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
(2008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8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3/30)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2008/04/06)
1. 어리석음과 미련함의 관계(잠26:8) 2008.3.30 주일오후 1
2. 어리석은 자의 자랑(잠14:18) 2008.4.6 주일오후 7
3. 미련한 자의 소유(잠14:24) 2008.4.13 주일오후 13
4. 미련한 자의 지혜(잠26:9) 2008.5.4 주일오후 17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3 (2008/04/13)
1.어리석음과 미련함의 관계
"미련한 자에게 영예를 주는 것은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으니라" (잠26:8)
성경에 보면 어리석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그리고 미련하다는 이야기도 많이 나오는데 도대체 어리석다는것, 미련하다는것이 뭘까요?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바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의 실제적인 삶의 재앙이 뭐냐면 어리석은 삶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어리석다 아니면 미련하다 이것이 무엇인가? 이 문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개의 짝을 같이 비교하면서 이해할 때 아주 쉬어집니다. 어리석다의 반대말이 무엇입니까? 어리석음의 반대는 슬기로움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미련하다는 말이 나옵니다. 미련하다고 하는 것과 짝을 이루는 것, 누구누구는 미련하나 누구누구는 무엇을 하다. 미련하다, 지혜롭다는 아닙니다. 명철, 총명은 좀 틀리고... 그래서 미련함에 짝을 이루는 반대어로 잠언에서 특별히 명철함이 많이 나옵니다. 시편에도 많이 나오고... 그럼 우리들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 수 있나하면 어리석음과 미련함의 관계는 슬기로움과 명철함의 관계와 같습니다. 그러면 이제 슬기롭다 이것은 다른 사람에게 없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슬기로워지는 것입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지혜입니다. 그러면 지혜하고 유사해서 섞여 나오는 말이 무엇입니까? 지식입니다. 지식과 지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도 보면 지혜의 말씀 혹은 지식의 말씀 이렇게 나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이야기하면 굉장히 길고 끝이 없는데 그래도 한번 우리 목적에 맞게 정리를 하면서 말씀을 대하면 아마 눈이 열릴것입니다.
그러면 지혜라고 하는 것,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지식이라는 것은 아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목사님 오후시간에 피곤한데 독특한 특기 물로 늘어지는 것 그만하면 안될까요?" 안됩니다. 꼭 해야 합니다. 그래서 설 아는것은 모르는 것보다 훨씬 나쁩니다. 모르면 그 기계에 손을 안댈텐데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손을 댈 경우에 기계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을 기계라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에 손을 대기 위해서는 아주 분명한 앎이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로 하고 이것이 굉장히 어려운 내용입니다. 아주 쉽게 설명을 할테니까 여러분들이 찰떡같이 알아 들어 보십시요. 지식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냥 안다 라고 하는데 뭘 아느냐고 한번 더 물어 보면 이것도 알고 저것도 알고 하는데 그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안다 라고 하는것, 지식의 요점은 뭐냐면 일의 원인과 결과를 아는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지식인것입니다. 자! 여기에 정말 예쁜 꽃이 피었습니다. 이름은 잘 몰라도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태어날때부터 꽃이 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맨처음에는 어떻게 되어 있었을까요? 퍼렇게 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꽃이 피었습니다. 그러면 이것과 이것의 관계가 뭘까 생각하는 것입니다. 온도와 습도 수분이 맞아 4일만 지나면 이렇게 되더라 그러면 이것이 4일뒤에 이렇게 되었을 때 놀랠까요 안 놀랠까요? 없던것이 생겨났는데 놀라지 안았을까요? 지식이 없으면 충격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충격을 쾅하고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식이라는 것은 이것이 4일뒤에 왜 이렇게 되는지 원인과 결과를 알 때 그것을 지식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 원인과 결과의 관계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고 시간과 공간속에 묻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것과 이것이 시간이 4일이 걸려야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4일이 되기전에 이것을 들여다 보고 있으면 이것이 아직 안 된 것입니다. 그렇게 원인과 결과가 시간차를 두고 묻혀있는 것입니다. 혹은 공간을 사이에 두고 묻혀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무선으로 누르면 자동차가 철컥하고 닫히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신기했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꾹 누르니까 문이 철컥하고 닫히고 꾹 누르니까 철컥하고 열리는 것입니다. "야! 이것 참 신기하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것을 보면서 신기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 신기하다고 합니다. 이제는 모두 그것이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것이 왜 그렇습니까? 공간이 원인과 결과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식은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세상에 사물들이 움직이고 돌아가는 이치에 대해서 많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공부할 수 없으니까 원인과 결과를 항목별로 나누어 비오고 눈오고 하는 기상의 원인과 결과를 다 모아놓은 지식은 기상에 관한 지식인데 그것의 앞뒤를 잘 정리해서 반듯하게 건물처럼 세우면 기상학이 되는 것입니다. 생물도 원인가 결과가 있을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교회에 한의사하는 집사님을 만나서 저는 변이 잘 안나와서 고통을 받는다고 한동안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하는 이야기가 "목사님 혹시 갈증이 많이 나지 않으세요? 밤에 잠을 잘 못 주무시죠? 밤에 잘 때 이불 차시지요?" 그런데 말을 이렇게 집뚜껑을 열고 들여다 본 것처럼 다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무 신기해서 하나도 틀린것이 없이 딱 맞다고 하니까 그래서 제가 너무 궁금해서 그것이 변비하고 무슨 상관이 있냐고 했더니 변비되는 이유가 몸에 열이 많기 때문에 수분이 장에서 증발하는 것입니다. 저는 물을 덜 먹어서 변비가 걸리는줄 알았더니 물을 많이 먹어도 장에서 따뜻하게 덮여서 수분을 다 증발시켜 버리니까 밑에서 딱딱한 덩어리가 되는 것입니다. 몸에 열이 많으니까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고 밤에 잠이 안 오는 것입니다. 몸에 열이 많으니까 말을 몇마디만 해도 뜨거운 열기가 나오면서 입 안쪽이 마르는 것입니다. 왠만하면 설교시간에 물을 안 마시고 싶은데 어떨때는 결딜수가 없이 입이 마릅니다. 그것이 의사의 눈에는 다 알기 때문에 쪼가리 쪼가리가 아니라 연결이 되는 것입니다. 인체에 대한 생리현상의 원인과 결과를 다 모아놓은 것을 가르켜서 생리학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식물이면 식물학, 동물이면 동물학, 물건의 존재에 관한 것은 물리학 이렇게... 그런데 그것이 이런 자연적인 사물이 아니라 사회현상으로 옮아 갑니다. 정치를 하는데 이렇게 사회가 돌아가면 정치가들이 꼭 이렇게 하더라, 이렇게 리더쉽을 발휘하면 이렇게 되더라 이런것을 한군데 모아 놓아 원인과 결과를 모아 체계를 세워 놓으면 정치학, 한국은행에서 돈을 많이 찍으면 그 다음에는 금리가 올라 가더라, 그 다음에 물가가 올라 가더라, 수출이 잘 되면 뭐가 어떻게 되더라 이러면서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다 만들어서 학문으로 모아 놓으면 경제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배우는 학문이라고 하는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병든 인간에게 이런 물질을 투입하니까 병균과 어떤 관계가 생기면서 몸에 변화가 오더라 이것에 관해서 약과 몸사이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 계속 정보를 모아서 체계를 세워 놓은 것을 약학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수술 이런것을 다 포함하면 의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지식을 많이 가지면 가질수록 아직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어떤 일들이 일어날 때 그 원인과 결과가 어떻게 될까 하는것을 훤히 알게 되는 것입니다. 역사에 보면 현명한 임금이 3대, 4대, 5대 이렇게 내려오는 역사가 있습니까? 없습니다. 한번이나 두 번 세 번도 별로 없는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렇게 그 종자에서 이런 인간이 태어날까 하는 이상한 인간이 태어나서 역사를 다 뒤집어 놓습니다. 그것이 근친결혼하고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맨델스존이라고 하는 사람이 유전의 법칙을 통해 그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종자끼리 교배를 하면 다른 종자하고 흩어져서 교배를 하면 감추어질 수 있는 나쁜 종자들이 같은 것끼리 동종 교배를 하면 잘 발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사람 저사람하고 왕족이 결혼을 하면 지배층이 너무 늘어 가니까 그렇게 안하고 자기들끼리만 결혼을 합니다. 신라가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하고 결혼을 했으면 묻힐텐데 또라이 같은 기질을 가진 사람이 묻혀 있다가 2대쯤 지나가서 발현이 되는 것입니다. 역사가 발칵 뒤집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왜 이런일이 일어날까 하는데 사실은 원인과 법칙이 그 안에 다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식입니다. 지식이 많으면 남들이 희한하다, 어째 그런일이 하는데 사실은 어째 그런일이 아니라 당연히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도 굉장히 제가 한때 경제학을 독학으로 조금 공부했는데 원인과 결과에 있어서 어떤 주식을 사면 어떻게 돈을 벌까 그것을 안다면 세상이 얼마나 편안할까요? 사고 팔기만 하면 돈이 눈덩이처럼 불어날것 아닙니까? 그럼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과 결과를 정확하게 찿아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원인과 결과가 하나만 되어 있을 수 있는데 이 사이에 이것과 이것이 개입을 합니다. 그래서 자꾸 다른 요인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이것과 이것만 알고 있는 사람 말고 이것 이것 많이 알고 있으면 있을수록 정확한 판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식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러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지혜에는 자연적인 지혜와 도덕적인 지혜가 있습니다. 용어가 복잡하면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됩니다. 