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9월 14일 새벽예배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시 68:22-23).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너로 저희를 심히 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시도다. 아멘.
계속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이방의 원수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사이에 있는 언약관계에 충실하신 그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저희를 바산에서 돌아오게 하며 바다 깊은데서 도로 나오게 하고 그랬습니다. 바산은 여러분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던 때에 길을 열어 주지 아니함으로 피할 수 없이 전쟁을 해서 대 파한 그런 나라 였습니다. 그래서 바산과의 전쟁은 얼핏보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커다란 패배요 죽음을 안겨 줄 것 같았지만, 그들을 훌륭하게 격파하고 이겼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바다 깊은 곳에서 도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바다 깊은 데서 나오는 경험은 출애굽의 경험속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들은 양쪽의 벽과 갚이 물이 서고 그리고 그 사이로 난 마른 땅을 걸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너로 저희를 심히치고 그 피에 네 발을 잠그게 하며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을 향한 도륙과 승리가 얼마나 큰 것 인지를 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전에 전쟁은 지금과 같이 현대전이 아니라 정말 끔찍하게 창으로 찔러 죽이고 칼로 사람을 치는 그런 옛날 형태의 전쟁이었습니다. 물론 당시에도 폭탄과 유사한 불덩어리 들을 폭역하고 하는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전쟁의 기술은 엄청 발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화학전도 아니고 커다란 폭격도 아니고 사람들은 어짜피 칼과 창 끝에 죽어 갔습니다. 그래서 커다란 전쟁을 치를 때며는 피가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틴로플에 가며는 벽이 이중으로 되어있습니다. 성벽이 결국은 오스만 터키에 망할 때 사람들이 높은 절벽과 같은 성벽을 하나를 넘고 그리고 그 넘어오는 사람들을 막기위해서 여기서 미친 듯이 화살을 쏘고 그리고 창으로 찌르고 하는 전쟁들이 일어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 성벽과 성벽사이가 시체가 쌓여서 시체를 밞고 건널 정도였고 그 성벽과 성벽사이에 피가 도랑같이 흘렀다고 합니다. 그 어마어마한 도륙이 전쟁의 모습이에요. 이스라엘을 해하려고 하고 이스라엘에게 악을 행하려고 했던 그, 민족들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피로 다스렸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네 개의 혀로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한다 는 것은 주석적으로 명쾌하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의견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네 개의 혀로 네 원수에게서 제 분깃을 얻게 하리라 하는 말씀을 그 혀의 재주 어쩌면 이것은 나라와 나라의 관계에서 전쟁을 피할 수 없을 그때에 외교로서 그 상황을 극복하고 그리고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돌려주시길 원하는 붓깃들을 찾아내는 그런 종류의 복이 아닐까 하는 저는 조심스럽게 해석을 합니다. 자 그렇다면 오늘 이 네가지가 등장합니다. 일상 적으로보면 정치 군사적으로 보면 이길 수 없는 바산에서의 승리와 그다음 바다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커다란 기적 거기에서 다시 건져 나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그리고 이스라엘을 향하여 악을 행하고 도전하는 무리들을 징벌하되 그들의 피가 흥건해 져서 발을 잠그게 할 정도의 완전한 파멸과 승리, 그리고 하나님이 놀라운 외교의 기술을 주셔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그 분깃의 축복, 이 모든 것중 어느 하나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원래의 장점과 힘으로 획득한 것은 없는 거죠. 전적으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관계에 헌신하셨기 때문에 생겨나는 복이죠. 그러면, 이러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 강력한 능력과 그리고 큰 권세 이것들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시는 하나님의 큰 은혜에요.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행사를 보면서 어떠한 생각을 해야되겠습니까? 실제의 우리 삶에서, 많은 불순종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뜻대로 살지 않는 많은 우리의 삶. 이것들이 어디로부터 오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들어 주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사는 우리의 삶은 적극적인 면과 소극적인 면으로 나뉘어요. 소극적인 면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 하는 것은 하지 말아되는 것이에요.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적극적인 면이 필요한데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요한일서에 보면 사도요한이 이런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구하는 바를 그에게서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킬 뿐 만 아니라 그를 기쁘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입니다. 소극적인 원리만을 지키는 사람들은 어디까지 잘못해야 죄인가! 이렇게 생각하지만 적극적인 면까지 생각하는 사람은 자유가 주어졌어도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기쁨을 들릴 수 있는 가 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황지에 계시던 토레이 신부님의 할아버지 되시는 토레이 목사님이 계셨어요. 그분은 당시에 이 천구백년대 초죠, 미국사회에서 미국사회 뿐만 아니라 영국도 다 마찬가지 였고 그래서 사람들이 집을 지으면, 지하나 일층에 무도 시설을 만들고 부자들이, 그리고 거기에서 밤이며는 술을 먹고 서로 춤을 추는 그런 것이 유행이였구요. 