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인턴십 개강예배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눅 1:80)
녹취자: 원수연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1994년도쯤으로 기억이 됩니다. 교회 개척을 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부산에 있는 브니엘 신학교라는 곳에서 저를 불렀습니다. 개강 수련회를 인도해달라고 했는데 아주 심심산골 경북에 있는 어느 기도원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강사를 불러놨는데 나는 많이 시킬 줄 알았더니 새벽기도하고 저녁집회만 해달라고 그러더라구요. 기도원 골방에 앉아있는데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누가복음을 펼쳐서, 할 일이 없어서 읽은 건 아니고 성경을 읽고 있었는데 80절에서 제가 딱 꽂혔습니다. 그 때 조그만 노트북을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20분 쓰면 배터리가 다 날아가는 아주 조그만 거였는데, 그것을 놓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들을 거기에 기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3박 4일 동안 있었는데 마지막 날 내려올 때 A4용지 40매가 되었습니다. 그게 나온 책이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라는 책입니다.
그 때 제가 그 말씀을 보면서 깊이 깨달았던 것이 뭐냐면 ‘하나님은 당신 혼자 일하시지 않는다. 언제나 사람을 사용해서 일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사용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준비된 사람들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 여러분도 보면 어떤 물건을 만들다가 잘 만들어지면 그것은 원래 물건이 의도하던 데에 쓰고, 물건을 망치면 원래 의도하던 데 쓸 수가 없게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어느 날 사람을 툭 집어서 사용하시는 게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를 사용하시기 위해서 그를 준비시킵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으로 그 준비를 잘 감당하고, 어떤 사람은 꾀를 부리면서 감당을 안 합니다. 그래서 사실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다고 할 때는 정말 긴 하나님의 준비과정이 있었던 것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냐 하면 오늘 하나님이 세례 요한을 사용하시는데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희랍어 성경에 ‘에레모스’라고 되어있는 이 ‘빈 들’은 ‘광야’입니다. 왜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난 이 아이가 광야에 보내어졌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은 추측하기를 예루살렘에서는 참된 신앙에 대해서 배울 게 없으니까 이 경건했던 아버지가 오히려 광야에 있는 어떤 경건한 사람들에게 자기 자녀의 교육을 위탁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기 ‘파이디온’이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원래는 5-6세 이상의 어린이를 뜻하지만 갓난아기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어쨌든 그 갓난아이 혹은 5-6세 시절에 보내어져서 그 아이가 거기서 자라고 심령이 강하여지고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말씀과 역사와 학문들을 배우면서 조상의 경건한 신앙을 익히고, 마지막으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는 아주 독특한 선지자의 체험을 한 후에 말씀사역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뭐냐면 제일 중요한 것은 꾸준한 지식의 탐구, 두 번째는 인격적으로 끊임없이 연단 속에서 성숙되어 가는 것, 세 번째는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을 하기에 적합한 강력한 하나님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 세 가지가 준비되어 있을 때, 그 때에 탄탄한 목회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역을 가만히 보십시오. 어릴 때 태어나서 네 살 정도 되면 어린이집에 가면서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게 스무 살이 되어도 안 끝납니다. 대학을 포함하면 스물세 살이 되어야지 끝납니다. 좀 더 일찍 들어가는 사람은 일찍 끝나겠지만, 짧게 잡아서 고등학교만 졸업한다고 치면 20년을 교육을 받아야 합니다. 20세가 되도록 교육을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학대학원을 가려면 4년 대학을 해야 합니다. 24년입니다. 다시 3년 공부를 하면 27년입니다. 군대 갔다 오는 것까지 치면 30년입니다. 30년 돼야 겨우 이제 사역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학교 다닐 때도 사역을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실습과 같은 것이고, 목사가 되기까지 계산을 하면 강도사 고시 바로 붙고 목사가 된다고 하더라도 서른셋은 돼야지만 사역다운 사역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33년이라는 긴 준비기간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서른둘이나 셋 되어서 목사가 됐을 때 진짜 목사다운 목사가 되었기 때문에 사역을 시작하느냐, 그런 사람 없습니다. 여러분도 결혼해서 5년, 10년, 길게 지난 사람들은 그 이상 세월이 지났잖아요. 지금 돌아보면 10년 전에, 5년 전에, 혹은 12년 전에 시집을 와서 내가 정말 그 때 가정주부였을까? 한 남자의 아내였을까? 가정을 책임지는 살림살이를 내가 어떻게 했나 돌아보면 좀 창피하지 않습니까? 철모르게 그냥 시작을 하고, 이것은 여성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라 남자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오르는 열정으로 사역을 시작을 했지만 한 10년 지나고 나서 돌아보면 부끄러워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순수한 열정인 줄 알았던 것은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고, 지식과 아는 것들이 너무 없어서 자기도 모르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면서 그렇게 일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놓고 보면 서른셋쯤 목사가 되었을 때 그 다음의 상당 기간은 훈련을 받는 기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되기까지.