자연적 지혜는 잔머리라고 생각하면 되고 도덕적 지혜는 굵은머리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자연적 지혜라고 하는 것은 선하고 악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고 하는것 말고 그냥 자연적인 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특별한 기술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지식은 원인과 결과에 대한 하나하나의 지식입니다. 자기가 어떤 목표로 가고 싶은데 그것들을 연결해서 배치를 하면 여기에 가는데 이바지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을 못하면 지식이 많아도 별로 쓸모가 없고 인생이 고달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느 회사에서, 잘 나가는 회사인데 제가 직접들은 이야기입니다. 여직원을 많이 쓰는 회사입니다. 그런데 회사가 대우도 좋고 간판도 있으니까 우르르 몰려오는 것입니다. 회사는 10명 뽑을 때 10명 오면 별로이고 한 100명 오면 회사로서는 으쓱해지지 않겠습니까? 10대1이다 하면 사표 내려고 해도 슬며시 집어 넣습니다. 아! 우리회사가 굉장히 들어오기 어려운 회사이구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원을 뽑는데 공부도 잘하고 영어도 잘하고 하는데 서로 오겠다고 하니까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예쁜 여직원들을 뽑았습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키도 맞혔습니다. 왜냐하면 유니폼을 입혀 놓았을 때 똑같으면 이쁘지 않습니까? 그래서 몸무게도 뚱뚱하면 안 뽑습니다. 그래서 좋은 회사에 가보면 직원들이 이상하게 판에 박은듯이 키가 똑같습니다. 그리고 사이즈도 비슷비슷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우리도 일류회사라고 해서 해 놓았는데 오는 사람들마다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이 회사 어쩜 이렇게 유니폼도 이쁘고 직원들도 이쁘고 공부도 잘해서 똑똑하고 어쩜 이렇게 회사가 들어오면서 기분이 너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회사는 경영이 잘 안됩니다. 왜냐하면 얼굴이 예쁘니까 수없이 전화가 오는 것입니다. 남자들한테서... 그리고 퇴근시간 땡하면 50분부터 보따리 싸기 시작해서 땡하면 쫙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집간다는 이야기만 들리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직원을 뽑을때는 얼굴 이쁜 사람은 하나씩 하나씩 내 보내고 그 다음부터 뽑을때는 똑똑하고 성격이 좋으면서 못생긴 여자들만 뽑았습니다. 그랬더니 이 사람들은 회사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이 있어도 자기들끼리만 약속이 있는 것입니다. 밥을 먹으러가도 자기들끼리만 먹으러 가는 것입니다. 휴가를 줘도 여기가 제일 편하다 하고 휴가 내고 직장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키지 않아도 야근을 하고 그리고 늘 여기서 사는 것입니다. 보십시요. 어떤 사장이 자연적인 지식이 많아 이 녀석은 상냥하고 사근사근 사람들을 잘 대해 괜챦아, 이 친구는 사근사근하지는 못하지만 개혁성이 있어서 하나 하나 꼼꼼하게 잘해, 이 녀석은 꼼꼼하지도 않고 상냥하지도 않지만 힘이 쌔, 이렇게 한사람에 대해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지혜가 부족해서 상냥하고 싹싹하고 기운이 없는 사람을 창고에 보내서 짐을 나르라고 시키고, 그 다음에 사람을 전혀 상대하지 못하고 계획성은 있지만 말한마디 하면 남의 염장을 지르는 사람을 영업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이러면 하나하나에 대한 지식은 있는데 이것을 잘 엮을수 있는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주 불행한 결과가 도래하는 것입니다. 이런것이 선하다, 악하다, 하나님 사랑한다, 안사랑한다와 관계되지 않았을때에 지혜를 가르켜서 자연적 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그렇게 분류를 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를 들자면 이런 것입니다. 경영학이란 것은 경제적인 사실, 상업적인 사실, 그 다음에 인간관계에 대한 사실, 조직에 관한 사실 이러한 많은 사실들을 남의 학문에서 빌려다가 맛있게 비빔밥을 하는 것이 경영학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경영학은 어떤 지식 하나하나를 엮어서 좋은 결과를 낼까하는것만 연구하는 것이 경영학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유를 하자면 지식이 구슬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꿰는 꾐입니다. 구슬이 서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뜯어서 굴러 다니는 진주는 필요 없습니다. 좋은 실로 잘 엮어서 목에 걸어주면 그 진주의 가치는 빛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고 그리고 주께 순종하고 반역하고 하는 것 말고 그냥 자연적인것들끼리 엮여서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이것을 가르켜서 자연적인 지혜라고 합니다. 이런것이 많아야 할 사람들이 누구냐면 회사를 경영하거나 사업을하거나 조직을 관리하고 하는 사람들은 자연적인 지혜가 뛰어나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은 어디에서 오느냐?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기도 하고 자기가 계속 훈련 받음으로 생겨나기도 합니다. 자연적으로 하나님이 주셔서 아주 받았던 사람중 하나가 요셉 같은 경우입니다. 그것은 놀라운 자연적인 지식이지만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지혜도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충성스럽게 일하면서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는 사람의 물불 안가리는 헌신은 하나님께 고통입니다. 물불 안가리고 헌신하면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동기는 순수한데 항상 일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적인 지혜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자연적인 지혜는 기껏해야 사람의 물질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이 세상의 일들을 잘 돌아가게 하는데 이바지할 뿐입니다. 그런데 자연적인 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도덕적인 지혜입니다. 도덕적인 지혜는 이런것입니다. 사물에 관한 지식을 이렇게 이렇게 엮으면 돈이 많이 벌리고 몸이 아프지 않고 명예가 올라가고 출세를 하고 내 뜻대로 되고 하는 결과를 산출한다고 하는 것을 아는 것은 자연적인 지혜인데 사실은 자연의 것들이 그렇게 저절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법칙이 거기에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이런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때 성전이 지어지고 그때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하늘이 문을 닫고 풍제나 깜부기나 재앙이 내리고 메뚜기의 재앙이 내린다면 네가 나의 전을 향하여 기도하라 그러면 내가 하늘의 문을 열고 이런 재앙들을 물러나게 하리라. 무슨 뜻이냐하면 자연적인것들끼리만 연결되어서 결과를 산출해낸다면 자연적 지혜 하나만 있으면 성공을 거두겠지만 때로는 꼭 성공할것 같이 실패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일이 안되게 하시는 적이 있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요나입니다. 다시쓰에 가는 배를 탔습니다. 순풍에 돛을 달았습니다. 득의 만만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폭풍이 불었습니다. 성경에는 큰 풍랑이 대작하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성경에 보면 하나님이 폭풍을 발사하셨다고 나옵니다. 풍랑이 일 이유가 없는데 요나 그 한 인간의 버르장머리를 고치시기 위해서 바람을 훅하고 쏘신것입니다. 바람이 슝하고 날라가서 그 배만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이런 요인이 있기 때문에 결코 자연적인 지혜 그것 하나만 있는것은 잔머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도덕적인 지혜는 어디서 생기나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도덕적인 지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건강한 사람들은 보면 이번에 제가 아는 목사님이 백살이 되셨는데 설교하러 다니시고 미국 집회도 가십니다. 대단하죠? 그런데 그러한 분들은 모두 건강할 수 밖에 없는 좋은 생활의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원인과 결과가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우리의 영혼과 마음 이런것에 관한 일들에 대해서도 지혜가 있는 사람이 있고, 없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지혜를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데서 그 지혜가 나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람이 불행해지는 이유를 아우구스티누스는 교만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슨 뜻이냐면 사실 궁금한데 이런 뜻입니다. 악을 행하지 마라, 이웃을 속이지 마라, 하나님이 말하셨는데 속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불순종하지 마라 하는데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잘 지켜라 하는데 안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교만이라는 것입니다. 무슨 교만인가하면 교만은 죄중에 하나가 아니라 모든 죄를 죄가 가능하게 만들어 주는 살아있는 뿌리입니다.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그러면 왜 그런가 하면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말라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면서 그렇게 하면 네가 불행해진다 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데 이웃에게 악한일을 행하는 것은 하나님 판단은 틀렸고 내 판단이 맞다고 하는 것 없이는 그렇게 못하는 것입니다. 주일을 잘 지켜라 그래야 나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주님이 잘 모르셔서 그러는데 요즘은 그렇게 못 삽니다. 그러니 주일을 어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만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던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 진리를 깨닫고 누가 너 그렇게 살면 안되 하고 손가락질해도 말을 안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납니다. 진리를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사로 잡혀서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나의 인생에 남은 소원은 우리 하나님을 사랑하는것 뿐이다 라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는데 나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 만난 사람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머리 끝까지 올라 갔던 인간이 바닥 밑으로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지혜가 그렇게 생겨나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네가 그렇게 돈을 좋아해도 세상에는 돈보다 좋은 것이 많다 그런데 기껏하는 말이 돈이 있으면 못 사는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고 돈 밖에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 깊이 만나면 이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돈을 돈이 있어야 할 자리에 가져다 놓고 자기를 자기 있어야 할 자리에 가져다 놓음으로서 결국은 질서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지혜가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자연적인 지혜가 많은 사람은 행복하지 않아도 자연적인 지혜가 조금 부족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도덕적인 지혜가 가득하면 무지하고 조금 모자라도 아주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래서 슬기로움은 지혜가 있기 때문인데 지혜가 있는 사람은 명철합니다. 