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2009년 설교모음)
설교기간|2009년
편집내용|녹취원본
출 력 일|2013년 3월 23일
목 차
1. 하나님과의 관계(대하7:14) 2009.1.12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
2. 성도와의 관계(마5:23-24) 2009.1.13 새해말씀사경회(새벽) 7
3. 목회자와의 관계(히13:17) 2009.1.14 새해말씀사경회(새벽) 14
4. 교회와의 관계(살후3:14-15) 2009.1.15 새해말씀사경회(새벽) 23
5. 남편과 아내의 관계(벧전3:1-7) 2009.1.16 새해말씀사경회(새벽) 30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1 (09. 1. 12 새해 말씀사경회 새벽)
1.하나님과의 관계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구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지라”(대하 7:14).
이번 사경회 때 새벽의 시간에는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하는' 이라는 큰 주제로 하나님과의 관계부터 시작을 해서 하나씩 하나씩 다섯 개의 관계를 다루어 가려고 합니다. 오늘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은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이제 말하자면 하나님의 전을 다 짓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그것을 봉헌할 때에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 기도의 응답으로써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밤에 나타나셔서 그래서 이제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 여기에 나옵니다.
결국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과 우리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살아가느냐에 의해서 우리의 삶은 훨씬 달라지게 마련이죠.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은 매일매일 현실에 코를 박고 살아가다가 보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그리고 이 세상에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만 보이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실지로 우리 인생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은 그 원인과 결과가 모두 우리의 현실 생활 속에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인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그 어려움의 원인이 이 땅에 있고 우리가 또 현실적으로 어떤 좋은 일을 만나게 되면 그렇게 은덕을 베풀어준 사람이나 환경이 현실에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를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는 모든 원인과 결과들이 이 현실 안에 다 있다고 생각하기가 십상이에요. 그렇게 되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속에서 연결을 찾고 하나님에게까지 안 가게 되기가 아주 쉬운 거죠. 그래서 그런 생각을 하면서 살다가 보면 사실은 하나님은 보이지 않게 되는 거죠. 그러면 이 세상에서 자신의 행복과 불행의 모든 원인이 이 세상의 원인도 있고 결과도 있고 하는 것을 생각을 하면서 살아갈 때에 그 사람이 현실에 몰두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죠.
그런데 사실 이러한 원인과 결과들이 이 세상에 다 있지만 궁극적으로 그 모든 것들을 조합하고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현실에서 신앙을 통해서만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은혜를 많이 받고 하나님의 말씀이 언제나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예배드릴 때마다 기도할 때마다 현실적으로 늘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제 은혜가 사라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화도 그치고 이렇게 모든 것들이 비뚤어지게 되면 그러면 남는 거라고는 우리의 눈, 코, 귀, 입을 통해서 들어오는 이 세상에 대한 정보밖에는 남는 것이 없어요. 그런 사람이 영적으로 생각을 하고 신령한 방향으로 이 모든 것들을 판단하면서 그렇게 생활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거거든요. 그래서 이제 우리가 은혜 생활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런데 오늘 여기에 보면 그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하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사하고 그 땅을 고칠 것이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이 땅이에요. 이게 오늘 우리의 맥락에서 보면 우리는 대부분의 사람이 땅에서 뭘 일구어서 먹는 사람이 아니니까 그러니까 그저 실감이 잘 안 나지만 이 시대로 돌아가서 생각을 해보면 모든 것이 땅에 달려 있습니다. 땅은 그 당시 사람들의 운명이에요. 왜냐하면 먹는 모든 곡식과 필요한 모든 것을 땅에서 얻었어요. 왜냐하면 농경사회였기 때문에 땅에서 이 곡식이 나지 않으면 가축도 없고 그 다음에 집도 없고 그 곡식을 가지고 먹고 살 양식도 없고 하면서 전체적인 기근이 들게 되고 기근이 들게 되면 나라의 통치가 어려워지게 되죠. 그리고 기근이 들게 되면 전쟁이 일어나게 되죠.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서 땅이라고 하는 말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 치명적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여호와의 전을 모두 마치고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하고 있던 그때였는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죠. '내가 네 기도를 듣고 여기에다가 전을 삼았으니' 그러면서 부정적인 말씀부터 하시는 거죠.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고 메뚜기가 나오고 이러이러한 많은 환란이 오게 될 때가 있는데 그때가 바로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않는 때다. 그래서 하나님이 하늘을 닫으면 비가 내리지를 않아요. 땅이 모두 마르고 경작을 할 수 없이 흉년이 들어요. 그러면 거기에서 온갖 피폐한 일들이 일어나는 거죠. 그러니까 이렇게 모든 사회의 기초들이 무너지는 거죠. 풍년이 들이 모든 게 넉넉하면 강력사건도 안 일어나고 사람들이 평안하고 인심이 넉넉해요. 그런데 흉년이 들고 끊임없이 땅을 재앙을 당해서 먹을 것이 없어지면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그 다음에 사람들 사이에 이 친절하고 너그러운 인정도 사라지게 되는 거죠. 이럴 때에 그런 원인이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이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시지 않기 때문이다 는 거죠.
신앙의 첫 번째 발걸음은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 나의 영혼, 그리고 나의 육체를 위해 필요한 모든 자원, 육체를 위해서는 이 땅의 자원이 필요하고 영혼을 위해서는 하늘의 자원이 필요한데 이 모든 자원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분이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 분이 닫으시면 열자가 없다. 이것이 신앙의 첫걸음 이예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1년 동안 자신이 힘껏 벌어서 먹고 살았으면서도 그것은 수단일 뿐이고 결국은 나에게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고 일 년을 영위하면서 살 수 있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이에요. 그게 신앙이에요.
그러면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원하시는 간절하고 궁극적인 기대가 무엇이겠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하나님을 잘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것이 우리의 겉 행실에서뿐만 아니라 마음속과 일치해서 그 주님을 높이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겠어요? 그러면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아도 결국 우리의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 모든 것을 아시고 그리고 우리에게 진짜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 아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결국 그 모든 것들을 사용해서 우리를 그러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뜻으로 우리를 이끄시지 않겠어요?
여러분들에게 만약에 자녀가 있다면 그 자녀가 여러분의 뜻대로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부모인 여러분들의 마음이라면 모든 것을 가지고 자녀를 그런 쪽으로 인생을 살도록 가르치지 않겠어요? 때로는 회초리를 들고 야단을 칠 때도 있고 때로는 용돈으로 잘 달랠 때도 있고, 때로는 상을 걸고 이렇게 이렇게 하면 이렇게 주겠다라고 자녀들을 다루면서라도 결국은 사람다운 사람을 만들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이지 않겠어요? 우리가 죄 많은 불완전한 부모라도 자식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러면 이 참되신 부모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를 향해서 이런 마음을 얼마나 더 많이 가지고 계실까 생각을 해 보세요. 사람이 신앙이 떨어지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문제를 생각하려고 하는 생각이 사라지고 그리고 오직 이 땅에서의 원인만을 가지고 찾아서 사람을 미워하기도 하고 원망하기도 하고 하나님 없이 사람에게 메이기도 하고 하는 인생을 사는데서 모든 불행이 유래되는 것이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땅을 내가 고쳐줄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이 육체를 위해서 나오는 필요한 모든 자원들을 사실은 땅이 가지고 있고 그 땅을 주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그래서 이 성경적으로 보면 이스라엘의 육적인 번영과 영적인 하나님과의 관계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땅을 고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들의 땅은 어떻습니까? 건강합니까? 이 땅이 건강하고 건강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놀라운 차이가 있는지 모릅니다. 그 북한에 갔을 때에 이야기를 들어보니까 이 한 정보에 북한에서는 4톤의 쌀을 내고 내 말 들어보니까 그것도 과장된 거고 그저 3.5톤 정도 보면 된다고 해요. 남쪽에서는 한 정보에 얼마나 쌀을 거두냐 하면 7.2톤을 거둔대요. 그러니까 똑같은 넓이의 땅에서 북한에서는 절반이 약간 안 나오는 거죠, 곡식이. 그래서 우리가 비료를 보내줄 때에 북쪽에서 그렇게 고마워하는 이유가 비료를 50만 톤을 보내주면 정확하게 50만 톤의 곡식이 더 생산이 된다는 거예요. 비료를 가지고도 땅이 이렇게 많이 움직이는데 하나님이 그 땅을 병들게 하시면 그 땅에서 무엇이 날 수 있겠는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래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어려움을 만나고 물질적으로 곤궁하고 병이 들고 많은 어려움을 만나게 되는데 이런 것을 보면서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하고 묻지만, 신앙의 눈을 갖고 보면 그런 어려운 모든 일들 속에 하나님의 목소리가 숨겨져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무엇인가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싶은 것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아주 세밀하게 우리의 인생을 어머니처럼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모든 것을 알고 우리에게 발생하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우리를 이끄셔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 가운데 우연한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에요. 그런 속에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 신앙이에요.
그래서 우리들이 은혜에서 멀어지고 방황할 때에는 우리의 영적인 생각들이 막 파편처럼 흩어져 있는데 말씀을 깨닫고 은혜를 받고 깊이 변화되면 놀랍게 이 마음과 생각이 하나로 모아져요. 하나로 놀랍게 모아져서 그래서 모든 것들이 아주 분명하게 보이는 거예요. 그게 바로 은혜가 가져다주는 유익이에요. 그래서 은혜에서 멀어지게 되면 제일 먼저 혼란이 오는 게 이 머리예요. 머리에서 부터 혼란이 오기 시작해요. 은혜를 받고 나면 제일 먼저 맑아지는 게 머리와 마음이에요. 그래서 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아주 분명한 인식이 생겨나게 되는 거죠.
하나님이 그 땅을 고치셔요. 아주 쉽게 얘기하면 지금 여러분들에게 일어나는 힘들고 어려운 모든 일들이 결국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어요. 그래서 인생을 사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예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온 과거를 보면 우리에게 일어나는 힘들고 매우 어려운 일이 있었지만 그러나 사실 나중에 지나고 보면 그것이 축복의 통로였던 것을 발견할 때가 많이 있어요. 좋고 그리고 아주 행복한 일처럼 여겼지만 그러나 사실은 알고 보면 그것이 유혹이고 시험이었다고 깨달아지는 때가 많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제일 먼저 올바르게 해야 될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다 라는 것이에요. 거기에 초점을 맞추어서 먼저 하나님 앞에 문제를 해결하려고 해야 해요. 어제도 성경을 보다 보니까 예수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아라 이것은 다 이방사람들이 구하는 것이고 하늘에 계신 천부께서는 너희에게 있어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아시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리라’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않고 자신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고 몸부림치면 반드시 하나님 앞에 불신앙의 죄를 짓게 되는 거죠.
그래서 제일 먼저 여러분들이 해결해야 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하는 것이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땅을 고치는 것과 함께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죄를 사해 주시는 것이에요. 그래서 이 죄를 사해주는 것과 땅을 고치는 것이 밀접한 관계에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이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 앞에 그 관계를 고치는 것이 땅이 다시 축복을 받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에요.
한번 미국에 갔을 때인데 어딘지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어쨌든 공원을 갔는데 큰 나무들이 엄청 많아요. 근데 그 나무를, 쓰러진 나무를 이렇게 뚝 잘라 놓은 거예요. 상처럼 이렇게 둥그렇게. 세워놨는데 얼마나 큰지 내가 섰는데도 내 키보다 훨씬 더 커요. 그 나무의 지름이 한 2.5m 정도 되요. 거기에 막 수많은 나이테가 있잖아요. 그 나이테에다가 표시를 했어요. 요때 에는 1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2차 세계 대전이 있었고, 뭐 남북전쟁이 있었고 쭉 이렇게 표시를 해 놓았어요. 그런데 참 놀라운 게 뭐냐 하면 이 나무가 이 나무가 나이테가 있잖아, 근데 그 나이테를 보면 그 땅에서 뭔가 힘들고 어려운 일이 일어났을 때는 그 나무의 나이테에 그 사연이 다 나온대요. 식물학자들의 얘기예요. 나이테라고 하는 것이 뭐예요. 여름에는 수분과 햇빛, 온도가 높으니까 쭉쭉 자라고 겨울에는 추우니까 조금 자라잖아요. 그러면 조금 자란 것들이 이 나무의 밀도가 조밀해져서 테를 형성하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쉽게 얘기하면 무르게 자란 부분하고 단단하게 자란 부분 그 나이테 두 개가 합쳐져서 그게 하나가 되는 거거든요. 그게 정확하게 나이테 표시가 쭉 되요. 그런데 그 땅에서 커다란 사고가 일어난다든지, 전쟁이 일어난다든지, 살인이 이루어진다든지 하는 그런 힘든 일들이 일어나게 되면 그것들이 그 나이테 속에 다 표시가 된다는 거예요. 신기하잖아요. 이 땅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들도 인간이 그렇게 고통을 받고 괴로움을 당하게 되면 그것들이 그 나이테 속에도 다 나타난다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땅을 하나님이 고치시는 것과 인간의 영혼과 하나님과 맺은 그 관계가 그대로 거기에 투영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들이 아주 쉽게 얘기해서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서 우리가 이 땅에서 번영하는 삶을 살려고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 없이 번영하고자 하는 불신앙이에요.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생활이 당신을 의지하지 않고 독립하는 생활이에요.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중대한 모욕이에요. 그래서 결국은 하나님이 우리를 치시고 때리셔서 마지막에 고치시는 것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고 나는 납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고, 복종할 수밖에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고 그리고 주님의 은혜로 나는 손끝 하나라도 움직이면서 사는 백성일 뿐입니다. 그런 의존과 사랑의 마음을 갖게 하시는 하나님이 우리를 연단하시는 이유예요.
그러니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치는 것 없이는 여러분들의 삶의 형통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이에요. 그래서 정말 하나님은 우리를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들이 만약에 하나님의 말씀의 은혜에 목마르고 그 은혜에 주려있을 때에는 하나님이 말씀의 은혜를 우리가 불순종하게 되면 말씀의 은혜를 거둬 가셔요. 근데 그것도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있을 때어야지만 하나님이 말씀을 주시다가 끊으시면 막 안타깝고 절절한 마음이 들지 아 이거 뭐 한 달, 두 달 가도 성경을 거의 읽지 않고 예배를 드려도 설교를 통해서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맛보는 경험을 사라지고 심하게 되면 마음에 갈급함 조차도 느끼지 못하는 무뎌진 상태가 되는데 그때 그것을 끊는다고 해서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 간절하게 움직이지를 않는다는 말이에요. 왜냐하면 그것은 영적인 것들이니까.
그런데 그러다가 결국 그렇지만 아무리 은혜가 떨어져도 은혜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예민해지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이 세상에서의 물질생활에 대해서 예민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돌이키게 하실 때 이 세상에 있는 사물들의 질서를 움직이셔서 결국은 아, 이제는 내가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하는 거예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이 일어나서 하나님 앞에 불순종하다가 전쟁이 일어나서 이방 민족에게 짓밟힘을 당하고 실컷 고생을 한 후에 하나님 앞에 다시 주님을 찾게 되는 거죠.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고 큰 곤란이 임할 때 하나님 앞에 용서를 구하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하나님 앞에 매달리고 변화 되게 되요. 그래서 해야 될 일이 뭐냐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는 것이다 는 것이에요. 거기에서부터 먼저 시작을 하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불순종한 것들을 고백하면서 그 죄를 먼저 사함을 받을 때 하나님이 그 땅을 고치시는 것이에요.