우리 교회에 많은 교역자들이 있지만 데리고 있어보니까 바탕이 참 좋고, 열렬히 신앙생활을 하고, 지적인 능력도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저 목회가 무엇인지를 그 사람이 배우기 위해서는 자신을 불태우면서 한 10년은 목회를 해야지 감을 잡습니다. 그러면 마흔 셋입니다. 그 다음에 담임목사로 갑니다. 그러면 완전히 신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교역자는 큰 교회일수록 하기가 쉽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많고 자기 일이 딱 정해져 있으니까. 작은 교회일수록 어렵습니다. 전천후 폭격기처럼 새벽기도부터 교회청소까지 모든 것을 다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작은 교회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던 사람은 전문성이 없어서, 큰 교회였던 사람은 전체를 잘 모르기 때문에 담임목사가 되면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로님들과의 관계라든지, 별로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교회의 정치문제 같은 것들의 최선봉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때로부터 10년, 53세쯤 되면 목회가 무엇인지 어느 정도 알게 됩니다.
나는 교회를 개척하고 5년이 지난 후에야 ‘아, 목사가 하는 일이 이런 거구나.’ 그것을 알게 됐습니다. 내가 그렇게 사람이 둔하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뛰어나게 명민하지는 않지만, 그랬는데도 5년이 지난 후에야 목회가 무엇인지 줄을 그릴 수 있는 정도가 된 것입니다. 나는 부목사 생활은 안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50대 중반이 되어야지만 겨우 한 교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훈련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한 10년 하다보면 떠날 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의 나이는 세상 나이하고 다릅니다. 목회자의 전성기는 50대입니다. 정말 화려한 전성기가 40대가 아니라 50대입니다. 50대 중반이 세상의 직업 활동하는 사람들로 보면 한 35세정도 되는 것입니다. 꽃피우는 시기입니다. 삼성그룹이나 엘지 같은 곳에서는 45세쯤 되면 나가라고 합니다. 한창 꽃피우는 때가 35세, 40세 그쯤에서 막 뻗어나가면서 승진하고 이럴 때, 목회에서는 그 나이가 거기입니다.