명철은 뭐냐면 슬기로움은 총체적인 것이고 명철한 것은 하나 하나를 보면서 정확하게 판단을 내릴수 있는 명석함입니다. 혼돈이 오지 않고 명석하게 판단을 내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슬기로운 마음을 가질때에 거기에서 명철함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명철함입니다. 슬기로움은 지혜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슬기로운데 그러면 어리석음은 무엇을 소유할때에 어리석어질까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도 됩니다. 지혜가 빠지거나 모자라면 충분히 어리석어 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엇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것이 아니라 슬기로워 지는 것은 지혜 때문에 슬기로워지는데 어리석어지는 것은 무엇 때문에 어리석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혜가 없기 때문에 어리석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십시요. 하나님을 만나고 자기가 누구인지를 깨닫고 주님을 깊이 사랑하게 되면 슬기로워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이 부패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것을 잃어 버리게 되면 잃어버리는 만큼 저절로 어리석음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어리석음과 슬기로움의 관계는 빛과 어두움의 관계와 같습니다. 어두움은 빛을 가리면 어두움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두운곳을 밝게 하려면 불을 비추어야 하지만 밝은 것을 어둡게 하려면 어둡게 하려는 무엇을 집어 넣을 필요가 없고 불만 끄면 저절로 어두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아무리 캄캄해도 빛이 들어오면 어두움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물러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슬기로움이 있지만 그 지혜가 제거되고 나면 영혼은 혼탁해지면서 어리석음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을 이렇게 보면 자기도 실수를 하지만 어쩜 저렇게 불행해 질 수 밖에 없는 길을 한걸음 한걸음 걸어갈까? 정말 신기할 정도로 그렇게 한걸음 한걸음 걸어가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슬기로울 때 명철함이 생기듯이 어리석을때는 미련함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하다고 하는 것은 원인과 결과가 연결이 되어서 마지막에 어떤 좋을 결과 나쁜 결과를 만들어 낼지 이 모든 연결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서 미련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판단의 능력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이것도 자연적인 미련함이 있고 도덕적인 미련함이 있는 것입니다. 자연적인 미련함은 선악과는 상관이 없이 일을 하는데 워낙 답답하고 미련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연적인 지혜가 부족한 것입니다. 그런데 도덕적인 미련함은 내가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하나님 앞에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판단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해서 결국은 판단을 그르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도덕적인 미련함입니다. 그래서 신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슬기로워지고 슬기로운 정신과 마음을 가지고 삶의 상황상황마다 명철함으로 판단해서 미련함을 피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살면서 기회는 지혜로운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미련한 사람에게도 주어집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에게는 그 기회가 반드시 불행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 보십시요. 돌을 물매에 매는 것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돌이 여기에 하나 있습니다. 그러면 이 돌은 이 사람이 판단을 잘못해서 던져 보았자 몇미터나 나갈까요? 한 30미터 나갈까요? 보통 사람이 던지면 30미터 쯤 나갈 것입니다. 그러면 30미터 밖에 있는 사람은 안전합니다. 절대 다치지 않습니다. 이것을 물매에 매면 200미터까지 날라 갑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차라리 명예가 없었더라면 30미터 안에 있는 사람만 피해를 당했을텐데 이번에는 명예가 주어지니까 사정거리가 길어져서 저 멀리까지 날려 보낼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련한 사람이 그런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사회의 큰 불행이고 수 많은 사람의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잘 준비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입니까? 이렇게 하나님 앞에 슬기로움과 명철함이 있어 하나님이 그에게 사명을 맡기시든지 기회를 주시든지 할 때 그 기회 때문에 훌륭한 유익을 얻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준비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모든 지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는 가운데서 계속 이 빛들이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여러분들의 인생은 많은 물질과 재물이 있어도 슬기로움이 없는 인생보다 훨씬 아름답고 값진 인생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을 사랑해야할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 1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3/30)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2008/04/06)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3 (2008/04/13)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5/04)
2.어리석은 자의 자랑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아도 슬기로운 자는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느니라" (잠14:18)
기업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가나안 땅에 가서 각 지파별로, 가족별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땅입니다. 그래서 이제껏까지는 남의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고 또 해방된 후에도 방랑생활을 계속했지만 이제는 땅을 기반으로 두고 그 땅에서 경작을 하고 농사를 짓고 가축을 치면서 그렇게 생활을 하는 것이 이제 가나안을 들어가고 난 다음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런 땅도 없고 기업이 없어 종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이런 기업을 얻게 되었으니까 사실 그것은 굉장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기업이라고 하는 말은 종의 생활을 해 보고 노예살이를 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기업이 그렇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주 의미가 큰 것이었습니다. 그 기업을 가지고 있다 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자신의 삶의 터전이 자기에게 있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기업을 잃어버리고 나면 신분 자체가 결국은 종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빌론에 끌려갈때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기업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종살이를 하게 된것 아닙니까?
그렇게 중요한 것이 기업인데 오늘 어리석은 사람은 어리석음으로 기업을 삼는다고 했습니다. 대게 어리석은 사람들이 고집이 쎄고 머리가 나쁜 사람들이 완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 어리석음을 숙명처럼 여기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남이 무엇을 이야기할때에 귀담아 듣고 자기를 성찰하고 고치는 사람들은 자신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열등감에 가득차고 자기 자신에 대해 깊은 사람들이 자신의 부족함이나 잘못된것에 대해 지적해 주는 것에 대해서 견디지 못해하고 누가 무엇이라고 이야기해도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그 어리석기 짝이 없는 길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처음 태어날때부터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고 지혜가 있어서 슬기로운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살아가면서 인생의 이치를 깨닫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변화되면서 예전에는 무지했지만, 지식이 있는 사람으로 예전에는 어리석었지만 슬기로운 사람으로 계속 변해 가는 것이 인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렇게 자신이 변화되기를 싫어하고 그 어리석음을 자신의 아집으로 삼아서 도무지 변화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아마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 보면 이상하게 성격이 마치 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이 기름 바른 마루바닥을 유리신을 신고 걸어가는 것처럼 자꾸 미끄러지는 사람들을 경험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인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 상식을 따르지 않습니다. 천재들도 상식을 따르지 않는데 천재들이 상식을 따르지 않는 것은 범상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탁월한 논리가 있기 때문에 상식을 안따르는 것을 천재라고 하고, 논리는 없는데 다른 사람이 생각하지 않는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을 바보라고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이 어리석은것 그 자체에 대해서 조금도 문제를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지고 스스로 자기자신을 대견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아무리 다른 사람이 그런 사람들에게 충고를 해 주고 그리고 그 사람에게 다른 사람이 좋은 가르침을 주어도 도무지 그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던 때의 우리의 옛생활입니다. 물론 우리는 자연적인 지혜의 차원에서는 남의 말을 듣고 바꾸기도 하고 고치기도 하고 했겠지만 그러나 도덕적인 지혜 곧 하나님을 향해 태도를 바꾸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는 이러한 도덕적인 지혜의 변화는 없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보면 세상적으로는 사람이 나긋나긋하고 이야기도 잘 통하는데 주께서 말씀하기를 하고 성경을 펴 보면 마음의 문을 꽉 닫고 도무지 요동하고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을 우리들이 많이 만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한번 우리의 삶은 어떤지 생각해 보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삶고 살아가고 있지 않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가장 훌륭하며 또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 아주 확실하고 조금도 모자람이 없고 더 이상의 훌륭한 삶의 태도는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꾸준히 그 길을 걸어가고 있지 않은지 한번 보라는 것입니다. 