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22일 교직원예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여 힘이시니 환란중에 큰 도움이시라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든지 바닷물이 속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요동할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시 46:1-3).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오늘도 저희와 함께하여 주시옵소서. 은혜를 내려주셔서 저희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과 그리고 그 분부를 따라 살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오늘도 잠시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려고 하오니 주께서 복을 내려주시고 은혜를 허락해 주옵소서. 주님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모든 사람이 환란을 당하고 고난을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아우구스티누스가 말했듯이 행복해 지려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의 고유한 본성에 속하기 때문이지요. 그렇치만 실제의 우리의 삶에서는 끊임없는 시련과 환란 그리고 고난이 있습니다. 사람이 호흡이 없이 인간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죄가 들어온 이유로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인간들은 그러한 환란과 시련을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의 글속에서 말하기를 ‘인간이 역경 가운데 있을 때에는 순경을 만나기 위해서 애를 태우고 순경가운데 있을 때에는 그것을 잃어버리고 역경가운데 빠져들까봐 두려워하게 되나니 어차피 산다는 것이 시련 아닌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모습이지요.
박유선 목사님은 간암으로 결국은 돌아가셨는데 저는 걸려보지 않았으니까 모릅니다만은 그 간암이 암중에선 그렇게 고통이 크다고 하네요. 그래서 마지막에는 너무 아프셔서 눈을 뜨지 못하고 주님을 찾으시곤 했다고 하는데 사모님이 ‘주님 그렇게 아파서 어떻해요, 어떻해요’ 하니까 목사님이 침상에서 일어나서 두 손으로 고통가운데 침상을 꽉 붙들고서 ‘여보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든 삶이 결국은 고통이고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인데 그것을 불평한들 뭐하겠소’라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던 한 환자는 간암 말기에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자기가 아프다고 소리를 치면 가족이 잠을 자지 못하니까 이불을 잔득 말아서 입속에다가 구겨 넣고 입을 악물고 고통을 참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심한 것이 암의 고통이예요. 누가 그러한 고통에 가득찬 삶을 원하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것들을 우리에게 일어나도록 허락을 하십니다. 우리는 그 고통과 괴로운 환란이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느껴지고 마치 우리 몸에 달라붙은 더러운 벌레처럼 떼어내기를 위해서 몸부림치지만은 오히려 주님은 그것을 사용하여서 말할 수 없는 지혜와 섭리가운데 우리를 향한 당신의 거룩한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은 그런 동일한 환란을 당했던 성도의 고백을 보여주는데 우리는 여기서 환란을 당할 때 잊지말아야할 세 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선 첫째는 하나님이라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를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그리고 또 그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의 모든 계획을 주관하신다는 사실.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이라는 이 단어 속에서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어차피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의 모든 삶은 시련이 아닌 것이 없고 고통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시련과 고난으로 가득찬 인생속에서 그 자체안에서 어떤 위로를 찾으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마치 목마른 사람이 설탕물을 찾는 것이고 모래밭에서 양식을 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생각할 수 있는 지성을 주신 것이죠. 그래서 환란을 당할 때 우리는 제일 먼저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살아계시다는 것과 모순처럼 보이고 많은 고통과 무질서로 가득찬 것처럼 보여도 나의 인생이 그분의 계획 속에 있다는 것 이 두 가지 사실을 굳게 붙들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장 히브리서 11장에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그가 계신 것과 또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 것이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 그것을 굳게 믿고 나의 인생이 선악간에, 정동간에 움직이든, 흔들리든지, 고요하든지, 선하든지, 악하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그분의 주권 안에 있음을 믿어야 하는 것이죠. 이 믿음을 있으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존오웬 목사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신자의 모든 위로의 원천을 위로 계신 하나님께 두라고 우리에게 충고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자신이 그 일에 있어서 모본을 보이셨습니다. 여러 명의 자녀를 모두 앞세워 죽음으로 보내고 아내마저 잃고 <오마일령>에 의해서 추방을 당하고 사랑하는 교회를 버리고 아마 개혁신앙을 붙들지 않았더라면 대접받으면서 살 그런 귀족의 집안의 자제였는데 결국은 그런 피비린내 나는 박해를 받으면서 고난의 길을 갈 때 그는 특별히 신자안에 있는 죽음의 종식 비롯한 몇 권의 책들을 쓰면서 말할 수 없이 넘쳐 흐르는 눈물속에서 자기가 이 책을 썼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런속에서 오웬 목사님의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 보다 더 정확하게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영광을 묵상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에 되새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유일한 위로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 같아도 모두 지나가는 것이 세상에 것이지만. 하나님은 없는 것 같아도 계신 분이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우리 편에 늘 서있는 것 같지만은 언제든지 우리를 떠나가기를 마치 흐르는 시냇물이 한 장소에서 머무르지 않는 것처럼 속히 지나갑니다. 어제의 친구가 오늘은 원수가 되고 또 오늘 원수였던 사람들이 내일은 친구가 되겠죠? 사랑하던 사람들이 미워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사랑하게 되겠죠? 