[28:00]그런데 오늘 어떻게 그렇게 죄 사함을 받고 이 땅을 하나님이 고치시는 축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해서 이야기가 나오는데 세 가지예요. 그게 뭐냐 하면 첫 번째가 순종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악한 길에서 떠나서’ 길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계속 걸어서 그것이 자신의 일상이 되어버린 것을 이야기해요. 거기에서 돌아라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 앞에서 불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깊이 생각해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해 주셔야 될 것을 먼저 생각하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언약 백성으로서 주님 앞에 팽개치고 살아왔던 것들을 돌아봐야 해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 현저한 나의 불순종이 무엇인가 맡겨주신 사명 중에 내팽개치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없는가? 그리고 내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그런 불순종은 없는가? 이것을 돌아보면서 주님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서 그러면서 먼저 그 불순종에서 떠나야 한다,
두 번째는 마음을 겸비하게 하는 것이에요. 이 겸비한 표현이 성경에서 많이 나오는데 항상 참회를 무릎을 꿇고 제를 옷을 찢으며 하나님 앞에 자기는 티끌에 불과할 뿐이고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하면서 하나님 앞에 낮아지는 거예요. 그렇게 낮아지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은혜에 대한 사모함,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목마름 이 모든 것들은 결국은 겸비한 마음에서 오는 거죠. 그래서 주님을 만나야겠다는 아주 절박하고 간절한 마음, 이것이 겸비한 마음이에요. 그래서 마음을 잘 다스리면서 그러면서 불순종하게 되면 우리의 마음이 굳어지게 되요, 강퍅하게 되요. 그런데 하나님 앞에 마음을 낮추게 되면 주님 이외에는 우리에게 희망이 없구나 하는 생각이 생겨나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은혜 받을 때가 되면 하나님 외에는 아무 희망이 없구나 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요.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의지하는 마음이 생겨나게 되는 거예요.
세 번째는 마지막으로 뭐냐 하면 기도하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성경에 보면 ‘네 얼굴을 구하며’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냐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것을 하나님 앞에 많이 구해도 하나님의 얼굴은 전혀 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얼굴을 구한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면전에서 살기를 원한다라고 하는 뜻이에요. 하나님 없이 번영하기 보다는 하나님과 친교를 누리면서 차라리 고난을 받겠습니다 라는 삶이예요. 왜냐하면 하나님 없는 번영은 그 마지막이 불행이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는 고난과 어려움은 마지막에 영혼의 큰 유익과 그 다음에 축복을 가져다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하나님 자신의 얼굴을 구하며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마음은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 앞에 올바르게 하기 위한 마음과 일치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할 때 자신의 영혼은 가장 사랑받게 되고 하나님의 얼굴을 전심으로 구하며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할 때 그때에 자신의 영혼을 위해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 거죠. 근심과 어려움이 많이 있으면 우리가 기도하기가 어려워지죠. 그때에 성도들은 생각하기를 이렇게 어려운 일들이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내가 기도를 못한다고 생각을 해요. 그런데 실지로 그런 문제들이 잘 해결이 되어서 편안한 환경이 되면 그 기도생활에 변화가 일어나는 게 아니라 똑같이 더 기도를 못하게 되요. 결국 기도 하게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불순종에서 떠나고 하나님 앞에 자기를 낮추는 겸손과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주님 앞에서 살기 원하는 마음이 기도하게 하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예전에 은혜 받던 때를 보면 환란과 어려움이 일어나면 그것 때문에 기도를 더 많이 했던 기억이 나죠. 그러니까 신앙이 떨어지고 은혜가 사라지면 환란과 어려움 때문에 기도를 못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진짜 은혜를 많이 받고 나면 은혜를 받을 때가 되면 환란과 어려움 때문에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매달리게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들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거죠.
그래서 제일 먼저 불순종에서 떠나고 그래서 마음을 낮추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매달려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먼저 우리의 영혼을 치료하시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시고 우리의 땅을 고쳐서 그래서 하나님 앞에 새로운 삶을 살게 하시는 거죠. 결단을 하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서 이 축복의 통로를 다시 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성도와의 관계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에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 5:23-24).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2 (09. 1. 13 새해 말씀사경회 새벽)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을 살아갈 때는, 그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르기만 하면 하나님이 그 관계를 통해서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우리가 몸으로는 이 세상에 살고 있고 영혼으로는 주님께로부터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능력을 따라서 승리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육체를 위해서는 이 땅에 있는 자원들을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여러분! 우리들이 어려움을 당하지 않을 때에는 모르지만 정말 어려움을 당하고 나면 우리가 이 땅의 자원들을 적절하게 누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건강을 잃고 큰 고통을 당한다든지, 사업에 위기를 만나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든지, 이러한 어려움을 만나게 되면 우리가 정말 이기면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에도 하나님이 끊임없이 베풀어주시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해서는 이 땅의 자원들이 필요하고 영혼을 위해서는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자원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이 끊임없이 베풀어 주시는 두 가지 자원을 힘입어서 우리들이 겨우 하나님 앞에 살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위에서 보신 적이 있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우리가 부러워할 정도로 여유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하늘로부터 부어지는 은혜의 자원이 없으면 그 삶은 너무나도 비참하고 핍절합니다.언젠가도 제가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제가 전도사로 섬겼던 교회 바로 옆에 우리나라에서 내노라하는 재벌이 살고 있었습니다. 집이 얼마나 넓은지 집 안에 농구코트까지 해놓고 경호원의 경호까지 받으며 생활하던 사람이, 모두 부러워하는 대한민국 재벌의 회장이 어느 날 신문에 났는데, 안방에서 부엌에서 칼을 가져다가 온 몸을 난도해서 결국은 자살에 실패한 것으로 신문에 났습니다. 그러니 하늘의 자원이 없는 것이 그 사람을 얼마나 비참하게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이와 같이 하늘의 자원을 하나님이 끊임없이 이 땅의 자원과 함께 공급해 주시니 그 첫 번째 통로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올바르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담대하게 기도하면 됩니다. 기도할 수 있으면 우리는 살 수 있습니다. 마음에 구김이 없이 하나님 앞에 이 땅의 자원이 없어 고통을 당할 때에 긍휼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호소하고 우리의 영혼이 곤고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에 이기면서 살수 있는 하늘의 자원을 부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든지, 피할 길을 알려주시든지, 끄덕없이 이길 힘을 주시던지 셋 중의 하나 아니겠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우리를 이끄시고 새 힘을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잘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는 것입니다.가만히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우리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 우리가 간절하게 간구해서 이루어 주실 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얼마나 굳은 확신을 갖게 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 있으면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도 주시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주시지 않는 것을 통해서 하늘의 자원을 많이 공급받습니다. 사도바울이 다니며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다가 말로는 찌끼같이 되고 마음으로는 사형선고 받은 사람처럼 되었는데, 그런 가운데서도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했더니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은혜의 과정으로 그 고난이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때에 간절히 기도해도 안주실 때에도 하나님이 안주시는 것 같아도 안주시는 그 과정을 통해 우리의 영혼에 정말 필요한 것을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입니다.또 하나님이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실 때, 피할 수 있는 길을 주실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참 놀랍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된 사람들이 곤경 속에서 누리는 이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라는 것은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반드시 포함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시지 않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맺은 관계로 보이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는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보이지 않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뿌리로 보신다면, 우리의 보이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열매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율법과 선지자의 관계를 말씀하실 때에도 마음과 뜻과 성품과 목숨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도 이와 같으니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던 것입니다.이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우리가 성도와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이 두 번째 축복의 통로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기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신 분으로서 모세의 율법에 담긴 말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시는 장면이 나옵니다.모세의 율법을 보면,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된다. 이것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십계명에 나오는 계명일 뿐 아니라, 또 다른 곳에서는 이 계명을 어기면 하나님 앞에 당하게 될 형벌에 대해 나옵니다. 그것이 바로 살인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살인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계명가운데 부모님을 공경하라는 계명과 더불어서 가장 중요한 계명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고대 초대 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면 살인한 사람은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이라고 규정할 정도로 이 죄를 무서운 죄로 생각한 것입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살인을 하지 않으면 내가 이 계명을 어긴 적이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의 껍데기는 살인을 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그 계명을 주실 때 하나님의 마음은 이런 것이었노라 하고 백성들에게 율법의 껍질 속에 담겨진 내용이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미움의 마음이었습니다.그래서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일러주시면서 형제에게 노한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게 라가라 한 자가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욕한 자마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사람들은 이 부분을 읽으면서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인데, 어떻게 여기에 보면 형제를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한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자라 욕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된다그러면 두 가지 혼란이 오게 되는데, 하나는 우리의 구원은 행위로 얻는 것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형제에게 분노하고 형제를 모욕하고 이렇게 사소한 욕을 한 사람이 지옥에 가게 된다면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그러나 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러한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을 사람들의 영혼과 마음의 특성과 경향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형제에게 노하고 형제를 미워하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심판을 받아서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을 사람들의 특징은 바로 이 미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람들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유혹해서 성도와 올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인격적인 특징이라는 것입니다.
구원받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미 그 영혼을 하나님이 살려주신 사람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 다시 살아나게 된 사람들의 특징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진리에 굴복하고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을 뜻을 가르쳐주면 여러 가지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 굴복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우리 구원 받은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그런데 여기에서 말씀하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이 구원해 주셔서 변화시켜 주셔도 그 사랑이 마음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을 한 번 원수 맺게 되면은 그 사람을 용서할줄 모르고 끊임없이 미워하고 악한 감정을 품은 채 풀지 않은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지만 진정으로 구원을 받고 변화 받지 않은 영혼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아마 여러분도 보면, 사람이 살면서 누구와 맺히기도 하고 어느 순간에 은혜가 떨어지면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하고 그 사람이 미워지기도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길이지요. 그렇지만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으면 다시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고 그 사람과 더불어 화해하고 그 사람을 용서해주고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 새롭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끌려고 하는 마음을 갖는 사람들이 있고, 한 번 그렇게 마음으로 틀어지고 불화하게 되면 어떤 경우에라도 그 불화를 고쳐보려고 마음을 먹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후자의 사람들은 말하자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까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왜냐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어떠함은 우리가 직접 그 마음을 들여다보고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마음과 영혼의 상태를 아는 것은 마치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은 아무데도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들이 직접 하나님을 주목하므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을 보면서 그 하나님의 마음이 성품이 어떠하신 분이라는 것을 유치해서 알게 되는 것처럼 인간도 인간이 행하는 일, 사람들과의 관계,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생활을 보면서 그 사람들이 어떨 것이라고 우리들이 거꾸로 유추해가지 않아요?그러나 하나님은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매개체가 필요한데,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한번에 우리의 마음과 삶을 들여다 보는 것입니다. 마음만 먹고 마음에만 품고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지만,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이미 아십니다.
만약에 그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형제와 불화하고 형제와 맺힌 것이 있는데 풀지 않고 한 번 발생한 미움을 가슴에 하나님처럼 품고 원망과 질투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결국은 시간의 문제일 뿐인지 언젠가 어디에서나 마음에 그러한 것을 드러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죄에 빠져서 결국은 영원한 하나님의 구원으로부터 멀어질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인간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그것은 생각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아가야 할 지를 알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생각하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과는 상관이 없는 신앙생활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우리가 구약시대로 되돌아가보면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는 것은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이나 너무너무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서 죄 용서함을 받고 이제 더 이상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든지 마음으로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실 수 있도록 새롭고 산 길을 우리를 위해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그렇지만 이 구약시대에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면 그때 일시적으로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이 열렸습니다. 죄를 용서해주시고 은혜를 주셔서 영혼에 필요한 하늘의 자원들을 공급해 주셨던 것입니다. 다시 죄를 짓고 나면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하나님을 뵈올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이 제사, 하나님 앞에 나아가 드리는 이 시간은 하나님과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갔는데, 그때에 제사를 드리러 간 그 제단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와 공적인 예배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이 세상에 살면서 믿음이 떨어져서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하나님을 잘 느낄 수 없게 되었다 하더라도 예배당에 나오면 모든 성도와 함께 예배할 때면 모든 지체와 함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기도할 때, 찬송할 때에는 현실적으로 하나님을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때입니다. 은혜로부터 멀어져서 믿음이 식어질 때에는 예배의 시간을 통해서 내가 죄인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멀리 떠나왔다는 알게 해주고, 은혜 안에 있을 때에는 이 예배를 찾아온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 주시는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런 예배에 나와서 졸고 하나님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은 예배 밖에서의 삶 속에는 어디에서도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굳어진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고 주님을 경배하는 그 자리에서도 하나님을 못 느끼는 사람이라면 일반적인 자리에서 하나님을 느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로 심령이 굳어있는 사람들입니다.여기에 예수님이 선정한 사람들은 훌륭한 사람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주님을 믿기는 하지만 한편으론 지체와 싸우기도 하도 지체를 미워하기도 하고 인간의 연약함으로 죄를 짓기도 하는 평범한 이스라엘의 백성 중의 한 사람을 선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데에서는 그런 생각을 별로 안 했는데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물을 하나님 앞에 바치려고 하는데 문득 생각이 나는 게 내가 누구누구한테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었구나, 이게 누가 잘했냐 잘못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원망을 들을만한 일이 있어서 성도와 성도 사이에 언약백성 사이에 갈등이 생기고 미움이 생기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사람보다는 소중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과 맺힌 것이 있는 사람들의 제사를 받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만약에 네가 진정으로 이 제사를 하나님 앞에 바치려거든 그런 경우에 먼저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하고 나서 다시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치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명백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주님 앞에 드리고자 할 때는 반드시 자신의 삶을 돌아보라는 교훈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기 때문에 이렇게 모여서 사는 것도 하나의 사회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갈등들이 있습니다.