제멋에 겨워서 신앙생활을 해가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을 대견해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정말 하나님을 만나는 기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삼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슬기로운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이 사람은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는 사람들입니다. 면류관은 존귀와 영광의 상징입니다. 이 면류관은 영광과 존귀의 상징입니다. 그런데 이 존귀와 영광의 상징인 면류관이 세상의 돈이나 권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식에 의해서 이 면류관이, 그 지식이 사람의 면류관이 된다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 면류관을 이렇게 헛된 이 세상의 영화로 면류관을 삼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누구를 존경하고 좋아하는지를 보면 그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를 알수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 사람이 좋아하고 닮고 싶은 사람이 만약에 아주 속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을 좋아하는 그 사람도 똑같이 속된 사람입니다. 친구를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듯이 그 사람이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삼기 때문에 어리석음의 탑위에 쌓아 올린 많은 자기 비슷한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처럼 되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 사람들이 면류관으로 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자랑거리는 다 지나가는것들 그리고 이 세상의 영광들 그리고 분토만도 못한것들 그리고 우리를 영원하게 할 수 없는 것들 이런것들을 자랑으로 삼고 그런것들을 구하고 그런것들을 못가진 사람들을 멸시하고 그리고 그런것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앞에 비굴하고 이렇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다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고 그리고 주님의 품에 돌아오기 위해서 세상의 모든 것들을 다 버렸는데 그리고 교회에 와 보니까 오래 예수 믿은 사람들이 자기가 버리고 온 것들을 쌓아 올리면서 자랑을 하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많이 가진 사람은 그것 때문에 다시 교만해지고 못가진 사람은 그것 때문에 속상해하고 그래서 버리고 온 그 세상이 교회안에 그대로 있더라는 것입니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안 믿었을때에만 어리석은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못 믿어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이 지혜는 총명의 소관사항이기 때문에 신자는 한번 하나님의 빛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어리석음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이지만 신자안에 있는 이 총명의 빛은 불변적인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은혜 가운데 있을때에는 만물을 바라보는 모든 질서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상합하여 모든 것들을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지만 은혜로부터 멀어지고 영혼의 어두움이 오게 되고 인간의 마음이 더러운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그 마음에 예전에 가득찼던 총명의 빛은 잃고 흐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예는 성경속에 너무나 많이 나오지 않습니까? 젊은날에 총기 가득하던 다윗이 후일 범죄하고 하나님 앞에 큰 죄를 짓게 된 것도 그의 총명이 흐려졌기 때문입니다. 왕이 된 후에 그렇게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바라 보았던 아사나, 히스기야 임금이 마지막에 가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게 된 것도 결국은 영혼의 총명이 흐려진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이 총명, 지혜라고 하는 것은 항상 가변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때에만이 지성이 명료해져서 모든 사물의 이치를 올바르게 보고 하나님과 자기의 위치가 얼마나 틀리고 또 내가 찿고 갖기를 원하는 사물들이 어느 위치에 있어야 하는지를 이해할 수 있는 안목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어리석음을 기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참된 진리의 빛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빛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되는 빛이지만 그 진리를 필요로 하지 않고 진리를 거스려서 어두움속에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빛이 매우 부끄러운 것입니다. 그 진리의 빛은 항상 그를 부끄럽게 하기 때문에 어둠의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 빛을 싫어하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 있으면서도 빛으로 나오기를 싫어하는 이유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슬기로운 사람은 지식으로 면류관을 삼는다고 했는데 이 지식은 세상의 이치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입니다. 그래서 자연적인 지혜는 세상 이치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서 자연적인 지혜를 가지지만 신령하고 도덕적인 지혜는 그 도덕과 신령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짐으로서 지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기 전에는 그렇게 삶의 질서가 엉망이고 사람들과의 관계도 깨지고 위아래도 못 알아보고 인간이 마땅히 행하여야할 본분과 의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제멋대로 살던 사람이 누가 인생 그렇게 살면 안된다고 훈수둔것도 아닌데 또 훈수둔다고 말을 듣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놀라운 질서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자녀가 행복하게 되는 비결은 두가지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자녀들에게 남겨준다고 해서 자녀들이 행복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해 질 사람은 돈을 많이 가지면 돈 때문에 불행해 지고 가난하면 가난해서 불행해 집니다. 행복해질 사람은 오히려 넉넉하지 않기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되고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 물질 때문에 행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조건이 뭐냐면 이 두가지 지혜를 함께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신령한 지혜와 자연적인 지혜를 함께 가지고 있는 사람 그래서 자연적으로는 인생사는 이치를 알고 세상사는 물정을 알고 사람을 이해해서 어디가든지 사람들로부터 환영을 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어디가든지 자기의 위치와 자기의 할 일을 깨달아서 자기가 그 사람들 속에 있는 자체가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고 기쁨이 되는 그런 사람으로서 살아갈 때 그때 어디가든지 많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고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하나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또 하나는 신령한 지혜를 가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자기가 얼마나 죄인인지를 깨달을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때로는 자연적인 사람들의 질서와 신령한 하나님의 질서가 충돌을 일으킬 때 신령한 지혜가 없는 사람들은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을 버리지만 신령한 지혜가 있는 사람은 때로는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를 따라서 생활하기 위해서 가끔은 이 세상에서 자기를 편안하게 하는 지혜를 접는 것입니다. 그러한 신령한 지혜와 자연적인 지혜가 충돌할 때 자연적인 지혜를 꺽는 것 그 자체가 신령한 지혜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고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자녀가 이 세상에서 행복하고 진정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유익을 끼치며 사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예절을 잘 가르치십시요. 잘 가르치고 무조건 아이들을 우격다짐으로 가르치지 말고 하나하나 그 아이에게 예절을 가르쳐서 어디에다 그 아이를 내다 놓아도 모든 사람들과 어울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드십시요. 그것을 잘 훈련시키면 이 아이의 마음속에서 지혜가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디에 가든지 그 사람이 인정을 받고 환영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위에 신령한 지혜가 필요한데 이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영혼의 변화 없이는 생겨날 수 없는 지혜입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슬기로운 자가 그렇게 갖고 싶어하는 지혜입니다. 그 지혜는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아는데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좋은 집을 구하면 뻐기고 자랑할 마음이 생기고 좋은 차를 가지면 아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새차 산 것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생길것입니다. 좋은 새옷을 사 입으면 외출할 때 많은 사람이 볼 때 그 옷 입고 나가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생각이지 예쁘고 좋은 옷을 입고 빈방을 혼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좋은것이 있으면 사람들에게 보여 주고 싶고 그것이 사실 우리의 인생을 사는 육체의 영광입니다. 그러나 진짜 슬기로운 사람은 그런것들로 면류관을 삼지 않고 하나님을 많이 아는 것으로 면류관을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말 우리들이 부러워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그 넓은 은혜의 세계, 남이 받지 못한 아버지의 사랑, 가보지 못한 하나님의 깊고 오묘한 영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볼 때 그들의 지식이 만들어 내는 아주 풍요로운 영적인 삶 그리고 비록 가진것이 많지 않고 큰 부자가 아니라도 그 지혜안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이 진리의 빛을 나누어 주면서 살아가는 그 사람의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보면서 그 지식을 부러워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것을 별로 느껴 본 적이 없는데 사람들이 시샘을 많이 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물건 같은 것을 누가 하나 사면 따라서 사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것을 이용해서 마케팅도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가슴에 손을 얹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누구를 부러워 해 본적이 한번도 없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그렇게 부러워 했습니까? 