끊임없이 변화에 종속되는 것이 하나님을 제외한 이 세상의 속성이고 그것이 변한다고 마음아파하고 내가 원하는 질서와 같지 않다고 괴로워하면 나 자신도 흘러가고 변하는 수많은 물방울 같은 존재들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오늘은 이 시점에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나 내일은 저 시점에서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내가 변한 것이 판단 받습니다. 이렇게 변천하고 소용돌이 치는 세상에서 우리들이 그것들을 붙들고 산다면 늘 요동치죠 그래서 주님을 바라봐야 됩니다. 환란이 올때 시련과 고난이 가득찰 때 이 세상에 나혼자 버려진 것 같았을 때 그때 우리는 하나님 한 분을 그 환란 속에서 기억하여야 합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환란을 당할때에 하나님의 존재의 유용성을 두 가지로 묘사합니다. ‘피난처이며 힘이시니라’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묘한 대조를 이루죠. 피난처는 적군의 공격이 워낙 강해서 맞서서 공격할 수 없을 때 피신해서 자신을 지키고 전열을 가다듬고 혹은 부분적인 방어를 하는 개념이 피난처의 개념이예요. 주님은 우리가 주님을 믿지만은 우리가 시련을 당할 때에 항상 용기 있게 싸워서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것은 아니죠. 그래서 우리는 맞닥뜨려 피흘리며 싸우는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그것을 피해야 하는 때도 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내가 너무 약하고 시험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피하기도 하지만. 처음부터 하나님의 속성에비추어 맞닥뜨려 싸워야할 싸움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피난시키시는 적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소극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새로운 우리의 인생을 쭈욱 돌아보면은 하나님의 도움이 아닌 것이 없고 주님의 은총에 빚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내 힘으로 도저히 피할 수 없을 것 같았던 환란을 때로는 피할 길을 주시고 때로는 우리를 숨겨주셔서 우리의 인생의 최악의 고통의 때를 오히려 그 고통속에서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경험하게끔 만들어 주셨잖아여. 환란이 와도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이 우리의 피난처이신 것을 기억을 하고 그분께 피하기만 한다면 오히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속에서 인생의 가장 고통스러운 환란의 때가 우리에게는 주님과 밀어를 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개념은 힘이예요. 내가 물리학을 전공한 교수한테 대화를 하면서 김영길 총장한테 내가 물어봤어여. ‘힘이 뭡니까?’ 물리학에서는 힘을 에너지라고 본데요. 에너지. 영적으로도 똑같습니다. 영적인 힘이 영적인 에너지입니다. 에너지는 어느 것도 스스로 일으켜지는 에너지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우리가 달리고 싶다고 할지라도 한 20일쯤 금식을 하고 나면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몸보러 달리라고 명령할지라도 우리의 몸은 그 마음의 명령을 순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은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해야 하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옳은 모든 것을 항상 그렇게 실행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좋은 것을 선택할지라도 그 좋은 선택한 것을 실행할 수 있게 하는 힘은 우리에게 없어요. 그래서 주님의 힘이 필요해요. 주님은 오늘 이 시인에게 힘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힘이 있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그것을 그 힘이 있으면 해낼 수 있고, 힘이 없어서 수치를 당하던 때도 오히려 우리는 그럴 수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정신의 힘이죠. 그래서 그런 힘이 많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약점이나 결점, 심지어는 자기를 해치고자 하는 사람들의 악랄한 계교까지도 받아들이면서 오래참고 견딜 수 있는 것이죠. 그런 힘을, 하나님이 바로 그런 힘이시라고 시인이 고백을 했습니다. 여기서 처음 경험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살면서 그것을 많이 경험하는 것이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속성과 속성이 실행되는 방식이라면 그 방식을 보고 따라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것은 힘입니다. 그리고 그 힘은 바로 우리의 영적인 힘이고 그것은 다름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의 의지 속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섭리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만나는 마음 아픈 환란 큰 시련과 고통 이런 것들이 지금은 쓰라려 보이고 아파보여도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러한 힘의 필요를 느껴 하나님 앞에 매달리게 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기회라고 우리는 여기며 위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성도가 환란을 당할 때 마지막으로 기억할 수 있는 것을 오늘 시인이 지적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라고 하는 소유대명사입니다. 즉, 시인은 환란을 당할 때 나의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어떻게 한 사람 한 사람 동떨어진 존재들인데 그들이 우리라고 하는 대명사에 의해서 묶일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언약관계가 아니면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잉글랜드에 있는 청교도들은 자기를 청교도라고 부르지만. 스코틀랜드에 있는 청교도들은 자기를 <퓨리탄>이라고 부르지 않고 <카비넌터>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이 곧 언약도이죠. 그들은 이러한 사상이 강력했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들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언약을 따라 믿고 산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라 우리다’라고 하는 철저한 공동체적 신앙의 고백이었습니다. 환란을 당할 때 우리보다도 더 큰 고난의 가시밭길을 지나는 성도들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됩니다.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무겁다고 생각될 때 더 큰 고난의 십자가를 감당하며 피흘리며 동지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우리는 우리가 스스로 무겁다고 불평하던 이 십자가의 이 불평이 민망스러워 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뉘게나 있는 십자가 내게도 있도다-찬양) 하나님은 그렇게 우리를 깨닫게 하십니다.
