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salms 1
목 차
복 있는 사람의 삶(시1:1-2) 3
의인의 형통함(시1:3) 7
복 있는 사람의 삶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 1:1)
시편의 분류와 배열과 저자
시편 전체를 2년여에 걸쳐 새벽시간에 설교한 적이 있는데, 다시 한 번 설교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시편은, 멀게는 주전 1500년경부터 시작해서 가깝게는 주전 400년경에 이르기까지 장구한 세월동안 기록된 책들을 후대에 편집한 것입니다. 아마도 주전 3세기경쯤 모았을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이것들은 총 1권부터 5권까지로 분류됩니다. 연대순이나 저자 순으로 분류한 것이 아니라, 당시에 이스라엘이 가지고 있던 성경 중에 가장 기본서인 모세5경(창세기-출애굽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을 기준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래서 1권에 나오는 시들은 대개 창세기의 노래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하나님의 창조, 창조의 아름다움, 창조된 인간, 창조된 세계, 이런 것들은 제1권에 대개 모아져 있습니다. 제2권은 광야의 생활, 다음에 하나님의 인도, 보호, 불순종으로부터 돌이킴, 이런 것들이 출애굽기의 노래입니다. 이어서 제3권은 레위기의 노래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 하나님께서 열납하심, 이런 것들이 엮여 있습니다. 성전에 관한 노래는 레위기와 짝을 이루는 제3권에 나옵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성전, 제사, 제사를 드리는 것, 제사를 통한 하나님과의 교통, 이런 것들이 여기에 나옵니다. 그 다음으로 제4권은 민수기의 노래입니다. 여기에는 불순종과 방황, 거기로부터의 돌이킴, 광야생활의 고달픔, 이런 것들이 나옵니다. 마지막 시편5권은 신명기의 노래입니다. 알다시피 신명기는 광야생활에서 모세가 했던 설교를 모아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신명기의 노래에서는 하나님의 말씀, 말씀의 영광, 말씀의 능력, 말씀과 위로와 보호, 하나님의 인도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을 1편부터 150편까지 무슨 원칙에 따라 배열했는지는 잘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무려 150편이나 되는 시를 배열하면서 어떤 시를 시편1편으로 놓을지, 얼마나 심사숙고했겠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그 시들은 누가 지었는지 잘 모릅니다. 시편의 표제가 안 붙어 있는 것들은 작자미상이지만, 다만 시편의 성격상 다윗에 속한 것이 많다고 추측합니다.
복이란 무엇인가
1편에서는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노래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이라는 표현이 히브리의 성경에는 이러이러한 사람의 행복이여’라고 나옵니다. 행복 또는 복이라고 하는 단어는 ‘쉘’이라는 단어입니다. 여기에서는 아무 복이나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에서 성도가 받는 복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흔히 복이라고 말할 때, 세상적인 복과 천상적인 복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복은 사람들이 자기가 좋아하기 때문에 복이라고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돈이 많이 생겼다, 지위가 올라갔다, 얼굴이 예뻐졌다 등등.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되었기 때문에 불행하게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돈을 없으면 행복했을지도 모르는 사람이 불행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위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경우에는 사람에게 있어서 돈은 복이 아니라 화라고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어떤 것을 손에 넣게 되는 것이 복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행복하고 온전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복입니다. 바로 천상적인 복이어야 합니다. 성도의 복이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궁극적인 종류의 행복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돈만 있고, 명예만 있고, 건강만 있는 그런 행복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중심에 계신 행복입니다. 그래서 “복 있는 사람은”이라고 시작합니다.
복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다음에 이어서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이 나옵니다. “악인의 꾀를 쫓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이것이 바로 복 있는 사람의 첫 번째 조건입니다. 소극적 의미로, 복 있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것들을 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악인의 꾀를 좇는다”는 것은 악인의 도모, 악인들이 머리를 굴리며 생각하는 술수 같은 것을 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에차’(hx;[e)라는 단어인데, ‘카운셀링’이란 뜻입니다. 원문대로 해석해서 ‘악한 사람의 의문을 좇지 않는다’는 것은 악인들이 만들어낸 모의를 쫓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죄인의 길에 서지 않는다”는 것은 죄인은 하나님을 잘 믿으며 살려고 하는데, 어쩔 수 없는 연약함에 의해서 잘못하는 그런 종류의 죄인이 아닙니다. 죄를 계속 지어서 죄가 그 사람의 인격의 특징이 된 사람이 걸어가는 인생의 길에 서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 것이다, 지위가 좀 높아질 것이다.” 등등의 이유로 거기에 서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는다”에서 오만한 자는 그냥 일반적인 의미에서 겸손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그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점점 죄가 발전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악인의 꾀를 가끔 가서 빌리다가, 그 다음에 죄인의 길에 걸어가다가, 마지막에는 모든 사상에 하나님 없다고 비웃으면서 거기에 주저앉는 것입니다. ‘앉는다’는 말이 ‘야솨브’(bv'y:)인데, 집을 짓고 아예 거기에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즉, 거기에 거처하는 뜻입니다.
의인은 어떻게 사는가
그런데, “의인은 이런 식의 삶을 살지 않는다”고 하면서 나오는 것이 “의인은 이런 식의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자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묵상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탁’ 알고 있는데 그것이 이상하게 자기의 삶에 적용되어서 작동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은 머릿속에 있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가슴 속으로 흘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흘려 내리는 일을 묵상이 도와줍니다.