얼굴이 나보다 예쁜것을 보고 부러워 해 본적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부러워해봐야 성취될 수 없는 꿈입니다. 원판이 틀린데... 아무리 부러워해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나보다 훨씬 좋은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 그리고 좋은 부모를 만나서 부족한 것이 없이 젊은 시절을 보내는 사람들 부럽죠? 저도 어떤때는 가끔 남의 교회에 가면 예배당의 지붕 높은 교회가 부러울때가 있습니다. 한번 설교해 보는 것이 꿈입니다. 기둥이 이렇게 많아서 많이 변화되지 않는 교인들 버티고 있는 것처럼 7개나 되는 것이 버티고 앉아서 요동도 하지 않습니까? 그래도 요동도 안하니까 교회가 무너지지 않고 서있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어쨎든간에 훤히 내려다 보이는 동그랗게 교인들이 둘러 앉아서 한번에 이렇게 예배 드릴수 있었으면 좋겠다 하는 부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정말 나보다 하나님을 더 많이 아는 사람을 보면서 시기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 왜 같은 사람인데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기가 짐승 같은데 저 사람은 어떻게 하나님을 놀랍게 깨달았습니까? 그리고 한번 부러워서 하나님 앞에 투정이라도 부려볼 그럴 마음이 생긴적이 없습니까?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요한이 이 계시록을 쓸때는 나이가 95세가 넘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합니다. 그러니까 호호 할아버지입니다. 그 할아버지가 그나마 반모라고 하는 섬에 귀향을 갔습니다. 거기에서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에게 마지막에 될 위대한 일들의 계시를 보여주시면서 이것을 너는 적어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교회에 보내거라 라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마지막날의 계시들을 적어 내려 가는데 갑자기 이제까지 보이던 것들이 다 그치고 두루마리 하나가 내려오는 것입니다. 거기에 마지막의 일들에 대한 계시들이 다 기록이 되어 있는데 열어 볼 수 없도록 봉합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달려나와서 뜯어 볼 마음을 갖겠는데 하늘에서 소리까지 들립니다. 이 두루마리는 내가 인봉한 것인데 이 두루마리의 인봉을 떼어서 펼쳐 보여줄 만한 사람은 하늘의 천사들도 없고 이땅의 사람도 없고 아무도 이것을 떼어서 열어 보여줄 사람이 없다. 어린양 예수 이외에는 없다. 그런데 자기는 어린양 예수가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보이지 않고 그래서 이 요한은 그 계시의 말씀을 보고 싶었는데 아무도 뚜껑을 열어 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핍박을 당하고 동료 모든 사람들이 고난을 당해서 순교하고 사랑하는 교회의 교우들로부터 헤어져서 절의 고도의 섬에 귀향살이를 왔어도 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상 깨달을 수가 없다 라는 사실이 하늘로부터 들려왔을 때 이 사도는 어린아이처럼 울었습니다. 희랍어 성경에 보면 크게 울었다고 했는데 그 우는 소리가 소리를 내서 애들처럼 엉엉 운 것입니다. 과연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저는 하나님을 정말 모릅니다. 하나님 정말 저를 이대로 내버려 두시겠습니까? 내게는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이 아니라 항상 있고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의 빛이, 그 진리의 깨달음이 필요합니다. 나를 도와 주십시요." 그리고 울어 본 적이 있습니까? 주의 종의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 주십시요. 내가 이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죽을것 같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내게 주시옵소서 라고 우리들이 간절히 하나님 앞에 기도해 본적이 있습니까? 인생의 곤궁한 일을 만나서 돈을 달라고, 환경을 열어 달라고, 육신의 질병이 낳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매달린적이 있지만 진리의 지식을 갖게 해 달라고 그렇게 매달린적은 거의 없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사실은 우리 인생에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분이신지를 아는 지식입니다. 여기에서 어리석은 사람과 슬기로운 사람은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렇게 이세상에 있는 것들로 자기를 꾸미고 단장하려고 하지만 모두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언젠가 한번 영국을 간 적이 있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데 가면 꼭 물건사는 곳을 들르지 않습니까? 굉장히 비싸던데 가서 이렇게 보면 허름한 바바리 코트 같은데 150만원 200만원 이렇게 달라고 합니다. 남대문 가면 7,8만원이면 살것 같은데... 거기에서 썬그라스 하나에 170만원, 바바리 코트 하나에 140만원, 200만원, 마후라 하나에 20만원, 30만원 하는 것을 사람들이 척척 걸치고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안 어울립니다. 그것 젊고 예쁜 여성이 입으면 얼마나 이쁘겠습니까? 그런데 할머니들이 그것을 하나 걸치고 오는데 뭐가 이렇게 맞아야지 이쁘지 안 어울립니다. 정말 그 옷이 고급스러워 보이면 보일수록 옷 속에 들어 있는 사람은 정말 후져 보이는 것이니다. 그것이 젊었을때는 그런것을 사 입을 능력이 누가 있겠습니까? 살 돈이 있고 능력이 있을때는 늙었을때입니다. 그냥 동네에서 스웨터 하나 입고 하는 것이 수수하고 정말 그 사람다워 보이는 것이지 절대 안 그렇습니다. 아무리 명품을 입으면 뭐합니까? 사람이 짝퉁인데... 소용없습니다. 그것은 그래서 우리의 영광이 되지 않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래서 화장을 하거나 옷을 입어도 나이를 추월하려고 하면 안되고 비슷하게 가면서 자기를 가꾸려고 할 때 우아한 기품이 있는 것입니다. 60세 되는 사람이 10대처럼 하려고 하면 치매끼가 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지 예쁘다고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우리가 정말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기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화장품과 옷으로 꾸민 그 아름다운 젊은이들도 흉내 낼 수 없는 이 내면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 인격의 향기, 하나님을 향한 지식의 향기 이런것들이 나이가 들수록 스며나와야 합니다. 그렇지않으면 아주 추한 늙은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육신의 눈이 어두워지면 질수록 우리의 영혼의 눈으로는 하나님을 잘 뵈올수 있도록 그 지식으로 충만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세계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생을 달관할 것 같은 그 지혜 그리고 나이가 들면서 젊어서는 이러한 욕망과 정욕에 시달리면서 가시밭길 같이 살아 왔어도 나이가 들면서는 찬란한 진리의 빛에 압도되어서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젊음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외모의 완전성으로부터는 멀어졌지만 아직 우리들이 만나지 못한 하나님께는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가 있는 것 같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앞에 옷깃을 여미고 나이가 들수록 체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배우려고 그렇게 많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은 돌아 가셨는데 예전에 계시던 안세훈 장로님 생각이 오늘 아침에도 그렇게 났습니다. 마지막에 돌아가실 때 제가 가서 손을 꼭잡고 장로님 지금 가지 마시고 성찬식 몇 번 더하시고 가십시요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참 그분이 놀랍습니다. 암에 걸려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병상에서 투병을 하시면서 제가 마지막 심방을 갔을 때 힘들게 일어나 앉으셔서 심방을 받으셨습니다. "목사님 제가 빨리 집에 가야 하는데 자기 깨어짐을 아직 다 못 읽었는데, 2/3쯤 읽다가 말았는데 그것 마저 읽어야 하는데요..." 늘 도서관에 나오셔서 기독교 강요를 그렇게 열심히 읽으셨습니다. 그것도 영어로... 마지막에 당신이 가지고 계시던 것을 도서관에 기증하셨습니다. 한번 가서 보십시요. 그 할아버지가 영어로된 기독교 강요를 읽으며 그렇게 감탄을 하는 것입니다. 너무 좋은 책이라고... 그것이 노년에 살아야 할 삶입니다. 욕망을 줄이 십시요. 그리고 훨씬 줄이고 진리와 접촉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그리고 젊어서는 내 마음대로 다니고 사람들과 함께 내 원하는 곳으로 다녔고 그리고 육신의 욕망에 우거진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더 가까이 다가가서 정말 아름다운 노년을 맞이해야겠다 하는 것입니다. 정말 불쌍한 사람이 뭐냐면 머리가 히끗해지면 기력도 없어지지 않습니까? 예배당에 와서 졸고 기력이 없이 사는것... 저는 정말 그렇게 노년을 맞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차라리 그렇게 맞이 할 바에는 젊고 총기 있을 때 죽었으면 좋겠습니다. 너무 비참합니다. 육신의 죽음의 그림자가 깃드는 것도 서러운데 우리의 영혼까지 그런 죽음에 깃들여져 있다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저는 가끔 연세드신분들 그렇게 예배드리고 살아가는 모습 보면 제가 많이 서러워 집니다. 나의 후의 모습을 보는것 같아서 눈물이 납니다. 단순히 불쌍해서가 아니라 육신의 죽음의 그림자가 깃들여지는 것도 서러운데 영혼까지 그렇게 잠들어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많지는 않지만 나이 들수록 육신은 죽음의 그림자에 쇠하여 가도 영혼에는 총기가 가득해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나안 농군학교하던 김용기 장로님 같은분... 연세가 그렇게 드셨는데 눈의 총기기 초롱초롱 합니다. 그런 마음, 그런 사모함을 가지고 하나님앞에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 1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3/30)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2008/04/06)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3 (2008/04/13)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5/04)
3.미련한 자의 소유
"지혜로운 자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요 미련한 자의 소유는 다만 그 미련한 것이니라" (잠14:24)
사람이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기는 참 쉽지 않습니다. 얼굴이 예쁜 사람은 성질이 좀 나쁘고 마음이 한 없이 편하고 너그러운 사람은 얼굴도 민주주의적으로 생겼고, 민주주의 라는 것은 코는 코대로 눈은 눈대로 이렇게 자유롭게... 저를 보면 아시지 않습니까? 학식이 뛰어난 사람은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기술이 모자라고 집안이 훌륭한 사람은 본인의 실력이 모자라고 하여튼 무엇이든지 가만히 보면 부러워해서 그 사람 가까이 다가가 보면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대로 없는 것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끔 이것을 같이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하나 때문에 또 다른 하나도 아주 빛나 보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이 말을 잘 하는데 삶이 말하는것 만큼 아름답지 못하면 그 말은 곧 빛을 발하게 되지만 말도 잘하는데 삶이 훌륭하게 되면 삶 때문에 말이 빛나게 되고 말 때문에 삶이 빛나게 됩니다.