그런데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갈등이 있는 사람들이 모인 곳은 불완전한 교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씨름할 때에는 누군가가 그렇게 맺히는 성도들의 관계로 하나님 앞에 와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며 그 하나님이 자기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의 크고 작은 많은 죄들을 용서하셨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러한 용서와 사랑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빚진 마음으로 성도앞에 나아가서 그와 맺힌 것을 풀고 또 그에게 용서를 빌고, 그리고 내가 예배하고 경배하려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 당신을 향한 사랑을 보이는 공동체 속에서 입증하라고 하셨으니 하나님 때문이라도 우리들이 일치와 사랑을 위하여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여야 한다는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그러면 여러분들은 이런 질문을 하고 싶겠죠? 그러나 현실적으로 교회에서 보면 성도들이 한번 미워하고 난 후에 서로를 깊이 용서하는 것을 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들의 영혼을 어떻게 될까요? 똑같습니다. 우리들은 우리의 인생을 생각할 때에 그저 잘 먹고 사업 잘 되고 돈 잘 벌고 평안하게 살면 하나님의 모든 축복을 누리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은 우리 하나의 삶이 아니라 여러 사람의 삶과 엮어져 있기 때문에 우리 하나가 잘못했다고 해서 한번에 우리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가시고 우리를 징벌하시고 우리를 원수처럼 여기시고 그러지 않으십니다. 또 이것은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그러나 형제를 미워하고 교회에서 성도들간에 어떤 맺힌 것이 있는데 그것을 풀지 않고 살아가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십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위에 있는 성도들이 성도들 가운데 여러 가지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하고 파당을 짓고 무리들이 몰려다니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을 대적하고 마음에 섭섭한 것을 독기를 품고 풀지 않고 누가 옳고 그르냐는 나중 문제이고 하나님이 하늘 문을 닫으십니다. 그렇게 마음속으로 형제를 모질게 미워하고 한 번 맺힌 것을 풀지 않는 사람이 쏟아지는 은혜 속에서 사는 것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영적인 원리는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닫으셔서 더 이상 하나님의 말씀으로 감동을 받아 변화 받는 그런 마음이 안 생기게 되고 하나님께 기도해도 허공을 치는 것 같은 무기력한 기도가 이어지게 되고 영적인 자원이 서서히 침식당하게 되고 하늘 문이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그렇게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하고 성도들하고 끊임없이 분쟁을 일으키고 목회자와 관계를 바르게 가지지 못해서 심한 근심과 모욕을 느끼게 만들고 하는 사람들의 삶에 복이 있으면 하나님이 안계신거 아니에요? 만약에 그런 사람에게 복이 있으면 하나님이 안계신거 아니에요? 그렇게 하나님의 마음에 대못을 박고 그렇게 하나님이 세우신 통치의 질서에 전면적으로 대들면서 하늘을 열고 그 영혼에 은혜와 복이 쏟아진다면 하나님이 안계신거 아니에요? 하나님은 살아 계시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드려 지고 목회자와의 관계가 부서지고 교회에 대해서 끊임없는 고통과 아픔을 주고 성도들끼리 여러 가지 이유로 분쟁을 하고 서로 미움의 칼을 꽂고 살아가는 사람들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는 변하는 게 아닙니다. 그 관계가 변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과 영혼이 깊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 이외에는 바뀌는 것이 없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사람들은 모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와서 제때에 앉아있고 그저 은혜를 받는 척하면 사람들은 그저 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할 때 하늘의 문이 닫힌 것은 옆에 사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압니다. 무기력한 기도, 허공을 치는듯한 기도, 기도를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예배를 드려도 영혼에 아무 유익이 없는, 성경을 앞에 놓고 읽어도 그렇게 꿀같이 맛있던 말씀이 무미건조한 나무토막 같아서 성경을 들어도 도저히 읽을 수 없는 영혼의 암흑이 옵니다. 그걸 누가 설명을 해야 압니까? 자기 자신의 양심이 증거합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고, 성도들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지 않고, 한번 깔본 사람을 영원히 깔보고 그리고 마음에 맺힌 것을 마음에 독하게 품고 살아가요. 그럼 구원 받은 사람 맞아요? 가봐야 알아요.구원 받은 사람의 가장 중요한 표는 하나님 앞에 자기가 꺾어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올바른 것이 아니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은 일정한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아프고 힘들지만 자기가 그 앞에서 꺾어지는 것입니다. 아, 그렇구나 내가 잘못했구나. 그리고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는구나. 나는 하나님 앞에 불순종했구나 하고 자기가 하나님 앞에 꺾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거듭난 신자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안 꺾어져요. 그런 사람이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뭐라고 하든지 성경이 뭐라고 기록하든지 복음적인 교회의 권위와 그리스도의 통치가 무엇이든지 난 상관없어. 난 내 생각대로 살테야 하고 꺾어지지 않는 사람이 무엇으로 자기가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걸 입증할 수 있냐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 앞에 예배 드릴 때 당신 앞에 나오는 사람이 예배의 행위와 그의 평소의 삶이 일치되면 일치될수록 그 사람의 예배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운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그러므로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정말 축복을 받으려면 성도와의 관계를 똑바로 하셔야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이점에 있어서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으면 계속해서 곤고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배는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려도 상달되지 않을 것이고 기도는 할 수 없을 것이며 혹시 기도를 한다 해도 그것은 허공을 치는 것이고 교회에 봉사를 한다고 일을 거들어도 영혼에 아무런 변화를 가져다 주지 못할 것입니다. 기독교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종교입니다. 마음이 하나님 것이 아니면 모든 것을 입술로 다 드려도 하나님께는 아무것도 바친 것이 아닙니다.이렇게 예수님이 성도와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리스도 교회의 몸의 영적인 특성 때문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머리로 해서 모든 지체들이 영적으로 접붙여 있습니다. 그러면 모든 지체들이 마디마다 연결이 되고 핏줄 속에서 서로 연결이 되고 힘줄로 서로 이어져있을 때에 머리가 명령하면 이것들을 수행을 하지, 만일 힘줄이 끊어지고 마디마디 연결이 되어 있지 않으면 만일 머리가 손목을 들라고 하면 손목이 꺾어져서 이렇게 밖에 못 들거 아닙니까? 그런 몸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교회의 일치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그렇기 때문에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지 교회의 일치와 화해를 깨뜨리기 위해서 이바지 하는 사람들입니다. 여기에 가서 이 말을 옮기고 성도와 성도들간에 이간질하고 교회와 성도들간의 관계를 대적하고 이렇게 하면서 끊임없이 불란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통치에 굴복하지 않고 목회자의 권위에 순종하지 않고 성도들과의 관계에서도 교회의 질서를 지키지 않으려는 사람들, 교회의 암적인 존재입니다. 언젠가는 하나님이 끊어내십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교회 저 교회에 기웃거리면서 유리 방황하고 다니는데 그 사람이 들어가는 그 순간 그 교회는 너무 슬픈 것입니다. 그 암 덩어리가 그 교회에 가서 달라붙었으니 이제 이 인간이 그 교회에 달라붙어서 무슨 일을 한 것인가 두고 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한 삶이 어느 한 순간 하나님을 인정하고 꺾어지면서 깊이 돌이키는 변화가 없다면 그 사람이 어떻게 구원 받은 사람일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구원 받은 사람의 자기도 거스를 수 없는 인격적인 특징은 예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미워하고 끊임없이 고통을 주는데,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의 자녀일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제가 여러분들에게 교회에서 돈 꾸고 꿔줘서는 안 된다는 이유는 교회의 이런 일치와 화합과 사랑을 가로 막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사람을 끊임없이 원망하고 미워하게 만들고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한 형제나 지체가 아니라 채권자와 채무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려간 돈 빨리 내놓으라고 신경질을 내며 전화를 하고 독촉을 할 때 거기에서 자기에게 돈 빌려간 그 사람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이룰 수 있겠냐는 말입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빚 독촉을 받을 때 그 채권자의 전화 속에서 예수의 형상을 닮은 지체의 모습을 느낄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느낄 수가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는 원망과 미움들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이 창기의 몸입니다. 왜 그리스도 예수안의 생명을 함께 분양 받고 함께 사랑하고 함께 화합하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의 관계를 그렇게 만들어요?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 일, 쥐꼬리만한 거 하면서 어쨌든 일 하기만 하면 지체와의 관계에서 끊임없이 부딪혀서 원수를 맺습니다. 그럼 그렇게 지체들과의 관계를 팔아서 원수를 맺고 눈도 바로 뜨지 않고 미워하는 관계를 만들면서 해 낸 그 일이 하나님 앞에 열납된다면 성경을 찢어 버리고 다시 써야 하는 것입니다.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이시며, 그 모든 몸의 지체의 머리가 되시는데, 모든 지체 위에 가장 뛰어난 것은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에 복종하고 일치를 이루는 것입니다. 그런 거 안하고 자기가 머리를 위해서 섬긴다고 하는 그것이 결국 장애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지 뭘 할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리고 일을 쥐꼬리만큼 하면서, 그까짓 일 안 하면 어때요? 어차피 형제들간의 관계를 파괴하고 미움을 사고 원망을 하면서 해내는 그 일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자기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 그냥 일입니다.여러분, 교회 와서 쓸고 치우는 것은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돈 받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직업활동입니다. 용역업체에 있는 사람들이 와서 토요일에 청소를 하고 돈 오십만 원을 받고 간다면,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상 주셔야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지 돈 받고 일한 것입니다. 술집에 가서 청소하고 가는거나 교회에 와서 돈 받고 청소하고 가는 거나 무슨 차이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차피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 아닌데 말입니다. 일한답시고 지체들과의 관계를 난도질하고 서로 사랑하고 용서할 사람들을 서로 미워하고 가슴에 원한을 품고 저 인간 인간으로 안보고 그렇게 해서 해낸 그 일이 하나님 앞에 열납된다면 성경을 다시 써야 합니다. 이미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무릎을 꿇고 기도해도 하나님에 의해서 배척을 당하는 거절감을 느낄 것입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관계를 하나님 앞에 청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복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한테 하나님이 계속 복 주시면 얼마나 교만해 지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들에게 말합니다. 끌지 마십시오. 즉시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형제에게 맺힌 것이 있으면 가서 용서를 비세요. 그리고 진정으로 푸십시오. 하나님 앞에 여러분의 영혼이 살기 위해서라도 그런 일은 더 이상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심지어는 목회자 앞에까지 와서 지체들의 욕을 퍼붓는 사람들이 있는데 성도 맞는지 묻고 싶습니다. 혹시 목회자가 화가 나서 누구에 대해서 안 좋은 마음을 품고 야단을 쳐도 그렇지 않다고 변론을 해서 화목시켜야 할 사람이 목회자에게까지 와서 그러니 목회자가 아닌 사람 평신도들 속에서 얼마나 그 입을 놀려서 그 똥물 같은 걸 쏟아 놓아서 그 공동체를 더럽혀 놓겠습니까?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데려 가십니다. 하나님이 죄를 끊으시는 마지막 최종적인 방법은 목숨을 거두시는 것입니다.그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구원 받아서 한 교회의 지체로 살아가면서 우리의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게 할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다. 깊이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늘의 문을 닫았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영혼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3.목회자와의 관계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3 (09. 1. 14 새해 말씀사경회 새벽)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 13:17).
두 번에 걸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받는 축복의 통로를 생각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있을 때 하나님께서 땅을 고치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겠죠? 두 번째는 성도들과의 관계가 올바르게 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죠? 그래서 사람이 두렵거나 무서워서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의 질서에 복종하는 그 신앙이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게 하는데 그것이 주님 앞에 드리는 예배와 제사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과의 깨어진 관계를 방치하고 성도들과의 관계가 다 여러 이러저러한 이해의 관계로 얽히고 변질되고 그래서 서로 미워하고 원망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는 막히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이 관계를 하나님 앞에 올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런 주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고 성도들과의 올바른 관계를 하는 그것이 교회와 많은 영혼들을 살게하는 것이고 자신도 살게하는 것이다 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는 것이죠. 이런 관계를 올바로 고치지 않은 가운데 복을 달라고 하나님 앞에 세게 기도로 밀어 부쳐봐야 하나님께선 그 기도 듣지 않으십니다. 때로는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혹은 선교적인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어느 모로 보던지 그것은 잘못된게 없고 논리적으로 보면 그 일이 잘 되면 하나님 앞에 더 많이 봉사할 것 같고 충성할 것 같고 그 일이 잘되면 하나님께도 영광이 될 것 같은데 이상하게 그 일이 계속 꼬이면서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그때 아무리 그 일 자체가 좋고 논리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이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열려 있지 않으면 그러면 첫째 날 말씀드린 것같이 땅이 계속 병들면서 삶이 함께 병들게 되는 것이예요. 그때에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돌아보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과 맺은 관계를 돌아보라 하는 것이예요.
오늘 세 번째는 목회자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라 이것이 결국은 영혼의 목자와의 관계가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다 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죠. 오늘 이 히브리서는 핍박을 받고 있는 그 히브리인들 그리스도인들에게 사도가 쓴 편지입니다. 사도는 그렇기 때문에 이 히브리서를 제사 제도를 잘 예를 들면서 그 제사 제도를 통해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언약의 중보자가 되시고 그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과 속죄가 어떻게 우리의 죄를 씻어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도록 하나님과 교통하도록 만들어 주는 가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제사 제도 자체가 이스라엘 사람 개개인에게 주신 제도가 아니라 언약 백성으로서의 한 공동체에게 주신 것이죠. 그러니까 당연히 그 제사의 실현인 그리스도 예수도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신 후에 그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공동체를 이루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모세의 율법을 통해서 이스라엘 민족이 한 나라 한 백성이 되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이 세상에 드러나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신약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속죄의 죽음을 통해 머리이신 그 분께 접붙여진 성도들이 함께 공동체로 부름을 받아서 예수를 통해 하나님이 누구시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므로 모든 열방을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자로 돌아오게 하는 그래서 결국은 교회가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의 왕국으로 이어져 영원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가 되게 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했던 것이죠. 그러니까 히브리서는 다른 모든 성경도 그러하지만 특별히 공동체적인 삶을 강조해요.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성경 구절 가운데 하나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무리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그날이 가까옴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하면서 핍박이 가까운 때일수록 성도들이 이렇게 함께 연합을 이루며 함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서 공동체의 연합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강조해요. 그러면 그렇게 핍박과 고난을 이기면서 은밀한 곳에서 성도들이 모여서 살아가야 될 때에 그들은 제대로 된 교회도 없었습니다. 우리와 같은 예배당도 없죠. 그래도 놀랍게 그 안에 질서가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하면 하나님이 보내신 사도들을 통해서 선지자들를 통해서 그리고 복음 전도자들, 그리고 목사와 교사 이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그 질서를 엄격하게 따라서 성도들이 생활하였기 때문에 그 공동체의 특성들이 잘 유지되고 그래서 정해진 제대로된 교회 건물이 하나 없어도 그들의 모임 속에서 신앙의 순수함은 유지되었고 교리의 순수함도 유지되고 하나님의 말씀은 효과적으로 전파되고 교회에서 제 멋대로 행동하고 악을 행하는 사람들은 제지를 받고 그리고 교회는 진리를 아는데 있어서나 생활에 있어서나 순결한 공동체로 유지될 수가 있었던 것이예요.
그러면서 오늘 이 13장에서 이제 특별히 사도는 교회 안에서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들과 그 인도를 받는 성도들간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 사도는 오늘 우리와 꼭 같이 목회하는 사람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당시로 보자면 그렇게 크게 내세울 것이 없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은 여러분들이 너무나 잘 알죠. 고기잡던 어부 그리고 공무원 중에 하급관리로서 세금이나 거두던 사람 뭐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세상적으로 내놓으면 어디에 가더라도 상류층 계급이라고 불릴 수 없는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사도였습니다. 잘 아는 것과 같이 뛰어난 학문을 가진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이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였으니까 사실 그 사람들이 세상에 나아가면 세상에 있는 것들로 사람들에게 권위를 인정받을 만한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이 교회에서 그리스도의 소명을 받고 그리고 양떼를 치고 교회를 목회하는 일꾼들이 되었을 때에는 그들에게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그 권위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신 권위이고 그 권위는 그 사람 자체를 높여 주신 것이라기 보다는 그 사람의 권위를 질서 삼아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으로서 진리와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통치하고 다스리는 통로로 사용하신 권위의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서는 박사도 아니고 그리고 뛰어나게 공부를 많이 한 훌륭한 사람도 아니고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만약에 그 사람들이 여전히 사도가 되지 않고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서 맞먹을 사람들이었고 심지어는 자기 밑에 놓고 부려먹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께서 그에게 소명을 주시고 교회의 양떼를 치게 하셨기 때문에 양떼인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리더쉽 아래 전적으로 복종하며 교회에서 자신의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에 대한 올바른 지식을 갖고 이어갔다라는 것이죠. 그럼 생각해 보십시요. 자~ 하나님께서 교회를 주시고 나서 교회에는 제일 먼저 하나님이 주신 사람들이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들이예요. 자~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 영혼을 인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 그들을 치리하는 사람, 또 그들에 의해서 교훈을 받고 변화를 받은 사람들과 함께 봉사하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자~ 교인이 모여야지 봉사를 하죠? 또 모인 교인들을 치리하려면 누군가가 진리는 이것이고 올바른 것은 저것이다 라고 하는 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이 당신의 교회를 세울 때에는 제일 먼저 이 모든 사람을 함께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제일 먼저 부르시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만나고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그래서 이 세상에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그들의 연약한 것을 살피고 그리고 진리를 가르쳐주는 사람, 예수님 당신 자신의 마음을 갖고 그 일을 할 한 사람을 먼저 택하시는 거예요. 그게 누구냐, 그게 바로 목자예요.
