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8일 새벽예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행 2:3)
녹취자 : 홍성림
성령님이 구약에도 계신 것은 사실이지만 역사하시는 방식에 있어서 신약처럼 이렇게 편만하게 역사하시진 않았습니다. 구약에서 성령님의 역사라고 하는 것은 믿을 때에는 성령님이 역사하시니까 구약에서도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겠지만, 오실 메시아를 믿을 수 있었겠지만 계속해서 그 사람 안에 내주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어떤 특별한 일을 시키시고 싶으시면 오셔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일하게 하시고 끝나신 다음에는 다시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믿는 모든 사람에게 내주하신다기 보다는 당신의 필요한 일을 위해서 필요한 사람에게 오시곤 일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시는 그런 형태였습니다. 구약에도 보면 가끔 능력을 충만하게 받은 사람들, 하나님과 매우 특별한 사랑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모든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오순절 사건은 그런 점에 있어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오순절을 기점으로 성령님이 오셔서 각 사람 마음 가운데 가심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 주님이 충만하게 계시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그런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시대를 여시면서 성령님이 오신 것입니다. 오셨을 때에 두 가지 아주 뚜렷한 징표를 가시적으로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보여주셨습니다. 뭐냐하면 불의 모양으로 임하신 것이었고, 또 하나는 그들이 성령을 받자마자 방언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에 성령님이 특별히 임재하실 때에 비둘기와 같은 모습으로 임하시지 않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성령님이 임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시는데 그렇게 메시아로서 공적인 취임을 하실 때에 그 분이 앞으로 행하실 일, 하나님이 그분을 사용하셔서 이루실 일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비둘기와 같은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서 비둘기는 안식과 평화의 상징이었습니다. 제일 먼저 비둘기가 등장하는 것은 노아의 홍수에서입니다. 그래서 물이 갈하자 발붙일 곳이 없는가 확인해보기 위해서 비둘기를 노아가 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처럼 비둘기는 안식과 평화의 상징이었는데, 사실 이 비둘기가 나중에는 하나님 앞에 가난한 사람들이 드리는 번제물과 속죄제물로 사용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비둘기 자체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가 상실된 사람들에게 다시 평화를 주시고 그 평화 안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안식을 주시고, 그리고 그 안식과 평화가 예수님의 자기 봉헌과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성령이 임하셨을 때에 이렇게 되었듯이 두 번째로 오순절 성령 강림사건이 있을 때에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큰 불의 형상이 나타나고 또 그들이 방언으로 일제히 말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이야기하는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이 사건은 결국 무엇을 나타내냐 하면 성경에서 특별히 불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자면 두려운 하나님의 임재를 뜻하기도 하고 또 효과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은 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정결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심판이 집단적으로 임하면 불의한 사람들을 태워버리고 의로운 사람들을 남겨서 정결하게 하고, 또 각 개인에게 적용이 되면 그 사람들의 심령 안에 있는 죄들을 태움으로 말미암아 그들을 깨끗케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불과 물로 세례를 주려고 오신다고 세례요한의 증거에 나옵니다. 그 불은 심판의 요소이고 물은 하나님의 정결케 하는 요소, 그래서 축복의 요소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든지 간에 불은 죄악을 태우는 정결케 하는 요소입니다. 이것이 성령님이 오시면서 제일 먼저 보여주시는 성령의 역사의 징표였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서 혹은 집사가 되기 위해서 교육을 받을 때에 문답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령님이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대답이 무엇이냐 하면 성령님이 하신 일은 죄와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 죄와 죄의 결과인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성령님께서 아주 놀랍게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그 죄의 비참함에 대해서 깨닫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사람들로 하여금 그 비참함을 발산하게 합니다. 그래야지만 그것을 태우시려는 성령님의 의지에 순종해서 정결케 될 것 아닙니까? 이후로부터 계속해서 성령님이 임하시는 곳마다 죄를 태우시는 크나 큰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거기에 끝까지 순종하지 않을 때 성령님이 심판하시는 역사도 같이 나타납니다. 