오늘 성경에 보니까 바로 그런 경우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 재물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가막히게 좋은 것 아닙니까? 지혜는 뛰어나고 참 훌륭한데 끼니가 간데없이 가난하면 삶의 지혜가 아무리 많아도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겠습니까? 옛날에 어느 목사님이 황당한 일을 당했다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무슨 황당한 일을 당했습니까?" 했더니 교인이 천명쯤 모이는 교회인데 그 노회에서는 꽤 큰 교회였습니다. 자기가 옛날에 데리고 있었던 부목사가 있었는데 따뜻하게 잘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분명히 개척을 한다고 해서 나갔고 그래서 지방에 내려가 개척을 했는데 느닷없이 전화가 와서 "목사님 저 다음주에 목사님을 뵈어야겠습니다." 그래서 제자처럼 있던 부목사가 목사님 뵙고 싶다니까 그러라 했겠지요? 그런데 그 다음에 하는 이야기가 "제가 여기서 아무리 목회를 해 보아도 교인들이 모이지 않아서 안되겠습니다. 다음달에 보따리 싸서 올라가려고 하니 자리 하나 마련해 놓으십시요." 라고 하더랍니다. 그러니까 목사님이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교역자가 나가고 다른 사람이 와서 일을 하고 있는데 아무리 허물없이 가깝게 대해 주었다고 해도 기껏 개척하라고 내보내어 주었더니 불쑥 와서 하는 이야기가 다음달에 보따리 싸가지고 살기 힘들어서 서울 올라 갈테니 부목사 자리하나 만들어 주십시요 하고 이미 다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 하더라는 것입니다. 저는 아직까지 그런 황당한 일은 안 당했는데 그 목사님께 "그래서 어떻 하셨어요?" 했더니 "뭘 어떻해요? 일주일후에 올라온 놈을 혼을 내주었죠" "그래도 어떻게 그렇게 혼을 내 주었어요?" "그냥 혼을 내줄 있습니까? 할 수 없이 돈을 마련해서 봉투를 들고 가서 혼을 내주고 봉투를 손에 쥐어주고 돌려 보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하는 말씀이 뭐냐면 "아무리 책망하는 말이 훌륭하고 지혜로워도 주면서 야단을 쳐야지 말이 빛나지 먹고 살 수 없어서 부목사로 오겠다는 사람을 안된다고 거절하는 것도 힘든데 그 정신머리가 그렇게 되가지고 어떻게 목회를 하겠냐고 실컷 야단만 쳐 놓으면 그 인간이 듣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하나 또 지혜를 배웠습니다. 야단을 칠때는 무엇을 주면서 야단을 쳐야 하는구나? 그것을 또 하나 배운것입니다. 한사람이 슬기롭고 아주 지혜로운데 그 사람에게 재물까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그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니까 그 재물이 있는 것이 그 지혜로운 사람에게는 면류관처럼 느껴지는 것입니다. 같이 지혜가 있어도 돈이 없고 가난한 사람은 돋보이지 않는데 지혜가 있고 지혜롭게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사람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하게 되었고 또 그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해서 이웃에게 덕을 끼치게 될 때 그 부자는 아름다운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경은 어느곳에서도 인생의 행복이 부자가 되는데에 있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또 어느 곳에서도 성경은 가난하게 되기만 하면 아름다운 영혼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물질이 많기 때문에 그 물질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섬김속에 표현하여 강물처럼 흘러 가면서 그 사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게되고 또 어떤 사람은 물질이 있기 때문에 그 물질 때문에 방탕하고 타락하여 신앙도 잃어버리고 인생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을 망가뜨리고 아름답게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게 하는 모든 힘이 물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그 사람안에 있는 지혜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질과 지혜의 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없는 사람들이 물질을 의외로 많이 소유하게 되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저는 장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세월이 오래 흘러도 이상하게 그렇게 애달프게 매달리는데도 넉넉하게 안되는 사람들은 기도제목을 바꾸어서 돈을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돈을 지닐만한 사람이 되었는지를 자신에게 물어보고 내가 하나님 보실 때 그런것들을 맡을만한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바꾸어 보십시요. 그것이 훨씬 빨리 응답을 받는 비결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예화) 여러분 자녀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 학교다닐때도 보면 아이들이 망가지는 아이들이 누구냐하면 서울에서 하숙하는 아이들입니다. 하숙하거나 친척집에 얹혀 있는 아이들입니다. 모두 그런것은 아니고 비율로 볼 때... 왜냐하면 가끔 엄마 아빠가 오시는데 너무 측은한 것입니다. 시골이 집인데 서울에 올려 보내서 하숙집에서 눈칫밥을 먹는 것 같기도 하고 친척집에 얹혀사니까 불쌍하기도 하니까 용돈을 듬뿍 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제 문제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용돈을 듬뿍 주니까 달랑달랑 학생이 품위를 유지할 정도로만 주어야 하는데 듬뿍 주니까 그것가지고 아이들이 통제하면서 살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 친구들이 꼬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친구들은 그것을 쓰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니 질이 별로 안 좋은 친구들입니다. 그렇게 하면서 아이들이 망가져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보십시요. 하나님도 똑같이 우리가 슬기로워지는것 만큼 우리에게 물질의 복을 주실 때 그것이 우리가 행복한 것이지 분량도 안되는 사람에게 그것을 주면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이번에도 보면 경부운하를 만든다고 하는데 만들어도 걱정이고 안만들어도 걱정인것 같습니다. 만들면 걱정인것이 뭐냐면 환경의 파괴도 환경의 파괴이거니와 이 물길이 지나가는 주변의 땅값들이 다 오르고 또 졸부들이 수없이 생겨날텐데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불행해질까 하는 것이 걱정입니다. 차라리 그것 받은것 교회에 헌금이나 하면 불행해지지 않을 텐데 그 얼마나 불행해질까? 여기 안양이 개발될 때 제가 맨처음 여기 교수로 부임할때만해도 여기 하잘것 없었습니다. 그러다 안양 이쪽이 개발되면서 거름통 지고 다니면서 아침 저녁으로 밭에 거름이나 주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갑자기 10억, 20억, 30억 심지어는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그 넓은 밭이나 부쳐 먹고 살면서 별로 그렇게 소득도 없던 사람들이 10억, 20억, 30억 심지어는 100억씩 보상금이 나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불행해집니다. 그래서 제가 설교시간에 통계인용해서 예도 들어 주지않았습니까? 그렇게해서 사람들이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결국 뭐냐면 지혜가 모자라기 때문에 그렇게 불행해지게 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에게 주시면 면류관이 될 수 있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아주 심한 치욕이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람 만드시는것 만큼 우리에게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조건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말고 주님이 나에게 그런것들을 맡기셨을 때 그것이 나에게 면류관이 되어서 주님을 빛나게 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훨씬 기도 응답을 빨리 받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안 주시는 것은 주시는것 만큼 이유가 뚜렷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그렇게 기도하시면서 문제를 풀어가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니까 지혜로운 사람의 재물은 그의 면류관이라고 했습니다. 이 면류관은 무엇입니까? 큰 명예입니다. 왕이 쓰면 왕이 쓴 그 관을 보면서 그 사람이 나라를 다스리는 통치자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또 그 면류관은 모든 사람위에 뛰어난 명예요 자랑입니다. 물질이 우리에게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의 면류관은 하나님을 드러내고 주님을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면류관입니다. 우리가 물질을 통해서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요. 우리들이 그리스도의 삶 가운데에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는 것이 대부분 물질 문제 아닙니까? 교회가 분란을 일으키고 어려움을 겪는 것도 대부분 물질의 문제입니다. 겨우 사이가 좋고 평안하던 가족들의 의가 상하고 갈라지는 것도 결국은 물질의 문제가 많이 개입이 됩니다. 왜 그렇게 사랑하고 의지하여야 될 부자간에 혹은 남편과 아내간에 심지어는 동생과 형, 언니, 누나간에 그렇게 소송을 하고 이렇게 법정에서 다툼이 일어나고 하는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어디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하세요? 이런것들이 결국은 다른것이 아니라 바로 물질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자랑스러운 면류관이 아니라 물질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께 불명예를 끼쳐 드리고 물질 때문에 하나님 앞에 영광을 가리우게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물질 문제에 대해서 너그러운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손해 볼 생각을 하고 그래서 사람들과의 관계보다는 물질보다 훨씬 소중하다고 생각하는것이 지혜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에게 그것이 면류관이 되는 것입니다. 여유가 있기 때문에 가족들을 돕고 친지들을 돕고 동기간들을 돕고 그렇게 슬기롭게 사용을 하면 그것이 믿는자의 면류관이 됩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소유를 그렇게 사용할 줄 모릅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는 그 소유 때문에 결국은 스스로 자신이 물질이 없었더라면 안 그랬을 사람이 그것 때문에 큰 부끄러움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예화) 언젠가 한번 상이 났을때인데 교회개척하기 전입니다. 상이 나서 갔더니 우연히 장의사 사람하고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장의사 하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자기는 하도 많이 죽은 시체를 장사 지내어 봐서 눈치가 아주 빠르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냐면 사람이 죽자마자 온 가족이 모여서 고인을 애도하면서 한마음이 되는 초상집이 있고 눈물은 간곳이 없고 사람 죽자마자 이구석 저구석 모여서 삼삼오오 수군대는 초상집이 있다고 합니다. 대게 그 집은 어떤 집인가 하면 돈이 조금 있고 유산 문제를 가지고 아직 시체는 누워있는데 벌써부터 삼삼오오 이해당사자들끼리 모여서 수군덕거리면서 유산 분배를 가지고 다투기 시작하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야기가 재미 있습니다. 돈 많은 사람 집에 초상이 났을 때 좋은 분위기에서 장례를 치루는 집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대부분 그런 유산문제를 가지고 분란을 일으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그런것들을 분명히 해 놓고 죽으십시요. 애매모호하게 하지 말고 가장 좋은 것은 안 모아 놓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분란이 없습니다. 빚은 남기지 말고... 그런것들을 애매모호하게 해 놓고 부모가 죽거나 아니면 자식이 많은데 부모가 공식적으로 하면 되는데 그렇게 안하고 자식을 불러서 기분이 통할때는 이 집 너 줄게하고 몇일 있다가는 다른 자식을 불러서 너 줄게 하는 것입니다. 죽은 다음에는 서로 이집은 아빠가 나 준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거짓말 하지 마라 한 집을 어떻게 두 사람준다고 하냐 나 준다고 했다. 내가 녹음 한 것도 가지고 있다. 이러면서 싸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은 물질이 없었더라면 당하지 않을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미련한 사람에게는 이 물질이 결국은 그들의 부끄러움이 되는 것입니다. 