그러면 세월이 흘러가면 저절로 그렇게 될까? 아닙니다. 옛말에 개꼬리를 3년을 묻어두어도 황모가 안 된다고 그럽니다. 황모는 노루털입니다. 노루 꼬리의 털을 황모라고 하는데 그것이 붓 재료로서의 최상품입니다. 개털을 모아가지고 먹을 써보십시오. 되게 웃깁니다. 다른 털은 먹을 찍어도 먹이 붓을 하나로 만들지 못합니다. 그런데 좋은 붓은 먹을 탁 집으면 먹을 머금으면서 모든 털들이 하나로 쫙 뭉쳐집니다. 그리고 붓글씨를 써 보면 그림 같은 글씨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묵혀둔다고 해서 개꼬리가 황모가 되지 않는 것처럼 안 될 사람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우리 주위에서 사역을 크게 하고, 그게 우리의 어떤 비전일 수는 없습니다. 존 칼빈이 자기의 책 속에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교회는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수성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커다란 교회도 복음의 순수성이 없으면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교회가 작아도 순수하면 그 작은 교회를 보면서 사람들이 신앙이 무엇인가, 인생이 무엇인가, 이런 것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목표 자체는 뭐냐면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에 있어서 깊이가 있고, 신앙의 인격이 정말 거룩하고, 무엇인가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배울만한 무엇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서 개인적으로 만나서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왔느냐를 보면 연단이 없이 살아온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절대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두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다양한 고생을 하잖아요. 저는 무슨 고생을 했나 생각해보니까 맨 처음 결혼을 해서 경제적인 것 때문에 되게 힘들었습니다. 경제적인 것 때문에 늘 고통을 받고, 눈물을 흘리고, 힘들게 살아왔고, 더군다나 장남이었으니까 부모님에 대한 어떤 의무, 가정에 대한 생각, 이런 것들이 가슴에 미어질 때가 많았습니다. 내가 고생하는 건 할 수 있는데 나의 소명 때문에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 직업을 잃고 이렇게 살아가는 게 굉장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고 조금 시간이 흐르니까 인간관계, 정말 교회 속에서 담임목사님이나, 담임목사님이나가 아니라 담임목사님 한 분이지, 그런 비인격적인 태도나 이런 것들을 직면하면서 가슴앓이를 하고,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런 게 그러면 완전히 사라지는 거냐, 참 재밌는 게 뭐냐면 고생하고 연단은 다릅니다. 고생은 객관적인 것입니다. 연단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고생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신앙적으로 그것을 소화해가고 있을 때에 연단입니다. 연단이라는 말은 아무한테나 쓰는 게 아닙니다. 신앙적으로 그것을 소화해나가는 사람들에게 쓰이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더라구요. 물질적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고 연단을 받는데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훈련을 시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물질에 대한 집착이라든지 사랑, 가난을 견디는 인내, 이런 것을 배우게 하신 다음에는 하나님이 풀어주십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부러워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저 사람은 그래도 돈 걱정 없이 사는구나.’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다음 전혀 다른 국면의 훈련을 또 받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가 끝나면 그 다음 게, 그 다음 게 계속 떠오릅니다. 지금도 똑같이 또 다른 것이. 아마도 이것은 죽을 때까지 계속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런 고난, 고생과 연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한번 힘들어보라고 주시는 게 아니라 그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 되어가도록 그렇게 연단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는 그래도 금을 제조하는 기술이 세계적으로 뛰어난 나라입니다. 옛날에 그렇게 과학적인 금 제련법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 대부분 용광로에서 녹여서 만들었습니다. 철광석을 뜨거운 불에 끓여서 쇠를 녹이고, 녹이면 그 다음에 바위 같은 것들은 안 녹잖아요. 그러면 그런 것들을 걷어내고, 액체로 된 그 금속 녹은 것 속에서 비중에 따라서 쇠와 금을 분리해내고 그러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결국 순결한 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끊임없습니다. 뭐냐면 평안하고 부족함이 없는 삶을 꿈꾸면 죽을 때까지 배신감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이번에도 그리스도인들이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납니다. 심지어 목회자들도 자살을 합니다. 보면 진짜 먹고 살 수 없어 죽는 사람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오히려 많지 않습니다. 다른 이유입니다. 결국 무슨 뜻이냐면 살면서 우리들이 고통이 없는 세상, 연단이 없는 세상을 꿈꾸면 매일매일 일어나는 현실을 보면서 고통을 받는 것입니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큰 교회 목사도 ‘내가 정말 은퇴할 때까지 이 교회에서 목회를 해야 되나?’ 고민을 한다고 그럽니다. 그 사람이 돈이 없겠습니까? 교회에서 충분히 먹고 살게 해 주겠죠. 명예가 없습니까? 그런데 끊임없이 그런 연단들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죽을 때까지.