묵상은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과 의미가 자신과 갖는 관계를 끊임없이 생각해서, 하나님의 말씀의 이치를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면 얼마나 시시합니까? ‘복 있는 사람은 이것도 안하고, 저것도 안하고, 그것도 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복이 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그렇게 시시하거나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시편의 첫 번째 편에서 우리가 어떻게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는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복의 근원이 함께하는 사람이 바로 복을 가진 사람이잖습니까? 복이 있는 사람은 바로 하나님을 묵상하며 율법을 묵상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많이 생각하면 세속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고 하나님을 많이 생각하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이러한 이치로 하나님은 신실한 그리스도인과 더불어 동행하며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의인의 형통함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시 1:3)
의인과 악인의 대조
여기서 의인과 악인을 대조하는데,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기에는 ‘의인은 의롭게 사는 사람이고, 악인은 악을 행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생각하는 의인의 사상, 특별히 시편에서 생각하는 의인의 사상은 인간의 도덕적인 행실을 보고 그것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의인은 의로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지만, 그 뿌리 자체가 자기의 도덕적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것이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게 만들어 줍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면 사람의 목소리, 사람의 말, 사람의 글, 전부 다 사랑스럽습니다. 한 사람이 싫으면 그 사람이 속한 모든 것이 다 싫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말은 고사하고 목소리조차 듣기가 싫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똑같은 원리가 성립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이 듣기 좋고, 하나님이 전해주시는 음성이 우리에게 크나큰 기쁨이 됩니다. 거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뿌리라면, 율법은 뿌리를 통해 계속 섭취되는 물과 양분입니다. 그리고 도덕적인 삶은 나무가 그것을 빨아들여서 맺은 열매, 혹은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울창한 그러한 번성의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반대로, 악인은 어떻습니까? 악인은 뿌리 자체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아니라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자기 사랑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무엇엔가 뿌리를 내려서 빨아들이면서 섭취하려고 하는데,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이루려는 생각과 지상적인 사념들을 빨아드립니다. 그런 것들이 뿌리를 통해 섭취되니까 거기에서 올라와서 열매 맺는 모든 것들이 사악한 것입니다.
양자의 근본은 물론이고 나무, 열매, 줄기, 가지까지 모두 구분이 됩니다. 당연히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하리라’ 그렇게 삶의 뿌리와 본질과 열매에 이르기까지 악인과 의인이 일치하는 것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둘 다 한데 섞여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데 사실은 아무 것도 일치하는 것이 없습니다. 완전히 다릅니다. 그래서 둘이 섞여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것은, 첫째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회중에 들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도 포함되지만, 둘째로는 그들이 생각과 좋아하는 것들이 워낙 다르기 때문에 함께 섞여 있을 때 그들이 행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유상종이란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악인들은 삶의 뿌리 자체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데,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악인은 번성하는 것과 같지만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무가치하고 덧없는 인생을 살 뿐입니다. 이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의인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 같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렇게 의인으로서의 삶의 특징을 유지하면서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삶의 뿌리가 깊이 하나님의 말씀에 내리고 거기로 말미암은 진리를 계속 섭취하면서 하나님 앞에 살아가야 됩니다. 그것이 의인의 삶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골몰하고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아무리 좋은 나무라고 할지라도 뿌리에 물이 공급되지 않으면, 번성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93년쯤의 일로 기억이 되는데 충청도 쪽인가, 경상도 쪽인가 집회를 갔습니다. 그런데 그때가 엄청나게 가물 때였습니다. 여름인데도 비가 안 와서 전국이 난리였던 시절이었습니다. 집회를 가던 차에, 너무 피곤해서 기름을 넣으면서 주변을 보니 가로수들이 전부다 시들시들했습니다. 그런데 유독 저쪽에 있는 나무 하나가 잎사귀들이 촘촘했습니다. 하도 신기해서 가까이 가보니 옆에 실개천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그 샘은 논들에 물을 대는 수로였습니다. 그때 생각난 것이 시편1편입니다. 다른 나무들은 전부 시들어 가는데, 한 나무만 개천 옆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 나무는 잎이 촘촘하게 자랍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공급이 끊어지면 하나님의 백성으로써의 아름다운 특징은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기품 있고 아름다운 꽃이나 나무라도 물기가 없어지면, 본래의 아름다움은 사라져 버립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의 뿌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일매일 은혜를 받으면서 그 말씀이 가슴에 물이 되어 흐를 때 거기에 뿌리를 박은 우리의 삶도 성숙한 삶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들이 매순간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에는,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해서 기도하고 살 때에는, 그 말씀에 부합하기 위해서 살고 또 그 말씀을 기준으로 반성하고 이렇게 될 때에는,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물이 되어 흐르는 것입니다. 예전에 내 인생을 바꾸는 말씀이 오늘도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하기 위해서는 아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깊이 가슴에 담고 그것이 물이 되어서 우리의 마음속에 흐르도록, 그렇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묵상은 머리에 있는 지식을 계속 생각해서 가슴으로 흘려 내려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머리에 있는 지식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긴 지식 속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1편에서 묵상이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과 적용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기도와 더불어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성경을 몇 장 후딱 읽어버리는 이 아니라, 천천히 묵상해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말씀을 계속 섭취하고 묵상해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 있도록 해합니다. 여러분 꾸준히 성경을 읽는데도 마음이 건조하고 신앙생활이 뒤로 물러가는 적 있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이 요술 같은 효과를 우리에게 일으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사모하고 그 말씀이 늘 우리의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항상 성경을 읽고, 설교테이프를 듣고, 그 다음에 일하면서도 곰곰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들의 마음이 말씀에 의해서 물기를 공급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시편1편 강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