어리석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을 사용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어리석음과 모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보십시요. 돈만 생기면 무조건 먹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옷도 안 입고 책도 안보고 그냥 먹는 것입니다. 옛날에 우리교회에 집사님 한분이 있었는데 부인이 남편이 하도 남루하게 하고 다니니까 "여보 내가 가서 잠바하나 사 줄게?" 그래서 백화점에 가서 "이것 어때요 여보?" "어 괜챦네" "이것 하나 싸주세요" 남편이 물어 보았습니다. "이것 얼마요?" "십만원입니다" "십만원! 여보 당신 미쳤어? 우리 살림에 이것을 사입게?" 부인이 하는 말이 "당신 먹을때는 십만원어치 잘 먹쟎아!" 그런데 옷은 안 사입으려고 합니다. 돈만 생기면 그냥 먹기만 하려는 사람들 또 돈만 생기면 무조건 옷만 사려는 사람들이 있고 화장품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별 사람이 다 있습니다. 또 돈만 생기면 아이들한테 다 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만 생기면 무조건 책만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여러 가지 아니겠습니까? 또 돈만 생기면 전축만 사들이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이 사용되는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그 사람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사람이 물질이 생겼을 때 절대로 지혜롭게 사용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합니다. 절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물질을 통해서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도 모르고 바보같은 사람들은 자기를 지혜롭게 만들어 달라고 기도하기는 마다하고 부자는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니 오늘 이 오후에도 하나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들은 한번 하나님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서 주님이 내게 무엇을 맡기시든지 간에 그것이 주님의 기쁨이 되게 해 달라고 그렇게 기도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 1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3/30)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2008/04/06)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3 (2008/04/13)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2008/05/04)
4.미련한 자의 지혜
"미련한 자의 입의 잠언은 술 취한 자의 손에 든 가시나무 같으니라" (잠26:9)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로 말하자면 인생관 같은 것을 기록한 내용을 가르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잠언은 막연하게 인생에 관해서 기록한 것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인생의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되는 그런 삶의 지혜들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게 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에는 충분한 말씀이지만 모든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또 모든 것을 말해 줄 필요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자녀들을 길러보면 아이가 슬기롭고 지혜로우면 부모가 할 말이 적어 집니다. 왜냐하면 스스로 판단해서 잘하기 때문입니다. 똑같이 성경이 우리에게 이렇게 믿어라, 이렇게 살아라, 이렇게 기도하라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그 말씀을 잘 믿고 실제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범위 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또 다른 지혜들도 많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생을 살고 하나님을 섬기다 보면 아직 경험하기 전에는 그냥 평범한 말씀으로 들렸던 것이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이 가지고 있는 참된 의미도 깨달아 지고 또 말씀을 삶속에서 구체적으로 실행하며 사는 비결도 터득하게 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들은 우리가 그 나이를 먹지 않으면 도저히 깨달아 알 수 없는 그런 진리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1학년 학생이 회심하고 은혜를 많이 받았다 할지라고 인생은 나그네와 같다는 성경 말씀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반드시 삶의 연조가 필요하게 되고 그러는 가운데 성경의 진리가 우리의 가슴속에 더 깊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잠언은 그런 와중에서 경험하게 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인생의 이치를 가르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진리이고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지만 우리가 성경 말씀을 사랑하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애쓰면 이 성경과 같은 이야기이면서도 그것을 사람들에게 성경에 입각해서 말해줄때에 마음속에 큰 기쁨과 즐거움, 행복 같은 것들이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공부를 많이해서 성경의 의미를 잘 배우는 것은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이 없지만 설교하는 사람이 인생의 경험이 풍부해서 그 말씀들을 해석해 낼 때 바르게 해석한 것이 뼈대라면 그 풍부한 경험을 통해서 거기에 피와 살과 근육을 덧 입혀 살아서 움직이는 말씀을 전달해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이치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슬기롭게 지혜로운 인생을 산 사람은 끊임없이 이 세상에서 잘 믿고 잘 살려고 분투하면서 말씀을 붙잡고 살아 온 인생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반드시 잠언이 있기 마련입니다. 신앙생활을 했는데 만약에 그런 잠언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자기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한 것이 아니라 남을 따라 신앙생활을 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인격적인 신앙의 생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은 반드시 인생이 흘러 가면서 거기에서 끊임없는 지혜를 발견하게 만들고 그것들이 자기안에 피가되고 살이되어 누군가에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하고 지혜롭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사람에게는 가장 좋은 적응성을 가지게 되지만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차도 감동을 줄 수 있는 적응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믿으나 안 믿으나 인생은 역시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미련한 자의 입에 잠언'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있을 수 없는 표현이 지금 여기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련한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사실은 잠언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잠언이라는 것은 일생을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의 교훈을 따라서 바르게 믿고 바르게 살려고 애를 쓸때에 자기화된 교훈, 자기화된 하나님의 말씀 이것이 바로 잠언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아서 미련한 자에게 잠언이 있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쨎든 잠언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잠언은 참 잠언이 아니라 잠언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 보니까 생겨나게 되는 확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인생관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너무 강조하면 안됩니다. 그것이 절대로 좋은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언론의 질문에 대답하기 어려운 것이 목회철학이 뭐냐고 하면 저는 그런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철학이 없이 어떻게 목회를 합니까 하는데 또 무슨 철학이 필요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잘 믿고 그 뜻대로 살아 가려고 애를 쓰면 그것이 철학이고 그것이 신앙이지 말하자면 철학하면 성경보다 훨씬 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것은 별로 좋은 것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답변을 하고는 합니다. 그러니까 미련한 자에게 있는 잠언이라고 하는 것은 잠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참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경속에 담긴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거기에서 만들어진 참된 잠언이라기 보다는 미련한 자가 가지고 있는 신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성경으로부터 기초를 했다고 생각하면서 가지고 있는 신념이라는 것도 사실은 그것이 얼마나 올바르지 않은 것인가 하는 것을 말씀을 더 깊이 깨닫게 될 때 알게 되는데 하물며 미련한 자가 이런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 그 신념이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동의해 주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그 신념을 손에 쥔 사람이 미련한 사람일 경우에는 이것이 그의 인생, 다른 사람의 인생을 행복하게 하는데 이바지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골에 가면 요즘은 아카시아 나무가 많이 없어졌는데 가시나무, 가시가 있는 나무를 손에 한줌 쥐고 있는데 술을 먹고 이것을 시장바닥에서 휘두른다고 생각해 보십시요. 보통일이 아닙니다. 누구 얼굴에라도 한번 긁히기 시작하면 피가 흐르는 상처를 낼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기가막히게도 미련한 자가 가지고 있는 잠언에는 술 취한 자의 손에 들린 가시와 같아 누구를 치고 누구를 때릴지 모릅니다. 그것이 술 취한 자의 마음안에 있는 신념입니다. 여러분 이런것은 어떻습니까?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이 훌륭한 것입니까? 아니면 쓸데 없는 것입니까? 훌륭한 것입니다. 약속을 잘 지키는 것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일생을 살면서 약속을 잘 지켰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해 주겠다고 약속을 하면 꼭 지킵니다. 돈을 빌리면서 언제까지 갚겠다고 하면 꼭 갚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 무슨 선물을 주겠다고 하면 그것을 꼭 실행을 합니다. 그렇게 자신이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런 신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적거나 거의 없습니다. 교회에서 그런 사람이 생활한다고 치면 자기처럼 똑같이 잘 하는 사람들은 따뜻하게 대해 줄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람이 미성숙하거나 혹은 모든 사람이 자기 같지 않습니다. 자기는 약속을 잘 지키는 일에 있어서 뛰어날지 모르지만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일에 있어서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이 훨씬 더 인정이 많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념은 자기것이 가장 중요한 신념이고 다른 사람은 하잘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됩니까? 굉장히 사이가 좋고 함께 섬기며 살아가야 할 사람이 한번, 두 번 약속을 어겼다고 해서 인간취급을 안하게 되는 일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더 중요하겠습니까? 자기 신념을 따라 약속을 잘 지키는 덕 있는 삶이 높은 덕이겠습니까? 