여러분들이 열린교회 와서 이렇게 신앙생활하지만 맨 첨에 교회를 세우려고 했을 때 이중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자인 저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주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가르치게 하시고 연약한 자들를 돌보게 하셔서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렇게 예수를 믿고 교회를 형성하게 되는거죠. 그렇게 교회를 형성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질서가 필요하겠죠. 그러니까 질서가 있어야지만 진리도 올바르게 다 이 사람 저 사람 나이별로 가르칠 수 있고 교육도 시킬 수 있고 생활도 지도할 수 있고, 그리고 그들의 필요가 무엇인지를 한 사람이 다 살필 수 없으니까 그 필요를 살피는 사람들이 함께 도우며 교회를 이룰 수 있겠죠. 그래서 거기에서 일꾼들이 세워지게 되는데 그 일꾼들이 세우질 때는 아무렇게나 세우지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질서에 따라서 하나씩 하나씩 일꾼들이 세우지는 것이죠. 그래서 처음에는 목사가 있어도 한 사람이면 충분해요. 요즘은 교인 50명만 되도 부목사 쓸려고 하는 세상인데, 저희 교회는 420명이 될 때까지 목사는 저 혼자였습니다. 부목사 없었습니다. 420명이 넘어서 450명 되어갈 때 최초로 부목사님 한분을 모셨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접혀진 것이 펼쳐지듯이 자꾸 교회의 질서의 모습이 교회가 형성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 맨 처음에 부름을 받았던 목사가 있는데 그가 무슨 이유에서든 간에 어쨌든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할려고 하는데 교인들이 모이지 않아서 교회가 형성이 안돼. 그러면 질서고 뭐고 할게 없는 거예요. 자기 혼자있는데...
(예화) 어느 교회에서 그랬대요. 목사가 교회를 개척을 했는데 교인이 안 모여. 그래서 이제 설교를 하는데 자기 부인 밖에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하도 썰렁하니까 교회에다가 거울을 여러 개 달아서 서서 설교하면 사람이 여럿 나타나게 해놓고 그러고 설교를 하는데 사람이 안 모이면 목사가 기도 죽고 그랬으면 사모도 불쌍할텐데 이 사람은 무슨 특별한 소명을 받아서 그런지 은혜가 충만해서 그런지 6개월째 사모 한 사람 놓고 설교를 하는데 하여튼 1시간을 넘게 설교를 하면서 10만명을 모아놓은 것처럼 부흥회를 하더래요. 그래서 ‘똑바로 하시오. 회개하시오’ 그러더래. 사모가 하도 화가 나니까 6개월 만에 벌떡 일어나서 ‘너나 잘하시오’ 그러고 나갔대요.
질서고 뭐고 생겨날게 없잖아요. 그렇게 하고 일꾼들이 세우지는 거예요. 잘 들으세요. 요즘은 무슨 교회를 하는 것을 사업하는 것처럼 해요. 그래서 목사님이 교회를 세우신다는데 제가 가서 좀 도와드리죠. 심지어는 제가 한 7명 모아 가지고 가서 목사님 목회를 도와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심지어는 ‘우리 같이 목회 해보실래요? 목사님은 설교하시고 우리는 열심히 교회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우리 팀을 짜서 해봅시다’ 그러는데 다 쓸데없는 소리예요.
사도들은 사도될 계획이 없었어요. 예수님 만났는데, 정말 죄인이었는데 예수님이 고기잡는 어부들에게 나타나셔서 당신 자신을 제시해 주셔도 믿을 리가 없으니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봐라.’ 밤새도록 고기를 못 잡았는데 깊은 데서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많이 잡혔어요. 수없이 오랜 세월동안 고기 잡이를 했는데 어부의 상식을 깨뜨린 사건이었어요. 그 순간에 확 밀려오는게 ‘아~ 이 분은 보통 분이 아니구나’ 무릎을 꿇고 ‘주여, 나는 죄인입니다. 나를 떠나시옵소서’ 그 고백은 뭐냐하면 ‘만약에 나를 용서하시고 받아주시면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런 뜻이잖아요. 그랬더니 ‘너희는 나를 따르라.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그때까지만 해도 거기에 진리가 있고 하나님이 있으니까 따라 간 거지. ‘자~ 아무래도 이 분 따라가서 한 자리하면 여기서 이거 그물이나 던지면서 고기를 잡는 것보다는 인생이 피는 거 아니겠어?’ 그렇게 생각하고 간게 아니잖아요. 그리고 감히 ‘예수님은 설교하시고 우리는 열심히 우리 할 일 하면서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같이 동업하듯이 한번 복음사역을 해볼까요?’ 그렇게 해서 한게 아니거든요. 먼저 그 예수님의 양떼가 된거예요. 전 말이죠, 얼마 안 살았지만 교회를 어떤 평신도 하고 목사하고 만나서 ‘자~ 나는 목회할테니 너는 나를 열심히 돕고 우리 같이 한번 동업하듯이 목회를 해보자’ 하고 마지막에 잘되는 교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결국은 두 사람이서 대판 싸우고 갈라져요. 왜냐하면 그건 교회를 세우는 원리가 아닌거죠. 그래서 교회에서 제가 제일 경계하는 사람들이 누구냐 하면 와서 도와주겠다고 하는 사람들...도와주긴 뭘 도와줘. 와서 그냥 무릎 꿇고 은혜 많이 받고... ‘너나 잘하세요’ 예수 잘 믿고 신앙생활 잘해서 주님이 마음 안에 계시고 진리를 알아가고 이렇게 살아가는 하는데, 처음부터 그런 의도가 없고 ‘당신은 설교 잘하고 목회 잘 하니까 하고, 당신은 이런거 이런거 못하니까 내가 할테니까 우리 함께 팀을 이루면서 하자‘ 이게 무슨 사업입니까? 이게 무슨 도너츠 집 내는 겁니까? 이게 무슨 건설회사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아무리 교회와서 뒷돈대고 헌금하고 이런 저런 일 팔장 거들고 사회에서 지위나 좀 있어 가지고 교회 어려운 일 정치에 관가에 얘기해서 교회 편의를 제공하고 막 나가는 거예요. 교인들 보기에는 엄청나게 교회 일 하는 것 같지만 그 사람은 원래 교회의 참된 지체가 아니야. 그렇게 하고 사는 사람들...그 무슨 교회냐 이거죠. 심지어는 말이죠, 교회에서 젊은 목회자들이 있다가 교회를 개척하면 좋지만 그때는 쉬운게 아니죠. 특별한 부르심이 있어야 되니까. 어쨌든지간에 3-4백면 4-5백명 많으면 천명쯤 되는 교회에서 ’목사님 우리 교회 와서 목회 좀 해주십시오‘ 하면 동료들의 부러움을 사면서 부임하죠. 부러워할거 하나도 없어. 가서 쓴 물 먹도록 고생을 하는 거예요. 왜? 그 교회에서 장로들이 부르고 장로들이 투표를 해줘야지만 가결이 되서 가는데 문제는 뭐냐하면 십년이 흘러도 그 장로들이 새로운 목사의 양떼라고 스스로 생각을 안해. 그러면 뭐냐하면 그 목사를 자신들이 대주주인데 고용을 했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야. 그리고 저 친구가 목회를 잘 하는지 교인을 대신해서 감시해 주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야. 그러니까 뭐죠? 교회의 가장 핵심을 이루어야 할 사람인 목자가 없어.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목자가 없는 이유는 두 가진데, 처음부터 목자가 없었던 사람이 있고 처음엔 목자가 있었는데 그 목사하고 관계가 틀어져서 결국은 마음 속에서 그 목사를 짤랐어. 그래서 결국은 목회자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교회에 남아있어요. 그럴 경우에 이제 생각지도 못했던 수많은 문제를 불러일으키게 되는거죠.
그러면서 오늘 성경은 영혼을 인도하는 목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요. 그게 누구냐하면 첫째는 그리스도께서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목양의 질서, 통치의 질서를 세우시기 위해서 주님이 지정하신 사람이예요. 그 질서의 일부분이예요. 그러니까 교회에서 질서를 따른다고 하는 말에 있어서 첫 번째는 목회자가 그리스도의 권위로서 진리를 가르칠 때에 가르침의 질서를 따르고 생활을 교훈할 때의 생활의 질서를 따르고 사역을 지도할 때에 사역의 질서를 따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예요. 그것이예요. 그렇게 하도록 가정의 아버지처럼 주님이 세우신 사람이 목회자예요. 그게 성경이 이야기하고 있는 목회자의 정체예요. 그거예요. 두 번째는 그 내용에 있어서 오늘 성경은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해 경성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경성한다는 것이 뭐냐하면 깨어있다 그런 뜻이거든요. 자~ 여러분 간밤에도 평안히 주무셨죠? 간밤에 한숨 안 잔 사람도 있어요. 군인들이예요. 국경을 지키는 군인들은 밤이 없어요. 그 긴 휴전선을 날밤을 새우면서 나라를 지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나머지 모든 군인들과 국민들이 평안히 자는 거예요. 그래서 전쟁의 역사에 보면 밤에 전쟁이 많이 일어나요. 한창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이 고조될 때 어느 군사 전문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우리나라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정확하게 5월이나 6월 5시에서 6시 사이에 일어납니다. ’ ‘어떻게 그렇게 아냐? 어떻게 시간까지 아냐?’ 그러니까 ‘그렇게 전쟁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 북한에 있는 사람들은 어두워진 속에서 전쟁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래요. 밤은 그렇기 때문에 경계가 필요한 시간이예요. 그러면 내가 말씀드리는게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는데 물론 여러분들이 늘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걱정하고, ‘어떡하면 주님 더 잘 믿을 수 있을까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길이 무엇일까 진리의 말씀이 도대체 무슨 뜻일까 교리를 더 많이 배워야 될텐데....’ 물론 여러분 그렇게 해요. 그렇기 때문에 교회가 가르칠 때 많은 사람들이 와서 배우고 설교를 듣고 메모를 하고 그것을 다시 집에 가서 익히고 구역에서 공부를 하고 책을 읽고 노력을 해요. 그런데 항상 그래요? 모든 사람이 그래요? 안 그러거든요. 항상 그렇지도 않고 모든 사람이 그렇지도 않거든요.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 일에만 전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가서 생업에 종사하고 이 세상의 근심과 많은 염려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예요. 그러니까 그것이 늘 정상적이고 올바른데 항상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예요. 그러나 목회자는 항상 그래요. 제가 목회자인데 다른 생각이 뭐가 있겠어요. 엊그제도 저녁에 혼자 조용히 생각하면서...‘내가 이세상에서 무슨 욕심이 남아 있나’ 주님이 보실 때는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하냐, 이놈아’ 그러실지 모르지만 내 생각 속의 체로 걸러볼 때 거의 없는 것 같아요. 뭐 유명한 사람이 되는 것도 별로 그렇게 원하지 않고, 그리고 무슨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욕심도 없고... 돈 벌 자신이 있거든요. 그 다음에 무슨 오래 살고 싶지도 않고... 가만히 생각해 보면 열심히 목회를 하려고 공부하지만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해서 무슨 박사 학위를 받아서 어느 학교에 들어가서 한번 해보고 싶고... 뭐 이 나이에 그런게 뭐가 필요 하겠어요? 주위에서 자꾸 나를 권해요. ‘목사님 그러지 마시고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까 외국에 연결을 하셔서 별도로 하시지 마시고 그냥 공부하는거 가지고 계속 하시면서 방학 때 같은 때 가서 좀 강의도 들으시고 한 3년해서 외국의 왠만한 학교에서 박사논문을 쓰십시요.’ 가만히 생각해 보는데 그걸 해서 내가 뭐 하겠는가... 그걸 해갖고 왔더니 교인들이 예배 시간에 졸던 사람이 벌떡 일어난다던지 아니면 말 안듣던 교인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껌뻑 죽는다던지 그러면 내가 한번 해 보겠어요. 열린교회에서 그렇게 해보겠어요. 그런다고 여러분들이 나를 더 잘 알아주겠어요? 안 그럴 것 같애. 여러분들은... 그저 조는 사람은 박사 학위를 받고 와서 설교를 해도 계속 졸거고,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내가 그거 없다그래도 잘 들을거고...그런데 그걸 해서 뭐하겠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러니까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애요. 그럼 뭐겠어요? 여러분들 예수 잘 믿고 신앙 생활 하는거예요.