그래서 헤롯도 죽이시고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죽이시고, 이렇게 심판을 행하심으로 말미암아서 회개케 하시고 끝까지 성령의 역사에 저항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를 통해서 죄인의 목숨을 끊으시면서 까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곳에 강력한 죄를 불태우는 역사가 일어나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서 초기 기독교 선교의 역사가 펼쳐져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회심하기 직전에 회심의 전율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의 특성이 나타나고 그래서 그것 때문에 죄인들이 깊이 자신 안에 있는 죄악을 발견하고 두려워서 덜덜 떨게 되는 무서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죄인들이 하나님 앞에 깊이 두려움에 떨게 되어 죄를 태우시는 역사입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날도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좋은 은혜만을 보여주시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시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둘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복음입니다. 성령님이 율법을 사용하셔서 죄인들의 마음에 비춰주실 때에 죄인들은 율법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 자신의 불의한 죄악, 그리고 거기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같은 것들을 보게 하십니다. 거기에 큰 두려움을 느끼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이 복음을 보여주실 때 그때 그 복음 안에서 죄인은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안식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런 뚜렷한 회심의 역사가 없는 것도 이렇게 죄를 태우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역사와 임재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우리가 초대교회 교인들처럼 사모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간절하게 기도해서 회심치 못한 사람들의 죄를 태우시고 주님은 믿었지만 형식적으로 살아가는 많은 신자들의 가슴에 이 모든 불법과 죄악들을 태워 그들을 정결한 백성으로 세워달라고 기도하며 마음을 낮추고 하나님의 성령의 은혜를 전심으로 구하면 지금도 하나님께서 이러한 성령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다시 우리를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다시 우리를 하나님의 강력한 은혜의 역사로 충만하게 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 길을 가게끔 하나님이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날마다 이러한 성령님의 은혜를 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재산이 늘어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큰 건물을 갖게되고 인간이 여러가지 지혜를 짜서 경영을 해서 편리한 교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체제가 갖춰지고 하는 것은 그렇게 심증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두번째 세번째 네번째 다섯번째 심증은 아무래도 좋은 일에 속하는 것일 수는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교회당에 들어오는 그 순간 마치 모세가 호렙산 가시나무 떨기 사이에 붙은 타지 않는 불꽃을 보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던 것 같은 성령님의 임재, 그런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서 강력한 성령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각 사람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역사가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예화)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목회하던 웨스트민스터 채플이 런던에 있는데 저도 한번 가보았습니다. 그 동네에 한 죄인이 있었는데 살다가 살다가 도저히 못 살겠으니 템즈강으로 자살을 하러 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성령님의 역사인데, 그 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로이드존스 목사님의 설교를 한 편 듣고 자살하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교회당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설교를 들으려고 하는데, 높진 않은 돌계단 위를 걸어 올라가는데 예배당 문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열려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예배당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소리가 나는데, 조금 늦게 간 것입니다. 저녁예배였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거기에서 예배 시간이 되어 목사님이 기도를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기도소리가 주파를 타고 돌계단을 올라가는 그 사람에게 까지 들린 것입니다. “여호와는 미끄러지는 자를 붙드시며” 그 소리가 들리는데 이 사람이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경험하면서 그 계단에서 고꾸라져 버렸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죄를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것이 무엇이냐면 인간의 어떤 설득을 통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 죄를 깨닫게 하시고 그 죄를 책망하시는 성령님의 강력한 임재에 의해서 정결하게 하는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죄인을 회심하게 하는 요인이 된다고 하는 것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성령님의 충만한 역사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삶을 바르게 하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모으고 이러한 성령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도록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리는 것 외의 다른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간절히 구하며 아버지께 매달려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강림 사건에 나타난 첫 표적, 태우는 불길이 그들 가운데 성령의 임하심과 함께 보였던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그러면 방언을 하게 된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다음 시간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