아니면 결점과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깊이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그러한 신앙생활이 훨씬 더 높은 덕에 속하는 것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앞에 깊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성경을 통해 감화를 받고 은혜를 받으면서 가슴에 품게된 이 잠언은 절대 신념화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당부하는 것은 신념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세우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하나님의 말씀을 짓밟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죠? 모든 일에 있어서 검소하게 사는 것은 아름다운 덕입니다. 그러나 자기처럼 교육받지 못해서 검소하게 살지 않는 사람을 깔보는 것은 작은 것을 준수하고 큰 것을 짓밟는 것입니다. 결국은 사랑이 없으면 그가 가지고 있는 어떠한 신념도 그 손에는 들리어진 가시나무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들을 휘두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이 정말로 슬기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하다 보니까 그 진리를 깨닫게 되고 그 진리대로 살려고 하니까 실제로 그 진리를 따라 사는 길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깨닫게 되고 변화되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깨닫고 변화되는 과정을 통해서 잠언이 그 가슴속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흘러가는 잠언입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것이 가치 없다거나 하챦거나 오늘 있다가 내일 사라진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언제든지 하나님의 말씀아래 굴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면서 자기가 마음에 품게 된 잠언이 훌륭한 것이지만 실제로 살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깨뜨려 지게 되면 신념을 가지고 있었을때는 몰랐던 또 다른 사실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앞에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실제로 제가 들은 이야기입니다. 담임목사님이 교회에 있을때는 교회생활을 열심히 잘 하고 담임목사가 없을 때에는 교회생활을 조금 소홀히 하는 것이 잘 하는 것입니까? 못하는 것입니까? 여러해 전에 여러 선배 목사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거기에서 제가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짧은 시간의 대화인데 어느 목사님이 자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번에 교회를 두어달 비웠지! 미국도 다녀오고 집회도 하고... 그래도 교인들이... 우리교회는 참 좋은 교회야! 변함이 없어! 내가 그렇게 한달, 두달씩 비워도 교인도 안 줄고 헌금도 줄지 않고 정말 그래" 저는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 잘 모르지만 저도 비워 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한 2주 비워 보면 교인도 덜 나오고 하는데 저 교회는 얼마나 좋은 교회이길래 그럴까? 하면서 이제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데 옆에 있는 친구 목사님이 "야! 야! 집어쳐! 네가 목회를 오직 아우러지게 하면 네가 있거나 없거나 마찬가지냐? 그것은 네가 필요 없다는 뜻이야! 담임목사가 교회를 비우면 교인도 좀 줄고 헌금도 줄고 하는 것이 정상이지 네가 얼마나 평소에 목회를 아우러지게 하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 이겠느냐? 그것이 성숙한 것이 아니라 당신이 목회를 거지 같이 한다는 뜻이야!" 그리고 가만히 듣고 보니까 앞의 이야기 보다 뒤의 이야기가 훨씬 더 설득력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이 워낙 훌륭하게 목회를 했기 때문에 교인들이 말씀의 은혜를 많이 받고 워낙 성숙해서 목회자를 의지하지 않고도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교인들이 성숙한 교회는 없다고 봅니다. 우리교회도 못한 것을 그 교회가 하겠습니까? 그래서 아! 그렇구나 저분은 저것을 신념으로 가지고 있으니까 똑같은 상황을 보는 두 시선이 어떤 잠언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서 완전히 다른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신념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상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이것이 잠언이다 맞아! 인생은 이렇게 사는거야! 말씀에도 근거가 있쟎아 하고 붙잡았다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깊이 깨드려 보면 사실은 그것보다 더 넓은 경지의 신앙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붙든 이 잠언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 깨달은 것이라도 끊임없이 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으로 또다시 깨어지기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높은 신앙의 경지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워낙 등산을 싫어해서 내려올것을 왜 저렇게 힘들게 올라가나 그리고 허리도 별로 안 좋으니까 올라 가는 것이 영 그렀습니다. 그래도 한번 제가 높이 올라간 적이 있었는데 금강산에 수련회를 갔습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사모님들이 그럽니다. 나는 뒤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김 목사님은 산을 싫어해서 틀림없이 안 올라가시고 이 버스안에서 책이나 읽고 계실거야 하는 소리를 듣는데 마음이 영 그랬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를 악물고 올라가지 한번 두고봐라 하고 올라 갔는데 허리도 별로 안 좋았고 컨디션도 별로 안 좋았습니다. 이틀동안 850미터 짜리 두개해서 1,700미터를 올라 갔습니다. 정말 힘들었습니다. 태어나서 제일 높이 올라간 것입니다. 이틀 연달아서... 그래서 한줄로 서서 올라가는데 계단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쇠파이프 같은 것을 붙들고 사다리처럼 올라 가는 것입니다. 제가 왠만해서 두려움을 안타는 사람인데 한참 올라가는데 무슨 생각이 드냐면 바위에 매달려 있는 철구조물이 부지직하고 떨어지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거의 90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올라가는데 다시 내려 오는 길이 없습니다. 일방통행입니다. 이쪽으로 올라가고 저쪽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밑에서 사람이 새까맣게 올라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 내가 저 소리를 들었으니 올라가고야 만다 하고 운동화 끈을 단단히 매고 맨 앞으로 갔습니다. 우리 집사람도 버려 두고 신경 안쓰고 올라 가는 것이 목표이니까 뒤에 처지면 못 올라갈것 같아서 앞에서 올라 갔습니다. 1/3을 올라 갔는데 얼굴이 하얗게 되면서 땀이 나는데 이것은 도저히 한계입니다. 토할것 같았습니다. 매달려 있으니 밑을 보니 떨어질것 같았습니다. 누구를 위해 여기에 올라가나... 정말 올라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림에서 다 보았는데 뭘 또 올라갑니까? 그런데 올라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가지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아래서 보는 금강산과 위에서 보는 금강산이 틀렸습니다. 아래에서는 밑에서 보면 보이기는 보이는데 그저 높이 있는 것만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백미터, 오백미터, 육백미터, 팔백오십미터 올라가고 정상에 올라가니까 정말 발 아래 산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마음속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인생도 이렇겠구나! 그런데 저 처럼 산에 오르기가 싫어서 더 높이 올라가지 않고 땅바닥에 앉아서 다 보았다, 다 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의 세계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영적인 수준이 높아지고 진리에 대한 깨달음이 상승하면 상승할수록 똑같은 인생인데 상승할수록 상승된 곳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또 다른 인생을 보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걸을 한걸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많은 선조들이 우리의 믿음생활을 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가는 것에 비유를 했던 것입니다. 점점 더 거룩해지고 진실해지고 순결해지는 면에서 영광의 주님을 향하여 올라간다기 보다는 그것도 포함하지만 더더욱 인생을 바라보는 이 지혜에 있어서 점점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렸을때는 판단이 미숙하고 가슴에 다가온 작은 지혜를 붙들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인생에 대해서 자신이 잠언을 소유한 것처럼 붙들지만 그것은 자칫하면 어리석은 자의 잠언과 같아서 자기처럼 생각하고 자기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을 상처내고 그 가시나무를 휘두르면서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기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면서도 신념이 강한 사람들하고 사귀지 마십시요. 반드시 상처를 받습니다. 좋은 사람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며 주님이 주시는 기회를 꼭 붙들고 날마다 확신 있는 삶을 살지만 언제든지 주님의 말씀이 나를 깨뜨리면 깨어질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어제의 잠언보다 더 나은 잠언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 어제 발견한 인생의 이치가 더 아름다운 인생의 이치에 의해서 바뀌어질 때 기꺼이 더 높고 좋은 가치를 붙들수 있도록 진리를 향해 자기를 개방한 사람, 그 사람의 삶은 썩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흐르는 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쭉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면 흐르는 물이 썩지 않듯이 우리의 신앙생활이 썩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안에 이 깨달음이 계속 마르지 않고 흘러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어리석은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 없이 도를 찿으려고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신앙생활은 구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길이라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 대신 그리스도 예수를 따라서 구도의 삶을 사는 것이지 그리스도 없이 성경없이 진리없이 막연하게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세 개를 눈감고 묵상하면서 우주 속에서 도를 찿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식으로는 도가 발견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도는 둘도 아니고 셋도 아니고 오직 하나 그리고 우리의 도는 감추어진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통해 이미 드러난 도입니다. 그리스도를 깊이 사랑하고 그렇게 매일매일 이 지성속에서 새로운 깨달음이 우리안에 있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부패하지 않고 끊임없이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훌륭하게 산 사람들은 언제나 그렇게 살지 못한 사람들을 얍잡아 보게 되는 마음이 있게 마련이고 높은 가치를 찿아서 살던 그렇게 자신의 입지전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깔보는 마음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에 붙들려서 끊임없이 그 도를 깨달으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늘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깨뜨려져 새로운 잠언을 소유하며 산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오히려 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미련한 인간인가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런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그리스도를 굳게 믿고 날마다 자기 깨어짐속에서 새로운 잠언을 만들어 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빕니다.
어리석음과 미련함에 관하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