여러분들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도 한때는 부자들이 지하에다가 그런 빠를 만드는 것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거기에서 춤을 추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셨어요. 사람들이 그렇게 술을 먹지 말거나, 혹은 또 사람들이 모여서 그렇게 춤추는 것에 대해서 금지하는 성경구절이 어디에 있느냐고 발론을 제기 할 때, 아fp이토레이목사님은 기독교인의 윤리의 한 기준을 독특하게 제시하셨어요. 그것이 뭐냐며는 술을 먹는 것도 금하지 않고 있고 또, 함께 춤을 추는 것도 성경은 금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전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의 적용과 중생한 신자의 마음안에 있는 영혼과 관련하여 생각할 때, 나는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들이 밤중에 모여서, 어영집? 남녀들이 모여서 부인과 남편을 바꾸어가며 살을 부딪기면서 그렇게 음밀한 불빛아래서 밤에 모여서 춤을 추는 그것이 성경에 금지가 되어있지 않지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확신이 자기에게는 들지 않는다. 그러면서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에 있어서 사람들이 흔이 어디까지 해야지만, 죄가 되지 않나, 라는 것을 생각 했을 때,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라서 아레이 토레이 목사님은 그것보다는 훨씬더 적극적인 기준, 그것이 우리에게 자유로 주어졌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면, 버리는 것이 옳다는 새로운 윤리의 기준을 제시하셨던 것이에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순종과 하나님을 향한 반역들을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이 나를 충분히 지켜 주시며 내 인생이 그분의 수중 안에 있고 내가 믿음대로 살면 그분이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하는 확신의 결의에서 대부분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간수하시는 방법은 은혜로운 방법이고 우리가 우리를 간수하는 방법은 대부분, 신앙의 원리를 파괴하는 방법이에요. 더욱이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충만한 사랑과 순종의 마음이 없을 때에는 우리가 우리를 위하는 대부분의 방법이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는 방법과 충돌을 일으키는 거에요. 그래서 정당한 방법으로 하나님과의 관계속에서 복을 얻기 보다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밖같에서 복을 얻어보려고 할 때에 거기에 수많은 악들이 생겨나고 삶전체가 하나님 주신 이 언약의 원리에서 왜곡되어 가는 것이에요. 경건한 시인들이 세파를 이기며 살아갔던 방법을 생각해 보십니요. 천만인이 나를 치려고 애워쌀지라도, 나는 오히려 안온 하리도다. 노래 하지 않았습니까! 방백들을 의지하는 것보다 우리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났도다. 라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주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 하리요. 라고 외치지 않았습니까! 이런 모든 자신감 하나님이 우리와 맺은 당신의 언약관계에 충실하실 것임을 굳게 믿기 때문에 주님께서 나를 도와주시지 않거나 나를 소외시키실까, 그렇게 떨지 아니하고 오히려 두려워 하는 것은 내가 그 하나님의 언약관계에서 이탈한 사람이 되거나 주님의 법을 멀리 떠나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대부분 잃어버릴까봐 두려워하는 대부분의 모든 것들이 사실은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치명적인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지않습니까? 주님이 거기계시고, 우리가 여기 있어서 그분을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다면, 나며지는 아무것도 아닌 우연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종교계혁가 쯔빙들리가 결국은 화해의 약속을 깨고 수많은 군대를 이끌고 자기들의 마을을 쳐들오 오는 카톨릭 군대들의 침략소식을 듣고 여행하던 중 급히 돌아와서 까펠이라는 곳에서 마지막 전투를 하게 됩니다. 숫자 자체가 세배가 는 적군이였기 때문에 이길 가능성이 처음부터 없는 전쟁이었어요. 자기 사위 자기 아들, 거기서 장렬하게 함께 전사합니다. 그는 전쟁에서 죽어 가면서 자기를 끌어안고 있는 병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단지 육체를 죽이는 자를 두려워 하지 말거라 영혼까지도 멸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하고 죽었어요. 그렇게 자기의 목숨이 만약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위해서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것이라면 그건 어쩔 수 없다! 자기의 육체의 생명까지도 자신에게 있어서 치명적으로 중요한 것 아니다 라고 믿었던 거에요. 그것이 신앙이에요. 그래서 항상 우리에게 없는 것 모자란 것 부족한 것을 생각하지 마세요. 그걸 너무 많이 생각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요.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주님이 이제 것 나에게 주셨던 것, 그리고 지금 누리고 있는 것, 그리고 주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 살아오면서 때로는 하나님의 섬리속에서 고난을 당하긴 했지만, 신실하셨던 하나님을 생각하세요. 그리고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섬리속에서 때로는 우리는 홀로 두시는 것 같아도 그분은 위험해진 당신의 언약관계에 충실 하게 헌신하신 분이고 그리고 언제나 그 언약관계에 최선을 다 하신 분이고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굳게 믿는 거에요. 그리고 하나님께 굳게 붙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이렇게 건져낼 수 없는 위기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이길 수 없는 적들을 멸하시며, 극복할 수 없는 난관 들을 이겨 나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날마다 주님을 의지하며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희들을 사랑해 주시고 오늘 이시간에도 아버지 앞에 간구하고 기도하게 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이 우리와 맺은 이언약을 충실하게 지키신 것처럼 저희도 그 언약을 따라 사는 주의 백성들이 되게 하옵소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