고난이 올 때 내가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 크다고 생각할 때 내가 주님을 위해 너무 많이 애를 쓰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내가 무엇인가 주님의 일을 하면서 부당한 대접을 받고 있다고 생각될 때 내가 스스로 주님의 일을 감당하면서 하나님이 나만 부당하게 대우하신다고 불평하는 마음이 들 때 그때 마다 이 세상에 우주적인 그리스도의 몸의 교회 안에 접붙여진 수많은 성도들, 지금도 이 복음을 전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기위해 피 흘리며 몸부림치는 많은 동지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그런 큰 성도들의 고난과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온전한 마음으로 몸부림치는 그 진실한 성도들의 그 큰 수고와 말할 수 없는 고난 앞에서 우리가 스스로 짐이라고 생각하는 그 고통은 얼마나 부끄러운 것인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들이 그렇게 고난을 당한 것도 결국은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였겠습니까?
<존 락스>의 스승은 <조안 위셔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공회 사람이었습니다.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었고 안정된 삶을 살던 사람이었는데 칼빈의 사상을 접하면서 개혁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는 가시밭길을 걷게 되죠. 그가 큰 감화를 끼친 제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존 락스>입니다. 그리고 스승과 함께 가시밭길을 걷게 되죠. 결국 <조지 위샤트>는 화형됩니다. 그리고 <존 락스>도 고난의 길을 걷게 됩니다. 아마 순교하죠. 나중에 청교도 운동이 무너지면서 근데 그 언약도들이 갇혀있던 그 감옥을 갔었어요. 근데 지하에서 그 광물을 캐던 채굴광인데 그 <센티엔디오 성> 그 아래에 있었어요. 그거를 쇠창살로 막아서 감옥으로 활용을 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서서 걸어갈 수 가 없고 엉금엉금 기어서 통과해야 되는 개굴입니다. 그것도 입장료를 그렇게 비싸게 받더라구요. 거기를 내려갔어요. 축축하고 습기가 차고 돌멩이나 광석으로 되어 있는 거기를 불편하게 그렇게 쭈구리고 오리걸음으로 걸어서 거기를 드나들던 거기서 그 사람들이 하 세월동안 갇혀서 먹지도 못하고 고난을 받았던거죠. 일어날 수도, 드러 누울 수도 없는 그 자리에서 공기도 통하지 않는 그 자리에서 손발이 묶인 채 고난을 당하며 기약이 없는 감옥살이를 한 이유는 개혁 신앙을 신봉한다는 오직 그 이유 하나 때문이었습니다. 갑자기 그러고 거기에서 <조지 위셔트>가 화형을 당하는 그 모형을 거기에다 만들어 놨어여. 갑자기 내가 고민으로 생각하고 힘들게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진리의 종들은 이렇게 신앙을 위해서 죽어갔는데 내게 있는 십자가도 십자가 축에 들까라고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에 환란을 당하는 사람이 우리 하나가 아니라 나 하나가 아니라 우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부분적으로는 그들이 주님을 위해 애쓰고 고난을 받는 더 큰 고통 때문에 우리는 위로를 받게 되고 그들을 붙들고 계신 하나님 때문에 또한 우리를 더 붙드실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되는 것이죠. 하나님과 그의 도움심과 공동체를 생각하면서 고난과 시련을 이기며 살아왔던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들이 그렇게 살아야 할 것입니다.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