(예화) 지금은 오래됐는데 교회 직원 하나가 있었는데 쬐끔한 교회이던 시절이예요. 부산에 있는 어느 교회에 부흥회를 갔어요. 제가 전화를 잘 받지도 않고 하지도 않는 사람이예요. 그러니까 그쪽에서 목사님이 그래도 김남준 목사가 온다 그러니까 교회는 조금했어도 제가 널리 알려졌으니까 교회에 전화를 했는데 여직원이 받았어요. ‘저 말씀좀 여쭙겠습니다.’ ‘예 말씀하세요.’ ‘목사님이 우리 교회 집회 오시기로 하신 교회 담임 목사입니다.’ ‘아~ 그러세요, 목사님’ ‘궁금한 게 있는데, 김남준 목사님이 무슨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물으니까 이 자매가 아주 은혜롭게 대답을 했어요. ‘목사님, 우리 목사님은 음식보다 훨씬 좋아하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게 뭔대요?’ ‘당신들이 은혜 많이 받는 겁니다.’ 그러고 뚝 끊었어요. 이 목사님이 감동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그래가지고 갔는데 신파적으로 자기가 전화를 하고 나서 한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했다는 거예요. 무슨 음식을 좋아하십니까 물으면 일식입니다, 한식입니다 그럴 줄 알았더니 우리 목사님에게는 별도의 양식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은혜를 많이 받는 것입니다. 은혜 많이 받으세요. 그러고 뚝 끊더라 이거예요. 이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거죠. 아니 그게 내 얘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신뢰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무슨 소원이 있겠어요. 여러분 잘 되는게 제 소원이예요. 잘 된다고 하는 의미는 여러분들이 사업을 하다가 다 기울어져 가는데 사업이 잘 된다더라 그러면 밥 한끼라도 얻어먹어도 그렇게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어요. 뭘 하는데 잘 안되서 힘들다 그러더라 그러면 갈비탕을 먹으면서도 바늘 방석이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잘되면 좋겠어요. 그리고 좋은 처자 만나서 자식들 시집 장가 보내고 좋은 얘기 들릴 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어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여러분들의 목회자로 부름을 받았으니까 여러분들이 말씀을 잘 듣고 은혜를 받고 변화되어서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던 사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이 되고 영혼이 추하기 짝이 없던 사람이 아름답게 변화되어서 신앙 생활한다 그러더라 그러면 충분해요. 무슨 그 보답으로 나에게 뭘 주고... 전 필요 없어요. 얼마전에도 제 생일 때 됐는데 누가 교역자가 그랬나 직원이 그랬나 ‘목사님 필요한 것 없어요?’ ‘아무 것도 필요한거 없다. 지금 있는 것도 너무 충분한데 뭐가 더 필요한 게 있느냐’ 그거예요. 그게 목회자의 바램이고 소망이예요. 아니 이건 진심으로 제가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에게 얘기할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변화받고 정말 신실하고 좋은 그리스도인들이 된다고 하면 춤을 추면서 다니겠어요. 그런데 그 일에 전념해야 되잖아요? 어제도 아침 8시부터 12시까지 회의를 했어요. 정확하게 말하면 10시 반까지 회의를 하고 그 다음에 교회를 돌아보면서 12시까지 화장실까지 돌아보면서 교회를 챙겼어요. 마음이 막 상하는 거예요. ‘아~ 나는 영혼을 돌보고 이 영혼을 올바로 인도하고 이들에게 풍성한 꼴을 먹이기 위해 부름을 받았는데 내가 왜 화장실에 들어가서 이놈의 타일 깨진 것 까지 두들기면서 이걸 검사를 해야되나. 이런 짐을 좀 대신 져주는 사람은 없나. 내가 해야 할 고유한 일에 모든 걸 쏟고 싶은데 이렇게 몸도 아픈데 내가 교회를 이렇게 오르내리면서 화장실에 타일 깨진 것까지 뒤지면서 내가 이걸 잔소리를 해야 되나.’ 한 순간에 상한 마음과 비애가 확 밀려와요. 그러면서도 가면서 ‘내가 이러면 안되지. 결국은 목회라는게 다 그런거지. 누가 그렇게 모든 것을 챙겨주나. 그러지 말자’ 그렇게 마음 먹지 말자 마음을 다스리면서 갔어요. 그러면 생각해 보십시요. 목회자가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은 사람, 경성하는 사람이예요. 그래서 교인들 자신은 가끔 신앙에 있어서 잠들어도 목회자는 외치는 소리가 있어서 그래야 되요. 여러분 최근에 “배교에 가까운 배교적 예배”를 돌이키라 한 여덟 번 정도 설교 하고 6주 정도 설교했는데... 어쨌든 굉장히 힘든 시간을 지났죠. 저도 목회를 하고 나서 그렇게 강하게 설교해 본 적이 없어요. 어느 교회 부흥회를 갔더니 목사님이 그 설교를 들어가서 들었던 모양이예요. 그래서 뭐라냐면 ‘그 설교를 하는 당신이 대단해 보이는게 아니라 그렇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도 안 가고 있는 교인들에게 자신은 존경을 표한다’ 그러더라구요. 그 설교를 들으면서 여러분 그런 생각 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설교를 했는데 저도 얼마나 마음이 상했는지 몰라요. 거의 눈물, 마음 속에서는 계속 눈물이 몇 달 동안 흘렀어요. 어떤 때는 모든 기운이 빠지면서 결국 그렇게 미친 듯이 목회를 했는데 마지막에 남는 건 이렇게 병든 교회 하나 남겨 놓고 이제 늙어가는 나하고 이것밖에 안되는구나 결국은 마지막에 내가 인생을 살았다는 보람이 뭐 있을까 ...그러고 마음을 가눌 수가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그런데 몇 사람이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요. 그게 뭐냐하면 자기가 ‘신앙 생활하면서 그렇게 교회가서 욕 먹어보기 처음인데 어쩜 그렇게 상상치도 못했던 최고의 단어들을 동원해서 아주 자신들을 깔아뭉개는데 그런데 이렇게 기분이 좋고 감사한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자기가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고 야단칠 수 있는 목사님이 계시기 때문에 자신의 영혼은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몇 사람이 그런 편지를 보냈어요. 결국은 뭡니까? 자신은 가끔 잠들 때가 있어도 목회자는 깨어서... 그거 아니예요? 결국은 뭐냐하면, 자신의 영혼을 위해서 스스로 그 영혼이 위기에 있고 곤고할 때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참 좋은거죠. 목회자는 자기가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그렇게 불쌍히 여기지 않고 내팽겨칠 때도 돌아다니면서 그걸 주워다가 씻어면서 눈물을 흘리는게 그게 목회예요. 그래서 오늘 성경에 보면 ‘자기가 회개할 자인 것처럼 한다’ 여기서 회개가 뭐냐하면 뉘우치는 걸 이야기 하는게 아니라 셈하는 거예요, 셈하는 거. 그래서 다른 사람의 영혼인데도 마지막에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다가 주인에게 가서 보고해야 하는 사람이 있는 것처럼 또한 목회자는 교인들의 영혼을 자신의 영혼인 것처럼 하나님 앞에 가서 ‘그 영혼 어쨌니?’ 라고 할 때에 거기에 대답을 해야되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목회자다 그런 뜻이예요. 그러면 오늘 성경이 이야기하는게 뭐냐하면 그런 사람들이 그 일을 할 때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 일을 하게 하고 근심하는 마음으로 하게 하지 말아라. 이것이 성경이 목회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강조하고 있는 내용이예요. 어떤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렇게 감사하고 기쁨이 쏟아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할 때는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 괴롭고 그리고 근심에 잠기게 되는거죠. 평생 그렇게 가슴앓이를 하다가 죽는게 목회자예요. 여기에서 무슨 그렇게 대단한 영광을 보겠어요. 그게 목회예요. 오늘 성경은 뭐라고 얘기하냐 하면 만약에 너희가 영혼을 인도하는 목회자가 네 영혼을 돌볼 때 즐거운 마음으로 그 일을 하지 못하게 하고 결국은 돌보기는 돌보는데 근심 속에서 돌보도록 그렇게 너희가 목회자와의 관계를 맺는다면 아주 간단하게 얘기하는 거예요. 유익이 없느니라. 무슨 유익이 없는거예요? 육체적인 유익이 없는거죠. 그래서 목회자와의 관계가 그렇게 망가지고 어디를 가든지 끊임없이 고통을 주고 괴로움을 주는 사람에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있겠어요?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 인간을 돌이키려고 마음을 먹으신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목회자의 가슴에 못을 박고 고통 속에서 몰아넣는 그 사람, 그래도 영혼이기 때문에 돌볼 수 밖에 없는 사람... 회사 같으면 짤라버리면 되잖아요. ‘해고거든. 보따리 싸가지고 가!’ 그러면 되잖아요. 그런데 목회자 자신도 그 교회에서 부름을 받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일 뿐이예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권한이 있어도 사용하지 않죠. 그리고 영혼들을 돌보죠. 이제까지는 형편이 없는 사람이었고 가시같은 인간이었지만 예전에 주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이었고 앞으로도 변화될 거야 라는 소망을 품죠. 왜? 목사 마음 속에 사랑이 있으니까 그게 되는 거죠. 사랑이 완전히 사라지고 은혜가 떨어지면 목사도 막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안되잖아요. 그런 관계를 갖게 되면 유익이 없는거예요, 이 땅에 유익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병들어요. 하나님이 하늘을 닫으셔요. 땅에서 열매가 나질 않아요. 목회자의 가슴을 그렇게 아프게 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땅이 열매를 내겠어요? 낼지도 모르죠. 내더라도 그것은 일시적인 것이죠.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서 다루시죠. 두 번째 무슨 유익이 없어요? 영혼의 유익이 없죠. 왜? 그 통로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진리와 은혜의 축복들이 목양의 질서를 통해서 펼쳐져 오는 거예요. 그런데 목회자의 마음에 끊임없이 근심을 주고 그 목양의 질서에 복종하지 않기를 쇠심줄같이 염소같이 들이 받으면서 생활을 하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겠어요? 그런데 신기한건 그렇게 은혜를 못받으면서도 소 잡아 먹은 귀신처럼 교회 절대 안 떠나요. 뭐하러 거기에 있는건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하는 사람이 기도가 되겠어요?
(예화) 저희 학교에 교수로 계시다가 교회를 맡아서 가신 분이 있었어요. 교인이 천여명 정도 되는 교회가서 열심히 목회를 해서 한 십년 하셨나요? 교인이 한 삼천 오백명 정도 모인다고 그러니까 대단하지 않아요?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말씀 열심히 가르치고 기도 아주 많이 하는 목사님이예요. 그런 목사님도 우리 나라에 몇 안되죠. 그러면 우리가 생각할 때 ‘아이고, 그 교회는 참 복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그건 다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지 교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 차를 7년을 타고 다녔다나 몇 년을 타고 다녔다나 차가 다 낡아서 결국은 교회에서 ‘목사님 아무래도 차를 바꾸셔야겠습니다. 먼 거리를 왕래하시면서 강의도 하시고 하니까 기왕이면 탄탄하고 사고가 나도 다치지 않을 만한 차를 타십시오.’ 그러면서 교회에서 제네시스를 사라고 그러더래요. 목사님이 한걸음 양보해서 무슨 제네시스입니까. 그냥 웬만한거 하나 사겠습니다. 그래서 무슨 차를 샀대요. 사고 나서 매일 학교에서 강의할 때 어디 집회갈 때 문자가 오는거예요. 장로 한 사람이 ‘목사님 사천만원짜리 차 타니까 기분이 좋습니까?’ 그러니 그걸 들여다 볼 때... 그걸 한 번도 아니고 수시로 문자가 오는거예요. 그것도 장로라는 사람한테서... 아니 그렇게 싫으면 목숨 걸고 공동의회에서 막지...그렇게 해? 그러니 내가 묻고 싶은게 그거예요. 자~ 누가 옳으냐를 따지기 전에 그렇게 해서... 그 사람도 할일 되게 없는 사람이지.... 아마 백수일거예요. 그렇게 해서 문자를 수시로 보내어서 목사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데 자신이 그런 목사님 밑에서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겠어요? 그 사람에게 제일 좋은 건 프라이드 타는 교회로 가면 되요. 그 교회에 가면 은혜를 받는냐 하면 절대 그거 아닙니다. 왜 인생을 그렇게 사는냐 이거예요. 그래서 딱 그치고 영혼의 유익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참 놀라운게 뭐냐하면 말이죠. 교회에 오래 신앙 생활을 하고 교회에서 나름대로 자기가 집사도 되고 안수집사도 되고 권사도 되고 장로도 되고 그러잖아요. 그러면 이상하게 평신도 때는... 그것도 평신도지만... 어쨌든 직분이 없었을 때는 은혜가 안되면 교회를 옮겨볼까 생각을 하고 그 전선줄에 앉아 있는 참새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녀요. 그런데 이상하게 교회에서 일정한 직분을 갖고 뿌리를 내리게 되면 은혜가 되든지 말든지 소잡아 먹은 귀신처럼 떡 달라붙어 있는 거예요. 그리고는 또 자기는 은혜 못 받으면서 애들 낳으면 절대 그 교회를 못 떠나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교회 생활이 계속 되는거죠. 그 사람들이 거기 남아서 절대 그 교회에 유익을 주지 못해요. 그리고 가문을 형성하고 파벌을 형성하고 해가지고 그렇게 해서 교회를 목양의 질서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세워지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안된다 라고 하는 것이예요. 왜 그렇게 살아요? 그리고 목회자하고 부딪칠 만큼... 거기에서 이게 목회자하고 상업적인 경쟁 관계예요? 어느 회사 납품하는데 목회자가 자기 회사의 경쟁자예요? 아니 싸우고 부딪칠 일이 뭐가 있느냐 그거예요. 그리고 목회자가 정신과 생각이 이상해서 싸이코 같아서 도저히 그런 사람이면 모르지만 왜 그렇게 해요? 우리 노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냐 하면 장로 한 사람이 장로 시험을 봤는데 이제 웬만하면 합격을 시키거든요. 60점 넘으면... 마지막 면접을 하는데 ‘왜 당신은 장로가 되려는가?’ 하고 물어봤어요. 면접관들이 ... 그러면 그냥 가만히 겸손하게 ‘저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렇게 교인이 저를 찍어주셔서 그저 장로가 되면 열심히 목사님 목회를 돕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면 합격이지 뭘 더 큰거를 얘기를 해요. 그리고 나중에 딴짓을 하더라도 그건 별개의 문제잖아요. 떡하니 한다는 얘기가 ‘우리 목사님이 뭘 모르고 철이 없어서 자기가 감독을 좀 하려고 한다고...’ 거기 있는 목사님들이 전부 다 열을 받아가지고 저런 자식은 떨어뜨려야 된다고 말이야... 떨어뜨렸는지 붙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나중에도 너무 나를 만나서 면접관들이 분노를 하는거야. 그러면서 그 다음에 뭐냐하면 ‘그 목사님이 정말 걱정이돼.’ 저런 사람이 장로가 되서...아니 처음에 그런 얘기를 안해도 나중에 그러기 쉬운데 아니 아직 되지도 않았는데... 집사로서 시험보러왔는데 아니 우리 목사님이 철이 없고 잘 몰라서 내가 좀 감독을 좀 해야 하기 위해서 내가 시험 보러 왔다고 하니 그게 진짜 장로되고 난 다음에 어떻게 되겠느냐...근심이 쌓여있어. 목사님들이.... 그거 왜 그래요? 그렇게 할게 뭐가 있어...질서를 따라서 잘 가르쳐주면 거기에 순종하고 그리고 목사가 설마 전혀 성령이 아닌 걸 가지고 그렇게 강요할 리는 없잖아요? 뭐 그러면 그 교회 안다니면 되지...이단이라고 생각하고 딴데 가면 되잖아요. 그거를 머리를 부딪치고 들이박고 싸움질 하고 가서 목사 욕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설교 시간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서 노트 필기나 하면서 예배시간 끝나기를 기다리고... 아이고, 왜 살아요 그렇게....그리고 나서 무슨 좋은 일이 일어나는지 보십시오.
그래서 오늘 성경은 말하기를 영혼을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 순종하고 복종한다고 하는 것이 개인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그를 통해 행사되는 목양의 질서를 통해서 하라는 거죠. 그래서 오늘 내가 여러분들에게... 여기도 오늘 우리 교인 아닌 분들 많이 있죠? 있을 거예요. 요즘 150명 정도가 왔다갔다 하시는 것 같은데... 이제 연말이니까 교회도 옮겨보실 요량을 하시겠죠? 그렇죠? 그런데 하나는 분명해요. 목회자와의 관계는 깔끔하게 하고 뭘 해도 하라 이 얘기죠. 아니 정정당당하게 마음 속으로 기도 많이 하고 그리고 마음이 좀 안 맞는거 있어도 속으로 다 용서하고 그리고 가서 정중하게 ‘목사님, 제가 오랫동안 목사님 목양을 받고 교회에서 유익을 얻었고 제가 여기서 신앙을 길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떠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목사님, 그동안에 저 목양하시느라 애 많이 쓰셨습니다. 마음 아프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이러고 떠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을 위해 유익한 거 겠어요? 자신은 떠날까 말까 하면서 계속 전화하고 교인들 만나서 ‘아이고, 그 교회 개떡같은 교회야. 그 목사 밑에 있는 것은 재앙이지.’ 이렇게 계속해서 말을 내면서 그렇게 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에 계속 상처를 주는 것이 옳은 거겠어요? 한번 진지하게 생각을 해야 되는 거죠. 그래서 목회자와의 관계가 망가지면 그거는 자기 자신의 영혼을 보호하는 좋은 틀이예요. 여러분들은 목회자를 미워하고 싫어해도 목회자는 그럴 수가 없어요. 야단을 쳐도 돌아서서 기도하면 하나님이 그러지 말라고 그러셔요. 눈물을 흘리면서도 그 길을 가는 거예요. 그래서 할 얘기를 안해.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들은 목회자가 여러분들의 밥인 것처럼 생각하고 여러분들의 종인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면 안되요. 언젠가 하나님이 그의 편을 드시면 여러분들의 인생에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 일어나요. 그렇게 하지 마요. 왜 그렇게 해요? 마음을 아프게 하고 고통 가운데 목회를 하게 하지 마라. 그러면 축복의 통로가 막힌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뭐가 잘 안되고 계속 엉키고 영혼이 병들게 그러면 그 문을 점검해 보라, 두드려 보라... 그러면 회개하고 새로워진 가운데 다시 목회자와 관계를 회복하고 그렇게 살고 죽어도 회복할 수 없으면...가요! 딴데가서 다시 시험지 풀다 안되면 쫙 찢어버리고 새 종이 놓고 다시 풀 듯이 다시 시작해요. 거기 가서 교회 떠난거 회개하고 그리고 새 삶을 살아요. 그렇게 되지도 않은 일을 하면서 끊이없이 교회에 고통을 주고 그렇게 하는 거 아니예요. 자신의 영혼에도 자신의 후손에 까지도 좋은 영향을 주지 못해요. 깊이 자기를 돌아보고 주님 앞에 축복의 통로를 열고 사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4.교회와의 관계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4 (09. 1. 15 새해 말씀사경회 새벽)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살후 3:14-15).
