요? 수련회를 갔는데 하여튼 교역자들이 남자, 여자 섞여서 하여튼 그렇게 험하게 싸웠어요. 그 때 설악산에서 혼자 밤길을 걸으면서 마음속에서 눈물이 났어요. 아! 참, 왜 교회가 이럴까? 왜 교역자들은 교인들에게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면서 그들은 서로를 형제로 자매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까? 그리고 어떤 상심한 부교역자들 몇 사람을 그때는 차도 안 가져와서 택시를 빌려서 설악산을 한 두어 시간 동안 돌면서 제가 위로를 해주었어요. 그 때 처음으로 내 마음속에 아주 강렬한 소원이 생겨났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정말 사랑하는 형제, 자매들과 함께 마음을 쏟을 수 있는 공동체가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어요. 그것이 교회의 개척에 구체적으로 내 마음의 시발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교회를 하고 보니까 꼭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더라고요. 오히려 교회를 안했더라면 꼴을 보지도 않을 사람들이 또 그 교회 안에 깃들여서 어떤 사람과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형제다운 아름다운 관계로 행복을 누리지만 어떤 사람을 통해서는 내가 열린 교회가 아니면 지들을 만났겠어요? 만나자고 수백 번을 문을 두드려도 내가 만나줄 사람들이 아니에요. 자기들도 나 없이 살겠지만 나도 자기들 없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사람인데 이게 교회라는 울타리가 있으니까 그 만나기 싫은 인간들도 또 만나야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내가 깨달은 것이 ‘아, 그때 내가 생각을 잘못했구나! 교회라고 서기만 하면 모두 이렇게 사랑의 뜨거운 관계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으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가!’ 생각하지요. 그래도 미워할 수는 없지요. 그래서 사랑해야 됩니다. 마음에 그런 쓴 뿌리가 남아있으면 우리의 사역에 복이 없어요. 그래서 마음을 활짝 열고 나를 때리는 자들이 나를 때릴 수 있게 하고, 나를 뜯으려는 자들이 나를 뜯게하고, 나를 비난하는 자들 속에서 주님이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배우고 오히려 나에 대한 애정이 추호도 없기 때문에 그들의 비난 속에는 진실의 요소가 담겨있을 것이라고 믿고 그렇게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주님을 의지하면서 우리의 섬김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에요.
그래서 그 즐거움의 근원을 주님에게서 발견하면서 그러면서 매일 매일 치열하게 살아가야 해요. 이 세상에서의 사역에 대한 비전이나 그리고 진리에 대한 사랑, 심지어는 영혼에 대한 사랑도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고 그분과 함께 있을 그 마음의 욕망을 능가해서는 안돼요. 그래서 강 교수님하고 차를 타고 오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매일 매일 그리워합니다.’
(찬양) 잠시 머물 이 세상 헛된 것들뿐이니 주를 사랑하는 마음 금보다도 귀하다
그렇게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날마다 앙망하면서 이 땅에서 너무 많이 쉬려고 하지 말고 그 나라에서 안식과 휴식이 달콤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그렇게 조금만 더 참고 견디고 살면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사랑과 소멸하지 않는 위로가 있을 그날을 바라보면서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