그래서 엊그제는 제가 어디 강의를 가가지고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러실 리도 없지만 젊은이들이 있는데 “너희들이 보기에 내가 너희들의 젊음을 부러워할 것 같지? 하나도 안 부럽다.” 그럴 리도 없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얘야, 너 다시 한 번 살아봐라. 20대로 돌려놔주마. 괜찮겠니?” 그러면 나는 단호하게 “됐습니다. 됐거든요.” 한 번 살았으면 됐지. 그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그런 시련의 계곡을 왜 또 갑니까? 늙은 사람들이 젊어지고 싶은 건 출장가고 싶은 것입니다. ‘잠깐 한 일주일동안 20세로 젊어졌으면….’ 그러는 거지 그 고민과 무지, 고통을 모두 안고 그 시기를 다시 살아라, 그건 너무 가혹한 것입니다. 너무 가혹해서 하나님이 아무에게도 그렇게 안 시키셨습니다. 직선으로 한 번 지나가는 거지, 돌아가는 화살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분명히 깨달아야 될 것은 뭐냐면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여러분이 담임목회자가 되어서 꽃피우면서 목회할 수 있는 시기, 준비한 시기 등등 다 제하고 나면 넉넉잡고 20년 정도를 한번 불꽃같이 살고 죽는 것입니다. 20년 일반교육 받고, 20년 신학교육과 목회자로서의 준비를 하고, 마지막 20년을 하고, 나머지 한 5년 정도는 보따리 싸면서 마무리를 짓는 그런 것입니다.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주위에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합하면 25년이고 떼어내면 20년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40세에서부터 65세 정도까지, 20년에서 25년 정도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진짜 뭔가를 알고 원숙해져서 사역할 수 있는 그 시기는 그보다도 훨씬 적어서 15년에서 20년밖에 안 되는 것입니다. 철이 안 들면 한 번도 못해보고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세례 요한을 보십시오. 세례 요한의 출생연대를 학자들이 대개 7년으로 봅니다. 주전 7년으로. 그러면 이 사람이 30세쯤 되어서 선지활동을 하면 23년경에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준비를 했는데 세례 요한이 한 일이 뭡니까? 설교 몇 편 하고 죽습니다. 그런데 그 몇 편의 설교를 남기기 위해서 그렇게 가혹할 정도로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잘 준비됐는데 안 쓰시는 법이 없고, 준비되지 않은 사람이 가끔 쓰임을 받는 경우는 있지만 그러나 끝까지 완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훈련을 잘 받아서 준비되는 것, 그게 너무너무 중요한 것입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가 한 말을 시오노 나나미가 ‘로마인이야기’에서 인용한 것이 있습니다. “로마가 강력하던 시절에 그 강력함은 군대의 힘이었고, 로마 군인들은, 훈련은 피 흘리지 않는 전쟁이었고 전쟁은 피 흘리는 훈련이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제 아이 낳고 너무너무 힘들죠. 남편은 얼굴도 보기 힘들고, 소외감, 그리고 과중한 업무, 거기에다가 가난하기까지 하고, 교회에서 소속된 데도 없습니다. 목회자의 아내로 대접을 받는 것도 아니고, 우리 교회처럼 사모구역이 있어서 거기 가서 교제를 하는 것도 아니고, 하지 말라는 것은 왜 그렇게 많은지, 또 안 하면 하라는 건 왜 그렇게 많은지, 대접은 안 해주면서 요구하는 게 뭐 그리 많은지, 그런 것들을 경험하면서 마음속에서 교회에 대한 반감들이 생기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 것들을 모두 견디어 나가면서 자기 삶의 주체성을 가지고 헤쳐 나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견뎌야 합니다. 이기고 ‘이것들을 내가 그냥 대충 넘기면 풀지 않은 숙제를 이 다음에 목회를 하면서 다 감당을 해야 된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진짜 하나님 앞에 다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정말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잘 훈련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적으로 성숙하고, 성경과 학문을 아는 지식에서 성숙하고, 인격과 성품에서 성숙하고, 정서적으로 성숙하고, 영적으로 성숙하고, 그렇게 잘 준비된 가운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쓰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가시려고 할 때 보석처럼 쓰임 받는 여러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