첫째 날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 그것이 축복의 통로를 유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날은 ‘성도와의 관계’를, 세 번째 날은 ‘목회자와의 관계’를, 그리고 오늘은 ‘교회와의 관계’를 올바로 하는 것이다.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사도 바울이 두 통의 편지를 쓰게 되는데 이유가 무엇 때문이냐 하면 문제를 좀 일으켰습니다. 그게 무슨 문제냐 하면... 사도들이 여러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강림하신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날이 가까워 올수록 더욱더 정신을 차리고 신앙 생활을 해야 된다.’ 이런 것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성령 강림하시고 신약의 교회가 세워진 그때부터 사도들은 마음속에서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영광 가운데 우리에게 다시 오실 것이고 이렇게 영광 가운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이니 우리가 이 세상을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와 함께 누리게 될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면서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살아가자 이것이 사실 사도들의 중요한 메시지 였습니다. 그런데 이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좀 문제를 일으켰어요. 문제라는게 뭐냐하면 ‘예수남이 곧 오신다.’ 그거였어요. 그러니까 그걸로 본다면 사도들의 가르침에 어긋난 것이 아니였죠.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였어요. 예수님이 곧 오실테니까 지금 직업 활동을 하고 뭐 이런저런 일로 봉사하는 거 다 의미가 없는거다 그리고 집어치우고 이제 우리는 열심히 예수님이 빨리 오신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그러면서 우리가 주님을 맞을 준비를 하자 이것이었어요. 그러니까 사도들하고는 적용이 틀렸죠. 사도들은 ‘주님이 곧 오실테니까 종말론적인 긴장 속에서 우리가 더욱 열심히 주님을 위해 일하고 교회에서도 봉사하며 하나님을 잘 섬기자.’ 이것이 사도들의 가르침이었는데 그것을 잘못 해석을 한거죠. 그래놓고 그런 가름침이 어디서 왔느냐 할 때에 교만한 어떤 사람들은 ‘내가 직접 하나님께로 받았다, 영으로 직접 주님께로부터 받아서 그래서 놀라운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연구하다가 보니까 우리가 깨달았다.’심지어는 ‘사도들이 우리에게 준 편지속에 이러이러한 말이 있는데 그게 이러이러한 의미가 아니냐.’하면서 이제 이러한 교훈들이 퍼져나간 거예요. 그러니까 교훈과 생활은 나뉘어질 수 없다고 어제도 말씀을 드렸죠. 잘못된 교리를 믿으니까 그 다음에 거기에서 잘못된 생활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이런 일들이 일어나게 된거죠. 그러니까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곧 오실 것이라고 하는 임박한 종말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사실었거든요. 그러니까 사실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예수가 곧 오실 것이다 라고 하는 아주 초긴박한 종말 사상을 가진 것이 사실은 이단적인 생각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여기서 뭐라 그러냐 하면 ‘원수들처럼 대하지 말고 형제들처럼 그들을 권고하거라’ 그랬으니까 사도들이 보기에도 이게 조금 빗나갔지만 오버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이게 이단이라고 까지는 얘기할 수 없다 그거였어요. 그런데 사도들이 가르쳐 준대로 바르게 그것을 믿고 올바르게 정도를 지켜서 적용하지 않으니까 이게 교회에 적지 않은 문제를 일으킨 거예요. 예를 들자면 예수님이 곧 오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사는데 이게 이런 거거든요.
우리가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면 사실은 이 영의 역사는 시간을 초월하기 때문에 시간을 건너 뛰어서 그래서 하나님의 놀라운 진리의 말씀들, 혹은 우리를 위한 구속과 구속의 완성의 사건들이 시간을 건너 뛰어서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예요. 무슨 얘기인지 조금 모르시겠죠. 설명을 드릴게요. 이런거예요. 자~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의 사건이죠. 2천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사건인데,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마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경험하게 되면 2천년 전에 일어난 이 사건이 시간과 상관없이 2천년의 간격을 뛰어넘어서 지금 내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이 우리에게 생생하게 체현되는 거예요. 그게 뭐냐하면 시간을 초월하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 속에서 우리들이 그런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적으로 그것이 체현되는 것을 경험하는 거죠. 그 정도가 아니죠. 사도 바울의 경험을 보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얻게 된 것이 처음에는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 했어요. 그런데 나중에 가만히 생각하니까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나는 하나님이 특별히 선택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더 신앙이 깊어지니까 만세 전에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셔서 이렇게 복음 전하는 사도 만드시려고 작정하셨다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게 된거죠. 그러니까 그 시간을 건너 뛰어서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를... 그때는 2천년이 아니죠. 불과 몇 년 전에 자기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나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기를 선택하신 수십년 전의 일이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영원한 세계 전인 만세전의 하나님이 당신의 지성 안에서 당신 자신의 작정을 가지신 것이나 시간의 간극과 상관없이 사도에게는 모두 현재에서 일어나는 일로 아주 놀라운 감동으로 다가오게 되었던 것이예요. 그러면 과거적인 사건이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오늘 지금 방금 일어나는 사건으로 우리에게 체현되듯이 성령의 은혜가 있게 되면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 우리에게 확 전해져서 방금 우리 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처럼 체현이 되는 효과가 있는 것이예요. 그렇기 때문에 옛날에 핍박을 박다가 순교한 사람들이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어요? 자신이 죽고 하나님께 가면 마지막 날에 영광스런 부활과 함께 받을 놀라운 상급, 이것은 아직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될지 모르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영광스런 의식의 체현속에서 고난도 이기고 핍박도 견디면서 순교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이죠. 사도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성령의 은혜 속에서 훨씬 미래에 일어날 일이지만 방금 자신에게 일어날 일일 것처럼 자신 속에서 체현되고 그러한 영적인 체현 속에서 그 속에서 매일매일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다가 주님이 작정하신 대로 오는 그날에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 그것이 사도가 가르쳐 주고 싶었던 교훈이었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거기에서 훨씬 지나쳤어요.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영광 가운데 재림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우리가 변함없이 주님을 섬기고 그리고 가정을 잘 돌아보고 그리고 직장을 다니던 사람들은 자기를 고용한 사람을 위해 신실하게 일하므로 하나님의 자녀의 아름다운 행실을 드러내고 이런 것들이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거든요. 그래서 에베소서 같은 곳에 보면 이제 마지막 날에 되어질 영광스런 그리스도 예수의 나라의 전망을 내다보면서 그러면서 ‘종말로 너희에게 이르노리’ 라고 말하면서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늘의 정사와 권세에 대한 것이라’‘ 영적인 싸움이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부모와의 관계를 잘하고 자녀와의 관계를 잘하고 자기를 고용한 사람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교회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성도들과의 관계를 바르게 하고 하면서 쭉 실제적인 삶을 가르쳐 준 거죠. 그러니까 곧 주님이 오실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욱더 하나님을 믿는 자녀로서 더욱더 주님을 섬기며 모든 사회에서의 관계를 올바로 하면서 살아가야 된다는 가르침이였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것을 잘못 적용하였던 것이죠. 그렇게 많이 빗나간건 아니잖아요. 그렇죠?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면은 ‘우리가 들은즉 너희가 규모없이 행하여’ 그랬거든요. 규모가 없다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면 질서가 없다는 뜻이예요. 규모가 없다는 것이 .... 그래서 우리들이 흔히 규모있는 생활을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생각이 있고 정해진 계획이 있어서 그래서 왜 그렇게 행동해야 되는지가 다 설명되고 그래서 하나하나의 행동과 생각들이 전체적인 계획과 조화를 이루게 될 때 우리가 그것을 가리켜서 규모있는 행동이다 라고 말하죠. 살림살이에 규모가 없는 여성들은 어떤 여성들이죠? 자~ 남편이 벌어다 준 돈이 한달에 2백만원이다 그러면 대충 나오죠. 2백만원에서 우선 3십만원 정도 저축하고....2백만원이면 우선 2십만원 십일조 헌금을 하고 그리고 백8십만원이 남으면 그다음에 십만원 정도는 나머지 헌금을 하고 백7십만원이 남으면 집세를 5십만원 내고 그러면 백2십원만 남으면 아이들 학비 뭐뭐뭐 하면은... 어떤 물건을 볼 때 내가 이걸 살 수 있는 형편이 되는가 안되는가 하는 것들이 규모가 나오잖아요. 이런 것이 없이 충동적으로 쓰고 보자 하고 돈을 쓰게 되면 이게 바로 규모가 없는 삶이예요. 이런 규모없는 삶을 살게 되면 그러면 반드시 살림살이에 파산이 오게되죠. 그 규모가 없다는 말이 바로 그렇게 질서가 없다 그런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것은 틀린 교훈이 아니었지만 그 교훈을 확대 해석하니까 그 다음에는 믿는 진리 전체가 균형을 잃게 되고 거기에 기반해서 살던 생활이 균형을 잃게 되서 그래서 잘못된 삶을 살게 되는 거죠. 이렇게 해서 이 사람들이 규모없이 행하였다 라고 하는 것은 질서가 없는 삶을 살게 되었고 그리고 이러한 자신들의 주장을 교회에서 널리 퍼뜨리며 그러면서 사람들의 편을 가르게 되었어요. 그래서 결국은 사도가 보기에는 열심히 돌아치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신 올바른 목적의 견지에서 볼 때 도무지 일하는 사람들이 아니었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 사도들이 권하기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조용히 일하며 자기 양식을 먹어라.’ 이게 무슨 뜻이예요? 그러고 돌아다니니 그 다음에 살림살이고 직업이고 다 집어치우고 그렇게 돌아다니는데 그래도 지들이 밥은 먹을 거 아니예요? 누가 벌어다 준 밥을 먹겠어요? 그러고 돌아다니면서 성도들에게 돈 받아서 결국은 그걸로 밥을 먹을거 아니예요? 아니 그런 사람들 많잖아요? 옛날에 제가 있던 교회에서는 무슨 기도원에서 뭘 받았다고 그래놓고 지나면서 시장에 가는 사람들 심지어는 동네 사람들 데려다가 기도해 주고 돈을 받아서 그걸 또 자기 스스로 쓰고 그러는... 어쨌든 전혀 질서가 없는거죠.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거죠. 그러니까 사도가 뭐냐하면 ‘예수님이 곧 오시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 해라. 네가 벌어서 네가 일해서 네가 밥을 먹고 다른 사람에게 신세 끼치지 말고 이렇게이렇게 해라...’ 그러고 가르치는 거죠.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예수님이 곧 오신다는 생각을 깊이 확장시켜 버리니까 아주 룸펜들이 되어버린 거죠. 그래서 결국은 아무 일도 안하고 건들거리는 종교적인 백수들이 되어서 그러고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거예요.
그랬더니 이 사람들에 대해서 사도가 어떻게 했냐하면... 그러면서 너희들은 이렇게이렇게 하지 마라 그리고 지침을 데살로니가 전서와 후서 두통의 편지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 교회에 알려준 거예요. 그 당시에는 구약밖에 없었잖아요. 이 편지를 전해주면서 이런 편지들은 교회에 가면 교회에서 전체적으로 회람되었어요. 함께 읽어서 교회들이 같이 듣고 있었던거죠.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냐하면 이 편지한 우리 말, 사도 바울이 쓰긴 했지만 사도 바울은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걸 쓴 것이 아니라 말하자면 목회자로서 사도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그렇게 써내려간 거예요. 이렇게 우리가...그러니까 이것은 뭐냐하면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 이 사람들에게 보낸 사적인 편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의 질서의 목회자로서 모든 사도들이 동의할 수 있는 그런 성경적인 내용으로 이렇게 편지를 썼으니까 이것은 개인적인 권고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도를 통해서 목회자를 통해서 교회에게 주시는 질서를 잡는 가르침이였어요. 그걸 준거예요. 그러면서 이야기하길 뭐냐하면... 이 편지에 우리가 한 말이 있는데 이 말들을 따르면 지금 교회의 문제들이 치료될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말을 순종치 않으면 지목을 하라. 저 사람이 목회자의 말을 듣지 않는다.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다 라고 지목을 하고, 그리고 그 다음에 그 사람과 사귀지 말고... 사귀지 말라는 이야기는 성도의 교통이 없게 하라 이뜻이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은 성도의 교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영적인 자녀들 끼리의 교통이잖아요. 그래서 성도의 교통의 근본은 그리스도께서 머리되셨기 때문에 그 머리되신 그리스도 예수께 붙어있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 예수와 교통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루어진 영적 교통이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사실은 끊어질 수가 없는 것이죠. 그렇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접붙여진 사람들이라고 하더라도 올바르게 순종하지 않을 때가 있는 것이죠. 그래서 순종하지 않고 그것이 현저히 교회의 질서에 어긋나게 될 때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그 사람을 권고하여 그렇게 하지 마라, 혹은 그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라고 하나님께서 명령하시는 것이예요. 우리가 필요한 모든 것이 성경에 있지만 그것을 적용하는 모든 것을 성도들이 다 알지는 못해. 그래서 교회가 이 명백한 하나님의 말씀에 지시된 바를 올바로 준행하기 위해서 그것을 해석하고 때로는 그것을 공동체적으로 적용해서 규칙을 만들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지키도록 권고해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루어 드리기 위한 보조적인 수단으로 질서를 잡는 거죠. 그것을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권고되는 거죠. 그러니까 목회자와 세우신 일꾼들을 통해서 심지어는 교회 위에 있는 회의를 통해서 결정이 되고 결정된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서 지키게 하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왕권을 교회 안에서 행사하시는 방법이예요. 그걸 통해서 혼란스러운 교회 질서를 놓고 올바르게 규모를 갖춘 교회가 되게끔 하시는 거죠. 그런데 이것을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때 교회에 당신이 행하실 질서, 목회자와 교회에 세우신 일꾼들을 통해서 이 질서를 잡아가시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개인의 자격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대신한 자격으로 우리에게 전달되는 것이죠. 그러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보이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당신의 통치를 행사하니 그것이 개인에게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통치라고 생각하고 믿음으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세를 갖는 것이 성경이 말하는 성도의 도리예요. 그렇게 할 때 성도는 교회와 올바른 관계를 갖게 되는 것이죠. 만약에 이러한 문제가 생겼을 때, 올바른 질서를 잡는 일이 교회에 없다면 사도들이 가르쳐 준 가르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또 사도들에게 주신 영이 자신에게도 임하였다고 하며 이말 저말을 내고 잘못된 교훈을 조직해서 그릇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때 교회가 어떻게 통솔할 수 있겠느냐... 불가능하게 되는거죠. 그래서 사도는 만약에 그렇게 고의적으로 권고를 받고도 의도적으로 이 말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지목하라 그랬어요. 저 사람이다 이 사람이다. 그래서 모두 교회에 알게하고 그 다음에는 성도의 교통을 끊어라... 이게 뭐냐하면 교회를 내보내는 거예요. 일단 그렇게 내보낸 사람들은 비록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접붙여진 형제라고 할지라도 성도는 그 사람과 교제하지 말도록, 만약에 교제하면 교회로 부터 벌을 받았어요. 그렇게 하므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잘못된 교훈과 그릇된 생활이 성도의 교통을 통해서 누룩처럼 번져가지 아니하도록 엄격하게 차단해서 교회의 순수성을 보존하였던 것이예요. 교리적인 순수성과 생활의 순수성을 보존하여 질서를 세워갔던 것이예요.
자~ 이 당시에 교회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세상적으로 아무 힘이 없었습니다. 정해진 교회의 무슨 놀라운 기관이나 외적인 이런 어떤 건물 같은 것도 없었어요. 끊임없이 핍박과 고난을 받으며 이 가정 저 가정으로 모이고 심지어는 지하 동굴에 새벽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어요. 그리고 그들을 지도하던 사도들도 세상적으로 볼 때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아니었어요. 사도 바울 같은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세상에서 크게 별볼일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도가 가마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뛰어난 지성을 소유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지만 종교 지도자의 길을 포기하고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을 때 그의 사회적인 위치가 무엇이었겠습니까? 여기저기 다니면서 고난을 당하고 핍박을 받는 전도자에 불과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스리는 교회였지만 이렇게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 질서의 권한을 올바르게 행사하고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가 사도와 그리고 목회자들과 교회에 세우신 질서를 통해서 당신의 통치를 행사하신다는 분명한 생각을 가지고 거기에 복종했기 때문에 교회의 통일성이 유지되면서 지금과 같이 통신과 모든 의사 소통의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 교회가 실권도 없었죠. 그후에는 교회가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을 받고 심지어는 국교가 되면서 이렇게 교회에 대항하고 목회자에게 거스리고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은 죽일 수도 있었어요. 그런 것들이 옳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런 실질적인 정치적인 권한을 갖고 교회 밑에다가 감옥을 만들어서 말 안듣는 사람들은 가둬버렸다 말이예요. 이 때에는 그런 권한도 행사할 수가 없었잖아요. 그런데도 이 순수한 영적인 권한을 가지고 행사하는데도 교회의 성도들은 놀라운 일치를 보이며 거기에 복종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어요.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보이는 교회 공동체 속에서 실현되도록 그렇게 성도들을 이끌고 진리의 교훈으로 조직하여 이 모든 사람들의 생활을 기독교적인 참된 교리의 기반 위에 세움으로써 통일성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예요.
그러니까 세월은 많이 바뀌고 흘러갔어도 이러한 원리는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이예요.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요. 오늘 여기에서 사도가 이야기 하는 것은 개인적인 관계가 아니예요. 오늘 이 이야기는 사도가 바울 개인으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는 아무개 집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아니예요. 그리스도의 대리자로서 교회의 질서를 통해 당신의 왕권을 행사하시는 그리스도 예수의 심부름꾼으로서 교회의 질서를 바로 잡으며 그렇게 편지를 보내고 있는 것이죠. 여기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끊어내고 그렇게 함으로 교회 전체가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세우신 일꾼들의 질서를 통해서 행사하시는 그런 그리스도의 자유로운 통치에 온 교인들이 은혜와 사랑으로 화합하며 그렇게 질서를 바로 잡아가게 하였던 것이죠. 그러니까 자기가 아무리 기도하다 받은 확신이 강하고 성령의 체험 속에서 이런저런 말을 받고 또 사도들이 전한 편지를 해석을 해서 어떤 결론을 이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교회의 질서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사도들에 의해서 가르침과 교훈을 받으며 올바른 질서를 세워가는 가운데 성도들은 보이지 않는 교회와 보이는 교회 안에서의 성도들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러면 이런 질서의 권한을 하나님께서 교회에 주신거죠. 그리고 목회자에게 주시고 교회에 세운 일꾼들에게 주셔서 이 모든 그리스도의 권위가 질서있게 행사되고 성도들은 거기에 복종하고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하도록 하나님이 만드신 거죠.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이러한 질서를 하나님이 세우셨지만 이 질서 속에는 성경이 명백하게 분부하고 있는 것들에 한해서 질서를 세우는 거죠. 그러니까 그런 속에서 성도들은 명백하게 성경을 통해서 교회에 질서를 통해서 행사되는 그리스도의 통치에 복종하고 나머지 성경이 침묵하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한없는 자유를 누리면서 그렇게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거죠. 그게 바로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적인 교회의 성도의 신앙 생활이예요. 만약에 그렇지 않고 우리들이 각자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따르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통일성이 없는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그러면 오늘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사도들의 가르침에 반대하고 영의 역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교회의 질서를 무시하고 하는 이런 일들이 아주 비일비재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잘못하는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사도들의 가르침에 크게 어긋나지는 않았지만 적용을 잘못하게 되었을 때 그들이 이단이 아니었는데도 교회로부터 그들을 분리해 내고 그리고 ‘저들이 비록 예수 믿는 우리의 한 형제지만 우리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교회의 질서를 따르지 않으니 저희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고 너희들은 그들과 교제를 끊음으로 교회의 질서를 유지하거라.’ 이것이 바로 사도가 가르치는 교훈이었다 이거죠.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교회와의 관계가 올바른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베푸시는 축복의 통로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죠. 이러한 교회의 가르침에 올바로 순종하고 복종하면서 그러면서 자유롭게 신앙 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없이는 우리가 어떤 식으로든지 올바른 신앙 생활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예요.
이 사람들이 첫째는 은혜가 없기 때문이고 둘째는 올바르게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렇게 가정에서도 보면 그 자녀를 우리들이 양육하면 애들이 항상 잘 하고 싶은건 아니잖아요. 아이들이 공부를 항상 잘 하고 싶은 건 아니고, 항상 부모에게 효도하고 싶고 항상 신앙 생활 잘 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들어보세요. 가정이 올바로 서있어서 평소에 똑바로 가르치고 아이들을 제바르게 징계를 하고 칭찬을 하고 해서 가정 교육을 똑바로 시켜 놓으면 애들이 공부하기 싫어도 공부하는 시늉은 합니다. 그리고 조금 게으를 때는 있어도 막 나가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게 가정에서 본게 없어요. 애비는 맨날 가서 술 처먹고 와가지고 애들 두들겨 패고, 그리고 에미라는 사람은 시시콜콜 남편에게 잔소리나 하고 대들어서 남편 얼굴이나 할퀴고 하여튼 집안이 콩가루 집안이야. 그리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공경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가서 가정이 근본이 안되있어서 무너져 버린 가정에서 애들이 자라게 되면 본게 없어요. 그러니까 할아버지에게 막 대들고 불효하는 아버지 보고 그리고 남편과 아내 사이의 관계도 깨져서 제멋대로 행동하는 자기 엄마 밑에서 그러고 자란 거예요. 그러니까 본게 거의 없는거죠. 이렇게 될 때 애들이 공부를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나면 막 나가는 거예요. 그리고 권위라고 하는 것이 없는거죠 내 맘대로 하는데 어떻냐 이렇게 되는 거죠. 똑같아요. 집안이 좋다고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집안이 별로 안 좋다고 공부를 못하는 것도 아니죠. 그래서 집안이 콩가루 집안인데도 애가 정신 차리고 공부해서 똑똑한 애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뭐냐하면 사람 됨됨이와 가정 교육은 잘못 받은 거죠. 그래서 결국은 공부를 잘한 사람들은 그 틈속에서 인간 됨됨이가 못된 것을 드러내고 공부도 못하는 사람은 그냥 하층 사회에서 그저 기면서 자기 자신의 인격의 조잡함을 드러내요. 그리고 살아가요. 그럼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예요. 여러분들은 개인적으로 주님 만난 것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제대로 된 교회에서 교육을 받으면서 제바르게 자라야 되요. 교인 몸에는... 벌써 와서 처음 심방하면서 밥을 먹으면서 한 삼십분 대화를 나눠보면 이게 근본이 안된 교인이구나 눈에 확 들어와요. ‘저 사람 조심해야 되겠다 은혜 많이 받고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사람되기 힘들겠구나’ 느낌이 벌써 온다... 한두번 밖에 안 만났는데 차 한잔 마시고 나면 ‘아, 이 사람은 제대로 근본이 된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처럼 제대로 근본을 가르쳐 준 교회에서 신앙 생활을 했구나. 성향 자체가 올바르구나.’ 다가오는 거죠. 은혜 많이 받을 때도 있고 좀 식을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근본이 올바르게 된 교회에서 제대로 자라지 않은 사람들은 은혜만 떨어지면 무엇이든지 다해. 뭐 장로들이랑 싸우고 목회자에게 대들고 성도들에게 상처주고 교인들 규합하고 끌고 다니고... 하여튼 할 수 있는 짓은 다 한다 이거예요. 그건 뭐냐 하면 결국은 올바른 교회에서 제대로 근본이 있는 신앙 생활을 익히지 못하는 거죠.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집안에서 아이들이 자랄 때 한두번 부모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고 해서 그게 근본있는 집안의 자식이 됩니까?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오랜 세월 내려오는 그 가문과 가풍 속에서 그러면서 할아버지에게 하는 아버지를 보고, 아버지에게 하는 할아버지를 보면서 자식의 도리를 배우고, 할머니가 할아버지에게 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와 그리고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를 보고 자기 부모들이 서로 어떡하는 것을 보고 자식을 돌보는 것을 보고 자식들을 지도하는 것을 보고 근본을 세우는 것을 보면서 인간 살아가는 도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오랜 세월 속에서 몸에 익히는 거예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죠. 오늘날 교회가 점점 혼란스러워지는 이유 하나가 뭐냐하면 가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예요. 왜냐하면 집에서 그렇게 지 애비고 애미고 없이 마구 들이받으면서 대들고 그리고 행패를 부리던 사람들이예요. 그걸 사회 속에서도 그렇게 행동을 하는 거예요. 맘에 안들면 직장에서 걷어차고 집어치고 그러는 거죠.
(예화) 나 옛날에 직장 다닐 때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상사가 너무 하긴 했어요. 잔소리를 되게 많이 하고 비인격적으로 야단을 많이 쳤어요. 이 사람은 기술자였는데... 높은 사람은 책상이 나무로 되있잖아요. 그런데 군화 같은 걸 신고 일을 하는데 야단을 쳐도 따끔하게 야단을 치고 그 다음에 격려할 땐 격려하고 그러면 좋은데 하여튼 비인격적으로 그렇게 야단을 쳤어요. 막 야단을 치니까 높은 사람이 야단을 치니까 우리 같으면 어느 한 순간에 확 머리가 돌아버린 거죠. ‘그래 나 이렇게 밖에 못한다. 어쩔래 이 새끼야. 그리고 내 이놈의 직장 집어치우면 그만이지.’ 그러고 발길로 책상을 펑 찼는데 얼마나 세게 찼는지 책상이 뚫어져가지고 발이 쑥 들어가버렸어요. 그리고 안 빠지는거야. 그리고 빼더니 그다음엔 ‘내가 이 놈의 새끼 죽여버리고 만다’고 망치를 들고 쫓아다니니까 이 사람은 도망다니는 거야. 상사의 체면이 완전히 땅에 떨어져서... 사람들이 말리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는 막 깔깔대고 웃은 거야.
그러니까 자기도 망신이고 망신이죠. 가정에서 근본이 없이 그렇게 혈기를 부리고 맘대로 하던 그 사람들이 결국은 직장에 와서 그렇게 하고, 그렇게 가정에서 근본을 못 본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똑같이 행동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가 점점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 사랑이라는 미명하에 그냥 덮어두기만 하지 않고 오늘 여기에서는 지목해서 그래서 혼을 내고 성도들의 교제로부터 끊어냈던 거죠. 그래서 옛날에 초대교회에서... 초대교회나 종교개혁 시대나 마찬가지로 이렇게 소위 이야기해서 출교라고 하는데 이게 막 심각한 이단을 믿거나 이런다고 해서 짤리는게 아니라 이렇게 교회에서 규모없이 행동해서 질서를 통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를 방해하게 될 때 딱 끊어내는 것이죠. 그래서 끊어내면 성도들이 절대로 교제할 수 없어요. 교제하면 그 사람도 징벌을 받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또 놀랍게 이 사람이 회개했다는 소문이 들리면 그러면 그렇게 출교했던 사람을 다시 또 해벌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해벌하고 받아줘요. 그럼 다시 성도로서 들어오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것을 보더라도 초대교회 때부터 이 교회의 질서를 통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대해서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나 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죠.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면 석기시대 얘기한다고 그러죠. ‘웃기네’ 라고 얘기하는 거죠. 그러니까 교회의 권위나 이런 것들이 다 무너진 거죠. 그래서 결국은 오늘날과 같은 이런 교회의 모습이 된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안에 교회는 어떤 힘이 없기 때문에 단번에 그를 어떻게 하지 못하죠. 그렇게 개념없이 행동하는 사람에게 금방 하나님게서 그에게 환난을 주시거나 사업을 망하게 하시거나 한번에 생명을 거두거나 그러시지 않으시죠. 왜 ?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그러면서 교회는 끊임없이 고통을 받는거죠. 여러분 기억하세요. 겉으론 아무 일 일어나지 않아도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 질서를 흐트러뜨리고 반항하고 개념없이 행동해서 그리스도의 교회를 현저히 상처를 줄 때 하늘의 문은 닫혀요. 그런 사람들에게 무슨 은혜가 있겠어요. 처음의 뜻은 올바를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은 교회와의 관계가 바르지 않고 하늘의 문이 닫혀요. 그래서 결국은 영적으로 곤고한 삶을 살아요. 그래서 지금도 여러분 주위에서 교회와의 관계를 바르게 하지 못하고 어디로 가든지 적응하지 못하고 그 질서를 흩트리면서 살고 한두 가지 자기가 옳은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확대 해석해서 교회의 결점을 드러내고 그래서 교회에 대해서 반항하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교회아래 행하시는 질서의 통치에 불복종하면서 사는 삶을 정당화한다고 해서 그 사람의 삶이 어떡해 되겠는지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끊임없이 곤고하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거죠. 이런 것 결국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는 것이다 하는 것이예요. 그래서 이렇게 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보이지 않는 권위를 보이는 교회의 질서를 통해서 행하시는 것이다 생각하고 깊이 복종하고 선을 행하면서 낙심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5.남편과 아내의 관계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너희 단장은 머릴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 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7)
오늘은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다섯 번째 남편과 아내의 관계입니다. 그 당시에도 여성들이 복음에 대해서 훨씬 빨리 반응을 했던 거 같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말씀을 보면 물론 남성들도 잘 받아들이고 은혜를 잘 받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여성들이 훨씬 더 빨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반응합니다. 그래서 어느 교회든지 여 성도들이 많습니다.누가 그랬습니다. 자기네들이 죄를 먼저 졌으니까 돌아오는 것도 빨리 돌아오나 보다 그렇습니다. 그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여성들이 복음에 대해서 아주 빨리 반응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그러다 보니까 무슨 문제가 생기냐면 그 당시는 로마시대인데 이렇게 여성들이 예수를 믿고 나니까 로마제국 전체에서 예수를 믿는 것도 불법인데 그 당시 사회는 여자를 더더욱 하찮게 여기는 시절 아닙니까? 그러니까 가정생활이 훨씬 어려워지는 것입니다.지금처럼 자유로운 때에 여성들의 권한이 확보되어 있고, 그리고 대가 센 여성들이 많은데도 여성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집안에서 제약을 받기 십상인데, 그 당시에 별로 사람대접도 못 받던 여성이 주님을 만나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고 할 때, 그게 사회적으로도 나쁜 것이라고 낙인이 찍혀서 핍박을 받는데 안 믿는 남편이 영화나 드라마에서처럼 여성을 끔찍이 사랑을 해서 화초같이 자기 아내를 생각한다면 그거야 사랑하면 죽는 데까지 가는데 문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는 아닌데 예수를 믿게 되면 굉장히 어려웠던 것입니다. 이혼을 요구하고, 이혼은 무슨 이혼이야 그냥 내쫓고 그런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럴때 그 아내들에게 권고하는 내용이었습니다.이 권고를 하기 전에 먼저 그 예수 믿는 여자들에게 혹은 예수 믿는 남자들에게 사도 베드로가 원래의 그 남편과 아내가 어떤 사람들이었는지를 깨닫게 해 줍니다. 그게 바로 예전에는 예수 그리스도 없이, 목자가 없이 방황하던, 그래서 이리 찢기고 저리 찢기며 목자 잃은 양같이 살았던 불쌍한 인간이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런데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너희가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 되신 그리스도께 돌아왔느니라
이렇게 구원의 은혜를 먼저 상기시켜 주면서 아내에게 먼저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 남편에게 복종하거라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남편은 불신자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편에게 복종하거라. 그러면서 덧붙이는 것은 우리가 전하는 하나님의 말씀에는 순종치 않는 자라도 너의 행실을 보면서 하나님이 정말 살아 계시구나, 우리 아내가 예수를 믿더니 변했구나, 저렇게 사람이 바뀔 수가 있을까, 저것은 단순히 나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짐짓하는 행동이 아니라 무엇인가 하나님이 저 마음속에 오셔서 그래서 저 영혼을 저 심령을 움직여서 새사람이 되어서 새 삶을 살게 하고 있구나 라고 하는 강한 깨달음을 이 남편에게 준다면, 그가 결국은 처음에는 순종치 않은 도라도 다시 생각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결국은 우리가 전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지 않겠느냐 하는 것입니다.열린 교회에서 목회를 하다 보면 온 가족이 교회에 나오기는 하는데 모두가 회심을 한 건 아니지 않습니까? 대개 아내의 손에 이끌려서 억지로 교회에 나오는 남편들이 꽤 됩니다. 그런데 그것만 해도 참 기특합니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었을 텐데 아내가 그만한 권한을 집에서 행사한다는 자체가 장족의 발전을 한 것 아닙니까? 어쨌든 남편을 교회에 끌고 나옵니다. 남편은 회심을 안 하는 겁니다. 이게 원래 집안식구들이 아무리 얘기를 하더라도 집안식구들의 감동을 받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자식을 제일 사랑하면서도 자식들의 신앙에 대해서 이야기하기가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사람이 부모고 또 남편을 사랑하면서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면서 그 남편에게 똑바로 신앙생활 하라고 이야기하기가 가장 어려운 사람이 아내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회심하지 않은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 이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영혼에 대해 근심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가까이에 있는 자기가족의 회심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보면 회심 안하고 가족의 평화를 위해서 억지로 교회에 끌려 나오는 사람들이 있는데 놀랍게 하나님 앞에 변화되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가족들이 회심했을 때, 자기나 자기부인이나 그냥 교회에 습관적으로 나왔는데 어느 날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정말 놀랍게 변화되었을 때 이 변화되지 않은 남편이나 가족들의 느낌을 무섭고 두렵다고 합니다. 자기는 어느 실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다녔는데 어느 순간에 보니까 하나님이 정말 계셔서 내가 가장 잘 아는 아내를 이렇게 변화시킬 수 있구나, 그걸 볼 때에 두려움이 느껴집니다. 또 그런 경우가 우리 교회에도 여러 번 있었는데 남편은 거의 변화받지 않았는데 아이는 엄마와 함께 교회 나오면서 은혜를 많이 받고 변화되었어요. 그래서 식사시간이 되어서 식기도할 때, 네가 한번 기도해봐 했더니 기도를 하다가 구원받지 못한 우리 아버지 영혼을 기억해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펑펑 울었답니다. 이럴 때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두려움이 강물처럼 밀려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자체가 변하는 것이야말로 변하지 않는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충격을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는 아내의 의무가 참된 변화를 받고 그래서 변화된 삶으로써 자기 안에 과연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자신 안에 그리스도가 함께 하셔서 그래서 이 신앙의 도리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보여줄 때, 구원 받지 못한 남편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고린도서에서 말하기를 믿지 않는 남편이 있는데 만약에 네가 예수를 믿어도 계속 함께 살기를 원하면 나뉘지 말고 그가 불신자이지만 데리고 살면서 네가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네 남편도 구원에 이르게 하여라 하고 충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그가 하나님 믿는 사람에 대한, 자기가 어떻게 믿고, 자기가 어떻게 사랑하고, 자기가 어떻게 생활하느냐에 따라서 이 남편의 영혼의 구원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 달린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고 남편에게 행실로 본을 보여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그는 정말로 훌륭한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사람들은 말로 예수를 전하는 것보다 자기 안에 계시는 예수를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더 확실하게 믿게끔 신용있게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그러니까 만약에 아내가 남편과 관계를 올바로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축복의 통로를 막으시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아마 많이 경험했을 것입니다. 새벽기도 나와서 남편을 위해 기도하고 눈물을 흘리고, 그리고 누구 집 남편 회심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우리도 그런 일이 일어나게 해 달라고 그렇게 빌다가 어느 날 마음이 틀어져서 대판거리 싸우고 교회에 수요예배 나왔을 때 하늘이 활짝 열리고 은혜가 확 쏟아지면서 기도가 콸콸 나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결국은 돌아가서 잘못했다고 하고 관계를 회복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내와 남편의 관계가 얼마나 영적인 신앙생활을 위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구원받지 못한 남편에게 그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를 구원받게 한다 할 때에는 자기가 전에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 같은 그런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우리가 복음을 전하러 나가보면 얼마나 치사합니다. 물건을 팔러 온 사람한테도 그렇게 대우는 안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조금도 마음상하지 않습니다. 이유는 내가 어느 아파트에 서서 벨을 누르고 그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전할 때 예수그리스도를 대신해서 거기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부당한 대접을 받고 환영을 받지 못할 때 주님도 이세상에 계실 때 사람들에게 모두 환영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서 오히려 위로는 받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보이는 남편에 대해서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여성들이 남편을 휘두르고 살고 권리를 다 행사하면서 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부당한 대접을 받는다고 생각지 말고 자기가 복음을 전하면서 그가 구원에 이르기 까지 많이 희생해야 하는데, 오늘 여기에서는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에게 잘 순종하고 그의 뜻을 받들며 살아가려고 할 때에 이것은 여성에게 있어서 아주 아름다운 장식이 되는 것입니다. 보석과 고운 화장품과 예쁜 옷으로 단장하는 것이 육체의 단장이라면,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따라 남편과 동거하고 남편에게 복종하므로 자기 안에 계신 일체의 그리스도를 남편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바로 영혼의 장식이요 그리고 남편의 영혼의 눈을 뜨게 해서 아버지를 보게 해주는 그러한 아름다운 장식이라는 것입니다. 이 통로를 잘 관리해야만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임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남편과의 관계가 바르지 않은 아내가 교회에서 이런 저런 일로 봉사를 하고 열심히 살 때 우리는 그의 헌신이나 부지런한 섬김의 생활을 신용할 수 없는 것입니다.그 다음으로 7절부터 나오는 이야기가 이제는 남편 이야기입니다. 이제 성경이 말하기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면서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만약에 남편이 아내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고 귀히 생각하면서 부부가 살아가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고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부부의 다툼이라는 것이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어떤 때는 분명하게 아내가 잘못해서 화를 내고 그 관계가 잠시 소원해져서 기도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것을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정이 교회의 모형이라고 합니다. 저도 목회를 하다 보면 가끔 마음이 상하지 않겠어요? 마음이 상하면 목사인데도 기도가 안됩니다. 부부관계도 이와 똑같습니다. 다투고 나서 돌아볼 때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이럴 때도 있지만, 어떨 때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너무한거 아니야 도대체 왜 성질을 내는 거야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러면 아무리 기도해도 기도가 잘 안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첫 번째는 기도가 잘 안 되는 것은 덜 억울합니다. 자기가 잘못했으니까. 두 번째는 아무리 생각해도 크게 잘못한 게 없는데 그래도 기도가 안되. 교인과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무슨 일로 인해서 마음이 막 상하고 힘들어지면 목사인 제가 잘못했나요, 자기들이 잘못해서 그런 것이지요. 마음이 상하고 나면 기도를 하려고 해도 기도가 잘 안됩니다. 그래서 깨닫는 것은 결국은 이 원리가 사랑의 원리구나 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아내와 남편이 가끔 다툴 때가 있어도 바로 기도하고 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축복의 통로가 닫힙니다. 그래서 기도하고 말씀을 받던 남편들이 아내와의 관계가 깨어지면 기도의 문이 막히고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가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내에게만 쓰는 표현입니다. 아내와 남편 사이에만 쓰이는 표현입니다. 이 뜻은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받는데, 남편과 아내 사이에 있는 생명이 하나의 연합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연합은 크게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연합을 기초로 아내와 남편 사이에 모종의 이런 연합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의 은혜를 남편이 따로 누리는 것이 아니라 아내와 함께 연합하여서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은 원래 그리스도 예수에게 접붙여진 사람들끼리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이렇게 묻고 싶을 겁니다. 한 사람은 예수를 믿고 한 사람은 믿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학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부부가 있을 때 그리스도와의 연합대로 아내와 남편 사이에 연합이 이루어지는데 이렇게 한쪽이 믿지 않는 경우에는 그러한 연합은 없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그 언약에 어떤 방법으로든 참여하게 하시는 가상적인 연합이 있을 것이라고 상정을 합니다. 그래서 아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신앙생활을 하거나 남편이 그렇게 하면 믿지 않는 남편과 아내가 돌아와서 온전한 연합이 되기를 하나님 앞에 꿈꾸고 기도하고 사모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명이 있는 유업을 함께 받을 자로 알아서 귀하게 여기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내가 약한 그릇이다, 어떤 면에 있어서 몸도 약하고, 물론 남편보다 힘센 아내도 많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아내는 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모든 면에서 남편을 의존하는 사람으로 하나님이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을 알고 그를 연약한 그릇으로 여기로 또 그를 아주 소중하게 여기면서 남편과 아내와의 연합을 올바르게 이어갈 때 그 축복의 통로는 막히지 않고 열려서 하나님께로부터 계속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 앞에 신기한 것이 결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제도, 직접 세우신 제도는 둘 밖에 없습니다. 가정이라는 제도와 교회라는 제도. 그래서 맨 처음에는 가정 밖에는 없었고 가정 자체가 교회가 되었다가 죄가 들어오면서 가정과 교회는 나뉘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구속이 완성이 되어서 모두 하나님 나라에 갈 때는 다시 이 가정과 교회는 하나가 됩니다. 그래서 하늘나라에서는 다시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이 없고 하나님 아버지를 모시고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서 온 성도들이 남편과 아내들이 하나의 가정으로 한 가족을 이루며 살아갈 때 그 가정이 곧 교회요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이 삶 중에 통합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교회를 통해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이 완성이 되어가는 이 과도기적인 시점에서 하나님께서는 이 두 제도를 온전히 하시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이 잘 성화된 만큼 교회에 세우신 모든 질서를 잘 따르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고 성화된 만큼 가정에서는 가정에 세우신 그리스도의 질서를 따르는 아름다운 구성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주례를 설 때마다 가정에서 좋은 남편이 되는 비결이 교회에서 좋은 신자가 되는 비결과 완전히 일치하고, 가정에서 좋은 아내가 되는 비결이 교회에서 좋은 신자가 되는 비결과 일치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참된 신자가 되기만 하면 저절로 가정과 교회에서도 아름다운 구성원이 될 때 이모든 것이 질서와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은혜를 받고 변화되기까지는 질서고 뭐고 자기 좋은 대로 첨벙거리며 살았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지식의 깨달음을 받고 하나님 앞에 그 지식에 입각한 진정한 신자의 생활이 무엇인가를 알게 될 때에 그렇게 세우신 하나님의 질서를 보게 되고, 그리고 자기가 그 아름다운 질서 속에서 어디에 있어야 아름다운지를 자리매김할 줄 알게 되고 질서를 통해서 행사되는 그리스도 예수의 행사를 온전히 복종하며 살므로써, 그 사람이 그 자리에 있으므로써 그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가 되고 그 사람 자신이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집의 일꾼으로 노예로 갔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축복의 통로를 열어놓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해서 보디발의 온 집이 축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게 그 질서를 알고 그 자리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통치에 기꺼이 복종하며 그 하나님의 질서 속에서 거기에 있어 아름다운 사람이 될 때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런 사람이 있어서 아름다워지는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질서를 바로 알지 못하고 알아도 그 질서로 돌아갈 생각 없이 끊임없이 복종하지 않고 불복하지 않고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동할 때에 그 사람이 있어서 교회는 고통스럽고 그 사람 때문에 교회는 아름다움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똑같이 이렇게 예수를 잘 믿고 은혜를 잘 받아서 지식의 생활과 질서의 생활을 올바로 해 나갈 때에 사람이 가정에 가서 어떤 아내 어떤 남편이 되어야 하는 지를 잘 아는 것입니다. 그것을 올바로 할 때에 그 아내 때문에 가정에 질서를 가지게 되고 그 남편 때문에 그 가정은 질서있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하나님께서 질서를 세우셔서 통치하실 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질서를 세우셔서 통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각 구성원마다 하나님 앞에 하여야 할 의무를 갖는 것입니다. 그 의무에 따라서 질서를 아주 잘 갖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내와 남편이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될 때 축복의 통로는 계속 열려서 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내적으로는 이렇게 열려진 하늘의 축복의 통로를 통해서 하늘의 자원을 공급받게 되고 외적으로는 이러한 축복의 열려진 통로를 통해서 이 땅의 자원을 공급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되신 것을 드러내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께서 이제 가정에 있어서의 모든 축복의 통로를 올바로 하고 하나님 앞에 이러한 축복의 통로를 통해 부어지는 하나님의 은혜의 자원 이세상의 자원으로 풍족하게 사는 것을 통해서 주님을 섬기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축복의 통로를 바르게 함 1